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31

조선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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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0


금희와 은희의 운명 2부 (1974) - The Fate of Kum Hui and Un Hui -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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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part is available here/1부: https://www.youtube.com/watch?v=tYrR1CeTcys The classic North Korean movie from the 1970s shows a story of a divided twin baby girls. Both become dancers, Kum Hu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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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5

금희와 은희의 운명 1부 (1974) - The Fate of Kum Hui and Un Hui -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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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part is available here/2부: https://www.youtube.com/watch?v=gLGpIR3YA10&feature=youtu.be The classic North Korean movie from the 1970s shows a story of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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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희와 은희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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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희 | 2012.06.11 17:16:05댓글: 12 조회: 1841 추천: 4
http://bbs.moyiza.com/sympathy/1172628

어릴 쩍 딸랑 입장권 돈만 쥐고 이십여리 거리의 로두구까지 걸어서 조선 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을 본 적이 있다.코물 이리 씃고 저리 씃는 요 어린시절에도 눈물 똑똑 떨구며 울던 기억이 새롭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하여튼 동생 은희가 남조선에 팔려 가 갖은 고생을 하고...어른의 돼 기생집(지금은 뭐 노래방이라 하나?..)에서 노래부르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 하는 내용...그리고 금희는 인간의 락원(?)의 북조선에서 근심걱정없이 잘 살아가는 내용 .... 하여튼 이 시절에는 눈물 없이는 볼수 없었던 영화였다... ...
이 같은 운명은 현재 나의 주변에도 일어나고 있다.한 피줄의 삼형제 아재 형제들은 북조선.남조선 그리고 이 대륙(머...옛날엔 고구려라고도 햇다나...)에 나누어 살고 또한 그들이 처한 운명 눈물겹다... ...
나 어릴 때의 시절...그 당시엔 우리 연변사람들이 북조선으로 막 들어가고 들어오는 시기 였다고 한다. 나의 큰 아재도 그 당시 북조선에 진입...근데 갑자기 무슨 정책으로 국경선의 긴급봉쇄...하여 나의 이 아재는 이렇게 북조선에 버려져(?) 살기 돼였는데...그후 남매 대 여섯명 딸린 남자한테 시집가고...하여튼 자기 자식은 없고(불임증이 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 이렇게 남편공대 잘하고 요런 남매들을 코물 눈물 씻어주며 인젠 다 성가시키 보냈다는 얘긴데... ...그후 중국과의 관계의 온화.. 생계을 위한 발악... 보따리 달랑 들고 여기 연변에 와 형제,친척들이 내놓은 재봉침,라디오...하여튼 돈 되는 모든것을 꿍지고 지고 ...이렇게 여러해 여러번 왔다갔다 하는 발악에 그래도 늙으막에 거기서는 먹고 입는 문제을 기본상 해결한다는 내용...헌데 문제는 그의 늙그막의 운명이 였다...재산 탐욕에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자식들이 늙고 병든 자기 아버지가 죽자 ...얼마후 지붕 뚫고 친입...있는 재산(?)을 다 털어가는 망극을 벌였다는 현실이 였단다...마지막 ...중국의 조카한테...미국돈 1딸라만 보내달라 하고 애원에 가까운 처절한 목소리 한번 남기고...종무소식... 인젠 생사도 알수 없는 현실...아..아 아재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 .... 한국과의 무드가 좋아지고 있던 시기...나의 둘 째 아재는 연변 어느 시골에서 남편잃고 어린 자식 키우며 농사일에 아득바득...많은 세월이가고...자식도 다 커가고...아무튼 ... 결국 한국결혼의 역사의 흐름에 오른다...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한다....언어의 장벽,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만 야유와 멸시,치욕을 밥먹듯 하여야만 하는 현실... ...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의 무관심과 질타...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독한(?) 마음은 식당,모델..도우미...하여튼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서슴치 않는다... ... 십여년이 지난 지금,먹고 입는 문제는 기본상 해결...그래도 여전히 모텔에서 힘겹게 늙은 몸을 이끌며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 만년에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안타까운 심정...이러한 심정은 이 넓다넓은 대륙이 국적이란 장벽으로 받아주지 않는단다...아...아....무심함이여..
... ... 나의 막내 아재...한국행도 막바지에 오르내리는 시기... 힘겨운 가난한 어느 연변시골에서 드디어 돈 되는 한국행에 오른다....오년간의 피와 눈물이 나는 노력...옛날보다 많히 나은 한국인의 편견이라지만...그래도 갖은 천대와 멸시.치욕을 받으며...그래도 늙그막 생활이 보장되는 생활의 여유가 있게 됐다는 현실.... 참으로 운명이란 ....

... ...노력해도, 발악해도 개변되지 안되는것이 타고난 팔자,운명이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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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57) - 2012/06/11 18:09:28

노력해도 발악해도 개변 되지 않지만 거기서 멈추면 않되겟죠
화이팅

(♡.26.♡.168) - 2012/06/11 18:10:07

음~~~~~~~아~~~~~~안타깝군요!

부자되자e (♡.10.♡.74) - 2012/06/11 21:06:42

좋은글 이네요~
마음이 무거워 지네요~

(♡.136.♡.113) - 2012/06/11 21:21:29

금희와 은희의 운명을 보면서
저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갑자기 어버지가 잠든
쌍둥이딸들을 바라보면서
불러주었던 자장가가 생각나네요~~

잠자거라 아가야~
내사랑 아가야.....

나루희 (♡.245.♡.116) - 2012/06/11 21:28:02

...그렇네요...잠 잘 자거라 ..아가야...눈물이 당그랑... ...잠 잘 자는 세상이 어디에 잇으며 어떻게 하면 잠 잘자는 아가들을 볼수 잇을고?...

빛바랜 (♡.238.♡.91) - 2012/06/11 21:51:52

양애리 생각이 막연이 떠올라서...
공감가시는분들 제밑에 덧글 좀... ㅋㅋ

(♡.136.♡.113) - 2012/06/11 22:09:58

양애리 ?ㅎㅎ
님은 제사엔 관심이 없고
제밥에만 눈길이 가시나봐여~ㅎㅎㅎ

빛바랜 (♡.238.♡.91) - 2012/06/11 22:45:20

하두 인상있는 유저라서 ㅎㅎㅎ

정글법칙 (♡.212.♡.38) - 2012/06/11 22:31:17

현대판 금희와 은희의 운명이네 휴~ 불쌍한 ...
일블만 보내달라는 말에 뭉클해나네여
어떻게 중국들어오지 조카들이 있다는데

가을속동화 (♡.245.♡.208) - 2012/06/12 11:15:51

좋은 글이였네요, 뭐라 더 말하수도 없고, 그냥 생각에만 잠기게 되네요

(♡.93.♡.139) - 2012/06/12 14:41:06

안타깝습니다. 북조선에 잇는 동포들이~~~

나루희 (♡.161.♡.92) - 2012/06/13 17:25:09

...잃어버린 기억에 소중한 충언올시다...하도 어릴 쩍 보았던 기억이라...참 기억력이 대단하십니다...괜찮다면 다시 그 줄거리를 듣고 싶습니다...ㅎㅎ 그리고...술책은 ...아니고 아재들이 운명이 그래갔고...또한 전 제목에 그다지 신경 안씀니다...그저 생각 가는대로 그래로 즉시 써버리는 습관이 있어서...충고 고맙게 승인합니다... 뭐...대상타는 작품도 아니고 이지간 하도 심심하고 지-랄이 나여 이런데 잘 들림니다...누구한데 바란것이 (리풀...등..) 없고 그저 저의 생각과 판단에 의존하는 데면데면하는 사나이로 받아 들여 주소서...ㅎㅎㅎ 좋은 하루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화이팅..!!

백선엽 회고록의 숙군 당시 박정희 구명에 관한 서술



23시 59분의 잉여로운 잡담실: 백선엽 회고록의 숙군 당시 박정희 구명에 관한 서술




백선엽 회고록의 숙군 당시 박정희 구명에 관한 서술

백선엽의 회고록은 여러 차례 출간된 바 있습니다. 백선엽 회고록의 사료적인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창군 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백선엽의 회고는 내용이 풍부한데다 백선엽의 지위 때문에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회고록이 여러 차례 나오다 보니 어떤 부분에서는 서술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숙군당시 체포된 박정희가 구제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는 2009년 시대정신에서 간행한 『군과 나』와 2012년 책밭에서 간행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에 실린 내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한편 숙군 과정에서 중형이 선고된 군인 중 유일하게 구제된 경우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박정희 소령이었다. 방첩대 수사반은 남로당 군사책 이재복李在福이 육군사관학교에 조직을 침투시켜 일부 중대장을 통해 생도들까지 좌익 활동에 가담시킨 사실을 포착했다. 이 수사에서 용의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된 사람이 육사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했었고, 당시 육본 작전교육국 과장이던 박 소령이었다.

숙군 1단계 작업이 완결될 즈음인 1949년 초 어느 날, 방첩대 김안일 소령(준장 예편ㆍ육사)이 나에게 “박 소령이 국장님을 뵙고 꼭 할말이 있다고 간청하고 있으니 면담을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박 소령이 조사 과정에서 군내 침투 좌익 조직을 수사하는데 적극 협조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사실 사관학교 등 군내 좌익 조직 수사는 최초 단서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었다.

나는 면담을 승낙했다. 당시 내 사무실은 국방부와 방첩대 두 곳에 있었다. 내가 박 소령을 만난 곳은 명동 구 증권거래소 건물 3층 정보국장실이었다. 박 소령은 한참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한번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작업복 차림의 그는 초췌해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태도는 전혀 비굴하지 않고 시종 의연한 자세였다. 평소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었으나 어려운 처지에서도 침착한 그의 태도가 일순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였을까.

“도와드리지요.”

참으로 무심결에 내 입에서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약 20분간 면담을 마치고 그를 돌려보냈다. 나는 일단 내 입으로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숙군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도 간여하고 있었다. 나는 정보국 고문관 리드 대위로 하여금 참모총장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와 로버츠 준장에게 박 소령 구명에 관해 양해를 구했다. 동시에 육군본부에 재심사를 요청했다. 육본은 참모회의를 거쳐 형집행정지를 내렸고, 박 소령을 불명예 제대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백선엽, 『군과 나』(시대정신, 2010), 416~417쪽.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서 서술하는 내용은 약간 미묘하게 다릅니다.

