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은이) | 뿌리와이파리 | 2017-08-07
근대화 우등생 일본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한국인들이 몰랐던 '축적'과 '가교'의 시간, 에도시대.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경로의 운명을 가른 일본의 '에도시대' 대해부를 통해 21세기 새로운 역사의 길을 묻는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근대화의 맹아가 태동하고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그 과정에서 단순한 외양을 넘어 그 이면에 자리한 자본, 시장, 경쟁, 이동, 통합, 자치, 공공이라는 근대성의 요소가 어떻게 '수용.변용.내재화'를 거쳤는지 나름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한 분석에는 저자가 직업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바라본 시각이 작용하였다.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전체적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을 중시하는 것이 외교관의 직업적 특성이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분야의 총합적 상호관계를 통시적.공시적.종횡으로 엮어내어 세계사적.지역적 좌표 속에서 이해의 틀을 구성하는 그러한 총합적 이해의 틀에는 생활문화사적 접근이 중요한 요소로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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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제1장 에도 한복판 200년 된 소바집의 의미
제2장 역사를 바꾼 우연(1): 에도의 탄생
허허벌판에서의 시작 | 물을 다스리는 자가 천하를 다스린다 | 다이묘의 등골을 빼 인프라를 구축하다
제3장 역사를 바꾼 우연(2): 참근교대제
근대화의 예습, 참근교대제 | 폭포수와 같은 낙수효과 | 돈이 돌고 도시가 발달하다 | 서민 계급이 새로운 실세로 등장하다 | 전국 네트워크의 구축
제4장 ‘된장(미소)’으로 본 근대 일본의 정치경제학
전략물자가 된 ‘미소’ | 부국강병의 꿈이 담긴 ‘센다이미소’ | 품질과 신뢰로 에도 시장을 뚫다 | 새로운 시대, 넘버원 미소의 자리는? | 경쟁과 자율성이 꽃피운 미소 문화
제5장 여행천국의 나라, 관광입국의 시대
평생에 한 번은 이세참배를…… |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 | 여행의 대중화: 장기투어, 고講, 료칸, 유곽 | 시대를 앞서간 ‘觀光’의 탄생
제6장 출판문화 융성의 키워드: 포르노, 카피라이트, 렌털
출판 혁명의 시작은 포르노 | 시대를 풍미한 초베스트셀러의 등장 | 유교의 이상을 완성한 『경전여사』 | 일본판 카피라이트, ‘판권’의 탄생 | ‘대본업’의 등장과 공유경제 |문화 융성은 시장 활성화의 이음동의어
제7장 교육의 힘: 번교, 데라코야, 주쿠
P.40~41 : 이에야스는 위기의 순간마다 기회를 찾아낸 창의적 발상의 소유자였다. 이번에도 그의 기지가 발휘된다. 택지를 마련하기 위해 내륙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매립의 대상지가 된 곳은 ‘히비야이리에日比谷入江’였다....
P.48 : 로마 격언에 ‘도로는 강자가 만들고, 약자가 부순다’는 말이 있다. 체제가 잘 정비된 우수한 국가일수록 충실한 사회 인프라를 갖추고, 그렇지 못한 국가일수록 사회 인프라의 수준이 낮다는 의미이다. 무가들이 실력 본위의 경쟁을 벌이는 일본 특유의 정치상황 속...
P.53 : 먼저 경제적 파급효과이다. 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했다. 독자 징세권으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였다....
이원덕
: 한국의 제도교육이나 역사 상식의 범주 밖에 방치해두었던 일본 에도시대 사람들의 삶과 문화, 사회경제적 존재 양식을 이처럼 생생하게 복원시킨 책은 일찍이 읽어본 적이 없다. ‘외교관 출신의 우동집 사장님이 쓴 일본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팩트의 면에서나 역사 해석의 면에서 전문가를 능가하는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생활문화사적인 접근이라고는 하나 꽤나 전문적인 해석을 요하는 내용임에도 저자는 특유의 글쓰기 재주로 알기 쉽게 술술 이야기를 풀어간다. 서구 제국주의의 서세동점 와중에서 일본은 근대화라는 숙명적인 과제를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이 책은 에도인들의 일상적 삶을 통해 담담하게 그 해답을 추구하고 있다.
선우정 (<조선일보> 국제부장)
: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이라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인 저자는 SNS 논객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책에서 다룬 에도시대는 일본을 꽤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도 ‘잃어버린 고리’에 해당하는 낯선 역사이다. 주일특파원 시절부터 멀지 않은 과거에 나라를 잃은?아픈 역사를 되돌아봄에 있어 결과가 아니라 원인을 알려 하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그러한 나의 생각과 궁금증을 충족시켜주는 데 모자람이 없다. 다채로운 사례와 정교한 분석틀을 통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요인들이 양파껍질처럼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 나온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일본의 근세를 통해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논리정연하면서도 힘이 있는 글솜씨가 저자의 천직이 무엇인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는 감상은 덤이다.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전?대통령 외교안보수석))
: 외교관으로 평생을 봉직하는 동안?일본은 늘 궁금증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굴절 속에 항상 존재감을 피력해온 일본이지만, 외교의 현장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도 일본의 실체와 저력에 대해서 이렇다 할 나름의 ‘관觀’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외교부 후배인 신상목 군의 역작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많은 의문과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이 책은 ‘일본을 바라보는 법’에 대한 새로운 길라잡이이다. 가장 가까운 이웃을 너무나도 모르면서 아는 줄 착각하고 과소평가해온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다. 전편에 걸쳐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에도시대에 대한 문화적·사회적·경제적 해부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역사적 고정관념과 편견에 경종을 울린다. 누구든지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열기 전의 일본과 책을 덮고 난 후의 일본이 같지 않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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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신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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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1996년 제30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부에 입부하였다. 외교부 근무 중에는 와세다 국제대학원 연수, 본부 동북아1과 및 주일대사관 근무 등 일본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2010년 G20 정상회의 행사기획과장,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의전과장 등 굵직한 국제행사의 실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숙명적 관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바탕으로 한일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외교부를 퇴직하고 현재 서울에서 ‘기리야마본진’이라는 우동가게를 경영하고 있다. 안정된 조직을 벗어나 냉엄한 현실 속에서 홀로서기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도 틈틈이 일본 관련 기고와 저술 활동을 통해 한일관계 증진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에 도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일본은 악어다』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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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세를 알아야 비로소 조선이 뚜렷하게 보인다!
