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그늘 - 남한의 지하혁명조직과 북한
한기홍 (지은이)시대정신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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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도적인 역할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로 일대 도약하였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이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국민적 공감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산업화세력이 성장의 이면에 인권의 그늘을 드리운 것처럼, 이들의 활동도 민주주의의 이면에 진보· 종북(從北)의 그늘을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에 침습한 지하혁명조직의 직간접적인 활동이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친북· 종북적인 성격으로 바꾸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북한 정권의 3대 세습과 대아사 사태, 참혹한 인권유린, 대량 탈북 사태 등에 함구하는 것 등이 이의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종북 지하당이나 혁명조직에서 활동하며 남한을 북한식으로 혁명화하려는 목표를 갖고 그 세력의 확대를 도모한다. 이 책에서 서술하는 주요 사건들은 이들을 검거·구속하는 과정에서의 판결문과 관련자들의 증언, 언론보도 등을 종합하여 그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물이다.
‘진보의 그늘’을 드리우며 ‘종북’의 강력한 파장 아래로 우리 사회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하혁명조직에 대한 각 사건의 흐름을 관통하는 연관성이나 역사성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개별 사건으로 묻혀 그 심각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종북’의 정점에 있었던 지하혁명조직에 대한 연구와 진실을 알리고자 이 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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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1990~2000년대 NL계열 지하당 운동의 역사와 특징
민혁당 사건
중부지역당 사건
구국전위 사건
일심회 사건
2부
1960~1970년대 좌인 지하당 운동의 특징
통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
부록_ 북한의 지하당 조직론
저자 및 역자소개
한기홍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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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경기도 수원시에서 태어났다. 1981년에 연세대 심리학과에 입학하여 1996년에 졸업했다. 2012년에서 2015년까지 국방대 국방관리대학원에서 안보정책학 석사를 마쳤다. 학생운동 과정에서 시위를 주동해 6개월을 복역했다. 석방 후에는 용접공, 인쇄공과 철도 기능직 노동자로 있으면서 ‘서울노동운동연합’, ‘서울지역인쇄노조’, ‘전태일기념사업회’ 등에서 14년간 노동운동을 했다. 1990년대 후반 사회운동 방향을 전환해 청년단체 ‘푸른사람들’ 회장, 격월간 《시대정신》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다. 이후 ‘The Daily NK’ 초대 발행인과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000년부터 2021년까지 ‘(사)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로 일했다. 2018년 10월부터 2019년 9월까지 1년간 일본 「오사카 YWCA 일본어 전문학교」에서 일본어를 공부했다. 저서로는 《진보의 그늘-남한의 지하혁명조직과 북한》이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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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남한의 지하혁명조직과 북한!
민주주의의 그늘에 드리워진 진보의 실체
【기획 의도】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도적인 역할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로 일대 도약하였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이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국민적 공감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산업화세력이 성장의 이면에 인권의 그늘을 드리운 것처럼, 이들의 활동도 민주주의의 이면에 진보· 종북(從北)의 그늘을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에 침습한 지하혁명조직의 직간접적인 활동이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친북· 종북적인 성격으로 바꾸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북한 정권의 3대 세습과 대아사 사태, 참혹한 인권유린, 대량 탈북 사태 등에 함구하는 것 등이 이의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종북 지하당이나 혁명조직에서 활동하며 남한을 북한식으로 혁명화하려는 목표를 갖고 그 세력의 확대를 도모한다. 이 책에서 서술하는 주요 사건들은 이들을 검거·구속하는 과정에서의 판결문과 관련자들의 증언, 언론보도 등을 종합하여 그들의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물이다. 그 과정에서 사법적 심판을 받았던 인사들의 다수가 제도권 정당 등에 참여하고 있는 점이 파악되었다. 심지어 집권 경험이 있는 전통야당인 <민주통합당>에도 이러한 인사가 있으며, 자칭 진보를 대변한다고 하는 <통합진보당>에도 다수의 인사가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이념이나 대북관에 대해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투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중요한 공직선거에 지속적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는 등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올해 치러지는 제19대 국회의원선거에도 지하혁명조직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는 인사들이 다수 출마하고 있다. 이처럼 이들이 ‘진보의 그늘’을 드리우며 ‘종북’의 강력한 파장 아래로 우리 사회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하혁명조직에 대한 각 사건의 흐름을 관통하는 연관성이나 역사성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개별 사건으로 묻혀 그 심각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종북’의 정점에 있었던 지하혁명조직에 대한 연구와 진실이 반드시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 민주통합·통합진보 단일화 경선에서 여론조사 조작 사건으로 사퇴한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주사파(자주파)가 주축이 되어 민주노동당을 장악한 종북세력의 핵심인 ‘경기동부연합’에서 내세운 인물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이번 4·11 총선의 이슈로 급부상했다. ‘경기동부연합’에 소속된 일부 회원은 <민족민주혁명당> 사건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경기동부연합’은 민노당의 당권파로 사실상 민노총과 전교조를 움직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 성】
1부에서는 1990년대 이후 신(新) 좌익의 주도하에 결성되었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중부지역당>, <구국전위>, <일심회> 등 지하혁명조직을 다루었다. 이들 사건은 <왕재산> 사건처럼 1980년대 대학에 입학해 NL계열에서 활동하면서 북한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인물들이 주도한 것이다. 이 조직들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활동하다 수사기관에 포착되어 사건화된 것이다.
