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0

친북주의연구 / 홍진표, 이광백, 신주현 : 네이버 블로그



친북주의연구 / 홍진표, 이광백, 신주현 : 네이버 블로그

친북주의연구 / 홍진표, 이광백, 신주현

마음

2012. 3. 1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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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97년 전향한 운동권 인사들이 세운 출판사 시대정신에서 나온 책이다.

개인적으로 전향한 종북인사들과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본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북한문제에서만큼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많이 참고하고 있다.



이 책은 친북의 역사와 발전, 주요단체와 활동방법, 왜 그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등등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책 자체가 작고 굉장히 얇은데도 중요한 부분은 다 들어있었다.

또, 보통 종북과 싸우는 사람들의 글은 감정적인편인데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연구'라 객관적으로 서술한 점이 좋았다.




친북의 활동이 공식적 기록에는 물론이고 현재는 더 공공연하게 활동하는데도

일반사람들이 그 활동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진실인 세상이던가.




친북세력에 대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 인상깊었던 부분을 요약하여 블로그에도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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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김정일 정권유지를 바라는 사람들을 분류



1. 김정일 체제의 붕괴가 가져올 혼란이 두렵다 : 가장 다수, 북한에 무관심한 젊은층, 김정일체제 무너지면 대량탈북, 북한내부의 내전, 남북간 전쟁으로 비화될 소지에 대한 믹연한 불안감

2. 미국에게 맞서는 김정일에게 호감이 간다 : 특별히 친북적이진 않지만 미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북한을 편듬. 이 사람들이야 말로 김정일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음.

3. 개인적 이해 관계에 따라 김정일 체제의 유지를 바라는 경우 : 주로 학자나 언론인, 관료중에서 많음. 김대중/노무현 시절 대북포용정책에 휩쓸려 대북지원을 주장했거나 정책을 폈던 사람들로 자신의 오류가 증명되는 것을 두려워 함. 현대아산등 기업인도 마찬가지.

4. 과거 반공을 내세운 군사 정권을 반대하면서 그 반작용으로 북한 정권에 관용적인 습성이 든 사람 : 3번부류처럼 자신들의 오류가 밝혀지는 걸 두려워하여 현실을 똑바로 보기를 거부

5. 맹목적 친북추종자들 : 김정일 체제에 호감을 갖고 북한 주도의 통일을 꿈꾼다. 수는 많지 않지만 조직화 되어있고, 여중생 촛불시위에서는 인도주의자로, 이라크전쟁에서는 평화주의자로 변신하며 친북의식을 감추고 대중적 명분을 얻는 전술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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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의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1. 불법에 대한 불관용 대응

종북세력은 폭력, 거짓말을 동원한 선전 등 합법적 테두리 벗어나 활동하는 것을 속성으로 함.

폭력 등 민주주의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학 ㅔ처벌하고, 북과 조직적으로 연계된 활동도 찬단할 필요.

친북주의 주장에 대해서는 법적 접근 보다 사상의 시장에서 도태라는 사회적 고립을 통해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



2. 북한 사회 현실과 합리적 통일 방안에 대한 교육 강화

종북주의가 내세우는 반미자주나 민족통일 구호에 선동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북한의 극심한 인권유린 실태를 정확히 알게 해야 함.

김정일 정권은 인민의 미래나 사회주의 건설, 민족통일보다 자기 개인의 권력 유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도 이해시켜야.



3. 북한 변화와 개혁을 촉진하는 대북 정책

종북의 뿌리인 북한 변화와 개혁 촉진해야. 북한 민주화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시민사회운동 영향력 높이는 것도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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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세력 등장





1. 80년대 이전



1) 정부수립전까진 친북이 아닌 남한내 독자적인 공산주의 활동시대.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설립 당시 총비서라는 최고 지도자였음, 49년 2인자로 전락했고 56년 숙청당함





2) 진보당



한국적 진보주의를 내세움. 현대 사회기준으로 보면 사회민주주의, 온건사회주의

남북총선거에 의한 평화통일론이라는 정책 내세웠으나 정당등록 취소당하고 조봉암 간첩행위로 사형선고 받아 집행됨.

