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7

“오시마가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만들었어” - 오시마 나기사 감독 영화 [교사형>


[기획] “오시마가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만들었어” - 오시마 나기사 감독 영화 <교사형>, 서간집 <죄와 죽음과 사랑과> 도용 의혹


글 배동미

2025-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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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오시마가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만들었어” - 오시마 나기사 감독 영화 <교사형>, 서간집 <죄와 죽음과 사랑과> 도용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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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오시마 나기사 프로덕션 주식회사

재일 교포 양영희 감독으로부터 한편의 기고문이 도착했다.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교사형>(1968)이 재일 교포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 감독이 출판한 서간집 <죄와 죽음과 사랑과>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글이다. 
양영희 감독은 이 문제에 있어 제3자이나 자신도 도용 사건을 겪었기에 마음에 불이 댕긴 듯 이 문제에 파고들었고, 박수남 감독의 서간집과 <교사형>의 시나리오를 비교하여 도용이 의심되는 대목을 11개나 발견하였다. 그리고 가나가와현 가사키시에 있는 박수남 감독의 자택을 찾아가 인터뷰까지 진행했다.


*이어지는 글에서
양영희 감독의 기고문과, 
<교사형> <죄와 죽음과 사랑과> 비교 분석, 
[기획] 스스로 표절을 인정한 오시마 나기사

사진제공 오시마 나기사 프로덕션 주식회사

올여름 일본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도쿄의 폭염 속에서도 예술영화관 온라인 예매는 연일 매진을 기록했고, 2,000엔짜리 팸플릿이 불티나게 팔렸다. 일본 관객으로서는 자국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지배를 다룬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보길 잘했다, 귀중한 기록을 남기고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라는 호평이 쏟아졌다. 내년 재상영 또한 예정되어 있다.

올여름 일본에서 개봉한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프리미어로 공개되어 다큐멘터리 부문 최우수작에 주어지는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했다. 올해 90살을 맞은 재일 교포 2세 박수남 감독이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고, 그 뒤에서 딸이자 공동 감독인 박마의 감독이 휠체어를 밀며 레드카펫을 걷는 장면을 기억하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2025년 8월15일 광복절에 KBS에서 방영되며 다시 주목을 받았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 감독이 1964년부터 오디오와 메모로, 1985년부터 비디오로 기록해온 다양한 구술 역사를 담은 작품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에 피폭된 조선인, 나가사키의 군함도나 규슈의 지쿠호 탄광에 강제징용된 조선인, 오키나와 전쟁에 나가 싸워야 했던 조선인 병사와 위안부 여성들. 그 기록은 박수남 감독의 인생과 공동 감독을 맡은 딸 박마의와의 관계에 녹아들어 다층적인 구조를 만들어내며 148분 동안 관객을 사로잡는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 감독의 기록자 경력의 출발점이 된 ‘고마쓰가와 사건’(1958년 재일조선인 청년이 일으킨 살인사건)도 다룬다. 박수남 감독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이진우(당시 18살)와 방대한 양의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이를 엮어 1963년 <죄와 죽음과 사랑과>란 제목의 서간집을 출간했다. 이 책은 당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를 바탕으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영화 <교사형>을 제작했다고 한다.

올해 7월 도쿄 시사회에서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보았을 때, 박수남 감독이 “오시마가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만들었어”라고 말하던 짧은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프로듀서이자 함께 시사회에 참석했던 남편 아라이 가오루도 같은 의견을 표했다. <교사형>을 다시 보고, 이미 절판된 <죄와 죽음과 사랑과>를 중고 서점에서 구해서 읽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죄와 죽음과 사랑과>없이 <교사형>은 존재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부인이자 여배우인 고야마 아키코가 연기한 캐릭터는 박수남 감독 그 자체였다. 그러나 <교사형>의 엔딩크레딧에는 <죄와 죽음과 사랑과>가 원작이라는 사실도, 박수남 감독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았다.

사형수 이진우와 박수남 감독이 주고받은 옥중서신(<죄와 죽음과 사랑과>, 산이치쇼보 펴냄, 1963)과 영화 <교사형>의 각본(<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시세이도 펴냄, 1968)을 비교 분석한 결과, 11개의 도용을 발견했다.

