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30

가와바타 야스나리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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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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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 康成
Yasunari Kawabata 1938.jpg
작가 정보
출생1899년 6월 11일
오사카시
사망1972년 4월 16일
즈시시
국적일본
언어일본어
직업작가소설가각본가시인
학력도쿄 대학
수상노벨 문학상 (1968)
문화훈장 (1961)
Officer of Arts and Letters (1960)
훈일등욱일대수장
Kikuchi Kan Prize (1944)
Goethe Plaque of the City of Frankfurt (1959)
문화공로자 (1961)
일본 예술원상
배우자Hideko Kawabata
친지Kaori Kawabata (사위)
주요 작품
The Dancing Girl of Izu설국센바즈루고도잠자는 미녀산소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탄생지에 세워진 비석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어식 한자 표기:川端 康成
가나 표기:かわばた やすなり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가와바타 야스나리
로마자:Kawabata Yasunari

가와바타 야스나리(일본어川端 康成かわばた やすなり1899년 6월 14일 ~ 1972년 4월 16일)는 일본의 소설가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의 차화정(此花町, 지금의 덴진바시 부근)에서 태어났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함께 『분게이지다이(文藝時代)』를 창간하여 당시 유럽의 허무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문학 유파였던 신감각파(新感覺派)의 대표적 작가로서 활약하였다.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 『설국』, 『천 마리의 종이학(千羽鶴)』, 『산소리(山の音)』, 『잠든 미녀(眠れる美女)』, 『고도(古都) 』 등 죽음이나 유전 속 '일본미(日本美)'를 표현한 작품을 발표했고, 1968년(쇼와 43년)에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쇼와 47년)에 만 72세(향년74세)로 사망하였다.

생애[편집]

1899년(메이지 32년) 6월 14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던 에이키치(榮吉)이고 어머니는 겐(ゲン). 누나는 와카코(芳子)였다. 1901년(메이지 34년)에 아버지가 죽고 외가가 있던 오사카부 니시나리군(西成郡) 도요사토무라(豊里村, 지금의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 미하치로(三八郞), 할머니 가네(カネ)와 함께 미시마 군(三島郡) 도요카와무라(豊川村, 지금의 이바라키시)로 옮겼다. 1906년(메이지 39년) 도요카와 심상고등소학교(豊川尋常高等小学校, 지금의 이바라키 시립 도요카와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때 동급생으로는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있었고 할아버지와는 함께 바둑을 두는 등 사이가 좋았지만, 9월에 할머니가 죽고 1909년(메이지 43년)에는 따로 살고 있던 누나마저 사망하는 비극이 이어졌다. 1912년(메이지 45년)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중학교(지금의 오사카 부립 이바라키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2년 뒤 할아버지까지 죽자 도요사토무라의 구로다(黒田)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했다. 하급생으로 오오야 소이치(大宅壮一)가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도라타니(虎谷)'라는 이름의 책방이 있어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 그곳까지 책을 사러 가곤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가와바타 야스나리(1917년).

작가에 뜻을 두게 된 것은 중학교 2년때의 일로 1916년(다이쇼 5년)부터 『교한신보(京阪新報)』에 단편, 『분쇼세카이(文章世界)』에 단가를 투고하게 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에 졸업하자 도쿄로 상경해 아사쿠사 구라마에(蔵前)의 사촌 집에서 얹혀 살면서 예비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여 제1고등학교의 1부 을(乙) 영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가을에 이즈를 여행하다가 떠돌이 예인과 만나 교유한 경험은 훗날 『이즈의 무희』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유가시마(湯ヶ島) 온천 여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1920년(다이쇼 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국문과로 전과했다. 대학 동기로는 기타무라 기하치(北村喜八)、혼다 아키라(本多顕彰)、스즈키 히코지로(鈴木彦次郎) 등이 있었다. 입학한 해에 곤 도코(今東光)、스즈키 히코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제6차) 발행을 기획하여 국문과로 전과한 이듬해에 실행에 옮겼고, 그곳에 발표한 작품 「초혼제일경(招魂祭一景)」이 기쿠치 간에게 인정받아 『분게이슌주(文芸春秋)』(1923년 창간)의 동인이 되어 문인의 길에 들어섰다. 1924년 대학을 졸업하고(졸업 논문은 「일본소설사 소론日本小説史小論」) 요코미쓰 리이치, 가타오카 갓페이(片岡鉄兵), 나카가와 요이치(中河与一), 사사키 모사쿠(佐佐木茂索), 곤 도코 등 14명과 함께 동인지 『분게이지다이(文芸時代)』를 창간, 「이즈의 무희」를 지면에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초기에는 왕조문학이나 불교 경전의 영향을 받아 허무한 슬픔과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이후 비현실적인 미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설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37년 「설국」이 일본의 문예간담회상을 수상하였고, 1944년(쇼와 10년)에 「고향(원제: 故園)」, 「석일(원제: 夕日)」 등의 작품으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한다. 이 무렵 미시마 유키오가 가져온 「담배(원제: 煙草)」를 호평하였는데, 미시마에게 있어 가와바타는 그를 문단에 데뷔시킨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1945년(쇼와 20년) 4월에 일본 해군보도반(海軍報道班) 반원(소좌 대우) 자격으로 가지마(鹿島)까지 따라가 가미카제를 취재하기도 했다. 이때 함께 갔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는 그 자신의 작가관까지 바뀔 정도의 충격을 받았고, 가와바타는 이때의 일을 토대로 「생명의 나무(원제: 生命の樹)」를 집필하였다. 그 뒤 「천 마리의 종이학」, 「산소리」 등을 단속적으로 발표하면서, 패전 뒤인 1948년에는 일본 펜클럽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도쿄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서 주최국 일본측의 회장으로서 활약하여 이듬해에 기쿠치 간 상을 또 한 번 수상한다. 1958년에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62년 세계평화 어필 7인 위원회에 참가하였고, 1963년에는 새로 생긴 일본근대문학관(日本近代文学館)의 감사(監事)역을 맡게 되었다. 196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다. 단속적으로 작품 「단포포(たんぽぽ)」의 연재를 『신조(新潮)』에 시작하였다. 1965년에 일본 펜클럽 회장직을 사임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맹장염으로 도쿄대학 병원에 입원하였다.

무려 12년간이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설국》은 가와바타의 미의식이 절정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 문학성이 인정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8년 10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일본인의 심정의 본질을 그린, 몹시 섬세한 표현에 의한 서술의 탁월함(for his narrative mastery, which with great sensibility expresses 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이 노벨상 위원회의 수상평이었다. 12월 스톡홀름에서 열린 수상식에서 가와바타는 연미복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수여한 문화 훈장이 달린 몬쓰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 차림으로 수상에 임했고, 기념 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美しい日本の私) 그 서론」을 행했다.

이후 1969년부터 1974년에 걸쳐 신초샤에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전집」(전19권)이 간행되었고, 타이베이의 아시아 작가 회의뿐 아니라 1970년에 한국에서의 서울 국제펜클럽 대회에 출석하였으며 일본 근대 문학관의 명예 관장으로도 취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뒤에 발표한 작품은 단편 몇 개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노벨상 수여에 따른 중압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2012년 9월 4일, 스웨덴 아카데미가 NHK의 공개 청구에 응하여 개시한 노벨 문학상 전형 과정의 자료를 통해 가와바타가 노벨상을 수상하기 7년 전인 1961년에 이미 노벨상의 후보로 결정되어 있었음이 밝혀져 NHK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노벨 문학상 3년 뒤인 1972년 4월 16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의 맨션 「즈시 마리나」의 자택 작업실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가스에 의한 자살. 향년 73세였다. 계명은 문경원전고산강성대거사(文鏡院殿孤山康成大居士)대도원수예문화강성거사(大道院秀藝文華康成居士)1973년에 재단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기념회에 의해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이 제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는 이바라키 시립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관'이 개관했다. 또한 이바라키시 명예 시민으로도 임명되었다.

연보[편집]

작품 목록[편집]

  •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
  • 설국(雪国)
  • 고도(古都)
  • 단포포(たんぽぽ)
  • 산소리(山の音)
  • 여자라는 것(女であること)
  • 명인(名人)
  • 이즈의 여로(伊豆の旅)
  • 무희(舞姫)

이 외 다수.

