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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독일사 산책
닐 맥그리거 (지은이), 김희주 (옮긴이)
옥당(북커스베르겐) 2023-03-30
영국박물관과 BBC가 공동 기획한 역사 프로젝트 '유럽사의 서문을 장식한 독일을 가다'. 흔히 독일 하면 히틀러와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던 나라를 떠올린다. 혹은 무뚝뚝하고 딱딱한 독일 병정과 무서운 냉전시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이자 영국박물관장인 닐 맥그리거는 "독일은 최근의 시리아 난민처럼 혹독한 난민 시절을 겪었고 합의를 통해 작은 나라들을 이끌어온 느슨한 연합체"라고 말하며 독일의 건물과 물건, 사람과 장소를 통해 유럽사의 중심에 서 있는 독일사를 풀어낸다.
목차
옮긴이 서문 | 책으로 여는 독일 역사문화 전시회
지도로 읽는 독일사 ①~⑧
시작하며 | 역사를 기억하는 그들만의 방식
1부 요동치는 국경, 모자이크 제국을 낳다
1장 역사의 증인, 브란덴부르크 문
분단의 상징이자 되찾은 자유의 상징 | 서쪽으로 전승기념탑 | 동쪽으로 베를린 궁전 |
전쟁에서 월드컵까지,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다
2장 동서로 나누어진 하늘
동독을 탈출하다 사살된 사람들 | 또 다른 탈출루트, 발트 해 | 프리드리히슈트라세 역에서의 눈물의 이별 | 비밀경찰의 감시, 그리고 기억 | 국민 작가 크리스타 볼프의 침묵
3장 잃어버린 수도들
이제는 독일이 아닌 도시들 | 칸트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 |
호박 방과 함께 사라진 왕국 |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
4장 뺏고 빼앗긴 도시
독일 땅 슈트라스부르크 | 프랑스 땅이 된 슈트라스부르크 |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열광한 괴테 | 스트라스부르의 숙제
5장 신성로마제국의 분권 정치
하나의 군주, 두 개의 세계 | 부분과 요소가 모여 전체를 이루다 |
화폐 주조권의 소유와 상속 | 타협으로 움직이는 정치 체제
2부 독일의 상상력, 국가 정체성을 세우다
6장 표준 독일어의 탄생
너무 많은 독일어 방언 | 마르틴 루터,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다 | 루터 성경의 등장 |
대중과 소통하는 성경 | 루터의 언어, 표준 독일어가 되다
7장 나폴레옹에 맞선 백설 공주
숲에 담긴 독일의 숙명 | 그림 형제, 동화로 민중의 정체성을 재건하다 |
참나무와 독일인의 기질 | 그림과 동화로 고취시킨 애국심 | 21세기의 영웅으로 거듭나다
8장 괴테 아래 한 민족
괴테를 사랑한 독일 | 유럽을 뒤흔든 베스트셀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한 세계 시민 | 《파우스트》에 독일을 담다
9장 영웅의 전당, 발할라
굴욕의 나폴레옹 치하 | 독일 영웅들의 흉상을 만들다 | 초대받은 자, 초대받지 못한 자 |
배제된 마르틴 루터 | 놀라운 건축 양식
10장 맥주와 소시지
가장 독일다운 대중 축제, 옥토버페스트 | 독일맥주순수령, 보리· 호프·물로만 만들라 |
까다로운 소시지 제조 전통 | 정치 회합은 맥주홀에서
3부 집요한 과거, 독일인을 하나로 묶다
11장 프-독의 샤를마뉴 쟁탈전
황제의 왕관 | 샤를마뉴의 정체 | 나폴레옹과 또 다른 황제의 탄생 |
샤를마뉴 유산 상속 전쟁 | 최후의 반전
12장 종교개혁과 독일농민전쟁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수용한 신성로마제국 | 천재 조각가 리멘슈나이더의 위기 |
피바다로 끝난 독일농민전쟁 | 권력자의 억압에 맞섰던 예술가의 복원
13장 한자동맹
가장 오래된 상업 네트워크 | 어떤 초상화 | 느슨한 연합, 독일적인 동맹 |
서서히 다가온 종말
14장 철의 나라 프로이센
사치하지 않는 나라 | 신분 차별이 없는 철십자 훈장 | 루이제 왕비의 협상과 징벌 조약 |
십자가 언덕의 철제 기념비
15장 1848년에 갈라진 길
동요와 혁명의 시대 | 새로운 국기와 국가를 만들다 | 마르크스와 새로운 길 |
화해할 수 없는 둘을 포용하다
4부 독일제 신화, 라인 강의 기적을 만들다
16장 인쇄기로 시작되다
구텐베르크와 인쇄 혁명 | 15세기 마인츠와 책 만들기 | 영리한 사업가, 구텐베르크 |
인쇄 혁명이 독일에서 일어난 이유
17장 유럽이 사랑한 독일의 국민 미술가
‘로고’의 발명 |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가다 | 뒤러의 판화 두 점, 쌍둥이 자화상 |
가장 유명한 판화 주제, 코뿔소
18장 작센의 하얀 금, 도자기
도자기 병에 걸린 왕 | 도자기 제조비법을 알아내다 |
작센의 새로운 무기 | 도자기 동물원 제작 | 전쟁배상금의 희생양
19장 금속 가공의 명인
폭스바겐 ‘비틀’의 엔진음 | 길드의 장인 만들기 | 유럽의 모든 물건은 독일로 통한다 |
대량생산 시대와 길드의 몰락 | 나치의 ‘독일 동력화’ 정책 |
독일차의 원형 ‘비틀’, 경제 기적을 일구다
20장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원형, 바우하우스
국립조형학교의 탄생 | 디자인으로 균형 잡힌 밝은 세상을 꿈꾸다 |
나치에 의해 폐교당하다 | 바우하우스의 후계자, 이케아
5부 유례없는 재앙, 몰락을 부르다
21장 비스마르크의 철혈 정치
나폴레옹 3세 물리치고 독일 제2제국 출범하다 | 철의 수상, 비스마르크의 등장 |
부국강병책과 통일 | 삼중 초상화 | 빌헬름 1세의 죽음과 해임
22장 목격자의 고통
소리 없는 증언 | 판화가 콜비츠와 ‘직공들의 반란’ | 끔찍한 예언 |
산 자에서 죽은 자에게로 | 반성 그리고 용서
23장 통화 위기
물자부족 시대 | 비상화폐에 담긴 생활상 | 전쟁배상금과 인플레이션 |
경제불황이 뿌린 비극의 씨앗
24장 나치의 퇴폐 추방 운동
도자기 디자이너 그레테 막스의 추방 | ‘독일다운’ 미를 찾아라 | 퇴폐 예술 전시회 |
영구불변의 유대인 | 고통 속에 살아남은 그레테 막스의 도자기
25장 부헨발트 수용소 정문
너도밤나무 숲의 이면 | 각자 제 몫에 맞게 | 수용소 정문 서체에 담긴 의미 |
서로 다른 부헨발트의 기억
6부 새로운 독일, 역사를 짊어지다
26장 쫓겨난 독일인
1,500만 명의 독일 난민 | 잔혹한 이주 | 손수레와 억척어멈
27장 파괴된 독일의 재건
재앙이 지나간 자리 | 맨손으로 재건에 나선 폐허부인들 | 마르크 도입, 이중 통화 경제의 시작 | 마르크 대 오스트마르크의 경쟁 | 독일의 경제 통일 | 마르크 대신 유로
28장 독일로 이주한 유대인들
새로운 독일 유대인 | 왕실 비호 유대인 로트실트 | 오펜바흐 공동체
29장 바를라흐의 천사
추모 행사 없는 독일 | 전쟁 기념비 제작을 의뢰받다 |
전쟁 기념비의 새로운 유형 | 천사의 귀환
30장 새로운 독일
추모비와 의사당 | 140년 역사의 목격자를 옆에 두고 |
베를린, 건축으로 꿈꾸는 도시 | 다시 ‘문화국’을 향하여
마치며 | “역사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도 내다본다”
감사의 글
도판 출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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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현재 독일에서 국가의 공공 행사를 치르는 광장이 있다면,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이다.
밑줄긋기
P.424bloodmess73
인플레이션 열기가 뜨거웠고, 독일은광기에 빠진 상황이었다. 그러던 1922년 6월 라테나우가 암살당했다. 그리고 마르크화는 1달러에 300마르크로 가치가 하락했다. 한 달 후 1년배상금 지급기일이 되자 1달러에 500마르크까지 가치가 떨어졌고, 27배상금 지급기일인 10월 말에는 1달러에 4,500마르크로 무너져내렸다결국 1923년 4월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뇌관이 터져버렸다. 그때 나온 지폐 이야기를 꺼내려니 지금도 오싹하다. 1,000마르크, 1만 마르크, 10민마르크, 100만 마르크 지폐, 그리고 금액을 말로 표기한 십억 마르크
‘천억 마르크 지폐, 1923년 11월 마르크화의 환율은 1달러에 12조 마르크였다. 당시 베를린 주재 영국대사관 직원이 1파운드 당 마르크화의 숫자가 태양까지의 거리와 맞먹는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해 말 달걀 한개의 가격은 1918년 가격의 5,000억 배였다. 사람들이 수레에 지폐를 신고 다니던 모습은 아직도 유명하다. 물건을 사러 가는 모습이 아니었다.
쓸모없는 현금을 은행으로 가져가 훨씬 더 큰 고액권으로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중에 유통되던 통화량은1921년 1,200억 마르크에서 2년 후 거의 5억조 마르크에 육박했다. 가늠할 수 없는 수치이다. 5억 마르크 지폐 한 장으로 겨우 빵 한 덩어리를살 수 있었다.
