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31

알라딘: 제5공화국 강원택

알라딘: 제5공화국

(18) 제5공화국을 둘러싼 불편한 질문들
이한우 교장(논어등반학교)

2024-06-01 
80년 ‘서울의 봄’은 왜 실패했고
87년에는 민주화가 가능했는가?
10·26땐 사태 관망했던 국민들
경제성장으로 중산층 늘어나며
직선제 개헌에 동참 아이러니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강원택 교수가 문제작 《제5공화국》(역사공간)이란 책을 냈다. 강 교수와 마찬가지로 80년에서 87년 대부분을 학부와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보낸 필자로서는 별다른 호기심 없이 그냥 한번 읽어보자는 기분으로 독서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이 책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왜 80년 ‘서울의 봄’은 실패했고 87년에는 민주화가 가능했는가?”

80년 ‘서울의 봄’ 실패에 대해 우리는 분명한 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두환을 앞세운 신군부 세력의 집권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편의주의적 책임 회피라는 것이 강 교수 주장이다.

강 교수가 여기서 던지는 질문은 “왜 1979년 10월 26일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을 제외한 다수의 시민들은 사태를 관망했는가?”이다. 돌이켜보면 노동현장에서 다소 과격한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실제로 일반 시민들은 87년 호헌철폐 직선개헌 때처럼 길거리에 나서지 않았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상당수 국민들은 최규하-신현확 유신 관료 집단의 점진적 변화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이는 사실상 지나간 박정희 시절에 대한 암묵적 지지와도 연결이 돼 있다.

그러나 군부는 구군부와 신군부로 분열되었고 12·12사태는 신군부가 구군부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여기서 강 교수는 두 번째 쟁점을 던진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일방적 희생자가 아니라 상황을 오판하고서 오히려 신군부에 적극 협조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강 교수는 당시 최 대통령의 담화나 회견문 그리고 관련자 인터뷰를 통해 소상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큰 흐름이야 바뀌지 않았겠지만 “그가 민주화를 위한 정치 일정을 조속히 밝히고 과도정부의 수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면 신군부의 권력 장악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강 교수 진단은 그래서 눈길을 끈다.

이어 강 교수는 80년 ‘서울의 봄’ 실패에 대한 김영삼, 김대중의 책임론 또한 제기한다. 두 사람은 당시 상황을 낙관해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분산 소진시키고 결국은 신군부 집권을 향한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통상 양김에 대한 책임론은 87년 대선과 관련해서만 제기되었다. 그러나 ‘양김 분열=신군부 정권 장악’이라는 80년의 구조는 '양김 분열=신군부 출신 노태우 당선'이라는 87년의 구조와 너무 흡사하다. 이 점 또한 우리가 80년대를 이야기하면서 쉽게 간과한 대목이다.

이번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1985년 2월 12일에 실시된 제12대 총선거에 대한 심층 분석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때는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정권이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치활동 규제를 풀어주기도 했지만 결국 양김이 손을 잡음으로써 신한민주당의 ‘선거 혁명’이 가능했다.

그런데 오히려 질문은 다른 방향에서 던질 수 있다. “왜 전두환 정권은 총선을 앞두고 과감한 해금 조치를 취했을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지난 4년간 경제발전이라는 치적을 바탕으로 정국 운영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결국 오판으로 드러났지만 신당 창당을 부추겨 야권 분열을 노렸던 것이다. 즉 집권 여당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씨가 지원하는 신민당이 민한당에 이어 제3당이 되면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 계산한 때문이었다. 오산이었다. 강경노선은 오히려 큰 힘을 얻었다. 그 노선이란 다름 아닌 ‘대통령 직선제 개헌’ 주장이다. 하긴 돌이켜보면 이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한국 정당은 학생운동 세력과 손을 잡았다. 이른바 ‘386 세력’이 비로소 태동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강 교수는 이때부터 일반 시민들이 대거 야당 주장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것이 80년과는 전혀 다른 사태 진행이 이뤄진 이유라는 것이다.