2부는 일제시대나 해방 공간에서 활동했던 구(舊) 좌익이 주도한 1960년 4·19 이후 1970년대 말까지의 <통일혁명당(통혁당)>, <인민혁명당(인혁당) 및 인혁당재건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 등을 다루었다. 부록으로는 ‘북한의 지하당 조직론’을 참고로 실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건 관련 밀입국 경로 및 현장 사진 등 50여 장의 사진과 사건 관련 조직체계도 및 도표 등을 다수 수록하였다.
【주요 지하혁명조직】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1980년대 이후 대학가에서 자생한 구 좌익과 단절된 최초의 대규모 신 좌익 지하당.
관련자: 김영환(총책, 조선노동당 가입), 하영옥, 김경환
중부지역당
북한의 최고위급(권력 서열 22위) 대남공작원인 이선실이 기획하고 구축한 지하혁명조직
관련자: 황인오(총책, 조선노동당 가입, 전향), 최호경, 양홍관, 이철우(제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제19대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후보), 윤민석(민주통합당 당가((黨歌) 작곡)
구국전위
남한 변혁운동의 지도조직을 지향하며 전국적인 범위에서 조직을 확대한 지하혁명조직
관련자: 안재구(총책, 조선노동당 가입), 류낙진(빨치산 출신), 홍중의, 박래군, 이영기, 김진국
일심회
2000년 이후 소위 ‘386세대’ 운동권 출신들이 종북적인 활동을 지향하며 결성한 단체
관련자: 장마이클(총책, 조선노동당 가입), 이정훈(민노당 전 중앙위원), 최기영(민노동 사무부총장)
통일혁명당(통혁당)
해방 이후 북한의 전형적인 대남공작사업에 의해 결성된 남한 내 지하당
관련자: 김종태(총책, 조선노동당 가입), 김질락(조국해방전선 책임자), 이문규(민족해방전선 책임자),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박성준(성공회대 교수,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남편)
인민혁명당(인혁당)
전 혁신계 일부 인사와 언론인 및 대학 관계자, 학생 등으로 구성된 조직
관련자: 도예종(총책), 박현채(조선대 교수, 빨치산 출신), 정도영, 전창일(통일연대 고문), 김한덕(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이창복(제16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남민전)
구 좌익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청학련’ 세대가 응집한 조직
관련자: 이재문(총책), 안재구(구국전위 총책), 김남주(시인), 이학영(해성대원)
【제19대 총선 출마 지하당 관련 주요 인물】
<이철우: 제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2004. 5~2005. 3)>
이철우 전 의원은 92년 6월 6일 노원구 공릉동 소재 민가에서 <중부지역당>에 입당 강원도당 위원회의 교양담당 비서 및 춘천권 담당으로 임명받아 활동했었다.
그러던 1992년 11월 9일 ‘남한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 발각되면서 입건됐다. 이 의원은 당시 국보법 위반 등으로 1993년 7월 8일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복역 후 한탄강 댐건설 반대를 위한 시민운동 등을 벌여오다 김대중 정권 당시인 1999년 2월 25일 특별 복권됐고, 지난 17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러나 2005년 3월에 대법원 3부(주심 이용우 대법관)의 선거유세 시 상대후보를 비방하는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벌금 25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최근 민주통합당의 당가(黨歌)를 직접 작사하였는데,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당가(黨歌)를 작사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철우 전 의원은 제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포천·연천지역 공천을 받았다.