박정희 소장, 그는 내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자주 머리에 떠올렸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 또한 나와는 함께 근무한 적이 없어 개인적인 관계만을 따지면 특히 걸릴게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순간 숙명처럼 내 앞에 다가온 적이 있다.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었으나, 나는 그가 나중에 5ㆍ16을 일으키고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그를 떠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만큼 그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군인은 아니었다.

그는 1948년 좌익 남로당의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아 숙군 작업에 걸려들었다. 단심인 군사재판에서 결국 무거운 혐의를 벗지 못해 사형을 판결 받고 말았다. 나는 당시 숙군작업을 모두 지휘하는 입장이었고, 그는 밧줄에 묶인 사형수로서 지금의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 지하 감방에 갇혀 있었다.

나는 이전에 내가 펴낸 회고록에서 이를 자세히 서술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한다. 1949년 1월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군 생활을 하면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어 그의 얼굴을 나는 기억했다. 그는 수갑을 찬 상태였다. 그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정보국 방첩과 김안일 과장이 그 만남을 주선했다.

나는 숙군을 지휘하는 정보국장이어서 김안일 과장이 마지막으로 그의 동기생인 박정희의 구명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퇴근 무렵 내 사무실에 들어선 박정희 당시 소령은 구명을 위해 내 앞에 섰으나, 분위기는 매우 침착해 보였다. 그는 내가 먼저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권유에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다소 긴 침묵이 흐른 뒤 그는 “한 번 살려 주십시요...” 라면서 말끝을 흐리다가 눈물을 비치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이 어딘가 아주 애처로워 보였다. 당시 그의 혐의 자체는 무거웠으나 실제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한 흔적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숙군작업의 진행을 위해 솔직하게 남로당 군사 조직을 조사팀에게 제공해 개전의 여지를 보였다.

나는 그런 내력을 감안해 그의 구명 요청을 들은 뒤 “그럽시다. 한 번 그렇게 해 봅시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육군 최고 지도부에 그의 감형을 요청했고, 결국 그는 풀려나 목숨을 구했다. 나는 또 군복을 벗게 된 그의 생계를 염려해 정보국 안에 민간인 신분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 후 나는 정보국에 김종필을 비롯한 나중의 5ㆍ16 핵심 멤버를 이룬 육사 8기생 31명을 선발해 정보국에 배치했다. 역사의 우연이라면 큰 우연이다. 나는 꺼져가는 박정희의 생명을 붙잡았고, 결국 육사 8기생까지 선발해 그와 만나게 한 셈이었다.

백선엽,『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책밭, 2012), 124~125쪽.

뭔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서술입니다.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 실린 내용은 진영에 따라서 아주 재미있게 다룰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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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군사고문단, 남로당, 로버츠, 박정희, 백선엽, 숙군, 이재복, 하우스만, 한국군
위치 9:24 PM

15 comments:


이준님9:27 PM

보통 그런 경우는 후일의 회고가 더 신빙성이 있지 않나싶습니다. 아무래도 이전에는 박정희에 대한 신화적인게 어느 정도 있긴 하지만요.

어떨때 보면 후일의 회고가 더 신화에 가까울 경우도 있지만요

덧: 80년대초반이나 이런 비사(말 그대로 술집이나 대학가에서 하는류의)류에서 "박정희를 내가 구했다"는 사람이 줄을 섰던 걸 본다면 저 증언도 교차 검증이 있어야지요.

덧덧: 조갑제의 "박정희 술마실때 X 같은 새X" 설이라던가. 뭐 여러 이야기도 뒷판에서는 "그런거 없다"로 나간 걸 보면 어느 정도 가감은 해야할겁니다.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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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어린양10:21 PM

그렇지요. 특히 백선엽의 회고에서 왜 최근에 들어와 미묘한 변화가 생겼는지 확인해보려면 다른 자료를 찾아보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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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einhof9:45 PM

제가 가진 대륙연구소 출판부 판, 지구촌 판도 모두 전자와 같은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최신판에서만 바뀐 게 맞네요.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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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어린양10:19 PM

그렇군요. 저는 아직 다른 판본들을 다 교차검증하지 못했습니다.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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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gia10:28 PM

이거 굉장히 상반된 내용인데요, 백씨의 인간성을 보여주는게 아닐지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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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어린양3:48 PM

예. 차이를 보이는 내용이라서 왜 2012년에 나온 회고록에서는 기존의 회고록과 다른 내용이 나온 건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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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혁3:38 PM

2012년 책이건 그 이전 책이건 결국 대필작가가 쓴 책이고, 단지 백선엽 장군의 인터뷰에 임할 때의 대필작가의 독자 조사 수준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5사단장 시절 통비 마을 방화사건에 대해서도 이전 판본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했지만 뒤의 것은 가해자의 배후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내용이 많았죠...

다만, 이게 진짜 연구 결과인지 아니면 소설가적 역량 발휘 결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양자 모두 정치적 의도가 없지 않은 책이기도 했다는 것 역시 감안할 필요는 있겠죠. 전 후자 쪽을 좀 더 신뢰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사실 판본 전체에 걸쳐 소설 같아 보이는 부분이 많다는 게 굉장히 꺼림칙하거든요.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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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어린양9:03 PM

높은 양반들은 거의 대부분 대필작가를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은 대필자가 쓰더라도 원고를 검토하고 최종 승인을 내는 것은 본인이니 뭔가 의도가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꽤 민감한 문제라 백선엽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쓸데없이 날조를 하는건 위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윤민혁7:19 PM

뭐 개인적인 생각이니까요. 군과 나의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상 내용 차이나 그런 것도 백선엽 장군이 일일이 다 챙기셨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당대 독자들이 보고 싶어할 만한 걸 일부러 넣으려 하셨거나, 보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페이크를 쓰시지 않았나 할 때가 좀 있는 정도입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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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텐보로8:33 PM

박명림교수가 백선엽장군을 2010년에 인터뷰한걸 오늘 우연히 다시보게 됐는데 여기에 해당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전자와 똑같군요.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newsview?newsid=20100531080005373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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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어린양10:39 PM

예. 제가 궁금한건 1950년대 이후를 다루는 최근 회고록에서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숙군시기의 일화를 썼을까 하는 겁니다. 그것도 이전의 서술과는 조금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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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래10:25 PM

구글이 RSS 서비스를 버리겠다고 했을 때부터 블로그 피드에 신경을 안 썼더니 이런 흥미로운 글을 이제서야 보게 되네요.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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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어린양10:39 PM

예. 저도 구글 RSS만 쓰다가 그게 없어지니 꽤 불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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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coonsolo12:02 AM

당연히 알고 계시는 사실이겠지만
2009년 '군과 나'도 사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책이 재판된 것입니다.
즉 '박정희의 위광이 살아있던 시절'에 쓰인 것이라 봐야겠지요.
시대적 배경의 차이를 고려해서 봐야할 부분 아닌가 싶습니다.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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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어린양12:22 AM

『군과 나』는 노태우 시기에 처음 나왔습니다. 이 책의 출간은 성우회가 전두환때 해체되었다가 재건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박정희의 위광 문제를 지적하셨는데 박정희의 위광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군과 나』가 출간된 1989년 시점에서는 오히려 전두환 시기의 박정희 격하(?)의 영향이 훨씬 강했다고 봐야 겠지요.

그보다는 박정희, 또는 그 일가에 대한 백선엽 개인의 생각이 변화한게 더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여튼 왜 이런 서술의 차이가 생겼는가는 개인적인 의문입니다.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황교안, 국가 불행의 씨앗 '종북세력' 제거해야|종북, 사이비좌파2016.12.12 00:42:20

박정희 대통령 그리고 6.25의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까지도 친일파로 몰아가는 억지주장에서도 확인됩니다. ▲ 11월 12일 박근혜 대통령 하야 요구 집회에는 '붉은...지에 온 국민들의 관심이 지향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최근의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논란에서 비롯되었던 문제인 대통령 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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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김광진: '國監 최우수 의원상' 받은 '민족문제연구소' 출신 정치인|김필재기자2013.05.21 09:21:07

2012년 10월19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관진 국방장관에게 백선엽 장군 관련 뮤지컬 제작을 국방부가 지원하고자 예산 반영을 추진하기로 한 사실을...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 소위로 임관했다는 점이다. 白 장군은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 소위로 임관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혔고, 당시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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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영웅 백선엽 “NLL은 휴전때 그은 평화선, 北도 인정… 목숨걸고 지켜야”|자주국방2012.12.26 09:30:49

회고하며…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최고사령관과 대화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가리키고 있다. 1951년 2월 맥아더 사령관이 수원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모습이다. 이때 백 장군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말한 ‘우리 같이 갑시다(We go together)’는 이후 한미동맹을 상징하는 표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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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엔 아직도 종북좌익이 학생회장?|종북, 사이비좌파2012.10.28 07:41:22

전설, 백선엽 장군을 “친일민족반역자”라고 불렀다고 온 나라가 야단법석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남동부지부 사무국장을 맡았었다는 31살짜리 민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그 젖 비린내 나는 아이가 내지른 소리는 그저 철없는 인간의 미친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빨갱이 사상으로 정신이 병든 인간 망나니의 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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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軍 元老에게 막말해야 민주당 훈장 타나|종북, 사이비좌파2012.10.27 07:45:46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김 의원은 지난 19일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에서 백선엽(92) 장군을 '민족 반역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백 장군은 우리 군은 물론 미군...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 소위로 근무했던 사실이다. 백 장군은 이미 회고록에서 이 사실을 밝혔고 자신이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주장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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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측, '반역자' 언급에 "역사도 모르는…"|구국기도2012.10.26 09:30:00

같이 하는 지 분명히 밝히고, 그를 비례대표로 선정한 책임을 지고 백선엽 장군에게 즉각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6·25 전쟁 당시 구국의 영웅을 '민족...토벌한 바가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강조했다. 백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독립군이 아니라 중공 팔로군을 격퇴하는 데 주로 활동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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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벤처 영웅' "韓모바일 성공요인은…" / 풋내기 민통당의원의...|적폐,관피아,국가 부정부패2012.10.24 08:48:38