정당 정강 정책과 조봉암 성향으로 볼때 의식적으로 정권위해 활동했을 가능성을 낮아보임.

또한 겉으로 친북 드러내지도 않았음.

그러나 북한과 연계를 맺고 공작금 받아 활동했다는 당시 사법부 판결은 아직 번복되지 않았으며

이를 부정할만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음





3) 4.19혁명 이후



60년 총선에서 패한 좌파정당과 사회단체들은 민자통(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결성. 민자통이 제시한 통일방안 북한의 영향 받음

민자통 내의 민민청(민족민주청년동맹),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등 좌파청년그룹이 참여했고 그 주도세력은 친북성향 강했음.



이와 별개로 대학생단체인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도 즉각적 남북 교류 주장함. 그러나 이들은 친북적인 민자통과는 달리 낭만적으로 접근하였음.



4.19혁명 당시 민주주의와 반공을 주장하던 대학생들이 1년만에 친북으로 돌아서지 않았음.

이들은 뚜렷한 이념지향이 없었고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져도 온건한 수준이었으므로 친북이 대세 장악하긴 힘들었음.





4) 인혁당 사건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조선노동당 지령받아 인혁당 조직해서 사변기획했다고 발표.

재판부는 인혁당이라는 명칭쓴적도 없고, 써클수준이며 국가전복 음모를 기도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징역1~3년, 집행유예로 경미한 처벌내림.



1974년 2차 인혁당 (인혁당 재건위) 사건. 23명 구속. 8명 사형선고, 15명은 무기징역~징역15년, 사형선고 18시간만에 형 집행.

07년 재심청구에서 무죄판결을 내려 과거 판결을 뒤집음.



그러나 1,2차 사건 모두 당의 실체가 있었다, 1차사건때는 법정투쟁을 잘해서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증언.

북한정권의 대남공작이 한국 사회주의운동에 미친영향에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진 것이 너무 많음.





5) 통혁당 사건



4.19혁명때 남한 적화의 절호의 기회 놓친 것을 아쉬워한 김일성이 대남기구 대폭강화하고 60-70년대에 남한 내 지하당 결성 본격 추진.

이 과정에서 통혁당(통일혁명당)구축.



68년 1차 통혁당 사건.

그해 7월 2차 통혁당 사건.

남파 간첩 김종태가 통일혁명당을 조직하고, 前 남로당원, 혁신적 지식인, 학생, 청년 대량 포섭하고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하여 정부전복기도하다가 일망타진됨.

관련되어 검거된자가 158명. 김종태는 사형선고받고 집행.

김종태는 김일성에게 창당지시를 직접받았다고 진술하였음. 김종태와 함께 사형이 선고된 김질락은 지은죄를 뉘우치며 변호인 측 반대심문 거부함.



이후 북한은 끈질기게 통혁당 재건 추진함. 대남 선전 방송인 '통혁당 목소리 방송' 시작.

통혁당은 85년 조직이름을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바꾸고 05년 반제민족민주전선으로 다시 개칭함.





6) 남민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79년 발각당시 남한 최대규모의 지하 혁명 조직. 국가전복하고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꾀하였다고 발표.

주모자 이재문은 64년 인혁당 사건 당시 집행유예선고받은 적 있음.

2명은 사형확정, 5명은 무기징역선고 받음.



84명 구성원 1:1 점조직으로 연결, 모두 가명 사용, 재정사업일환으로 금은방 절도 행위 벌이기도.

사회를 특권층, 재벌, 자본가, 중산층, 서민층, 농민, 실업자등 7계층으로 나누어 중산층까지를 민중의 적으로 자신들은 민중의 전위대로 규정함.

한국사회를 신식민지로 규정하고 미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고 강조.



한국사회를 신식민지로 규정한 것은 이 후 민주화운동 세력과 통일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끼침.



06년 민주화보상위는 남민전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반국가단체라는 대법원판결에 이견이 없다며 상반된 결론을 내림





2. 80년대



1) 대학가 좌파열풍

학생운동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이념 확산.

