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 기록으로 남은 16세기 아시아 노예무역 | 아시아 총서 41
루시오 데 소우사,오카 미호코 (지은이),신주현 (옮긴이)산지니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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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쪽
책소개
전국시대의 일본 국내에 노예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했고 이들을 포르투갈인이 해외로 끌고 나갔던 사실이 알려졌다. 3명의 일본인 노예가 멕시코로 건너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가 발견됐다. 유대교도의 포르투갈인에 대한 이단심문기록에 노예에 관한 기록이 포함된 것이다. 아시아에서 인신매매는 어떤 것이었나? 세계의 바다에 전개한 유럽 세력의 움직임을 배경으로 이름 없는 사람들이 보낸 인생에서 대항해시대의 또 다른 모습이 떠올려본다.
대중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아시아인 노예의 인신매매, 특히 일본인 노예의 존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국제적 인신매매는 과연 어떤 것이었나. 저자 루시오 데 소우사는 지금껏 이에 대한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했음을 인식하고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 그들의 족적을 좇는다. 노예가 되어 유럽인에 의해 세례를 받고 타지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어떤 사연에 얽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역사 속 새로운 마이너리티를 인식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목차
머리말
서술에 앞서
서장 교차하는 디아스포라-일본인 노예와 개종한 유대인 상인의 이야기
제1장 아시아
-마카오
-필리핀
-고아
제2장 스페인령 중남미 지역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제3장 유럽
-포르투갈
-스페인
보론 예수회와 노예무역
-나가사키의 노예 시장
-임진왜란
-나가사키의 아프리카인 노예
맺음말
증보판 에필로그
후기
증보판 후기
역자 후기
접기
책속에서
P. 35 필자는 수년 전 큰 규모의 국제학술회의에서 포르투갈인에 의한 일본인의 인신매매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대항해시대의 아시아 해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연구자로부터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날조가 아닌가”라는 발언을 들었다. 이러한 무지는 이 문제를 동시대 사료에 기초한 실증적이면서 동시에 체계적인 연구가 결여돼 왔... 더보기
P. 100 다수는 범죄자나 채무, 빈곤 등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자들이었다. 해외 도항을 원했던 일본인에게 마카오가 천금과 같은 기회를 주는 곳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노예 구매자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P. 161 당시 가톨릭 교회는 일종의 원칙에 따라서 노예의 사용을 합법으로 간주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정의로운 전쟁(justi belli/guerra justa)과 정의롭지 못한 전쟁(guerra injusta)의 구별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 규정은 권력자에 의해서 그 입맛에 맞게 해석되었는데 전제가 ‘정전(正戰)’에서 포로가 된 자는 ... 더보기
P. 209 원칙적으로 유기계약의 노예들은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자유민이 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많은 일본인이 유기계약 증서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유자의 상인들은 그 법적 유효성을 무시하고 종신 노예로 그들을 다른 사람에게 되팔고는 했다.
P. 239 그런데도 그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사는’ 것을 선택했다.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에서 거의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존재인 그들의 일상의 기쁨이나 슬픔이 조금이라도 후세 사람들에게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가깝게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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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루시오 데 소우사 (ルシオ·デ·ソウザ)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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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포르투갈에서 출생했다. 포르투대학 인문학부 대학원 박사과정(아시아학)을 수료했다. 도쿄외국어대학 특임 준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 The Portuguese Slave Trade in Early Modern Japan: Merchants, Jesuits and Japanese, Chinese, and Korean Slaves (Brill, 2019) 등이 있다.
최근작 :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오카 미호코 (岡 美穗子)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74년 일본 고베시에서 출생했다. 교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인간환경학)을 수료했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준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공은 중근세 이행기 대외관계사, 그리스도교사이다. 저서로 The Namban Trade: Merchants and Missionaries in 16th and 17th Century Japan (Brill, 2021) 등이 있다.