바치겠나” ‘6·25 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백선엽(92) 장군(예비역 육군 대장)을 ‘민족반역자’로 언급한 김광진(31) 민주통합당 의원의 발언에 대해...임관했다는 점이다. 백 장군은 간도특설대 소위로 임관했다는 사실을 회고록에서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간도특설대 역할에 대해서 백 장군은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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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세 6·25영웅을 "민족 반역자"라 비난한 31세 민주 의원|종북, 사이비좌파2012.10.22 07:17:26

31) 의원은 19일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에서 우리 군의 원로인 백선엽(白善燁·92) 장군(예비역 육군대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 의원은 민족문제연구소 전남...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 소위로 임관했다는 점이다. 백 장군은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 소위로 임관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혔고, 당시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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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이야기] 6월 이야기-아픔과 고통이 생략된 북한의 전쟁 이야기|수용소의 노래2012.07.11 09:16:15

웃음) 북한은 그때 105 탱크 여단에 탱크가 1백 대나 됐잖습니까? 문성휘 : 4백대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4백대더라고요. (웃음) 김태산 : 그리고 백선엽 장군 회고록 등 책도 보고 사건들도 찾아보고 나서 알았습니다. 진짜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을 현혹하고 세뇌시키는 게 고도로 발달됐다는 걸 느꼈고 아직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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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76) ~ (277) , 시리즈를 마치며|구국기도2012.03.19 05:51:35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76) ~ (277) , 시리즈를 마치며 중공군과의 대회전 (276) 총성이 멎다 [중앙일보] 입력 2011년 02월 25일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201102250157 중공군과의 대회전 (277) 전쟁터를 떠도는 내 영혼 [중앙일보] 입력 2011년 02월 28일 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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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58) ~ (275)|구국기도2012.03.18 05:49:57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58) ~ (275)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58) 한밤에 걸려온 전화 [중앙일보] 입력 2011년 01월 25일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201101250030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59) 세계를 뒤흔든 한국발 뉴스 [중앙일보] 입력 2011년 01월 26일 http://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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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48) ~ (257)|구국기도2012.03.18 05:48:57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48) ~ (257)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8) 워싱턴서 전우들과의 해후 [중앙일보] 입력 2011년 01월 10일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201101100026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9) 버크의 설득 [중앙일보] 입력 2011년 01월 12일 http://pdf.joinsm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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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48) ~ (257)|구국기도2012.03.17 06:41:21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48) ~ (257)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8) 워싱턴서 전우들과의 해후 [중앙일보] 입력 2011년 01월 10일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201101100026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9) 버크의 설득 [중앙일보] 입력 2011년 01월 12일 http://pdf.joinsm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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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28) ~ (247)|구국기도2012.03.17 06:40:18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28) ~ (247)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8) 명분으로 미군을 설득하다 [중앙일보] 입력 2010년 12월 13일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201012130048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0) 일본과의 수교 협상 [중앙일보] 입력 2010년 12월 15일 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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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01) ~ (225)|구국기도2012.03.17 06:39:12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01) ~ (225) 중앙일보에서 연재했는 백선엽 장군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가 12000원의 가격으로 'e북-저널리즘'으로 현재 시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중앙일보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길 수 없는 형편입니다. 현재 중앙일보 PDF에 있는 것만 10회 분량으로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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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01) ~ (225)|구국기도2012.03.15 06:52:4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01) ~ (225) 중앙일보에서 연재했는 백선엽 장군 회고록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가 12000원의 가격으로 'e북-저널리즘'으로 현재 시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중앙일보에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길 수 없는 형편입니다. 현재 중앙일보 PDF에 있는 것만 10회 분량으로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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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91), (192), (194) ~ (200)|구국기도2012.03.15 06:50:32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91), (192), (194) ~ (200)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1) 미군을 따라 배우다 [중앙일보] 입력 2010년 10월 13일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201010130022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2) 2군단 창설식 [중앙일보] 입력 2010년 10월 14일 ht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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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81) ~ (188), (190)|구국기도2012.03.15 06:49:07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81) ~ (188), (190)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1) 끝을 드러낸 토벌작전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9월 28일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201009280026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2) 이현상의 죽음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9월 30일 http://pdf.joinsm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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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81) ~ (188), (190)|구국기도2012.03.13 06:03:23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81) ~ (188), (190)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1) 끝을 드러낸 토벌작전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9월 28일 겨우 17~18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 아이들이 일부는 바위 틈에 앉아 있었고, 일부는 총탄에 맞아 숨져 있었다. 그 모습들이 하도 이상해 자세히 살펴봤지만 분명 앳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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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71) ~ (180)|구국기도2012.03.13 06:02:09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71) ~ (180) 지리산의 숨은 적들 (171) 다시 산을 오르다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9월 09일 우리의 작전 구역은 전주~남원~구례~순천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었다. 그 서쪽은 8사단이 맡고, 동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했다. 각 사단은 특징이 있었다. 최영희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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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61) ~ (170)|구국기도2012.03.13 06:00:54

양구에서 출발해 지리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리산은 어느덧 찾아온 가을을 맞고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2) 삐라 1000만 장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8월 27일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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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51) ~ (160)|구국기도2012.03.10 06:24:47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51) ~ (160) 지리산의 숨은 적들 (151) 박정희 5·16의 토대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8월 12일 육사 8기생은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새 피’였다. 이들은 모두 31명이었다. 정보국에 새로 수혈된 이 피들은 여러 부서에 나뉘어 골고루 배치됐다. 1200명이 넘는 동기생 가운데 성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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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41) ~ (150)|구국기도2012.03.09 05:43:05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41) ~ (150) 지리산의 숨은 적들 (141) 좌익에 손을 대다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7월 29일 여수와 순천을 배경으로 벌어진 14연대의 반란 사건을 전후해서 전국 곳곳은 군대 내부의 좌익세력이 마치 경연(競演)이라도 벌이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곳 저곳에서 조직적인 군대 내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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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31) ~ (140)|구국기도2012.03.08 05:55:48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31) ~ (140)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1) 먹구름 낀 한라산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7월 15일 제주 4·3사건은 점차 더 꼬여 가고 있었다. 사건이 터지던 날 제주읍에서 하루를 머물렀던 내가 당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사건이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을 맞았던 즈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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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21) ~ (130)|구국기도2012.03.07 06:42:45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21) ~ (130)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21) 김일성의 됨됨이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7월 01일 휴전회담 석상에서 마주치는 공산주의자들의 모습이 요즘 다루고 있는 주제다. 내가 겪었으나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일이 많다. 그것들을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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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11) ~ (120)|구국기도2012.03.07 06:41:27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11) ~ (120) 대관령의 중공군 (111) 미군을 따라 배우다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6월 16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왼쪽)가 1952년 12월 4일 한국을 방문해 한국군 부대를 사열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활약했던 아이젠하워는 그해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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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01) ~ (110)|구국기도2012.03.05 06:16:18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01) ~ (110) 대관령의 중공군 (101) 참담한 후퇴, 후퇴…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6월 01일 중공군의 비수(匕首)가 다가왔다. 인제 오마치(五馬峙) 고개, 미군과 국군이 관할을 다투던 곳. 중공군은 이 전략적 요충이자, 아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제대로 노리고 들어왔다. 소양강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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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91) ~ (100)|구국기도2012.03.04 05:31:38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91) ~ (100) 대관령의 중공군 (91) 봄에 밀려든 중공군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5월 13일 전선이 다시 요동을 쳤다. 밀렸다 다시 치고 올라가는 국면이 거듭 이어졌다. 1950년 11월부터 대공세에 나선 중공군은 급기야 서울을 점령했다. 길고 긴 피란민 행렬이 다시 길에 나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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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81) ~ (90)|구국기도2012.03.03 06:05:0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81) ~ (90) 서울 거쳐 평양으로 (81) 대동강의 푸른 물결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4월 28일 1950년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한 국군과 유엔군은 시내 곳곳에서 저항하는 북한군과 시가전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저항은 평양을 우회해 북쪽으로 진입한 국군의 협공에 밀려...

북한해방,
통영의딸 신숙자모녀를구출하자,
자유민주통일북한해방,
MBC거짓왜곡방송,
김정은척결,
이적당민통당해체,
전교조척결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71) ~ (80)|구국기도2012.03.03 06:04:12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71) ~ (80) 서울 거쳐 평양으로 (71) See you in Seoul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4월 13일 12연대장 김점곤 대령과 함께 서쪽으로 계속 향했다. 도로변의 풍경은 같았다. 여기저기에 적군의 시체와 무기 등이 널려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공격을 펼치던 적군의 그림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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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61) ~ (70)|구국기도2012.03.03 06:03:0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61) ~ (70) 낙동강 혈전 (61) 다부동의 마지막 위기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3월 23일 ‘볼링장’은 계속 시끄럽게 돌아갔다. 핀들이 육중한 볼링공에 맞아 쓰러지면서 울리는 요란한 소리는 그 여름의 천평동 계곡을 가득 채웠다. 전투는 밤과 낮 없이 줄곧 이어졌다. 막바지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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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51) ~ (60)|구국기도2012.03.03 06:01:50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51) ~ (60) 낙동강 혈전 (51) 숨가쁘게 넘긴 고비들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3월 09일 후방에 포 쏴 아군 후퇴 막고 전쟁통에 병풍 치고 식사도 … 그 배짱 좋던 최영희 대령 미군 1기병 사단장인 게이 장군(가운데)이 1950년 8월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격전을 치르고 있던 국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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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41) ~ (50)|구국기도2012.03.03 06:00:41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41) ~ (50) 임진강을 넘어온 적 (41) 북한군 포로가 된 미군 장성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2월 23일 윌리엄 딘 소장의 미 24사단이 6·25전쟁 발발 직후 한반도에 급하게 뛰어든 것을 둘러싸고 약간의 논쟁이 있다.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섣불렀다’는 평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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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31) ~ (40)|구국기도2012.03.03 05:59:37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31) ~ (40)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31) 전쟁통의 가족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2월 08일 어둠 속을 달려 도착한 곳이 어디였는가에 대한 기억은 지금 내게 없다. 부관이 그 집을 미리 파악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산 시내 어느 한 주택이었다. 전쟁통이라 여러 가족이 그 작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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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1) ~ (25), (27) ~ (30)|구국기도2012.02.27 05:57:38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21) ~ (25), (27) ~ (30)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21) 전세 뒤집은 51년 2월 중순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1월 27일 미 1기병사단 소속 전차가 1951년 2월 경기도 용인 양지면에서 다리를 건너다 무게 때문에 바닥이 기울어지자 멈춰서 있다. 공병들이 다리 아래에 버팀목을 대고 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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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6) ~ (10)|구국기도2012.02.25 06:29:1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6) ~ (10)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⑥ 미 8기병연대 3대대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1월 09일 1950년 11월 1일 새벽 1시쯤이었다. 나는 길을 재촉했다. 영변의 국군 1사단 사령부를 향해 지프를 달렸다. 밤길을 달리는 지프 뒤로 스쳐가는 바람이 차가웠다. 불안감과 초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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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 ~ (5)|구국기도2012.02.25 06:27:37