수상 경력[편집]

  • 1937년 - 「설국」으로 문예간담회상 수상
  • 1944년 - 「고향」, 「석양」 등으로 기쿠치간상 수상
  • 1952년 - 「천 마리의 종이학」으로 예술원상(芸術院賞) 수상
  • 1954년 - 「산소리」로 제7회 노마 문예상(野間文芸賞) 수상
  • 1958년 - 도쿄 국제 펜클럽에서 활약한 데에 대한 노고 치하로서 제6회 기쿠치간상 수상
  • 1962년 - 「잠든 미녀」로 제16회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毎日出版文化賞) 수상
  • 1968년 - 노벨 문학상 수상

일화[편집]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문학사에 찬연히 빛나는 수많은 명작을 남긴 근현대 일본 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오늘날까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주요 작품은 대부분 문단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본인도 전문 잡지 등에 기고한 창작에 관한 수필 등에서는 약간 요설(饒舌)에 기술하는 것이 있었기에 작품 속에 다소 각색된 모델이나 로케이션, 등장 사물이 순전한 창작(가공의 사건)에 의한 것은 아니었음이 구체적으로 판명된 경우도 많다.

  • 부립 이바라키 중학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다만 수필 등에서 나오듯이 가와바타의 관심은 입학한 뒤에 곧장 예술이나 어른들의 세계로 향하고 있었고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졸업 성적표에 보면 가와바타의 작문 성적은 53점으로 전학생 88명 가운데 86등이었다.
  • 교토 안에 현존하는 유일한 양조장 사사키 주조(佐々木酒造)에서 만든 일본술을 맛보고 "이 술의 풍미야말로 교토의 맛이다"라며 작품 이름을 「고도」라 지었다. 만년에 가와바타는 숙박지에서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 교토대 명예교수)와 면회했을 때에 "고도라는 술을 알고 계신가?" 라고 물어서 모른다고 대답한 구와바라에게 그 술을 맛보여 주고자 추운 밤에 직접 30분 걸리는 길을 걸어서 사러 갔다고, 구와바라는 회상하고 있다.
  • 일본 기원(日本棋院) 내에 있는 대국용 방에는 가와바타가 쓴 「심오유현(深奥幽玄)」이란 족자가 있다. 바둑을 좋아하여 당시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던 김소운(金素雲)이 가와바타의 집에 갔다가 바둑판을 발견하고 "바둑을 얼마나 두십니까?" 라고 묻자 가와바타는 "그저 조금 두지요."라고 대답했고, 당시 8, 9급 수준도 되지 못했던 김소운은 자신 정도의 실력이려니 짐작하고 "언제 한 수 배울까요?" 하고 그에게 대국을 제안했고 가와바타는 "네, 연락 드리지요." 하고 승락했다. 하지만 돌아와서야 가와바타가 명인전(名人戰)의 기보(棋譜)까지 쓸 정도의 아마추어 최상급의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실수했음을 깨달았고, 마침 가와바타가 전화를 걸어 지난 번 약속대로 바둑을 두자고 하는 것에 다른 핑계를 대고 빠져버린 뒤, 『분게이슌주』에 수필을 실어서 가와바타에게 답했다고 한다.
  • 전쟁 중에 가노야 해군항공대(鹿屋海軍航空隊)에 첩보반으로서 부임하고 있었을 무렵, 부대 소속의 소위 스기야마 유키테루(杉山幸照)는 그에게 예전 연료 보급을 위해서 착륙한 스즈카에서 오랜 비행으로 지쳐 얼굴이 창백한 와중에도 사관 식당에서 나온 카레라이스를 기운이 다 빠진 상태에서 깨끗이 비웠던 경험을 말하며 '특공의 비인간성'에 대해 가와바타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당시 스기야마는 원래 특공대 쇼와대 소속으로, 전속 명령이 나와 가와바타와 함께 야타베의 해군 기지로 가는 중이었다). 스기야마는 훗날 자신의 저작에서 가와바타가 끝까지 특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감이었다고 적고 있다. 가와바타는 부임전에 일본군 본영의 보도부 소속 다카도(高戸) 대위로부터 "특공을 잘 봐 두십시오. 다만 쓰고 싶지 않으면 쓰지 않으셔도 좋다. 언젠가는 이 전쟁의 실상을 글로 써주셨으면 좋겠다"라는 통고를 받았던 것이다. 후에 다카도는 "섬세한 신경이었기에 (특공에 관해서) 붓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

사망에 대하여[편집]

사망 당시 그의 사인은 자살로 보도되었고 이것이 통설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가와바타의 사망 전후 상황으로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가 아니냐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자살설[편집]

  1. 교제가 깊었던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이때 가와바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여겨지며, 미시마의 장례식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 197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던 자유민주당 후보 하타노 아키라(秦野章)의 지원 활동에 떠밀려 나간 것에 대한 수치(하타노는 낙선했다. 다만 가와바타가 본래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형적은 없다)
  3. 늙음(창작 의욕의 감소)에 대한 공포 등으로 인한 강한 정신적 동요
  4. 가와바타가 좋아했던 가정부의 퇴직(이는 1977년 우스이 요시미의 소설로도 각색되었으나 유족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해 합의 조건으로 절판).

이상이 가와바타의 자살 동기로서 거론되는 정황 증거들이지만, 자살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첫 번째 증거는 일시가 너무 떨어져 있고 두 번째 증거는 자살 동기로서는 너무 약하고, 세 번째 증거는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예 평론가의 해석일 뿐 구체적 증명은 없으며 네 번째 증거도 주관적 기술에 불과하며 사실 검증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사고사설[편집]

  1. 이전부터 가와바타는 줄곧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었다(심야에 집필하는 일이 많은 작가들에게서 수면제 복용은 드문 것이 아니다).
  2. 유서가 없었다.
  3. 보통 스스로 조작한적 없는 난방 기구의 사용 착오(가스 스토브의 미연소 가스가 방에 가득했다고 여겨진다).
  4. 가와바타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 있을 때의 부회장이었던 세리자와 고지로(芹沢光治良)는 추도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죽음(川端康成の死)」에서 자살은 아니었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가와바타의 죽음 전후로 그를 만났던 여러 관계자의 증언에서 가와바타가 자살했음을 암시해주는 어떤 징후도 없었다는 것이다(가와바타 자신도 그 해 가을에 개최된 국제 펜클럽 대회의 준비에서 책임자로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

같이 보기

2022-08-29

2208 ‘일왕 장인’ 전 국제사법재판소장 “‘위안부’, 법적정리 이상을 해야” 길윤형 기자

‘일왕 장인’ 전 국제사법재판소장 “‘위안부’, 법적정리 이상을 해야”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일왕 장인’ 전 국제사법재판소장 “‘위안부’, 법적정리 이상을 해야”

등록 :2022-08-25
길윤형 기자 


오와다 히사시 전 국제사법재판소장
제7회 ‘한일포럼상’ 수상뒤 소감 연설
외무성 재직 시절 ‘위안부’ 노력 소개도

왼쪽부터 오와다 히사시 전 국제사법재판소장과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한국국제교류재단 제공“국가 간의 위기관리를 위해선 정부 간 외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민족이고, 인간이고, 국민입니다. 그래서 민간의 교류가 정말 중요합니다.”

25일 도쿄 지요다구 뉴오타니호텔에서 열린 ‘제7회 한일포럼상’ 수상을 위해 연단에 오른 오와다 히사시(89) 전 국제사법재판소장은 감개무량한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일포럼 초대 일본 쪽 의장이기도한 그는 자신과 한국의 인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며 절감한 민간 교류의 중요성, 양국 관계 회복의 필요성 등에 대해 수상 연설을 이어갔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일 두 나라가 국교를 정상화하던 1960대 중반으로 거슬러 오른다. 1955년 대학을 졸업한 뒤 외무성에 들어가 주로 조약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그로 인해 1965년 6월 조인된 한일협정의 문서 작성에 참여하게 된다.


한국과 관계가 ‘결정적’으로 깊어지게 된 것은 1991년 8월 외무성의 ‘넘버2’인 사무차관에 임명된 직후 불거진 ‘위안부’ 문제였다. 자신이 본 피해를 직접 밝히며 호소한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 증언’을 통해 그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위안부 문제가 역사 전면에 부상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일본 정부는 매우 난처한 입장에 몰리게 된다. 그는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차관이었던 내 업무의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애초 일본 외무성은 “위안부 문제는 1965년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체결된 청구권 협정으로 법적 처리가 끝낸 문제”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국제법 전문가’인 오와다 전 소장의 견해 역시 같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의 마음은 요동쳤다.

“법적으로는 그렇다 해도 인간으로서 그럴 수 있을까요. 법적으로 정리된 문제라 해서 인간과 민족의 관계는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성의를 갖고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외무성 역시 그런 방침을 정하게 됩니다.”

오와다 전 소장은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던 미야자와 기이치(1919~2007) 총리에게도 그런 취지로 보고했다. “미야자와 총리께서도 제 말에 반론하지 않고 쭉 얘기를 들으시더니, ‘그게 맞는 얘기다. 그런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가자’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일본 정부의 방침이 정해진 것입니다.”