不二
2013년 6월,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의 최우방국들까지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했다고 폭로했다. 이를 두고 영국과 독일의 반응이 달랐는데, 이는 감시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강력한지 분명히 보여준 사례였다. 영국의 공식 반응은 통상적인 수준의 적개심과 경멸이었으나, 독일은 `공공의 이름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공공에 역행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대중에게 알리고 싶았다`는 스노든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엄청난 지지를 보냈다. 예를 들어 라인지방의 마인츠 시에서는 ... 축제를 벌이는데, 2014년 축제에서 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한 영웅이 스노든 인형이었다. 독일이 분명하게 소리 높여 스노든을 찬양했던 것이다. 그리고 2014년 1월 29일 메르켈 총리는 연방 하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국의 감시 행위에 대해 이처럼 신념에 가득 찬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독일의 정치 지도자나 동독에서 자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76)
不二
그렇다고 볼프가 궁지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볼프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망각이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그런 기억을 억눌러서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정부의 주장에 속아 넘어가 무조건 따를 수 있을까? 볼프는 나치 치하에서 유년을 보낸 자신이 모든 방법으로 국가를 지원하려는 욕망과 복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결론지었다. 그 세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도 집단 순응에 적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프는 부끄러운 기억을 억누르는 정신의 능력을 인정했을 뿐, 해명할 수는 없었다. (78)
不二
그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면서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보헤미아에 민족주의적 열망이 소용돌이칠 때까지 200년간 프라하에서 독일인의 영향력은 변함없이 확고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이 붕괴하며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변했다. 체코의 민족주의 정서가 계속 커졌고, 500년간 공동생활을 하며 혼인 관계를 맺어온 프라하와 보헤미아 주민들이 단호히 독일어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1848년에서 1880년 사이 프라하는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시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도시로 변했다. 1882년 새로운 프라하 시장이 취임식에서 ˝100개의 첨탑이 있고, 전성기를 맞은 소중한 `슬라브인`의 프라하˝라고 연설했을 때, 최후까지 남아 있던 독일인 시의원들이 이에 항의하며 시의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다음 해 카프카가 태어났다. (93)
不二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카프카를 규정하는 것은 독일어권 프라하의 특별한 환경이다. 1883년에 태어난 카프카가 자라면서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도시 프라하는 독일인이 철수할 뿐만 아니라 종말적으로 감소하던 도시였다. ... 카프카는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해묵은 독일의 정체성을 지우기로 결정한 도시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카프카의 소설 몇 작품에 삽화를 그린 한스 프로니우스...의 카프카 초상화를 보면 불안하고, 경계심 가득하며, 소심한 한 남자가 보인다.
카프카는 1890년대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젊은이 대부분이 그렇듯 이중으로 이방인이었다. 카프카가 다닌 독일 중등학교 김나지움의 학생 대부분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다. 300년간 가톨릭을 독실하게 믿은 국가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고 독일 유산을 버리고 있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독일어 사용자였으니, 카프카는 태어나면서부터 현대 정치 구조의 억압과 소외를 경험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95)
不二
˝18세기 초 유럽의 많은 나라가 이런 식으로 신성로마제국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덴마크, 프로이센. 스웨덴,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 제국 외부에서 왕관을 쓴 통치자는 모두 기능적으로 밀접하게 제국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지배 가문도 독일 가문이었습니다. 결국 제국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정치 집합체가 형성된 것이죠. 제국의 안보가 유럽 전체의 안보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이런 방식이 아주 중요한 이유는 ... 동시에 나머지 유럽이 독일에 일정한 질서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 독일. 놀랄 만큼 현대적인 견해로 보인다. 지역별 차이가 두드러지고 중앙 집권을 꺼리는 하나의 독일이 현재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인 것과 같다. 요아킴 웨일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관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121)
不二
루터의 대화와 편지를 보면 그가 언어를 만들면서 작센의 관공서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작센은 독일 중동부에 위치해 방언이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주경계선이 있었는데,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를 나누는 언어 경계와 같습니다. 어린 시절 루터는 부모를 따라 이 경계선을 넘나들며 두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에 모두 능통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실제 저지독일어와 고지독일어로 청중에게 연설을 하고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독일어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뜻밖의 행운입니다. (137)
不二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인은 읽고 쓰는 능력이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 중에서 독일은 문맹률이 낮았다. 독일은 아무리 작은 국가라도 교육을 담당하는 관료가 있었다.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 시장과 박람회 덕분에 수백 개가 넘는 거래소에서 글을 읽고 쓰는 상인 계급이 활동했고, 이들이 한 권에 1굴덴씩 하는 루터 성경을 부담 없이 구입했다. 1굴덴은 학교 교사의 두 달치 월급이었고, 시장에 나온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이었다. 다섯 집 중 한 집이 루터 성경을 구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이 루터 성경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재단사, 제화공은 물론 독일어를 조금 배워 겨우 읽을 정도인 평민과 여자들까지도 진리가 솟는 샘이나 되는 양 열심히 루터의 성경을 읽는다. 책을 가슴에 품고 외우는 사람도 있다.˝ (142)
不二
하지만 독일인은 늘 그리스인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독일인은 자신들이 프랑스인이나 로마인보다 군사력은 약할지 모르지만, 그리스인처럼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독일인은 그리스의 다원성도 동일시했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가 다양하게 많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국가도 다양하게 많았으니까요. 독일인은 그리스인이 자유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믿었고, 자유에 대한 애정 또한 특별히 독일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발할라의 건축 양식으로 그리스 양식을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선택이었습니다. (197)
不二
옆에서 지켜보는 영국인에게 독일은 놀랄 정도로 다양한 나라이다. 지역 특산물이 수세기에 걸쳐 지역문화를 대변한다. 서로 다른 맥주와 지역 소시지는 모두 500년 전부터 광범위한 규제에 따라 관리되었다. 드골 장군이 치즈 종류만 246가지인 프랑스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불평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드골 장군은 소시지 종류가 더 많은 독일을 통제하지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흔히 그렇듯 이렇게 서로 다른 맥주와 소시지들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국가 구조 안에 포함된다. 어떻게 보면 맥주와 소시지는 5장에 소개한 동전과 유사하며, 엄청난 지역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천 년 동안이나 독일 대부분과 중앙 유럽을 하나로 결합한 신성로마제국의 완벽한 정치적 기능과 유사하다. (214)
不二
바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입니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루터파라는 두 가지 기독교 신앙고백은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동등하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뒤로도 내용을 다듬어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칼뱅파를 세 번째 신앙고백으로 추가 인정했습니다. 이는 제후들의 권리를 인정한 합의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세 가지 신앙고백 안에서 국민 개개인이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합의였습니다.
농민전쟁과 30년 전쟁은 끔찍한 싸움이었지만, 그 결과는 일부 역사학자의 평가대로 신성로마제국의 궁극적 성취로 이어졌다. 종교의 차이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는 정치 단위가 탄생한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비교가 되지 않는 종교적 관용이었다. (247)
不二
두 판화가 유명한 이유는 뛰어난 제작기법 때문만이 아니다. 독일의 정반대돠는 면을 표현한 쌍둥이 자화상이란 의미를 얻으며 유명해졌다. 단호한 행동을 상징하는 기사와 내면을 들여다보며 명상에 잠긴 멜랑콜리아. 이처럼 미묘하고 복잡한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민족은 유럽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323)
不二
비틀은 절대 명품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독일 제품이 누려온 명성 하나는 공유했습니다. 바로 품질입니다. 50년대에는 생산 수량이 판매 수량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비틀이 잘 팔렸지만, 회사는 변함없이 품질관리에 매달렸습니다. 50년대 중반 회사 대표가 기술검사보고서를 검토하고 직원에게 아무개가 모처에서 발견한 잡음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만전을 기하라는 메모를 계속 날릴 정도였습니다. 회사의 입장은 간단했습니다. 아주 높은 품질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 우리에게 결점이란 있을 수 없다. 독일인이 이렇게 높은 품질에 성공의 희망을 거는 데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두 번의 패전으로 거의 전부를 잃은 경험과 일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두 차례의 패배에 대한 보상심리입니다. (355)
不二
남편에게 몇 차례 도움을 받으며 자연스레 알게 된 여자들이 있다. 나는 노동자들의 운명과 삶의 방식에 관련된 모든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처음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일에 마음이 끌렸을 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동정과 위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이 주된 동기였다. (395)
不二
집단에 가해진 범죄를 다룰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끝없이 쌓이고 되풀이되어 집단이 되었을 뿐, 그 안에는 언제나 각별한 개인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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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닐 맥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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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독일사 산책>,<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 총 67종 (모두보기)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이자 박물관계의 스타로 손꼽힌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태어났으며, 영국 런던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였다. 레딩 대학교에서 예술사와 건축사를 가르쳤고, 미술공예 잡지 〈벌링턴 매거진The Burlington Magazine〉의 편집인을 지냈다. 1987년부터 2002년까지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in London 관장을 맡았고, 2002년부터 2015년까지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 관장으로 일했다. 2010년에는 다양한 문화 예술 분야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게 영국 최고의 문화훈장인 메리트 훈장Orderof Merit을 받았다. 영국박물관장에서 은퇴한 닐 맥그리거는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베를린 궁전에 새로 들어설 훔볼트 포럼the Humboldt-Forum의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12개국 이상에서 번역 출간한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A History of the World in 100 Objects》와 《시끌벅적한 셰익스피어의 시대Shakespeare's Restless World》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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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김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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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펍헙번역그룹에서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좋은 책 발굴과 소개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 《중국의 조용한 침공》 《ESG와 세상을 읽는 시스템 법칙》 《저녁 식탁에서 지구를 생각하다》 《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 《기회의 법칙》 《사악한 소년》 《극한의 경험: 유발 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독일사 산책》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영국박물관과 BBC가 공동 기획한 역사 프로젝트
유럽사의 서문을 장식한 독일을 가다!
흔히 독일 하면 히틀러와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던 나라를 떠올린다. 혹은 무뚝뚝하고 딱딱한 독일 병정과 무서운 냉전시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이자 영국박물관장인 닐 맥그리거는 “독일은 최근의 시리아 난민처럼 혹독한 난민 시절을 겪었고 합의를 통해 작은 나라들을 이끌어온 느슨한 연합체”라고 말하며 독일의 건물과 물건, 사람과 장소를 통해 유럽사의 중심에 서 있는 독일사를 풀어낸다.
세계는 왜 독일에 주목하는가?
2015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세계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한 사람을 집중 조명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영국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프랑스의 대표적인 통신사 <AFP>,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스포트라이트가 향한 인물은 독일의 총리 메르켈이었다. 언론은 하나같이 메르켈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며 유로존 채무 위기와 시리아 난민 사태에 직면해 메르켈 총리가 보여준 리더십을 주요 업적으로 꼽았다. 이제 독일은 누가 뭐래도 경제, 정치 등에서도 유럽 대륙을 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나라이다.
하지만 역사의 시계를 100년만 되돌려도 독일의 현재 모습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러 역사의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지 않았던가. 그런 독일이 불과 반세기 만에 물리적, 정신적 폐허를 딛고 일어나 경제 강국이자 정치 리더가 되어 유럽 공동체를 앞장서 이끌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영국박물관과 BBC는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독일은 어떤 나라이고 독일인의 정체성에는 어떤 힘이 숨어 있는지 추적하였고, 영국박물관장이자 이 책의 저자인 닐 맥그리거는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보며 그 실마리를 발견한다.