중앙일보] 백선엽 장군 회고록 (1) ~ (5)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① 새로운 전쟁의 시작 [중앙일보] 입력 2010년 01월 04일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수풍댐을 향해 북진하는 국군 1사단이 1950년 10월 중순 청천강에 놓인 나무 다리를 지나고 있다. 얼마 뒤 1사단은 영변 북쪽 운산에 서 몰래 들어와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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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4성장군 백선엽] 軍과 나 (제4장 3. 4)|구국기도2012.02.12 05:03:04

서문 ․ 백선엽 19 제1장 길고 긴 여름날, 50년 6월 1. 아침 7시에 날아온 ‘개성함락’ 급보(急報) 28 2. 문산 방어선이 무너지다 34 3. 뗏목을 타고 진행된 한강 도하(渡河)작전 41 제 2장 낙동강까지 3백km의 후퇴길 1. 적 지연작전 한달 50 2.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54 3. 낙동강 피의 공방, 최후의 1인까지 6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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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첫 4성장군 백선엽] 軍과 나 (제1장|구국기도2012.02.07 08:55:50

야전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치룬 백선엽장군이 오늘의 젊은 지성에게 바치는 생생한 전쟁 메시지 대륙연구소 출판부 6.25한국전쟁 당시 이름모를 땅에서 꽃다운...오시던 백선엽 장군이 전쟁의 전모를 말하는 ‘軍과 나’라는 귀중한 회고록을 내놓게 되었다. 6.25 당시 국군 제1사단장이었던 백장군은 적의 공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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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죽이고 '총 2발' 더 쏜 까닭|일제의만행2011.07.11 16:23:58

모습도 나온다. 작가는 "아이젠하워가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반대·북진 통일' 주장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냈던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백선엽 장군 또한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종식이라는 미국국민의 염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어서 그는 휴전회담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승만의 손가락|건국아버지 이승만2011.01.04 07:45:02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초기 독립운동을 펼쳐갈 무렵 일본 관헌(官憲)에게 붙잡혀 고초(苦楚)를 겪은 일이 있다. 짐작하건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때 역시 일본에 의해 약 2년 동안 구금된 적이 있었다. 마크 클라크 장군이 아는 바로는 이 대통령이 당시 일본 관헌에게 붙들려 조사를 받는 과정...



6.25에 대한 기초 지식|한국전6.252009.06.25 04:43:59

차관으로 취임한 장경근의 입김이라는 설이 있다. 전방 사단장으로 임명된 장군들은 부대을 장악 하고 지형을 익숙 시킬 여유 없이 전쟁을 맞았다(p.40). * 6.24...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하고 전 장병의 2분의1에 게 휴가를 주었다(이형근 회고록). * 6.25 남침 사실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에게 보고하자 전속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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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의 '南侵전쟁' 6.25에 대한 기초지식|한국전6.252009.06.25 03:27:10

차관으로 취임한 장경근의 입김이라는 설이 있다. 전방 사단장으로 임명된 장군들은 부대을 장악 하고 지형을 익숙 시킬 여유 없이 전쟁을 맞았다(p.40). * 6.24...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하고 전 장병의 2분의1에게 휴가를 주었다 (이형근 회고록) * 6.25 남침 사실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채병덕에게 보고하자 전속부관...



국군의 날에 한국군 장교단의 死生觀을 묻는다!|조갑제기자2008.10.01 03:32:49

라는 회고록을 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정치와 언론이 월남전을 망쳤다고 분개하는 한 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미군이 戰場에선 지지 않았는데 언론의...자유월남이 망한 것은 그 7년 뒤였다. 웨스트모어랜드(별명이 웨스티) 장군은 이 책에서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가장 공정한 보도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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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 백선엽의 ‘6·25 진실’… 회고록 통해 알려진 사실 8

백선엽의 ‘6·25 진실’… 회고록 통해 알려진 사실 8

백선엽의 ‘6·25 진실’… 회고록 통해 알려진 사실 8
[중앙일보] 입력 2011.03.01 









북한군과 싸운 건 초반 3개월뿐
6·25는 중공군과의 전쟁이었다
중앙일보에 1년2개월 동안 연재했던 백선엽(사진) 예비역 대장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이 2월 28일자로 막을 내렸다.

 그의 생생한 기억은 본지의 지면을 통해 총 277회, 75만 자의 분량으로 정리됐다.


DA 300

 대한민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했던 전쟁 기간 동안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친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일선 사단장부터 육군참모총장, 한국 최초의 대장과 야전군 사령관 등을 지내면서 전쟁의 모든 국면(局面)을 아우른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회고는 전쟁 전반과 함께 참혹했던 전화(戰禍)를 겪은 대한민국이 힘차게 재기하는 과정에까지 닿아 있다.

 그의 초인적인 기억력을 통해 그 모든 과정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상대로 힘겹게 벌인 싸움, 그 결과로 얻어진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미국의 대한(對韓) 경제지원, 전쟁 초기 서울 경무대에 들렀던 김일성의 행적, 군 내부의 좌익 척결 과정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구명(救命) 과정 등이 모두 이 회고록에 등장했다. 또한 3년 동안 벌어진 6·25는 초반 3개월을 북한군과 싸웠고, 나머지는 중공군과 벌인 싸움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장엄했던 대한민국 분투사를 생생하게 옮긴 본지 회고록을 돌아보자는 취지의 리뷰를 이번 주까지 마련한다. 새로 밝혀진 사실, 백선엽 장군의 리더십, 못 다 한 이야기, 인간 백선엽 등을 소개한다.

유광종 선임기자

[출처: 중앙일보] 백선엽의 ‘6·25 진실’… 회고록 통해 알려진 사실 8

Memoir | Ilpyong Kim

Memoir | Ilpyong Kim

Memoir

김일평 교수 회고록 (교수신문 기획연재)

연재에 앞서
회고록을 쓰게 된 동기
8.15 해방과 나의 영어공부
한국전쟁과 연락장교시절
미국유학 준비
애스베리대에서의 강의와 역사공부
콜럼비아대학원의 국제정치학 연구
뉴욕학생회와 뉴욕한인회 창립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연구생활
인디애나대에서의 교수 생활
새로운 고향, 코네티컷주립대 시절
국제한국학회 (ICKS) 창립 무렵
나의 중국연구와 중단없는 학문의 길 (마지막회)
부록

회고록 (9) ‘제 100 부대’ 배속 … 남원에서 화천으로 | Ilpyong Kim



회고록 (9) ‘제 100 부대’ 배속 … 남원에서 화천으로 | Ilpyong Kim



회고록 (9) ‘제 100 부대’ 배속 … 남원에서 화천으로
By ilpyongkim on June 22, 2012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의 대부분은 임관 직후 육군 「제 100부대」에 배속 받았다. 육군 제1군단장이었던 白善燁 장군이 사령관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야전 전투사령부’를 100부대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는 설도 있다. 백장군이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내가 겪은 6·25전쟁과 한국군」에 의하면 6·25 전쟁 이전에 한국군 제2군단이 창설돼 있었는데 6·25 전쟁의 와중에서 거의 해체되다시피 산산조각 나 흩어지고, 제1군단만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3군단을 새로 조직하기 전에 제2군단을 다시 창설하고 제2군단장으로 역임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194-197)은 <중앙일보> 2010년 10월 18일 부터 27일에 연재된 내용인데, 이 내용에 거론된 시기는 내가 대한민국 육군중위로 6·25전쟁에 참여해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을 창설할 때 참여한 나의 경험과 똑 같은 시기이기 때문에 매우 흥미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제1사단장 시절의 백선엽 준장. 김일평 교수는 바로 그와 관련된 ‘제100부대’에 배속돼 연락장교로서 군생활을 보냈다.

백선엽 장군의 6·25 전쟁 회고록은 자화자찬이 매우 심한 부분도 있다. 백 장군의 통역장교를 역임한 임석두 중위의 통역이 없었다면 미군 고문관 사이의 의사소통은 전혀 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 당시 참전했던 장교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그가 통역장교의 역할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지 매우 궁금하다).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은 대구 육군본부에서 100부대에 배치됐다. 이 무렵 송요찬 장군이 이끄는 수도사단과 최영희 장군의 8사단이 지리산의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가 배속된 ‘100부대’는 대구를 출발해 대전에 도착했다. 자동차길 2km 정도는 지프차와 스리코터, 트럭에 실려 갔다. 대전에서는 기차 편으로 전주에 도착했다. 전주역에 내렸을 때 3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철도역 직원이 지리산 토벌에 참전하는 우리 장교들을 겁에 질리게끔 말을 했다. 그 사내는 “전주와 남원부근에는 빨치산들이 아직도 우글우글해서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되고, 낮에는 대한민국의 세상이 된다. 세상이 또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니 당신들 주의하시라”라고 경고했다. 우리는 전주 북중학교(전주고등학교의 전신) 校舍의 교실에 짐을 풀고 5~6일 밤을 지낸 뒤 남원으로 떠났다. 남원에 도착한 우리 100부대는 남원국민학교 校舍를 사령부로 정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남원은 우리나라의 고전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이가 나온 곳이 아니었던가? 나는 기억해 보았다(백선엽 장군의 「6·25전쟁 60년」, 회고록(190), <중앙일보>, 2010.10.11. 참조).

