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훈 (지은이) | 문학과지성사 | 201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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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소설 명작선 1권. 해방 후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며, 한국인의 삶의 궤적을 20세기 세계사의 진폭 속에 위치시키고 인간 존재의 본질 규명에 주력하는 무수한 기념비적 작품들의 작가이자 살아 있는 지식인의 표상, 다름 아닌 작가 최인훈이다. 그의 대표작 <광장>은, 1960년에 처음 발표되고 55년이 흐른 지금까지 세대를 거쳐 거듭 읽히며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해방―전쟁―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주인공 이명준의 깊은 갈망과 고뇌를 그린 <광장>은 남북 간의 이념-체제에 대한 냉철하고도 치열한 성찰로써 그 깊이를 드러내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항대립을 극복하려는 한 개인의 역정이기도 하다.
반세기가 넘도록 한민족의 여전한 현실인 분단 상황을 상기할 때 이 작품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보다 삶의 일회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 개인과 사회/국가가 간의 긴장과 갈등, 인간의 자유와 사랑과 같은 본질적 주제에 대한 폭넓은 성찰이야말로 <광장>이 한국 현대 문학사 최고의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광장
구운몽
원재훈 (시인)
: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이데올로기와 사랑
박홍순 (작가, <미술관 옆 인문학>, <저는 인문학이 처음인데요>등.)
: 분단, 금기의 영역을 건드리다
저자 : 최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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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2011년 박경리문학상, 1994년 이산문학상, 1979년 서울시문화상, 1966년 동인문학상
최근작 : <한국 현대희곡선>,<광장 / 구운몽>,<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 총 73종 (모두보기)
소개 :
1936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 법대에서 수학했다. 1959년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이 『자유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1977년부터 2001년 5월까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 집필과 후진 양성에 힘써왔다. 주요 작품으로 『광장/구운몽』 『회색인』 『서유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하늘의 다리/두만강』 『우상의 집』 『총독의 소리』 『화두』 등의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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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분단 상황에서 20세기 세계체제론에 이르는 문학적 성찰의 역정, 최인훈 문학을 대표하는 『광장』(1960), 통쇄 189쇄 돌파
『광장』 발표 55주년 기념, 『새벽』지 1960년 11월호에 함께 실렸던 삽화 6점 수록
김성곤(한국문학번역원장) 번역으로 영역본(Dalkey Archive Press, 2014)도 출간
전후 한국 문학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작 『광장』
해방 후 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며, 한국인의 삶의 궤적을 20세기 세계사의 진폭 속에 위치시키고 인간 존재의 본질 규명에 주력하는 무수한 기념비적 작품들의 작가이자 살아 있는 지식인의 표상, 다름 아닌 작가 최인훈(1936~)이다. 그의 대표작 『광장』은, 1960년에 처음 발표되고 55년이 흐른 지금까지 세대를 거쳐 거듭 읽히며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해방―전쟁―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주인공 이명준의 깊은 갈망과 고뇌를 그린 『광장』은 남북 간의 이념-체제에 대한 냉철하고도 치열한 성찰로써 그 깊이를 드러내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항대립을 극복하려는 한 개인의 역정이기도 하다. 반세기가 넘도록 한민족의 여전한 현실인 분단 상황을 상기할 때 이 작품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보다 삶의 일회성에 대한 첨예한 인식, 개인과 사회/국가가 간의 긴장과 갈등, 인간의 자유와 사랑과 같은 본질적 주제에 대한 폭넓은 성찰이야말로 『광장』이 한국 현대 문학사 최고의 고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50년 넘게 계속된 『광장』 다시 쓰기, 그 판본의 역사
