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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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사회를 바꾸려면

[eBook] 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은이),전형배 (옮긴이)동아시아2014-06-18
원제 : 社會を變えるに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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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사회문제에 주목하는 책이다. 2012년 고단샤에서 출간된 책은 2013년 일본 신서대상 1위를 하며, 일본 내 인문학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일본의 원자력발전 반대운동의 기운이 한창 높아가는 가운데 쓰였다. 그렇기에 원전, 사회운동, 일본에 대한 특정한 관심과 관련이 있지만, 이 책은 보다 폭넓은 문제들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탈공업화’(‘리스크 사회화’ 또는 ‘글로벌화’)의 조류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모두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용과 가족의 불안정화, 격차의 확대, 정치의 기능부전, 민주주의의 한계봉착, 공동체의 붕괴, 노조의 약체화, 편협한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증대, 이민자 배척운동이나 원리주의의 대두 등은 현대의 어느 나라에서나 발견된다.

2011년 12월 30일 아사히신문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지진 후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답한 사람이 약 71%, 데모에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4%이다. 그러나 데모에 참가하는 것은 저항감이 든다고 답한 사람이 63%,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답한 사람 중 “세상은 간단히 바뀌지 않는다”라는 이유를 댄 사람이 67%였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가에게 맡기면 된다고 한 사람은 전체의 3%에 불과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누구나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실제로 바꿀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정치가에게 맡기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에 관여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데모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목차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들어가며

제1장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일본이 ‘공업화 사회’였던 시대 │ 공업화 사회란? │ 탈공업화 사회 │ 자유롭고 다양한 사회 │ 청년은 행복지수가 높다 │ 일본형 공업화 사회 │ 기능부전에 빠진 일본형 공업화 사회 │

제2장 사회운동의 변천
공업화 초기의 사회운동 │ 윤리주의와 전위당 │ 새로운 사회운동 │ ‘청년’과 ‘여성’ │ 탈공업화 사회의 운동 │ 리스크 사회 │ ‘68년’과 탈공업화 사회

제3장 민주주의란?
‘쥐 시집보내기’ 이야기 │ ‘대표를 뽑는다’라는 것 │ 제한선거의 논리 │ ‘우리의 대표’ │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 ‘모두 함께 어울림’의 중요성 │ 토론의 의미 │ ‘대표’와 ‘리프리젠테이션’ │ ‘공’과 ‘사’ │ 축제와 음악의 세계 │ 왕·축제·시장 │ 뒤르켐의 『자살론』 │ 자기를 넘어서는 것 │ ‘국가의 미래’와 ‘시장의 판정’ │ 플라톤의 ‘이데아’ │ 수학과 기하학 │ ‘철인왕’ 교육 프로그램 │ ‘수’와 ‘본질’ │ 문답법 │ 통치의 변천 │ 법의 지배 │ ‘대표’와 ‘왕’ │ 공사의 역전

제4장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
화약과 나침반 │ 인쇄술과 성서 │ 세계관의 변화 │ 근대과학과 실험 │ 전란의 시대 │ 근대적 이성과 데카르트 │ 수학과 근대적 주체 │ 뉴턴과 연금술 │ 수식으로 쓰인 본질의 운동 │ 근대과학에 있어서의 공개와 대화 │ 근대과학에서 정치사상으로 │ 계약으로 사회를 만든다 │ ‘민주주의의 원조’ 루소 │ 애덤 스미스의 경제자유주의 │ 벤담의 공리주의 │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 토크빌의 미국론 │ 데모는 과연 민주주의의 파괴인가? │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비판 │ ‘대표’와 ‘68년’ │ 자유민주주의의 종언?

제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
‘이성을 행사하는 주체’에 대한 의심 │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 ‘안전기준’이라는 사고 │ 후설의 현상학 │ 개체론이 아니라 관계론 │ 사회조사와 관측 데이터 │ 구축주의 │ 물화 │ 변증법 │ 관계와 운동 속에서 바뀌어간다 │ 재귀적인 근대화 │ 선택의 증대 │ 재귀성이 증대한다 │ ‘전통’도 만들어진다 │ 왜 좌파와 우파 모두 한계에 처했나? │ 카테고리의 한계 │ 보수주의의 역기능 │ 원리주의 │ 대화와 공개성 │ 임파워먼트 │ 엄벌주의는 역효과 │ 유연안전성 │ 기본보장은 효율적 │ 보호에서 활성화로 │ 자발적 결사의 활용 │ 부메랑 효과 │ ‘리스크’란? │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뭔가를 하는 것이 낫다 │ 밑바닥에서부터 사회를 바꾼다

제6장 일본 사회문제의 상징, 원자력발전
자연재해로 문제가 드러나다 │ 원전과 공업화 사회 │ 원전 사고로 변화한 소련 │ 원전을 떠받쳐온 보조금 시스템 │ 전쟁에서 시작된 전력시장 통제 │ 무책임한 체제 │ 한계에 처한 원전 산업 │ 원전 코스트 │ 원전은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상징 │ 사회는 바뀌어가고 있다

제7장 전후 일본의 사회운동
일본 사회운동의 특징 │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 │ 일본의 특징에서 생겨나는 약점 │ 윤리주의 │ 1960년의 안보투쟁과 공동체 │ 2,000만 명의 서명 │ ‘무당파’가 없는 사회 │ 전쟁의 체험과 기억 │ ‘민주주의를 지키자’ │ 소득배증계획으로 진정 국면 │ 공동체의 약화 │ 학생의 변화 │ 대학 자치회와 신좌익 │ 일본의 ‘섹트’ │ 대학의 대중화에 대한 불만 │ 지금까지 지녀온 의식과의 괴리 │ 고도성장이 안겨주는 당혹감 │ 공해와 주민운동 │ 베트남 전쟁 │ ‘전후 민주주의의 기만’ │ ‘전학련’과 ‘전공투’ │ ‘자유로운 운동’의 협소성 │ 전공투 운동의 특징 │ 섹트와 전공투 │ 윤리주의의 폐해 │ 연합적군 사건 │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 ‘쇼와 시대 일본’의 확립 │ ‘경제대국 일본’에 대한 비판 │ 원전 반대운동의 역사 │ 1980년대의 ‘탈원전 뉴웨이브’ │ ‘3세대’에 들어선 전후 일본 │ ‘후쿠시마 사태’ 이후 │ 50년 만의 사태 │ ‘자유’층의 확대 │ 앞으로의 운동

제8장 사회를 바꾸려면
일본의 ‘국체’ 논란 │ 현대에 있어서 ‘사회를 바꾼다’라는 의미는 │ 현대일본의 ‘격차’의식 │ 현대일본에서 ‘사회를 바꾼다’라는 의미는 │ ‘좋은 간사’보다 ‘냄비요리’가 낫다 │ 사회운동에 관한 다양한 이론 │ 쟁점관심 사이클 │ 정보의 2단 흐름과 ‘이노베이터’ │ 프레이밍 │ 구축주의와 주체형성 │ 모럴 이코노미 │ 어프로프리에이션 │ 각각의 운동이론을 평가한다면 │ 이론의 사용법 │ 이론 사용법의 콘셉트 │ 운동의 실례를 통해 살펴보다 │ 국제 NGO │ 생활 클럽 │ 미나마타병 소송 │ 베평련 │ 이렇게 하면 실패한다 │ 개체론적이지 않은 운동 │ 개체론적인 전략 │ 즐거운 것과 즐거워 보이는 것

