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6

박찬승 - 약산 김원봉에 대한 글들이 최근에 페북에도 많이 올라왔다.



박찬승 - 약산 김원봉에 대한 글들이 최근에 페북에도 많이 올라왔다. 신문에 실린 글들도 꽤 되는 것 같다. 그런데...

14 June at 22:53 ·



약산 김원봉에 대한 글들이 최근에 페북에도 많이 올라왔다. 신문에 실린 글들도 꽤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약산의 해방 이후 활동과 행적과 관련하여 정확하지 않은 글, 지어낸 것 같은 이야기들도 꽤 보인다.
현 시점에서는 약산에 대한 평가에 앞서 우선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이 시기의 그의 활동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이 있지만,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여기에서는 이들 몇 편의 논문과 당시의 신문 자료, 서적 등을 참고하여, 세 가지 쟁점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

1. 해방 이후 약산의 정치적 선택

약산은 1946년 1월 말 김구가 이끄는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하고 2월 중순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참여하여, 여운형 박헌영 허헌 등과 함께 의장단(15명)의 한 명으로 추대되었다. 약산이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하고 민전에 참여한 것은 비상국민회의가 주로 우파들로 구성되었다는 것, 비상국민회의가 결국 미군정의 협력기관인 민주의원이 되고 말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제기된 가운데, 결과적으로 신탁통치 반대파는 비상국민회의에 집결하였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파는 민전에 집결한 셈이 되었다. 이때부터 세간에서는 전자를 우익, 후자를 좌익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민전은 조선공산당(박헌영)과 조선인민당(여운형)이 이끌고 있었다. 김원봉은 당시 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있었는데, 민족혁명당은 1947년 여름에 인민공화당으로 개명하게 된다. 민족혁명당은 당세가 약하였기 때문에 약산은 주로 민전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민전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의장으로서 내키지 않지만 그들이 써주는 성명을 읽어야 한다든가 하는 경우도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약산의 정치적인 운신의 폭은 상당히 좁아지게 되었다.
.

2. 약산이 경찰에 체포된 경위

약산이 경찰에 체포된 것은 딱 한 번 있었는데, 1947년 3월 22일 전평(전국노동조합평의회)에 의해 총파업이 실시된 때였다. 미군정에서는 총파업과 관련하여 전평뿐만 아니라 민전 등 여러 좌익 단체가 관계되어 있다고 보고, 민전의 주요 인물에 대해서도 체포령을 내렸다. 김원봉은 이 파업에 대해 잘 알지 못한채, 22일 서울역에 기차를 타러 나갔다가 체포되었다(리차드 로빈슨, <미국의 배반>, 194쪽). 결국 그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는데, 서울역에 기차를 타러 나가 장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알리바이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김원봉이 화장실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주장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이 노덕술을 경찰에서 만났다면 바로 이때일 것이다. 노덕술은 수도경찰청의 수사과장이었다.

그런데 김원봉 체포령은 경찰보다 윗선인 미군정의 고위 당국자로부터 나왔다고 하며, 한 미국인 관리(그는 선교사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는 경찰서에 갇혀 있던 김원봉을 찾아와 민전을 탈퇴하라고 부추겼지만, 김원봉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리차드 로빈슨, 앞의 책, 192쪽).
.


3. 약산이 북으로 간 경위와 이유

약산이 북으로 넘어간 것은 1948년 4월 초였다. 그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민공화당 관계자들과 비밀리에 38선을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1947년 8월 이후에는 공개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미군정은 민전 등 좌익측이 1947년 8월 15일 폭동을 일으킬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하며, 이를 근거로 8월 12일 민전 등 주요 정당, 단체의 간부들에게 수배령을 내렸다. 이때 남로당의 허헌, 인민공화당의 김원봉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졌고, 김원봉은 이후 계속해서 피신 생활을 해야만 했다(김원봉은 기소중지자 신분이 되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원봉은 결국 북에 남았고, 해주회의를 거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그가 북에 남은 것은 남쪽에서는 더 이상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된 반면, 북에서는 환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

약산의 해방 이후 활동은 결국 그의 정치적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국내에 들어와 좌우를 통합하여 하나의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그의 대리인으로 성주식이 민족혁명당의 대표로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던 그는 '민전'을 선택하여 민전 의장으로 주로 활동하였는데, 그것이 그의 활동의 폭을 좁히는 결과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북으로 가서 그곳에 남게 된 것은 미군정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져 남쪽에서는 더 이상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292박길수, 정혜경 and 290 others

10 comments57 shares

LikeCommentShare

Comments


Kim Young Hak 그럴수밖에 없는 혼란한 시대적 상황이였을겁니다
북에 남았다고 북에서의 활동이 독립운동에 선봉에서 피흘린 업적이 폄화되는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봅니다
누구라도 그 시대적상황에서는 어쩔수없는 선택의 기로에 설수밖에 없지요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이강윤 감사한 마음으로 공유합니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최성환 잘 배웠습니다. 깔끔한 정리 도움이 많이 되네요.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박진철 제가 간절히 바라던 사학자께서 이렇게 깔끔한 정리를 해주셔서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김진수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d

이종행 친일파들과의 관계는 전혀 언급이 없는데,
친일파들과는 무관하다는 말인가요 ?
Hide or report this



박찬승 김원봉이 친일파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일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1946년 영남의 10월 봉기 직후 이 사건을 조사한 보고서를 민전 의장단 허헌 김원봉 성주식의 이름으로 군정장관 러치에게 냈는데, 이곳에서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의 하나로서 " 미군정의 행정이 민중을 위한 일정 確乎한 정책이 없고 일제시대의 악질 관공리와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팟쇼분자의 등용에서 민중에 대한 압박은 점점 심하여 간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또 그 직후인 1946년 12월 29일자 공업신문 기자와의 인터뷰를 보면 친일파 문제를 이렇게 언급합니다. "독일, 이태리 등에서는 전쟁범죄자를 철저히 청소하였으며, 또 일본에서도 맥아더사령관의 지시로(?) 전쟁에 협력한 공직자까지도 전부 숙청하였는데, 그 수효는 십수만이나 된다. 그런데 다같은 미군정 아래에 있으면서도 조선에서는 옛날 일본제국 치하에 있어서 그들에게 협력하고 충성을 다한 관리들을 그냥 도로 등용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도로 00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힘을 더 공고히 하여 우리의 통일운동을 억압하고 있으며, 또한 모리배와 부동하여 우리의 인민 생활을 혼란케 하고 있다. 미군정이 이러한 방해물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인민의 생활의 위협은 날로 심하여 갈 것이다." 이처럼 김원봉은 친일파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가 북을 선택할 때는 이런 문제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북을 선택한 더 중요한 이유는 남쪽에서 정치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