스스로 표절을 인정한 오시마 나기사

사진제공 오시마 나기사 프로덕션 주식회사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직접 자신의 표절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는 인터뷰와 저서에서 박수남 감독의 서간집 <죄와 죽음과 사랑과>를 표절해서 영화 <교사형>을 만들었다고 명시한다.

“서간집을 읽긴 했지만, 당시에는 뭘 어떻게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교사형>의 시나리오를 쓰기로 하고 다시 읽어봤습니다. 이진우는 감옥에 갇혀서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마침내 진정한 자아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편지들은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그녀를 만나서 처음으로 타인의 죽음이라는 개념이 그의 상상력 속에 들어오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이 거기서 반성하면 지루해질 테니, 그 부분이 풀어내기가 어려웠죠. 박수남이라는 실명을 쓰면 안될 것 같아서 이름은 쓰지 않았습니다.”(<오시마 나기사 1968>, 오시마 나기사 지음, 세이도샤 펴냄, 164~165쪽)

“저는 진짜 박수남을 몰라요. 이건 우리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들의 비법인데, 구체적인 관련 인물을 되도록이면 만나지 않고 상상하는 게 좋습니다. 그 상대방을 만나면 현실의 박수남에게 끌려 들어가거든요. 저렇게 희화화하려면 상대방을 모른다는 장점이 있어야 합니다. 대신 그 서간집만은 열심히 읽었죠. 책에서 가장 좋은 부분들을 가져다 썼습니다.”(같은 책, 165쪽)

“박수남은 조총련 소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책을 작품의 소재로 삼고 허락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수남의 반응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상하죠? (웃음) 북한이 얼마나 폐쇄적인 사회인지, 뒤집어 말하면 우리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배타적인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같은 책, 167쪽) 박수남 감독은 1961년 말에서 1962년 초 사이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서 추방당했다.

“저는 한번도 박수남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글을 인용했으니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죠? 전 절대 만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박수남 감독을 아무리 없애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까요. 상대하면 손해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뿐이라고요.” (같은 책, 172쪽)

저자의 허락조차 구하지 않고 “책에서 가장 좋은 부분들을 가져다 썼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 사실은 단순한 창작 윤리의 문제를 넘어 영화 <교사형>제작의 심각한 결함을 드러낸다. 나는 묻고 싶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고 <교사형>을 상영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오시마 나기사의 아들, 오시마 아라타에게 묻다

사진제공 오시마 나기사 프로덕션 주식회사

<교사형>의 엔딩크레딧이나 시나리오, 그 어디에서도 ‘박수남’이나 <죄와 죽음과 사랑과>라는 고유명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면밀히 추적한 결과, 영화 개봉 무렵에 발간된 소책자 <예술극장>55호(1968년 2월 발행, <교사형> 특집호)의 ‘후기: 시나리오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형제도 문제와 고마쓰가와 사건에 관한 수많은 글과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특히 박수남씨가 엮은 소년의 서간집 <죄와 죽음과 사랑과>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존경을 표합니다.”

박수남 감독의 책을 “이 책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표절하고, 다른 매체에서 일방적인 감사를 표하는 것은 어떤 심리일까. 표절을 한 사람이 허락도 받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으면서, 피해자에게 감사를 표할 권리가 있을까? 이 문장을 읽은 당시 독자들은 아마도 박수남 감독의 동의를 얻고 서간집을 참고했다고 오해할 것이다. 이는 오만하고 비겁하며 음흉한 수법 이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2013년 1월에 별세했다. 영화 <교사형>을 포함한 작품의 저작권자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아들인 오시마 아라타(영화감독, 프로듀서, 오시마 나기사 프로덕션 주식회사 대표)다. 이 문제에 관해 오시마 아라타에게 의견을 구했다.

“양영희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알게 된 일들이 많습니다. 당연히 박수남씨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교사형>에 박수남씨의 이름과 저작권을 명시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부주의했던 것인지, 그 시대가 부주의했던 것인지. 설령 그 시대의 영화제작 방식이 부주의했다고 해도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상처를 받은 분이 있고,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양영희씨가 지금 지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타인의 저작물을 작품에 사용할 때는 반드시 당사자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크레딧에 명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영화제작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릅니다. 잘못했다면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박수남 감독은 현재, 이 표절 문제에 관한 공식 성명 발표를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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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박수남 <죄와 죽음과 사랑과>, 오시마 나기사 <교사형> 대조

비교조사 아라이 가오루 번역 인예니

사형수 이진우와 박수남 감독이 주고받은 옥중서신(<죄와 죽음과 사랑과>, 산이치쇼보 펴냄, 1963)과 <교사형>의 각본(<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시세이도 펴냄, 1968)을 비교 분석한 결과 11개의 도용을 발견했다.