마치며
접기


책속에서



P. 43 당시에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풍요로움을 구가하며 정치에 무관심했다. 의회 또한 그런 다수파의 몰표를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사회에서 질식할 것만 같았던 청년이나, 차별을 당하는 인종적·민족적 마이너리티 등은 사회 다수파가 될 수 없었고, 자연히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할 전망도 없었다. 베트남 전쟁 반대도 최초에는 미국 안에서 소수파의 주장에 불과했다.
그래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하여, 의회민주주의 체제 바깥에서 직접행동에 의한 호소가 중요하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그 방식으로서는 데모와 연좌농성 등이 많았지만, 일부에서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테러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종래의 노동정당 운동 등과 달리, 의회에서의 법을 통한 전략보다 이러한 직접적인 호소방식을 중시했기 때문에, 자기를 표출하는 쪽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 ‘새로운 사회운동’의 특징이라고도 평가받는다.
제2장 사회운동의 변천 접기
P. 166-167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란 일종의 혼합정체(governo misto)이다. 투표를 통한 대의제란 말하자면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다. 자유주의란 권력은 개입하지 말라, 생활이 안정되어 있으므로 국정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좋은 왕이 치안과 외교만을 담당하라는 사고방식이다. 민주주의란 모두 함께 결정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왕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을 조합시킨 것이 혼합정체로, 철인왕 같은 뛰어난 인재가 없을 경우 선택할 수 있는 차선책의 정치체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생각에 따라서는 극히 위험한 균형 위에 서 있는 정치체제이다.
그렇게 보면 대의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을 때, 데모나 사회운동이나 국민투표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나가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간혹 ‘데모나 국민투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파괴행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러나 대의제가 원래는 봉건제의 산물임을 고려하면, ‘데모나 국민투표는 봉건주의의 파괴행위’라고는 할 수 있어도, 민주주의의 파괴라고는 할 수 없다.
제4장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 접기
P. 252 대화와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사회가 바뀔 수 있을까, 역시 선거로 정권을 쥐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다. 당연한 의문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설령 정권의 수반으로 올라서 어떤 정책을 선언해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고급관료가 되어도, 재계의 수뇌가 되어도, 그것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도 말하는 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다. 정치가에게 맡기면 된다는 사람은 3%에 불과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권을 수중에 넣었다 해도, 현재의 관계인 채로는 부품을 갈아 끼우는 정도에 지날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사회는 어딘가에 중앙제어실이 있어서 거기를 점령하면 사회 전체를 조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 법률이 바뀌면 이렇게 된다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만, ‘자유’와 재귀성의 증대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설사 효과가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 해도 의회와 지역에서, 행정과 운동을 통해서, 즉 사회의 모든 곳에서 발상과 행동과 관계를 바꿔나가 그것이 연동해가며 사회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
제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 접기
P. 276-277 원전만이 사회를 바꾸는 테마는 아니다. 그러나 원전은 포괄성과 상징성이 있는 테마이면서 운동에 의해 바뀔 전망이 높은 테마 가운데 하나이다. 원전을 테마로 한 운동을 계기로 사회를 바꾸는 감동 어린 경험을 한 사람은 수십만 명이나 된다고 생각한다. 부당한 것에는 항의해야 한다는 체험을 이미 해봤고, 막상 해보면 재미있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바로 그런 습관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나면 사회는 바뀌게 마련이다.
행동이란 물론 데모만이 아니다. 그 이외의 다양한 행동, 예컨대 정부발표 이외의 정보를 모으거나, 방사선량을 계측하거나, 자치단체나 학교에 불만을제시하거나, 자신의 판단 아래 피난을 가거나, 기업이나 관공서 안에서 의견을 말하거나, 쇼핑과 투자 방식을 바꾸거나,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하는 사람들이 필시 수천만 명에 이를 것이다.
그런 ‘행동’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그 정도의 자율적인 행동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사회를 바꾸어가게 된다.
제6장 일본 사회문제의 상징, 원자력발전 접기
P. 352-353 원전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종래와는 조금 달라졌다. 1980년대까지의 원전은 산업문명과 경제대국 일본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후에 사람들의 분노를 산 것은 정부의 정보제공과 대응의 방식이었다. 근본적으로 20여 년에 걸친 경제침체 속에서 정부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터에 이번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야말로 불난 데에다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이는 소련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벌어졌을 때와 유사한 현상이다. 대규모 원전 사고에서 그 대응을 잘못하면 국가를 망가뜨려버릴 정도의 엄청난 충격을 안긴다.
일본에서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사고 직후의 정보공개와 정책대응이 부실했다. 그뿐 아니라 그 뒤 재가동 등의 과정에서 정부는 의사결정 방식을 바꾸는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방사능 공포는 당연하거니와, 이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지켜줄 마음도 국민의 뜻을 반영할 생각도 없고, 정계와 관계의 이너 서클에서 전부 결정할 태세라고 불만의 수위가 올라간 것은 당연했다.
제7장 전후 일본의 사회운동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오구마 에이지 (小熊 英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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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사회학자로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전공은 역사사회학과 상관사회과학相關社會科學이다. 1962년 도쿄도 아키시마시에서 태어나 나고야대학 물리학과를 중퇴하고 1987년 도쿄대학 농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 같은 대학원의 총합문화연구과에서 「‘일본인’의 경계: 지배 지역과의 관계에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 총합정책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구마 에이지는 방대한 자료를 섭렵해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정치철학과 역사를 폭넓게 탐구하여 일본 학계에서 명망이 높다. 또한 그는 일본 사회를... 더보기


최근작 : <민주와 애국>,<일본 양심의 탄생>,<사회를 바꾸려면> … 총 43종 (모두보기)

전형배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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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해외의 좋은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동안 옮긴 책으로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오체불만족』, 『내 마음의 선물』, 오구마 에이지의 『사회를 바꾸려면』, 시바야마 게이타의 『조용한 대공황』, 시마자키 스스무의 『단숨에 읽는 사기』, 시미즈 나오코의 『이 회사도 블랙기업일까?』 등이 있다.


최근작 : … 총 1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행동하라!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 오구마 에이지 게이오대(慶應大) 역사사회학 교수

2013 일본 신서대상 (新書大賞) 1위
“왜 데모를 해야 하는가를 탐구한 텍스트” _《아사히신문》

1. 일본 교양 인문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다
신간 『사회를 바꾸려면』(원제 社會を變えるには)은 일본, 더 나아가 전 세계에서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갖고 있는 사회문제에 주목하는 책이다. 2012년 고단샤(講談社)에서 출간된 책은 2013년 일본 신서대상(新書大賞) 1위를 하며, 일본 내 인문학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반응과 인기를 얻은 책이다. 저자 오구마 에이지는 게이오대(慶應大) 역사사회학 교수로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로 꼽힌다.
이 책은 일본의 원자력발전 반대운동의 기운이 한창 높아가는 가운데 쓰였다. 그렇기에 원전, 사회운동, 일본에 대한 특정한 관심과 관련이 있지만, 이 책은 보다 폭넓은 문제들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탈공업화’(‘리스크 사회화’ 또는 ‘글로벌화’)의 조류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모두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용과 가족의 불안정화, 격차의 확대, 정치의 기능부전, 민주주의의 한계봉착, 공동체의 붕괴, 노조의 약체화, 편협한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증대, 이민자 배척운동이나 원리주의의 대두 등은 현대의 어느 나라에서나 발견된다.
2011년 12월 30일 아사히신문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지진 후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답한 사람이 약 71%, 데모에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4%이다. 그러나 데모에 참가하는 것은 저항감이 든다고 답한 사람이 63%,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답한 사람 중 “세상은 간단히 바뀌지 않는다”라는 이유를 댄 사람이 67%였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가에게 맡기면 된다고 한 사람은 전체의 3%에 불과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누구나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실제로 바꿀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정치가에게 맡기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에 관여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데모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사회는 과연 바뀌는 것인지, 사회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회를 바꾼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역사적, 사회구조적, 사상적으로 성찰해보고자 하는 것이 책의 전체적인 취지이다.