최근작 :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 총 6종 (모두보기)
신주현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80년 수원 출생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학·석사, 美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근세사(명청) 전공이며,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연세글로벌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 대항해시대 이베리아 세력의 그림자
그곳엔 일본인 노예가 있었다
15세기,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포문을 연 서구열강의 대항해시대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도달로 박차를 가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단을 통해 아시아로 가는 항로의 개척과 세계일주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에 큰 족적을 남긴 지리상의 사건들은 기존의 세계 질서를 새롭게 개편했다. 그러나 이 눈부신 모험 뒤에 제국주의와 같은 거대한 그림자가 있음을 오늘날의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는 그 그림자 속에서도 대중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아시아인 노예의 인신매매, 특히 일본인 노예의 존재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국제적 인신매매는 과연 어떤 것이었나. 저자 루시오 데 소우사는 지금껏 이에 대한 실증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했음을 인식하고 역사적 사료에 근거해 그들의 족적을 좇는다. 노예가 되어 유럽인에 의해 세례를 받고 타지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어떤 사연에 얽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역사 속 새로운 마이너리티를 인식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16세기 말 세 명의 일본인 '노예'가 멕시코로 건너갔다
2010년, 마카오와 나가사키, 마닐라를 전전하며 살았던 유대인 페레스 일가의 이단 심문 재판기록 속에서 세 명의 일본인 노예가 멕시코로 건너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가 발견되었다. 이 사료는 전국시대 일본 내에서 노예가 된 사람이 포르투갈인에 의해 해외로 보내졌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16세기의 유대계 포르투갈인이 나가사키에 거주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일본인을 노예로 삼아 동행하게 된 서사는 무엇일까?
저자는 서장에서 종교 박해에 의한 페레스 일가의 도피 생활과 그에 동반한 일본인 노예 가스팔 헤르난데스 하폰의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노예가 되어 중간 상인에 팔려 간 일본인이 주인을 따라 아시아 각지를 전전하고 끝내 멕시코의 이단심문소에서 자유를 외치기까지의 스토리를 통해 중세 아시아인 노예무역의 시대적 배경과 그들의 실생활을 엿볼 수 있다.
▶아시아·아메리카 대륙·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흔적
노예의 이름은 잘 남지 않는다. 그렇기에 존재하는 기록 또한 적다. 이 책은 일본인 노예의 존재가 드러나는 귀중한 1차 사료들을 구석구석 소개한다. 아시아에서는 마카오, 필리핀, 인도의 고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유럽에서는 포르투갈, 스페인까지. 다양한 국가에서 발견되는 각 사례를 훑어보면 ‘노예’라는 단편적인 이미지가 아닌 구체적이고 다양한 삶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노예가 되었는가? 전쟁포로 혹은 납치에 의해 한순간 인생이 뒤바뀌기도 했고 가족에 의해 자식들이 팔려나가기도 했으며 어떠한 희망을 품은 스스로의 결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떤 노예가 되었는가? 아시아 노예들은 흔히 가사노예에 적합하다고 여겨졌으며 그 외에도 하급 선원, 용병, 교회의 종복, 전문기술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종사했다. 또한 그들의 인생은 봉공하는 주인에 따라서도 굉장히 양상을 달리한다. 노예의 수는 필시 귀족들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실존했던 다양한 삶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곳엔 조선인도 있었다
서장에서 소개한 페레스 일가의 도망사에는 사실 ‘조선인’ 노예 또한 등장한다. 일본인 노예가 세계를 전전하던 시기, 어쩌면 당연하게도 조선인 또한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나가사키에서 거래된 비일본인 노예 중 수적으로 가장 많았던 것도 조선인이라고 한다. 이 시기 조선인은 어떠한 경로로 노예가 되어 팔려나갔을까.
일본의 전국시대가 종언되고, 연이어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생포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전국시대 내전으로 넘쳐나던 포로의 자리가 조선인으로 대체된 것이다. 우리 역시 이들의 숨겨진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닐까.