사진제공 오시마 나기사 프로덕션 주식회사

1. <죄와 죽음과 사랑과> 149쪽(이진우→박수남)

“일전에 어느 프로테스탄트인 죄수가 눈에 색정을 풍기며 여인을 보는 자는 이미 간음을 범했다는 성서의 구절은 좀 지나친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했어요. 이런 경우, 색정이란 어느 범위까지를 이르는가가 문제가 되겠지요.”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52쪽

신부 색정을 품고 여인을 본다면 이미 마음속으로 간음을 저지른 것입니다.

검사 그런 말을 합니까?

신부 예수님 말씀입니다. 하느님조차 성욕과 상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셨습니다.

2. <죄와 죽음과 사랑과> 151쪽(이진우→박수남)

“상상의 반복이 과연 일종의 자신감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피해자를 봤을 때,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아요. 나는 멋지게 해낼 거예요. 이와 비슷한 장면은 이미 상상에서 행한 바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이 자신감은 어디서온 것일까? 아마 그것은 상대적인 자신감이었을 거예요. 만약 충동적으로 범행을 결심했다면 그 자신감은 충동과 같이 절대적이었을 테지요.”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64쪽

R 몇번이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범죄를 상상하는 사이, 무언가 자신감 같은 게 생겨난다는 건…. 자전거를 탄 여자를 어떤 식으로…. 그런 상상도 반복했다고나 할까요…. 상상했던 대로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옵니다. 제가 상상했던 장면과 똑같습니다. 자신감 같은 것이 솟아오릅니다.

3. <죄와 죽음과 사랑과>151~152쪽(이진우→박수남)

“그때 그녀는 왼쪽을 달리고 있었어요. 만일 그녀가 오른쪽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나는 범행을 단념하자고 생각했어요. 나는 현실이 상상과 어긋나면 범행에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욕망을 느낄 수 없었어요. 마치 남자 같은 외형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상상이 나에게 욕망을 느끼게 하였어요. 그러니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욕망을 느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회를 놓쳐버려도 좋았겠죠.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상황이 상상한 그대로가 되는 것이었어요. 이 복잡한 동기를 잘 표현하기가 어렵군요. 어쨌든 나는 그녀를 오른쪽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어요. 자전거에 탄 채로 그렇게 굴러떨어져본 적은 없어요. 그럼에도 나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어요. 아마 상상의 반복이 그런 자신감을 만드는데 힘이 된 것 같아요.”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64~165쪽

R 하지만 그녀는 왼쪽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상상대로라면 오른쪽을 달려야 할 텐데. 나는 잠시 망설입니다. 만약 그녀가 오른쪽으로 오지 않는다면, 이건 상상도 현실도 아닌 이상한 상황이 됩니다. (중략) 오른쪽을 달리지 않는 한, 그만두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몸이 멋대로 움직여 그녀를 오른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지금, 현실과 상상은 일치합니다. 이러면 실패하지 않지요. 다시금 자신감을 느낍니다. 상상했던 대로 손을 뻗어 목에 감고, 여자와 함께 쓰러집니다. 이건 꿈이다. 내가 늘 하는 짓 아닌가.

4. <죄와 죽음과 사랑과> 155~156쪽(이진우→박수남)

“우리는 어떤 상태에서 일어난 일은 그 상태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내가 내 사건을 나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상태의 단절을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그 일을 저질렀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그런 일을 한 나다. 그런데도 그녀들이 나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는 생각은, 왜 베일 너머로만 느껴질까.’ 이 문제가 신앙 안에서, 마음 속에서 몇번이나 되풀이되었어요. 그러할 즈음에 나는 누나와 만났던 것이지요.”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66쪽

R 그 사람들, 내가 죽인 사람들은 현실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뭔가 이렇게 베일에 가려진 형태로밖에 떠오르지 않아. 왜 그럴까.

R 누나, 그런 때 난 누나를 만났어.