1951년에 릿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일본 동경의 맥아더 극동사령관의 후임으로 떠난 후 그의 후임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이가 바로 제임스 벤플리트 장군이다.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파면하고 퇴역 조치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 작전에 성공한 후 그의 기세가 등등함에 따라 미군부대를 38선을 넘어서 38선 이북의 북한을 해방시키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이 약세에 몰리면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주저했다. 따라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이 북한군을 추적하는 작전을 38선으로 제한하고, 6·25전쟁 이전의 영토에 한해서만 원상회복하는 범위에서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38선 이북의 북한 지역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의 전략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에 정면으로 맞섰다. 트루먼 대통령과 안보담당 보좌관은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 우려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 반면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트루먼 정부의 한국전쟁 전략은 전쟁을 국지전(Limited War)으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중공군이 개입하는 경우가 생겨도 미군은 중공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한이 있을지라도 38선 이북의 북한을 해방시키고 한반도의 남북통일을 무력으로 실현시키겠다는 전략을 주장했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과 백악관 안보담당 참모들은 한국전쟁에서 중공이나 쏘련이 북한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한국전에 개입하게 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전쟁을 확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맥아더 장군과 트루먼 대통령과의 전략적 견해 차이로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은 제한된 전쟁 (Limited War)’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맥아더 극동사령관을 하극상의 죄목을 씌워 파면했다(6·25전쟁 중 트루먼-맥아더 사이의 의견 차이와 논쟁은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1951년 미공군 전투기로 하여금 중국본토를 폭격하는 전략으로 발생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공군 전투기가 중국본토를 포격하게 되면 중공의 맹방인 소련이 참전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기 위해 맥아더 극동사령관을 해임한 것이다(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d the Korean War by John W. Spanier, 1965). 나는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디애나 대학(Indiana University) 에서 국제정치개론을 학부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반드시 한국전쟁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사이의 논쟁을 강의했다. 국제정치 개론 교과서에도 깊이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8일 서울이 수복되고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北進할 당시 미 육군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전방을 시찰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전사했다. 때문에 그의 후임으로 주한 미8군사령관으로 매듀 릿지웨이 장군이 부임해 왔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임명돼 동경으로 떠나게 됐다. 맥아더 극동사령관이 왜 해임됐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증가했다.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됐다.

맥아더 장군은 미국군 총사령관인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하극상이었는지 아니면 한국전쟁을 확대해 중공과 전쟁을 확대하겠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입장과, 그 반면에 한국전쟁을 확대하고 중공군과 전쟁한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이라며 반대하는 트루먼 행정부의 입장, 그리고 이러한 팽팽한 두 입장간의 견해 충돌과 논쟁은 미국의 정치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토론 대상이 되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by David Halberstam, 2007 참조). 그러나 논쟁은 상당히 장기간 계속됐다. 내가 1957년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대학원 강의에 등록했을 때 리처드 뉴스태트 (Richard Newstadt) 교수의 ‘대통령의 권력’ (Presidential Power)라는 대학원 강의를 들을 때 트루먼-맥아더 논쟁을 케이스 스터디로 매우 심도 있게 다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와중에 릿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벤플리트 장군이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왔던 것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희랍)의 군사지원단장으로 그리스군을 도와서 그리스의 공산게릴라를 토벌하는데 공헌이 많은 게릴라 전문장군으로 이름이 알려진 장군이다. 벤플리트 장군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그리스를 거쳐 미 8군사렁관으로 부임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짐으로써 한국전선의 전방에서 싸우던 북한군은 동부전선의 태백산맥을 타고 북한으로 도망친 부대도 있었다. 그러나 서부전선에서 싸우든 인민군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산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남한 출신 의용군과 합류해 게릴라 작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때문에 민가의 피해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미군과 유엔군에게는 아주 큰 위협이 됐다.


1951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훈련장을 찾아 제임스 벤플리트 미 8군사령관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당시 <라이프>지에 실렸던 사진이다.

우리 연락장교 7기생은 육군본부에 가서 임명장을 받고 지리산의 100부대 전투 사령부에 배속을 받았다. 남원에 도착한 우리 한국육군 100 부대는 남원국민학교 교사를 사령부로 정하고 그곳에서 먹고 잤다. 백선엽 장군은 그의 저서 『軍과 나』라는 6·25전쟁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남원의 야전전투사령부 시대를 회고했다.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미8군 작전참모 메제트 대령이 남원의 사령부에 은밀히 나타났다. 메제트는 나에게 ‘벤픓리트 사령관으로부터 한국군에 제2군단을 창설하겠다는 內命을 받고’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231쪽) 한국 육군 제2군단을 창설하기 위해 한국군 100 부대는 1951년 3월 남원을 출발해 미육군 제9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화천군 북방의 泉田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미군이 벌써 천막을 치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다 끝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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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 - 나무위키



백선엽 - 나무위키



백선엽

최근 수정 시각: 2017-12-29 22:39:35




白善燁
1920년 11월 23일~ (97세)




대한민국 육군제1야전군사령관




초대 백선엽



2대 송요찬


대한민국 육군총참모장


6대 이종찬



7대 백선엽



8대 정일권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9대 이형근



10대 백선엽



권한대행 이형근


대한민국 국군합동참모의장


3대 유재흥



4대 백선엽



권한대행 유재흥




1. 개요2. 출신 및 친일행위3. 주요경력4. 박정희 구명5. 6.25 전쟁의 영웅
5.1. 개전 초기 지연전5.2. 다부동 전투5.3. 평양 점령5.4. 빨치산 토벌전5.5. 전쟁 후기6. 전후활동 및 이야기거리
6.1.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원수 추대 가능성
6.1.1. 무산된 원수 추대6.2. 형보다 나은 아우는 없다6.3. 미화논란7. 저서들
7.1. 군과 나7.2. 실록 지리산8. 기타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장교이자 대한민국군인, 전 육군참모총장, 장관, 기업인, 교육인이다. 일제강점기에 개명했던 일본식 이름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1]

간도특설대 복무전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되었지만, 6.25 전쟁 당시 탁월한 무공으로 한국군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2. 출신 및 친일행위[편집]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으며 이후 1939년 평양사범을 졸업하고 1941년 12월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2]를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년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어 활약했는데, 이 부대가 지원자들로 구성된 항일유격대를 주로 상대하는 잔혹한 부대였다는 점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의 자서전인 '실록 지리산', '군과 나' 등에서 해당 경력을 언급했다. 본인은 간도특설대 경력에 대해 밝히고는 있으나 특별히 후회한다고 언급하거나 사죄한 적은 없다.[3]

오히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들 때문에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니고 일본과 싸웠더라도 독립이 빨라지거나 한건 아닐꺼라고 항변하면서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만 민중의 평화를 위한 군인의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에서 발간한 친일진상규명위 보고서에 백선엽의 회고록 가운데 일본서적에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시인하고 있다(白善燁, 若き将軍の朝鮮戦争 白善燁回顧錄!, 草思社, 2000年, 71~79쪽). 이 책은 군과나의 일역판 조선전쟁 천일의 개정판이다. 군과 나 자체도 2010년에 개정판 회고록이 출간되었다.




(전략) 봉천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나는 견습사관으로서 동부 만주의 寶淸(파오칭)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연대)에서 근무하였다. (중략) 이어서 佳木斯(자무스)의 신병훈련소의 소대장으로 전임되었는데 (중략) 1943년 2월, 나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하는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전임되었다. (중략)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明月鎭)에 설치되어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日系 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는데, (중략)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동북항일연군 등 항일무장세력을 게릴라라고 지칭하고 있음)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게릴라전에 대한 다른 책에서는 솔직히 식민지 백성으로 이런 부대에 참가했다는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백은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대소전 발발시 후방잠입 특수업무가 주요한 일이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만주 작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소련의 침공이 너무 전격적이어서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부대는 말 그대로 와해되거나 자진해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731 부대도 마찬가지).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후략)



백선엽이 일본에만 출간한 책인 게릴라전 관련 전술서적인 "미국은 왜 베트남에서 패배했는가?"에서 당시 상황을 알수 없는 일본 독자들을 위해서 2차 대전 당시 간도특설대에 들어간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당대와 그때의 고민 및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사정에 대해서 나름 변명과 유감을 표명하고 있으나 이 책 자체는 회고록이기 보다는 대게릴라전 전문가로서 베트남전을 평가하는데 주 목적으로 한국에서 출간한 지리산보다 더 빨치산 토벌에 대한 전술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 책 자체는 우에다 신의 컴뱃 바이블 2에서 한국군의 대게릴라전 전술 부분에 백장군의 캐리캐처와 함께 부분 발췌 수준으로 소개되었고 서해문집에서 나온 일제 하 소련억류자들을 다룬 서적에서 부분 발췌되었을 뿐 정식 번역은 되지 않았다.

사실 백선엽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사실대로 밝히지 않은 것은 5.16 군사정변을 전후한 시점에서의 군내 알력[4]과 자신이 받을 비판에 대한 부분 정도인데, 이 부분은 이례적으로 유난히 자기미화가 심한 편이다.

이후 만주군 중위을 지내다가 해방 직후 평양으로 돌아왔고,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가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후 1945년 12월에 월남한다.

