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했지만 사형당한 김질락
기자명 강량 객원논설위원
입력 2023.02.26
강량
동학난이 조선의 근대를 열었다면 고종은 왜 계몽군주인가? 제주 4·3사건이 왜 민중이 국가폭력에 맞선 민주주의의 세기적 표본인가?
3·1독립운동, 해방, 6·25전쟁, 4·19혁명, 5·18광주에 이르기까지, 좌익은 남과 북 조선의 영혼이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 그 망상 속에 대한민국의 건국과 번영은 없다.
작금의 대한민국에는 한번도 경험 못한 비상식적인 일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매일 벌어지고 있다. 통일혁명당 주모자 신영복 유령이 지배하는 이상한 나라로 점점 퇴화되고 있다.
문재인, 이재명으로 이어지는 좌익들의 반(反)대한민국 체제전복 시도 중심에 통혁당이 있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단죄된 간첩들은 전체의 20%도 채 되지 않았다. 그 나머지 잔당들이 비밀스럽게 암약해 결국 오늘의 기울어진 이념운동장을 만들어 냈다.
1941년생 신영복은 서울대 경제과를 나와 육사교관을 하던 중, 문리대 선배인 김질락에게 포섭돼 통혁당에 가입했다. 무기징역 선고 후 1988년 출소, 성공회대 교수·대학원장·석좌교수로 활동하다가 2016년 사망했다. 김질락의 옥중수기 <어느 지식인의 죽음>에서 잘 나타났듯이, 신영복은 쉽고 재미있는 동화 형태의 얘기로 대중에게 계급의식과 사회주의 사상을 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대중을 현혹했던 신영복과 달리, 김질락은 체포 후 완전히 전향했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미국 유학을 꿈꿨고, 가족을 사랑했던 좌익지식인은 옥중수기로 고해성사를 했다. 처절한 후회로 절절한 고백을 했다. 하지만 전향 4년 만에 갑자기 사형 집행이 결정됐다.
- 1974년 당시 남북회담을 빌미로 김일성이 김질락의 사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것이 압도적 정설이다.
- 김질락이 살아있을 경우, 남한 내 북한 간첩조직들이 받을 타격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김질락이 살아서 신영복 류들을 제압했더라면, 좌익들로 고통받는 작금의 대한민국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대부분의 좌익들은 간첩행위를 민주화투쟁으로 둔갑시켜 국가보상금을 받아갔다. 그와 비교해, 고인의 명예를 위해 국가보상 소송조차 포기했던 김질락 가족의 행동은 참으로 고귀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김질락 사형 집행에 대한 국가보상이 논의되어야 한다.
관련기사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