16세기 말 일본에 온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일본 시장에서 본 조선인 노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연령대의 남성, 여성들이 수많은 노예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었다. 누구나 아주 싼값에 팔렸고 나 자신도 다섯 명의 노예를 겨우 12에스쿠드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3장 유럽」 중에서
▶여전히 배제되는 현대판 노예
노예의 역사는 언제나 비주류였다. 지금에서야 그들의 피상적인 모습만이 아닌 깊숙한 내면에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동시에 이 시대의 노예들도 다시 비주류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우리는 또 현재의 노예를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소위 개발도상국이라 불리는 지역의 노동자들과 외화벌이를 위해 선진국에 나왔지만 보호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존재를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만 있는 것에 가깝다. 이와 관련한 문제가 제기되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처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노예제와 노예무역에 관한 본질을 여러 방향에서 관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할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접기
이와나미 역사에 기고하시는 분인 만큼 믿을 만한 학자이고 내용도 괜찮습니다.
ktf_ycraah 2021-12-10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조선인 노예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그렇게 특이한 사례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한국인으로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김수경 2022-03-1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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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루시오 데 소우나-오카 미호코)
이 책은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1) 페레스 일가와 일본인 노예의 이야기
2) 아시아-중남미-유럽의 일본인 노예의 실태
3) 예수회와 노예 무역의 관계
'자애로운' 노예주, 루이 페레스
이 책은 기독교와 노예제라는 '모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1)에서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루이 페레스'와 그의 일가가 등장합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어린 노예를 구매하는 것이 자신의 부와 관대함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노예에게는 혹독한 노동이 강제되지 않았고, 주인이 부끄러움을 겪지 않도록 충분한 음식과 의복이 제공되었습니다. 루이 페레스도 일본인 노예 '가스팔 페르난데스'를 가족처럼 대하였습니다. 페레스는 자신이 주인으로 취급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고 하인과 노예를 학대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본인과 그의 가족들도 모두 타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성매매를 하거나 첩을 두지 않고 일본인과 일본문화에 항상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의 왕녀 후안나의 초상화 - 어린 노예는 주인의 부와 자애로움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의 휼륭한 인격과 품행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출신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심지어 나가사키의 일본인 기독교도들도 그에게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그를 예수회에 고발하기까지 합니다. 페레스 일가는 이단심문소의 압박을 피해서 필리핀까지 도망치지만 결국 고발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재산은 몰수당합니다. 여기에는 가스팔의 증언과 그의 또 다른 조선인 노예 '가스팔 코레이아'의 증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루이 페레스는 형무소로 가던 도중에 사망하였고, 그의 노예들은 고용 기한이 정해진 한시적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종신 노예로 처리됩니다. 가스팔은 이후 2년간 혹독한 착취를 당하다가 1599년 자유민으로서의 신분이 입증됩니다. 루이 페레스의 장남 '안토니오 로드리게스'와 차남 '마누엘 페르난데스'가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고 법정 증언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위에까지 읽으면 루이 페레스의 휼륭한 인품과 불행한 결말에 감정을 이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작가는 비극적인 노예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자애로운' 루이 페레스 이야기를 먼저 꺼냈을까요? 여기에는 작가의 의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스팔 페르난데스는 어린 시절 본래 자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일본인에 의해 유괴를 당했고 나가사키로 끌려와 노예로 팔렸습니다. 그는 이 어린 일본인이 어떻게 노예가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페레스는 가스팔을 구매한 뒤에 곧바로 교회에 보내서 12년간 봉사하는 계약에 서명하게 합니다. 당시 증서를 발급해준 로페스 신부는 페레스가 위법하게 어린아이를 취득했다고 덧붙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차남인 마누엘 페르난데스가 당시 일본인이 다른 곳에서 동포를 끌고 와서 포르투칼인에게 파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증언한 것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당시의 유럽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상인들은 비합적으로 '노예' 신분이 되어 강제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 상거래에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노예를 구입하지 않았더라면 포획자들이 포획행위를 그만두기보다는 살해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결국 그리스도교도 상인의 소유물이 되는 순간 세례를 받게 된다고 하여 자신을 정당화하곤 했습니다.
예수회와 노예 무역
이러한 작가의 지적은 3)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회는 '정의로운 전쟁' 논리를 통해서 인신매매를 합리화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기독교로 개종한 다이묘나 장수들이 생포한 사람들을 '합법적인 노예'로 간주합니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도 당시에 존재했습니다.