“다채로운 사례와 정교한 분석틀을 통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요인들이 양파껍질처럼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온다.” _선우정 조선일보 논설위원
근대화 우등생 일본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한국인들이 몰랐던 ‘축적’과 ‘가교’의 시간, 에도시대.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경로의 운명을 가른 일본의 ‘에도시대’ 대해부를 통해
21세기 새로운 역사의 길을 묻다!
8·15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일제의 잔악한 침략과 수탈에서 벗어나 ‘빛을 되찾은’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며 ‘반일’민족주의를 제고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 내부의 문제를 직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은 어떤 사회였으며, 왜 식민지가 되었는가? 19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시험대 앞에서 일본은 최우등생, 중국은 열등생, 조선은 낙제생이었다면, 무엇이 그러한 차이를 만들었을까?
우리는 혹시 훈도시를 입고 칼을 찬 야만의 나라에 고래古來부터 문물을 전수해주었건만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일본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정작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 중 유독 일본만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홀로 다른 길을 걸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2017년 현재 일본은 총 2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한국에서는 그때마다 메이지유신을 지목하고, 이후 근대화 과정에 부러움을 보낸다. 그러한 분석을 접할 때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저력을 만든 것이 정말로 그 100년일까? 과연 100년 만에 그러한 국가적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답을 찾아나가는 여정의 기록이다. 그러한 여정의 끝에 도달한 종착지는 일본 ‘근세의 재발견’이다.
지금의 일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에도는 이미 18세기 중반에 인구 100만이 거주하는 왕성한 상업활동과 도시기반 시설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그 당시 에도에 필적할 만한 유럽의 도시로는 런던이 100만 명이었고, 파리는 50만 명이었다. 1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는 유럽 전체에서도 20개 도시에 불과했다). 이에야스가 에도로 옮겨와 처음에 착수한 것은, 치수治水사업과 상수도의 개통, 택지 마련을 위한 매립 공사였다. (현재의 히비야 공원에서 신바시新橋와 하마초浜町에 걸쳐 있는 매립지는, 서울에 비유하면 조선 선조宣祖 때 시청 앞에서 용산까지의 지역을 매립하는 것과 같다.) 도시기반 확충과 함께 지역 경제의 기초가 되는 산업을 장려하고, 각종 기술자, 상인, 학자 등의 인적 자원이 확충되자 도시 에도는 같은 시기 유럽국가들에 견주어도 독보적인 인프라를 갖출 수 있었다.
막부를 에도에 두기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단이 ‘천하보청’ 및 ‘참근교대제’와 맞물려 혁신적인 도시문명의 서막을 열었다. 그중 참근교대가 가져온 가장 큰 부산물은 에도의 눈부신 발전이다. 수십만 명의 다이묘와 수행원들이 ‘순수한 소비자’로 유입됨에 따라 에도에는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된다. 이들의 저택과 수행원 숙소 및 공공 인프라 마련을 위한 토목·건설·건축업, 다이묘 일행의 공사公私에 걸친 교제 생활을 위한 외식업, 공예업, 운수업, 당시 유행하던 ‘이키粹’ 복식문화에 따른 섬유업과 의상업, 다중多衆의 문화생활을 위한 각종 출판업, 공연업과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다양한 분야의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외교관 출신 우동집 주인장’, 씨줄과 날줄을 엮어 에도를 말하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축적의 시간’이자 ‘가교의 시기’로서의 에도시대에 주목한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근대화의 맹아가 태동하고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주제이다. 그 과정에서 단순한 외양外樣을 넘어 그 이면에 자리한 자본, 시장, 경쟁, 이동, 통합, 자치, 공공이라는 근대성의 요소가 어떻게 ‘수용·변용·내재화’를 거쳤는지 나름의 시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한 분석에는 저자가 직업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바라본 시각이 작용하였다. 외교관의 세계에는 “유능한 외교관은 모든 분야에 대해 조금씩은 알아야 하고, 한 분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전체적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을 중시하는 외교관의 직업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일 터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분야의 총합적 상호관계를 통시적diachronic·공시적synchronic 종횡으로 엮어내어 세계사적·지역적 좌표 속에서 이해의 틀을 구성하는 그러한 총합적 이해의 틀에는 생활문화사적 접근이 중요한 요소로 내포되어 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생활문화사적 관점에 기반하여 현대 일본의 원형原型으로서 에도시대의 다양한 모습을 담으려는 시도가 반영되었다. 당시 형성된 구성원들의 정서적 태도와 생활양식은 알맹이가 꽤 단단한 것이어서 현대 일본사회에도 연속성을 갖고 이어져 ‘일본적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도시 한복판에 소바집이 생기려면? 참근교대제의 낙수 효과, 된장의 정치경제학, 여행천국의 나라, 출판문화 융성의 비결, 세계최초의 전신마취 수술, 시대를 앞서간 지도 이노즈, 번역의 힘, 『해체신서』가 일으킨 혁명적 변화, 도자기와 차문화 등등 추상적 관념에서 탈피하여 실용과 실증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에도시대의 각종 도구적 성취와 특징을 중요한 소재로서 다루고 있다.
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지게 되었을까?
