2023-10-10

이찬수 - 와다 하루키의 [북일 교섭 30년>(길윤형 옮김, 서해문집)

(6) 이찬수 - 와다 하루키의 <북일 교섭 30년>(길윤형 옮김, 서해문집) 간단 소감과 요약... 일본의 대북 외교사,... | Facebook

이찬수
231008
  · 
와다 하루키의 <북일 교섭 30년>(길윤형 옮김, 서해문집) 간단 소감과 요약...
일본의 대북 외교사, 그리고 한국-미국과의 관계를 잘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지난 수십년 동안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내 선입견보다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이 방해만 덜 했어도 일본은 진작에 북한과 수교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러면 동아시아의 정치 지형도 대단히 달라졌겠지.

일본의 평화주의자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기반으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동아시아의 정치 질서를 선도하려는 움직임일 것이다.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를 주도했던 이 책의 저자 와다 하루키가 그 대표자중 한 사람이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 소련의 해체 이후 북한과의 수교를 적극 추진했다. 여기에는 보수주의자 일부도 동행했다. 하지만 이른바 북한 핵미사일 문제, 납치자 문제 등으로 대북 적대감이 강한 강경보수세력의 저항으로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끝에 고이즈미 전 총리가 평양 방문을 했지만(2002.09.17) 역시 또 납치자 문제 때문에 사실상 효과를 보지 못했다. 도리어 일본인이 북한에 의한 납치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이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전환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강경 보수가 국민의 피해의식을 활용하며 정치적 세력을 강화했다. 
다음달 10월 3일-5일 미국의 제임스 켈리(동아태 차관보) 방북단이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추출 등 핵미사일 개발계획의 철회를 요구하자 이를 부정하며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미국에 북한이 반발하면서 사태는 더 꼬였다. 미국이 북일교섭에 딴지를 건 셈이었다. 나아가 미국은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에 제공하기로 약속되었던 중유공급을 중단했고 북미관계는 더 멀어졌다. 응당 한반도 평화도 다시 멀어졌다...
고이즈미는 2004년 5월 22일 재방북해서 앞선 북일수교를 위한 평양선언을 이행하자고 김정일과 회담했다. 일본 내 여론도 괜찮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납치자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1977년 북한으로 납치되었다가 사망한 요코타 메구미의 것이라며 북에서 준 유골이 요코타의 것이 아니라는 DNA 검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악화된 여론을 이용해 강경 보수가 정치적 힘을 더 확보했고, 그 최대 수혜자는 아베 신조였다. 고이즈미가 퇴진하고, 결국 2006년 9월 아베가 자민당 총재,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식민지배 시절을 모르는 첫 총리였다.  그는 납치 문제를 앞세워 북한과의 대결을 선언했다. 북한은 10월에 2차 핵실험을 했다. 
일본의 보수는 더 강하게 반발했다. 
2009년 8월 총선거에서 경제난으로 정권이 민주당으로 교체되었지만 납치자 문제를 둘러싼 일본내 보수적 정서는 그대로였고, 민주당에서도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다. 
2011년 3.11 대지진이 발행하자 북한은 의연금 10만달러를 보내왔지만, 일본은 별 보도를 하지 않았고, 도리어 대북 제재를 연장했다. 당연히 북한 내 대일 감정도 악화되었다. 
그러면서도 북일교섭을 재개하려는 움직임도 계속되었다. 와다 하루키가 애정을 보인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가 언제나 제일 열심이었다. 민주당 정권도 의지를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했다. 
후계자 김정은은 정권 초기에 인공위성 실험, 3차 핵실험 등을 단행했다. 
그리고 자민당의 아베 정권이 다시 들어서 납치자 문제를 적극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일본은 대북제제 기간의 연장에 동의했고, 북한은 반발했고, 북일 관계 개선 작업은 다시 꼬였다.


북한은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을 했다. 수소폭탄실험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왜 그런 식이었을까.
와다는 그 원인 중의 하나를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문재인이 처음으로 한반도 평화의 이니시어티브를 주도했었다.
그런데 아베는 그것이 불편했다.
하노이 노딜에 대해 아베는 도리어 안도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김정은과 만나 납치자 문제를 해결하겠고 정상회담도 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공수표일 뿐이었다.

한반도의 평화를 불편해하면서 무엇을 위한 북한과의 교류협력이란 말인가. 

와다에 의하면 그것은 그저 무언가 열심히 하는 척 하는 영혼없는 외교적 연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아베 사후, 스가, 기시다 내각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 총리인 기시다가 "김정은 위원장과 직점 마주한다는 결의를 하고 있다"고 표명했다. 
하지만 와다는 그것도 영혼없는 발언이라고 규정하지만...

그나저나 이 정부는 북한에 대해서는 왜 외교적 발언조차 없는 것일까. 영혼이 아예 없어서일까.
일본도 북한과의 교섭을 계속 시도해왔고, 한반도에서는 박정희, 전두환때도 북한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지금 정부는 적대시만 하는 모양새라니...씁쓸할 따름이다.

#북일교섭30년 #와다하루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