그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마치고 국방경비대에 입대,1946년 2월 부산 제5연대 A중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정보국장으로 재직중이었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었다. 1950년 4월대령 계급으로 제1보병사단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하면서 6월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서 고급간부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3. 주요경력[편집]



1941. 12. :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졸업, 만주군 소위 [5]
1946. 02. : 군사·영어학교 졸업
1946. 02. : 국방경비대 부위(중위) 임관, 제5연대 A중대장
1946. 09. : 제5연대 제1대대장
1947. 01. : 중령, 제5연대장
1947. 12. : 제3여단 참모장
1948. 04. :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
1948. 12. : 대령
1949. 07. : 제5사단장
1950. 04. : 제1사단장
1950. 07. : 준장(★)
1951. 04. : 소장(★★), 제1군단장
1951. 07. : 휴전회담 대한민국 대표
1951. 11. : 백 야전군 사령관
1952. 01. : 중장(★★★)
1952. 04. : 제2군단장
1952. 07. :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1953. 01. : 대장(★★★★) [6]
1953. 05. : 육군대학 총장 겸직
1954. 02. : 제1야전군 사령관
1957. 05. : 육군참모총장
1959. 02. : 연합참모의장
1960. 05. : 예편
4. 박정희 구명[편집]


1949년 2월 박정희는 '군병력 제공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김안일 과장을 통해 박정희와 면담한 후 박정희의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무죄방면 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 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7]박정희가 대령에서 준장으로,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할 적에 보증한 사람도 백선엽이었다.

그러나 5.16 직후 중화민국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던 백선엽은 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전력을 이유로 사상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발언했다.[8]직후 중화민국 대사에서 유럽/아프리카 총괄대사로 전임[9]되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캐나다를 떠돌다가 모친병환을 이유로 잠시 귀국했을때 박정희를 면담하고나서도 2년뒤 69년 12월에야 교통부장관으로 임명되어 10년만에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10] 그후에는 교통부장관직 이후 전경련 이사와 한국종합화학등 공기업체 사장을 두루 거치며 보상받았다.
5. 6.25 전쟁의 영웅[편집]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 활약을 했다. 때문에 전쟁기간 중 최고의 속도로 승진을 거듭해 마침내 국군 최초의 4성 장군및 꽤 젊은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지위에 오르는 등 한국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이다.

5.1. 개전 초기 지연전[편집]


광주에 주둔한 제5사단장으로 복무하던 백선엽 대령은 1950년 4월 22일 개성을 포함한 38선의 경비를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보직되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당시 그는 서울에서 아내와 갓난 아이를 만나고 있다가 아침 7시경 부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급히 복귀해 1사단을 지휘했다. 그의 사단 담당지역은 인민군의 주 공격로 위에 있어 T-34 전차 등 인민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음에도 부대를 유지하며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차가 몰려오자 일부 병사들은 폭발물을 들고 달려들어 저지하는 투혼을 벌였는데, 이는 지시한 적도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벌어진 것이라 사단장인 그도 숙연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병사들만 나선게 아니라 대대장, 중대장까지 직접 수류탄을 들고 북한군 전차에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육군본부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38선 전체에서 전면적인 공격이 가해져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일제히 후퇴중이며, 1사단도 퇴각하지 않으면 곧 포위될 것이니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로 인해 퇴각을 하지만, 그의 부대는 퇴각중에도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고록에 따르면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한 것은 아니었다.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무너져 버리자 포위를 우려하여 참모총장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패닉 상태에 있었던 지휘부는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인도교가 폭파되자 퇴로가 끊긴 1사단은 그제서야 시흥을 집결지로 선정하고 후퇴를 시작하지만 배도 구하기 어려운지라 몇명의 부관과 함께 행주에서 뗏목을 만들어 겨우 도하가 가능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하여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으나 본인은 이 일로 상부의 후퇴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오해를 받아 많이 억울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나마 사단급 편제를 유지하고 멀쩡히 퇴각할 수 있던 부대는 1사단과 춘천6사단, 그리고 강릉8사단이 유일했다.

6사단의 경우 후퇴하면서도 제대로 된 전투를 벌였는데 바로 춘천-홍천 전투다. 수도권을 치던 인민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해 공격의 강도가 덜했던데다, 6사단은 부대장 재량으로 병력의 외출, 외박을 제한했던 덕분에 비교적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6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을 3일간이나 저지했고 이때문에 인민군 제2군단장 김광협은 해임당했다.

그리고 8사단의 경우 주문진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혔음에도 강릉을 빼앗긴 그날 밤 기습공격을 하여 인민군에게 적잖은 패배를 주는등의 활약을 하고 3일간 방어하면서 태백산맥을 타고 안전히 후퇴할수 있었다. (강릉전투)

그렇다고 1사단쪽이 사정이 나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1사단은 수도인 서울에서 가까워서 개전 당시 의정부시 회랑 방면과 함께 적의 주공이 밀려온 곳. 개전 당시 1사단이 담당한 구역은 적이 고지대에서 진지까지 단단히 구축한 후 빤히 쳐다보고, 배후에 바다가 있으며, 방어선으로 삼을 곳이 거의 없는 100km다. 게다가 하필 그쪽으로 내려온 것은 국공내전 참전경력까지 있던 기동전의 대가 방호산 소장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이었다.

적의 주력부대를 맞아 백선엽의 1사단은 김점곤 대령, 김익렬 대령, 최경록 대령의 부대가 합류하여 개성, 문산, 장단군 고랑포에서 인민군과 교전하면서 수도 서울로의 진격을 저지했다. 이런 곳에서 북한 주력군을 맞아 3일이나 버틴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교전으로 전선이 전면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서울 점령 때까지 그나마 3일의 시간적 여유를 벌었으나 이 성공적인 방어전에서도 결점은 많아서, 육군본부의 전후 공간사에서는 지휘역량이 아직 부족했고 부대 장악 수준이 충분치 않았던 탓에 조속한 대응에 실패, 더 잘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처음 이틀 동안 긴장과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발에 못이 박히고도 다음 날에나 전투화를 벗었을 지경이었다고 전해지며, 1사단이 상태가 그나마 가장 양호한 부대였으므로 학도병신병들을 계속 보충받아 한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해서 수많은 방어작전에 주력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악화되어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이 와중에 병사들 속에 섞여 퇴각하던 중 북한군의 추격으로 몇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5.2. 다부동 전투[편집]


백선엽 장군이 영웅으로 평가 받게 된 이유

낙동강을 넘어서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한 인민군의 8월공세에 맞서 국군 1사단은 다부동 전투를 치르게 된다. 북한군은 인민군 제3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가 미군부대를 회피해 국군1사단을 집요하게 노렸다.

다부동 전투 항목에서도 나왔듯이 낙동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 이미 8월5일 인민군이 낙동강을 도하한 상황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대구를 내줄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 15일 미 25사단 27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가 증원부대로 투입되어 육박전이 펼쳐졌고 8월 19일에는 미군 23연대가 뒤를 받쳤다. 그러나 8월 20일 미군 27연대가 국군 11연대 1대대[11]가 후퇴중이라며 퇴로확보를 위해 자신들도 철수하겠다는 통보가 오자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병력을 수습하고 2대대 선두에 서서 돌격, 488고지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백선엽은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이렇게 사단장이 직접 돌격하는 것은 사단장 돌격이라고 불리며, 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사례중의 하나. 일단 이 행동과 비슷한 사례로는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손원일 제독이 직접 소총을 들고 대한민국 해병대와 함께 진격한 경우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 준장이 노르망디 상륙을 최전선에서 함께했던것 정도.

돌격직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우리가 밀리면 미군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결국 8월 21일 5시간동안 모든 자원을 투입한 총력전이 펼쳐지고 8월 22일부터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후 1사단은 다부동을 미국 제1기병사단에 이양하고 팔공산으로 이동했는데 다부동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낸것으로 집계했다.
5.3. 평양 점령[편집]


이후, 부산에 미 1기병사단이 상륙함에 따라 1사단은 전력재건을 위해 임무를 교대했으나 미 1기병사단은 9월달즈음 북한군의 공격에 주저항선이 붕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어 북한군에 막대한 혼란이 벌어지자, 반격부대로서 다시 1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때쯤에는 성공적인 방어작전의 결과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북한으로 역진공하던 때의 에피소드인데,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하자 자신이 직접 영어로 설명하며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UN군의 선두에서 평양을 향해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으며, 사단장인 자신은 평양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아와 길을 잘 안다. 단지 자신들에게는 미군과 같은 종합적인 화력이 없는 것 뿐이라 만약 1사단에 미군 전차 1개대대를 지원해주면 이들과 함께 선두에서 진격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미군 장군이 '미군은 차량이 많고 기계화되어 이동속도가 빠른데, 보병 뿐인 한국군이 어떻게 미군의 전진속도보다 빨리 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자 '잠을 자지 않고 야간에도 행군해가며 이동속도를 늘리겠다'라며 굳은 의지를 보인다. 그리하여 미군 전차대대를 배속받게 되며, 미 육군 부대가 다른 나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영국지휘관에게 맡겨진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게다가 약속대로, 실제 1사단 장병들은 야간에도 잠을 자지 않으며 맹행군을 계속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미군들을 제치고 전군의 선두에 서게 된다.

나중에는 미군 전차대대 장교들이 '우리까지 밤에 잠도 안 자고 싸울 수는 없다. 전차는 야간에 사고를 일으킬 수 있고 적의 공격에도 취약하다'라고 하자 전차대대에는 숙면을 취하게 하며 '이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협조하라'고 하며 배려해줬으며, 실제로 이들은 그 보답으로 주간에 속도를 올려 1사단의 최선두를 따라잡았다. 이때 당시 장교들이 한 말은 정확하게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막힌 대답이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밝힌 바가 있다.

결국 평양 점령에 성공했다. 이는 전쟁 당시 최초의 평양 점령이었는데, 1사단과 평양 점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7사단 역시 다른 방향에서 같은 날 평양에 입성해 최초 입성부대라며 자랑하곤 한다. 평양 점령 후 김일성의 집무실에 1사단 지휘소를 차리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본인이 평양 출신이었던 덕분에 평양 점령 시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사단 통신참모가 북한군의 통신선을 발견해 도청을 하다 통신이 연결되어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 통신참모는 평양 사투리를 못해 사단장인 백선엽에게 직접 해주십사 하고 요청을 했다. 백선엽은 유창한 평양 사투리로 현재 적이 유엔군의 전력에 눌려 사기가 바닥을 치고 후퇴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외에도 미군이 대동강을 도하하느라 진격을 못하고 있던 틈에 수심이 얕은 곳으로 병력을 도하시켜 가장 먼저 평양 중심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1사단의 고문관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신기해 하자 "나는 어렸을 때 평양에서 수영을 배웠다. 물 위는 물론이고 물 아래까지 다 알고 있다."고 대답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북진을 계속해 압록강변에 거의 다다랐지만, 중국군의 반격에 휘말리며 38선 이남으로까지 밀려가게 된다. 이후 국군과 UN군의 반격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직한 김백일을 대신하여 소장으로 진급해 1군단장이 되었다. 이때, 최초로 미국북한-중국간의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군 장교를 빼놓고 휴전 협정을 할 수는 없다며 강력하게 주장하여 참관인으로 참석했다.