이후 미야자와 내각은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과 일본 정부의 관여를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를 내놓게 된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 시절이던 1995년 7월 일본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피해자들에게 ‘속죄금’을 지급하는 ‘아시아 여성기금’이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명확한 법적 책임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의 반발에 막혀 일본 정부가 기대했던 ‘완전한 해결’에는 이르지 못한다.





제7회 한일포럼상 시상식에서 유명환(오른쪽)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오와다 히사시 전 국제사법재판소장을 소개하고 있다.위안부 문제를 다루며 오와다 전 소장이 절감한 것은 민간 외교의 중요성이었다. 외교에는 국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한-일이 화해하고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데 필요한 것은 민간의 지속적인 교류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무차관 퇴임을 앞두고 당시 공로명 당시 주일 한국대사와, 두 사회가 교류할 수 있는 민간 플랫폼을 만들어보자고 제의한다. 이 제안이 열매를 맺어 1993년 11월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경주에서 만나 양국의 지속적인 민간 교류를 위해 폭넓고 지속적인 대화를 하기로 합의한다. 이후 30년 동안 한해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한일포럼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포럼은 그동안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김포-하네다 직항 노선 신설 등 양국 관계를 개선하고 교류를 심화시킬 수 있는 여러 제언을 내놓았다. 24일부터 3년 만에 도쿄에서 ‘대면’으로 열린 제30차 포럼의 둘째날엔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이 직접 참석해 축사를 전했다. 하야시 외상은 이 포럼에 16번이나 참가한 ‘단골 멤버’다.

오와다 전 소장은 현재 사상 ‘최악의 상태’라 불리는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낙관적인 견해를 보였다. “관계가 어렵지만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현재 양국 간 문제를 단순히 분석만 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학자들이 하면 되는 것이죠. 두 나라 사이의 긍정적인 요소를 잡아내 실현해야 합니다. 이 모임에 정부 관계자 대신, 정치가, 언론인, 학자, 전직 관료를 넣은 이유입니다. 의견을 결집해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오와다 전 소장은 나루히토 현 일왕의 장인이기도 하다.

도쿄/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2015 일본 낭인들, '여우사냥' 명명된 명성황후 암살 작전에 동원돼 - 프리미엄조선


일본 낭인들, '여우사냥' 명명된 명성황후 암살 작전에 동원돼 - 프리미엄조선


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33)-②
일본 낭인들, '여우사냥' 명명된 명성황후 암살 작전에 동원돼

입력 : 2015.06.18 
<①편에서 계속>

4. 명성황후 시해에 하버드 대학과 동경제대 출신의 일본 최고지식인들 참여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 이 사건은 일본 천황 직속 기관인 대본영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대장과 조선 공사와 외무대신을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휘했다. 이들은 현 아베 총리의 정치적 본거지인 야마구치 현 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표적으로 조선 정벌을 주장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자기들 고향 야마구치 현 출신의 극우 거물인 육군 중장 출신의 자작 미우라 고로에게 친러 정책의 명성황후를 죽이라는 밀명을 주고 1895년 9월 조선공사로 부임시켰다. 미우라의 명성황후 암살 계획참모는 시바 시로란 자로 미국 명문 하버드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최고지식인이었다. 미우라와 시바는 일본군대가 명성황후를 암살하면 비난받을 것 같아 민간인들 중심의 암살집단을 구성하였다.

명성황후 살해 실행 총책 미우라 공사와 이시즈카 에조의 암살 보고서.이 민간 암살집단에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출신 등 일본 최고의 젊은 지식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메이지 유신 추종 세력과 백제 유민 후손이 많은 규슈 구마모토 출신 낭인 30여 명과 한성 신 보의 주필, 편집장, 기자들이 주도적으로 가담했다. 이는 후에 시해사건을 일본 공사관이 아니고 민간이 주도했다고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명성황후 암살 작전은 “여우사냥” 이라고 명명했으며 1895년 10월 8일 새벽 4시에 작전 개시했고 명성황후는 새벽 6시경에 시해 당했다. 이 작전에 흥선대원군, 개화파 유길준,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 등 조선인들 여럿이 가담하여 조력하였는데 황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5.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국부 검사와 성폭행 당했는가?

45세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의 칼을 맞고 즉시 숨이 끊어졌는지 아니면 칼을 맞고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한 기록이 우리에게는 없다. 위에 보이는 조선 정부의 일본인 고문관 이시즈카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황후가 사망 직전에 능욕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 기록과 주장이 진실이든 아니든 또 설사 황후가 성폭행을 당하고 죽었다고 해도 군사력이 없는 황후의 남편 고종은 통곡하는 길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조선 정부 고문관 이시즈카 에조는 “낭인들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힌 후 왕비를 발가벗기고 국부 검사를 한 후에 기름을 부어 소각시켰다” 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에 보냈다(위키 백과).

김진명씨의 소설 “신황태자비 납치사건” 의하면 이시즈카 에조는 “낭인들은 훤히 드러난 조선 왕비의 가슴을 밟고 짓이기고 왕비 몸을 칼로 상처를 낸 후 왕비를 완전히 발가벗겼다. 그리고 한 낭인이 발가벗겨진 왕비의 음부를~~(중략)~~ 꿈틀거리는 조선 왕비를 앞에 놓고 낭인들은 대일본제국 만세를 불렀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일본의 법제국장에게 보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잔인성과 변태성으로 보아 명성황후 시해 주범자들은 일본 최고지식인들이지만 능히 명성황후의 음부를 검사하고 성폭행했을 것이다. 731 부대에서 보듯이 일본인들은 의사와 과학자 등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의 빈 깡통의 두뇌가 되어 상부조직의 프로그램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못할 짓은 아무것도 없었다.

명성황후 시해 모습(왼쪽).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 시해 행동대원들. /위키백과
6. 일본의 한국 재침략 대비해 경제력과 국방력 증강해야

명성황후 시해 주도자들이 시해 사건 후 아래 그림과 같이 출세한 것을 보면 명성황후 시해의 모든 것은 일본 정부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자행된 것임이 확실하다.

일본이 조상의 과거 범죄를 진정 사죄하고 참회한다면 몰라도 일본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인기 있던 삼성 갤럭시 휴대전화기가 삼성 로고를 떼어도 잘 안 팔리고 젊은이들에게 열풍같이 일었던 한류 바람도 시들해졌다. 한일관계가 경색되자 일본인들은 한국 것을 좋아하다가는 자칫 우파세력에 이지매를 당할까 두려운 것이다. 조선 정벌론을 마음속에 품은 일본 우파세력은 기회만 포착되면 한국을 재침략할 것이다.

해방 직후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아베 총리와 혈연관계 없음)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한 말 “나는 반드시 조선에 다시 온다”를 명심하여 일본 상품 구매를 자제하고 경제력과 국방력 증강에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33)-②] 전체기사 보기




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33)-①
하버드대-동경제대 출신 日최고 지식인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었다

장대성전 
강릉영동대 총장
E-mail : dschang28@hanmail.net서울서 성장해 경기고와 한국외국어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탁결..

입력 : 2015.06.18

 
 
1. 일본군의 8만명 중국 여인들 강간사건 폭로 저자 일본우익 협박에 자살

중국을 침략해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간 피난가고 남은 주민의 50% 이상인 30만명을 무차별 학살했고 8만명의 여인을 집단 강간했다. 난징에서 중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총책임자는 황족 아사카 야스히코 중장인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난징사건을 다루는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소추가 면제되어 재판정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 황족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맥아더 사령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현재 일본에선 극소수 지식인들 이외에는 난징 대학살을 날조된 없었던 사건으로 부정함은 물론이고 교과서에는 난징사건으로 축소하거나 기술을 못 하게 하는 등 국가적으로 난징대학살에 대해 언급을 금하고 있다.

여인 강간 후 내장을 파헤쳐 죽인 일본군(왼쪽), 일본군의 백 명 먼저 목 베기 시합 기사.일본군은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여자 아이는 물론이고 늙은 할머니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집단 강간하고 팔과 다리를 절단하고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심지어 강간하고 그 여성의 음부에 총을 쏘거나 칼을 꽂아 죽이기도 했다. 일본군들은 가족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는 딸을, 아들은 어머니를, 오빠는 누이를 강간하도록 강요했다.