4.19혁명 55돌과 그 햇수를 같이하는 『광장』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작가의 개작에 대한 쉼 없는 노력으로 어쩌면 한국문학사상 가장 많은 판본을 지닌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인훈은 당초 잡지에 처음 발표했던 600매 정도 분량의 중편소설이었던 『광장』을 이듬해인 1961년에 정향사에서 단행본으로 낼 때 200여 매를 덧붙여 장편소설로 발표했었다. 말하자면 이 판본이 지금 우리가 읽는 『광장』의 원형(原型)에 해당한다. 작가는 다시 1967년에 신구문화사에서 간행한 『현대한국문학전집』에 이 작품을 실으면서 섬세한 교정을 거쳤고, 1973년에 민음사판 단행본을 내놓으면서 한자어를 한글로 바꾸고, 『광장』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인 갈매기가 등장하는 부분을 손질하기에 이른다. 무엇보다 1976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최인훈 전집〉을 발간하면서 개작 수준의 대폭적인 수정과 교정이 이뤄졌음도 알려진 바다. 작품이 가졌던 연대기적 (기억의) 모호함을 바로잡고, 한자어의 그늘을 완전하다 싶을 만큼 벗은 데다가, 철학도였던 작가 자신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입장을 이명준의 입을 빌려 넌지시 전하기도 했다. 작가 스스로 가장 크게 애착을 기울였다고 고백한 문체 면에서는 재래의 문체를 탈피하고 콤마 하나하나와 문장의 리듬에 따른 분절과 어미에 있어 대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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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삶. 명준의 선택은 항상 마음을 뛰게 하고, 젊음에서 시작되고 젊음을 관통해 젊음으로 향한다. 그는 아마도 체게바라와 친구하며 세상 어느 언저리에서 젊을 것이며 궁극의 자유를 추구하고 누리리라...
rushfire ㅣ 2017-12-22 l 공감(0) ㅣ 댓글(0)
광장 쵝오
팔루스의 기표 ㅣ 2015-01-22 l 공감(0) ㅣ 댓글(0)
총 : 5편
광장 아닌 광장 불가록 ㅣ 2017-12-18 ㅣ 공감(0) ㅣ 댓글 (0)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헤밍웨이는 소설『노인과 바다』를 다 쓴 후에도 도입부 한 문장을 완성하지 못해 수 백 번을 고쳐 썼다고 했다. 소설에서 첫 문장이란 그만큼 중요하다. 나는 광장의 이 첫 문장을 좋아한다. 광장의 이 첫 문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도입부로 손 꼽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 문장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에 두 번째 읽게 되었을 때, 나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의 바닷속에서 가프게 숨을 쉬고 있는 명준을 볼 수 있었다. 바다는 명준이 숨 쉴 수 있는,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광장이었다. 그곳은 북조선에서 그에게 유일한 쉼터가 되어주었던 은혜와, 그녀와의 사랑의 결과물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광장이다.
소설은 광장 위의 배, 정확히 중립국으로 향하고 있는 타고르호 위에서 명준이 시선을 느끼면서 시작한다. 배 위에서 자꾸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그 시선은 타고르호를 따라 항해하고 있는 흰 갈매기 두 마리의 시선이다. 선장은 뱃사람들은 그런 새를 ‘뱃사람을 잊지 못하는 여자의 마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명준은 갈매기를 보며 옛일을 회상한다. 철학과 3학년이던 그가 어떻게 이 타고르 흐를 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남조선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는 느닷없이 서에 불려간다. 월북한 아버지가 대남 방송에 나오는 것을 빌미로 명준을 부른 것이다. 그는 형사에게 폭행을 당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를 부르짖던 남한의 땅에서, 일순간에 그는 법의 보호 밖으로 소외된 사람이 되었다. ‘빨갱이 혐오’ 앞에선 법도, 권리도 모두 무력해졌다. 소외된 그가 찾은 광장은 윤애였다. 그러나 명준에게 있어 윤애는 전부를 내어주지 않는, 확신할 수 없는 존재였고, 불완전한 광장에서 명준은 도망치듯 북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명준이 만난 인민공화국은 그가 상상하던 혁명의 땅이 아니었다. 이미 혁명의 불꽃이 다 타버린, 잿빛 공화국이었다. 피가 끓는 혁명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개인적인 ‘열정’ ‘욕망’을 터부시하는 곳, 오직 ‘당’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명준은 또 자신이 설 광장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 명준에게 설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내어준 것은 이번에도 여자, 은혜였다. 그녀는 윤애와는 달리 확실한 광장이었다. 좁아지는 부채꼴의 마지막 그가 설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전쟁은 그에게서 그런 공간마저 앗아가버린다. 이렇게 서 있던 모든 공간을 빼앗겨버린 명준은 중립국으로 향하는 타고르 호에 몸을 싣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타게 된 타고르호에서 그는 따라오는 갈매기의 시선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곧 그 갈매기가 은혜와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거기서 새로운 광장을 발견하게 된다.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광장, 자신의 사랑과 그 사랑의 결실이 기다리고 있는 광장. 그는 웃는다.