80년대 학생운동은 과거와 다른 두가지 차별성 가짐



첫째,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추구세력이 학생운동 주류로 등장.



둘째, 80년대 이전 좌파흐름은 구(舊) 남로당계열 영향이나 북한 대남공작의 직접적 산물이었으나

80년대 학생운동권 좌파는 내부동력만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짧은 기간에 급속도로 전파됨.

80년대 서울의 봄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금기시되던 사상조류가 잠시 이완되며 마르크스주의 서적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졌다는 것이 중요요인.



79,80학번들은 마르크스주의 전파에 힘썼고, 81,82,83은 적극적으로 수용함.

이들은 주로 지하이념 서클 위주로 활동,

서울대의 경우 사회과학연구회(사과), 대학문화연구회(대문), 흥사단 아카데미, 후진국경제연구회(후경), 농법연구회(농법)등 5대 패밀리 존재

특히 82학번의 경우 좌파사상이 크게 유행하여 5천명중 약 2천명이 한번이상 이념서클의 세미나에 참석한 경험 있는 것으로 조사될 정도.



84년 전두환정권의 유화국면이 조성되자 이를 적극 활용하여 대중적 저변 넓힘.



2) 80년 광주의 경험



80년대 민주화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5.18민주화운동

이를 통해 5.18을 민주혁명의 모델로 삼아 혁명주의가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인식이 학생운동권 중심으로 급속히 퍼짐.

그러나 5.18운동은 군대의 강경진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한 치명적 약점있음.

즉, 역설적으로 5.18운동의 경험으로 정권이 시위진압에 군 동원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



또 5.18운동은 80년대 운동권이 반미운동으로 나가는 계기가 됨.

이는 NL계열 운동권 확산과 더불의 인식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임.

운동권은 한국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사주나 방조 없이는 한국군 광주투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당시 공수특전단은 한미 연합사 체제와 미국 작전 통제권 밖에 존재하였음.



그러나 사실과 무관하게 80년대 대학가에선느 신입생에게 광주의 참혹한 사진을 보여주며 미국의 한국군 작전통제권 보유 등을 설명하면

전두환 정권과 미국에 대한 반감 쉽게 끌어낼 수 있었음.





3) 386사상적 반란



이 세대는 마르크스주의와 80년대 중반부터 대두된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서구의 60년대 현상과 유사함.

이들은 전후 세대로 전쟁경험이 없고 윗세대에 비해 교육기회와 경제성장의 헤택을 누린 세대.

민주주의가 옳다고 배웠으나 현실은 권위주의 체제로 심각한 괴리를 느끼게 되었음. 기성세대에 대한 반란의식이 유달리 강하게 됨.



80년대 사회는 경제고속성장으로 사회주의자가 자리잡기에는 불리한 사회여건이었음에도 아주 짧은 기간에 전투적 조직적 열정적 사회주의자들이 민주화와 변혁운동주도하게 됨.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정도.

그 원인은 5.18민주화운동, 초기운동세력의 운동능력, 자유주의자들의 세력부재등이 불리한 여건이 되었음.



세계사에서 보기드문 전투성과 헌신성으로 공장, 농촌, 빈민가로 뛰어들었고, 90년대 중반전후로 시민단체에도 적극 진출.

이에 함께 하지 못한사람들은 정신적인 부채의식을 가지게 됨.





4) 유사 386세대

한국 386세대는 지속적으로 영향 미침

소련/동구가 붕괴되어 좌파사상이 영향력을 잃은 90년대 대학다닌 세대들도 386세대와 유사한 사고방식. 이 대목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움....



주요원인은 주체사상이라는 극단적 민족주의의 경향이 좌파운동권의 주류가 된것.

80년대 중반 서울대를 중심으로 소수에서 출발한 주사파(주체사상파)는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소련을 모델로 삼은 PD파를 누르고 운동권 주류로 성장하였고 소련이 봉괴된 후 민족주의를 내세워 명맥 유지하였음.