이 집단 강간 사건에 대하여 29세의 재미 중국 여인 아이리스 장(Iris Chang)이 1997년 논픽션으로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 출판하였다. 일본 우익세력은 날조라고 그녀를 협박하고 규탄집회 시위까지 하면서 압박을 가했다. 결국 아이리스 장은 일본 우익세력의 협박과 공갈에 못 이겨 2004년 11월 권총 자살로 36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2. 일본인들 8백년 동안 사무라이들에게 잘 훈련된 무의식 집단

평상시 그렇게 얌전하고 예의 바른 일본인들이 왜 그토록 잔인했을까? 일본은 12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시대부터 약 800년 동안 사무라이들이 지배한 국가이다. 사무라이들은 도쿠가와 막부가 자리 잡는 17세기 초까지 약 400여 년 동안 수없는 살육의 전투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려면 부하 사무라이들과 하급전사들은 물론 백성의 머릿속까지 빈 깡통으로 만들어야 했다. 어떠한 명령에도 무조건 복종하게 하여 일사불란 한 행동을 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사무라이 조직의 명령과 방침에 반하면 칼로 베이거나 할복자살을 강요당했다.

사무라이 조직의 행동 강령과 방침에 대하여 사소한 반감과 반대 의견을 가져도 일본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술좌석에서라도 사무라이들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면 그 즉시 사무라이들의 칼에 목이 떨어져 나가거나 집단 린치를 당했다. 무섭고 잔인한 사무라이들의 지배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일본인들은 스스로 자기 머릿속을 비웠다. 자기 주관과 의견 없이 사무라이들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독특하면서도 불행한(?) 민족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인들은 전 세계에서 전체주의 조직에 가장 잘 순응하는 국민이 되었다.

3. 일본 관동군 731부대 임산부에 매독균 주입 후 산모와 태아 함께 해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과 아시아 정벌 꿈을 계승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등 야마구치 현의 청년들과 하급 사무라이들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부르짖으며 도쿠가와 막부를 붕괴시키고 1867년 메이지 유신시대를 열었다. 이 메이지 유신 세력이 일본을 근대화하면서 사무라이 지배정신과 요시다 쇼인의 조선과 아시아 정벌론을 계승하여 일본의 신흥 우익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에 의해 양성된 일본 제국군대는 명령이라면 인류를 모두 불태워 죽이라고 해도 아무 죄의식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잔인무도한 무리가 되었다. 일본 제국 군인들은 자기 누이를 강간하는 것이 천황 폐하와 일본제국을 위하는 길이라면 당당하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마취 없이 남자 성기를 자르는 모습(왼쪽), 마취 없이 생체 실험하는 모습.일본은 1932년 천황 히로히토의 칙명으로 만주 관동군 산하에 731부대라는 생체실험 부대를 하얼빈에 설치했다. 이 부대에서 약 1만 명 이상의 조선인, 중국인, 몽골인, 러시아인 등이 산채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 갔다. 임산부에게 매독균을 주입 후 산모와 태아를 함께 해부했다.

의사가 여인을 임신시키고 태아를 배를 째고 꺼내어 실험했다. 생사람의 팔, 다리를 자르고 출혈상태를 관찰했다. 피부표본을 얻기 위해 사람의 피부를 산채로 벗겨 냈다. 어떤 사람의 콩팥에는 말의 오줌이 투입되었다. 이 모든 실험은 마취 없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생체실험 부대는 731부대 이외에 9개 부대가 더 있었다. 이 부대들의 의사와 과학자들은 많은 생체실험을 통하여 일본 의학과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②편에계속>





☞ [장대성의 세종 회장과 충무공 사장(33)-①]

Talk & 通 (총 109개)


김석범(uks****)2015.09.08 16: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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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은 그들의 악행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역사가 심판할 때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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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so****)2015.09.07 10: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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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본을 보이고 있는작금의 메르켈 독일을 보노라면, 자연스레 아베의 일본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2차대전때의 과오를 인정하는 독일과 그 시절의 만행을 나 몰라라 하는 일본은 너무도 극명하게 대비되지 않는가? 과거를 모른채하는 아베의 일본은 한 중 일 동아시아인의 자존심과 격을 내동댕이 치는 원범이다. 아시아인으로서 창피하고 모멸감을 느낀다. 메르켈의 독일이 부럽다, 그로 인해 비로서 미국을 능가하며 세계의 최선진국이됐음을 인정하며 독일국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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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so****)2015.09.06 2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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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함이 올바른 양식인의 자질이라 생각하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입장에서 더군다나 가해자가 자신들이 저지른 짐승다운 만행을 부정하는 현실에서 먼저 가해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 본인이 피해 당사자가 아닌 우리 어르신들이라 난 모르겠다는 건가? 일본은 먼저 자신들의 과거를 솔직히 인정한 후에야 비로서 새로운 동아시아의 미래가 열릴 수 있다고 본다. 만약 쟌윤 같은 사람이 한국인이라면 일제치하에서의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너무나 잔인하고 비참하게 만드는것 아닐까? 오랜만에 들어와서 정말 놀랐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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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영(cyk****)2015.07.10 21: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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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의 잔인함과 비겁함은 세계가 아는 사실로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민족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섬 민족인데다가, 잦은 지진과 태풍으로 위축되어 살기 위해서 뭉치기는 잘하지만, 앞에서의 미소 뒤에 비수가 있는 민족이다. 항상 불안하기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고 거짓으로라도 합리화하며 괴변으로 배타적인 사고를 갖은 민족이다. 항상 경계하고 우리가 힘을 키워야 깔보임응 당하지 않음을 기억해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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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욱(lcw****)2015.06.25 10: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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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 전부터 byon-tae 행각을 벌여온 일본nom들... 그 죄가는 자손대대로 받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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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주(cwj****)2015.06.23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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튼튼한 국력만이 국민을 지켜줄 근간 이겠죠! 과거사를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은 무슨 배짱 일까요? 진실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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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숙성(chan****)2015.06.23 09: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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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걸까요. 역사를 보면 일본이 끔찍하게도 우리나라를 못살게 굴죠.근본은 변하지않아요. 반드시 경계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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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윤(john****)2015.06.23 02: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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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구의 37% 가 노비였으나 일본에서는 노비제도가 16세기부터 금지되었고 20세기 식민지가 생긴후에나 강제노동이 빈번해졌다. 조선인구는 1800년에서 1900년 사이 10% 이상 감소하였으나 1900년에서 1945년 사이 일제하에서 1천2백만에서 2천5백만으로 증가하였다. 1900년 조선인의 평균수명은 고작 25세 (남성 24세, 여성 26세)였으나 1935년까지 남성 40.4세 여성 41.7세로 증가하였다. 일제하에서 2등 국민으로 전락해서 식민지 생활을 한게 조선왕조 통치하에 있던것보다 삶의 질이 오히려 더 나았다는건 조선이 얼마나 거지같은 나라였는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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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윤(john****)2015.06.24 06:4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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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같은건 국가에서 신청하는것이라 문화수준의 객관적 척도가 못됩니다. 광주항쟁 새마을운동 난중일기 동의보감 이런것 갖고 조선의 우수성을 입증하긴 좀 무립니다. 혹시 조선이 일본보다 나은 면이 있었다면 구체적으로 밝혀 주시죠. 저도 그런게 있었으면 좋겠네요.


심유경(yksh****)2015.06.23 11: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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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감히 사무라이 깡패 일본이 넘 볼 수 없는 고도의 문화와 통치제도가 발달된 국가입니다,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요 조선을 우습게 보지 마세요,

쟌윤(john****)2015.06.23 0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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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학살 생체실험 명성황후 시해 같은건 아이리스 챙이 새로 폭로한게 아니라 무식한 사람 아니면 오래전부터 상식으로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중요한 사실은 일본은 전후 70년간 아무나라에게도 무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국제사회에서 모범국으로 존중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본국민이 군국주의의 부활을 허용할 가능성은 사실 없다는것이다. 120년전 명성황후 사태때문에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하자는게 좀 한심한 논리 아닌가?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 둘째 경계상대는 중국, 세째는 러시아로 보는게 정상이다. 비민주적 독재국가가 무력을 멋대로 휘두르고 침공한다는 사실도 못 깨우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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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윤(john****)2015.06.24 07: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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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속시원하게 사죄는 안했어도 최소한 하는 시늉이라도 좀 한건 사실입니다. 반성하면 믿을수 있고 안하면 못믿는다는 것도 유치한 생각이죠. 국제관계에서 유일하게 믿을수 있는건 자신이 가진 힘 뿐입니다.


쟌윤(john****)2015.06.24 06: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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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남침한것 KAL기 폭발사건 아웅산 사건 천안함 사건 인정하나요? 중국이 한국전쟁 개입해서 전쟁을 3년 연장시킨것 사과한적 있나요? 러시아는 남북 분단시키고 한국전쟁 후원하고 KAL기 추락시키고 한것 사과했나요?


쟌윤(john****)2015.06.24 06:4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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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애들이 우리나라는 이렇게 위대한 나라야 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싶은데 사실은 생체실험하고 성노예나 부렸다고 인정하긴 창피할것 아닙니까? 자꾸 숨기니까 앞으로도 침략할 속셈이라는 논리는 좀 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이 네 나라중 제일 우리에게 위협적인게 북한 중국 러시아 그리고 마지막이 일본이죠.