변혁보다는 정치개혁을 통한 사회 안정이 당시 시대를 읽어내는 저류라고 본다. 그래서 강 교수는 87년 체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학생운동이라기보다는 직선개 개헌을 주장하고 마침내 이를 관철해 낸 김영삼, 김대중의 야당이라고 단언한다. 바로 이 점이 80년과는 결정적으로 달랐던 국면이기도 하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그 기간 자체만 놓고 보면 정치적 왜곡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루어냈고 중산층 70% 시대를 열어놓았다. 그러나 바로 그 70% 중산층의 각성된 정치의식은 더 이상 왜곡된 정치를 수용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5공’은 자기들이 길러낸 중산층에 의해 무너져내렸다.

이한우 교장(논어등반학교)




제5공화국 강원택 (지은이) 역사공간 2024-05-18
정가32,000원

세일즈포인트 1,030
전두환정부/노태우정부 주간 7위


536쪽
제5공화국은 한국 정치사에서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은 제5공화국의 정치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 시도다. 제5공화국 시기가 한국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한국의 권위주의체제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정치의 구조와 통치 형태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동안 이 시기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충분히 이뤄지지 못해서, 이 시기가 한국 정치사에서 사실상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한국 현대사의 공백을 메워주는 학술적 움직임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


책을 내면서 7
여는 글. 제5공화국은 한국 정치사에서 어떤 의미일까 14

제1장. 유신체제의 몰락과 남겨진 유산
유신체제의 붕괴: 혼돈 22
유신 관료: 최규하와 신현확 37
김종필과 민주공화당 58
야당: 김영삼과 김대중 72

제2장 신군부의 부상
군부 내 파벌 갈등 102
12·12 사태 119
김재규 재판 158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173
5·17 계엄 확대와 군사정부의 구성 184
최규하 대통령 214

제3장 제5공화국의 출범과 정치제도
제5공화국 헌법의 제정 240
국가보위입법회의 246
정당 창당과 선거 259

제4장 제5공화국의 주요 정책
경제 274
외교 293
대북 관계 331

제5장 정치적 억압
언론 338
대학 349

제6장 광주항쟁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360
광주항쟁의 정치적 결과 383

제7장 정치적 대안 세력의 등장
야당의 복원 398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403
사회경제적 변화와 중산층 435
분노의 폭발과 요구의 타결 451

제8장 ‘87년 체제’의 확립 473
맺는 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494
미주 503
참고문헌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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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문화일보 2024년 5월 31일자
중앙일보: 중앙일보 2024년 6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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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강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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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제5공화국>,<한국 정치론>,<기본소득의 사회과학> … 총 102종 (모두보기)
현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석사를 마친 후 영국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정당학회장을 역임했다. 『한국정치론』, 『한국의 선거 정치 2010-2020: 천안함 사건에서 코로나 사태까지』, 『한국 정치의 결정적 순간들』, 『대한민국 민주화 이야기』, 『통일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제5공화국은 한국 정치사에서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은 제5공화국의 정치사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 시도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제5공화국은 여전히 회색지대로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그 시기는 ‘흐리고 탁한 색채’로 그려져 있고, 학술적으로는 여전히 본격적인 평가작업이 이뤄지지 못한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어두운 기억과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고 해도, 제5공화국 동안 우리 사회는 그 나름의 변화를 겪었다. 그 변화는 그 이후 시대에 영향을 미쳤고, 오늘 우리의 삶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역사는 단절적이지 않다. 제5공화국을 외면하거나 부인한다고 해서 그 시기 동안 이뤄진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민주화로 가는 여정의 중요한 변곡점, 제5공화국