<이학영: 정당인, 시민운동가>
이학영 씨는 1979년 4월 27일에 이른바 ‘땅벌작전’이라 명명한 작전에서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의 금품을 훔칠 것을 모의하고 차성환, 박석률 등 8명(이학영 가담)과 함께 급습하여 경비원 김영철 씨(당시 25세)를 칼로 찔러 중태에 빠뜨리고 달아나다 붙잡혔다.
이 사건에 앞서 1979년 3월 25일에 서울 종로구의 한 금은방 강도 사건(이학영 가담)을 모의하면서 사제폭탄과 총기 등을 제조하면서 각종 흉기를 모으기도 했다.
대검찰청 공안부가 발행한 《좌익사건실록》에 따르면 이학영은 전남대 재학 중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복역 후 무직자로 전전하다, 1978년 남민전 산하 ‘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로부터 00택이라는 조직 가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학영 씨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으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구속되었다. 이후 희망제작소 이사, 노무현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다 제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군포지역 공천을 받았다.
김창현: 정당인, 통합진보당 공동위원장
대법원 형사3부(주심 변재승 대법관)는 1999년 9월 3일 이른바 ‘영남위원회 사건’과 관련하여 지역사업책으로 활동한 혐의로 김창현 울산동구청장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하였고, 이로써 그는 구청장직을 상실하였다. 또한 대법원 형사2부는 ‘영남위원회’ 총책 박경순(통합진보당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을 이적단체 구성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을 선고하였다.
김창현 등은 1992년 3월 ‘반제청년동맹’을 모태로 하는 ‘영남위원회’를 결성한 뒤 부산·울산지역에서 대학가, 노동·재야단체를 상대로 지하활동을 벌였다. 김창현 씨는 제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야권연대 경선 지역인 울산 북구지역 경선에서 민주당 이상범 후보를 누르고 통합진보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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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그늘에 드리워진 진보의 실체
방송인이되자 2012-04-23 공감 (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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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다면
요즘 뉴스를 보면 진보진영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같은 편 아니었나? 라고 고개를 갸우뚱 할만한 사람들끼리 sns로 혹은 기자회견을 통해 서로 비난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평소 진보진영 대표 논객으로 유명한 진중권 교수는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에게 공포영화 ‘링’을 보는 것같이 소름이 돋는다며 대표직에서 물러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백낙청 교수를 비롯한 진보진영 원로들도 당권파의 희생을 요구했다.
현재 진보진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진보진영,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통합진보당 내의 분열 사태는 19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순번 배정을 둘러싸고 부정선거가 이루어진데서 촉발됐다. 통합진보당내 민주노동당 출신들인 당권파가 비례대표 2,3번을 배정받은 이석기, 김재연을 위해 모바일 투표 코드를 조작, 대리투표 등 총체적인 부정투표 정황이 속속히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진보의 그늘’은 이런 파렴치한 부정선거를 가능하게 했던 지하 종북세력의 실체를 조목조목 집어주고 있다. 저자는 “지난 수십년 동안 개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수사기관의 사건발표와 언론의 단발성 보도를 제외하고는 각 사건의 흐름을 관통하는 연관성이나 역사성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책은 1980년대 자주파의 탄생부터 민혁당 사건,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가능하게 했던 일심회 사건까지 진보진영 중에서도 종북지하 세력들의 과거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지하에서만 움직이던 이석기, 김재연 같은 인물들이 부정선거를 치루면서까지 비례대표로 나섰다. 개인적인 탐욕이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만약, 종복지하조직의 노선이 변경되어 대한민국 입법기관에 진출하는 것이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언론에서는 이번 부정선거 결과가 진보진영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말한다. ‘진보의 그늘’이 앞으로의 향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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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고은 2012-05-1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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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사파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책[진보의 그늘- 남한의 지하혁명조직과 북한]
요즘 대선을 앞두고 종북주사파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솔직히 정치에 그리 많은 관심은 없어서 신경쓰지 않다가 연일 이슈를 삼는 언론 덕분에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저 사람들이 뭐길래 저렇게 신경을 쓸까 싶었고, 도대체 종북 주사파가 뭔지 싶었다. NL이든 PD든 이번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간단히 이 책 소개를 하면 이 책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NL에 대해서 이다. NL은 Nation liberty(민족해방, 민족주의계열)이고 PD는 People democracy(민중민주주의, 사회주의계열)이다. 운동권에 NL세력들이 주로 차지했다고 한다.