2.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의 사상까지 민주주의의 원류를 파헤치고,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다
저자는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직접행동과 참여를 강조한다.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데모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라고 말한다.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하면 대화를 할 수 있는 사회, 대화가 가능한 관계를 만들 수 있고,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하면 참가할 수 있는 사회, 참가할 수 있는 자신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책은 단순히 데모를 비롯한 사회운동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태동부터 그것이 현대의 자유민주주의로 발전된 역사적 흐름을 짚으며 사회운동의 가능성과 행동을 모색한다. 근대과학·철학·정치·경제 등 다양한 방면의 사상의 출현과 발전,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찾으며, 인문학적으로 깊은 성찰을 제시한다.
데모라는 말의 어원인 데모스 크라토스(demos cratos)는 민중의 힘, 즉 피플즈 파워(people’ power)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민중에게 힘이 깃들어 있는 상태이다. 피플즈 파워에는 참가하는 사람들 모두가 고조되는 것이 중요하다. 똑같은 숫자의 사람들이 참여한 데모일지라도, 참가자들에게 힘이 깃들어 있는 데모와 그저 일당을 받고 참가한 데모는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폭력적이고 과격한 ‘데모’의 이미지는, 즐겁고 흥이 나는 원래의 바람직한 양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데모에는 사회를 바꾸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데모 등의 사회운동을 통한 직접행동과 참여는 ‘나의 생각이 대표된다’라는 의식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소수일지라도 행동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 숫자가 많을 필요도 없고, 한 사람의 행동, 한 장의 사진, 한 편의 시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데모보다 투표가 낫다’나 ‘로비를 통해 정치가를 움직인다’ 등의 사고방식은 대단히 협소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은 ‘나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해서 의원이나 정당을 선택하고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18~19세기의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고방식일 뿐이다.
원래 자유주의, 대의제, 민주주의 세 가지를 조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대의제는 ‘선거에 의한 귀족정’이고, 자유주의는 권력의 개입을 가능한 한 줄이자는 입장, 민주주의는 모두 함께 결정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의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을 때, 데모나 사회운동이나 국민투표를 비롯한 직접민주주의로 보완해나가지 않으면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데모나 국민투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파괴행위’라는 일련의 주장도 있지만, 대의제가 원래 봉건제의 산물이기에 데모가 봉건제의 파괴행위일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의 파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또 선거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투표를 통해 대표가 선출되는 체제는 유력자나 대규모 조직을 등에 업은 사람이 승리하게 된다. 이것은 루소가 말한 것처럼,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탈공업화 사회에서는 고용 및 가족은 불안정해지고 격차는 심화된다. ‘나’는 정당에 의해 대표되지 못하고, 갈수록 정치 또한 불안정해진다. 이런 가운데 돌발적 인기를 얻는 정치가나 극우정당이 보수정당이나 노동정당을 위협하기도 한다. 때문에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나 세계금융공황 등이 발생했을 때 실업자나 불안정한 노동자의 증가는 폭동 등의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것은 유럽 등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현상이다.

3. ‘주체’와 ‘객체’는 서로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
‘대립하는 목소리’를 넘어 ‘대화하는 목소리’로
저자가 데모나 사회운동 등 직접행동과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는, 현대는 탈공업화 사회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탈공업화 사회는 자유롭고, 선택 가능성과 다양성이 증대된 사회이다. 현대는 인터넷을 이용해 전 세계 어디서나 수많은 선택지와 다양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간혹 고용 및 가족의 불안정, 범죄의 증가, 데모 및 사회운동을 인터넷의 영향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지만, 기술은 사용자의 세계관과 사회기반의 변화가 없으면 사회를 바꾸는 원인으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또한 공개와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든스의 표현에 따르면 ‘대화민주제’이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자치회와 공청회, 집회·데모 등 직접민주주의의 활력을 통해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그러나 일부는 대화에 의한 조정보다 ‘강한 리더’가 필요하다는 성향을 보인다. 그것은 종래의 ‘조정형’ 정치가, 대화가 아닌 이해관계자들끼리 사전교섭을 하여 ‘조정’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형태를 바꿔야 정치부재와 포퓰리즘을 막을 수 있다.
근대과학·정치·경제는 주체가 객체를 조작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정치 또한 민중을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체’와 ‘객체’는 서로 만들고 만들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조작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개와 대화에 의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나가야 한다. 대의제 자유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도입하려는 데모와 사회운동은, 정권과 대립하는 상태라면 ‘대립하는 목소리’가 되지만, 정권이 거기에 응해주면 ‘대화하는 목소리’가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생각이 전혀 없는 정부가 자신들을 무시하고, 기득권을 장악한 세력끼리만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을 용서할 수 없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일본의 탈원전 데모에서 사람들이 바랐던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것은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느 시대에서나 품고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는 형태는 다르지만, 이런 보편적인 생각과 연결될 때 일어나는 운동은 커다란 힘을 지닌다고 말한다.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행위와 관계와 역할의 연결체”이고, 가만히 있으면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어떻게든 알아서 해준다는 감각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비록 정치가나 관료나 대기업이 부정행위를 벌일지라도 유능하기 때문에 맡길 수 있고, 사회 구조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체념한 채 무관심하게 지내도 괜찮다고 여길 수 있는 시대도 역시 지났다. “차가운 벽에 둘러싸여 목소리를 낼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타인의 눈으로 볼 때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 ‘벽’의 일부일 수 있다.
관계는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관계는 기다리거나, 나서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사회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꿔야 하고, 사회는 이미 바뀌고 있고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실제로 다양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저자 오구마 에이지는 2012년 12월 22일자 《아사히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탈원전 데모에 참가한 오구마 에이지. 그는 사회를 바꾸는 힘이 데모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권력을 향해 구호를 외치고 변화를 요구하는 경험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주춧돌이 된다는 말이다. 선거결과를 민의의 전부라고 여기고 실망하는 이들에게 오구마 에이지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선거가 시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통행을 거듭한다면 다른 민주주의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시민의 의사를 왜곡하는 선거제도와 민의를 배반하는 정치를 바꿀 힘은 직접행동에 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투표할 권리’만 말하는 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시민 누구나 생각을 모으고 발언하며 공동의 문제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만들자는 것이다. 지역자치운동이든, 비영리단체 활동이든, 어떤 행동이든 시작하자고 오구마 에이지는 이야기한다. 행동은 전염성이 있다고. 용기는 전염된다고.

저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Still, let us not disarm, even in unsatisfactory times. Social injustice still needs to be denounced and fought. The world will not get better on its own.)