5. <죄와 죽음과 사랑과>155~156쪽(이진우→박수남)

“우리는 어떤 상태에서 일어난 일은 그 상태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내가 내 사건을 나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상태의 단절을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그 일을 저질렀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그런 일을 한 나다. 그런데도 그녀들이 나로 인해 죽음을 당했다는 생각은, 왜 베일 너머로만 느껴질까.’ 이 문제가 신앙 안에서, 마음 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어요. 그러할 즈음에 나는 누나와 만났던 것이지요.”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68~169쪽

R 꿈속에서 베일 한장을 통해서만 느껴지는 피해자들을 매우 생생하게 느끼는 일이 때때로 일어나게 되었다.

6. <죄와 죽음과 사랑과> 156쪽(이진우→박수남)

”언젠가부터 나는 누나가 정말 좋아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누나 생각이 나자 크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누나는 다리를 다쳤는데도 일부러 집까지 찾아와주었어요. 누나가 버스 정거장을 잘못 알고 한 정거장 먼저 내려버렸어요. 그래서 집까지 걸어가는 도중에 운좋게 자전거 뒤에 탈 수 있었지만, 나는 우리 집 근처의 일들을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한 일이 있으니만큼 만약 누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으로 가슴이 아팠어요. 나쁜 짓을 하면 나쁜 것만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 정말 맞는 말이에요.”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66~167쪽

R 어느새 누나를 너무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어느 날 문득 누나를 떠올렸을 때 갑자기 누나가 걱정됐다. 그때 누나는 다리를 다쳤는데 일부러 우리 집에 찾아와줬다. 버스 정거장을 잘못 알고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우리 집 근처는 아주 위험하다. 나 같은 범죄자들도 많다. 만약 누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갑자기 누군가가 내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나는 나쁜 상상만 하기 때문에, 이럴 때도 가장 나쁜 일을 상상한다. 누나가 살해당하거나 강간당하면 어떡하지. 내가 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7. <죄와 죽음과 사랑과> 156쪽(이진우→박수남)

“그래서 나는 누나를 굉장히 걱정했는데, 그 순간 피해자가 생각났고, 그것이 이전에 없던 강한 쇼크를 주었기 때문에, 그 일이 뭔가 깊은 의미를 지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67쪽

R 나는 하루 종일 가슴이 아팠고 심장이 이상하게 격렬하게 뛰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다. 나는 갑자기 피해자들을 떠올렸고 위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죽인 사람들… 그 사람들은 사라졌다. 나 때문에….

8. <죄와 죽음과 사랑과> 187쪽(박수남→이진우)

“네 아버지의 연로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유치환이라는 시인이 망국의 비애를 노래한 <송가>라는 시를 항상 떠올려요.쫓기인 카인처럼/ 저희 오오래 어두운 슬픔에 태었으되/ 어찌 이 환난을 짐승이 되어선들 겪어나지 못하료.”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53쪽

女 쫓기인 카인처럼/ 저희 오오래 어두운 슬픔에 태었으되/ 어찌 이 환난을 짐승이 되어선들 겪어나지 못하료.조국의 시인, 유치환의 시야. 네 아빠의 얼굴을 보면 이 시가 생각나.

9. <죄와 죽음과 사랑과> 150쪽(이진우→박수남)

예를 들어 우리는 여배우의 수영복 차림의 사진을 자위행위의 재료로 하기 일쑤지요. 처음에는 시각에 의해서 성욕을 자극 시키지요. 그런데 그것은 언제나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아요. 행위는 습관화되어 가지만 상상은 습관화되지 않지요. 행위는 반복되지만 상상은 반복됨이 없이 확대되어 가는 것이지요. 거기에서 우리는 눈익은 배우의 수영복 사진을 상상에 의해서 보충해 가는 거죠.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63쪽

R 상상으로 여자를… 자위행위지요. 예를 들면 여배우의 수영복 사진을 자위의 재료로 삼습니다. 처음에는 사진을 보면 자극을 받죠. 하지만 대상이 사진이기 때문에 항상 똑같습니다. 상상으로 수영복을 벗기거나 찢거나 점점 특이한 것을 요구해 가죠. 하지만 하는 일은 똑같습니다. 다만 제 머릿속에서 상상만이 점점 부풀어서 바뀌어 갑니다.