심유경(yksh****)2015.06.23 11:3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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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북한 중국 라시아 다 경계해야 할 국가이죠, 그리고 일본의 문제는 과거 범죄를 인정 안하는 것이죠, 도둑과 강도가 자기 범죄를 인정 안하고 반성 안하면 계속 범죄를 하지요, 그래서 일본도 언제가 기회가 있으면 또 우리를 침력할 가능성이 있어 항상 경계하자는 의미이죠, 쟌윤씨는 일본인의 겉 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 같아요, 일본인애 대해 연구 더 하세요, 그리고 친일 하세요,

김기주(k****)2015.06.23 01: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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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윤(John**) 그래서 설들력 있게 당신 스스로 함 제시해보지. 별일 아닌데 이런 기획기사를 쓴다는게 낭비같나? 설득력이 없이 그냥 감정적으로만 이러는 사람들이 미개하다 느끼나? 미국살아 미국식 사고에 젖은건가??한민족의 피를 받았으면 세계사보다 한국사 좀 더 공부하지~ 독일이 나치가 저지른 죄과에 대해 사과하는것도 별일 아니겠네? 아님 그냥 친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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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식(everad****)2015.06.23 06: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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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윤님은 일제를 옹호하지도 또 친일도 아니다. 주관적이기 보다 객관적 안목, 감성적이기보다 이성적 판단과 행동이 중요함을 언급하였을 뿐.. 감성적, 주관적, 국수주의적 사고와 행동으로는 왜를 이길 수 없음이 자명하다. 왜가 저지른, 그리고 아직도 보배처럼 떠받드는 약점이 바로 그 세가지이기 때문이다. 반세기전 그 세가지 오류를 용감히 내밀다보니 왜가 망하지 않았나~! 우리가 이를 답습해서야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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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事変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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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事変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乙未事変
Le Journal illustre Korean queen assassination.png
各種表記
ハングル을미사변
漢字乙未事變
発音ウルミサビョン
日本語読み:いつびじへん
ローマ字転写:
英語
Eulmi sabyeon
Eulmi Inc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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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未事変(いつびじへん)は、李氏朝鮮の第26代国王・高宗の王妃であった明成皇后(閔妃)が1895年10月8日三浦梧楼らの計画に基づいて王宮に乱入した日本公使館守備隊[1]、公使館警察官、日本人壮士(大陸浪人)ら日本人、朝鮮親衛隊・朝鮮訓練隊・朝鮮警務使、高宗の父である興宣大院君派ら反明成皇后朝鮮人の共同で暗殺された事件。閔妃暗殺事件(びんひあんさつじけん)ともいう[2]

真霊君心酔による国政壟断・散財への朝鮮内部からの批判、大院君派との暗殺合戦まで至っていた深い対立、親露派となったことへの日本側の警戒、様々な思惑が一致した末に実行されたため、死後に興宣大院君による平民への身分格下げ措置と日本側による身分回帰措置などで反明成皇后政権同士でも対応に乱れが生じたものの、実行者の一人である禹範善暗殺事件・暗殺犯への減刑措置を持って当時は日本政府・朝鮮王族側で決着とされた[3][4][5]。王妃への評価が異なるため、事変を主導した興宣大院君と息子の高宗間の断絶が決定的となった[6]

概要[編集]

朝鮮王高宗の父大院君
岡本柳之助

1894年3月28日、閔氏政権によって開化派の中心人物金玉均が閔妃の刺客である洪鐘宇回転式拳銃に暗殺された。そして5月31日、閔氏政権に不満をもつ農民が蜂起し、甲午農民戦争が勃発した。農民軍は全州を占領したが、統治能力を失った閔氏政権は宗主国に軍の出動を要請。清の軍隊が朝鮮半島に駐留することを嫌った日本政府は、日本も朝鮮へ出兵することを決定した。閔氏政権が農民に譲歩するかたち(全州和約)で戦争は6月にいったん沈静化した。そのあいだ日本は閔氏政権に内政改革を求めたが、受け入れられず、日清戦争開戦を2日後にひかえた1894年7月23日、日本軍は景福宮を占領した。日本は閔氏政権と対立していた興宣大院君(高宗の父)の復権を行い、開化派金弘集政権を誕生させた。金弘集政権は日本の支援のもと、甲午改革を進めた。日清戦争は日本が勝利し、1895年4月17日、下関条約が締結された。その結果、朝鮮は清からの独立を果たしたが、三国干渉によって日本の影響力が後退すると、甲午改革によって政権を追われていた閔妃とその一族はロシア公使カール・イバノビッチ・ヴェーバーとロシア軍の力を借りてクーデターを行い、1895年7月6日に政権を奪回した[7]下関条約からまだ3か月も経過していなかった。

日清戦争直後にロシア軍の力を背景に行った閔妃勢力のクーデターは、大院君や開化派勢力、日本との対立を決定的にした。こうした中で、日本公使三浦梧楼・軍事顧問岡本柳之助らは前年の王宮占領の再現を狙って、親露派の閔妃を排除するクーデターを実行することにしたとされる[7]が、一方で大院君が軍事顧問岡本柳之助に再三に渡り密使を送っていたことや[8]10月6日に訓練隊を解散し隊長を厳罰に処すとする詮議がなされたことが漏れ伝わったこと[9]で激昂した訓練隊は大院君を奉じ決起することとなった[9]という一次資料も存在している。ただしこの訓練隊の訓練は日本の指導であった事を三浦公使は述べており、その解散を告げられた時三浦公使の頭に、時期が切迫し一日も猶予を許さぬ、という考えが閃いたのだという[10]

1895年10月8日午前3時、日本公使館守備隊・公使館警察官・日本人壮士(大陸浪人)、朝鮮親衛隊・朝鮮訓練隊・朝鮮警務使が景福宮に突入、騒ぎの中で閔妃は斬り殺され、遺体は焼却された[3][4][7]。この時、三浦らは大院君をかつぎだすため、屋敷から王宮へ参内させたが大院君がのらりくらりと時間を引き延ばしたため、事の露見を防ぐために夜明け前に行うはずだった作戦は破綻したとする説もある[11]

なお、日本公使館守備隊は鎮静化のため王宮の警備を行った[9]、侍衛隊と訓練隊との衝突は軽微なものとなった[9]、大院君の護衛に日本人が参加することなどについて三浦梧楼は黙認した[12]などとする日本側の記録もある。

事件の背景と性格[編集]

日清戦争が終わると、日本とロシアが朝鮮半島の支配権を争うことになった[13]。日本側は大院君に接近し、これに対して閔妃は、日本人の影響下にあった訓練隊を解散しロシアの教官による侍衛隊に置き換えようとしたので日本公使館は危機感をもっていたのである[14]

興宣大院君と閔妃の深い対立

事件の背景には、興宣大院君と閔妃の権力闘争(大院君が閔氏一族によって摂政の座を追われた1873年の最初の失脚以来、20年以上にわたって凄惨な権力闘争を繰りひろげていた)、改革派(開化派)と守旧派(事大党)の路線闘争、さらに朝鮮半島をめぐる日本の安全保障問題、日本との覇権争い、日清戦争後の日本とロシア帝国の覇権争いがあった。そのため、日本公使三浦梧楼らの主導による親露派の閔妃を排除するためのクーデターとする説が日本における歴史研究のほとんどで採用されているとの見解があり[15]、歴史事典の多くがこの説を明記している[3][4]

朝鮮側の関与については、朝鮮王室内部クーデターに見せかける意図で興宣大院君や朝鮮の訓練隊が利用されたとする説[7][16]の他、朝鮮側が首謀しているとする説や決定的証拠がなく不明とする見解が存在している[17][18][19][20]#朝鮮政府内部首謀説参照)。

事件直後に行われた朝鮮国内の裁判では、興宣大院君を事件の首謀者とする朝鮮王朝内の権力闘争としての判決が出ている[21]

日本政府の対応[編集]

駐朝鮮公使三浦梧楼

10月10日、日本政府は実情調査のため小村寿太郎外務省政務局長を京城に派遣。三浦は10月24日に免官処分が下され、小村が後任となった。また特派大使として井上馨が京城に派遣された[22]

三浦をはじめ事件に関与した容疑のある外交官、軍人らには帰朝命令が、日本人民間人には退韓が命ぜられた。軍人8人は第五師団の軍法会議にかけられ、三浦ら48名は謀殺罪等で起訴され、広島監獄未決に収監されたが[22]、首謀と殺害に関して[18]は証拠不十分で免訴となり、釈放された[23]

日本国内における裁判にあたっては、朝鮮政府(金弘集政権)が事件は朝鮮政府内部のもので大院君に責任があるとし[24]、その内容で決着をさせようとする朝鮮政府(金弘集政権)からの意向が日本へ伝えられていた[25]

