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1

민경우 “6월항쟁 주역, 전대협 아닌 YS” [6월항쟁 되짚기⑱]  - 시사오늘(시사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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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우 “6월항쟁 주역, 전대협 아닌 YS” [6월항쟁 되짚기⑱]
윤진석 기자
승인 2024.03.21

민경우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前 범민련 남측운동본부 사무처장)
“YS 목숨 걸고 민추협, 신민당, 개헌운동 성공”
“전대협 직선제 동참? 北 한민전의 가스라이팅”
“북한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구나, 진실에 눈 떠”
“주사파 군자사의 약속 後 민노당, 통진당 장악”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민경우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지난 1월 29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범민련 남측운동본부 사무처장을 지낸 바 있다.ⓒ시사오늘

1987 주역, 학생들이 아니고 YS(김영삼)다.

민경우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의 논지다.

지난 1월 29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민 전 위원은 1980년대 학생운동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1984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5·18에 분노했던 그는 곧바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87년 서울대 인문과학대학 학생회장을 맡았다. 범민련 남측운동본부 사무처장이었다.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후술 예정)을 통해 학습했으며 북한과 직접 교류했고, 주사파 핵심으로 통했다. 3번 구속됐고 4년여간 수감됐다.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지난 2005년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소련의 붕괴를 목격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전향했듯 그 또한 북한이 예견한 역사 발전 이론이 엉터리인 것을 확인하면서 진실에 눈을 떴다고 했다. 배신감이 들었다. 조국 사태 등을 거치면서 더욱 선명해져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민전의 실체, 북한이 만들어낸 가짜라는 사실이 확인됐을 때 나는 고통스럽게 과거를 회상한다. 여러 날 한민전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곤 했다. 어느 날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속된 표현이지만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그대로 옮긴다면 북한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구나.”
-민경우 <스파이 외전> 중-


주사파로서 북한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던 그였다. 지금은 이면에 감춰진 당시의 민낯을 낱낱이 알리는 데 전념하고 있다.

관련 책도 여러 권 썼다. <진보의 재구성>을 시작으로 <86세대의 민주주의>, <신영복을 존경하세요?>, <운동권 열전>. <한민전>, <군자산의 약속>, <스파이 외전> 등을 집필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면밀히 되짚고 있었다. 노래 테이프를 재생하다 한 음절이라도 놓치기 싫어 다시 뒤로 돌리듯 그는 반복적으로 되감아갔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뜨거운 청춘의 한때, 본인이 어떻게 북한의 공작에 의해 교묘하게 가스라이팅을 당해왔는가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를 살아가던 주사파로 상징되던 주류 학생운동권 전체가 ‘한민전’이라는 라디오 전파를 통해 어떻게 북한의 지령에 세뇌되어 왔고 놀아났는지를 되짚었다.




“사라진 한민전”

민 전 위원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도 이 점에 주목했다.

“6월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전국대학들이 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한민전이었습니다. 한민전은 전국적 통일성을 위한 콘텐츠를 제공했고, 주요 대학을 중심으로 지침을 내렸습니다. 서울대 구학련과 관악자주파, 연대 중심의 조통그룹, 고대 중심의 반미청년회, 외대 등 서울권 대학 중심의 자민통 그룹, 새벽그룹 등이 충실히 따랐습니다. 이들 조직은 대체로 1986-1992년까지 활동하며 전대협의 결성과 성장을 이끌어 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한민전’은 현재도 있는 방송입니까.

“지금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민 전 위원은 그 과정을 ‘사라진 공룡’에 빗댔다.

오래전 살았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공룡처럼 ‘한민전’ 또한 87체제가 들어서고 난 뒤 어느 시기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었다. 또, 약속이나 한 듯 아무도 ‘한민전’에 대한 존재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민주화운동을 회고하는 기록물들이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제작한 <민주화 운동사3>에는 1987년 6월을 전후한 시점의 민주화 운동을 기록하고 있다.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주체사상이나 맑스레닌주의(Marx-Lenin主義,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북한어)에 경도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책에는 한민전이라는 말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한민전이 잊힌 것은 의도적인 망각 때문이다. 80~90년대 학생운동은 한민전 및 북한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80~9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은 사회에 진출하면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긍정적인 측면은 남기고 북한과 연루되었던 부정적인 측면은 지웠다. 놀라운 것은 수십 년간에 걸쳐 그와 연루된 활동가뿐 아니라 그 세대 상당수가 한민전을 조금씩 망각하는 방향으로 손을 썼다는 데 있다. 특별히 이 작업을 지휘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 모두는 어려서부터 투쟁과 조직으로 단련된, 그야말로 백전노장이었다. 그들은 불필요한 논란을 자제하고 조금씩 민주화운동에서 북한과 관련된 흔적들을 지워나갔다. 한민전에 관한한 그 단어 자체를 지우는 것을 묵계로 삼은 듯하다. 역사는 유기체와 같아서 하나를 지운다고 나머지가 온전할리 없다. 북한과 한민전을 지웠다고 해서 북한, 한민전과 함께 얼룩진 한국 민주주의의 왜곡된 흔적이 사라지지 않는다.”
-민경우 <한민전> 중-