4.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어떻게 사회운동으로 연결되었는가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의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는 사상 초유의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2년 6월 29일 금요일, 일본 수상관저 앞으로 대략 10만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시민들이 몰려들어 평화적으로 원전의 ‘재가동 반대’를 소리 높여 외치게 된다. 대규모로 이어진 탈원전 데모는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30~40대 남녀가 주류를 이루고, 외국인과 해외언론도 함께 이 데모에 참가했다. 이는 과거의 ‘운동’이나 ‘데모’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조직 동원이 없는 순수 자유참가자들이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천재(天災)’에 그치지 않는다. 공업화 사회와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원자력발전은 현대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오히려 원전은 일본 사회문제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정경유착, 안전문제, 경제적인 비용문제 등 그전부터 일본 내에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고, 이미 시민들은 불만이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원전 사고 이후 사람들의 분노를 산 것은 일본 정부의 정보제공과 대응의 방식이었다. 20여 년에 걸친 장기 경제침체 속에서 정부정책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터에 원전 사고가 터졌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서도 볼 수 있듯, 대규모의 사고에서 그 대응을 잘못하면 국가를 망가뜨려버릴 정도의 엄청난 충격을 안긴다. 이것은 비단 원전 사고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동안 쌓여 있던 문제와 불만은 시민들의 분노를 표출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후의 정부의 의사결정 방식이, 국민의 안전을 지켜줄 마음도 국민의 뜻을 반영할 생각도 없고, 정계의 기득권층에서 결정하려 했기 때문에 불만의 수위가 올라갔다.

5. 『사회를 바꾸려면』의 주요 내용들

[ 제1장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일본 사회,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현황을 파악하며 문제점을 알아본다. 공업화 사회에서 탈공업화 사회로 변모해가며 일본 사회는 고용, 교육, 사회보장, 정치 모든 면에서 한계에 봉착했다. 글로벌화, 자유화, 다양화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탈공업화 사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일본은 기능부전에 빠지게 된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고 격차는 심해지며, 소속감은 없어지고 소외감은 증대되었다. 사회를 바꾸려면 현대 사회의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 제2장 사회운동의 변천 ]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의 사회운동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왔는지 살펴본다. 공업화 초기의 윤리주의와 전위당 조직형태의 사회운동에서 공업화 후기에는 학생운동, 여성해방운동, 에콜로지운동 등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발전되어간다. 계급에 기반을 두지 않은 ‘청년’과 ‘여성’ 등 소수자의 운동이 중심이었다. 탈공업화 사회에 이르면 선택의 다양성의 확대, 자유의 증대, 사회의 변화에 따라 사회운동도 더욱 자유로워지고 다양해졌다.

[ 제3장 민주주의란? ]
고대 그리스는 민주주의의 기원이지만 현대와는 달리 시민 전원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체제였다.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중요시한 고대 민주주의는 축제의 장과 흡사한 형태였다. 제의는 곧 정치이고, 대표가 모여 행하는 것이 대의제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감지하는 ‘철인왕’이 통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 문답법과 웅변술이 필요하다고 했으나 철인왕의 통치는 이상에 불과했다. 중세가 되면서 왕정이 고정되고 왕이 곧 ‘대표’가 되었다.

[ 제4장 근대 자유민주주의와 그 한계 ]
근대의 기본 사상인 이성, 과학, 정치학, 경제학 등이 근대 자유민주주의인 대의제로 결실을 맺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약, 나침반, 인쇄술의 발명은 신분제를 뿌리부터 뒤흔들었고, 세계관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데카르트의 근대적 이성과 근대과학이 나타나고, 이와 함께 새로운 정치사상도 출현한다. 근대 정치사상의 원조 홉스, 자유주의의 원조 로크, 민주주의의 원조 루소에서, 애덤 스미스의 경제자유주의, 벤담·밀의 공리주의, 프랑스 사상가 토크빌의 미국론까지 그 사상적 흐름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오일쇼크와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 자유민주주의는 한계에 부딪힌다.

[ 제5장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사색 ]
대의제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인 모색을 소개한다. ‘이성을 행사하는 주체’에 대한 의심은 20세기 양자역학, 불확정성원리, 상대성이론, 후설의 현상학 등으로 확산된다. 개체론적 발상보다 관계론적 발상을 중시한 현상학은 후에 구축주의로 발전하고, 마르크스의 물화, 헤겔의 변증법 등도 새롭게 등장한다. 개체론적인 카테고리로 묶는 원리주의는 한계에 처했고, 기든스의 재귀적 근대화, 울리히 벡의 ‘리스크’ 이론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주체가 객체를 조작한다는 근대과학과 대의제 민주주의는 다양한 사상적 모색을 통한 보완이 필요하다.

[ 제6장 일본 사회문제의 상징, 원자력발전 ]
2011년에 일본 사회운동의 주된 의제로 떠오른 후쿠시마 원전 문제가 일본 사회에서 갖는 상징성에 대해 조명한다. 공업화 시대의 원전은 경제성장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지만, 오히려 일본 사회가 처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정경유착, 안전문제(환경파괴), 경제적인 비용문제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원전은, 일본 정부에 대한 불만과 불안감을 시민들의 사회운동을 통해 표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제7장 전후 일본의 사회운동 ]
전후 일본 사회운동의 역사를 소개하며, 현대에 필요한 사회운동의 모습이 어떤 형태가 되면 좋을지 점검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60년대 일본부터 현대일본까지의 사회운동사를 살피며, 사회구조의 변화와 운동의 관계, 일본 사회운동의 특징을 짚는다. 일본에서 어떤 형태로 운동이 전개되어왔는지, 왜 사회운동에 대해 나쁜 이미지가 형성되었는지, 왜 1970년대 이후에는 사회운동이 침체에 빠졌는지, 그리고 현대의 사회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 것인지 조명한다.

[ 제8장 사회를 바꾸려면 ]
단순히 선거를 통해 ‘중앙제어실’을 바꾼다고 사회, 또는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화와 참여를 통한 데모, 사회운동, 국민투표 등의 직접민주주의의 형태가 필요하다. 현대에서 사회운동을 전개하면서 참고할 만한 이론들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며 궁극적으로 현대에 있어서 사회를 바꾼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본다. 운동은 폭동을 일으킨다는 등의 비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라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주창하는 ‘자원동원론’, 운동의 관심이 줄어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쟁점관심 사이클’, 관심은 있지만 지식이 없거나 지식은 있지만 행동을 망설이는 층을 타깃으로 삼는 ‘이노베이터 이론’,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프레이밍’, 누군가 목소리를 내서 인지함으로써 문제로서 구축되는 ‘구축주의’, 인간의 세계관과 윤리의 질서를 침해당했을 때 운동이 일어난다는 ‘모럴 이코노미’, 잘 알려진 것을 슬로건으로 전용하는 ‘어프로프리에이션’ 등 다양한 이론들을 소개하며, 어떤 이론을 언제 이용하는 것이 좋은지 실례를 통해 살펴본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참여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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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하나씩 예도 들면서... 학생은 잘 가르치겠다.
madwife 2014-06-1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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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 담백한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 아쉽지만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에게는 이 책을 절반 정도로 축약해도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개인적으로야 잘 모르는 사이지만 세상 어딘가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는건 좋은 느낌이다.
귀를기울이면 2014-07-1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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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가볍달까, 아니면 편하달까. 정작 봐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
냥이관리인 2014-12-0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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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위한 마지막 징검다리 돌을 스스로 들게 만드는 책...