事件発生時、京城領事館一等領事であった内田定槌は外務次官の原敬宛に事件関連の私信8通を送っており、閔妃を殺害したのが朝鮮人守備隊の陸軍少尉であること(10月8日付)、「若し之を隠蔽せざるときは、我国の為め由々敷大事件と相成」ため事件への日本人の関与を隠蔽する工作を行っていること(10月11日付)を報告している[26]

また、後に与謝野晶子の夫となる与謝野鉄幹も加わっていたとされたが、当日に木浦で釣りをしていたアリバイがあったとして、広島地裁検事局は免訴とした。

朝鮮政府の対応[編集]

朝鮮では閔妃暗殺の2日後(10月10日)、閔妃の死亡が一般に公表される前に大院君が閔妃の王后の地位を剥奪し、平民に落とす詔勅が公布される[27]。なおこの時、閔妃の死亡はまだ公表されていない(その後、小村壽太郎の助言もあり、11月26日に再び王后閔氏に復位している[24])。

朝鮮の裁判では、「王妃殺害を今回計画したのは、私です」と証言した李周会(前軍部協弁=次官)をはじめ、朴銑(日本公使館通訳)・尹錫禹(親衛隊副尉)[21]の3人とその家族を三浦らの公判中の同年10月19日に処刑した[28]

高宗は露館播遷後に事件についての再調査を実施し、事件が日本人士官の指揮によるものであること、日本人壮士らによって閔妃が殺害されたこと、「朝鮮人の逆賊」が日本人を補助していたことなどを調査結果としてまとめ、ソウルで発行されていた英文雑誌に掲載した[29]

史料によると高宗と純宗は殺害現場にいたことが記録されている[30]

高宗は1906年、韓国統監代理長谷川好道を謁見した際に「我臣僚中不逞の徒」(私の部下の中に犯人が居た)と述べており[31]、また、ロシア公使館から閔妃暗殺事件の容疑で特赦になった趙羲淵(当時軍部大臣)[32]禹範善(訓錬隊第二大隊長)・李斗璜(訓錬隊第一大隊長)・李軫鎬(親衛第二大隊長)・李範来(訓錬隊副隊長)・権濚鎮(当時警務使)の6名について、「王妃を殺害した張本人である」として処刑を勅命で命じている[33][34]

殺害現場にいた純宗は、「乙未事件ニ際シ、現ニ朕ガ目撃セシ国母ノ仇」と禹範善が「国母ノ仇」であることを目撃したと報告しており、また禹範善自身も「禹ハ旧年王妃ヲ弑セシハ自己ナリトノ意ヲ漏セリ」と自らが閔妃を殺害したと自白している[35]。禹範善は、純宗が放ったとされる刺客の高永根と魯允明によって広島県呉市において1903年(明治36年)11月24日暗殺され[36]、1907年2月4日、広島控訴院で高永根は無期、魯允明は12年の刑が言い渡された。同年に統監府は趙羲淵以下6名を特赦することを決定したが、その際、純宗は「閔妃殺害の犯人である禹を殺した高永根を特赦すれば、乙未事件はここで初めて解決し、両国間数年の疑団も氷解する」として高永根も特赦するよう要求している[35]

事件の首謀者・関係者[編集]

実際の暗殺の首謀者や実行者は誰であったかについては複数の学説が存在しているものの、日本における歴史研究のほとんどでは三浦梧楼らの計画に発し、その指揮によるものとする[15][3][4][7][16]。堀幸雄は、「玄洋社、関東自由党、熊本神風連の子弟ら50人が安達謙蔵を部隊長に王宮に乱入し閔妃を殺害したのである。」と書いている[37]

事件当時、在朝鮮日本公使館一等書記官であった杉村濬は、回顧録『明治廿七八年在韓苦心録』(1904年)で自らが「計画者の中心」であると述べ、閔妃を中心とする親露派を排除するため大院君や訓練隊を利用したクーデターであったと告白している[16]。また裁判では「手段は前年7月の王宮占領に比べ、はるかに穏和で、前年の挙を政府は是認している以上は、後任公使がこれにならって行った今回の挙もこれを責めることはできない」との内容の供述を行って[38]いる[39]

当時外務省領事官補だった堀口九萬一が事件翌日の1895年10月9日に送った書簡が2021年に発見され、その書簡には、「(王宮への)進入は予の担任たり。塀を越え(中略)、漸く奥御殿に達し、王妃を弑し申候」と書かれていることがわかった[40]。事件後の広島裁判で堀口九萬一は無罪となり、外交官に復職し、諸国に赴任した[41]

日本政府が直接関与したかについては否定的な見方が多く、秦郁彦は日本政府の関与については「証拠不足」との見解を示している[42]。背後関係について言及した近年の学説では、崔文衛による前任の公使であった井上馨の主謀論[43]金文子による井上が「更迭」され、後任として三浦が川上操六ら大本営の意を受けて送り込まれたとの説[44]がある。なお、事件当時における見方としては内田定槌が原敬に宛てた私信(前述)があり、政府の意思ではないだろう(「我政府の内意に出でたるものにあらざるべし」)が、前年の王宮占領と同様に政府が追認する可能性があるため処分について当惑していると記されている(10月19日付)[26]

福澤諭吉関与説[編集]

安川寿之輔金文子は、「閔妃は、微妙なバランス感覚による外交政策を得意にしていたが、日本では事件後ことさら閔妃を誹謗し、事件を閔妃と大院君との権力闘争の帰結として面白おかしく描くような言説が流布されたとし、そうした情報操作には福澤諭吉の関与があった」と主張している[45][46][47]

朝鮮政府内部首謀説[編集]

事件直後に朝鮮政府は朝鮮国内で行った裁判で興宣大院君(高宗の父)の首謀とする判決が出たことや[21]、朝鮮人実行犯の証言等から、事件の首謀者を大院君とする見解は根強く[17]、また閔氏一族の横暴や怨嗟の声が国中に満ちていることを憂慮していた朝鮮人らが積極的に参加していたとの見解や[48][19]、決定的な証拠がないため不明とし、実行犯が日本人か朝鮮人かを巡って、小説やノンフィクション、テレビドラマなどで現在でも様々な意見や主張が出されているとも言われる[20]

金弘集政権は事件後、大院君に責任があるとし、大院君を宮闕外に退かせること、王妃を復位すること、関係者を処罰することが重要であるとして、これを内閣に提出している。兪吉濬によれば、これは大院君にすべての責任を負わせて、政権が責任を免れようとしていたものとし[24]、その一方で兪吉浚はアメリカ人牧師モールスに送った手紙に、「大院君が日本公使館に頻繁に出入りして、閔妃殺害を日本に要請したのは大きな間違いだ」と書いていた記録が残っている[49]

『日本と韓国』の著者であり、終戦時には全羅南道の知事であった八木信雄は、閔氏政権が訓練隊を解散させようとし、事件前日の10月7日に解散通告をしてきたため、訓練隊の幹部が閔妃勢力との決闘を決意し、閔妃の政敵である大院君の力を借りて事を進めようとしたが、これを知った三浦が岡本を大院君のところへ送り、共にクーデターを決行しようという密約を結んだと述べている。また、事件直後の内田定槌による報告では「今回の事変は全く大院君及三浦公使の計画に基きたるもの」と両者の計画であったしており[50]、これらの報告に沿って、日本国内における裁判では三浦と大院君との密約が事実として述べられている[18]。しかし、三浦は事件直後に「何か特約でもあったことか」と明治天皇の言葉を伝えた侍従・米田虎雄に対して「(大院君は)唯自分の言ひなり次第になった訳で、約束も何もない」と答えたと晩年に回想している[51]

他にも大院君が事件に強く関わっていたとする次のような言及がある。

19世紀末にロシア人ゲ・デ・チャガイが編集した『朝鮮旅行記』の『1895年-1896年の南朝鮮旅行』の章に、ロシア参謀本部のカルネイェフ中佐が「1895年11月26日に実行された王妃暗殺では、間違いなく大院君がかなりの役割を演じていた」と発言していたことが記述されている。韓国の独立運動家にして大韓民国臨時政府第2代大統領だった朴恩植も閔妃暗殺犯を興宣大院君だと指摘した[17]

目撃者[編集]

純宗・高宗ら王族[編集]

息子である純宗禹範善が「国母ノ仇」であるとし、それを現場で目撃したと証言している。禹も自分が王妃を殺害したと自ら漏らしたとされる[52]。また現場にいた高宗は「我臣僚中不逞の徒」(私の部下の中に犯人が居た)と述べている[31]。1907年にも、純宗は明成皇后殺害の犯人である禹を暗殺した犯人らを特赦すれば、乙未事件することで決し、両国間数年の疑団も氷解するとし、反明成皇后派の興宣大院君死亡していたため、減刑措置が和解案として実行されている[5]