가장 큰 논쟁 거리가 바로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이었습니다. 히데요시의 전쟁은 분명히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지만, 여기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기독교 무장이 적지 않았고 이들이 조선인들을 '노예'로 외국인에게 팔아치우려는 행위는 아무리봐도 비도덕적입니다. 이에 대해 알칼라 대학의 신학자이자 예수회원인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병사가 얻은 것을 위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인에게 소집되었으며 그 전쟁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할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회 신부는 적어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도 좋다"라고 정당화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주교 루이스 데세르케이라는 '조선 침략은 정의롭지 않으며 생포된 조선인을 노예로 삼는 것 또한 위법하다고' 강력하게 반발하기까지 합니다. 양심적인 이들의 격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노예 매매는 성행하였습니다.
예수회는 노예 무역을 묵고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노예를 구매하기도 했습니다. 17세기 초에는 대략 1200명의 일본인이 예수회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조선인 노예
제목과는 다르게 이 책에는 일본인 노예만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인, 중국인, 조선인 다양한 노예들의 비극적인 운명이 2)에서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조선인에 대해서는 짧게 다루고 있지만,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 시장에 "모든 연령대의 남성, 여성들이 수많은 노예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아름다운 여인들도 있었다. 누구나 아주 싼 값에" 판매되었습니다. 고라이초에 '조선인 유곽'이 생겼다는 짧은 대목에서 이들의 인생이 얼마나 비극적이었을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총평
일본사 연구서가 부족한 한국에서는 꽤나 귀중한 책입니다. 저도 일본어 원서로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구매했습니다. 2)에서는 개별적인 사례가 많이 나와서 조금 지루하긴 했습니다만, 1)과 3)의 내용이 재밌어서 하루만에 다 읽었습니다. 일본인 노예로 한정되지 않고 포르투칼/스페인의 광범위한 아시아 노예 무역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일본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최근에 한국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보면 한국인만 자국민을 노예로 삼았다는 낭설을 보게 됩니다. 전공자들은 후지키 히사시의 <<잡병들의 전장 - 중세의 용병과 노예 사냥>>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얼마나 헛소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이와 관련된 책이 전무하기에 이러한 이야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굳이 전국시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카마쿠라 시대에도 노예와 관련된 재판이 있으니 이 이야기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는 알 수 있겠죠. 위 책에서는 당시의 일본인 노예가 대부분 다른 일본인에 의해서 팔려왔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혼란한 국내 상황을 이용한 약탈과 인신매매가 성행하였고, 그 외에도 자신의 생활 기반을 잃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노예가 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래 글은 김시덕 문헌학자의 글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번역의 계기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당시 일본인 노예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이 주를 이룹니다만 관심있는 분들은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김시덕 문헌학자의 관련된 글 :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10132046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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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f_ycraah 2021-12-1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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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나가사키에서 팔려나간 일본·조선인들…그리고 끝나지 않은 ‘거대한 비극’