2011년 3월 11일. 그 날 일어났던 일본 원전 사태 이후로 일본 국민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JAPAN AS NO.1'이라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속한 일본 사회가 전혀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고 있다고 여겼다. 버스 안의 얌전한 승객들처럼 핸들을 쥐고 있는 정부를 신뢰하며 이렇다 할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덜컥 사고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차량이 전복될만큼의 대형 사고를.


일본의 또 하나의 자부심이던 안전신화는 여지없이 붕괴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비판적 여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사업을 민영화시키고 지속적으로 사업 확장까지 시켜온 정부에 대한 신뢰 역시 그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참지 않았다. 40%라는 초유의 시청률을 보여준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는 단적인 그 증거였다. 한자와 나오키는 주인공의 이름인데 그는 은행원이다.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은행의 악랄한 속임수로 기업은 도산하고 결국 자살까지 하게 되자 복수를 위하여 아버지를 파멸로 이끌었던 은행에 취업한 것이다. 하지만 은행원이 된 동기가 오로지 복수인 것만은 아니었다. 다시는 아버지와 같은 비극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제대로 된 은행으로 만들겠다는 신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은행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온갖 악행과 불법을 저지르며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인물은 사전에 잡초처럼 밟아버리는 곳이다. 당연히 신념을 관철하려는 한자와 나오키 앞으로 탐욕에 물든 상사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올 수 밖에 없다. 그냥 묵묵히 상사들의 명령에 순응했다면 생채기 하나 안 났을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자와 나오키는 그러지 않았다. 타인의 눈물을 자아내는 불의가 있다면 결단코 바로잡으려 했다. 조직을 등에 업은 상사들의 발톱은 한자와 나오키에게 꽤나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는 자주 파면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말을 하면서 더욱 결의를 굳건히 할 뿐이다. 그 말이 바로 '바이가에시'다. '당한만큼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그것도 백배, 천배로.

바로 이것이 40%라는, 일본드라마로서는 참으로 경이로운 시청률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이 말은 원전 사태 이후에 변해버린 일본인들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었다. 원전 사태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믿고 순응했던 자신을 바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더구나 뒤이은 정부의 은폐와 여론 호도 조작은 일본인들을 더욱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국가가 국민을 철저히 무시해왔음을. 가만히 있었더니 진짜 '가마니'로 여기고 함부로 해 왔음을. 한자와 나오키처럼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가에시'는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여기서 무시라는 말을 꺼내게 된 데는 연유가 있다. 바로 이것을 2011년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나 아프리카의 '자스민 혁명'등, 작금에 이르러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하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우리'가 조각조각 흩어진 채 소우주처럼 난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고 공통적으로 여길만한 것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다. (...) 그러나 현대에 사는 누구나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등의 감각이다. 이것은 수상이든, 고급관료든, 비정규고용자든, 필시 공유하고 있다. 그것을 바꾸면 누구에게나 '사회를 바꾸는' 것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p. 370)



그것이 바로 62년의 동경에서 태어나 현재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정책학 교수로 있는 오구마 에이지가 쓴 '사회를 바꾸려면'이라는 책이다. '한자와 나오키'의 인기는 그러한 무시당했다는 감각이 일본 저변에 확대되어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는 '격차 사회'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 때 '1억명이 중산층'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인구에 회자될만큼 일본은 그동안 사회적 격차에 대해선 둔감한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1년을 기점으로 유행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격차 사회'란 말도 그 감각에서 발현된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격차에 대한 반감이 향하고 있는 대상을 통해서다. 일본인들의 반감은 '연 수입 10억엔 이상의 큰 부자에게는 향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연 수입 300만엔 정도의 공무원이나 정사원만이 원망의 대상으로 떠오른다.(p. 371)'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날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다면서도 우리들 원망의 이빨은 이건희 같은 재벌가들 보다 교사나 공무원 들에게 잘 들이댄다. 왜 그럴까? 바로 여기에 무시에 대한 감각이 깔려 있음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대기업의 정사원 그리고 교사나 공무원들이 자주 원망의 화살을 받는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안정적이라는 것. 즉 그들은 테우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사람들은 느끼는 것이다. 격차의 심화는 날로 테우리 안에 보호받는 사람들의 수를 줄였다. 우리나라도 이미 비정규직이 절반을 넘었다. 날로 테우리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이들이 많다.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일본이나 전무하다시피한 우리나라에서 테우리 바깥으로 내몰리는 것은 한없는 불안과 마주하는 일이다. 거기서는 생존마저 위태롭다. 오구마 에이지는 말한다. 빈곤이란 사실은 사회 어디에도 자기 자리가 없다는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현대 일본어의 '격차'라는 것은 단순히 수입과 재산의 차이만을 지칭하지 않으며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감각의, 일본 사회 구조에 입각한 표현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p. 373)