1부에서는 1990년대 NL계열 지하당 운동(신좌익)에 대해 이야기 한다. 1980년대에 자생 주사파라는 것이 생겼는데, 북한의 방송과 주체사상 비판 서적을 배운 김영환이라는 사람이 원조이다. 황장엽씨가 만든 주체철학에다 민족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이론, 수령론등이 섞여있는게 주체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엔엘 운동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사건, 중부지역당(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사건, 구국전위사건, 일심회사건등이 NL의 계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2002년에 있었던 일심회사건은 국가기밀을 수집해 북한에 보고했던 사건이었고, 그때 민주노동당에서 종북을 청산하지 못한것이 안타까운 사실이다.
2부에서는 1960년대 좌익 지하당 운동 (구좌익)에 대해 설명한다. 1960년대에는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지하당 운동이 있었다. 주로 해방이후 6.25전쟁 이전까지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세력이 중심이 되어 지하당 운동을 한 것인데 통혁당(통일혁명당), 인혁당(인민혁명당),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 등이 있다. 이 정당들은 친북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삼았고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세대적 단절이 생긴다. 그 이후로 자생 주사파들이 지하당 운동을 이어받게 된다.
사실 종북지하당 운동에 대한 책은 처음 읽는 것이고 관련된 인물들이 너무 많아서 읽기에 힘들었다. 이런 책을 읽어본적이 없고 내용이 너무 생소해서 읽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어려웠다. 엔엘이 뭔지, 피디가 뭔지 솔직히 알고 싶은 생각도 그리 많이는 없었고, 내가 아는 사건도 거의 없다보니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들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지하당을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었던 점도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우리나라 정치상황이 분단 상황으로 인해 진보든 보수든 심하게 왜곡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정책에 대해 진보적인 입장을 취할수도 있고, 보수적인 입장을 취할수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일관된 방향을 요구한다. 중간에 있는 사람은 회색분자가 되기도 한다. 오른쪽으로 가면 수구꼴통, 왼쪽으로 가면 좌빨이 된다. 보수에서는 애국을 강조하며 시시때때로 공격할때 ‘종북’을 이슈로 삼고, 진보에서는 보수에서의 부패와 비리, 성희롱등을 안주 삼아 씹어댄다. 그렇게 서로를 헐뜯다보면 국민들을 위하는 그런 정당은 생기기 어렵고, 어느 순간에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국민들은 정치 무관심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종북 주사파에 대해 호의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 존재하는 종북주사파는 2006년 일심회 사건때 없어져야 할 세력들이었다. 그리고 통합진보당도 미리 종북주사파 세력이 당권을 잡지 못하도록 했어야 하고 물갈이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못했기에 주사파들이 비례대표를 구렁이 담 넘듯이 자리잡은 것이고 그러다보니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은 것이다.
특히 예전에 ‘통일의 꽃’이라 불리며 무단방북한 다음에 자연스럽게(?) 통합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임수경씨나, 애국가에 대해 해괴망측한 발언을 하며 사퇴압력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이석기씨나, 통합진보당에서 사퇴를 요구하는데도 뻔뻔하게 국회의원으로써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김재연씨에 대해서는 빨리 정신차리고 지금이라도 명예롭게 사퇴하라고 하고 싶다. 종북주사파가 자신의 본질에 대한 반성없이 독재정권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운운하며 국회에 입성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본다. 민주화 운동에서 고문과 박해를 온몸에 받으며 피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은 생각도 안하고, 민주화운동의 소중한 열매만 따먹는 염치없는 사람같아 보인다. 그 사람들은 뭐랄까, 우리나라의 혜택은 있는대로 누리며 혜택에 대한 댓가는 치르지 않는 사람들 처럼 보인다. 국가에 살면서도 국가를 부정하는 한심한 사람들이 앞으로 국회에 입성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통합진보당은 종북주사파에 대해 빨리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몇가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이슈중에 하나가 종북이 아닐까 싶다. 선거를 위해 어쩔 수없이 통합진보당으로 통합한 것은 알겠는데 그덕분에 진보당은 다양한 시각이 나오지 못하고 하나로 잡탕같이 섞인 것 같다. 진보의 장점은 다양한 이슈를 제시하고 여러 문제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에 있다. 종북주사파를 정리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정당이길 바란다. 그리고 보수정당에 대해서도 ‘종북’을 미끼로 다른 국정현안이나 다른 산적한 이슈에 무관심하질 말았으면 좋겠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꼭 기억해 두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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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oir 2012-07-08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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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진보의 그늘
무소의뿔처럼