10. <죄와 죽음과 사랑과> 149쪽(이진우→박수남)

성욕은 신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정신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욕은 제한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 거죠. 나는 닭이나 소와 성교한 사람을 알고 있어요. 또 자기 처와 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성교를 계속하던 사람이 우연한 순간에 안면 있는 여인을 강간한 후에 죽인 일도 알고 있어요.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63쪽

R 성욕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게 아닐까요. 몸에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닭이나 소와 성교한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년 내내 아내와 성관계를 거른 적이 없는 남자가 우연히 아는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했습니다.

11. <죄와 죽음과 사랑과> 151쪽(이진우→박수남)

나는 상상 속에서 몇 번이고 범행을 수행하였어요. 이 길에서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잘될 것이에요. 아니면 이럴 땐 이렇게 하면….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작품집> 164쪽 R 전에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상상인지 아니면 실제로 저지른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상상 속에서 몇 번이고 그런 범죄를 계속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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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그렇게 샅샅이 뒤져 훔쳐갔을 줄 상상도 못했다”, 박수남·박마의 감독 인터뷰

박마의, 박수남 감독(왼쪽부터).

양영희 <교사형>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대표작입니다. 저예산 영화지만 칸영화제에 출품되면서 해외에 오시마 나기사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죠. 후속작인 <감각의 제국>(1976)으로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며, ‘오시마 나기사’라는 이름은 전 세계 시네필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시마 나기사 팬이라면 <교사형>을 모를 수가 없지요.

<교사형>의 주인공 R은 재일조선인 살인사건인 ‘고마쓰가와 사건’의 이진우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극 중 R이 ‘누나’라고 부르는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성(이진우와 교류하는 박수남 감독)은 오시마 나기사의 부인인 고야마 아키코가 연기했습니다. 하지만 <교사형>의 어디에도, 박수남 감독이 출판한 이진우와의 서간집이 바탕이 됐다거나 혹은 원작이라는 사실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교사형>에 대해 처음 들으신 건 언제였나요?

박수남 “오시마 나기사가 당신의 허락 없이 영화를 만들었답니다”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그 후로 <교사형>을 본 사람에게서 전화를 여럿 받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박수남 감독을 얕보고 있다, 명예훼손이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너무 끔찍하니까 안 보는 게 낫다”라는 의견도 있었고요. 저도 자존심이 있으니까요, 굳이 나서서 찾아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박마의 세월이 한참 지난 뒤 서울에서 열린 영화제에 초대받았는 데 그곳에서 <교사형>도 상영하더군요.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교사형>을 보려고 했는데, 조금 보는 것만으로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져서 극장을 나왔어요. 결국 앞부분만 봤어요. 정말 견딜 수 없었습니다.

박수남 표절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했을 줄은 몰랐어요. 애초에 내 허락 없이 영화를 만든 것 자체가 표절이잖아요? 그렇게 샅샅이 뒤져서 훔쳐갔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마의가 아라이 가오루의 비교 조사 결과를 읽어줬을 때 정말 놀랐어요. 나한테 소중한 부분을 그 남자가 통째로 훔친 거예요.

양영희 오시마 나기사 감독 외에도 <교사형>에는 세명의 시나리오작가가 있었어요.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에서 그들 중에 감독님을 만나거나 자문을 구한 사람이 있었나요?

박수남 전혀 없었어요. 몇번 영화화 제안이 들어오긴 했지만 오시마 나기사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요.

양영희 감독.

양영희 <교사형>이 칸영화제에 초청되면서 일본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세계의 오시마”라는 별명을 얻게 됐죠.

박수남 그때 “일본의 누벨바그”니 뭐니 떠들었죠. 저는 그것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양영희 박수남 감독님의 지인들이 <교사형>를 보지 말라고 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영화를 보고 철저하게 분석해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으셨나요?

박수남 전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는 타입이에요.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고요.

양영희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에서 박수남 감독님이 이 사건을 언급하는 짧은 장면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않으신 부분이죠.

박수남 항의 성명을 발표한 적이 없어서, 공식적으로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와 이진우의 서간집을 위조하고 헐뜯으며 작가를 모욕했다는 사실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입니다. 특히 그 사람 자신이 예술가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죠. 그 남자의 행동, 그 근본에는 여성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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