한국인들의 일본 역사에 대한 관심은 『대망大望』으로 대표되는 일본 센고쿠戰國시대의 영웅군담 스토리, 메이지유신, 러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르는 전쟁 스토리에 집중된다. 17세기 초반 에도 막부 성립에서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이전까지의 에도시대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식은 트리플 마이너리그의 역사이다. 그러나 에도시대는 서구의 르네상스, 대항해시대에 버금가는 전환의 시대이고 축적의 시대였다.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화 경로의 운명을 가를 거의 모든 선행조건들이 그 시기에 결정되었다.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를 되풀이하는 저주에 빠질 것이다”는 말을 남겼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치욕을 잊지 말아야 한다면 왜 빼앗겼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조선은 선善한데 일본이 악惡해서 나라를 빼앗겼다는 선악론은 역사를 반쪽만 바라보는 것이다. 어떠한 역사관을 택하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20세기 벽두에 조선은 약했고 일본은 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질문은 ‘왜 일본은 강했고 조선은 약했는가’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일본의 근세는 조선 근세의 거울이자 동전의 양면이다. 일본의 근세를 보면 비로소 조선의 근세가 뚜렷하게 보인다. 이 책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인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역사이지만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역사’인 일본 근세에 대한 한국 내의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한국 근대화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라도 일본 근세를 진지하게 조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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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사에 대한 관심은, 동시대 한반도에 대해 알 만큼 안다는 오만에서 출발했다. ‘불쑥‘ 성장한 듯 보이는 일본의 근현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가 서성대던 길목을 그들은 어떻게 통과한 걸까...이 책이 일러주는 근현대의 일본은,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근현대를 되돌아 보게 한다.
참한꽁딱심 ㅣ 2017-10-09 l 공감(1) ㅣ 댓글(0)
일본이라는 막연한 적대감 아래의 꼬장한 우리의 자존감 하지만 파헤쳐보아야 한다. 어쩌면 열등감일지도 모를 그 속을....
어린어부 ㅣ 2017-09-20 l 공감(0) ㅣ 댓글(0)
한국인이 일본 역사를 읽을 때에는, 미묘한 감정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에도시대의 사회문화상을 잘 그려냈지만 비교대상이 되는 조선을 까내리는 듯한 표현들을 읽을때마다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에도시대에 대해 궁금증을 해소해 준 좋은 역사책 임은 부인할 수 없는것 같다.
유즈삐 ㅣ 2017-09-06 l 공감(0) ㅣ 댓글(0)
일본 에도시대를 쉽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재미있게 일본 근세를 잘 알수 있어 좋았습니다
레비 ㅣ 2017-09-01 l 공감(0) ㅣ 댓글(0)
일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근대화를 착실하게 준비했는지 알려주는 재미있는 책
oldman ㅣ 2017-08-28 l 공감(0) ㅣ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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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5편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변경의 힘 LatteSorcerer ㅣ 2017-11-20 ㅣ 공감(1) ㅣ 댓글 (0)
한국은 1592년, 1875년 두 차례나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았다. 급기야 1910~1945년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05년부터 사실상 일제 통감부의 통치가 시작되었으니 실질적인 일제 강점기는 40여년에 달한다. 학창시절 한 나이든 선생님은 일본인이라면 누구든 때려도 된다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요즘은 일본 정치와 시민 개개인은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시각이 상식으로 자리잡았고 여행 등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삐딱한 시선이 강하다. 일본이 임진왜란과 구한말 조선을 침략할 정도로 강해진 까닭은 그저 서양의 신식 무기를 몇십 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이며 문명의 수준은 조선이 훨씬 높았다는 것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의 시각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는 임진왜란 이후 성립된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도시대) 일본 사회에서 전개된 사회-경제적 변화상을 소개한다. 미소 된장부터 염색 기술까지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인프라, 교육 / 연구, 교역, 화폐로 묶어서 후기를 적어볼까 한다.
에도시대 일본의 경제성장을 이끈 것은 정부의 대규모 인프라 투자였다. 특히 참근교대제와 천하보청 제도가 결정적이었다. 참근교대제는 지방 번의 영주들이 장자를 에도에 머물도록 하는 인질 제도로 고려시대 기인제도와 유사하다. 다만 고려가 지방 호족들로부터 직접 세금을 거둬들인 것과 달리 일본은 징세권을 번(지방정부)이 갖고 있었다. 대신 정부의 각종 공공사업에 대한 임무를 부과하였는데, 이를 천하보청이라고 한다. 막부는 번이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벌금을 부과하거나 영지를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각 번들은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행정력과 관련 노하우를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공공사업이 17세기 내내 진행된 결과 일본 도시들은 도로와 운하로 촘촘하게 연결되었고 편리해진 교통은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더욱 촉진했다. 참근교대를 위해 매년 영지와 에도를 오가는 다이묘들과 일자리를 쫓아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 이들을 상대로 한 숙박업과 요식업, 문화 산업이 생겨나면서 일본은 이미 에도시대에 시장경제 체제의 초기 단계에 진입하였다. 실제로 당시 에도의 인구는 100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 한양 인구 20만의 다섯 배에 달하는 규모다. 물자 거점 오사카, 문화 수도 교토의 인구도 수십 만에 달했다고 한다.
근세 일본의 학문적 발전도 놀랍다. 에도시대 일본의 교육기관은 크게 막부 직할 교육기관과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번교, 서민층을 위한 교육기관 데라코야, 그리고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주쿠가 있었다고 한다. 막부 직할 교육기관은 조선의 성균관에 해당하는 쇼헤이자카 학문소, 도쿄대학의 전신인 신식 교육기관 가이세이쇼(1856), 서양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1803) 등이다. 번교는 본래 다이묘를 위해 봉사할 무사 계급 자제들을 교육하는 기관이었으나 18세기 후반부터 의학, 서양 학문을 커리큘럼에 도입하는 번들이 증가하였다. 특히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 조슈 번은 조선, 병기 개발 등의 교육과정도 도입했다고 한다. 서민 교육기관인 데라코야는 읽기, 쓰기, 주판, 기본 상식 등을 가르쳤다. 주쿠는 설립자가 학생들을 모아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내용을 교육하는 형태로 고려 시대 문헌공도와 유사하다. 다만 문헌공도가 귀족 자제들의 과거시험 준비를 목표로 했던 것에 비해 주쿠는 하급 무사와 상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교육 내용도 의학, 천문학, 생물학 등 서양의 실용 학문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다채로운 교육 환경은 서양 학문에 대한 폭넓은 연구로 이어졌다. 일본 의사 스기타 겐파쿠, 사카모토 준안 등은 1771년 네덜란드어 의학서인 <타펠 아나토미아> 번역에 착수해 1774년 번역본 <해체신서>를 출간하였고 1792년에는 호시노 료에 의해 인체 골격 모형이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1833년 네덜란드어 사전 완성 등 당시 일본 학자들의 연구 범위는 생각보다 넓고 깊이가 있다.