“수도 한복판에 수치스러운 역사를 담아 기념비를 세우는 나라는 독일뿐이다.”(본문 43쪽)
저명한 정치 평론가 미하엘 슈튀르머(Michael Sturmer)의 말처럼 “오랫동안 독일에서 역사의 목적은 그런 일이 절대 재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부끄러운 역사조차 분명히 밝히고 이를 단호히 질책하며 미래로 이끄는 자세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국제사회가 수용하고, 그들에게 큰 역할을 맡긴 배경이었던 것이다.
독일 역사 인식의 출발점, 기념비
독일을 이해하기 위해 독일사 산책을 나선 저자는 우선 독일의 기념비에 주목한다. 독일사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 대륙이 혼란에 빠진 시기의 기록이 유럽 곳곳에 개선문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는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새긴 개선문을 파리에 세웠고, 영국은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 웰링턴의 승리를 기리는 개선문을 런던에 세웠다.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각국의 입장에서 세운 기념비이다. 물론 독일도 기념비를 세워 나폴레옹 전쟁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독일이 세운 기념비 중에서 바이에른 주의 도시 뮌헨에 세운 기념비는 파리나 런던의 기념비와는 다르다. 뮌헨 개선문은 ‘바이에른의 군대에게’라는 문구를 새겨 나폴레옹 전쟁 당시 바이에른 군대가 보여준 희생과 그들이 이룬 성취를 기념하고 있지만, 사실 바이에른의 군대는 전쟁 기간 대부분을 오히려 프랑스 편에 서서 같은 독일 민족을 공격하였고,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후에야 비로소 반(反)프랑스 진영에 가담하였다. 뮌헨 개선문에 담긴 승리에는 독일 민족에 대한 배신의 역사도 담겨 있는 셈이다.
지금은 같은 민족이라는 소속감이 강하지만, 1871년 통일되기 전까지 독일 민족에게는 공동의 목표 의식이 거의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큰 울타리 아래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자율적인 국가들로 나뉘어 근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 독일 내 국가들은 각자의 이익에 맞춰 때론 연합하고 때론 갈등하며 고유의 지역 역사를 써왔다. 때문에 프로이센의 굳건한 성장 발판을 마련하여 이후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대제도 프로이센에서는 영웅이었지만, 프로이센이 성장하는 데 좋은 먹잇감이 된 작센에서는 둘도 없는 악당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수세기에 걸쳐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형성한 다른 나라와 달리,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느슨한 연합체로 천 년을 보낸 독일 역사에서 단일한 민족서사는 결코 써내려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대신 오늘날의 독일인 대부분이 공유하는 독일의 업적과 상처를 씨줄과 날줄 삼아 현대 독일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한다.
건물과 물건, 인물과 장소에서 독일의 업적과 상처를 읽다
저자는 독일인 대부분이 공유하는 그들의 업적과 상처를 건물과 물건, 인물과 장소에서 세심하고 흥미롭게 읽어낸다. 그중 가장 오랜 물건은 구텐베르크 성경이다. 15세기에 나온 구텐베르크 성경은 근대 유럽 문화의 토대 중 하나를 제공하였는데, 그때가 독일이 세계사의 흐름에 처음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순간이다.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 가동 활자와 평압인쇄기가 일으킨 인쇄 혁명은 인류가 쌓은 지식을 널리 확산하는 데 기여하였지만, 이는 구텐베르크라는 특출한 개인의 능력이 만들어낸 결과는 아니다. 당시 역사 배경이 큰 역할을 하였다. 구텐베르크는 인쇄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면죄부를 인쇄하여 충당하였고, 구텐베르크의 후배 인쇄공들은 60년 후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는 반박문을 인쇄하여 종교개혁에 불을 붙였다. 흥미로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15세기 마인츠에서 인쇄한 구텐베르크 성경이 가장 오래된 물건이지만, 저자의 산책은 1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독일민족의 뿌리와 만나는 등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간다. 독일 서북부에 위치한 데트몰트 시 외곽의 토이토부르크 숲에서는 기원후 9년 로마제국의 침략에 맞서 독일 부족을 연합해 싸운 게르만 민족의 영웅 헤르만이 독일인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독일제국 황제가 만든 가짜 샤를마뉴 왕관을 통해 1,000년 넘게 서유럽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퉈온 프랑스와 독일의 외교사를 되짚는다. 그리고 뉘른베르크에서는 길드 체제에서 장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소개하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일으킨 경제 기적의 원동력을 추적하고,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남아 있는 프로이센 왕국과 뒤이은 독일제국의 흥망성쇠가 담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간다.
독일사 산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곳은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이다. 연방의회 의사당은 독일의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주도하여 통일을 이룬 독일제국의 의사당 건물로 화려하게 건축되었지만 황제와 비스마르크의 견제로 제 역할을 해보지도 못한 채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나치 정권 아래서는 방화로 훼손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때는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동서 베를린 분단으로 방치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1990년 재통일 이후 새로운 독일의 연방의회로 다시 태어나 의회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요동치는 독일의 역사
“독일?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못 찾겠습니다.”
이 질문은 외국인이 조각조각 나뉜 18세기 독일 지도를 들여다보며 헷갈려서 묻는 것이 아니다. 독일문학의 거장 괴테와 실러가 1796년에 공동으로 발표한 시집 《크세니엔Xenien》에 등장하는 질문이다. 괴테와 실러가 질문을 던진 18세기는 물론, 20세기에도 독일의 국경선은 쉼 없이 움직였고, 그 안에서 역사는 늘 요동쳤다. 청년 괴테가 독일 예술과 역사의 고유한 특징을 발견한 슈트라스부르크는 프랑스의 도시 스트라스부르가 되었고,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는 현재 러시아의 도시 칼리닌그라드이다. 끝없이 떠돈 국경선과 작은 국가들이 자기만의 역사를 써온 독일의 역사는 시간의 흐름을 좇는다고 해서 독일을 이해하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가 선별한 건물과 물건, 인물과 장소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역사의 고리들을 하나하나 풀어 가면 독일사의 주요 흐름은 물론 오늘날의 독일과 독일인을 이해할 수 있는 입체적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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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eday 201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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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어렵지 않다. 유물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이나 프로이센 처럼 이해하기 난해한 국가들을 알기 쉽게 잘 보여준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필자의 능력도 뛰어나고 수록된 사진자료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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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enz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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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문학 전공했으면서도 잘 몰랐던 독일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특히 주제별로 엮어서 읽는 데 부담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진도 잘 배치되어 있고요. 강력 추천합니다! 이런 좋은 책을 출간 결정한 출판사에도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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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sks239 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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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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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도 예쁘고, 편집도 좋고, 무엇보다 주제가 딱 마음에 든다.새로 이사간 동네 도서관에 2016년 신간인데도 구비가 되어 있어 얼마나 반갑던지.56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약간 기가 질렸는데 의외로 술술 잘 넘어간다.제목에 나온 산책이라는 단어에 잘 어울리는 편안한 수준이다.역사 뿐 아니라 예술가, 정치가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나오고 맥주나 소시지 같은 문화에 대해서도 같이 언급한다.독일은 보불전쟁 후 프로이센으로 통일된 1871년까지 수많은 공국으로 나눠져 있는 일종의 지방자치제 같은 나라였고, 나폴레옹의 침입을 계기로 민족주의 의식이 고취되었으며 근대는 하나의 독일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다.일찍이 중앙집권제를 확립한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선거후 전통을 갖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느슨한 연합체를 이룬 독일이 어떻게 하나의 독일로 결집될 수 있었을까?독일인을 정의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는 무엇인가?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가 독일어라고 정의한다.스위스 등지를 포함하는 고지 독일어와 네덜란드어 등을 포함하는 저지 독일어 사용자 모두를 독일인으로 규정한 것이다.위대한 독일인을 모아 놓은 발할라 신전에는 흔히 프랑스인으로 알고 있는 샤를마뉴 대제부터 시작해, 루벤스, 반 다이크 같은 플랑드르인까지 모셔져 있다.유대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최근에서야 아인슈타인 등이 들어갔다고 한다.발할라 신전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오랜 시간 동안 지방분권제로 존재했던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전환하면서 정체성을 갖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2차 대전을 일으키고 6백만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점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놀랍다.여전히 전범인 천황을 모시고 있는 일본과 매우 비교되는 대목이다.
벤츠나 폭스바겐 같은 자동차로 대표되는 독일의 공예 기술 전통도 인상깊게 봤다.
현대 디자인의 효시라는 바우하우스가 왜 독일에서 만들어졌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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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 2016-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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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의 최우방국들까지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했다고 폭로했다. 이를 두고 영국과 독일의 반응이 달랐는데, 이는 감시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강력한지 분명히 보여준 사례였다. 영국의 공식 반응은 통상적인 수준의 적개심과 경멸이었으나, 독일은 `공공의 이름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공공에 역행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대중에게 알리고 싶았다`는 스노든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엄청난 지지를 보냈다. 예를 들어 라인지방의 마인츠 시에서는 ... 축제를 벌이는데, 2014년 축제에서 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한 영웅이 스노든 인형이었다. 독일이 분명하게 소리 높여 스노든을 찬양했던 것이다. 그리고 2014년 1월 29일 메르켈 총리는 연방 하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국의 감시 행위에 대해 이처럼 신념에 가득 찬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독일의 정치 지도자나 동독에서 자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76)
그렇다고 볼프가 궁지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볼프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망각이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그런 기억을 억눌러서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정부의 주장에 속아 넘어가 무조건 따를 수 있을까? 볼프는 나치 치하에서 유년을 보낸 자신이 모든 방법으로 국가를 지원하려는 욕망과 복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결론지었다. 그 세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도 집단 순응에 적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프는 부끄러운 기억을 억누르는 정신의 능력을 인정했을 뿐, 해명할 수는 없었다. (78)
그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면서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보헤미아에 민족주의적 열망이 소용돌이칠 때까지 200년간 프라하에서 독일인의 영향력은 변함없이 확고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이 붕괴하며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변했다. 체코의 민족주의 정서가 계속 커졌고, 500년간 공동생활을 하며 혼인 관계를 맺어온 프라하와 보헤미아 주민들이 단호히 독일어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1848년에서 1880년 사이 프라하는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시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도시로 변했다. 1882년 새로운 프라하 시장이 취임식에서 "100개의 첨탑이 있고, 전성기를 맞은 소중한 `슬라브인`의 프라하"라고 연설했을 때, 최후까지 남아 있던 독일인 시의원들이 이에 항의하며 시의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다음 해 카프카가 태어났다. (93)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카프카를 규정하는 것은 독일어권 프라하의 특별한 환경이다. 1883년에 태어난 카프카가 자라면서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도시 프라하는 독일인이 철수할 뿐만 아니라 종말적으로 감소하던 도시였다. ... 카프카는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해묵은 독일의 정체성을 지우기로 결정한 도시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카프카의 소설 몇 작품에 삽화를 그린 한스 프로니우스...의 카프카 초상화를 보면 불안하고, 경계심 가득하며, 소심한 한 남자가 보인다.