“YS가 6월항쟁 주도”
YS 서거 7주기를 맞아 87년 체제의 성과 이를 실질적으로 이끈 주역 YS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사진은 6월 항쟁 당시 시청 광장에 시민들이 운집해 있다.ⓒ시사오늘(그래픽=정세연)

차치하고, 그는 “86세대 주사파들이 6월항쟁을 주도했다는 것은 그들의 착각”이라며 “87체제는 YS가 주도했다. 그의 역할이 컸다”고 거듭 단언했다.

“6월항쟁은 기본적으로 직선제를 두고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에 학생들은 6월항쟁 전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반복했습니다. 6월항쟁에서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스스로의 착각입니다. 학생들의 역할은 과장되고 부풀려왔습니다.”

반가운 증언이었다. <시사오늘>은 ‘민추협되짚기’를 통해서도 그랬지만, ‘6월항쟁 되짚기’에서도 YS가 왜 최대 주역인지를 조명해왔다.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YS를 통해 과정과 결과 모두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 권선징악적 인류 보편의 가치를 증명해낸 기념비적 사건”이라 평한 바 있다.

YS는 선거 혁명을 통해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줬고, 개헌운동을 통해 전 국민을 투쟁의 대열로 이끌었다. 마침내 신군부를 무릎 꿇렸으며 직선제를 쟁취했다. 상도동계 뿐 아니라 동교동계에서도 인정하던 바였다.

종교계에서는 인명진 목사가 증언했다.



“나는 6월항쟁 기간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이었어요. 분위기가 흉흉했을 때거든요. 계엄령이 선포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아단 말이에요. 그런데 YS는 매일 사무실에 찾아와서는 강경하게 밀어붙여야 된다고 하더라고.

그 기개를 보고 내가 놀랬어요.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지 모를 만큼 배짱이 좋았어요. YS를 다시 보게 된 거예요. 대단한 사람인 줄 처음 안 것이지. 이후 내가 어디 방송 나가면 그랬어요. ‘6월항쟁의 주역은 DJ가 아닌 YS다.’ YS 차남 김현철 씨한테도 ‘당신 아버지가 6월항쟁을 진두지휘했다고 했어요. 반면 DJ는 겁이 났던 것 같아. 가택연금을 당하던 중이었는데 나한테 전화해서는 강경 투쟁하면 안 된다, 자제하라고 말리고는 했어요.”
-인명진, 2023년 10월 <시사오늘> 인터뷰 중


그리고 지금, 학생운동권 출신 중에서는 민 전 위원이 처음으로 그 같은 주장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었다.

왜 그렇게 보는지 구체적으로 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민 전 의원이 입을 뗐다. 시대의 격랑 속으로, 눈길을 돌렸다.




격랑의 계절

이제부터는 ‘민경우의 일기’로 재구성해 본 것이다.

시간 순서로 풀어봤다. 이를 통해 앞서 언급된 그의 주장들이 구체화를 띌 것으로 본다. 인터뷰 때 나눈 대화를 비롯해 부족한 것은 퍼즐을 맞춰나가듯 그가 쓴 수권의 책들을 참조했다.

민경우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지난 1월 29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범민련 남측운동본부 사무처장을 지낸 바 있다.ⓒ시사오늘



# 회상 (민경우 시점)

1983년 5월 YS는 광주학살 진상 규명, 언론의 자유 등을 내걸고 23일간의 단식투쟁을 결행했다. 유화 조치가 있기 전이었다. 살벌한 국면이었다. YS로서는 죽음을 건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의 행동이 가져온 나비효과는 상당했다. 신군부는 움찔했다. YS 요구 중 일부를 들어줬다. 조금씩 유화 국면이 전개됐다.