주사파도 94년 김일성 사망후 북한붕괴론이 유행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클린턴에 의한 제네바협약과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다시 부활하게 됨.

이들 386과 유사 386은 친북반미 경향을 강하게 띠고 촛불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노무현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함



유사 386은 386이 현실적 사회경험을 통해 과거의 사고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과 달리, 친북반미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임.







5) 주사파의 등장과 확산



주사파의 대부인 김영환등에 의해 비교적 소상히 알려져 있음



당시 PD그룹은 러시아혁명을 모델로 삼았는데 북한의 존재가 공백으로 남아있는 것이 주사파에게는 약점을 보였음.

북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현실론. 북한 실제모습에 대한 정보 부재. 역대 정권의 북한선전에 대한 불신등으로 북한에 대한 신뢰가 생기게 됨.



주사파는 한국이 식민지반봉건사회라는 북한입장을 따랐는데,

한국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었음에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대학생들에게 수용되었음.



결정적으로 6월 항쟁때 직선제 중심으로 야당과 연대 노선 추구한 NL그룹이 PD그룹을 누르고 주도권 장악.

6월항쟁이후 NL론은 전국 주요대학으로 퍼졌고 총학생회를 NL계가 주도.

PD계는 소련동구 붕괴로 운동세력으로서는 의미를 잃게 됨. 이후 이들은 혁명주의를 버리고 합법정당 노선으로 선회하여 정당으로 결집.

NL그룹이 운동권 독점.







3. 주사파와 북한 연계





1) 민혁당 등장과 해체



반청(반제청년동맹)의 하영옥 주도로 88년 부터 준비하다 89년 정식 결성한 주사파 핵심들의 지하조직.

김영환은 출소후 합류하여 90년에 총잭이 되었음

북한 공작원 윤택림과 만나 조선노동당에 입당, 91년에는 김일성과 두차례나 면담.

그러나 이 방북을 통해 북한 내부의 모순을 알게 됨. 그리고 단계적으로 문제제기를 해나감.



이런 김영환읠 행보로 민혁당내 노선투쟁이 벌어졌고, 결국 김영환은 민혁당 해체를 결의함

하영옥은 김영환그룹을 변절자로 낙인찍음.



97년 최정남, 강연정 부부가 울산의 주사파인 정대연에게 접근하며 '김영환소개로 왔다'고 하자

정대연은 변절자 김영환의 이름을 대자 이를 안기부 공작으로 알고 경찰에 신고하는 사건이 벌어짐;;



당시 김영환은 중국으로 출국했던 때였음.



98년 남해상에서 북한 잠수정이 격침되고 인양되면서 민혁당 단서가 포착됨.

간첩 진운방의 시신과 하영옥과 찍은 사진등이 발견되어 하영옥 밀착감시로 민혁당 관계자 파악할 수 있었음.

김영환이 공개적으로 북한정권을 비판하자 김영환 대신 하영옥을 선택하여 접근한것.



김영환은 민혁당이 당국에 파악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99년 귀국하여 조사를 받다가 낌새를 채고 출국시도하다 구속됨.

이는 민혁당 관계자들에게 도피하라고 경고하기 위함이었음.

결국 민혁당 관련자 다수가 사법처리 됨.



이후 주사파는 크게 재편됨.

김영환, 홍진표 등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북한 체제 자체에 대해 비판적 입장으로 바뀐 사람들은

북한 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설정하고 98년 잡지 '시대정신 창간, 99년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창립.

민혁당 사건화와 김대중 정부 출범등으로 기존 운동권을 이 대열에 다수 합류시키는 데는 실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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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의 등장





1. 김대중 정부의 열린 공간



99년 민혁당 수사가 본격화 되면서 주사파 위기 심화.

그러나 김대중 집권으로 대북포용 정책으로 숨통 터주는 결과를 가져옴.



남북화해에 대한 기대감 커셔 통일운동 긍정적 평가받는 분위기 조성

공안기관들은 친북세력에 대해 느슨한 대응을 취함.

북한 정권은 이를 이용하여 친북세력 입지를 넓혀주려는 지원 시도.