나는 숨이 턱 막히었다. 읽던 내내 답답했었던 가슴은 끝내 뚫리지 못하고 아예 막혀버리고 말았다. 과연 그 푸른 광장은 새로운 희망인 것일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나는 소설에서 한 줄기 희망도 찾지 못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인간, 북에도 남에도, 그 동료들에게도, 심지어 사랑의 울타리 안에도 속하지 못했던, 정말 한 뼘의 광장과 한 마리의 벗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명준에게 세상은 디스토피아 그 자체이다. 무사유와 혐오가 판치는 세상, 그 둘이 얽히고설켜 풀 수 없는 실타래가 되어버린 지옥이다. 나는 읽는 내내 『1984』를 읽던 때보다 더 절망스러웠다. 그 이유는 소설 속 현실이 우리의 과거였고, 또한 현재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명준이 설 광장이 있는가. 아직까지도 ‘빨갱이 프레임’을 씌우고, ‘적폐’로 지목해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 여성 혐오, 남성 혐오가 판치고 인종차별이 존재한다. 나는 현실에서도 소설 속 광장 없는 세상이 보인다. 우리는 과연 명준이 설 수 있는 광장을 만들 수 있을까? 『광장』속 명준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배에서 사라져버린 명준의 마지막은 아쉬움을 주었다.
[낙서평]운명이 만나는 자리, 『광장』 - 최인훈 낙서 ㅣ 2017-05-16 ㅣ 공감(2) ㅣ 댓글 (0)
운명이 만나는 자리 '광장'
『광장』이라는 작품을 기억하시나요? 제목만을 기억하는 분도 계실 수 있고, 혹은 ‘중립국’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리실 분도 있으시겠지요. 저 역시 어렴풋이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국어책에 실린 문학작품들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었습니다. 내신 공부, 수능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던 때였죠. 작품의 재미,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빠르게 주제, 의미, 출제 가능성들을 따지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쉬워요.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 한편 한편이 재미있고 읽을 가치 역시 충분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분명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야 『광장』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익숙한 제목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국어책에 선정될 정도의 작품을 새삼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이유였지요. 그렇게 당시 운영하던 독서모임을 통해 최인훈의 『광장』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작 읽어보지 않았음을 후회하였었죠.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에 대해 먼저 살펴보려 합니다. 그가 살았던 삶과 고뇌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지요.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명준은 흡사 철학자 같은 인물입니다. 언제나 생각에 잠겨있기 마련이지요. 이성관계 혹은 유흥 거리들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방에 앉아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기를 즐기는 인물이지요. 잠깐 그의 생각을 들여다볼까요.
무언가 마지막 것을 얻기만 하면 다시 생각이란 이름의 화냥년을 잠자리에 들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면서, 낯빛과 몸짓을 가꾸는 마음의 거울 속에서는 자꾸 연지가 빗나가고 곤지가 번진다. 끝없이 실수를 거듭하고 뉘우침이 따른다.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주변에 보이는 늘상 생각에 잠겨있는 그런 인물이랄까요. 지금의 우리 젊은이들과는 시대는 다소 차이 나지만 그의 사색과 방황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시대가 달라도 통하는 것이 있는 것일까요? 그나마 명준의 독특한 면을 보자면, 책을 많이 읽는다는 점입니다. 조금은 씁쓸한 사실이지만, 요즘의 우리들은 책을 많이 읽지 않으니까요. 유달리 명준이 자신의 책장을 바라보며 하는 생각이 제게는 기억에 남습니다.