당시 나(민경우)는 84학번이었다. 입학 초 학원 자율화 조치가 이뤄졌다. 직전까지만 해도 전투경찰들이 학교를 감시했다. 서서히 병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교내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됐다. 2학기부터 서울대를 시작으로 학생회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한편 정치권에서는 5월 18일 외교구락부에서 범정치결사체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발족되고 있었다. YS 단식을 계기로 민주화에 뜻을 같이한 정치인들이 범정치결사체를 만들었다.


1985년 2월 12대 총선이 다가왔다. 선거 직전 민추협은 신민당을 창당했다. 상황은 극적으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2월의 어느 날 서초구 유세장에 서있었다. 여당이었던 민정당 후보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무언의 항의를 표현하며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렸다. 정치 일번지 종로에서는 이민우가 신민당 후보로 나섰다. YS와 DJ(김대중)가 정치 활동 규제에 묶이면서 출마를 할 수 없게 되자 이민우 후보는 이들을 대리해 나온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이민우를 연호하기 위해 구름떼같이 모여들었다. 민심이 어느 당을 향해 있는 가를 여실히 느끼게 해줬다. 이윽고 선거일이 다가왔다. 당시는 밤늦게까지 선거 방송을 중계했다. 하나둘 개표함이 열렸다.


“이겼다!”


신민당이 역전했다는 소리들이 연쇄적으로 들려왔다. 환희와 감동이 아직은 추운 2월의 차가운 밤을 뜨겁게 녹이고 있었다. 신민당은 혜성처럼 나타났고, 제1야당을 단숨에 갈아치웠다. 국민들이 얼마나 간절히 민주화를 열망해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줬다. 대학가에서도 신민당 얘기로 들썩였다. 희망의 동이 서서히 터오는 것만 같았다. 운동권 학생들도 고무됐다.


1985년 1학기 학생운동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총학생회 라인업은 서울대 김민석, 연대 정태근, 고대 허인회 등이다. 이들은 단위 학교에 머물지 않고 연합기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전국학생연합, 전학련이다. 학생들은 학생회와 별도로 효율적이고 공세적인 투쟁을 할 기구를 별도로 두는데 그것이 삼민투다. 함운경이 서울대 삼민투 위원장으로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주도한다. 1985-1986년 거의 1주일에 2-3번에 걸친 시위 동원이 있었다. 주1회 교문 싸움, 선전전, 가두 투쟁 정도는 기본이었다. 이 관점에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운동권이라고 볼 수 없다. <강철서신>을 쓴 김영환은 조 전 장관에 대해 운동권 6두품에도 안 들어간다고 밝힌 적이 있다.”
- 민경우 <86세대의 민주주의> 중


“그들의 민주주의관은 달랐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은 치열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졌던 민주주의관은 YS 같은 인사들이나 일반 국민과는 꽤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1984~1985년 무렵 학생 운동권은 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이념은 국민이 열망한 반독재 노선의 자유민주주의 가치와는 궤를 달리했다. 그보다는 사회주의 또는 인민민주주의의 1차적인 단계인 민주주의를 외친 것으로 볼 수 있다.


학생운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1985년은 특히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삼민(민주주의에 민족·민중을 결합해 만든 이념)이 지배적이었다. 82학번 선배들은 연설과정에서도 민주·민중·민족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이 삼민은 훗날 북한이 고안한 개념이기도 한 반미자주 노선의 자민통(자주민주통일)으로 연결된다.


자민통이라는 조직이 출현하자 공안 당국에서는 북한의 영향을 받은 정치세력이 학생운동권의 주류로 떠올랐다는 것을 파악한 듯싶었다. 훗날 구속됐을 당시 담당 형사와 관련 이야기를 나눴던 일이 있다.


1986년 봄이 찾아왔다. YS는 DJ와 함께 천만인 개헌 운동을 선언했다. 부산, 대구, 광주 등 장외투쟁을 전개했다. 수많은 군중이 참여하는 기폭제가 돼줬다. 다수의 운동권 학생들은 개헌 운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해 전 기간을 반미나 제헌의회 소집과 같은 과격한 투쟁에 집중했다.