外国人[編集]

景福宮の警護にあたっていた侍衛隊の教官はアメリカ人将軍のウィリアム・ダイWilliam McEntyre Dye)で、ロシア人御用技師アレクセイ・セレディン=サバチン(Алексей Середин-Cабатин)とともに事件を直接目撃した。この経緯についてはイザベラ・バードの『朝鮮紀行』に詳述されている[53]

事件後と影響[編集]

露館播遷[編集]

事件後、ロシアはソウルに水兵100名を上陸させ、日本と諸外国の緊張が高まる中、ダイらアメリカ兵、ロシア代理公使ヴェーベルも関与したカウンタークーデター事件春生門事件が発生。翌年に高宗がロシア大使館で政務を行うようになる露館播遷へとつながっていく。

大院君と高宗の決定的亀裂[編集]

この事件を期に、殺害に関与した興宣大院君と高宗の親子間の亀裂は決定的となり、興宣大院君は失脚した。高宗は3年後(1898年)に興宣大院君が亡くなった際に略式の葬儀しか行わず、高宗自身は父親である興宣大院の葬儀に参列さえしなかった[6]

日本側実行犯」の子孫の謝罪[編集]

2004年に熊本出身の元教師ら20人によって「明成皇后を考える会」が結成された。同会は、日本側実行犯の後裔を捜し出して関連記録を調査、殺害事件の真相究明を目的としている会であるという[54]。同会が2005年に行った謝罪行は、日本のドキュメンタリー番組『テレメンタリー』で「114年目の氷解〜反日感情の原点、閔妃暗殺を見つめた5年〜」とのタイトルで放送された。

2005年5月10日、事件のドキュメンタリーを制作しているプロデューサーのチョン・スウンの要請で、「明成皇后を考える会」の会員10人とともに日本側の実行犯とされる家入嘉吉、国友重章の子孫が入国し、皇后が埋葬されている洪陵を訪れ、土下座[55]して謝罪をしている姿を韓国の報道機関が伝えた。墓地を訪れていた閔妃の曾孫と面会したが、謝罪の言葉を受けた閔妃の曾孫は「謝罪を受ける、受けないは、自分がすることではない。政府レベルの謝罪がなければならない」と語った[56]

このドキュメンタリー番組では「犯人は日本人」としており、「暗殺事件の犯人は朝鮮人によるものであった」という国王・高宗や王子・純宗などの証言を日本の工作とした。

犯行に使用されたとみられる凶器の市民団体の返還要求[編集]

2010年3月、安重根の100年目の命日である2010年3月26日に曹渓宗中央信徒会と文化財返還事業を行う市民団体により[57]発足した韓国の市民団体「肥前刀還収委員会」(崔鳳泰弁護士、ヘムン僧侶)が櫛田神社に対して、玄洋社藤勝顕が1908年に奉納した肥前刀を、韓国に差し出すか、処分するかを要求した[58]。委員会によれば、刀のさやには「一瞬電光刺老狐」と記され、また、神社には皇后をこの刀で切りつけた旨を記した文書が保管されているとし、委員会は「犯人が皇后殺害にこの刀を使ったと自白したにもかかわらず、日本の神社に寄贈されたまま民間が所有しているのは法的に問題だ」と主張している[58]

脚注[編集]

[脚注の使い方]
  1. ^ 参謀本部が指揮を取る京城守備隊とは別の部隊であり、日本公使館が指揮を取る警備隊
  2. ^ 閔妃(びんひ)暗殺事件国立公文書館
  3. a b c d 外務省外交史料館日本外交史辞典編纂委員会 『新版 日本外交史辞典』、872,983頁。"三浦公使は杉村濬書記官、楠瀬幸彦公使館付武官、岡本柳之助朝鮮国軍部兼営内府願問官らと協議して、閔妃の政敵で京城郊外孔徳里に蟄居する大院君を擁して閔妃を倒し親日政権樹立を計画した。(中略)8日早朝、上記計画を決行した。訓練隊・日本軍守備隊・日本警察官・日本人新聞記者・壮士らを動員、大院君を擁して景福宮に入り、王宮護衛の侍衛隊を撃破し、閔妃を殺害、その死体を火葬した。"。
  4. a b c d 「日本公使三浦梧楼の指揮により日本軍人・大陸浪人らの手で閔妃が殺害された」(平凡社『世界大百科事典』)、「日本公使三浦梧楼の指揮により日本軍人・大陸浪人らは、反日派の中心人物と目された閔妃を、10月8日未明王宮内で殺害」(小学館『日本歴史大事典』)
  5. a b 「李朝滅亡」p58,片野次雄 · 1997年 「朝鮮王族も一枚岩でなく、双方の派で殺し合いまでしていたほど反明成皇后である興宣大院君、表立って父を批判出来ないが、明成皇后への身分下げ措置等には反対する高宗と純宗とに別れていた。1898年に大院君が死亡するとそれまで明成皇后と大院君の指示を受けていただけの高宗が実権を握るようになる。1903年に明成皇后殺害した朝鮮人の一人である禹範善が暗殺された。1907年8月31日付往電第31号によると、明成皇后の息子の純宗は明成皇后殺害の犯人である禹範善の暗殺犯らを特赦すれば、乙未事件はここで始めて解決し、両国間数年の疑団も氷解するとして主張していた。反明成皇后派の興宣大院君死亡していたため、双方で減刑措置が和解案となり、主犯は当初死刑判決だったものの、無期懲役で確定となり、無期にも関わらず5年間の懲役で朝鮮半島に返される措置を受けている。」
  6. a b 朝鮮王朝実録 高宗35年2月22日以降を参照
  7. a b c d e 山田朗『世界史の中の日露戦争』(戦争の日本史20)2009年、吉川弘文館p.38,p.39
  8. ^ p492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第28巻第1冊(明治28年/1895年)
  9. a b c d p491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第28巻第1冊(明治28年/1895年)
  10. ^ 黒竜会 編『東亜先覚志士記伝.上巻』昭和8-10、黒竜会出版部、p525、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dl.ndl.go.jp/view/jpegOutput?itemId=info%3Andljp%2Fpid%2F1242345&contentNo=296&outputScale=4
  11. ^ 金文子『朝鮮王妃殺害と日本人』2009年高文研、p.305-p.308
  12. ^ p493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第28巻第1冊(明治28年/1895年)
  13. ^ 堀幸雄『戦前の国家主義運動史』p24
  14. ^ 堀幸雄『戦前の国家主義運動史』p24-p25
  15. a b 小松裕 『「いのち」と帝国日本(全集日本の歴史 第14巻)』小学館、2009年、240頁。"閔妃殺害事件に関するこれまでの研究史を見ると、ほとんどが三浦梧楼首謀説をとっている。"。
  16. a b c 金文子『朝鮮王妃殺害と日本人』2009年高文研、p.86,p.87
  17. a b c 鄭容和, <文明の 政治思想: 兪吉浚の 近代韓國(문명과 정치사상:유길준과 근대한국)> (文学と知性社, 2004) 93
  18. a b c 日韓外交史料 第五巻 韓国王妃殺害事件 市川正明編 原書房刊 文書番号353
  19. a b 中村粲 『大東亜戦争への道』展転社、1991年、70頁。ISBN 4-88656-062-8
  20. a b 2010年2月12日『毎日新聞』
  21. a b c GK17289_00I0006韓国官報 資料請求番号 奎17289 GK17289_00I0006 開國五百年十一月十四日  號外 1. 裁判宣告書 http://e-kyujanggak.snu.ac.kr/GAN/GAN_SEOJILST.jsp?ptype=list&subtype=02&lclass=17289&mclass=&xmlfilename=GK17289_00I0006_0015.xml http://147.46.103.182/OIS/GAN/VIEWER.jsp?xmlfilename=GK17289_00I0006_0015&tablename=KYS_GAN_N_TBL
  22. a b 外務省外交史料館日本外交史辞典編纂委員会『新版 日本外交史辞典』P872,P983
  23. ^ 新聞集成 明治編年史 第九巻 日清戦争期 時事 1986年1月23日記事
  24. a b c 1895年(明治28年)12月28日付『機密発第98号』
  25. ^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十月八日王城事変ニ関スル犯罪人処分方ニ付朝鮮政府部内ノ意向」レファレンスコードB08090168700 明治28年12月26日付機密第53号
  26. a b 『原敬関係文書』第1巻
  27. ^ 『高宗実録 乙未(三十二)年八月二十二日』
  28. ^ 高宗は露館播遷後に朴銑、尹錫禹に関しては無罪として、補償金200円を出している(閣議決定案 第317号 1896年 4月 25日 第317号)。 別紙로 法部大臣이 청의한 朴銑의 伸冤과 尹錫禹의 褒贈과 그 恤金에 관한 건은 朴銑은 무고하므로 伸冤이 가하고, 尹錫禹는 무고에 의한 것으로 그 官을 복귀하고 褒贈과 恤金은 内閣總理大臣이 별도 供議하기로 결정됨이 가함. 朴銑의 伸冤과 尹錫禹의 褒恤 건은 각의 결정한 취지가 있어, 尹錫禹의 恤金은 200元으로 그 유족에게 下付하고 復官 후 貤贈之典은 上裁를 삼가 청하므로 각의에 供함
  29. ^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朝鮮事変ノ公報ト称スル書類ニ関シ京城駐在一等領事内田定槌ヨリ報告ノ件」レファレンスコードA04010025000 明治29年5月19日付公信第98号
  30. ^ 『機密第36号』、『機密第51号』及び『附属地図』
  31. a b 1906年 統監代理長谷川好道韓皇謁見始末報告 顧れば今を距る十二年、我国独立問題の為日清干戈を交へ、其結果日本の勝利に帰し、我国独立の基礎を確立するに至りしは、我国民の日本に向て深く感謝する所なり。然るに、不幸にも中頃王妃殂落事件の生ずるあり。夫れ此事たる、勿論我臣僚中不逞の徒、之を行ひたるも、其背後に日本の勢力を恃んで此に出たるが故に、国民の感情、自然融和を欠き、日韓両国の情誼稍々阻隔を致すに致りて、又止を得ざりし次第なり。最近に及び、露国の勢力漸進し来りて、我国の独立を危くせんとするに当り、日本は再び戈を執って之と交戦し、結局其勝利に帰し、東洋の平和を克服するに至りしは、之亦我国に於て多大の謝意を表する所なり。
  32. ^ 高宗実録 34卷, 33年(1896 丙申 / 대한 건양 (建陽)1年) 2月 11日(陽暦) 3번째기사
  33. ^ 電受第75号 「1. 明治29年2月12日から明治29年2月20日(韓国王露公使館ヘ播遷関係一件)」レファレンスコードB03050313400
  34. ^ 高宗実録 34卷, 33年(1896 丙申 / 대한 건양 (建陽)1年) 2月 11日(陽暦) 6번째기사
  35. a b 1907年8月31日付・往電第31号
  36. ^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在本邦韓国亡命者禹範善同国人高永根魯允明等ニ於テ殺害一件』
  37. ^ 堀幸雄『戦前の国家主義運動史』p24-25
  38. ^ 伊藤博文/編「秘書類纂 朝鮮交渉史 中」p.526-p.535(1970年に原書房より復刻)
  39. ^ 原田敬一『日清・日露戦争』(岩波新書)
  40. ^ 永井靖二. “外交官「王妃殺した」と手紙に 126年前の閔妃暗殺事件で新資料:朝日新聞デジタル” (日本語). 朝日新聞デジタル2022年2月8日閲覧。
  41. ^ 松村正義 (2010年). “決断の時・知られざる外交官の舞台 第2回「中南米との文化外交に尽力した堀口九萬一 『外交』Vol.2 (PDF)”. 外務省. 2022年2月8日閲覧。
  42. ^ 朝鮮の皇后・閔妃殺害事件 日本政府高官の手紙見つかる - 朝日新聞2008年6月28日付
  43. ^ 崔文衛『閔妃は誰に殺されたのか』彩流社、2004年
  44. ^ 金文子『朝鮮王妃殺害と日本人』2009年高文研、p.98-p.141,p.358,p.359
  45. ^ 安川寿之輔『福沢諭吉のアジア認識』2000年高文研、p.193
  46. ^ 金文子『朝鮮王妃殺害と日本人』2009年高文研、p.345
  47. ^ ただし、福澤諭吉のものとされる「国家主義」「侵略主義」「アジア蔑視」的な論説が、実際は弟子の石河幹明の手によるものだったとする研究もある。詳細は福沢諭吉の真実を参照のこと。
  48. ^ 名越二荒之助 『日韓共鳴二千年史 : これを読めば韓国も日本も好きになる』明成社、2002年、180-181頁。ISBN 4-944219-11-3
  49. ^ 鄭容和, <文明の 政治思想: 兪吉浚の 近代韓國(문명과 정치사상:유길준과 근대한국)> (文学と知性社, 2004) 93
  50. ^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明治廿八年十月八日朝鮮王城事変之報告」レファレンスコードB08090168300 明治28年11月5日付機密第36号。
  51. ^ 『観樹将軍回顧録』
  52. ^ 1907年8月31日付・往電第31号
  53. ^ 「朝鮮紀行」(講談社学術文庫)p.353
  54. ^ 2005年5月9日 朝鮮日報
  55. ^ 同番組によると、「洪陵の前で地面に膝をついて3回お辞儀するのは韓国での仕来りなので、そうして欲しい。」と事前に伝えられていた。
  56. ^ “明成皇后殺人犯の子孫が謝罪”. 中央日報. (2005年5月10日)
  57. ^ 明成皇后殺害凶器「肥前刀」の還収委員会発足Wow Korea,2010/03/26 17:43配信YONHAPNEWS.
  58. a b 明成皇后殺害凶器の肥前刀、日本の神社に返還要求へ」2010.3.25 20:26,聯合ニュース

