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3호]북·미 태우고 시동 걸다 : 특집일반 : 특집 : 뉴스 : 한겨레21
김동엽의 안 보이는 안보
북·미 태우고 시동 걸다
예비와 탐색 단계 없이 직진한 정상회담엔 뛰어난
한국 중매술과 김정은의 트럼프 취향 저격도 한몫
제1203호
등록 : 2018-03-12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0년 10월23일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과 백화원 초대소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18년 전 북·미는 오랜 대립을 끝낼 정상회담의 문턱까지 갔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당선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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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과 미국을 방문했던 특별사절단이 돌아왔다. 평창겨울올림픽의 성화와 함께 시작된 ‘1막’의 커튼이 평창겨울패럴림픽 시작과 함께 내려갔다. 복선을 깔고 서막 정도로 진행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1막부터 남북 정상회담을 넘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등장했다. 탐색이나 예비 대화를 위해 여건 조성이 먼저 되어야 한다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더니만, 모두 건너뛰고 바로 정상회담이 결정됐다. 예상치 못한 빠른 진전이다.
선물, 숙제 혹은 골칫거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치의 양보 없이 말폭탄을 주고받던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연출은 없을 듯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의도된 연출인지, 김정은과 트럼프의 파격적인 연기력 덕분인지 자못 궁금하다. 따라잡지 못할 만큼 빠르게 전개된 1막을 복기하며 2막 커튼이 올라가길 기다린다.
먼저, 방북 특사단은 3월6일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6개항의 방북 결과를 언론발표문으로 공개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방남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의 제안을 김정은 위원장이 수용하는 형식이라고 전해졌다. 실제 합의한 내용도 있고 김정은 위원장이 언급한 내용도 함께 담았을 것이라 본다. 1박2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양손에 제법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왔다. 말 그대로 실망스럽지 않은, 기대 이상의 결과가 틀림없다.
북한은 우리 특사단 복귀에 앞서 <노동신문>에 사진과 함께 김정은 위원장이 “북남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시키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는 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 허심탄회한 담화”를 나누었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세계가 보란 듯이 북남관계를 활력 있게 전진시키고 조국통일의 새 력사를 써나가자는 것이 우리의 일관하고 원칙적인 립장이며 자신의 확고한 의지”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그것이 전부다.
방북 특사단의 6개항 발표문이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수석대표로 한 대미 특사 방문 이후 트럼프 대통령마저 흥분케 한 북-미 정상회담 발표를 생각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만큼 온도차가 있다. 북한이 차분한 이유가 궁금하다.
특사단이 발표한 것은 남북 공동보도문이나 합의문이 아니라 우리 쪽에서 작성한 언론발표문이다. 없는 이야기를 했다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 사실이라고 믿는다. 단지 얼마나 가감 없이 김정은의 목소리와 진의를 담았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돌아오기 전 북쪽에 우리 언론발표문을 보여주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돌아가면 이런이런 내용을 공개할 것이란 정도는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한다. 우리가 발표한 6개항을 사전에 듣고도 북한이 “일없습메다” 했다면 한번쯤 발표를 고민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모두 ‘선물꾸러미’인지, 차분히 풀어나가야 할 ‘숙제 상자’인지, 아니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골칫덩어리’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이번 특사단 방북의 최고 성과는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4월 말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기로 합의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대한 상황에서 정상회담을 우리 지역인 판문점 평화의집(북한 지역 시설은 ‘통일각’이다)에서 열기로 한 것은 예상치 못한 반전이다. 평양에서 있었던 두 차례의 정상회담에 대한 북한 최고지도자의 답방 형식만으로 보기에는 의미가 크다. 또 평양에서 하는 것 아니냐는 우리 내부적 불만과 의심의 눈으로 지켜볼 미국을 생각해볼 때도 최적의 장소다.
서울-평양 간 ‘일일 정상회담권’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7년 11월30일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5형 발사 성공을 확인하며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위원장은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 남쪽 땅을 밟는 최초의 북한 지도자가 된다. 그동안 북한 최고 지도자가 남쪽으로 내려올 수 없었던 이유가 경호상 문제였다면 판문점은 이런 우려를 없앨 수 있는 장소다. 선대인 김일성·김정일과 차별화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정상적인 국가 지도자의 모습을 대외적으로 보여줄 기회를 얻게 됐다. 우리는 앞으로 문 대통령의 평양 답방이라는 4차 정상회담의 다른 기회를 얻어 남북관계 동력을 이어갈 수도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린다는 것은 남북의 정상이 원할 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실용적인 정상회담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남북 정상은 이번에 설치될 정상 간 핫라인을 통해 만나고 싶으면 전화로 연락하고 출발해 몇 시간 뒤면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서울-평양 간 ‘일일 정상회담권’ 시대를 열게 됐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정상 간 핫라인은 앞으로 남북 신뢰와 존중을 더하는 혈맥이 되리라 기대한다.