면직물과 도자기에 얽힌 국제 무역도 흥미롭다. 16세기 일본은 명나라, 조선, 포루투갈로부터 도자기, 면, 인삼, 조총 등 신문물을 수입하고 대가로 은을 수출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남미 광산에서 은 생산이 급증하면서 면화의 수입 대체 필요성이 커졌다. 공급 증가로 은의 가치가 하락한 탓이다. 이후 조선으로부터 목면 기술을 도입하고 조선인 도공을 납치하며 도약한 일본의 기술은 17~18세기 국내 경제호황을 거치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일본 도자기 산업은 명-청 교체기 행운도 따랐다. 동중국해를 장악한 정성공이 무역을 바탕으로 복명운동을 벌이자 청나라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해상무역을 봉쇄해 버린다. 해금령은 엉뚱하게도 중국 도자기를 가져가 유럽에 팔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타격을 입혔다. 이때 일본 도자기가 대체품으로 네덜란드인들 눈에 띄었고 이마리야키가 유럽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렇듯 여러 나라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시작한 15세기 이후 역사를 이해하려면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적 시각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재미 있는 건 17~18세기 일본이 누렸던 경제적 번영이 막부의 능력과는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조선보다는 개방적이었지만 일본 막부와 관료 그릅 역시 유교적인 틀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민간의 사치를 억누르기 위해 옷감의 색상을 제한하는가 하면 정밀하게 제작된 최초의 현대식 지도를 수거해서 잘 '보관'하였다. 막부 정권의 실정은 주먹구구식으로 적용된 화폐개혁에서 정점을 찍는다. 막부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로지 막부의 권위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금화를 도입하면서 금과 은의 순도를 각각 85%와 80%로 결정하였다. 순도를 지나치게 높게 설정한 것인데, 막부의 이런 조치는 화폐 공급 부족을 초래해 디플레이션을 일으켰다. 물가 하락은 특히 미곡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막부와 무사 계급, 농민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1699년 금 57%, 은 20%로 순도를 낮추는 화폐개혁을 단행한다. 순도를 낮춰 화폐 공급이 증가하자 일본경제는 수요부족 상태에서 벗어나 이른바 겐로쿠 호황이라 불리는 에도시대 최대 경제호황을 맞이한다. 하지만 버블이 생긴 뒤에도 통화 공급이 계속되면서 일본경제는 다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6~7대 쇼군대에는 강성 주자학자 아라이 하쿠세키 등이 주도하여 금, 은의 순도를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때로 되돌리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였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경제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이와 같은 막부의 주먹구구식 화폐개혁은 막부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반복되었다. 기술적으로 다뤄야 할 통화정책을 막부의 재정 충당을 위한 도구 또는 정의나 도덕의 문제로 접근했기 때문인데, 이 점은 오늘날 정치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도시대 일본 하폐는 세 가지 모순이 뒤섞여 있었다. 세 가지 모순이란 1) 금-은-동화 2) 미곡본위제와 화폐본위제 3) 중앙 화폐와 지방 화폐가 병존한 것이다. 통일국가의 장점은 단일시장, 단일통화인데 일본의 경우 오사카는 은화를, 에도는 금화를 사용했다. 따라서 오사카에서 물건을 팔고 받은 은화를 에도에서 사용하려면 은화를 금화로 환전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환전 업무를 대행하던 상인 계층이 당좌수표, 어음 등으로 업무를 확장하면서 초기 금융업과 유사한 상인 집단이 등장하였다. 미곡 본위제와 화폐 본위제의 모순도 상인 계급의 성장을 도왔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에도 정부도 관리들에게 녹봉으로 쌀을 지급했지만, 정작 참근교대를 위해 도시와 영지를 오가야 하는 관리들은 현금이 필요했다. 상업의 발전은 현금에 대한 수요를 더욱 키웠다. 상인들은 이렇게 곤궁한 처지에 놓인 관리들에게 가을에 얻게 될 소출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면서 부를 쌓아 나갔다. 중앙 화폐와 지방 화폐의 모순은 지방의 각 번들이 에도 막부에 맞서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각 번들은 천하보청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태환권을 발행할 수 있었는데, 태환권은 정화(금, 은)로 바꿀 수 있는 태환 화폐와 불태환 화폐가 있었다. 훗날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사쓰마, 조슈 번 등은 화폐제도의 틈새와 밀무역을 이용하여 막부 정권을 무너뜨릴 경제력과 군사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핵심 원인은 뭘까?' 질문을 해봤다. 적극적인 대외무역? 동남아 국가들도 대외무역에 적극적이었지만 자력으로 식민지배를 피한 나라는 없다. 교역은 근대화의 필요조건일뿐 충분조건은 아닌 듯하다. 역덕(역사 덕후)들은 몇몇 분기점에 천착한다. 광해군이 실각하지 않았더라면, 소현세자가 왕이 됐더라면,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등이다. 그런데 소현세자나 정조가 롤 모델로 삼았던 청나라도 근대화에 실패했다. 내가 찾은 답은 변경이 지닌 상대적 자율성이다. 근세 이전 유럽과 동아시아 질서는 각각 교황과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다. 교황과 천자는 단지 권력이 제일 강한 사람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고 정신 문명의 모든 것이었다. 아무리 수천 명의 군대를 보유한 왕이라도 교황 또는 천자로부터 '인증'을 받지 못하면 왕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고려-조선시대에 '오랑케'가 된다는 것은 서양에서 파문을 당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문명세계로부터의 사형 선고. 유럽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중세의 교황중심 신념체계로부터 벗어났다. 그 중에서도 종교개혁이 성공한 영국과 독일이 18~19세기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19세기말까지 중화주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일한 예외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이미 17세기 무렵부터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체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소중화 질서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 중국의 질서, 중국의 학문을 의식할 필요 없이 독자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섬나라인 탓인지 전국시대가 통일된 뒤에도 중국이나 조선처럼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지 않았다. 각 번의 다이묘들은 막부의 천하보청만 잘 수행하면 독자적인 정책을 펼 수 있었다. 동아시아 조공책봉체제의 울타리 밖에 있던 일본, 그 중에서도 변경에 속했던 사쓰마, 조슈 번이 근대화의 주역이 된 것이야말로 변경의 자유로움이 지닌 숨은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평점 : 3.5 / 5
외교관이 풀어쓴 에도시대 이야기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 키치 ㅣ 2017-10-07 ㅣ 공감(11) ㅣ 댓글 (0)
학교에서 일본사를 배운 적이 있었던가. 교과서에 일본사와 중국사가 아주 짧게 실려 있던 건 기억하지만, 한국사를 배울 시간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시험에 나오지 않아서 건너뛰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내가 일본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다. 정치외교학 전공이고 개인적으로도 일본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관련 수업은 죄다 수강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일본사를 틈틈이 공부하고 있다. 주로 책이나 영화, 드라마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이라서 사실 '공부'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다.