입력 : 2019.10.13 20:46 수정 : 2019.10.14 08:18김시덕 | 문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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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 노예무역 실상과 현대판 ‘노예제’
근세 일본의 나가사키 등에는 모잠비크·고아·말라카·명나라·조선·일본 출신의 노예와 자유인, 상인, 용병들이 뒤섞여 살았다. 당시 일본의 다인종적 상황은 항구와 대도시 풍경을 묘사한 남만병풍(南蠻屛風)이라는 풍속화 병풍들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남만은 남쪽에서 온 오랑캐, 즉 유럽인을 가리킨다. 위키피디아
오늘 소개할 책은 포르투갈·에스파냐 사람들이 온 지구의 바다를 석권하던 시기에 전 세계로 팔려나간 일본인·중국인·조선인 노예들의 실상을 밝힌 오카 미호코와 루시오 데 소자의 공저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 아시아, 신대륙, 유럽>(주오코론신샤, 2017·사진)이다. 책의 공저자 가운데 하나인 루시오 데 소자는 같은 테마를 <근세 일본의 포르투갈 노예 무역 - 상인, 예수회와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노예>(BRILL, 2018)로 출간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출신자들이 다루던 무역 물품 가운데 노예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이 시기의 노예 무역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는 일본인 노예 세 사람이 멕시코시티의 재판소에서 자신들 일생을 증언한 문서를 발굴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15세기 초, 이베리아 세력은 동아프리카의 모잠비크에서 인도의 고아, 동남아시아의 말라카, 명나라의 마카오, 일본의 나가사키,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현지 세력을 공격하고 요새를 세운 뒤 현지 출신 노예를 사고팔았다.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 이외 지역에서는 직접 노예 사냥을 하기보다는 그 지역에서 발생한 노예를 중개무역으로 구입하는 형태를 취했다.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시공사, 2012)에서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사이의 초기 교역은 정통적인 상품이었지 노예가 아니었다. (중략) 훗날 유럽인의 수요가 노예로 돌아섰을 때 아프리카에서 가장 발달한 곳과의 무역 선호는 계속 유지되었다. 더 번창한 지역일수록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기 때문에 내전 혹은 갈등이 일어날 경우 다수의 노예를 충분히 획득할 수 있었다. (중략) 노예를 취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전쟁과 습격에 의한 것이었다. (중략) 공동체 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동안 개인들은 아는 사람, 친구 혹은 가족에 의해 납치되거나 노예 시장에 팔려나갔다.
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세력은 이베리아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무기로 내륙 지역을 정복하고 그곳 주민들을 유럽인들에게 팔았다. 물론 이것은, 흑인 노예가 대규모로 거래된 책임을 아프리카인들에게 돌리고 유럽인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위 인용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유럽인들이 일반적인 상품 대신 노예를 원하게 되자, 유럽인들 수요에 맞춰 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발달한 사회가 노예 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내란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던 일본에서도 노예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전국시대(센고쿠지다이)라 불리는 일본의 내란기에는 유력한 영주들이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그 지역 백성을 노예로 만드는 일이 흔했다. 저명한 역사학자 후지키 히사시의 <잡병들의 전쟁터: 중세의 용병과 노예 사냥>(아사히신문사, 1995) 등에 의해 전국시대 일본의 노예 사냥 실상이 밝혀져 있다.
이윽고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가 1549년 일본에 도착하면서 유럽과 일본의 교류가 시작되자, 일본인 노예는 나가사키-마카오-말라카-고아-리스본 루트, 또는 나가사키-마카오-마닐라-아카풀코 루트로 전 세계로 팔려갔다. 같은 시기 명나라 해안 지역에서 후기 왜구(後期倭寇)라 불리는 다민족 해적집단에 생포된 중국인들도 일단 나가사키로 잡혀온 뒤에 일본인 노예와 동일한 루트를 따랐다. 그리고 1592~1598년 임진왜란 시기에는 조선인 포로들이 마찬가지로 위의 루트를 따라 세계로 팔려갔다.
소련의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것은 분명히 비극이지만, 같은 시기 연해주의 중국인 수만명은 시베리아로 끌려가 사라졌고 크림반도의 타타르인도 거의 전부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됐다. 스탈린 자신의 출신 지역인 조지아에서도 수만명이 살해되거나 굴락(gulag·노동수용소)으로 보내졌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포로가 발생한 것은 비극이지만, 이는 당시 인도양·남중국해·동중국해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거대한 비극의 일부였다.
루시오 데 소자의 <근세 일본의 포르투갈 노예 무역 - 상인, 예수회와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노예> 표지.