이 책은 8년여에 달하는 제5공화국의 역사를 시기적으로 나눠 기술하되, 각 시기가 갖는 특성에 주목하며 논의를 전개한다.
첫 번째 주제는 유신체제가 남긴 정치적 유산에 대한 것이다. 10‧26 직전 박정희 체제의 주요 인적 구조, 통치 형태의 특성을 분석하고 그것이 그 후 정치적 전개에 미친 영향에 대해 논의한다.
두 번째는 군사정권의 특성에 대한 것이다. 이와 관련된 시기는 10‧26 직후 전두환과 신군부의 부상, 12‧12사태, 5‧17 이후 설립된 군사정부 시기까지를 포함한다. 이 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신군부가 갖는 군사정권으로서의 특성을 살피면서, 궁극적으로는 한국 군부정치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5‧16군사정변 전후의 상황과 비교하여 논의한다.
세 번째는 제5공화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는 헌법이나 정당법 개정 등 법적 개정뿐만 아니라 여야 정당의 창당, 정치인의 정치 금지와 충원, 국가보위입법회의 시절 개정하고 제정한 여러 법적‧제도적 장치에 대해 살펴본다.
네 번째는 제5공화국의 주요 사건에 대한 것이다. 시간별로 사건을 나열하기보다 제5공화국의 특성을 상징하는 사건을 정치, 경제, 사회 차원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한다.
다섯 번째는 제5공화국의 억압체제에 대한 것이다. 그동안 민주화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이 주제를 다뤘다면 여기서는 역으로 억압체제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특히 유신체제와 비교하면서 제5공화국의 군부 권위주의체제의 억압적 속성을 분석한다.
여섯 번째는 87년 체제의 형성과 관련된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민주화운동 세력과 제5공화국 세력 간의 합의로 이뤄졌고, 그 결과 체제 전환의 과정 역시 두 세력 간의 논의를 통해 진행되었다. 이러한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87년 헌법 개정 과정이다.
마지막 주제는 제5공화국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평가이다. 제5공화국 시기는, 1979년과 비교할 때,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절박하게 소망하도록 만들었고, 군부 권위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와 적대감을 사회구성원 다수가 공유하게 만들었다.

제5공화국 시기가 한국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한국의 권위주의체제의 특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 정치의 구조와 통치 형태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동안 이 시기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충분히 이뤄지지 못해서, 이 시기가 한국 정치사에서 사실상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한국 현대사의 공백을 메워주는 학술적 움직임을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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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이 키운 중산층이 5공을 무너뜨렸다
연구서 '제5공화국' 쓴 강원택 교수

유석재 기자
입력 2024.05.29.

연구서 ‘제5공화국’을 쓴 강원택 교수는 “5공을 ‘해리 포터’에 나오는 볼드모트처럼 언급하지 않거나 기피하면 현대사의 중요한 실체를 놓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남강호 기자
연구서 ‘제5공화국’을 쓴 강원택 교수는 “5공을 ‘해리 포터’에 나오는 볼드모트처럼 언급하지 않거나 기피하면 현대사의 중요한 실체를 놓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남강호 기자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이어진 제5공화국 시기는, 역설적이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5공을 거치고 나서야 한국 국민은 비로소 군부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유일한 통치 원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28일 연구실에서 만난 강원택(63)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새로 낸 500여 쪽 분량의 연구서 ‘제5공화국’(역사공간)에 대해 말했다. 학문적으로 여전히 사각지대에 남아 있는 5공의 정치사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책이다. ‘왜 민주화가 왜 1979년에는 불가능했고 1987년엔 가능했는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연구다.

“10·26은 권력 내부의 파열이었을 뿐 대중이 저항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관료와 군부라는 유신 체제의 구조적 힘은 여전히 건재했죠.” 최규하·신현확의 유신 관료 집단과 정승화의 구(舊)군부 사이 협력이 유지됐더라면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나누는 이원정부제 형태로 헌법이 개정될 수도 있었으나, 12·12로 전두환의 신군부가 군권을 장악한 뒤 모든 권력을 빨아들였다.

강 교수는 “이른바 ‘서울의 봄’이 실패한 원인을 전두환 1인의 권력욕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고 했다. ‘피해자’로 인식된 최규하 대통령은 그가 보기엔 신군부에 의존해 자신의 집권 연장을 노렸고, 야권 지도자 김영삼·김대중은 지나친 낙관주의와 분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국민 대다수는 유신 체제를 힘들어하면서도 정치적 변혁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5공 시기를 거치며 세 가지 큰 변화가 생겨났다. “1987년 6월 항쟁만으로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첫째,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정부와 군부가 더 이상 물리적 강제력으로 시위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둘째, 1985년 2·12 총선으로 약진한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실현 가능한 목표를 제시했다.