전직 외교관 신상목이 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는 일본사 중에서도 에도 시대의 역사를 공부하기에 탁월한 교재다. 1996년 외무고시에 합격한 이후 일본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한 저자는 일본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외교부를 퇴직하고 현재 서울에서 '기리야마본진'이라는 우동가게를 경영하면서도 한일 관계 증진에 도움이 될 만한 저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도쿄)에 막부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를 일컫는다. 조선으로 따지면 선조 말기부터 고종 초기에 이르는 시기다. 알다시피 이 시기에 조선은 영, 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를 지속하지 못하고 당쟁과 세도 정치를 일삼다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기 직전의 상황에 치달았다. 반면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과 조선통신사에게 배운 문물, 그밖에 중국과 서양 국가들로부터 흡수한 문화와 문명을 십분 발휘해 근대화의 기반을 닦았다.
저자는 무려 400여 년 전부터 선진국이 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한 일본의 저력이 무엇인지 분석한다. 저자의 시선은 에도 시대의 정치를 비롯해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를 망라한다. 여행, 출판, 교육, 언론, 광고, 과학, 지도, 사전, 패션, 도자기 등 테마도 다양하다.
인상적인 건 에도 시대에 발전한 분야가 지금까지도 일본을 먹여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출판 강국인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매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만큼 대학 수준도 뛰어나다.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요미우리 신문은 에도 시대에도 있었고, 단순하고 간결한 미의식을 중시하는 일본의 패션 문화는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 조선 후기에 발전한 것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뭘까? 고리타분한 성리학 문화? 남존여비 사상? 착잡할 따름이다.
엄밀히 말해서 여행과 관광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관광이란 말은 중국 고전인 <역경>에 나오는 '관국지광'에서 비롯된 말이다. (중략) 일본의 유학자들은 관국지광, 즉 관광을 '나라의 빛을 살피는 것이 곧 군주의 덕을 가까이 느끼고 찬양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85쪽)
일본은 에도 시대 중기부터 여행 대중화가 진전되었다. 여행 대중화로 인해 일찍부터 교통망, 숙박시설, 치안, 오락시설 등이 생겨나고 융성했다. 이때의 여행은 진정한 여행이 아니라 관광의 속성이 강했다. 유교 사상에서 관광의 '광(光)'은 '빛나는 문물, 전통, 군주의 덕으로 이루어진 나라의 찬란함과 위대함'을 의미한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광복(光復)'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다. 에도 정부가 장려한 여행은 어디까지나 나라의 위용과 위대함을 확인하고 애국심이 고취되도록 하는 '관광'이었다.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역시 한국이 최고야!'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것이 관광의 목적이라니. 이 밖에도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돌아볼 수 있는 내용이 여럿 실려 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일본에 관한 것은 무조건 싫어도, 한 번쯤 읽고 찬찬히 생각해볼 만한 책이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 - 신상목 저 하얀소망 ㅣ 2017-09-28 ㅣ 공감(3) ㅣ 댓글 (0)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
신상목 저
뿌리와이파이 간
2017.08.07 간
8월에 읽은 ‘코리아 생존전략’과 9월에 읽은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를 읽으면서 일본은 어떻게 그렇게 우리와 다른 모습으로 개항을 맞이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마침 이 책이 지난 8월에 출간이 되면서 화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16년의 경험을 가진 외교관이라 합니다. 외교관으로서 해당 국가의 역사와 사회, 문화를 이해해야 제대로된 외교 정책이 입안될 수 있다고 하며, 평소에 연구해 온 일본의 근세사를 ‘생활문화사’의 관점에서 소개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저자가 전문 역사학자가 아님에도 내용 구성이 무척이나 풍성하게 느껴지며, 각 장은 읽는 재미가 느껴지게끔 쉬운 문체로 흥미롭게 쓰여 있어서 편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토요토미 가문과 토쿠가와 가문의 일대 격전을 벌였고 토쿠가와 가문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토쿠가와 가문은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 (현재의 토쿄)에 막부를 설립하였습니다.
에도시가 위치한 간토오 지방은 원래 얕은 늪지대여서 경작이 쉽지 않았으나, 토쿠가와 가문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이 지방으로 밀려온 뒤에 절치부심의 심정으로 그 지방을 개간하였고, 오랜 노력 끝에 일본 최대의 곡창지대로 탈바꿈하였다 합니다.
기존의 권력의 중심이었던 교토/오사카와 떨어진 곳에 또다른 정치/경제의 중심이 생겼고, 이러한 분립 구조가 일본의 역사를 바꾼 행운이 됩니다.
에도에 위치한 토쿠가와 막부는 전국의 지방영주들인 다이묘들에게 ‘천하보청’이라는 공공 사업의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또한 에도에 주기적으로 와서 일정 기간 머물게 하는 ‘참근교대제’를 실시했습니다. 이 두가지 의무를 이행하느라 다이묘들의 재정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세수를 자신의 부를 위해 축적할 여유가 없게된 각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 산업을 장려하고, 어떻게든 세수를 늘리기 위한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게 되었고, 이론 보다 실제가 위주가 되는 학문 경향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공공 사업에 의한 경제 부양 정책이라고나 할까요.
이러한 배경에서 저자는 중요한 항목들을 통해 그 시대를 얘기합니다.