5.4. 빨치산 토벌전[편집]


휴전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는데다 1군단의 사고사로 인해 긴급히 후임으로 강릉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휴전회담 한국측 대표를 하던 중, 군단장으로 복귀한다. 전투가 뜸해진 1951년. 남한 후방지역, 특히 지리산 지역에 인천 상륙작전 이후로 후퇴하지 못한 빨치산들이 대거 몰려있음이 알려지자 이들을 퇴치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성을 따서 '백 야전사령부'가 창설되어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벌어지며, 성공적인 작전을 마쳐 빨치산 토벌을 완수한다. 작전의 결과로 5,800명의 빨치산을 사살했으며 특히, 투항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절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사면장에 자신의 사인을 넣어 비행기에서 살포한 덕에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사면장을 들고 항복하게 만든다. 최종적으로는 5,700명이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어, 통합 11,500명을 토벌한 것이다. 이전 11사단의 견벽 청야 작전이 거창사건으로 대변되는 작전에서 진일보한것으로 평가된다.

재미있는 건 거창 사건으로 대변되는 양민학살의 실질적인 주범인 쓰레기 최덕신의 경우는 비난에서 벗어나서 영웅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월북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북을 택하지 않고 박정희 정권의 고위직으로 일생을 마쳤으면 지금 빨치산 토벌로 백선엽이 받는 비난은 최덕신이 받을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최덕신이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월북때문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최덕신의 월북은 박정희 정권에서 대접을 제대로 안 해줬다는 점 때문으로, 최홍희를 비롯한 고위급 월북자들이 대부분 그랬다시피 70년대 반정부 투사로 인정되기에는 상당히 지저분한 내막을 가지고 있다.
5.5. 전쟁 후기[편집]


[12]
그 이후에는 새로이 재창설된 1군단에서 군단장을 맡고, 미군의 지원[13]으로 1952년에 새로 창설되는 2군단에서 군단장을맡는다. 그리고 발췌 개헌당시 계엄령을 거부한 이종찬을 대신해 중장으로 승진, 육군참모총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1953년 1월 31일에는 그동안의 전공으로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33세였다. 이후 한국군의 규모 확대와 급여, 복지문제 개선과 지원을 확대하는데 애썼다.

이런 저런 활약과 더불어 전쟁중 부대 궤멸이나 대패, 총퇴각 같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미군에게도 큰 신뢰를 쌓고, 빨치산 토벌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등 큰 업적을 쌓은 덕택에 미군은 한국군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높게 했으며, 계속 장비 지원을 해 세력을 확충시키는 한편, 카투사 제도 등으로 미군부대에 한국군 병사들을 배속시켜 같이 싸우려고도 했다.

이 사실이 상당히 중요한 것은 장비 지원에 대해 반감을 가진 미군장성이 매우 많았으며, 기본적으로 6.25당시의 국군에 대한 미군의 시각은 조잡한 민병대 정도였으므로 장비를 주면 잃어버려서 적이 오히려 노획한 장비로 중무장을 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장진호 전투를 치른 해병 1사단장도 한국군의 무기고가 되는 것에 우려를 가지고 장비지원을 하라는 상부명령을 거절한 사례가 있다. 자기 부하 빼간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리 전투의 소식이 전해지고, 그 여파로 3군단은 해체되었으며 그 이후로 한국군의 작전권은 미군에게 넘어간다. 나중에 백선엽 본인은 '유재흥 장군이 실전경험이 없어서...' 라고 끝끝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유재흥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혹평 및 비난이 많고 본인도 그다지 높게 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따로 언급하지 않는 면에서 중후한 인품이 엿보인다. 백선엽은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수많은 당대 지휘관들이 부하 탓, 상관 탓, 미군 탓을 한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이는 회고록 '군과 나'를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이기붕에게조차 나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6. 전후활동 및 이야기거리[편집]


전후에도 군에 남아서 1954년에 탄생한 제 1야전군에서 제1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에는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을 지냈다. 1960년 5월 31일 예편한 이후에는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 등을 역임하고, 1969년부터 교통부 장관을 지낸후에는 충주비료 사장을 역임했다. 워낙 영향력 있는 인물이던지라, 훗날 박정희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영문명으로 'Park'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에서는 백선엽이 쿠데타를 일으킨 줄 알았다[14] 할 정도로 유명인물. 현재 미 2사단 훈련평가원실 건물 이름이 '백선엽관'이다.

대단히 정치적이었고 군사 쿠데타를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던 그럼에도 정치군인 양성에 힘썼던 이승만은 쿠데타 가능성이 높은 군 실력자들을 서로 경쟁시켜서 가급적 힘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수행했는데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이 교대로 참모총장이 되면서 상호 견제하는 체제로 나갔다. 이후 정치에 발을 실제로 들였던 건 정일권.

여담이지만 대식가라고 한다. 2009년 2월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육군협회 관련 행사에 참석한 이의 증언으로는 계속 꾸벅대다가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접시를 순식간에 비워낸 어르신이 백선엽인 걸 나중에 알고 황당했다고.

한국군 고위장교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친미성향이 짙으면서 실력으로도 대단히 유능했다는 것이 공통된 평이었다. 6.25 전쟁 당시 실력은 있으나 미군과 친하지 않아서 찬밥을 먹는 장교들이 많았는데 노령의 문제도 있지만 김홍일 장군이나 김석원 장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나중에 실력에 비해서 한직으로 밀려난다. 또한 유능하지 않으나 미군과 친한 이유로 과대평가되는 장교들도 있었는데 김교식에 따르면 장도영이 이런 케이스였다고 한다. 물론 장도영 정도는 그나마 실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다행이고 태백산맥에서 자주 나오는 썩은 국군 장교들의 경우 이런 경우가 꽤 많았다. 전선에서도 바쁜 와중에 틈틈히 영어공부를 했고 미군들에게 예의바른 표현을 익히기 위해 미군 표창장에 적힌 찬사문구를 메모해서 틈틈히 외워서 감사인사에 써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6.1.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원수 추대 가능성[편집]


2009년에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계획이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을 손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만일 성공하면 한국군 사상 최초의 5성 장군이 된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 경력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곧, 우리나라 최초의 원수 칭호가 친일파에게 섣불리 수여되기보다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사회적 토론이 선행되야 하지 않나 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이 인물의 몇몇 전공과,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임무였던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과오가 너무도 대립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극명한 대립양상을 보아 합의를 보기 힘들 것을 예상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명예 원수 추대가 성사되는 것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6.1.1. 무산된 원수 추대[편집]



"큰 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 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 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 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 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 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채명신)
"제 생각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령관님을 뵙자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일반 국민들의 상당수가 백선엽 자신에 의해 과장된 6·25 전쟁사를 통해 (백선엽을) 낙동강에서 조국을 구한 유일한 영웅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반인 뿐만 아닙니다. 국방장관을 역임한 예비역 장성과 중앙일보 등 일부 보수 일간신문도 백선엽이 우리나라 제일의 전쟁 영웅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내용 상당량이 과장된 것이지요."(박경석) - 박경석, 《불후의 명장 채명신》, 460쪽

2008년도 말부터 MB정부에서 명예원수 추대에 대해 논란이 있자, 박경석[15]은 즉시 "백선엽 장군이 명예 원수에 추대된다"는 사실을 채명신 장군에게 알려 위와 같은 대답을 받았다. 이에 박경석은 '백선엽이 일본국 괴뢰정부인 만주국 간도특설대의 육군중위 계급으로 독립군 소탕작전을 지휘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는 점, 낙동강 전선에서 활약이 과장 평가 되었다는 점, 북한이 남한에 대해 건군 과정을 헐뜯는 내용이 일본군과 만주군에 의한 건군인데 백선엽이 건국 첫 명예원수가 된다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점'을 담은 성명서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는 세기의 난센스다>를 인터넷 <박경석 서재>에 게재하였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명예 원수 추대를 기정 사실로 하고 김태영 국방장관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이때 백선엽은 장관에게 "내가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은 있지만, 독립군 소탕작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다행히 김태영 장관은 역사의식이 뚜렷한 사람이라 국방부 인사복지실장(육군 소장)과 담당과장(육군 대령)을 박경석에게 보내 사실 조사를 하게 하였다. 그러자 박경석은 백선엽이 직접 자기입으로 1950년대 일본 작가에게 자신이 토벌했던 게릴라 중에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라고 말한 대담집을 제공 하였다.

국방부 인사복지실장은 이어 채명신 장군을 만나 의견을 구했다. 채명신 장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파월한국군 사령관으로서 성공적인 임무 수행으로 한국사회에서도 명망높은 장군이며 그 때문에 채명신장군의 백선엽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 반대의사는 정부로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인사복지실장은 채명신 장군과 대담 후 더 확신을 가지고 김태영 장관에게 보고하였다. 이로써 명예원수 추대 해프닝은 끝났다. 박경석 장군이 말하길, 명예원수 추대를 무효화시킨 이 일은 채명신 장군이 조국에 바친 마지막 봉사라 한다.

결국 청와대에 백선엽의 원수추대에 반대하며 추대가 강행될경우 그의 과거행적을 폭로하겠다는 창군원로들의 자필편지가 접수되는 상황이 되자 우물쭈물 하던차에 때마침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원수 추대는 유야무야 되어 국방부는 "국민적 공감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관련된 사업을 포기했다.군 원로들이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명예원수 추대를 좌절시켰다

2013년도에도 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를 통해 백선엽 장군을 '명예원수'로!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뉴데일리 외에는 취재하는 언론이 거의 없는 듯 하다.