※なお、『高宗実録』は朝鮮総督府によって編修されたもので、編纂委員には事件の容疑者だった菊池謙譲の名もある。

参考文献[編集]

資料[編集]

  • 日本外交文書デジタルアーカイブ 第28巻第1冊(明治28年/1895年)
  • 近世朝鮮史 (林泰輔著)(早稲田大学出版部 近代デジタルライブラリー 国立国会図書館
  • 「朝鮮紀行―英国婦人の見た李朝末期」(イザベラ・バード (Isabella L. Bird) 著、時岡敬子訳、講談社学術文庫) ISBN 4061593404 
  • 「朝鮮奥地紀行」(イサベラ・バード著、朴尚得訳、平凡社東洋文庫全2巻、1994年) 
  • 「明治100年厳書 288巻 日韓外交史料5 閔妃殺害事件」 (市川正明編、原書房)
  • 有馬頼寧関係文書目録」 国立国会図書館専門資料部 (1989/01) ASIN: 4875822294
  • 「朝鮮旅行記」 『1895―1896年の南朝鮮旅行』の章(ロシア参謀本部中佐カルネイェフ著、ゲ・デ・チャガイ編、井上紘一訳) ISBN 4582805477(平凡社東洋文庫)
  • 「朝鮮王妃事件関係資料」 国会図書館憲政資料室(憲政史編纂会編) マイクロフイルム 整理番号546
  • 「法制局参事官石塚英蔵傭聘ニ付朝鮮政府ヨリ依頼ノ件」朝鮮問題5(公信類) 陸奥宗光関係文書 国会図書館憲政資料室  資料番号 77-2
  • 「新聞集成明治編年史 第九巻 日清戦争」(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會編、財政経濟学会) 昭和33年  
  • The tragedy of Korea'' (Mackenzie, Frederick Arthur著、原書出版: London,Hodder and Stoughton 1908) LC Call Num: DS916 .M2.(邦訳:『朝鮮の悲劇』、訳注:渡部学、平凡社東洋文庫222)ISBN 4-256-80222-3.
  • 「近代外交回顧録(第5巻) 近代未刊史料叢書 (5) 」 (広瀬順晧著、ゆまに書房) ISBN 4897149908

研究[編集]

  • 金文子『朝鮮王妃殺害と日本人』2009年、高文研
  • 木村幹『高宗・閔妃』2007年、ミネルヴァ書房
  • 「閔妃暗殺―朝鮮王朝末期の国母」(角田房子著)ISBN 4101308047(新潮社のち新潮文庫)
  • 武田範之とその時代(滝沢誠著、三嶺書房) ISBN 491490649X
  • 「閔妃は誰に殺されたのか 見えざる日露戦争の序曲」(崔文衡著、彩流社) ISBN 4882028786

韓国[編集]

  • 「梅泉野録 近代朝鮮誌・韓末人間群像」(黄玹著、朴尚得訳、国書刊行会、1990)ISBN-10  : 4336031584
  • 「訳注梅泉野録」(黄玹著、朴尚得訳、文学と知性社 (mun-hak-kwa ji-seong-sa) 3巻) ISBN 89-320-1565-1
  • 강준만, 《韓国近代史散歩 1》 (인물과사상사, 2007)
  • 黄玹, 《梅泉野録》 (허경진 옮김, 한양출판사, 1995)
  • 朴殷植, 《韓國痛史》(김승일 역, 범우사. 1997)
  •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한국> (문학과지성사, 2004)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