그들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 조르주 아감벤이 말한 법의 보호 바깥으로 밀려난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깨끗이 무시된 자들. 원망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즉 그들의 원망이란 기실 나도 당당한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호소에 다름아니었다. 그렇다면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진정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 오구마 에이지는 이렇게 답한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의 근본된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을 '나를 무시하는 존재'의 상징으로 보는가는 시대마다, 각 사회의 구조마다 다르다. 이 무시의 감각을 지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구체적 구조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그는 책의 시작이 되는 1장에서 지금 일본 사회의 구조부터 살핀다. 그에 따르면 지금 일본 사회는 공업화 사회에서 탈공업화 사회로 변했다. 탈공업화 사회의 특징은 무엇보다 유동하는 정체성이다. 공업화 사회는 '종신 고용'이라는 말처럼 정체성이 안정적이었다. 오구마 에이지에 따르면 '전업 주부'도 공업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원래 일본에는 여성 취업률이 남성보다 높았었는데 이제 공업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종신 고용으로 남성들이 안정적으로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바깥에서 일할 필요가 없게된 여성들은 가사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신 고용의 신화가 붕괴된 탈공업화 사회에선 더 이상 그런 안정의 획득이 불가능해졌다. 비정규직 비율은 날로 높아져가고 있으며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일자리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 성장의 근간이 되었던 제조업이 크게 쇠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제조업들은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중국이다 동남아 쪽으로 넘어갔다. 이제 일본은 다른 선진국들처럼 서비스업 종사자의 수가 제조업 종사자의 수를 크게 웃돌게 되었다. 이 서비스업 종사자 수의 증가가 바로 탈공업화 사회의 특징이다. 또한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탈공업화 사회로 가면 갈수록 비정규직의 비율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공업화 사회만큼 통일된 정체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이 그러하듯이. 거기다 서비스업은 직종도 또 의복도 천차만별이다. 때문에 정체성은 한없이 산포되고 그만큼 유동적이 된다. 이건 달리 말해 어떤 사안이 터졌을 경우 '이게 내 문제다'라는 감각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라는 감각을 만들기가 어려운 사회. 그것이 바로 탈공업화 사회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사회 운동 방법 역시 재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사회 운동 방식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당연했다. 그 때까지는 정체성이 어느정도 단일화 되어있고 항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너무나 많이 다변화된 정체성으로 '우리'의 문제로 가져오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 일본은 그러하다. 우리나라 역시 점차 다가가고 있다. 사회 운동의 방법 역시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무시받지 않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라는 감각을 어떻게 일깨울 것인가? 당연히 들 수 밖에 없는 의문이다. 오구마 에이지는 이를 위해 제법 긴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그는 민주주의의 참 의미를 답사하고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 지점까지 나아간다. 그러면서 근대 사회와 철학의 역사까지 아울러 훑는데 이러는 까닭이 있다. 근본적으로 탈공업화 사회 자체가 가져다주는 상황의 어려움이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이러한 사회의 특징을 무엇보다 '재귀성의 증가'로 꼽았다. 재귀성이 얼른 이해 안되면 '되먹임'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즉 존재든 사건이든 하나에 그치지 않고 자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재구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훗설의 현상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훗설은 말하기를 데카르트가 생각했듯이 주체와 객체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우리는 고정된 자아로서 타인과 세계라는 객체를 대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변해간다는 이야기다. 또한 내가 변하면 내가 바라보는 객체도 변하게 마련이니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드라마 같은 데서 잘 나오는 이야긴데 앙숙처럼 지내던 남자에게 어느 순간 사랑을 느낀 여자를 생각해 보자. 사랑을 느낀 그녀의 눈에 이제 남자는 더 이상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원수가 아닐 것이다. 예전에는 밉게 보이기만 했던 행동도 이제는 사랑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이 중, 어느 것이 과연 진짜 그녀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그녀에게 연연하지 않을 것임은 틀림없다. 훗설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재귀성'은 바로 이것이다. 나도 너도 매일 변한다는 것이다. 나와 너가 만나 이루는 관계 역시 요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진짜다! 진리다!' 말할 수 없는 시대. 그것이 바로 기든스가 바라보는 탈공업화 사회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든 것이 흐르는 물처럼 한없이 유동한다고 하여 '액체 근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구마 에이지는 이것을 가져와 '우리'라는 감각을 일깨우는 사회 운동 형성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출렁이는 바닷물 위에 하얀 백묵으로 선을 긋는 것과도 같이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치할 수는 없다. 변화는 언제나 실제의 시도에서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우리'라는 감각을 가지게 만들 좋은 계기가 닥쳐왔다. 그것이 바로 '원전 사태'다. 오구마 에이지가 특별히 6장을 일본 원전에 할애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로 그 원전이 지금까지 잠재된 일본이 가진 모든 문제점들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었고 변화의 정당성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전은 일본인 모두의 생존을 위험하게 만들었기에 '우리'라는 감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말하자면 원전은 모두가 '나의 문제'라고 여기게 만들어 변화를 위한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 준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모으고 뻗어나가게 할 것인가에 있다. 그것을 위해 오구마 에이지는 현실 속에서 존재했던 전후 일본의 사회 운동 역사를 참조하려 한다. 지금까지 일본 사회 운동의 역사는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기에 그건 실패한 역사의 복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타산지석이라고 지나간 운동의 실패는 우리가 어디를 디디면 안되는지는 알려줄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조심스러움이 눈에 띈다. 그만큼 이 계기를 놓칠 수 없다는 뜻일테고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터이다. 비록 재귀성이 한껏 증가하는 탈공업화 사회에서 변화로 흐르게 만드는 사회 운동의 물꼬를 트는 일은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구마 에이지는 행여나 건너가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 길손이 있을까 하여 징검다리를 놓는 기분으로 작업을 이어나간다. '사회를 바꾸려면'는 바로 그런 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은 그 원전 사태 때문에 쓰여졌다. 정작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 자신은 원전 사태가 발생했을 때 병원에 입원해 있어 그 사실을 몰랐지만. 어쨌든 원전에 대한 반대운동이 한창 높아져 가고 그만큼 정부의 은폐와 억압 또한 치열해 지던 향후의 추이를 보며 쓰여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 역시 '바이가에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호한 선언, 뜨거운 호소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차가운 지성의 책이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좌초중인 일본 사회를 바꾸려면 진정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총 439페이지에 도합 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름 단단한 뼈대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사회를 바꾼다고 이야기할 때 흔히 따를 수 있는 위험인 '탁상공론'이 되지 않도록 만드려는 뼈대가.




그렇게 이 책은 실천 가능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펼쳐진 진지한 모색의 작업이다. 일본 사회의 역사와 서양의 이론들까지 아우르는 내용은 꽤나 풍부하여 읽는 이의 흥미를 돋우고 현실 일본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논의는 꽤나 진지하여 이 쪽에 별 관심이 없었던 이들도 읽다보면 여기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후기에 저자는 자신의 책이 교과서로 읽히지 않고 어디 독서모임 같은 곳에서 토론 거리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는데 과연 거기에 어울려 보인다. 굴비들을 한 쾌로 엮듯 분명 주제의 일관된 흐름이 있지만 그와는 또 별도로 전체에 걸쳐 이것저것 생각할만한 꺼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분명 저마다 다른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서로의 마음에 대해 알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말했던 대로 해답이 아니라 촉발이다. 고민의 도착점이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인 것이다. 참조할 수는 있으나 구애받을 수는 없다. 오구마 에이지가 내내 설파해온 대로 정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기엔 마지막 징검다리 하나가 빠져 있는 셈이다. 그건 길손인 우리가 놓아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 마지막 돌을 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구마 에이지도 이 책 어디에선가 말했듯이 목소리를 스스로 내지 않으면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물론 무시가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그건 어렵다.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더욱 해야 한다는 당위가 성립된다. 그렇지 않아도 독자가 주저할 것임을 예상했던지 오구마 에이지는 다음과 같은 조언이랄까 응원이랄까 하는 말을 해 놓았다.


부당한 것에는 항의해야 한다는 체험을 이미 해봤고, 막상 해보면 재미있고,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바로 그런 습관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나면 사회는 바뀌게 마련이다.(p. 276 ~ 277)

무엇이든 처음만 어려운 법이다. 몸에 배이게 되면 더는 고민할 것도 없다. 그 첫 단추를 이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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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2014-07-1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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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되면 무섭잖아. 물대포 맞으면 아프잖아.


대의민주주의제도는 현대 국가의 근간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의민주주의제도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혁명과 전쟁과 살상과 암투와 결탁을 이어오며 만들어 낸 최종 결과물이다. 현대 정치의 골격이기도 한 대의민주주의제도를 한국은 수십 년 만에 응축했다. 한국전쟁 이후 오랜 독재 시기에는 제대로 이것을 구현하지 못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비로소 조금 맛보게 되었다. 대의민주주의제도를 결정하고 대표하는 것은 ‘선거와 투표’이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처럼 직접민주주의제도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근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선거와 투표’는 민심과 민의를 국가 정책과 운영에 반영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다. 한국의 정치와 선거가 세계 그 어떤 국가보다 질이 떨어지고 수준이 낮은 것은 일견 이해가 된다. 87년 이후 제대로 된 선거와 투표를 해 본 것이 불과 30년도 되지 않는 것이다. 독재정권 아래 선거는 선거가 아니었고, 투표도 투표가 아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선거와 투표를 하며 한국 사람들은 두 번의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정치적인 방향성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나는 이것만으로도 한국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자민당이 수십 년 동안 해먹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물론, 두 번째 정권교체 이후 이 대의민주주의제도의 골격인 선거와 투표가 공정하게 치러졌는지 말이 많고 의심이 많아 졌지만.