제 4장. 일본의 된장이라고 할 미소가 원래는 전투식량이었고,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기술의 경쟁이 치열했다고 합니다. 에도 시대의 평화 가운데에서 민간의 미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시장에서의 경쟁이 치열했고, 보다 값싸게 공급이 되기시작했다고 합니다.
제5장. 참근교대제로 인해 에도로 향하는 도로가 발달하고, 도로 주변의 여행 관련 시설들도 제대로 갖춰지게 됩니다. 참근 교대제로 인한 공적인 여행의 일상화되고, 인프라도 갖춰지다 보니, 개인적인 여행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쿄토와 오사카, 에도 등에는 전국에서부터 관광객이 몰려왔고, 그시대로부터 불과 백여년 전인 전국 시대에는 일반 평민들은 여행이 불가했고, 무사 계급들도 여행은 목숨을 걸어야 가능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에도 시대의 평화 가운데에서 전국적인 여행의 붐이 일었다 하니,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지요. 경제적 기반과 더불어 전국적인 치안의 확립이라는 기반이 잡히지 않고서는 안될 일이겠습니다. 이 때 부터 전국 시대의 지방 중심의 가치관에서 일본인들에게 일본 전국을 하나로 보는 가치관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6장. 뜻밖에도 출판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독서 문화는 중국은 물론 조선에 비해서도 크게 뒤졌으나,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지적재산권으로서의 판권의 확립, 서적 유통업으로서의 대본업의 발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출판 강국 일본의 현재 모습의 근원을 짐작하게 합니다. 유명한 작가의 연재 소설은 그 소설의 다음 회차가 출판되기를 전 일본 열도가 기다리고, 출판되면 그 이야기로 전 열도가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합니다. 이러한 출판 문화의 발달 역시, 민간의 소비 성향에 따라 시장이 발전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제7장. 일본 파나소닉의 창설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예전에 마쓰시다 정경숙이란 것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에 관련된 책이 우리나라에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그 ‘숙’이란 것이 교육에 관련된 기관을 의미했는데 그 형태가 우리나라의 어떤 것과도 조금은 달랐던 것 같아서 신기했습니다. 숙 일본말로는 주쿠는 개방형 사설 교육기관으로 전문 지식인이 지식의 창출과 전수 활동 만으로도 소득을 얻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합니다. 조선시대의 서원과 비교하자면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테라코야라는 사설 교육기관도 있어서 읽기/쓰기와 함께 주산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의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교육 체제 역시 민간, 시장 주도의 현상이었다 합니다.
제 8장. ‘요미우리’라는 뉴스 전달 매체가 당시 인구 백만의 도시 에도를 배경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면, 이는 당시 발달하고 있던 상업과 더불어 소비자들에 대한 광고 매체로까지 활용이 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역시 민간 주도의 자생적 인쇄매체 입니다.
제 9장. ‘동아시아~’ 책에서 김시덕 교수도 상세히 다루었던 ‘해체신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제대로 된 사전도 없이 3년에 걸쳐서 일본어로 번역을 했다합니다. 1700년대의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804년 세계 최초의 전신마취 수술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의 실용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기존의 틀을 깨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의학 분야에서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역시 민간 주도의 결과 입니다.
제 10장. 한국에 대동여지도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이노 다다타가라는 지도 제작자가 있었습니다. 이노는 원래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고, 어쩌다 막부가 후원하는 지도 제작 업무를 맡게되어, 자신의 천문지식을 활용해서 상세한 지도를 작성합니다. 에도 시대의 평화를 배경으로 한 여러 개간 사업, 간척 사업, 건물 건축 사업 등을 통해 당시 일본의 측량 기술은 매우 발전해 있었고, 장비와 도구를 구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합니다. 이런 물적 기반에 자신의 천문지식을 결합시킨 이노는 놀라운 열정으로 5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3만 킬로가 넘는 일본 전국의 해안을 직접 실측하였다 합니다. 이노 다다타카의 업적은 지금 봐도 놀랐습니다. 당시의 막부도 이노 다다타카의 업적을 잊지 않습니다. 비록 군사 기밀유출의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민간 배포는 금했지만, 막부는 이노 다다타가의 자손 대에 이르기까지 후원을 지속합니다. 이노 다다타가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합니다. 조선에서의 김정호의 운명과는 사뭇 비교가 됩니다.
제 11장은 사전 편찬의 이야기입니다. 최초의 네덜란드어 사전(난일 사전)은 민간이 주도했지만, 더 상세한 난일 사전은 막부가 주도했습니다. 민간이 주도한 것을 막부가 주도하여 완성한 모습입니다. 사전 편찬은 어찌보면 지식 인프라 사업일 수 있습니다. 필요할 때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막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12장은 섬유 산업의 얘기입니다. 목면을 중심으로 한 섬유 혁명이 섬유 자체의 제조 뿐 아니라, 염색을 통한 디자인 고급화, 유통에 이르기까지의 밸류체인이 인구 백만이라는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 에도를 배경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당대 최고의 전문가가 다른 전문가들을 모아 상업적 카탈로그 까지 만들어 배포했다고 하니 그 배경이 되는 상업적 인프라가 어느 정도였을지요,.