민간차원 교류에 있어서는 친북단체를 창구로 이용할 것을 조건으로 내거는 등의 방법 사용.



북한은 유화분위기를 노리고 남북정상회담등을 추진한 것일 뿐이지, 북한 내에서는 평화통일을 체제위협으로 보고 있음.

친북세력은 북한 정권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현실 직시하는 순간 친북을 버려야 한다는 딜레마로 이런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북한 주도의 통일을 실현할 것이라는 망상을 고집하게 됨.



한총련, 범민련 모두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판결받은 상태라 6.15공동선언 제2항을 내세워 합법적 활동공간을 얻기 위한 시도를 함

01년 30여개 단체가 모여 통일연대 결성.

통일연대는 6.15선언에 동의 하는 모든 세력의 참가를 내세우며 한국노총까지 끌어들임.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교류에 참여하려는 경쟁이 발생하였고 친북세력과 가까이 하는 것이 득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기존 친북세력과 연대하지 않았던 단체와 인사들도 손을 잡음.



통일연대는 참가범위가 넓혀졌음에도 친북세력이 집행부를 차지하고 주도하면서 기존 친북단체 행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시간이 갈수록 기존 친북단체와 차별성이 사라지고 07년 진보연대가 출범하면서 그에 통합됨.



이런 친북세력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한 전술과 상반적으로 실천연대(6.15남북공동실천연대) 같은 흐름도 생겨남

친북세력내에서도 주류에 속하지 못한 구좌익 일부와 청년활동가들이 모여 과격한 친북노선 추구.

이들은 한국국민이 아니라 북한정권에게 자신들의 노고를 보여주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음.

이런 노골적인 표현은 일반 국민들이 상식을 벗어난 친북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됨.

이는 한국내 친북세력 고립자초하는 결과 초래.





2. 노무현 정권기 종북 세력



대북포용정책은 북한체제 개혁개방이 진전되지 않고 북한의 도발과 핵개발로 한계에 부딪침.

북한을 둘러싼 정세가 바뀌면서 친북세력은 반미운동에 집중하는 전술적 변화 택함.

여중생 촛불시위, 매향리 미군 사격장문제등이 대표적.



89년 경실련 등장하면서 운동권 세력과 차별된 신사회운동 시작되었고 94년 참여연대 가세하면서 시민운동 전성기 도래.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자주통일운동'에 가세하며, 합법성의 테두리내에서 권력에 대한 견제와 시민의식 발전시킨다는 운동방법에서도 일탈.

사회에 정상적으로 편입되어 살면서도 인식은 과거에 멈춰있어 과거 마르크스주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임.

따라서 진보시민운동과 친북세력이 연대하게 됨. 05년 평택미군기지 반대운동이 대표적인 예.



노무현 정부거치면서 친북세력내 조직 재편 이루어짐.



민족민주운동 세력은 80년대 민통령, 전민련 -> 91년 전국연합이 결성되면서 NL그룹이 주도권가지게 됨. (이유는 위에서 설명함)

90년대 말에 전국연합에서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맥을 잇는 인사들이 떠나게 되면서 전국연합은 친북세력의 독무대가 되었음

지도력 약화로 분파적 양상까지 야기되자 조직 재정비 논의가 시작되어 07년 진보연대 준비위원회 결성함. 08년 발족함.

진보연대는 준비위단계에서 광우병 촛불시위의 범국민대책위에 참여연대와 함께 두개의 축을 형성하였음



친북세력은 PD계열이 진보신당으로 이탈하고 민노당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게 되면서 민노당과 진보연대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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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당과 종북주의





민노당 창립에는 97년 발족한 국민승리21이 징검다리 역할을 함.

노동자 진영에 지지기반을 배타적으로 확고히 갖는 진보적 대중정당 설립 목적으로 정당 설립 추진.



97년 국민승리 21 준비위 발족

98년 민주노동당으로 당명 결정

00년 민주노동당 창당. 권영길 대표 선출.