카프카는 1890년대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젊은이 대부분이 그렇듯 이중으로 이방인이었다. 카프카가 다닌 독일 중등학교 김나지움의 학생 대부분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다. 300년간 가톨릭을 독실하게 믿은 국가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고 독일 유산을 버리고 있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독일어 사용자였으니, 카프카는 태어나면서부터 현대 정치 구조의 억압과 소외를 경험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95)
"18세기 초 유럽의 많은 나라가 이런 식으로 신성로마제국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덴마크, 프로이센. 스웨덴,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 제국 외부에서 왕관을 쓴 통치자는 모두 기능적으로 밀접하게 제국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지배 가문도 독일 가문이었습니다. 결국 제국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정치 집합체가 형성된 것이죠. 제국의 안보가 유럽 전체의 안보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이런 방식이 아주 중요한 이유는 ... 동시에 나머지 유럽이 독일에 일정한 질서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 독일. 놀랄 만큼 현대적인 견해로 보인다. 지역별 차이가 두드러지고 중앙 집권을 꺼리는 하나의 독일이 현재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인 것과 같다. 요아킴 웨일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관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121)
루터의 대화와 편지를 보면 그가 언어를 만들면서 작센의 관공서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작센은 독일 중동부에 위치해 방언이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주경계선이 있었는데,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를 나누는 언어 경계와 같습니다. 어린 시절 루터는 부모를 따라 이 경계선을 넘나들며 두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에 모두 능통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실제 저지독일어와 고지독일어로 청중에게 연설을 하고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독일어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뜻밖의 행운입니다. (137)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인은 읽고 쓰는 능력이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 중에서 독일은 문맹률이 낮았다. 독일은 아무리 작은 국가라도 교육을 담당하는 관료가 있었다.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 시장과 박람회 덕분에 수백 개가 넘는 거래소에서 글을 읽고 쓰는 상인 계급이 활동했고, 이들이 한 권에 1굴덴씩 하는 루터 성경을 부담 없이 구입했다. 1굴덴은 학교 교사의 두 달치 월급이었고, 시장에 나온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이었다. 다섯 집 중 한 집이 루터 성경을 구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이 루터 성경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재단사, 제화공은 물론 독일어를 조금 배워 겨우 읽을 정도인 평민과 여자들까지도 진리가 솟는 샘이나 되는 양 열심히 루터의 성경을 읽는다. 책을 가슴에 품고 외우는 사람도 있다." (142)
하지만 독일인은 늘 그리스인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독일인은 자신들이 프랑스인이나 로마인보다 군사력은 약할지 모르지만, 그리스인처럼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독일인은 그리스의 다원성도 동일시했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가 다양하게 많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국가도 다양하게 많았으니까요. 독일인은 그리스인이 자유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믿었고, 자유에 대한 애정 또한 특별히 독일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발할라의 건축 양식으로 그리스 양식을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선택이었습니다. (197)
옆에서 지켜보는 영국인에게 독일은 놀랄 정도로 다양한 나라이다. 지역 특산물이 수세기에 걸쳐 지역문화를 대변한다. 서로 다른 맥주와 지역 소시지는 모두 500년 전부터 광범위한 규제에 따라 관리되었다. 드골 장군이 치즈 종류만 246가지인 프랑스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불평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드골 장군은 소시지 종류가 더 많은 독일을 통제하지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흔히 그렇듯 이렇게 서로 다른 맥주와 소시지들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국가 구조 안에 포함된다. 어떻게 보면 맥주와 소시지는 5장에 소개한 동전과 유사하며, 엄청난 지역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천 년 동안이나 독일 대부분과 중앙 유럽을 하나로 결합한 신성로마제국의 완벽한 정치적 기능과 유사하다. (214)
바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입니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루터파라는 두 가지 기독교 신앙고백은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동등하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뒤로도 내용을 다듬어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칼뱅파를 세 번째 신앙고백으로 추가 인정했습니다. 이는 제후들의 권리를 인정한 합의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세 가지 신앙고백 안에서 국민 개개인이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합의였습니다.
농민전쟁과 30년 전쟁은 끔찍한 싸움이었지만, 그 결과는 일부 역사학자의 평가대로 신성로마제국의 궁극적 성취로 이어졌다. 종교의 차이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는 정치 단위가 탄생한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비교가 되지 않는 종교적 관용이었다. (247)
두 판화가 유명한 이유는 뛰어난 제작기법 때문만이 아니다. 독일의 정반대돠는 면을 표현한 쌍둥이 자화상이란 의미를 얻으며 유명해졌다. 단호한 행동을 상징하는 기사와 내면을 들여다보며 명상에 잠긴 멜랑콜리아. 이처럼 미묘하고 복잡한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민족은 유럽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323)
비틀은 절대 명품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독일 제품이 누려온 명성 하나는 공유했습니다. 바로 품질입니다. 50년대에는 생산 수량이 판매 수량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비틀이 잘 팔렸지만, 회사는 변함없이 품질관리에 매달렸습니다. 50년대 중반 회사 대표가 기술검사보고서를 검토하고 직원에게 아무개가 모처에서 발견한 잡음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만전을 기하라는 메모를 계속 날릴 정도였습니다. 회사의 입장은 간단했습니다. 아주 높은 품질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 우리에게 결점이란 있을 수 없다. 독일인이 이렇게 높은 품질에 성공의 희망을 거는 데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두 번의 패전으로 거의 전부를 잃은 경험과 일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두 차례의 패배에 대한 보상심리입니다. (355)
남편에게 몇 차례 도움을 받으며 자연스레 알게 된 여자들이 있다. 나는 노동자들의 운명과 삶의 방식에 관련된 모든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처음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일에 마음이 끌렸을 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동정과 위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이 주된 동기였다. (395)
집단에 가해진 범죄를 다룰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끝없이 쌓이고 되풀이되어 집단이 되었을 뿐, 그 안에는 언제나 각별한 개인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446)
놀라운 것은 `페허부인들`이 독일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든 속도이다. 영국에서는 1960년대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는 피폭지들을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970년대에도 그런 곳에서 TV연속극을 촬영할 정도였다. 독일은 서베를린의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처럼 반파된 몇몇 건물을 일부러 복고하지 않고 기념비로 삼았는데, 제3제국의 범죄와 건물보다 더 큰 대가를 치근 국민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을 제외한 독일, 특히 서독의 많은 부분은 1950년대 후반에 이미 복구가 끝나 있었다. 독일인들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지 않으려면 부단한 노동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하다. (488)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모든 동독인에게 서독을 방문할 `환영금...`으로 100마르크씩 지급되었다. 환영금으로만 거의 40억 마르크가 지출되었다. 하지만 이는 헬무트 슐레징어의 지적처럼 두 나라의 통화를 통합하는 데 필요한 비용에 비하면 하찮은 금액이었다. 은행과 경제학자들은 2대 1의 비율로 오스트마르크와 독일 마르크를 교환하라고 제안했다. 두 나라의 경제력 차이에 비해 아주 후하게 책정한 비율이었다. 하지만 헬무트 콜 총리의 생각은 달랐다. 콜 총리는 오스트마르크를 실제보다 훨씬 높은 가치로 환전하기로 결정했다. 경제가 아닌 정치적 결정이었다. 그 어떤 것도 동독 주민의 재정을 파탄내고, 재통일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콜 총리가 임금과 이자, 임차료를 1대 1의 비율로 교환하라고 발표한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495)
유대인은 대체로 보호받는 주민이었고, 유용한 사람들도 인정받았습니다. 유대인과의 인종 통합은 없었지만, 프랑크푸르트 지구 같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곤 유대인들이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거주지구에서 살지 않는다는 면에서 공간 통합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독일의 반유대주의가 15세기 유대인 추방이나 1540년대 루터의 반유대적인 비판에서 출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19세기 근대 독일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비극의 역사적 선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홀로코스트가 독일 역사의 중세 후반에 뿌리를 둔 것은 절대 아닙니다. (506)
우리가 일련의 사건들을 인지하는 동안, 천사는 쉼 없이 잔해를 쌓아올려 그의 발 앞으로 내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파라본다. 천사는 머물러, 죽은 자들을 깨워 일으키고 부서진 것들을 다시 온전하게 복구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서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그 폭풍이 천사의 두 날개를 너무 거세게 밀어붙여 천사는 더는 날개를 접을 수 없다. 폭풍은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로 천사를 꼼짝 못하게 떠밀고, 천사 앞의 잔해 더미는 하늘로 치솟는다. 이 폭풍을 우리는 진보라고 부른다.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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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edoro 20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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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martedi_/223400235113
독일의 완전 처음이 아닌
“독일”이란 정체성이 서서히 생성되기 시작한
신성로마제국부터 시작해서
독일 통일을 처음으로 달성한 제2제국(독일제국; 빌헬름 1세, 비스마르크 수상),
독일 정체성과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제3제국(나치 독일),
그리고 동서독, 재통일을 이룩한 현대 독일까지의 역사를
다양한 박물관의 각종 유물과 기록, 연설, 문학작품, 철학자/철학 이론 등으로
보완하며 설명하는 책이다.
'독일사 산책'이라는 이름 답게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이면서도
내용이나 스케일 면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었고
독일 역사의 스케치를 그리는데 도움이 되며
뭔가 내 머릿속에 있던 스케치를 더 정밀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었다.
유물 사진이 모두 고화질이었고
역사를 설명하면서 고른 그림 작품이나 주요 인물 설명이 감각 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작가가 역시 미술사학자(이자 전 박물관장)였다.
책이 좀 두꺼워서 (약간 벽돌 모드) 긴장을 했으나
내용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았다.
또한 독일 역사를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훑어볼 수 있어서 아주 좋은 책이었다.