윗목에 놓인 책장에 마주 선다. 한번 죽 훑어본다. 얼른 뽑아보고 싶은 책이 없다. 400권 남짓한 책들. 선집이나 총서, 사전류가 아니고 보면, 한 책씩 사서는 꼬박 마지막 장까지 읽고 꽂아놓고 하여 채워진 책장은 한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월간 잡지가 한 권도 끼지 않았다는 게 자랑이다. 그때그때, 입맛이 당긴 책을 사서 보면, 자연 그다음에 골라야 할 책이 알아지게 마련이다. 벽 한쪽을 절반쯤 차지하고 있는 이 책장을 보고 있으면, 그 책들을 사던 앞뒷일이며, 그렇게 옮겨간 그의 마음의 나그넷길이, 임자인 그에게는 선히 떠오르는 것이고, 한 권 한 권은 그대로 고갯마루 말뚝이다.
무언가를 찾는지 모르면서도 무언가를 찾는 명준. 그게 삶의 의미일지, 맺음말일지 모르지만 명준은 늘 생각하고 생각합니다.
그런 명준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소식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가는 사건이지요. 이미 명준에게는 그 존재마저 희미한 아버지가 북에서 대남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상의 대립이 치열했던 시절. 명준은 현재의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추궁을 받고 형사에게 얻어맞지요. 아무리 이성적으로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버지가 명준에게 되살아나는 순간입니다. 형사에게 얻어맞아 코피를 흘리며 경찰서를 나설 때 명준은 생각합니다.
좋은 철
궁리질 공부꾼은
보람을 위함도 아니면서
코피를 흘렸는데
내 나라 하늘은
곱기가 지랄이다.
눈물이 흐르고, 분하고 서러웠던 그날. 명준은 그의 방문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명준의 밀실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튼튼하다고 생각하던 그의 문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 자신의 밀실이 무너졌을 때, 그리고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고 생각했던 ‘윤애’가 명준을 거부했을 때, 명준은 남한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광장』에서 ‘광장’과 ‘밀실’의 개념은 핵심입니다. 인간은 광장에서만 혹은 밀실에서만 갇혀서 살수는 없죠. 그 둘 모두를 적절히 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살 수 있습니다. 명준이 보기에 남한에는 밀실만이 존재했습니다. 남한의 광장에는 추악함과 배신만이 남아있었죠. 모두가 그 광장에서 서로를 등쳐먹으며 오직 자신의 밀실만을 가꾸는 데 치중합니다. 마치 개미가 먹을 것을 물어다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듯이 말이죠. 그러니 명준 자신의 밀실이 무너졌을 때, 그는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북에서마저도 명준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명준이 제대로 된 광장을 찾으리라 생각하고 간 북의 광장은 생각과 달랐습니다. 열정을 가장한 그곳에는 진짜 열정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게 되지요.
신명이 아니고 신명 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흥이 아니고 흥이 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명준이 보람을 느끼고 살만한 광장은 남에도 북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북은 어딜 가나 흉내뿐이었고, 숨이 막히는 ‘잿빛 공화국’이었습니다. 아. 도대체 한 인간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광장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 결국 명준이 찾아낸 최후의 광장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곳은 양손 끝을 맞잡아 만든 광장이었습니다.
두 팔이 만든 둥근 공간. 사람 하나가 들어가면 메워질 그 공간이, 마침내 그가 이른 마지막 광장인 듯했다.
그 안을 채울 수 있는 것은 명준이 북에서 만난 ‘은혜’입니다. 남한도 북한도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이 보람을 느낄 곳을 찾지 못한 명준에게 남은 것은 은혜뿐이지요. 당도 동무도 명준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조그마한 광장과 은혜만이 소중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낳은 끔찍한 전쟁으로 은혜마저 잃고만 명준은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그는 광장을 잃고, 그의 밀실은 이미 비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익히 기억할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전쟁이 끝난 후 명준의 거취를 정하는 순간이지요. 남과 북은 각각 명준과도 같은 지식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설득합니다. 하지만 명준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도 가고 싶어 하지 않지요.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
“자넨, 어디 출신인가?”