YS가 개헌을 요구하며 승부수를 던질 때 학생들은 NL(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과 CA(제헌의회파)로 나뉘어 있었다. NL은 미제국주의 타도, 반전반핵 양키고홈, CA는 군사파쇼 타도, 제헌의회 소집과 같은 구호를 내걸었다. 1985년까지 학생운동이 레닌주의에 물들어 있었다면, 1986년부터는 주도권이 급격히 북한을 추종하는 주체사상으로 넘어가 있었다.


NL을 주도했던 세력은 서울대 구학련이었다. 반미청년회, 자민통, 조통그룹 관악자주파로 구학련을 대표했다. 자생적 주사파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86 운동권에 지대한 영향을 준 <강철서신>의 저자 82학번 김영환이 만들었다.


구학련은 반미와 친북, 주체사상을 전면으로 내세운 것이 특징이었다. 나도 동료의 권유로 소모임에 잠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눈을 감고 묵념을 하고 선서 등을 통해 일정한 형식을 갖추려 한 것이 일반 모임과 달랐다.


이들 조직은 훗날 북한과 연계된 지하조직 민혁당으로 발전한다. 김영환이 주축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영환의 경우 1991년 북한에서 파견된 간첩을 만나 잠수정을 타고 몰래 월북했다가 직접 독재 정권의 실체를 목격하고 나서야 전향을 하게 됐다는 점이다. 김영환은 민혁당을 해산하려고 했다. 하영옥 등 잔류파들은 반발했다.


이들 잔류파들은 이후 전국연합을 구성한다. 전국연합은 1998년에 만들어진 투쟁 중심의 대중운동 연합체였다. 주한미군 철수 공론화와 범민련과의 연합 등을 내걸었다.



“대표적인 것이 전국연합의 부산울산엽합이고 이석기 경기동부연합도 그렇다.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 그리고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관련 정당(진보당, 민중민주당 등)들이 넓게 보며 그 잔류파들이다. 중부지역당의 경우에는 세력이 아니라 개인으로 살아남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윤민석과 조덕원이 있다.”
- 민경우, <86세대의 민주주의>중


다시 1986년의 그 시절로 돌아가면, 학생들의 주장은 누가 봐도 6월항쟁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풍문으로 듣게 된 것이 개헌을 이슈로 한 야당의 장외투쟁에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는 거였다. 학생들은 뒤늦게 5월 3일 인천에서 열린 야당 행사에 동참하기로 했지만, 그때도 사실상 때를 놓쳤다고 보는 것이 맞다.


잔뜩 힘이 들어간 나머지 수 시간 넘는 거리 투쟁만 진행하다 고립무원 상태에 처하고 말았다. 나 또한 1·2학년 후배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향했다. 최루탄이 난무하는 지루한 싸움에 참여했다. 이처럼 운동권 학생들은 잘못된 판단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6월항쟁과 본격적으로 대중적 결합에 나선 것은 1986년 10월 28일 건대사태 이후였다. 대중운동을 재평가하며 투쟁 전술에 변화를 꾀했다. 자민통(자주민주통일)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던 것도 이 때부터다.




“한민전, 통혁당 후신이라 믿어”
시사오늘은 YS 서거 7주기를 맞아 87년 체제의 성과 이를 실질적으로 이끈 주역 YS에 대해 조명하고자 한다. 사진은 6월 항쟁 당시 시청 광장에 시민들이 운집해 있다.ⓒ연합뉴스

민 전 위원은 여기까지 회상하다,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학생들이 변하기 시작한 데에는 한민전의 영향이 컸다”고 분석했다.

“한민전에서 과격한 투쟁을 지양하고 대중의 이해와 요구에 맞게 구호를 승화하고 다른 세력과의 연합도 강조하고 나선 겁니다.”

- 한민전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한민전의 풀네임은 한국민족민주전선입니다. 북한에서 ‘구국의 소리’라는 이름으로 송출했던 라디오 방송입니다. 1985년 창립돼 1987년 전후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주사파 단체를 상징하는 키워드야말로 “한민전이었다”고 규정했다.

- 당시 북에서 내보내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몰랐습니다. 훗날에 가서야 북한이 위장해 내보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당시만 해도 학생들은 그 방송이 서울 어딘가에 숨어서 활동하고 있는 지하혁명단이 내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진행자는 깨끗한 서울말을 썼습니다. ‘여기는 서울’이라는 클로징 멘트도 전했습니다.”

- 한민전에서 내보낸 내용은 무엇입니까.