입문용으로도 좋고 심화용으로도 좋고
안의 사진과 자료도 질적으로 좋아서 역시 소장하고픈 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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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옮긴이 서문 | 책으로 여는 독일 역사문화 전시회
지도로 읽는 독일사 ①~⑧
시작하며 | 역사를 기억하는 그들만의 방식
1부 요동치는 국경, 모자이크 제국을 낳다
1장 역사의 증인, 브란덴부르크 문
분단의 상징이자 되찾은 자유의 상징 | 서쪽으로 전승기념탑 | 동쪽으로 베를린 궁전 |
전쟁에서 월드컵까지,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다
2장 동서로 나누어진 하늘
동독을 탈출하다 사살된 사람들 | 또 다른 탈출루트, 발트 해 | 프리드리히슈트라세 역에서의 눈물의 이별 | 비밀경찰의 감시, 그리고 기억 | 국민 작가 크리스타 볼프의 침묵
3장 잃어버린 수도들
이제는 독일이 아닌 도시들 | 칸트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 |
호박 방과 함께 사라진 왕국 |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
4장 뺏고 빼앗긴 도시
독일 땅 슈트라스부르크 | 프랑스 땅이 된 슈트라스부르크 |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열광한 괴테 | 스트라스부르의 숙제
5장 신성로마제국의 분권 정치
하나의 군주, 두 개의 세계 | 부분과 요소가 모여 전체를 이루다 |
화폐 주조권의 소유와 상속 | 타협으로 움직이는 정치 체제
2부 독일의 상상력, 국가 정체성을 세우다
6장 표준 독일어의 탄생
너무 많은 독일어 방언 | 마르틴 루터,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다 | 루터 성경의 등장 |
대중과 소통하는 성경 | 루터의 언어, 표준 독일어가 되다
7장 나폴레옹에 맞선 백설 공주
숲에 담긴 독일의 숙명 | 그림 형제, 동화로 민중의 정체성을 재건하다 |
참나무와 독일인의 기질 | 그림과 동화로 고취시킨 애국심 | 21세기의 영웅으로 거듭나다
8장 괴테 아래 한 민족
괴테를 사랑한 독일 | 유럽을 뒤흔든 베스트셀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한 세계 시민 | 《파우스트》에 독일을 담다
9장 영웅의 전당, 발할라
굴욕의 나폴레옹 치하 | 독일 영웅들의 흉상을 만들다 | 초대받은 자, 초대받지 못한 자 |
배제된 마르틴 루터 | 놀라운 건축 양식
10장 맥주와 소시지
가장 독일다운 대중 축제, 옥토버페스트 | 독일맥주순수령, 보리· 호프·물로만 만들라 |
까다로운 소시지 제조 전통 | 정치 회합은 맥주홀에서
3부 집요한 과거, 독일인을 하나로 묶다
11장 프-독의 샤를마뉴 쟁탈전
황제의 왕관 | 샤를마뉴의 정체 | 나폴레옹과 또 다른 황제의 탄생 |
샤를마뉴 유산 상속 전쟁 | 최후의 반전
12장 종교개혁과 독일농민전쟁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수용한 신성로마제국 | 천재 조각가 리멘슈나이더의 위기 |
피바다로 끝난 독일농민전쟁 | 권력자의 억압에 맞섰던 예술가의 복원
13장 한자동맹
가장 오래된 상업 네트워크 | 어떤 초상화 | 느슨한 연합, 독일적인 동맹 |
서서히 다가온 종말
14장 철의 나라 프로이센
사치하지 않는 나라 | 신분 차별이 없는 철십자 훈장 | 루이제 왕비의 협상과 징벌 조약 |
십자가 언덕의 철제 기념비
15장 1848년에 갈라진 길
동요와 혁명의 시대 | 새로운 국기와 국가를 만들다 | 마르크스와 새로운 길 |
화해할 수 없는 둘을 포용하다
4부 독일제 신화, 라인 강의 기적을 만들다
16장 인쇄기로 시작되다
구텐베르크와 인쇄 혁명 | 15세기 마인츠와 책 만들기 | 영리한 사업가, 구텐베르크 |
인쇄 혁명이 독일에서 일어난 이유
17장 유럽이 사랑한 독일의 국민 미술가
‘로고’의 발명 |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가다 | 뒤러의 판화 두 점, 쌍둥이 자화상 |
가장 유명한 판화 주제, 코뿔소
18장 작센의 하얀 금, 도자기
도자기 병에 걸린 왕 | 도자기 제조비법을 알아내다 |
작센의 새로운 무기 | 도자기 동물원 제작 | 전쟁배상금의 희생양
19장 금속 가공의 명인
폭스바겐 ‘비틀’의 엔진음 | 길드의 장인 만들기 | 유럽의 모든 물건은 독일로 통한다 |
대량생산 시대와 길드의 몰락 | 나치의 ‘독일 동력화’ 정책 |
독일차의 원형 ‘비틀’, 경제 기적을 일구다
20장 현대 건축과 디자인의 원형, 바우하우스
국립조형학교의 탄생 | 디자인으로 균형 잡힌 밝은 세상을 꿈꾸다 |
나치에 의해 폐교당하다 | 바우하우스의 후계자, 이케아
5부 유례없는 재앙, 몰락을 부르다
21장 비스마르크의 철혈 정치
나폴레옹 3세 물리치고 독일 제2제국 출범하다 | 철의 수상, 비스마르크의 등장 |
부국강병책과 통일 | 삼중 초상화 | 빌헬름 1세의 죽음과 해임
22장 목격자의 고통
소리 없는 증언 | 판화가 콜비츠와 ‘직공들의 반란’ | 끔찍한 예언 |
산 자에서 죽은 자에게로 | 반성 그리고 용서
23장 통화 위기
물자부족 시대 | 비상화폐에 담긴 생활상 | 전쟁배상금과 인플레이션 |
경제불황이 뿌린 비극의 씨앗
24장 나치의 퇴폐 추방 운동
도자기 디자이너 그레테 막스의 추방 | ‘독일다운’ 미를 찾아라 | 퇴폐 예술 전시회 |
영구불변의 유대인 | 고통 속에 살아남은 그레테 막스의 도자기
25장 부헨발트 수용소 정문
너도밤나무 숲의 이면 | 각자 제 몫에 맞게 | 수용소 정문 서체에 담긴 의미 |
서로 다른 부헨발트의 기억
6부 새로운 독일, 역사를 짊어지다
26장 쫓겨난 독일인
1,500만 명의 독일 난민 | 잔혹한 이주 | 손수레와 억척어멈
27장 파괴된 독일의 재건
재앙이 지나간 자리 | 맨손으로 재건에 나선 폐허부인들 | 마르크 도입, 이중 통화 경제의 시작 | 마르크 대 오스트마르크의 경쟁 | 독일의 경제 통일 | 마르크 대신 유로
28장 독일로 이주한 유대인들
새로운 독일 유대인 | 왕실 비호 유대인 로트실트 | 오펜바흐 공동체
29장 바를라흐의 천사
추모 행사 없는 독일 | 전쟁 기념비 제작을 의뢰받다 |
전쟁 기념비의 새로운 유형 | 천사의 귀환
30장 새로운 독일
추모비와 의사당 | 140년 역사의 목격자를 옆에 두고 |
베를린, 건축으로 꿈꾸는 도시 | 다시 ‘문화국’을 향하여
마치며 | “역사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도 내다본다”
감사의 글
도판 출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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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현재 독일에서 국가의 공공 행사를 치르는 광장이 있다면, 브란덴부르크 문 주변이다.
밑줄긋기
P.424bloodmess73
인플레이션 열기가 뜨거웠고, 독일은광기에 빠진 상황이었다. 그러던 1922년 6월 라테나우가 암살당했다. 그리고 마르크화는 1달러에 300마르크로 가치가 하락했다. 한 달 후 1년배상금 지급기일이 되자 1달러에 500마르크까지 가치가 떨어졌고, 27배상금 지급기일인 10월 말에는 1달러에 4,500마르크로 무너져내렸다결국 1923년 4월 하이퍼인플레이션의 뇌관이 터져버렸다. 그때 나온 지폐 이야기를 꺼내려니 지금도 오싹하다. 1,000마르크, 1만 마르크, 10민마르크, 100만 마르크 지폐, 그리고 금액을 말로 표기한 십억 마르크
‘천억 마르크 지폐, 1923년 11월 마르크화의 환율은 1달러에 12조 마르크였다. 당시 베를린 주재 영국대사관 직원이 1파운드 당 마르크화의 숫자가 태양까지의 거리와 맞먹는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해 말 달걀 한개의 가격은 1918년 가격의 5,000억 배였다. 사람들이 수레에 지폐를 신고 다니던 모습은 아직도 유명하다. 물건을 사러 가는 모습이 아니었다.
쓸모없는 현금을 은행으로 가져가 훨씬 더 큰 고액권으로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중에 유통되던 통화량은1921년 1,200억 마르크에서 2년 후 거의 5억조 마르크에 육박했다. 가늠할 수 없는 수치이다. 5억 마르크 지폐 한 장으로 겨우 빵 한 덩어리를살 수 있었다.
不二
2013년 6월,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의 최우방국들까지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했다고 폭로했다. 이를 두고 영국과 독일의 반응이 달랐는데, 이는 감시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강력한지 분명히 보여준 사례였다. 영국의 공식 반응은 통상적인 수준의 적개심과 경멸이었으나, 독일은 `공공의 이름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공공에 역행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대중에게 알리고 싶았다`는 스노든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엄청난 지지를 보냈다. 예를 들어 라인지방의 마인츠 시에서는 ... 축제를 벌이는데, 2014년 축제에서 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한 영웅이 스노든 인형이었다. 독일이 분명하게 소리 높여 스노든을 찬양했던 것이다. 그리고 2014년 1월 29일 메르켈 총리는 연방 하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국의 감시 행위에 대해 이처럼 신념에 가득 찬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독일의 정치 지도자나 동독에서 자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76)
不二
그렇다고 볼프가 궁지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볼프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망각이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그런 기억을 억눌러서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정부의 주장에 속아 넘어가 무조건 따를 수 있을까? 볼프는 나치 치하에서 유년을 보낸 자신이 모든 방법으로 국가를 지원하려는 욕망과 복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결론지었다. 그 세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도 집단 순응에 적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프는 부끄러운 기억을 억누르는 정신의 능력을 인정했을 뿐, 해명할 수는 없었다. (78)
不二
그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면서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보헤미아에 민족주의적 열망이 소용돌이칠 때까지 200년간 프라하에서 독일인의 영향력은 변함없이 확고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이 붕괴하며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변했다. 체코의 민족주의 정서가 계속 커졌고, 500년간 공동생활을 하며 혼인 관계를 맺어온 프라하와 보헤미아 주민들이 단호히 독일어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1848년에서 1880년 사이 프라하는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시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도시로 변했다. 1882년 새로운 프라하 시장이 취임식에서 ˝100개의 첨탑이 있고, 전성기를 맞은 소중한 `슬라브인`의 프라하˝라고 연설했을 때, 최후까지 남아 있던 독일인 시의원들이 이에 항의하며 시의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다음 해 카프카가 태어났다. (93)
不二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카프카를 규정하는 것은 독일어권 프라하의 특별한 환경이다. 1883년에 태어난 카프카가 자라면서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도시 프라하는 독일인이 철수할 뿐만 아니라 종말적으로 감소하던 도시였다. ... 카프카는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해묵은 독일의 정체성을 지우기로 결정한 도시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카프카의 소설 몇 작품에 삽화를 그린 한스 프로니우스...의 카프카 초상화를 보면 불안하고, 경계심 가득하며, 소심한 한 남자가 보인다.