“……”
“음, 서울이군.”
설득자는,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면서,
“중립국이라지만 막연한 얘기요. 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 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밖에 나가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구 하잖아요? 당신이 지금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자. 우리가 알던 ‘중립국’은 바로 이 모든 일들의 결과였습니다. 중립국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겪어본 두 곳이 모두 싫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중립국으로 가는 배를 탄 명준입니다. 명준의 고뇌와 슬픔 그리고 결정을 생각하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부디 바라는 대로 중립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를 빌어보지만, 그는 중립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마저 소외감을 느끼고 고독해지죠. 그럴 때마다, 명준은 하릴없이 자신의 좁디좁은 광장을 찾아갑니다. 배 뒤쪽 난간 그 어딘가.
이야기의 끝에 명준은 광장을 찾아 떠납니다. 물론 그곳이 결과적으로 중립국은 아니었습니다. 명준은 은혜와 자신의 딸일지도 모르는 흰 새와 작은 새를 보며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닌, 그리고 중립국도 아닌 다른 광장을 찾게 되죠. 비로소 찾은 푸른 광장.
돌아서서 마스트를 올려다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 친 그는 지금 핑그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그리고 곧 중립국으로 향하는 배의 선장은 보고를 받게 되죠. 석방자 한 명이 사라졌다는 보고, 그리고 그 석방자는 이명준이라는 보고였습니다.
21세기인 지금. 우리는 어떤 광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밀실은 안전한가요? 시간은 흘렀지만 확신이 없습니다. 우리의 광장은 이명준이 그토록 바라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인지요. 1973년 일역판 서문에서 최인훈 작가는 말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 작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에 대해서 큰소리칠 자리에 있지 못하다. 그가 쓰러진 데서 한 걸음인들 내디뎠다는 믿음을 못 가졌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아쉬움을 1989년판을 위한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지요. 물론 우리의 부모님이 이뤄온 눈부신 업적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거보다 경제상황과 생활환경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지요. 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바람직한 ‘광장’을 가졌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생활이 단순히 살아 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성공 신화, 대박 신화가 광장에 떠돕니다. 우직하게 자신의 꿈을 펼쳐 보란 듯이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들립니다. 작게는 모두가 풍족하게 사는 듯이 자신의 삶을 갖가지 창구를 통해 내보입니다. 모두가 잘 살고, 모두가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터넷, 티비, 핸드폰이라는 작은 창이 아니라, 내 주변 삶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마치 풍문만을 듣고 사는 것 같네요.
막상 나가본 현장, 지금의 광장 역시 아직 완벽하진 않습니다. 여전히 이명준이 남에서 느꼈던 배신, 탐욕, 추악함이 여기저기 보이고, 더불어 북에서 느꼈던 흉내와 소문이 즐비하지요.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가치관을 들이밀며 내 방을 부수고 들어오는 경우도 여전히 허다합니다. ‘헬조선’이라는 말로 국내를 떠나려는 모습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명준의 선택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는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것일까요?
밀실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바람직한 열정이 가득한 광장. 중립국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 우리는 여전히 광장과 밀실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때로는 한 쪽에 갇혀 숨이 막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광장과 밀실 어느 한 곳에서만 살 수는 없습니다. 평범한 이명준이 남과 북으로 그리고 중립국으로 갔던 이유입니다. 방황하는 모든 21세기 이명준에게 바랍니다. 부디 자유와 열정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광장과 밀실이 살아 있는 곳을 찾기를. 풍문에 살지 말고, 현장으로 나아가기를. 최인훈의 『광장』이었습니다.