당시 나가사키에는 모잠비크, 고아, 말라카, 벵골, 시암, 명나라, 조선, 일본 등 인도양·남중국해·동중국해 연안 지역 출신 노예와 자유인, 상인과 용병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일본의 전국 통일을 거의 완수한 오다 노부나가는 유럽인 선교사가 데려온 모잠비크 출신 흑인 노예에게 야스케(彌助)라는 이름을 주고 부하로 삼기도 했다. 흑인 사무라이 야스케는 오다가 교토의 사찰 혼노지에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습격당했을 때에도 끝까지 오다의 곁을 지켰다. 아케치는 야스케가 일본인도 아니고 또 흑인이어서 동물 같은 존재이므로 죽일 필요가 없다고 하여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 일본의 다인종적 상황은 당시 일본의 항구와 대도시 풍경을 묘사한 남만병풍(南蠻屛風)이라는 풍속화 병풍들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남만이란 남쪽에서 온 오랑캐, 즉 유럽인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이베리아 상인들은 전 세계적 규모로 노예 무역을 수행했고, 그 무역의 흔적은 전 세계 도서관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일본인 노예들이 멕시코시티의 재판장에서 스스로의 처지를 밝힌 문서가 있어 주목된다. 그 주인공은 가스파르 페르난데스 하폰이라는 1577년생 노예다. 분고(오늘날의 규슈 동북쪽 오이타현)에서 태어난 가스파르는 8살 내지는 10살 때 노예상인에게 유괴되어 나가사키로 끌려갔다. 가스파르를 구입한 사람은 가톨릭교도로 개종한 포르투갈 비제우 출신 유대교도 상인인 루이 페레스였다. 당시 노예들이 거래될 때는 그 거래가 합법적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교회에서 발급받았는데, 가스파르의 거래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해준 나가사키 예수회 신부 안토니오 로페스는 그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듯 “이 거래는 위법하다”고 덧붙였다.
루이 페레스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이단심문에 넘기고 재산을 압류하는 등 유대인 탄압이 포르투갈에서 극심해지자 인도의 고아, 명나라의 마카오 등을 거쳐 나가사키까지 도망쳐 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일본인 가톨릭교도들이 유대인 출신 페레스 집안을 핍박하고, 포르투갈에서 파견된 이단심문관이 1591년 8월19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이들 가족은 필리핀 마닐라로 탈출했다. 마닐라에서 머물던 시기에 페레스 가족은 기존의 벵골·일본인 노예에 추가하여 일본인 노예 두 사람과 조선인 노예 가스파르를 구입했다. 시기적으로 보아 조선인 노예 가스파르는 임진왜란의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되팔려서 마닐라에 건너와 있었을 것이다.
유럽에서 도망친 유대인의 멕시코 ‘이단심문’ 재판에 증인으로 선 일본인 노예기록 등 담겨
이윽고 페레스 가족의 정체가 드러나자, 마닐라의 이단심문소는 일본인 노예 가스파르와 조선인 노예 가스파르, 그리고 벵골인 노예 파울로를 불러 주인 집안의 행적을 고발하게 했다. 세 사람 가운데 일본인·조선인 가스파르는 페레스 집안 사람들이 비밀히 유대교 의식을 치른다고 증언했고, 벵골인 노예는 이와 정반대 증언을 하며 주인 집안을 옹호했다. 멀쩡히 살던 집에서 납치돼 팔려온 일본인 가스파르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포로가 된 조선인 가스파르 모두 포르투갈인 주인 집안을 옹호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듯하다. 마침내 페레스 집안은 이단 판결을 받아 전 재산이 몰수됐고, 루이 페레스는 마닐라에서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이송되던 중 배에서 사망했다. 압류된 재산 목록에 조선인 가스파르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마닐라에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매된 것 같다.
동료 노예 중에는 임진왜란 포로로 추정되는 조선인도…
대항해 시기 횡행했던 노예무역의 비극 여실히
일본인 노예 가스파르는 원래 12년 근무 후 자유인이 된다는 조건이었지만, 루이 페레스의 재산을 몰수한 멕시코의 이단심판관이 슬쩍 “종신 노예”로 바꾸어 서류를 작성하는 바람에 가스파르가 소송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일본인 노예가 스스로의 처지를 밝힌 희귀한 문서가 태어난 것이다. 1604년 6월5일, 재판소는 가스파르와 또 한 명의 일본인 노예인 벤투라가 자유인 신분이라고 판결했다.