“북한은 한민전이 민중의 애국적 전위대라는 점과 남한 내 운동이 ‘자주민주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 운동의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선전했습니다. 한민전 문서는 학생회나 강의실에 공공연히 뿌려졌습니다. 주사파 학생들의 회의에 활용됐고 구학련, 반미청년회 등 주요 조직마다 방송팀을 별도로 운영하며 사상 의식을 고취하는 데 쓰였습니다. 학생들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한민전이 전위조직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한민전에서 선전해댄 것 그대로 자신의 운동 노선을 자민통(자주민주통일)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 한민전이 단기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배경은 뭐라고 봅니까.

“학생들은 한민전을 통혁당의 후신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실제 “그것은 맞다”고 했다.



“통혁당은 1960년대 북한과 연계한 대규모 지하조직이다. 북한 노동당의 지령을 받고 자금을 수수하면서 지하활동을 한 대남적화혁명의 전위정당이다. 김일성은 6·25 전쟁시 실패한 적화통일의 기회를 4·19의거 때도 연거푸 놓치게 되자 그 원인으로 남한내 지하혁명당의 부재에 있다고 연설했다. 즉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제4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은 소위 ‘조국의 평화적 통일에 관한 사업총화보고’를 통해 ‘남한의 혁명이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해방혁명이며 봉건세력을 반대하는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것과 이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침으로 하여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민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혁명적 당을 가져야’함을 역설하였다. 그 지침에 따라 남한내 지하혁명당으로 구축된 것이 바로 통일혁명당이었던 것이었다.

특징적인 것은 서울대 문리대와 상대 인텔리들이 대거 결합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이문규, 김질락, 신영복, 박성준 등이다. 통혁당과 관련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은 서울 상대 출신의 신영복이다.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가 신영복의 필체다. 문재인 대통령과 고민정 국회의원 등이 신영복을 존경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신영복은 1968년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했다. 이후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만에 가석방되었다. 신영복은 1988년 전향서를 쓰고 수감생활 20년만에 가석방되었으나, 1998년 8월 월간 <말>지와 인터뷰에서 사상 전향을 부인했다. 또한 통혁당 가담은 양심문제라고 주장하였다.”
-민경우 <통혁당>+<신영복을 존경하세요?> 개략-




“YS 목숨 걸고 직선제”

주사파가 학생운동권을 장악해갈 무렵 정치권에서는 ‘이민우 구상’이 파문이 돼 요동치고 있었다.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신군부가 제시한 내각제 개헌에 동의했다.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있던 양김은 반발했다.

신민당을 탈당했다.
때는 1986년 말.

이야기는 다시 ‘민경우 일기’로 옮겨간다.

민경우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지난 1월 29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범민련 남측운동본부 사무처장을 지낸 바 있다.ⓒ시사오늘



# 회상(민경우 시점)

서울아시안게임이 끝나자 전두환 정권은 돌변했다. 강경노선으로 선회했다. 건국대 사건을 강경하게 진압했다. 김근태 고문사건, 권인숙 성고문 사건도 이 과정에 일어났다. 평화의댐 사건을 비롯해 통일국시 발언의 유성환 의원을 제명하고 구속한 일부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이 연이어 터졌다.


1987년 4월 13일 신군부는 호헌 조치를 강행했다. 양김은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했다. YS는 직선제 개헌론으로 신군부를 압박했다.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를 통해 범국민연합전선이 결성됐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된 다음날인 6월 10일 신군부는 체육관 선거를 강행했다. 이를 규탄하는 범국민적 1차 대회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6월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6월 18·19일 여름이었다. 2차 국민대회가 열렸다. 나(민경우)는 1987년 6월의 어느 날 명동성당 앞에 있었다.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이 쭈뼛대며 가두시위에 합류했다. 이를 지켜보던 버스와 택시 기사들도 경적을 울려댔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해나갔다. 경찰 병력으로는 막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시기 나는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다. 어느 기자로부터 수도권 인근 부대가 출동하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비슷한 제보들이 잇따랐다. 나는 군부대 충돌에 대비하면서도 얼마 안 있어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위가 끝나면서 밤이 찾아왔다. 어쩔 수 없이 두려움이 엄습했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정처 없이 길을 따라 걸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무엇일까. 함께 투쟁한 수많은 학우들이,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온몸을 짓눌렀다.