남북 정상회담이 예상보다 빠른 4월 말에 열린다는 것은 북한이 남북관계에 ‘올인’한다는 방증이다. 우리의 중매로 북-미 정상회담이란 혼담이 오가게 되니, 북한이 남북관계를 통해 워싱턴으로 접근하려는 통남통미 전략을 쓴다는 평가가 설득력을 얻는다. 과연 그럴까?
김정은 위원장은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에게 무관심한 듯하다. 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 북-미 대화를 성사시켜준다면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일종의 ‘꽃놀이패’다. 오히려 남북관계를 부여잡고 2018년을 넘어 트럼프의 남은 3년마저 버릴 수 있다는 각오로, 어쩌면 2021년으로 예상되는 ‘제8차 당대회’까지 내달리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북한이 이처럼 미국을 밀치고 남북관계에 집중하는 것은, 결국 미국의 ‘최대 압박’과 제재나 군사적 옵션이 먹힌 것 아니냐는 평가가 있다. 북한이 대화로 내몰릴 만큼 내부 사정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면도 없지 않겠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김정은 정권 이후 특히 지난 2년간 펼쳐진 북한의 행동을 돌아보면 나름의 로드맵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5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남쪽은 꾸준히 북한과 관계 개선에 노력해왔고 물밑으로 대화 통로를 만들려 해왔다. 하지만 북한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랬던 북한이 문을 열기 시작한 시점이, 지난해 11월 말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 15형 발사에 성공하며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이후다. 북한이 2017년 핵무력을 완성하고, 2018년 신년사에 평창올림픽 참가와 대남 평화 공세로 나올 것이란 점은 이미 예견되었다. 북한 입장에서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고 평창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 최고의 시나리오였다(제1191호 김동엽의 안 보이는 안보 ‘90점짜리 핵무력 성적표’ 참조).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북-미 대화나 북-미 관계 개선에 나설 의향은 없지만, 북-미 대화를 절실히 요구하는 남쪽을 방해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남북관계가 속도를 내려면 한-미 관계와 북-미 관계가 선순환까지는 아니어도 부정적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김정은 위원장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를 북-미 대화의 테이블로 유인하기 위해 진짜로 필요한 카드는 북한만이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략전 선택과 전술적 치장
김정은 위원장이 대북 특사단에 비핵화와 북-미 대화 의지를 표명하고,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한다. 심지어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대해서도 “이해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발 뻗을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다행스럽게 트럼프 대통령도 “한국과 북한에서 나온 발표들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이 만든 보기 좋은 장식이 트럼프 대통령의 취향과 맞아떨어진 것일까? 대미 특사단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을 초대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가 전달되었고, 트럼프 대통령도 5월 이내에 만나자고 바로 수락했다. 예비와 탐색의 단계 없이 정상회담으로 바로 가게 되었으니 뛰어난 중매술도 있었겠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듯하다.
2막에는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까.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면 다음은 북-미 수교일 거라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대북 특사단의 결과 발표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또 “비핵화 문제 협의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해 미국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한반도 비핵화’가 선대의 유훈으로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직접 들은 것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 확인 차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선대 유훈을 포기하거나 부정한 적이 없다. 북한이 이야기하는 비핵화는 한반도 비핵화다. 이를 위해 2016년 7월6일 정부 대변인 성명으로 5가지 ‘조선반도 비핵화’ 원칙을 제시했다. ①남쪽에 있는 핵무기 공개 ②남쪽의 모든 핵무기 철폐 및 검증 ③핵타격수단(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금지 ④북한에 대한 핵공갈 및 공격 금지 ⑤주한미군 철수가 그 내용이다.
불안 요소는 북한이 말하는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빠졌다는 점이다. 이는 미국이나 우리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미국이나 우리가 아무리 군사적 위협이나 체제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해도 북한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북한의 핵보유는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문을 열고 내리게 해선 안 된다
실제 북한이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를 등가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북한은 이미 여러 차례 핵이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거래의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리비아와 우크라이나 사례를 생각해볼 때, 북-미 관계 정상화가 북한이 핵을 가질 필요가 없는 ‘군사적 위협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리라고 보지 않을 수 있다. 약소국이 강대국을 무기로는 이길 수 없다. 북한도 핵무기로 미국을 이기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의지와 전략의 문제다.
한국은 운전대를 잡고, 일단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을 차에 태우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이제 시동을 걸고 나아가야 한다. 4월 남북 정상회담과 5월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지만, 2막을 마냥 낙관적인 눈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문을 열고 내리게 해선 안 된다. 1막에서 이루어낸 남북, 북-미 그리고 한-미 관계의 접촉면을 확대해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갑작스레 닥칠 수 있는 긴장과 위기 국면을 완화하는 제2, 제3의 평창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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