제3국은 어디에 존재할까? <광장> 순수의결정체 ㅣ 2016-02-11 ㅣ 공감(2) ㅣ 댓글 (0)
왜 광장이 한국문학이 포함된 추천 도서에서는 빠지지 않고 포함되어있고, 여러 카피라이터 및 철학사를 공부하는 이들이 꼭 한 번씩은 언급하고야 마는 글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나에게 최인훈의 「광장」은 수능 공부할 때 자주 나오던 ‘중립국’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중립국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아! 이게 그 소설이었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던 건 비단 나뿐일 것인가?
한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유토피아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풀어내었다는 광장은 참으로 복잡 미묘하고 그 마지막은 끝을 알 수 없는 심해 속으로 빠지고 만 한 나약한 개인이 되어버린 것 만 같다. 광장을 꿈꿨지만 남한이라는 사회는 개인의 부도덕한 욕심만이 가득한 ‘밀실’로만 채워져 있었고, 푸른 광장을 찾아 월북하지만 그곳에서는 집단의 이념만을 존재하는 ‘잿빛광장’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것이 비단 그때만의 문제일 것인가? 지금의 우리 사회는 더욱 더 단단해져버린 밀실로 꽉꽉 채워지고 있으며, 그 밀실의 증가속도는 작가가 고민했던 때보다 더욱 빨라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 지 못한다. 정치적 이념으로 볼 수 있는 광장과 개인의 자유와 욕구로 생각되어질 수 있는 밀실은 언제나 상호보완적임과 동시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작가는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러나 밀실과 광장은 결코 하나의 공간이 될 수가 없다. 자유를 보장하면 평등이 깨어지고, 평등을 전제하면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점점 더 밀실만을 생산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리고 리더를 꿈꾸는 자라면, 그리고 배웠다는 지식인이라면 더 깨끗한 밀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야 하고, 그 밀실들이 모여서 지금보다는 더 나은 광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처럼 새로운 광장을 만들고, 그 광장에 밀실을 만들어 넣는다는 실패로 판명이 낫기 때문이다. 광장을 추구했던 구소련의 붕괴도 그렇고, 밀실을 추구했던 미국의 극심한 양극화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떠나, 시대적 상황을 떠나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더 높은 정신적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 3국인 중립국을 향해 가던 명준 에게 푸른 바다 속으로 자신의 몸을 맡기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남한에서 북한에서 두 가지 체제를 직접 몸소 겪고, 그 곳에서 발전가능성을 본 것이 아니라 실패의 참혹함만을 맛보았던 그였기 때문에, 중립국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일지도 몰랐지만,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결국 그런 경험 끝에 자신이, 그리고 우리가 온전히 소리칠 수 있는 광장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나의 밀실을 함께 나누어 쓸 수 있는 한 사람, 즉 인간 자체만이 광장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가 꿈꿨던 푸른 광장과 같은 드넓은 푸른 바다 속으로 자신의 피붙이를 안고 저 멀리 떠난 은혜와 딸을 생각하며 뛰어든다면, 그 속에서 죽음을 통해서 진정한 광장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가 다뤘던 사회 현실과 문학사적 의의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에겐 그 현실을 공감할 만한 사회 환경적 조건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저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펜촉을 부러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잊을 수 없는 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작가의 문장력이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속에서 탈대로 타고 난 무서움의 잿더미에 미움의 찬비가 소리 없이 내리면서,
남은 재를 고스란히 적시며, 명준의 온몸에 스며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고지라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최인훈의 글귀는 한자 한자 꼭꼭 씹어서 소화를 최대한 시켜서 삼켜도 아직은 넘쳐흐르고도 넘쳐흐른다. 속독을 해서는 절대 되지 않는 문장들이다. 한 문장도 놓치기가 너무나 아깝다. 그는 "삶 들여다보기"의 진정한 고수다.
마지막으로, 서양문학의 번역본이 아닌, 이런 높은 수준의 필력을 자랑하는 작가의 원본을 그대로 읽을 수 있음이 가장 값지게 다가왔다.