“1980년과 1987년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1980년에는 광주만이 고립되어 있었고 서울의 시위대오는 군부 출동이 두려워 스스로 후퇴했었지만 1987년에는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고 이들은 군부와 맞서 싸울 의지로 가득 찼던 신념과 확신에 찬 대오였다. 실제로 군대가 출동했다면 광주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심각한 희생을 치렀을 것이다.”
-민경우 <진보의재구성> 중-시사오늘은 시민사회의 힘으로 군부 퇴진 및 직선제 쟁취를 이뤄낸 6월 항쟁의 주역들을 만나 당시의 의미와 평가, 과제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시사오늘(그래픽=정세연)


여기까지 회상하다, 민 전 위원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잠기는 듯했다. 두 눈이 금세 눈물로 가득했다. 불과 이십 대 초반의 청춘들이었다. 대규모 유혈사태가 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맞서 싸우겠다며 전의를 불태웠던 순간들이 생생히 되살아난 듯했다. 내일이 없을 비장한 상황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초여름 새벽 한기에 떨면서도 정처 없이 내달릴 수밖에 없던 청년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잠시 진정할 시간을 가진 뒤 이야기는 6월의 막바지로 향해갔다.

민 전 위원은 6월 23일 영수회담을 상기했다. 그날은 YS가 전두환과 담판을 짓기 위해 청와대로 향한 날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YS는 단호했다. 직선제 외에 어떤 것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그는 청와대 밖으로 나와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바로 그와 같은 YS의 단호한 태도가 6‧29 선언이 있기까지 민주화 세력 전체를 이끈 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YS는 1980~1987년 전 기간 일관되게 직선제를 집요하게 요구하며 정세를 주도했습니다. 직선제 운동이야말로 강경한 투쟁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관제야당을 몰아내고 이민우 구상을 제압하고, 개헌운동에 성공한 진짜 주역이었던 셈입니다.”




“직선제 동참, 한민전 지령”

여기까지가 민 전 위원이 YS를 중심에 두고 설명해온 당시의 줄거리다.

학생운동권에서 과격 투쟁을 벌이며 우왕좌왕하는 동안 제도권에서는 양김을 중심으로 선거혁명과 개헌운동을 통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앞서 언급했듯 운동권 학생들이 개헌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은 건대 사태 이후 수세에 몰리면서부터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6월항쟁 성공의 과실은 뒤늦게 숟가락을 올린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체) 학생들이 취하게 됐다는 것이 민 전 위원의 일침이었다. 또, 이들이 그 같은 대중 노선으로 수정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북한의 한민전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는 진단도 포함됐다.

- 어쨌거나 전대협 등 운동권 학생들도 방향을 틀어 직선제 개헌 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니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분히 전술적이었죠.”

민 전 위원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운동에 가담한 것 모두 한민전이 강조한 것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6월항쟁 이후 주사파는 일약 민주화 운동의 총아로 떠오릅니다. 학생운동을 넘어 사회운동까지 장악할 만큼 확장해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80년대 중반 전성기를 누려온 전대협이었고 말입니다.”

반미청년회와 자민통 그룹의 NL 조직에서 만든 전대협은 건대 사태 이후 출범했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로 구성됐다. 민 전 위원은 “한민전에서 대중운동과 더불어 강조한 것이 연합 전선이었다. 연합체 성격의 전대협도 그 일환이었다”며 “전대협과 주사파 그리고 한민전은 80년대 중후반에서 90년대 중후반까지 사실상 동의어였다”고 평했다.



“결국 주사파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북한에 대한 입장에서 갈리는 듯하다. 주사파란 북한을 주어로 하는 정치적 견해를 뜻하기 때문이다. 6월항쟁 이후 주사파는 대략 3가지에 집중했다.

하나는 지하당 운동으로 민혁당, 중부지역당, 일심회, 왕재산 등이 그것이다. 둘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정확히는 노태우-김영삼 정권을 식민지 대리 정권으로 보고, 타도 투쟁을 전개했다. 셋째는 범민련과 한총련이 중심이 된 조국통일운동이었다.”
- 민경우 <군자산의 약속>


그 결과는 어땠을까.

민 전 위원은 우선 분열과 연합을 거쳐 흥했던 때부터 짚어갔다.