나는 적어도 정치적 의제와 정치 구조에 대해서 비판과 음모와 공격이 오가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중요한 발전 동력이라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선거제도나 투표제도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은 암울해 보이고 도무지 달성될 것 같지 않은 정권교체도 언젠가는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대의민주주의제도가 최상의 제도나 방법이 아님을 주장한다. 선거와 투표도 오롯이 민심과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 「사회를 바꾸려면」은 도발한다. 현대 국가를 구성하고 운영하고 유지하는 근간을 흔드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 이었다.(책을 다 읽고 나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여기며 입시경쟁을 뚫고 올라왔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 진리탐구의 전당은커녕, 학생들만 엄청 뽑아놓고 볼품없는 강의를 억지로 듣게 하고 수업료 올리기에 바쁘다.” (p.320)



이 부분만 읽으면 한국의 사회학자가 한국 사회를 진단하면서 쓴 문장으로 보인다. IMF이후 한국사회, 특히 대학과 대학생이 겪고 있는 사회적 진통을 표현한 듯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60년대 후반 일본의 대학에서 전공투 운동이 벌어지게 된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무려 50년 전 일본의 대학과 대학생들이 겪었던 일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일부 의도적으로, 일부 어쩔 수 없이 한국은 일본의 제도와 풍습, 사회체제와 학문, 문화와 의식을 답습했다. 일본이 80년대 겪었던 부동산 버블붕괴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지금 한국이 겪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을 가리켜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자꾸만 한국의 미래를 미리 보는 것 같았다.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앞으로 한국은 이렇게 될 거야.’라고 예언하는 것 같았다.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는 젊은 사회학자다. 책의 전반부에는 지금의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이론적 배경을 자세하게 언급하는 데, 사회학·철학책 몇 권 읽는 것 같이 짜임새 있고 내밀하게 분석한 것이 돋보였다. 특히, 나치스의 집권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후 방법론적으로 ‘전위당’으로의 방향성과 ‘사회민주주의’로의 방향성에 따라 어떻게 진보·좌파가 형성되고 실패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나치스가 정권을 쥔 것은 결코 폭력혁명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보통선거권에 의한 대의제 민주주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p.168)

흔히 히틀러의 나치스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불법적인 방법이나 폭력혁명을 통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끔찍한 2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고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아우슈비츠 학살, 유대인에 대한 정신병적인 공격 등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히틀러와 나치스는 정상적인 인간과 인간들의 집합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히이만을 통해 악의 평범함과 편재성을 악몽처럼 경험한 현대인들은 아히이만의 얼굴에 히틀러와 나치스의 얼굴을 오버랩해야 한다. 1차 대전 이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는 극우 폭력 단체를 양산했고, 지독한 실업난과 구직난에 허덕이던 청년들은 너도나도 이곳에 몰려들었다. 결코 폭력을 동원하거나 강제로 끌어 낸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선출된 권력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대의민주주의제도가 현대국가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될 수 있지만 그 제도로 인해 선출된 권력에 대해 무한대로 부여한 정통성은 한순간에 괴물 내지는 악마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법만 정상적이고 이후 과정과 결과가 비정상이라면 선거와 투표는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2차 대전 이후 전범들에 대한 체포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고 그들에 대한 처벌도 이뤄지고 있는 유럽에서, 신나치주의와 인종주의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가 정상적인 선거와 투표로 또다시 나치스와 같은 괴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생각에 이르니 끔찍하다.













대중문화 평론가인 강헌씨가 진행한 팟캐스트 방송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서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순간」이라는 책을 읽은 소감을 이야기 하면서 대의민주주의제도의 한계를 지적한 적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선거라는 것을 통해 선출된 자들이 결국 똑같은 자들이다. 뽑아놓은 저놈이 제대로 안 해서 다시 다른 놈을 뽑아도 결국 그들은 움직이고 지배하는 것은 그 위에 있는 다른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치상황과 묘하게 맞물리면서 뇌리를 강하게 때렸다. ‘아 맞다! 결국 한국이라는 사회를 움직이는 이들은 저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보이지 않는 자들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이르자 더욱 정치에 대한 혐오가 강해지는 역효과가 나기는 했지만, 선거와 투표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제도가 가장 이상적이고 훌륭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라는 것에 강헌씨와 오구마 에이지와 내가 비로소 동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과 내가 같은 반열에…….

“같은 마르크스주의라 해도 노동정당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여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소수 정예멤버의 전위당을 조직하여 혁명으로 정권을 잡는다는 레닌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p.282)



일본과 한국은 레닌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나는 현재 한국 진보정치의 괴멸의 시작은 레닌주의가 득세한 과거 7,80년대 대학운동권의 선택에 있다고 생각한다. 6.4지방선거에서 통진당 사태를 일으킨 통합민주당과는 다른 정의당과 노동당, 녹색당마저 괴멸한 것은 길지 않은 진보정당의 정치적 실험이 실패했다는 방증이다. 책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50년대 이후 대학운동권에서는 레닌주의에 입각한 ‘전위당’조직 활동이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50년대와 한국의 70년대는 ‘전위’가 필요했다. 당시 일본과 한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극소수였고, 이들은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추구하지 않고 대중을 계몽하고 영도해 보다 나은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소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교육이 일반화 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문맹의 비율이 낮아지면서 자연스레 ‘사회민주주의’형태로 변모해야 했는데, 여전히 ‘앞서서 나가니 따르라’라는 식의 객기만 남게 되었다. 이석기씨가 같은 정당 사람들과 모임을 하면서 전혀 실정에 맞지도 않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 한 것을 보면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전위의식’의 폐해가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이것은 이석기씨와 통진당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전체 좌파조직과 정당에 치명타를 입혔고 앞으로 좌파정당이 원내에 진입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이제 아무리 노동당, 녹색당 간판을 들고 나와도 “저런 저..저.. 저 놈들 통진당하고 똑같은 패 아니야! 빨갱이 놈들!”이라고 하면 끝이다. 게임 끝.

















“사회운동에 있어서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frame)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론이 프레이밍(framing)이다. 현상학적인 사고를 통해 말하자면 단지 사회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은 현실세계의 복잡성을 감축시켜 도식화하여 이해한다. 그러므로 인식의 틀을 바꾸는 것이 운동에서 중요한 경우가 많다고 파악한다.” (p.387)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괴멸한 한국 좌파정치의 마지막 희망이 될 것 같아 언급한다. 사회운동에 있어서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여론조작이나 정치적 선전과 선동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국의 선거 당일 밤 TV에서 지도에 양당색깔을 입혀 표시한 선거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네거티브가 판을 치고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도 선거결과 지도는 바뀌지 않는다. 동서의 구별이 확실하다. 그만큼 프레임을 바꾸는 것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면 이것에 올인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여론전에서도 밀리고 가지고 있는 돈과 정보와 힘도 없고 대중들에게도 완전히 비호감으로 낙인찍힌 상태다. 그렇다면 물러설 곳도 없는 것이다. 방법도 없고. 지난 지방선거를 앞두고 팟캐스트 방송 중 하나가 <지방선거 데이터 센트럴>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말 그대로 지방선거 후보자들에 대한 데이터를 나열한 방송인데, 경악했다. 일단 제대로 된 공약을 가진 후보자가 거의 없었고, 음주운전쯤은 기본 장착 옵션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탈했던 것은 새누리당, 새정치연합, 진보당, 녹색당, 정의당, 노동당 후보들의 공약이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공약 같은 것이야 유권자들이 보지 않으니까 대충 해놓고 시장에 가서 인사나 더 하고 악수나 더 하자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정치의 이런 구태와 낮은 수준의 선거행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책에서 언급하는 사례가 도움이 될 듯하다.