2015. 10. 2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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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그늘작가한기홍출판시대정신발매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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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학 입학 후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투옥되기도 하고 10여 년을 노동운동을 하다가 북한의 실상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전향한 필자가 우리나라의 지하혁명조직에 대해 쓴 책이다. 필자는 이 조직들이 비밀주의가 활동의 원칙인 데다가 관련자들의 함구로 실체 파악이 어려워, 당시 수사자료, 판결문, 일부 관련자들의 수기, 언론 기사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기 때문에 허점이 많다고 고백하고 있다. 1부에서는 1990년대 이후 신좌익 주도하에 결성되었던 민족민주혁명당, 중부지역당, 구국전위, 일심회 등을 다루었으며 2부에서는 일제하와 해방 공간에서 활동했던 구 좌익이 주도한, 통일혁명당, 인민혁명당 및 인혁당재건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을 다루었고, 부록으로 '북한의 지하당 조직론'을 실었다. 이 책의 내용 역시 진보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보수의 그늘’처럼 완전히 공정한 시선은 아닐지 모르지만, ‘진보의 그늘’을 살펴봄으로써 극심한 이념 대립의 와중에서 한발 물러서서 더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시야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부. 1990~2000년대 NL계열 지하당 운동의 역사와 특징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자생 주사파는 기존의 구 좌익의 영향을 받지 않고 출발했다. 운동노선에서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을 표방하고 있지만 조직이나 활동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자생 주사파의 원조인 서울대법대 출신 김영환은 1985년부터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과 도서관에 있는 주체사상 비판서적들을 통해 한국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혁명을 위해 민족해방이론(NL)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주변 동료(서울대 고전연구회 82~83학번)들에게 주체사상과 NL이론을 전한 다음 서울대 운동권들에게 본격적으로 보급했다.
1986년 3월 서울대 운동권 1백여 명이 집결하여 ‘구국학생연맹’을 조직한다. ‘구학련’은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1,288명이 구속된다. 그러나 주사파의 활동을 더욱 거세지고 전국적으로 NL계 총학생회가 등장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결성된다. ‘전대협’은 초기에 고대 출신 조혁이 총책으로 있던 반미청년회가 주도한다. ‘전대협’은 반미청년회가 공안당국에 의해 붕괴된 상태에서도 중앙위 주도로 임수경 방북 등 굵직굵직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후 ‘전대협’은 자민통 그룹이 주도하였다.
NL은 PD가 가진 결함(북한과 거리를 두는 태도)과 주체사상에 대한 매력(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사상이라는 자부심) 등이 작용하여 학생운동 지도부들에게 큰 공감을 주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NL 계열은 더욱 기세를 올렸고, 1990년대 초반부터 대거 노동현장과 각종 사회운동 그룹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NL 계열 속에서도 비주사 NL이 있었는데 YTM 사장을 역임한 장명국씨가 당시 주도했던 '새벽' 그룹이 대표적이다. 남한에서 자생 주사파의 성장을 지켜보던 북한 당국은 1989년 간첩 윤택림을 김영환과 접선하게 하여 전면적 연계를 맺는다. 이를 계기로 김영환은 ‘반제청년동맹’ 위원장을 맡게 되고 1992년 <민족민주혁명당>을 출범시킨다. <민혁당>은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를 두었는데 그 아래로 활동가 조직을 두어 그들이 일반 대학생들을 조직화했다.
그러나 독주를 거듭하던 주사파(NL) 진영도 북한의 현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부터 정체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국 ‘주사파의 대부’였던 김영환마저 북한 체제의 경직성을 목도한 후 ‘북한수령론은 사기극’임을 선언하고 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해 좌우가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사파 운동은 포기했지만 여전히 NL 성향을 지닌 8,90년대 학번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지위를 차지하여 요소마다 중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과거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사건
1998년 12월 18일 남해안에서 격침된 북한 잠수정에서 발견된 유류품에 근거하여 하영옥 등이 관련된 <민족민주혁명당>이 적발된다. 김영환과 조유식 등은 사상전향 의사를 밝혀 공소 보류되었으며, 국정원에 자진 출두하여 자술서 및 자수서를 제출한 15명은 기소유예 처리되었으나, 체포 후에도 전향치 않았던 하영옥, 심재춘, 김경환 등은 구속되었다. 2008년 8월과 9월 영남위원장 최진수, 부산지역위원장 이의엽이 검거되었고 2002년 5월에는 3년 여나 도피해있던 경기남부위원장 이석기가 검거된다. <민혁당>은 김영환이 주도하여 만든 최초의 대규모 신좌익 지하당으로 이후 사회운동에서 주류가 된 NL계의 지도부 역할을 하였다. 창당 초기부터 북한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통일혁명당>과 같은 유형의 당이라 할 수 있다.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2년간 복역하고 1988년 12월 석방된 김영환은 1989년 3월 결성된 하영옥의 지하혁명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의 중앙위원이 된다. 대외적으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직함으로 활동하던 그는 간첩 윤택림을 만나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하고 ‘관악산1호’라는 대호를 받는다. 1991년 5월 조유식(1989년 10월 경 현대중공업 위장취업 사건으로 1년간 복역 후 출소)과 함께 잠수정을 타고 북으로 가서 조선노동당에 정식 입당한 뒤 이듬해인 1992년 3월 16일 <민혁당>을 정식으로 창당한다. 중앙위원회 산하에 경기남부, 영남, 전북위원회 등 지역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위원회 아래 성남, 울산, 부산 등 지역별 위원회와 산하 시 단위 지부를 결성한다. 그리고 학생, 노동, 재야 등 부문별 사업부를 운영하고 중앙 단위의 부문별 사업지도부를 조직한다.