“1987년 하반기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대선 투쟁 방침을 두고 분열한다. 전대협 주류는 김대중 후보 지지, 서울대와 연대는 후보단일화 노선, 기타 진영은 민중후보 진영으로 3분된다. 1988년 통일투쟁이 시작된다. 이 투쟁을 고리로 전체 NL이 결집하면서 2기 전대협이 발족한다. 1·2기를 거치며 전대협은 안정된 조직으로 발전한다. 반미청년회와 자민통의 리더는 각각 고대 82학번 조혁과 84학번 구해우다. 1·2기 전대협 의장은 고대의 이인영, 오영식이다. 전대협-한총련(전대협 후신) 의장 중에서 1989년 임종석-1991년 김종식-1993년 김재용이 선출된다. 이들 모두 한양대 출신으로 학생운동에서 한양대의 시대가 열렸다. 전대협-한총련 역사에서 한양대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6월 민주화운동에서 학생들의 집결지로 유명했던 곳은 주로 연세대였는데, 연세대에서 NL이 약화되면서 한양대가 이를 대신했다. 96-97년 연이어 전남대에서 한총련을 배출했는데, 이때 한총련 사무실이 있던 곳도 한양대였다. 전대협-한총련 역사에서 한양대의 시대가 열린 배경에는 서울대와 연고대가 빠르게 이른바 NL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 민경우 <86세대의 민주주의>중



김일범 국장은 민추협이야말로 6월 항쟁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민추협서 도보행진을 하고 있다.ⓒ시사오늘(사진 : 김일범 제공)

하지만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들 조직은 얼마 안 가 쇠락의 길을 걷고 만다.

“한국 사회가 식민지라는 이론이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6월항쟁 이후의 한국 사회 발전과 결이 달랐던 것이다. 민 전 위원은 관련해 두 가지 사례를 들었다.

첫째는 농민론에 기초한 시대착오성이다.



“NL의 결정적인 특징은 농민론이다. 농민을 중시할 뿐만 아니라 민본주의, 우국지사와 같은 전통 농업사회에 뿌리를 둔 담론이 많다. 연장선에서 NL 총학생회장들의 남학생은 두루마기, 여학생은 치마, 저고리를 입은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 대표였던 이정희는 서울대 87학번인데 1990년 총여학생회에 출마했을 때,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1991년 5월 투쟁 과정에서 사망한 성균관대 김귀정의 영정 사진도 치마저고리 차림이다. 1990년대 한국은 빠른 속도로 도시화·자본주의화 되고 있었다. 따라서 농촌적 이론인 NL이 파고들기 어렵게 된 것이다. 1987년 6월 운동을 주도했던 서울대와 연고대 선거에서 NL계열이 꽤 많이 패배하게 된다.”
- 민경우 <86세대의 민주주의> 중


패배한 또 다른 이유는 김영삼 정부의 출범에 있었다.

민 전 위원은 “김영삼 정부의 출현은 학생운동 쇠락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며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학생운동이 시대와 괴리되며 사멸해갔다”고 진단했다.

-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993년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선거를 통해 출범한 정부였습니다. 문민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음 선거를 통해 바꾸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 주사파들은 김영삼 정권을 식민지의 대리 정권인양 규정하고, 반정부 타도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들은 1987년 직선제 이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에 관심을 두는 대신 과격한 시위를 벌이며 통일운동과 반정부 투쟁에 나섰습니다. 몰락을 자초한 1996년 연세대 사건과 1997년 한총련 사태가 그것입니다.”

- 이후 어떻게 변화해 나갔습니까.

“1980년대 주사파 학생들이 서울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세를 확장해나갔다면 1990년대 중반이 되면서는 경기동부, 인천, 울산과 같은 전국연합에 뿌리를 둔 민중적 주사파가 성장합니다. 주사파는 강력했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을 비롯해 광우병 촛불시위 대규모 촛불 집회 현장을 주도한 사람들입니다. 2000년대 청년과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조직한 거의 유일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3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동부는 성남 지역을 뿌리로 하는 주사파 그룹이다. 경기동부의 맹주는 82학번 이석기다. 이석기는 외대 용인 출신이다. 경기동부에서 출현한 주사파 그룹이 전국연합과 민노당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다음으로 인천그룹이 있다. 맹주는 81학번 강희철이다. 인천연합은 현재 정의당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울산파가 있다. 울산파는 서울대와 연고대 출신의 학생운동가들이 울산에 투신하면서 형성됐다. 박경순, 김창현, 정대연 등이 대표로 있다. 경기동부와 인천연합은 결속력이 세고 울산연합은 이론적인 성향이 강하다.”
-민경우 <86세대의 민주주의> 중




“군자산의 약속”민경우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이 지난 1월 29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범민련 남측운동본부 사무처장을 지낸 바 있다.ⓒ시사오늘



민 전 위원은 “이후 이들 3개의 주사파 그룹이 2001년 ‘군자산의 약속’에 합의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 군자산의 약속은 무엇을 말합니까.