16대 총선 원내 진출 실패

02년 3회 지방선거에서 45명 당선

16대 16대 대선 권영길 3.9% 득표

04년 17대 총선, 미례대표8명, 지역구2명 당선

06년 4회 지방선거 81명 당선

07년 17대 대선 권영길 3.0% 득표

08년 평등파 집단탈당, 진보신당 창당





민노당은 인적구성, 조직, 자금 등에서 민노총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는 정당.

민노당의 당원의 40~50%가 민노총 노조원.

민노총은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로 조직되어 있기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조직 노동자의 권익은 축소하거나 호도하며 (자기들 파이가 작아지므로..)

반미, 반시장경제, 반자유주의통일을 주장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



민노당 노동자나 빈민게층을 대변한다는 것은 그들의 희망사항일뿐 현실이 아님

민노당의 최대 지지층은 386세대이며, 따라서 한나라당 보다 더 고학력이고 고소득수준의 지지층의 지지를 받고 있음.

이들은 이런 이해관계를 이념화하였을뿐만 아니라 한국정치 권력게임의 중요요소로 참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음.

실례로 05년 노동자밀집지역으로 민노당에게 의미가 큰 울산 북구 보궐선거에서 의석을 잃음.

정규직-노조원의 민노당 지지율을 85.7%임에 반해, 정규직-비노조원의 지지율은 33.8% 비-정규직-비노조원의 지지율은 50.7%





민노당 창당 주도한 민노총 중앙(전진그룹)과 진보정치연합은 PD계열이었음.

전국연합 소속의 NL계 사람들을 끌어들여 함께 진보정당 창당 준비하면서도 종북주의 문제를 모르지는 않았으나

당에 들어와 국민대중과 만나다 보면 변할 것이라고 생각했음.



그러나 02년 선거에서 민노당 판도가 달라지면서 전국연합에 소속된 전농, 한총련, 민노총 국민파(범자민통 그룹)등이 조직적으로 입당

04년 당 지도부 경선을 통해 최고 의결기구인 최고위원회에서 자주파가 다수를 점함.



민노당 자주파와 평등파 간 분열은 80년대 후반 부터 시작된 운동권의 두 주류,

김일성 주체사상 신봉하는 민족해방계열NL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신봉하는 인민민주주의 계열 PD에 기원

NL은 한국은 식민지이므로 민족자주통일이 민족해방인 반면, PD계는 한국은 자본주의국가이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우선이라고 봄.

PD계는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 주도. NL은 학생운동과 통일운동 주도 하며 각종 연합/연대운동에 주력.

여러계층 규합하여 연방제통일을 목표로 하였기에 PD계보다 진보정당운동보다는 정권참여에 더 많은 관심

실제로 김대중 정권이후 제도권 정당내로 대거 들어감.



07년 대선에서 참패하며 종북세력과 결별해야 한다고 하여 논쟁격화됨

결국 평등파가 진보신당 창당하여 탈당.





민노당 당 강령에는 의하면

한반도는 미국에 의해 분단되었고, 대한민국은 미국 앞잡이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미국이 주도한 전쟁의 참극을 겼었고, 한국의 노동자와 농민은 미국 자본주의 매판자본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으며, 북한은 미국과 한국의 위협에 몰려 항시적 전쟁 위기에 놓여있고 때문에 북핵등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으며, 미군 주둔으로 인해 분단이 계속 되고 있다는 입장.

따라서 민노당 대북정책의 핵심은 미국을 몰아내는 것.



그러면 민노당 평등파, 진보신당의 강령은?

평등파 주요인사들은 북한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며 종북파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나

민노당 강령과 다르지 않은 강령을 가지고 있음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식민통치, 남북분단, 전쟁의 비극 모두 한국사회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며

한미동맹으로 북한을 적대시하기때문에 북한은 핵,미사일등으로 이에 맞서고 있다고 함



두 정당 보두 한국 현대사와 북한 현 상황에 대해 시대착오적임.



민노당은 08년 총선에서 5명을 당선시키는데 그쳐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들자 장외투쟁, 폭력으로 법안통과 막기, 민주당/진보신당과 연대전략으로 원내정치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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