1992년 4월 12일 북한으로부터 40만 달러(당시 약 3억 원) 등을 지급 받아 조직관리비, 선전물 제작, 선거지원금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기관지 ‘빛’을 14회에 걸쳐 제작 배포하고 98회의 북한 지령 수수 및 국가기밀을 북한에 넘겨주었다. 북한 연락 담당인 '말'지 기자 조유식은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자료를 탐독하여 북한에 보고할 목적으로 '말'지에 기고하였고, 취재 명목으로 해외출장을 가서 북한 공작원 및 간첩과 접선하여 국가기밀을 보고하는 한편 공작금도 수령하였다. 하영옥은 1997년 7월 김영환의 <민혁당> 해산에 반발하여 당조직을 수습하여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 등에 대한 조직 관리를 해 오던 중 심재춘을 포섭하여 그의 도움으로 직파간첩 원진우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새로운 대호 ‘광명성’을 부여받고 <민혁당> 총책에 임명된다. 1998년 12월 18일 북한의 반잠수정이 격침된 후 조직보위를 위해 심재춘 등과의 연락을 끊었지만 북한 지령 수수 등 반국가 활동은 지속한다. 심재춘은 1988년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한 후 주체사상에 심취되어 1991년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하고 1993년부터 서울대 총학생회 지도책으로 활동한다. 1998년 하영옥의 지시로 원진우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도피를 도왔으며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하고 ‘광명성91호’라는 대호를 받고 하영옥의 통신연락 담당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한국외대 출신의 김경환은 ‘반제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중 말레시아 국적으로 위장한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 진운방 부부와 만나고 이후 김영환과 진운방 사이의 중간 연락책 임무를 수행하다가, 1991년 9월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관모봉’이라는 대호를 부여받았다.
김영환은 17일 동안 북한에 체류하면서 오히려 많은 실망을 한다. 경제적으로는 뒤지더라도 인간애와 환경의 측면에서 우위에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정작 북한은 인간애는 고사하고 환경이나 주체사상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목도하고 북한이 주체사상을 발전시키고 지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회라고 판단, 북한을 모델로 하는 혁명조직인 <민혁당>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1995년 ‘말’ 4월호를 통해 북한 추종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청년단체 ‘푸른 사람들’의 기관지 1996년 1월호에는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는 글을 기고한다. 1997년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이 남행하였고, 1997년 7월 <민혁당>이 해체된 후, ‘말’ 1998년 5월호에서는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비판하면서 북한과의 완전한 결별을 고하였다. 김영환은 전향 후 북한 민주화 운동에 전면적으로 뛰어들어 1998년 한기홍, 홍진표, 조혁 등 전향한 386들과 함께 격월간 ‘시대정신’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립을 제창했다. 1999년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를 결성 북한 주민의 인권개선 활동을 전개한 공로로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인권상 단체 부문을 수상했다.
김영환의 대북 연락책을 활동했던 조유식은 전향 후 전부터 창업해 운영해오던 인터넷 서점 ‘알라딘’ 운영에 전념하였다. 하영옥은 1999년 9월 구속되어 8년형을 받고 2003년 4월 특사되었고, 김경환은 4년 6월의 선고를 받고 역시 2003년 4월 석방되어 ‘희망제작소’ 홍보센터 본부장으로 일했다. 이석기는 2002년 5월 검거되었으나 2003년 8·15특사로 석방되었고 여론 조사기관인 ‘사회동향연구소’를 설립했으며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2번으로 국회에 입성하였다. 이의엽 부산지역위원장은 2000년 9월말 검거되어 2001년 출소한 후 2010년 이정희가 대표를 맡은 민노당의 정책 위원장을 맡았다가 통합진보당 공동정책위의장이 되었다.