제 13장은 염색된 섬유가 유통하게 되면서 이것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한 막부가 ‘사치금지령’ 을 내려 옷의 색깔을 쥐색, 차색, 남색의 세가지로 제한했다고 합니다. 막부가 항상 도와주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색의 제한이 도리어 허용된 색을 중심으로 한 색의 세분화 및 표준화를 낳았다고 합니다. 중간색, 혼합색 등의 미묘한 색변화가 일본의 전통문화의 중심이 되어 ‘이키’, ‘야나세’라고 하는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를 형성했다고 합니다. 역시 민간 주도의 섬유 산업이 어떻게 당시의 문화를 형성해서 오늘까지 내려오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 14장은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임진왜란 때,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갔는데, 일본에서의 상황은 마침 그들의 기술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삼평이란 도공이 끌려간 곳은 일본의 사가 번의 아리타라는 지역. 사가 번의 번주는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서 새로운 산업이 필요했었고 도자기는 그에 알맞은 제품이었다 합니다. 번주의 지지와 후원을 등에 입고 아리타 도자기는 일본 전국으로 유명해집니다.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주요 수출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합니다. 중국의 도자기가 중국 내부 사정으로 유럽으로의 공급이 줄어들면서 일본의 도자기가 그 대안으로 인식되었고, 아리타 도자기는 중국산을 대체할 만큼의 품질을 가지고 있었다 합니다. 일본은 그 무렵에 유럽에 대한 수출산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15장에서는 19세기 일본 도자기 산업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해외로 소개되었던 일본 도자기 산업이 개항기를 맞이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서게 됩니다. 1873년 오스트리아 빈의 만국 박람회는 오늘날의 그 어떤 행사보다 컸다고 합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가 많이 없던 시대에 박람회는 그러한 정보가 모이는 장소였기에 수백만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그 박람회에 일본에서는 당시의 기술로는 어렵다고 생각했던 2미터짜리 초대형 도자기를 출품하여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고, 박람회 이후 수출물량이 거의 2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 박람회는 민간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민간 주도로 참가하였고, 1877년에는 뉴욕 브로드웨이에 도자기 전문 상점을 내기도 하였다 합니다.
제16장에서는 에도 시대 지식의 흐름 세가지로서 오규 소라이의 유학, 이시다 바이간의 심학, 그리고 난학을 얘기합니다. 오규 소라이는 공자의 ‘원전’을 기반으로 주자학을 비판하였다 합니다. 이시다 바이간은 심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상업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 이라는 것을 가르쳤고, 이러한 심학 사상은 당시 세력을 키워가던 상인 세력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제 17장과 18장은 에도 시대의 화폐 경제 현황과 그 문제점을 짚습니다. 에도 시대의 일본에는 금, 은, 동 세가지 화폐가 있었다 합니다. 금화는 동부의 에도 지역을 중심으로, 은화는 서부의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쓰였으며, 동화는 자디잔 잔돈의 역할을 했습니다. 서부에서 동부로, 동부에서 서부로 관광여행을 하거나, 참근교대제 때문에 이동을 한다 했을 때, 금화를 은화로, 은화를 금화로 환전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 환전을 담당한 상인들이 ‘료가에쇼’였으며, 이들이 커지면서 미쓰이, 스미토모 등의 재벌의 기원이 되었다 합니다. 당시 아직 전세계적으로 화폐 경제에 대한 경제학적 지식이 전무했던 상황이다 보니, 막부가 정책적 실수를 여러번 저질렀다 합니다. 금의 비중을 줄여서 화폐를 내놓는 바람에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합니다. 각 지방 번은 ‘한쓰’라는 번 지역내 화폐를 사용했다 하는데, 이들 지역 화폐는 금화나 은화와 같이 자체로서의 가치를 가지지 않은 그야말로 불태환화폐, 신용화폐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도를 활용해 각 번은 상업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합니다. 향후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는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이런 상업활동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였기에 독자적인 사절단을 유럽에 보낼 수도 있었다 합니다.
에도 시대 민간 경제는 화폐 중심으로 발전을 했음에도, 막부에서 무사계급에 지급하는 녹봉은 미곡 본위였다고 합니다. 쌀 생산의 생산성 향상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미곡의 가격이 하락하여 무사 계급의 지위가 상인 계급 대비 하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합니다. 마치 유럽에서 신흥 부르조아 계급이 귀족 계급 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서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과 유사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에도 시대라는 기간 동안 일본은 안정된 정치를 배경으로, 경제, 사회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기에 19세기에 밀어닥친 개항의 물결에 대응할 수 있었다 합니다. 그러한 발전이 중앙 정부가 아닌 민간의 수요 증가에 따른 시장의 힘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저자의 기조입니다.
저자의 의도가 ‘생활문화사’를 통해 그러한 부분을 조명해 보자는 것이었지만, 독자로서는 몇가지 추가적으로 궁금한 점들이 생기기는 합니다.
첫째로는 수요의 증가에 상응하는 공급의 증가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물론 책에 단편적으로 소개되는 바로는 쌀 생산의 생산성 향상이 있었다는 점, 도자기 등 다양한 상품이 제조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이 있긴 합니다만, 그러한 내용이 종합적으로 다루어진 챕터가 하나 더 있었더라면 아쉬움은 덜했을 것 같습니다.
둘째로는 민간에 축적된 부가 증가하면서 일본 전체가 발전했다는 것인데, 그렇게 축적된 부는 어떻게 분배가 되었을지, 빈부격차는 어땠는지 등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1800년대의 유럽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극심한 빈부 격차는 결국 사회주의 운동을 낳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산업혁명 이전이었기에 유럽의 산업 자본주의에서와는 상황이 달랐겠지만, 부의 축적은 언제나 불균등할 수 밖에 없었을 테고, 이로 인한 사회불안은 없었던 것인지, 있었다면 어떻게 해결을 하고 넘어왔는지 등이 궁금해 졌습니다.
세째로는 당시의 일본의 상황이 유럽에서의 부르조아 혁명기의 상황과 어떻게 매칭이 될까 하는 점입니다. 어차피 사회문화적 배경이 다르기에 비교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비교를 통해 조금 더 알게 되는 점도 있을 듯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마도 메이지 유신에 대한 다른 책들을 찾아보는게 맞을 것 같기는 합니다.
지금도 강력한 관료제의 나라라고 인식되어 있는 일본인데, 그 발전의 원동력은 민간 주도의 시장 경제였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어떤 부문은 정부의 방임이 필요하고 어떤 부문은 정부가 주도하는게 필요할 텐데, 일본 에도 시대는 그러한 역할 배분이 잘 맞아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었으면 하는 일본사 어린어부 ㅣ 2017-09-20 ㅣ 공감(0) ㅣ 댓글 (0)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형용모순된 표현 그대로
우방이자 제1의 가장적국인 일본
36년의 일제강점기를 떠올리면
영화 밀정과 암살을 떠올리면
제자리에서 독립군가와 애국가를
4절까지는 불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분노의 기억을 가진 나라
대한민국
하지만 일본에 대해
우리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 분노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혹시 고대로 이어진
상국의 꼬장한 자존감에서
오는 열등감은 아닐까
그것이 오늘날
그들을 쪽발이라 부르며
하대하는 세계 유일의 겉멋을
가지게 한 건 아닐까
외교관이라는
지극히 실리적이며 이성적인 관점
이제는 외교관이라는 공직을
떠나 헬반도의 개미 자영업자가
되어있는 작가의 관점은
그래서 자뭇 흥미롭다.