카프카는 1890년대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젊은이 대부분이 그렇듯 이중으로 이방인이었다. 카프카가 다닌 독일 중등학교 김나지움의 학생 대부분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다. 300년간 가톨릭을 독실하게 믿은 국가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고 독일 유산을 버리고 있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독일어 사용자였으니, 카프카는 태어나면서부터 현대 정치 구조의 억압과 소외를 경험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95)
不二
˝18세기 초 유럽의 많은 나라가 이런 식으로 신성로마제국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덴마크, 프로이센. 스웨덴,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 제국 외부에서 왕관을 쓴 통치자는 모두 기능적으로 밀접하게 제국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지배 가문도 독일 가문이었습니다. 결국 제국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정치 집합체가 형성된 것이죠. 제국의 안보가 유럽 전체의 안보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이런 방식이 아주 중요한 이유는 ... 동시에 나머지 유럽이 독일에 일정한 질서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 독일. 놀랄 만큼 현대적인 견해로 보인다. 지역별 차이가 두드러지고 중앙 집권을 꺼리는 하나의 독일이 현재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인 것과 같다. 요아킴 웨일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관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121)
不二
루터의 대화와 편지를 보면 그가 언어를 만들면서 작센의 관공서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작센은 독일 중동부에 위치해 방언이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주경계선이 있었는데,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를 나누는 언어 경계와 같습니다. 어린 시절 루터는 부모를 따라 이 경계선을 넘나들며 두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에 모두 능통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실제 저지독일어와 고지독일어로 청중에게 연설을 하고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독일어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뜻밖의 행운입니다. (137)
不二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인은 읽고 쓰는 능력이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 중에서 독일은 문맹률이 낮았다. 독일은 아무리 작은 국가라도 교육을 담당하는 관료가 있었다.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 시장과 박람회 덕분에 수백 개가 넘는 거래소에서 글을 읽고 쓰는 상인 계급이 활동했고, 이들이 한 권에 1굴덴씩 하는 루터 성경을 부담 없이 구입했다. 1굴덴은 학교 교사의 두 달치 월급이었고, 시장에 나온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이었다. 다섯 집 중 한 집이 루터 성경을 구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이 루터 성경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재단사, 제화공은 물론 독일어를 조금 배워 겨우 읽을 정도인 평민과 여자들까지도 진리가 솟는 샘이나 되는 양 열심히 루터의 성경을 읽는다. 책을 가슴에 품고 외우는 사람도 있다.˝ (142)
不二
하지만 독일인은 늘 그리스인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독일인은 자신들이 프랑스인이나 로마인보다 군사력은 약할지 모르지만, 그리스인처럼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독일인은 그리스의 다원성도 동일시했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가 다양하게 많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국가도 다양하게 많았으니까요. 독일인은 그리스인이 자유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믿었고, 자유에 대한 애정 또한 특별히 독일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발할라의 건축 양식으로 그리스 양식을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선택이었습니다. (197)
不二
옆에서 지켜보는 영국인에게 독일은 놀랄 정도로 다양한 나라이다. 지역 특산물이 수세기에 걸쳐 지역문화를 대변한다. 서로 다른 맥주와 지역 소시지는 모두 500년 전부터 광범위한 규제에 따라 관리되었다. 드골 장군이 치즈 종류만 246가지인 프랑스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불평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드골 장군은 소시지 종류가 더 많은 독일을 통제하지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흔히 그렇듯 이렇게 서로 다른 맥주와 소시지들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국가 구조 안에 포함된다. 어떻게 보면 맥주와 소시지는 5장에 소개한 동전과 유사하며, 엄청난 지역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천 년 동안이나 독일 대부분과 중앙 유럽을 하나로 결합한 신성로마제국의 완벽한 정치적 기능과 유사하다. (214)
不二
바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입니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루터파라는 두 가지 기독교 신앙고백은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동등하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뒤로도 내용을 다듬어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칼뱅파를 세 번째 신앙고백으로 추가 인정했습니다. 이는 제후들의 권리를 인정한 합의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세 가지 신앙고백 안에서 국민 개개인이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합의였습니다.
농민전쟁과 30년 전쟁은 끔찍한 싸움이었지만, 그 결과는 일부 역사학자의 평가대로 신성로마제국의 궁극적 성취로 이어졌다. 종교의 차이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는 정치 단위가 탄생한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비교가 되지 않는 종교적 관용이었다. (247)
不二
두 판화가 유명한 이유는 뛰어난 제작기법 때문만이 아니다. 독일의 정반대돠는 면을 표현한 쌍둥이 자화상이란 의미를 얻으며 유명해졌다. 단호한 행동을 상징하는 기사와 내면을 들여다보며 명상에 잠긴 멜랑콜리아. 이처럼 미묘하고 복잡한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민족은 유럽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323)
不二
비틀은 절대 명품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독일 제품이 누려온 명성 하나는 공유했습니다. 바로 품질입니다. 50년대에는 생산 수량이 판매 수량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비틀이 잘 팔렸지만, 회사는 변함없이 품질관리에 매달렸습니다. 50년대 중반 회사 대표가 기술검사보고서를 검토하고 직원에게 아무개가 모처에서 발견한 잡음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만전을 기하라는 메모를 계속 날릴 정도였습니다. 회사의 입장은 간단했습니다. 아주 높은 품질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 우리에게 결점이란 있을 수 없다. 독일인이 이렇게 높은 품질에 성공의 희망을 거는 데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두 번의 패전으로 거의 전부를 잃은 경험과 일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두 차례의 패배에 대한 보상심리입니다. (355)
不二
남편에게 몇 차례 도움을 받으며 자연스레 알게 된 여자들이 있다. 나는 노동자들의 운명과 삶의 방식에 관련된 모든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처음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일에 마음이 끌렸을 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동정과 위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이 주된 동기였다. (395)
不二
집단에 가해진 범죄를 다룰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끝없이 쌓이고 되풀이되어 집단이 되었을 뿐, 그 안에는 언제나 각별한 개인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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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닐 맥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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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독일사 산책>,<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 총 67종 (모두보기)
영국을 대표하는 미술사학자이자 박물관계의 스타로 손꼽힌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태어났으며, 영국 런던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였다. 레딩 대학교에서 예술사와 건축사를 가르쳤고, 미술공예 잡지 〈벌링턴 매거진The Burlington Magazine〉의 편집인을 지냈다. 1987년부터 2002년까지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in London 관장을 맡았고, 2002년부터 2015년까지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 관장으로 일했다. 2010년에는 다양한 문화 예술 분야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게 영국 최고의 문화훈장인 메리트 훈장Orderof Merit을 받았다. 영국박물관장에서 은퇴한 닐 맥그리거는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인 베를린 궁전에 새로 들어설 훔볼트 포럼the Humboldt-Forum의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12개국 이상에서 번역 출간한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A History of the World in 100 Objects》와 《시끌벅적한 셰익스피어의 시대Shakespeare's Restless World》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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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김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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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펍헙번역그룹에서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좋은 책 발굴과 소개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 《중국의 조용한 침공》 《ESG와 세상을 읽는 시스템 법칙》 《저녁 식탁에서 지구를 생각하다》 《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 《기회의 법칙》 《사악한 소년》 《극한의 경험: 유발 하라리의 전쟁 문화사》 《독일사 산책》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영국박물관과 BBC가 공동 기획한 역사 프로젝트
유럽사의 서문을 장식한 독일을 가다!
흔히 독일 하면 히틀러와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던 나라를 떠올린다. 혹은 무뚝뚝하고 딱딱한 독일 병정과 무서운 냉전시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이자 영국박물관장인 닐 맥그리거는 “독일은 최근의 시리아 난민처럼 혹독한 난민 시절을 겪었고 합의를 통해 작은 나라들을 이끌어온 느슨한 연합체”라고 말하며 독일의 건물과 물건, 사람과 장소를 통해 유럽사의 중심에 서 있는 독일사를 풀어낸다.
세계는 왜 독일에 주목하는가?
2015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세계 주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한 사람을 집중 조명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영국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프랑스의 대표적인 통신사 <AFP>,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스포트라이트가 향한 인물은 독일의 총리 메르켈이었다. 언론은 하나같이 메르켈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며 유로존 채무 위기와 시리아 난민 사태에 직면해 메르켈 총리가 보여준 리더십을 주요 업적으로 꼽았다. 이제 독일은 누가 뭐래도 경제, 정치 등에서도 유럽 대륙을 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나라이다.
하지만 역사의 시계를 100년만 되돌려도 독일의 현재 모습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러 역사의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지 않았던가. 그런 독일이 불과 반세기 만에 물리적, 정신적 폐허를 딛고 일어나 경제 강국이자 정치 리더가 되어 유럽 공동체를 앞장서 이끌고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영국박물관과 BBC는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독일은 어떤 나라이고 독일인의 정체성에는 어떤 힘이 숨어 있는지 추적하였고, 영국박물관장이자 이 책의 저자인 닐 맥그리거는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보며 그 실마리를 발견한다.
“수도 한복판에 수치스러운 역사를 담아 기념비를 세우는 나라는 독일뿐이다.”(본문 43쪽)
저명한 정치 평론가 미하엘 슈튀르머(Michael Sturmer)의 말처럼 “오랫동안 독일에서 역사의 목적은 그런 일이 절대 재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부끄러운 역사조차 분명히 밝히고 이를 단호히 질책하며 미래로 이끄는 자세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국제사회가 수용하고, 그들에게 큰 역할을 맡긴 배경이었던 것이다.