“‘풍요로움보다 자연을 지켜야 한다.’라는 프레이밍만으로는 좀처럼 사람들을 사회운동의 장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만들고 안 만들고는 주민투표로 결정해야 한다.’라는 프레이밍을 제시하면,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는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저 쪽은 나쁜 놈들이야! 저 쪽을 뽑으면 다 망해!” 라는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삼척시장에 당선된 김양호 시장은 선거 기간 내내 <핵발전소 전면 백지화>를 내세웠다. 상대편 후보가 <핵발전소 유치>를 내세운 것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김양호 시장이 당선되었다는 것은 삼척시민들의 민심과 민의를 제대로 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극히 일부다.


“독일 녹색당 ‘당신들은 우인가, 좌인가?’ ‘우리는 우도 좌도 아니다. 앞이다!’” (p.388)


“우리는 우도 좌도 아니다. 앞이다!”라고 재치 있게 받아칠 만한 녹색당원은 한국 녹색당에는 없는 걸까? “당신 빨갱이요?”라고 하면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정도에 불구하면 대중의 관심은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앞이다!”라고 말해 논점을 전환하고 전혀 다른 판국으로 사안을 주도할 수 있는 프레임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진보정치·좌파세력들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대중과의 소통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들만의 프레임을 만들어야 한다. 소수지만 <기본소득>같은 개념은 새로운 것이다. 전혀 한국 사회에서는 적용될 수 없을 것 같지만 끊임없이 이런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설득해야 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일본에서는 거리에서 벌이는 데모가 거의 잊힌 것이나 다름없어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운동수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오히려 데모의 의의를 강조했습니다.” (p.7)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는 대규모 데모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월스트리트 아큐파이와 재스민 혁명, 이라크와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데모와 시위. 저자는 선거와 투표를 통해 선출된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데모를 통해 한국 사회가 변화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대의민주주의제도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지난 시간이 아깝거나 다른 묘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알제리와 한국의 브라질 월드컵 조별 예선 2차전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모인 사람의 숫자가 8만 명이라는 뉴스를 보고 나는 절망했다. 왜냐하면 세월호 시위에 참석한 가장 많은 숫자가 그것에 반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뭐, 월드컵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월드컵 응원은 즐기는 것이고 세월호 시위는 뭔가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일, 내지는 잡혀갈지도 모를 일로 생각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회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바꾸어야 한다. 아니 이미 바뀌고 있다. 그 길을 피해갈 수는 없다. 침묵을 지키다가 서서히 침몰하든가, 어느 시점에선가 대파국을 맞이하든가, 명백하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든가 어느 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p.278)


저자는 여러 번 울리히 벡의 「리스크 사회」를 언급하면서 사회 어떤 계층이든 원전사고와 같은 국가적 재앙이 닥쳤을 때, 자신의 계층을 이용해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냥 관심 끄고 혐오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파국은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명백하게 좋은 방향”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지만 가만히 앉아서 파국을 맞고 싶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움직여야 하는데, 원전사고를 겪은 일본인들보다 한국인들은 전 사회적 리스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는 게 아닌가 싶다. 거리로 나가 조금만 인도로 진출하면 집시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끌려가야 하고 한여름이나 한겨울 상관없이 물대포를 맞아야 하는 두려움과 귀찮음을 벗어던지면서까지 데모를 하러 나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당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 당신이 바뀌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설 것, 낡아빠진 말 같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말의 의미가 새롭게 재활용되어야 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p.428)


책에서 아쉬웠던 것은 용두사미다. 결론이 애매모호하다. 저자 스스로도 “낡아빠진 말 같지만”이라고 언급했듯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제 당신 스스로 나서라. 거리로 나가라.” 이게 얼마나 한국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모르겠다. 「88만원 세대」와 「분노하라」를 읽고 몇 사람이나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갔는지 모르겠다.


책이 용두사미이다 보니 리뷰도 용두사미다. 이건 핑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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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작살 2014-07-02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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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할 수 있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에 분노했다. 정부의 무능력함 때문에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고 있다.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할 정도로 우리 사회 안전망이 이렇게까지 허술했는지,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의 구조 능력이 이 정도로 비민주적이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울리히 벡은『위험사회』에서 사회가 발전할수록 위험이 발생하는 것도 그만큼 많아진다고 경고했다. 그리고는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의 능력마저 비민주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위험은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평등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위험에 따른 사고를 어느 개인만의 불행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질병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회적 질병을 정부가 비민주적인방법으로 치료한다고 하면 우리는 더 이상 정부를 믿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게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투표로 선택한 정부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뜻과는 다르다는 것에 실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정부의 주인(主人)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순진하거나 바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가지고 오구마 에이지의『사회를 바꾸려면』을 읽었다. 저자는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행동하라!고 소리 지른다. 그것도 모자라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행진한다. 행동하라!는 말을 오래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데모 혹은 시위하는 행동으로 우리의 생존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인재(人災)가 날 때마다 정부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면서도 조용히 있으라는 완고한 주장만 되풀이 해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말을 듣고 입 다물고 있기가 어렵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내보내면서 묵묵히 참고 사는 데도 인내심이 바닥을 훤히 드러낼 정도로 불편하다.





우리가 사회를 바꾸려는 목적은 간단하다. 지금 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러면 저자의 주장대로 사회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위기’는 간과할 수 없다. 투표를 통해 우리의 대표를 뽑았으나 우리의 희망이란 그 한 순간에 불과해졌다. 루소가 지적한 것처럼 투표가 끝나고 나면 노예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데모를 하면 사회가 바뀌게 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데모의 부정적 이미지가 부각되다보니 대중의 참여마저도 회의적이다. 투표도 안 되고 데모도 안 되었을 때 제3의 선택, 즉 무관심하면 그만이지 싶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행동하라!를 실천전략의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말한 행동은 투표보다는 데모인데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데모를 풀이하면 ‘피플즈 파워’(people' power)이다. 저자가 민주주의의 역사를 분석하고 유용성을 재검토하는 것은 정치적 구호내지 행동만을 요구하는 사회현실에서는 데모의 성격이 결여되었다는 반증이다. 대중의 참여 없이는 사회를 바꾸기가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공감한다. 하지만 데모의 성격이 ‘관계론’이 아닌 ‘개체론’이라고 한다면 사회를 바꿀 수 없다. 개체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관계론에 따르면 나와 너는 서로가 만들고 만들어진다. 즉, ‘인간은 개체가 아니라, 행위와 관계와 역할의 연결체’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정치가와 관료는 악마가 아니며 그렇다고 신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데모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분명 상대방이든 자신이든 저마다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서로 간에 상대방을 이해하며 대화하면서 공동으로 만들어나간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데모라는 운동에서도 이와 같은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개별적인 차이를 넘어 더욱 더 관계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에게 힘이 생기며 활기가 뿜어져 나와 ‘나’를 넘어선 ‘우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단순히 정부를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데모를 벌이는 것은 생생하지도 않고 호소력도 없는 불행한 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보다는 사회 전반의 체질을 바꿔나가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그래서 일까? 우리 또한 어느 순간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라는 질문에 “데모할 수 있는 사회를”, “대화를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화할 수 있는 사회를”, “참가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에 “참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바꾸려는 저자의 새로운 가능성과 행동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바뀔 수 있는지?를 예측해볼 수 있는 것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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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아 2014-06-02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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