책을 일관하는 내용은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지극한 인과론의 설명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바로 보고 바로 알아야 한다는
지피지기백전백승의 자강론을
에도시대의 예시를 통해
매우 쉽게 전해준다
에도라는 시기
평화속 혼란이 잠식되어 가던
그 시기에조차
위기를 기회로 삼는 실용주의의 기틀을
놓치지 않았던 그들 일본,
하루 반나절의 대한해협을 두고
당쟁과 세도정치에
탐학과 부패가 일상이 된
봉권국가 조선의 국세 차이는
이미 유교라는 민본의 관점에서도
누구의 우열을 가리는데
부족함이 없었을 시대
세상의 변화에 눈감았던
선조의 불행하고 불운했던
시대를 억울 이라는 수동적 자세가
아닌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역사의 교훈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일임을
개론서 이자 입문서답지 않은 깊이의 책
'학교에서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독후평점 별셋 (知日을 하기 위한 색다른 입문서)
책속 기억 한문장 : 아널드토인비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도전과응전'의 원리로 설명한 바 있다.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한 거울 - 일본의 에도시대에 대한 이야기 장한별 ㅣ 2017-08-23 ㅣ 공감(1) ㅣ 댓글 (0)
기리야마본진 신상목 사장님의 두 번째 저서입니다. 월간조선에 <일본物語(모노가타리)> 연재글을 자료로 해서 엮은 한국인들은 잘 모르기 쉬운 에도시대 사회문화사네요. 저는 페이스북에 일부 원고들을 맛보기로 포스팅해주실 때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출판을 기다렸던 책입니다. 요즘처럼 감정적인 반일주의가 극심한 시점이라 더 반갑고, 출간 직후 판매량이 많아서 흐뭇하군요.
예를 들어 신슈미소(아이치현)와 센다이미소라는 필수 식재료시장을 놓고 벌어진 기술혁신과 증대된 소비자 효용의 구체적인 실례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막부에 대한 일정한 의무만 이행하면 상당한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던(심지어 자역 화폐 발행까지 ㅎㄷㄷ) 각 번들 사이의 경쟁이 보다 근대에 가까운 사회를 만든 것이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일본의 시대구분을 따라서 한국사학계에서도 조선시대를 '근세'로 분류하긴 하지만 낙성대학파의 실증연구에 판판히 깨져나가는 국사학계의 사회경제사 선행연구들을 떠올리면 일본과 같이 근세를 겪었다고 말하는 건 국뽕이라 생각합니다. 일본한테 뒤쳐졌다고 억울해할 것도 없고요.
전세계의 인류가 AD 1세기 무렵 로마시민권자들이 누리던 삶의 평균적인 수준을 다시 회복한게 (그것도 유럽에 한해서)14세기 이후라고 하니까요.(이언 모리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의 사회발전지수 참조)
이 책의 목차에 등장하는 에도의 탄생, 참근교대제, 목판출판문화, 뉴스와 광고의 원형, 이노 할아버지의 지도, 서양언어 사전 편찬, 도자기 등등의 일일이 언급하기 힘든 다양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페이스북에 연재하시지 않았던 부분도 많고요.
신사장님을 통해서 <해체신서>의 위대함에 대해 듣고나서 몇 달 후에 아키타현을 갈 일이 있었습니다. 첨부한 사진들처럼 에도시대 사무라이 마을 가쿠노다테(1620년대 조성)의 청류가에서 사본을 보니 더 그 느낌이 더 각별하기도 했습니다. 일제시대의 수탈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도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서세동점의 시대에 악착같이 대응했던 에도시대 일본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부분도 인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신사장님은 끝부분인 제17장과 18장에서 화폐제도와 에도시대 체제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동시대 서양이 아닌 다른 지역 국가들 모두 같은 실정이었습니다. 즉, 일본이 웅덩이의 최강자인 악어로 진화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거죠.(악어가 된 원인이 꼭 에도시대에서 기인할 필요는 없지만요.)
신사장님의 첫 책 <일본은 악어다>도 재미있게 읽었던 입장에서는 에도시대부터 동양에서 독보적으로 앞서나갔고 전후에 경제적 부흥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웅덩이 안에서만 최강자로 군림할 수밖에 없는' 원인에 대한 말씀들을 기대했거든요. 예를 들어 일본의 월등한 관광인프라와 오퍼레이션 수준때문에 해외여행을
점점 더 가지 않는 일본인들의 성향으로 인한 국제적인 인적 교류에서의 상대적
소외라던가 말이죠.(다음 번 책 소재로 남겨두셨을 수도 있죠.)
외교관, 국비유학생, 중앙부처의 과장급 공무원, 우동 장인(쇼쿠닌), 여러
명을 고용 중인 사업체의 대표까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누구보다 우리 사회를 입체적으로 보시는 분께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에게 비춰주는 거울같은 소중한 책이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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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쪽
여행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물질적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동에 필요한 교통망, 숙박시설, 치안, 희구의 대상이 되는 명소 명물, 유희 또는 도락거리가 존재하여야 하며, 무엇보다 일시적이나 노동에서 벗어난 여가의 시간과 이동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한다. 일본은 특이하게도 전근대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행 대중화의 조건이 충족되고 제약이 제거되었다. 일본은 18세기 중엽에 이미 연간 100만이 넘는 여행객들이 전국을 누비는 세계 최고의 여행천국이었다.
208쪽
일본 정부는 (1873년 빈 만국박람회) 현지에서 '기립공상회사'라는 반관반민 성격의 무역회사를 급조하여 보증서를 발급하였다. 급조된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회사 형태 조직의 유용성을 체험한 관계자들은 이듬해 도쿄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공예품과 미술품을 위주로 일본 물산을 해외에 수출하는 업무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일본식 무역진흥공사(JETRO)의 원형이었다.
총 : 1편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얼음칼 | 2017-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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