독일 역사 인식의 출발점, 기념비
독일을 이해하기 위해 독일사 산책을 나선 저자는 우선 독일의 기념비에 주목한다. 독일사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 대륙이 혼란에 빠진 시기의 기록이 유럽 곳곳에 개선문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는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새긴 개선문을 파리에 세웠고, 영국은 나폴레옹에 맞서 싸운 웰링턴의 승리를 기리는 개선문을 런던에 세웠다.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각국의 입장에서 세운 기념비이다. 물론 독일도 기념비를 세워 나폴레옹 전쟁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독일이 세운 기념비 중에서 바이에른 주의 도시 뮌헨에 세운 기념비는 파리나 런던의 기념비와는 다르다. 뮌헨 개선문은 ‘바이에른의 군대에게’라는 문구를 새겨 나폴레옹 전쟁 당시 바이에른 군대가 보여준 희생과 그들이 이룬 성취를 기념하고 있지만, 사실 바이에른의 군대는 전쟁 기간 대부분을 오히려 프랑스 편에 서서 같은 독일 민족을 공격하였고,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후에야 비로소 반(反)프랑스 진영에 가담하였다. 뮌헨 개선문에 담긴 승리에는 독일 민족에 대한 배신의 역사도 담겨 있는 셈이다.
지금은 같은 민족이라는 소속감이 강하지만, 1871년 통일되기 전까지 독일 민족에게는 공동의 목표 의식이 거의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큰 울타리 아래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자율적인 국가들로 나뉘어 근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면서 독일 내 국가들은 각자의 이익에 맞춰 때론 연합하고 때론 갈등하며 고유의 지역 역사를 써왔다. 때문에 프로이센의 굳건한 성장 발판을 마련하여 이후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대제도 프로이센에서는 영웅이었지만, 프로이센이 성장하는 데 좋은 먹잇감이 된 작센에서는 둘도 없는 악당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수세기에 걸쳐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형성한 다른 나라와 달리,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느슨한 연합체로 천 년을 보낸 독일 역사에서 단일한 민족서사는 결코 써내려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대신 오늘날의 독일인 대부분이 공유하는 독일의 업적과 상처를 씨줄과 날줄 삼아 현대 독일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한다.
건물과 물건, 인물과 장소에서 독일의 업적과 상처를 읽다
저자는 독일인 대부분이 공유하는 그들의 업적과 상처를 건물과 물건, 인물과 장소에서 세심하고 흥미롭게 읽어낸다. 그중 가장 오랜 물건은 구텐베르크 성경이다. 15세기에 나온 구텐베르크 성경은 근대 유럽 문화의 토대 중 하나를 제공하였는데, 그때가 독일이 세계사의 흐름에 처음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순간이다.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 가동 활자와 평압인쇄기가 일으킨 인쇄 혁명은 인류가 쌓은 지식을 널리 확산하는 데 기여하였지만, 이는 구텐베르크라는 특출한 개인의 능력이 만들어낸 결과는 아니다. 당시 역사 배경이 큰 역할을 하였다. 구텐베르크는 인쇄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면죄부를 인쇄하여 충당하였고, 구텐베르크의 후배 인쇄공들은 60년 후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를 비판하는 반박문을 인쇄하여 종교개혁에 불을 붙였다. 흥미로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15세기 마인츠에서 인쇄한 구텐베르크 성경이 가장 오래된 물건이지만, 저자의 산책은 1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독일민족의 뿌리와 만나는 등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간다. 독일 서북부에 위치한 데트몰트 시 외곽의 토이토부르크 숲에서는 기원후 9년 로마제국의 침략에 맞서 독일 부족을 연합해 싸운 게르만 민족의 영웅 헤르만이 독일인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 제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독일제국 황제가 만든 가짜 샤를마뉴 왕관을 통해 1,000년 넘게 서유럽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퉈온 프랑스와 독일의 외교사를 되짚는다. 그리고 뉘른베르크에서는 길드 체제에서 장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소개하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 일으킨 경제 기적의 원동력을 추적하고,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남아 있는 프로이센 왕국과 뒤이은 독일제국의 흥망성쇠가 담긴 역사의 흔적을 찾아간다.
독일사 산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곳은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이다. 연방의회 의사당은 독일의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주도하여 통일을 이룬 독일제국의 의사당 건물로 화려하게 건축되었지만 황제와 비스마르크의 견제로 제 역할을 해보지도 못한 채 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나치 정권 아래서는 방화로 훼손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때는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동서 베를린 분단으로 방치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1990년 재통일 이후 새로운 독일의 연방의회로 다시 태어나 의회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요동치는 독일의 역사
“독일?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못 찾겠습니다.”
이 질문은 외국인이 조각조각 나뉜 18세기 독일 지도를 들여다보며 헷갈려서 묻는 것이 아니다. 독일문학의 거장 괴테와 실러가 1796년에 공동으로 발표한 시집 《크세니엔Xenien》에 등장하는 질문이다. 괴테와 실러가 질문을 던진 18세기는 물론, 20세기에도 독일의 국경선은 쉼 없이 움직였고, 그 안에서 역사는 늘 요동쳤다. 청년 괴테가 독일 예술과 역사의 고유한 특징을 발견한 슈트라스부르크는 프랑스의 도시 스트라스부르가 되었고,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는 현재 러시아의 도시 칼리닌그라드이다. 끝없이 떠돈 국경선과 작은 국가들이 자기만의 역사를 써온 독일의 역사는 시간의 흐름을 좇는다고 해서 독일을 이해하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가 선별한 건물과 물건, 인물과 장소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역사의 고리들을 하나하나 풀어 가면 독일사의 주요 흐름은 물론 오늘날의 독일과 독일인을 이해할 수 있는 입체적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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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eday 2019-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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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어렵지 않다. 유물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이나 프로이센 처럼 이해하기 난해한 국가들을 알기 쉽게 잘 보여준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필자의 능력도 뛰어나고 수록된 사진자료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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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renz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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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문학 전공했으면서도 잘 몰랐던 독일의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특히 주제별로 엮어서 읽는 데 부담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진도 잘 배치되어 있고요. 강력 추천합니다! 이런 좋은 책을 출간 결정한 출판사에도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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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sks239 20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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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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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도 예쁘고, 편집도 좋고, 무엇보다 주제가 딱 마음에 든다.새로 이사간 동네 도서관에 2016년 신간인데도 구비가 되어 있어 얼마나 반갑던지.56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약간 기가 질렸는데 의외로 술술 잘 넘어간다.제목에 나온 산책이라는 단어에 잘 어울리는 편안한 수준이다.역사 뿐 아니라 예술가, 정치가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나오고 맥주나 소시지 같은 문화에 대해서도 같이 언급한다.독일은 보불전쟁 후 프로이센으로 통일된 1871년까지 수많은 공국으로 나눠져 있는 일종의 지방자치제 같은 나라였고, 나폴레옹의 침입을 계기로 민족주의 의식이 고취되었으며 근대는 하나의 독일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다.일찍이 중앙집권제를 확립한 영국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선거후 전통을 갖고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느슨한 연합체를 이룬 독일이 어떻게 하나의 독일로 결집될 수 있었을까?독일인을 정의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는 무엇인가?바이에른의 루트비히 1세가 독일어라고 정의한다.스위스 등지를 포함하는 고지 독일어와 네덜란드어 등을 포함하는 저지 독일어 사용자 모두를 독일인으로 규정한 것이다.위대한 독일인을 모아 놓은 발할라 신전에는 흔히 프랑스인으로 알고 있는 샤를마뉴 대제부터 시작해, 루벤스, 반 다이크 같은 플랑드르인까지 모셔져 있다.유대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최근에서야 아인슈타인 등이 들어갔다고 한다.발할라 신전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오랜 시간 동안 지방분권제로 존재했던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전환하면서 정체성을 갖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2차 대전을 일으키고 6백만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점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놀랍다.여전히 전범인 천황을 모시고 있는 일본과 매우 비교되는 대목이다.
벤츠나 폭스바겐 같은 자동차로 대표되는 독일의 공예 기술 전통도 인상깊게 봤다.
현대 디자인의 효시라는 바우하우스가 왜 독일에서 만들어졌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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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二 2016-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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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의 최우방국들까지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했다고 폭로했다. 이를 두고 영국과 독일의 반응이 달랐는데, 이는 감시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강력한지 분명히 보여준 사례였다. 영국의 공식 반응은 통상적인 수준의 적개심과 경멸이었으나, 독일은 `공공의 이름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공공에 역행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대중에게 알리고 싶았다`는 스노든의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엄청난 지지를 보냈다. 예를 들어 라인지방의 마인츠 시에서는 ... 축제를 벌이는데, 2014년 축제에서 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한 영웅이 스노든 인형이었다. 독일이 분명하게 소리 높여 스노든을 찬양했던 것이다. 그리고 2014년 1월 29일 메르켈 총리는 연방 하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국의 감시 행위에 대해 이처럼 신념에 가득 찬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독일의 정치 지도자나 동독에서 자란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76)
그렇다고 볼프가 궁지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볼프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망각이라고 주장했다. 어떻게 그런 기억을 억눌러서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정부의 주장에 속아 넘어가 무조건 따를 수 있을까? 볼프는 나치 치하에서 유년을 보낸 자신이 모든 방법으로 국가를 지원하려는 욕망과 복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고 결론지었다. 그 세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도 집단 순응에 적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볼프는 부끄러운 기억을 억누르는 정신의 능력을 인정했을 뿐, 해명할 수는 없었다. (78)
그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면서 유럽의 다른 국가들처럼 보헤미아에 민족주의적 열망이 소용돌이칠 때까지 200년간 프라하에서 독일인의 영향력은 변함없이 확고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이 붕괴하며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변했다. 체코의 민족주의 정서가 계속 커졌고, 500년간 공동생활을 하며 혼인 관계를 맺어온 프라하와 보헤미아 주민들이 단호히 독일어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1848년에서 1880년 사이 프라하는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하는 도시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도시로 변했다. 1882년 새로운 프라하 시장이 취임식에서 "100개의 첨탑이 있고, 전성기를 맞은 소중한 `슬라브인`의 프라하"라고 연설했을 때, 최후까지 남아 있던 독일인 시의원들이 이에 항의하며 시의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다음 해 카프카가 태어났다. (93)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카프카를 규정하는 것은 독일어권 프라하의 특별한 환경이다. 1883년에 태어난 카프카가 자라면서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도시 프라하는 독일인이 철수할 뿐만 아니라 종말적으로 감소하던 도시였다. ... 카프카는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해묵은 독일의 정체성을 지우기로 결정한 도시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카프카의 소설 몇 작품에 삽화를 그린 한스 프로니우스...의 카프카 초상화를 보면 불안하고, 경계심 가득하며, 소심한 한 남자가 보인다.