그리고 셋째, ‘탄탄해진 중산층’이 더 이상 권위주의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중산층 성장의 배경에는 최고 13.4%(1983)까지 올랐던 경제성장률, 물가 안정과 경상수지 개선, 도시화와 교육열이 존재했다. 올림픽 유치와 함께 5공 정부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모두 ‘민주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5공 정부의 억압적 통치의 결과 사회운동권 세력들 중 일부가 종북 성향을 띠거나 기존 사회 질서를 뒤집으려는 극단주의로 나아간 것도 사실이다. “이는 전두환 정권이 남긴 또 다른 나쁜 유산”이라고 강 교수는 말했다. 그는 “제5공화국을 암흑과 저항의 시기로만 볼 게 아니라 당시의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민주화를 위해 달려온 숨 가쁜 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유석재 기자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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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한번
2024.05.29 09:38:40
역사는 결과를 가지고 평가하면 된다. 지금 대한민국의 존재는 이승만대통령이 그리고 산업화의 시작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리고 본격적 발전은 전두환 대통령이 실현시켰다. 김영삼은 국가 부도 김대중은 북한 핵개발 실현 노무현은 본인 자살 문재인은 김정은 대변인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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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심가득
2024.05.29 09:56:52
5공의 공은 7이요 과는 3이다. 문재인은? 공은 없고 과만 10 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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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포인트
2024.05.29 10:55:52
그리운 전 두환 대통령, 자상하시고 검소하셨던 이 순자 여사. 5공 시절은 그야말로 한국인들에게 축복이었다. 전 두환 대통령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광주 금남로와 전남대에 전 두환 대통령 기념관을 호남인들이 모금해서 건립하도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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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환
2024.05.29 12:34:55
파출소 불 지르고 무기고 털고 교도소 공격하는 것이 민주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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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lup
2024.05.29 09:32:55
5공의 대표적순기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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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979년이 아닌 1987년에 민주화가 됐나···전두환 정권 다룬 학술서 ‘제5공화국’ 출간
입력 : 2024.06.06
정원식 기자

왜 1979년이 아닌 1987년에 민주화가 됐나···전두환 정권 다룬 학술서 ‘제5공화국’ 출간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존속했던 제5공화국은 본격적 학술연구의 ‘사각지대’로 꼽힌다. 5공화국과 관련한 정치학계의 연구는 주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최근 펴낸 <제5공화국>(역사공간)에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연구자들의 마음이 제5공화국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제한했다면서 “(민주화 이전 시기인) 제5공화국 동안 우리 사회가 겪은 사건과 경험을 간과해서는 민주화뿐 아니라 공고화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책에서 강 교수는 “제5공화국의 시기는 한국 사회가 군부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항구적으로 벗어나는 데 역설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와 관련해 제기되는 중요한 질문은 ‘왜 한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이 아니라 1987년에 민주화를 이뤘나’라는 것이다.

강 교수는 1980년 광주민주화 운동과 1985년 2월12일에 치러진 12대 국회의원 선거가 민주화 여정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이뤘다고 지적한다.

1979년 10·26 이후 급격한 정치적 변혁을 우려한 국민 다수는 신군부의 지배를 수용했으나,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군부 지배를 끝내야 한다는 민주화의 열망이 커졌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또 물리적 강제력에 의한 통치가 얼마나 큰 반발에 처할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1987년 6월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이 군사력 동원을 주저하게 한 계기가 됐다.

2·12 총선은 제5공화국 시기 진행된 도시화와 중산층의 부상 등 사회경제적 변화가 정치적 재편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총선 결과 신생 정당 신한민주당(신민당)이 관제 야당들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 배경에는 20세~39세 유권자 비중의 증가, 도시화의 진전, 대학생 숫자 증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다수 국민이 수용 가능한 민주화의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반권위주의의 대중적 저항을 주도해갈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해냈다.

제도권 야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강 교수의 이 같은 주장은 1987년 민주화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한 ‘운동에 의한 민주화’라고 평가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논의(<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상반된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화된 정치 질서에서의 잠재적 대안 세력으로서, 최대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민주화를 향한 힘을 결집한 중심체는 제도권 야당인 신한민주당이었다.”

<제5공화국>은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한국학 대형기획 총서 사업’ 중 하나인 ‘20세기 한국학술총서’의 첫 성과다. ‘20세기 한국학술총서’는 향후 식민지, 분단과 전쟁, 권위주의, 산업화 등 20세기 현대사를 주제로 2029년까지 총 50권의 총서를 펴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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