“군자산의 약속은 전국연합이 민주노동당에 합류하겠다는 정치 선언과도 같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주사파 출신들이 민노당과 통진당을 주도해나갔던 것입니다. 이는 남한 주사파와 북한 간의 약속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시대가 바뀌면서 북한은 주사파 집단에 ‘대중 정당 노선’으로 방향을 틀라는 새로운 운동론을 지시했다고 했다. 이후 지하당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민주노동당을 숙주로 삼아 들어갔고, 통합진보당(진보당의 전신)을 건설했다는 것이었다.

민 전 위원은 “2001년 군자산의 약속 이후 경기동부, 인천연합 울산연합 3파는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등을 빠르게 장악하기 시작했다”고 부연했다.



“전국연합 3파는 2004~2005년 무렵부터 민주노동당을 장악했다. 2012년에는 유시민 계열, 심상정, 노회찬, 주사파가 결합해 통합진보당을 결성했다. 지역 7석, 비례 6석 등 총 13석을 확보하며 대약진을 했다. 이석기 사건을 계기로 민중적 주사파는 분화됐다. 전통적 주사파는 민주당, 진보당 등으로 군소화했다. 인천그룹은 정의당으로 갈아탄다. 민주노총 선거에서는 경기동부 계열이 승리한다.”
- 민경우 <86세대의 민주주의> 중


“2012년 선거는 여러 면에서 진보정당 역사에 남을 선거였다. 2004년 노무현 탄핵을 타고 민주노동당이 대약진했는데 이때도 지역 당선자는 2석(창원 권영길, 울산 조승수), 비례 8석이었다. 대부분이 비례이거나 지역이라도 노동자 밀집 지역이었다. 2012년 시점에서 야권연대를 배경으로 지역에서 무려 7석을 얻었다. 돌이켜 보면 주사파의 정치적 진로에서 남한의 진보,민주파와의 연대-연합 여부가 결정적인 변수인 듯하다. 87년 6월항쟁에서도 주사파가 직선제에 동의하면서 대약진을 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번엔 민주당과의 정치연합 결과 지역구에서 통합진보당이 7석을 얻었다.”
-민경우 <스파이외전> 중


이 모두가 ‘군자산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민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군자산의 약속 또한 북한의 지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더 파고들지 못했다. 인터뷰는 끝을 달리고 있었다. 추후 안개 국면을 헤집고 가듯 그의 책을 좀 더 읽어보면서 더듬어보기로 했다.

민 전 위원은 한동훈 비대위 체제가 들어서면서 특권과 패권으로 비판을 받아온 86운동권을 잡는 저격수로 화려하게 등장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직에서 내려왔다.

여담으로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청년 세대를 위해 자신과 같은 86세대가 비켜줘야 한다는 말을 하려던 중 분위기가 약간 썰렁한 것 같아 오버한 것이 그만 상대진영으로부터 공격의 빌미가 됐다는 얘기였다. 아쉬울법했다.

- 그나저나 아까 눈물 흘린 것이 인상에 남습니다.

“…”

민 전 위원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앞서 그는 6월항쟁 기간 5·18 때와 같은 계엄령이 선포될 수 있다는 얘기들이 실제 있었다고 말하던 중 눈물을 보인 바 있다. 죽을 줄 알면서도 포화 속으로 몸을 던지는 병사와 같은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신군부와의 전면전을 각오하며 청춘의 열망을 남김없이 불사르려 했던 것일까. 밤새 6월의 거리를 달음박질치던 청년 시절의 앳된 민경우의 모습이 그려졌다.

또, 그 시절의 운동권 청년들을 북한이 가지고 놀았다는 말도 겹쳐 떠올랐다. 4월 10일은 총선이다. 진보당은 비례연합정당이라는 이름으로 이재명 대표 체제의 더불어민주당과 연합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총선에서 지면 윤석열 정부는 뜻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끝날 것이고 종북 세력이 주류로 떠오르고 말 것”이라고 한 바 있다. 민 전 위원도 이점을 걱정하고 있는 걸까. 또,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북한의 지침이 내려지고 있다고 보는 걸까.

여러 물음표들이 뒤죽박죽 스쳐 지나갔다. 미처 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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