중부지역당(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북한 권력서열 22위로 당 정치국 후보위원인 이선실은 재일교포 신분으로 위장해 입국하여 국내 영주 허가를 받아 1980년대 초부터 약 10년 간 서울에 장기 거주하면서 남한 내부에 북한공작지도부 구축을 시도했다. 1990년부터 민중당을 거점으로 삼아 반민자당연합전선을 결성하고 야당이 집권하면 자기들의 지분으로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요구하여 적화통일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고 친북정권을 수립한 후 한반도 공산화를 실현한다는 전략을 수립한다. 그리고 김낙중, 손병선, 황인오를 포섭한 후 약 400명의 조직원을 모아 <중부지역당>을 결성하고 1995년 통일투쟁을 전개할 조직적 토대 구축을 시도한다.
강원도 정선 사북탄광을 무대로 활동하던 노동운동가 황인오는 이선실에게 포섭되어 1990년 10월 북한으로 들어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최호경과 동생 황인욱 등을 끌어들여 <중부지역당>을 결성한다. 산하에 강원, 충북, 충남의 도급 당조직을 두었으며, 강원도 당 책임자였던 최호경은 <중부지역당>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미 1990년 12월에 주사파 운동가 241명으로 ‘1995년 위원회’를 결성해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였는데, 강원도당은 이 조직을 기반으로 한다.
1992년 안기부에 의해 이선실이 포착되고 8월 25일부터 김낙중, 심금섭, 노중선, 권두영이 체포되고 이후 손병선과 황인오 등 120명이 체포된다. 구속자 중에 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비서인 이근희가 포함되어 간첩단 조작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1992년 8월 안기부는 먼저 <민중당> 공동대표를 지낸 김낙중의 간첩활동 정황을 포착했다. 1935년생인 김낙중은 두 번째 월북사건으로 7년 형을 선고받고 1980년 만기 출소 후 ‘평화통일연구회’를 설립한 후 통일전문가로 활동하다가 88년 말 한국을 방문한 북경 사회과학대 이상문 교수의 소개로 직파 간첩을 만나 동조자를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고 심금섭과 노중선을 포섭한다. ‘무두봉11호’라는 암호명을 받은 김낙중은 1990년 민중당에 입당하여 공동대표가 되고 공작금으로 받은 돈의 일부를 암달러상에게 환전한 후 총선에 출마한 민중당 후보에게 지원하고, 통일단체로 위장한 ‘평화통일위원회’ 설립 자금으로 쓰기도 한다. 수사과정에서 민중당 정선지구당 위원장인 정운환을 통해 황인오가 드러나 체포되고 중부지역당의 실체가 밝혀지게 된다.
1990년 6월 민중당 창당 발기인 대회에 참석한 이선실은 황인오의 어머니 전재순을 만나 황인오를 남파간첩 권중현에게 연결시킨다. 권중현의 설득으로 황인오는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대둔산 11호'라는 암호명을 부여받는다. 1990년 10월 17일 72세의 이선실, 권중현 등과 함께 월북하여 5일째인 21일 지하당 구축의 구체적인 방법과 기술을 배우고 강원도와 충청도를 망라하는 <중부지역당> 건설의 임무를 받는다. 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공작금을 건네받고 돌아온 황인오는 동생 황인욱을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시키고 전 민중당 성남을 지구당 위원장인 최호경을 포섭한다. 최호경이 추천한 은재형, 정경수도 입당시킨 후 1991년 7월 31일 <중부지역당> 결성식을 갖고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의 그것을 차용한 강령과 규약을 채택한다.
조직 체계는 황인오를 책임 비서로 하며, 검열책 최호경, 원 멤버였지만 역량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된 은재형 대신 장창호를 선전책, 조직책 정경수 등 3인으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산하에 강원도당위원회 충북도당위원회, 충남도당위원회와 편집국을 설치하였다. <중부지역당>은 이선실의 지휘 하에 ‘1995년 적화통일 실현’을 목표로 삼고 주사파 핵심인자를 포섭한 뒤 학원, 노동, 언론, 문화계로 침투하였다. 기독교계 운동조직으로 ‘김창준 돌격소조’, 청년학생운동 조직으로 ‘8·28 학생동맹’, 노동운동 조직으로 ‘5·1 노동동맹’, 농민운동 조직으로 ‘11·11 농민동맹’, 지역·분야별 조직 부문 대오를 두었다.