카프카는 1890년대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젊은이 대부분이 그렇듯 이중으로 이방인이었다. 카프카가 다닌 독일 중등학교 김나지움의 학생 대부분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었다. 300년간 가톨릭을 독실하게 믿은 국가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고 독일 유산을 버리고 있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독일어 사용자였으니, 카프카는 태어나면서부터 현대 정치 구조의 억압과 소외를 경험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95)
"18세기 초 유럽의 많은 나라가 이런 식으로 신성로마제국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덴마크, 프로이센. 스웨덴,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 제국 외부에서 왕관을 쓴 통치자는 모두 기능적으로 밀접하게 제국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지배 가문도 독일 가문이었습니다. 결국 제국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정치 집합체가 형성된 것이죠. 제국의 안보가 유럽 전체의 안보와 불가분의 관계였습니다. 이런 방식이 아주 중요한 이유는 ... 동시에 나머지 유럽이 독일에 일정한 질서 유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 독일. 놀랄 만큼 현대적인 견해로 보인다. 지역별 차이가 두드러지고 중앙 집권을 꺼리는 하나의 독일이 현재 유럽 안보 체계의 핵심인 것과 같다. 요아킴 웨일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관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121)
루터의 대화와 편지를 보면 그가 언어를 만들면서 작센의 관공서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모델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작센은 독일 중동부에 위치해 방언이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주경계선이 있었는데,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를 나누는 언어 경계와 같습니다. 어린 시절 루터는 부모를 따라 이 경계선을 넘나들며 두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지독일어와 저지독일어에 모두 능통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에 주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실제 저지독일어와 고지독일어로 청중에게 연설을 하고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독일어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뜻밖의 행운입니다. (137)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인은 읽고 쓰는 능력이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 중에서 독일은 문맹률이 낮았다. 독일은 아무리 작은 국가라도 교육을 담당하는 관료가 있었다.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 시장과 박람회 덕분에 수백 개가 넘는 거래소에서 글을 읽고 쓰는 상인 계급이 활동했고, 이들이 한 권에 1굴덴씩 하는 루터 성경을 부담 없이 구입했다. 1굴덴은 학교 교사의 두 달치 월급이었고, 시장에 나온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이었다. 다섯 집 중 한 집이 루터 성경을 구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이 루터 성경인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재단사, 제화공은 물론 독일어를 조금 배워 겨우 읽을 정도인 평민과 여자들까지도 진리가 솟는 샘이나 되는 양 열심히 루터의 성경을 읽는다. 책을 가슴에 품고 외우는 사람도 있다." (142)
하지만 독일인은 늘 그리스인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독일인은 자신들이 프랑스인이나 로마인보다 군사력은 약할지 모르지만, 그리스인처럼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독일인은 그리스의 다원성도 동일시했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가 다양하게 많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독일 국가도 다양하게 많았으니까요. 독일인은 그리스인이 자유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믿었고, 자유에 대한 애정 또한 특별히 독일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발할라의 건축 양식으로 그리스 양식을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선택이었습니다. (197)
옆에서 지켜보는 영국인에게 독일은 놀랄 정도로 다양한 나라이다. 지역 특산물이 수세기에 걸쳐 지역문화를 대변한다. 서로 다른 맥주와 지역 소시지는 모두 500년 전부터 광범위한 규제에 따라 관리되었다. 드골 장군이 치즈 종류만 246가지인 프랑스를 통제하기 어렵다고 불평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드골 장군은 소시지 종류가 더 많은 독일을 통제하지 않아서 다행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흔히 그렇듯 이렇게 서로 다른 맥주와 소시지들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국가 구조 안에 포함된다. 어떻게 보면 맥주와 소시지는 5장에 소개한 동전과 유사하며, 엄청난 지역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천 년 동안이나 독일 대부분과 중앙 유럽을 하나로 결합한 신성로마제국의 완벽한 정치적 기능과 유사하다. (214)
바로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입니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루터파라는 두 가지 기독교 신앙고백은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동등하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뒤로도 내용을 다듬어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칼뱅파를 세 번째 신앙고백으로 추가 인정했습니다. 이는 제후들의 권리를 인정한 합의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세 가지 신앙고백 안에서 국민 개개인이 자유롭게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합의였습니다.
농민전쟁과 30년 전쟁은 끔찍한 싸움이었지만, 그 결과는 일부 역사학자의 평가대로 신성로마제국의 궁극적 성취로 이어졌다. 종교의 차이를 공식적으로 수용하는 정치 단위가 탄생한 것이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비교가 되지 않는 종교적 관용이었다. (247)
두 판화가 유명한 이유는 뛰어난 제작기법 때문만이 아니다. 독일의 정반대돠는 면을 표현한 쌍둥이 자화상이란 의미를 얻으며 유명해졌다. 단호한 행동을 상징하는 기사와 내면을 들여다보며 명상에 잠긴 멜랑콜리아. 이처럼 미묘하고 복잡한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민족은 유럽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323)
비틀은 절대 명품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독일 제품이 누려온 명성 하나는 공유했습니다. 바로 품질입니다. 50년대에는 생산 수량이 판매 수량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비틀이 잘 팔렸지만, 회사는 변함없이 품질관리에 매달렸습니다. 50년대 중반 회사 대표가 기술검사보고서를 검토하고 직원에게 아무개가 모처에서 발견한 잡음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만전을 기하라는 메모를 계속 날릴 정도였습니다. 회사의 입장은 간단했습니다. 아주 높은 품질에 우리의 미래가 달렸다. 우리에게 결점이란 있을 수 없다. 독일인이 이렇게 높은 품질에 성공의 희망을 거는 데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두 번의 패전으로 거의 전부를 잃은 경험과 일부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두 차례의 패배에 대한 보상심리입니다. (355)
남편에게 몇 차례 도움을 받으며 자연스레 알게 된 여자들이 있다. 나는 노동자들의 운명과 삶의 방식에 관련된 모든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 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가 처음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일에 마음이 끌렸을 때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동정과 위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들의 삶이 아름답다는 것이 주된 동기였다. (395)
집단에 가해진 범죄를 다룰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끝없이 쌓이고 되풀이되어 집단이 되었을 뿐, 그 안에는 언제나 각별한 개인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446)
놀라운 것은 `페허부인들`이 독일을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든 속도이다. 영국에서는 1960년대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는 피폭지들을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970년대에도 그런 곳에서 TV연속극을 촬영할 정도였다. 독일은 서베를린의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처럼 반파된 몇몇 건물을 일부러 복고하지 않고 기념비로 삼았는데, 제3제국의 범죄와 건물보다 더 큰 대가를 치근 국민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을 제외한 독일, 특히 서독의 많은 부분은 1950년대 후반에 이미 복구가 끝나 있었다. 독일인들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지 않으려면 부단한 노동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하다. (488)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모든 동독인에게 서독을 방문할 `환영금...`으로 100마르크씩 지급되었다. 환영금으로만 거의 40억 마르크가 지출되었다. 하지만 이는 헬무트 슐레징어의 지적처럼 두 나라의 통화를 통합하는 데 필요한 비용에 비하면 하찮은 금액이었다. 은행과 경제학자들은 2대 1의 비율로 오스트마르크와 독일 마르크를 교환하라고 제안했다. 두 나라의 경제력 차이에 비해 아주 후하게 책정한 비율이었다. 하지만 헬무트 콜 총리의 생각은 달랐다. 콜 총리는 오스트마르크를 실제보다 훨씬 높은 가치로 환전하기로 결정했다. 경제가 아닌 정치적 결정이었다. 그 어떤 것도 동독 주민의 재정을 파탄내고, 재통일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콜 총리가 임금과 이자, 임차료를 1대 1의 비율로 교환하라고 발표한 것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495)
유대인은 대체로 보호받는 주민이었고, 유용한 사람들도 인정받았습니다. 유대인과의 인종 통합은 없었지만, 프랑크푸르트 지구 같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곤 유대인들이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거주지구에서 살지 않는다는 면에서 공간 통합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독일의 반유대주의가 15세기 유대인 추방이나 1540년대 루터의 반유대적인 비판에서 출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19세기 근대 독일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비극의 역사적 선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홀로코스트가 독일 역사의 중세 후반에 뿌리를 둔 것은 절대 아닙니다. (506)
우리가 일련의 사건들을 인지하는 동안, 천사는 쉼 없이 잔해를 쌓아올려 그의 발 앞으로 내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파라본다. 천사는 머물러, 죽은 자들을 깨워 일으키고 부서진 것들을 다시 온전하게 복구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천국에서 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그 폭풍이 천사의 두 날개를 너무 거세게 밀어붙여 천사는 더는 날개를 접을 수 없다. 폭풍은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로 천사를 꼼짝 못하게 떠밀고, 천사 앞의 잔해 더미는 하늘로 치솟는다. 이 폭풍을 우리는 진보라고 부른다.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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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edoro 20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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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martedi_/223400235113
독일의 완전 처음이 아닌
“독일”이란 정체성이 서서히 생성되기 시작한
신성로마제국부터 시작해서
독일 통일을 처음으로 달성한 제2제국(독일제국; 빌헬름 1세, 비스마르크 수상),
독일 정체성과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제3제국(나치 독일),
그리고 동서독, 재통일을 이룩한 현대 독일까지의 역사를
다양한 박물관의 각종 유물과 기록, 연설, 문학작품, 철학자/철학 이론 등으로
보완하며 설명하는 책이다.
'독일사 산책'이라는 이름 답게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이면서도
내용이나 스케일 면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었고
독일 역사의 스케치를 그리는데 도움이 되며
뭔가 내 머릿속에 있던 스케치를 더 정밀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었다.
유물 사진이 모두 고화질이었고
역사를 설명하면서 고른 그림 작품이나 주요 인물 설명이 감각 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작가가 역시 미술사학자(이자 전 박물관장)였다.
책이 좀 두꺼워서 (약간 벽돌 모드) 긴장을 했으나
내용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았다.
또한 독일 역사를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훑어볼 수 있어서 아주 좋은 책이었다.
입문용으로도 좋고 심화용으로도 좋고
안의 사진과 자료도 질적으로 좋아서 역시 소장하고픈 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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