운명이 만나는 자리 「광장」 - 최인훈 미니지미니 ㅣ 2016-01-19 ㅣ 공감(0) ㅣ 댓글 (0)
1.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생소한 제목이었다. 다 읽고 난 후에도 도대체 어느 부분이 교과서에 실렸다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국어나 문학 시간에 지문을 그렇게 읽기 싫어했던 것 같다. 그냥 밑줄 치라고 하면 밑줄 치고 상징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외우고 그런 게 전부였던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소설이 기억날 리가 없고, 읽었다 해도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 되어서야 읽어 보니 아마 고등학생의 내가 읽었다고 하더라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은 내용들이었다. 과연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에 적합한가 의문이 든다. 그렇다고 지금의 나는 내용을 전부 다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나이에 이 작품을 만난 것도 하나의 행운인 것 같다. 필시 이런 작품이야말로 몇 번이고 읽어야 하고 거듭 읽음으로써 의미를 새로이 깨닫게 되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2.
소설 속에서는 해방 직후의 어지러운 한국 사회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인물로,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을 은근히 하찮게 생각하며 남한 사회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면서 남한에서 만남을 가지고 있던 여자를 두고 월북하게 된다. 그곳에서 은혜라는 여자를 만나는 것이 전체적인 스토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여기서 사실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3.
어느 한 부분도 허투루 쓴 장면 없이 모든 표현, 모든 단어와 문장들이 너무도 섬세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 글이기 때문에 명준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불타는 열정, 복잡하고 어지러운 현실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고뇌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이 독자에게 고스란이 전달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갈매기라든가 광장이라든가 하는 단어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 문장의 묘사에 함축된 의미 같은 것들은 누군가가 함부로 흉내내는 것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감탄스럽다. 같은 내용을 쓰더라도 작가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글이 가지는 느낌이나 무게감이 크게 달라지기 마련인데 <광장>이 현재까지도 꾸준히 읽히고 사랑받는 것은 글 안에 내포된 내용적인 측면도 있지만 작가의 깊이감 있는 표현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
작가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을 광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명준은 남한에서 개개인의 이득만을 취하며 우리 사회에는 무관심한 정부를 바라보며 남한에는 개인의 밀실만 있을 뿐 광장은 비어있다고 한탄을 한다. 그래서 여러가지 복합적인 심경으로 월북을 하게 되는데 자신이 갖고 있던 환상과는 달리 북한은 또 다른 모습으로 썩어있는 사회였던 것이다.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자신이 서 있을 광장을 찾지 못한 명준은 북한에서 만난 은혜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남한에서는 애초에 광장으로 나서길 거부하지만 북한에서는 나름대로 뜻을 펼치려 해도 무엇 하나 진실을 말할 수 없는 현실에 가로막혀 절망에 빠지는 명준은 그 시대의 희생양이지만 그 모습은 현대 사회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있다. 남한의 사회에 열변을 토하면서 '좋은 아버지, 프랑스로 유학 보내준 좋은 아버지. 깨끗한 교사를 목 자르는 나쁜 장학관. 그게 같은 인물이라는 이런 역설.'라고 말하는 명준의 대사가 있는데 자신들 배불리기에만 급급한 우리 사회의 정치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5.
1960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무려 56년이 지났지만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 씁쓸하다. 참 많은 것이 변했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과거의 우리 사회의 모습, 그리고 현대 사회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몇 년 후에 읽으면 또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아 이후에도 다시 읽어보고 싶다.
[마이리뷰] 광장 / 구운몽 김이늬 ㅣ 2015-01-22 ㅣ 공감(2) ㅣ 댓글 (1)최인훈의 작가적 책임감과 치밀함, 집요함, 그 무수한 고뇌와 노력과 편집적 습관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광장은 단순히 `여러 번`의 탈고가 아니라 매 순간 그를 놓아주지 않는 영원한 숙제였을 것이다.그는 생전에 대단히 꼼꼼하고 세밀한 사람이었지 않나 하는 감상이 후에 일었다.직후에는 그 이야기에 대해 느끼느라 평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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