16~17세기 다국적 상인·노예·자유인·용병들이 뒤섞여 살았던 나가사키,
주요 노예 공급처이자 수요지
이상과 같이 일본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전기에 걸쳐 노예의 세계적인 유력한 공급처이자 수요지였고, 유럽에서 탄압받는 유대인들의 임시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 100년 사이의 7년간, 조선인들이 임진왜란 포로로 나가사키, 히라도 등에서 마닐라 등을 거쳐 세계로 판매되었다. 유럽에서 무기를 구매한 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부족이 내륙의 약한 지역에서 노예를 잡아 유럽에 판매한 것처럼, 유럽산 조총으로 무장하고 전함까지 구입하려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조선과 명나라를 침공한 것이다.
예수회 신부 조반니 니콜로가 그린 오다 노부나가. 위키피디아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한 뒤에도, 세계 곳곳에는 일본인 노예 및 일본인 부모를 둔 혼혈아들이 존재했다. 1607~1613년 페루 리마의 주민대장에는 인도 고아 출신의 “포르투갈 인디오”가 56명, 마닐라·마카오·말라카 등에서 온 “중국 인디오”가 38명, 나가사키에서 건너온 “일본 인디오”가 20명 있다고 적혀 있다. 1625년 마카오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유럽계 남성 358명, 혼혈 남성 411명, 외국인 75명으로, 일본·중국·말레이·조선·인도인과의 혼혈이 마카오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 일본 시민들이 노예였던 조상들에 무심하듯,
한국이 조선시대 노비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다루듯
두 나라 모두 산업실습생으로 근무하는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이 겪는 산업재해와 인권 문제를 모른 척
오늘날 일본 시민은 이들 중·근세 일본인 노예 및 그 혼혈에 대해 잘 모른다. 조상들이 같은 일본인을 노예로 삼고 유럽 상인들에게 팔았을 리가 없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이다. 한국 시민들이 조선시대 노비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두 나라 시민들이 전근대의 노예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 심각성을 간과하는 것은, 현재 두 나라에서 근무하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산업실습생들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간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항해시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을 이단으로 몰아붙여 재산을 압류하고 추방하는 일이 빈번했다. 알프레두 로케 가메이루 ‘유대인 추방’(1917). 위키피디아
중세 일본의 노예는 계약한 근무기간을 채우거나 주인이 죽으면 대개 자유인이 되었지만, 오늘날 일본과 한국에서 일하는 산업실습생들은 근무기간이 끝나면 추방된다는 점에서 조건이 더 나쁘다. 중세 포르투갈 정부에서는 노예가 나이 들거나 치료받아야 할 때에는 해당 지역의 구빈원(misericordia) 원장과 수도사들이 이들을 병원에 입원시킬 것을 의무화했다. 이에 반해 현재 일본과 한국에서는 영세 기업과 농촌에서 미등록 외국인들을 고용하면서 최저임금이나 휴일도 지키지 않고, 안전도구를 지급하지 않아 심각한 부상을 입어도 제대로 산재처리를 해주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은 사회와 기업의 조직적 살인”…
지금의 일본·한국은 유럽인의 노예 무역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이렇듯 일본과 한국의 외국인 산업실습생과 외주노동자들(한국은 2004년 산업연수생제 대신 고용허가제로 변경)은 중세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상품으로서 거래된 일본인·조선인 노예 이상으로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고, 이들은 죽음으로써 이에 저항하고 있다. 일본 법무성 내부자료에 따르면 2015~2017년 외국인 기능실습생 69명이 자살·동사(凍死) 등으로 사망했다고 하며(Harbro Business 2018년 12월10일자 ‘기능실습생의 다수 사망 충격. 일본에서 일하는 외국인은 어떻게 생각하나’), 2009~2018년 한국에서 자살한 네팔인 노동자만 43명에 이른다고 한다(서울신문 2019년 9월23일자 ‘2019 이주민 리포트: 코리안드림의 배신 <1>이방인의 비극’). 이러한 상황에 대해 포천 이주노동자센터의 김달성 목사는 “한국에서 산재 사망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다. 사회의 조직적 살인이다. 기업의 살인 범죄다. 국가가 법·제도로 뒷받침하는 기업 살인”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현대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유럽인의 노예 무역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 필자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문헌학자이자 인문저술가이다. 2010년 일본에서 간행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가사마쇼인)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2011년 2인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사마쇼인)은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10여종의 단행본, 공저, 번역서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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