김장수 전국방장관등은 "백선엽은 한국전쟁의 영웅" "일본육사출신이라고 친일이라고 해선 안된다"며 그의 원수추대를 주장했다.
6.2. 형보다 나은 아우는 없다[편집]


위의 친일 논쟁과는 별도로, 그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동생인 백인엽(白仁燁) 때문에 싸잡혀서 욕 먹는 경우도 있다.
자세한 건 백인엽 항목 참고.

6.3. 미화논란[편집]


2011년 06월 24일 KBS에서 6.25 전쟁 당시 그를 주목하는 방송을 해 논란이 되었다. #
6.25 전쟁 61주년 특집다큐였으나 백선엽의 기억과 코멘트를 중심으로 그의 활약상을 조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2011년 8월 국립서울현충원이 친일 논란에 휩싸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91·사진)에 대해 사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내 묘역 안치를 약속했다.#

국방부는 2012년,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백선엽을 모델로 한 '더 프로미스'라는 뮤지컬에 수 억원을 투자했는데 이것이 국정감사때 문제가 되었고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은 " 잘못된 ‘과’를 가지고 있는 이 민족반역자를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잘못을 청산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 사람을 칭송해야 된다는 현실이 참 부끄럽다 "라는 발언을 하여 군과 새누리당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새누리당 측에서 전쟁 영웅에 대한 모독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김광진 의원은 "백 장군은 법률이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국가에서 규정한 것으로 논쟁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면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해야 할 것”이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

육군은 살아있는 백선엽의 이름을 따 사실상 그의 기념실을 만들었다. 계룡대에 위치한 이 기념실은 지난 2005년 3월 개관한 것인데 이 당시 친일 논란이 있는 생존 인물의 이름을 따 이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것에 대해 비난 여론이 일었다.

6.25 전쟁 당시 백선엽이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육군 1사단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2013년 6월 문화재청이 백선엽이 6.25 전쟁 당시 입었던 군복을 '대한민국 근현대사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공고를 냈다. 민주당 김광진 국회의원의 반대 운동과 여러 독립운동 단체의 격렬한 항의에 밀려 취소됐다.

2013년 9월,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그의 이름을 따 '백선엽 한미 동맹상'이 제정되었다.

2013년 9월 민주당 김광진 국회의원이 국방부 등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백선엽은 지난 2003년 11월부터 지난해까지 근 10년간 업무용 에쿠스 차량 1대와 운전병, 그리고 4급 상당의 개인 보좌관 등을 국방부로부터 지원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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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학술정보원(원장 오경두 대령)은 육군사관학교 교내 포털사이트에 자서전 '군과 나'를 기초로 한 웹툰을 올렸다. 그림은 현역병 차출###

7. 저서들[편집]

7.1. 군과 나[편집]


6.25 전쟁 회고록 6.25 전쟁 당시 실제 작전 입안자로서 6.25 전쟁을 회고하는 최초의 회고록이다. 사실 6.25 전쟁을 회고하는 수기류는 정책적으로 많이 나왔지만 공산권 자료의 미비, 최근에도 일제하 전력이라든가 작전실패, 민간인 학살 관련 등 여러 문제에 대한 당사자들의 증언 회피, 어른의 사정 등으로 객관적인 저서가 나오지 않았던 반면에 6월항쟁 이후에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6.25 전쟁을 볼 수 있는 시기에 나온 최초의 회고록이라는데서 의의가 있다. 실제로 이 책 이후에 나온 이형근, 정일권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이 비판받을 부분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원래 경향신문 연재물이었는데 대륙출판부에서 최초로 단행본이 나왔고 앞에 말한 이유뿐 아니라 문장이 수려해서 가독력이 좋아. 6.25 전쟁에 대해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작품. 심지어는 국군 최악의 패전인 현리 전투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많은 사람들이 잊혀진 걸작이라고 한탄하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책으로서는 의외로 단행본이 많이 나왔다. 앞서 말한 대륙출판부판, 다른 중소출판부판, 시대정신판 등등... 영문판으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이 제목은 전 UN군 사령관 클라크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와 제목이 비슷하다. 조선전쟁 천일이라는 제목으로 일역판도 출간되었다.

2010년 중앙일보에서 이 회고록의 추가 개정판이 연재되었다. 다만 이 판본은 중국군 개입부터로 순서를 조정했다.

7.2. 실록 지리산[편집]


이태의 남부군 출간 이후 동아일보 연재로 토벌대의 입장에서 대국적으로 그린 빨치산 기록이다. 저자 자신이 백야전사 작전에 참가했던 기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 → 남한 빨치산 약사 → 자신이 겪은 이야기 후기의 형식인 반면에 이 작품은 백야전사 작전 → 남한 빨치산 약사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단행본은 고려원 출간.

백야전사 부분을 제외하고는 빨치산 종군기자였던 이태남부군에 대한 토벌대의 입장이기 때문에 남부군을 읽지 않으면 갑툭튀한 서술이 좀 이상할 정도이다. 사실 남부군은 이후 나온 모든 빨치산 관련 작품(전향한 빨치산 작품)들이 인용하거나 비판하는(비전향 종북주의자 작품)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데, <실록 지리산>역시 국군 토벌대의 입장을 반영한 매우 중요한 텍스트로, 전투경찰대 연대장인 차일혁 총경의 아들이 쓴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와 함께 가장 많이 빨치산 문학에서 인용된다.[16]

여담으로 차일혁 총경은 만주에서 항일유격대 팔로군계 항일유격대에 소속되어 일본군, 만주군과 목숨걸고 싸운 독립군이였다. 해방후 군사영어학교를 갈 기회가 있었지만 "좌파들과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득세"한다는 소리를 듣고 입교를 포기한다. 다시 말해 만주에서 백선엽의 만주군과 싸우던 독립군이 바로 차일혁으로, 백선엽 같은 인간들이 군사영어학교에 득실 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안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였다

토벌대 사령관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겠지만 의외로 객관적이다. 자료 조사를 위해 지리산 곳곳을 다녔고 구빨치산 출신의 참전자들을 일일히 인터뷰했다. 토벌에 참가했던 국군의 '''잔학행위 증언도 빠짐없이 실어주었다. 이를테면 생포한 여자 빨치산을 바세린을 발라가면서 집단으로 강간하는 류의 이야기가 버젓이 나온다.

이런 증언을 소개하면서 토벌작전 책임자로서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참조

8. 기타[편집]


6.25 전쟁 중 한미상호방위조약 관련으로 미국에 방문해서 기자회견을 열었을때 어느 기자가 "당신은 동양인이면서 왜 키도 크고 안경도 쓰지 않고 금니도 없느냐."라고 묻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에 백선엽이 그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그런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자 기자가 부끄러운 듯이 물러났다고.(...) 미제 기레기

6.25 전쟁 때 여러 차례 만남을 계기로 알레이 버크 제독과 절친이 되었다. 버크 제독이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해상자위대 대표들에게 버크 제독이 자위대 창설에 크게 기여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사를 방문해 생도들에게 자신의 저서를 나눠주거나 장학금을 기탁하기도 했다.

2017년에는 주한 미 육군의 평택 이전 행사에 초청받았는데, 모두 휠체어를 탄 모습이었다. 하기야 그도 어느덧 아흔을 훨씬 넘은 백전노장이다.


[1] 윤봉길상하이 홍구공원에서 폭사시킨 일본 육군 대장의 이름이기도 하다.[2] 장춘의 4년제 만주군관학교의 전신으로 2년제 였다. 참고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2기 출신이다.[3] 일본군 경력을 부끄럽다고 고백하면서 일본군 장교자리 버리고 독립운동하다 초죽음이 된 동기 이종혁을 보고 진심으로 슬퍼하며 장한 일을 했다고 칭찬했던 김석원과는 다르다.[4] 이를테면 정일권이 주도한 함경도 세력과 백선엽 자신이 주도한 평안도 세력의 막장행각,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은 이런 군내 파벌들의 행각을 대의명분 중 하나로 내세우면서 세를 결집시킨 장교들의 작품이기도 하다.[5] 제2차 세계대전 종전시 만주군 육군 헌병 중위 신분이었는데, 당시 헌병은 Military Police가 아닌 지금의 정보, 기무, 특수전 병과와 유사했다.[6] 국군 1호 대장[7] 그리고 여기서 박정희는 김종필을 만난다.[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21683[9] 지금과는 사정이 달라서 당시 중화민국은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국가였다. 부임한지 1년도 못되어 전임한건 사실상 미국과 군내 신망이 있는 그를 부담스러워한 조치였다.[1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42700329210001&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4-27&officeId=00032&pageNo=10&printNo=13411&publishType=00020[11] 보급이 안되어 이틀간 물한모금 먹지 못한 상태였다[12] 1951년 7월 10일, 유엔군 대표단과 나란히 서 있는 백선엽 장군(홀로 철모를 쓰고 있는 사람). 참고로 사진 속 오른쪽에서 3번째 자리에 수류탄을 가슴에 매달고 서 있는 사람이 매튜 리지웨이 장군으로, 당시 유엔군사령관이다. 가운데는 협상단 대표였던 터너 조이 제독.[13] 여기서 미군 고문단으로 파견된 이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현대화에 굉장히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14] 1961년 5월 16일에 백선엽은 주대만대사로 타이페이에 있었다. 23일 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과거 공산당 연루기록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후 백선엽은 주프랑스 유럽및 아프리카대사로 임명되었다.[15] 월남전 당시 채명신의 맹호부대 산하 재구대대 대대장. 파병 준비중 산하 중대장인 강재구 대위가 수류탄 훈련중 사망하였다. 준장 전역 후 전업 작가[16]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여 비전향 종북주의자 빨치산을 부모로 둔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품이 있다.(철저하게 종북주의자 시점에서 집필 되었다.) 이상 4개의 작품이 수십종이나 되는 빨치산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텍스트이다. 4개의 작품이 이태의 남부군의 문학적 대성공을 보고 시기적으로 거의 동시에 나왔고, 다시 남부군 개정판에서 이들 3개 작품을 대폭 인용하여 기술하였다.


분류
일본군/조선인
제2차 세계대전/군인
한국전쟁/군인
한국군/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
1920년 출생
평안남도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