황인오는 총 41회 북한 방송 지령을 수령하고 19회에 걸쳐 공작활동을 보고했으며, 황인오의 동생 환인욱은 신민당 이상수 의원의 개인 비서인 이근희로부터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에 보고하였다. 황인오는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청취팀을 운영하면서 '백두산'이란 이름의 전단을 제작하여 대학가·노동 현장 등에 배포하였고 1992년 4월부터는 ‘새날의 주인’, ‘구국전선’ 등 제하의 당 정치신문을 제작 배포하였다.
총책 황인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8년 준법서약서를 쓰고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북한문제에서는 과거와 달라진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 최호경은 1999년 8월 15일 석방되었으며, 1998년 8월 15일 석방된 양홍근은 정형근 의원을 상대로 고문 의혹을 제기해 법적 공방을 벌였다. 중부지역당 강원도당 춘천시책을 담당했던 이철우는 2004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가 2005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선실은 월북한 제주 출신 이화선으로, 국내에서 이선화, 신순녀 등의 이름으로 10여 년간 활동하다가 2000년 8월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애국열사릉'에 묻힌 것으로 확인된다. 1992년 ‘애국동맹’에 가입해 김일성 찬양 노래를 작곡한 혐의로 복역한 윤민석은 이후에도 꾸준히 반미 성향 운동권 가요를 작곡했다. 199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1998년 8·15특사로 석방된 김낙중은 평화주의자, 통일운동가라는 이름으로 강연활동을 하였고, 1998년 역시 8·15특사로 석방된 손병선의 둘째딸도 이 사건으로 일본에 도피해 있다가 체류기간 만료로 송환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석방된 이후 안기부 수사관을 상대로 고문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구국전위사건
<남민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 1988년 특별 가석방된 안재구는 경희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여전히 친북성향을 드러내다가 1991년 재일 조총련 공작지도부와 접선하여 지하당 조직의 지령을 받고 1993년 <구국전위>를 결성한다. 1994년 안재구, 류낙진, 정화려와 하부 조직원 23명이 검거될 때까지 총 12회에 걸쳐 재일공작지도부의 지령을 받았으며, 홍중희, 박래군, 이영기, 김진국 등 각 지역 책임자들을 통해 파악한 재야, 노동, 대학 운동권 동향을 북한에 보고하고 거액의 공작금을 받아 사용하였다. <구국전위>는 1993년 6월 현대그룹 노동자 파업 현장에 개입해 노동운동을 배후 조종하려 했으며,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 <전대협 동우회>에 대한 장악 사업을 진행했고 아들 안영민을 활용하여 ‘대구경북지역 총학생회연합(대경총련)’을 배후 조종하였다. 그리고 ‘반미청년회’ 출신 조혁을 포섭하려다가 체포되어 관련자 전원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안재구는 1979년 말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1981년 교도소에서 만난 직파간첩 임창하를 통해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한다. 그의 형 안용웅은 <남민전> 대외연락부장을 맡고 있다가 월북한 인물이다. 1991년 5월초 안재구는 재일교포 유융범을 통해 백영민과 연결되어 동년 8월 ‘남광민’과 ‘광명’이라는 대호와 함께 지하조직 건설의 지령을 받는다. 그는 딸을 통해 소개받은 정화려를 포섭하여 일본과의 연락책으로 삼는다. 정화려는 일본으로 건너가 백영민을 만나 안재구가 동행시킨 물품을 전달하고 북의 편지와 공작금을 받아 귀환한다.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지하당 건설에 나선 안재구는 교도소에서 알게 된 빨치산 출신 류낙진을 호남지역 책임자로 포섭한다. 1928년생인 류낙진은 남로당에 입당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2년 체포되어 1957년 출소한 뒤에 1971년 <통혁당>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1990년 전향서를 쓰고 19년 만에 가석방된 상태였지만 안재구의 제안을 서슴없이 받아들이고 만다.
1993년 1월초 안재구는 조직 명칭을 <구국전위>로 확정하고 정화려를 비롯하여, 이영국, 김진국, 유성찬, 홍중희, 이범재, 박래군 등을 차례로 가입시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조직체계는 총책에 안재구, 부책 겸 광주전남책에 류낙진, 연락책에 정화려, 선전교양책에 이범재, 원주강원책에 홍중희, 대구경북책에 이영기, 서울중앙책에 박래군 등으로 중앙조직 및 지구조직을 구성하였다. 안재구는 조직원을 규합할 때 무엇보다 사상성과 북한에 대한 충성도를 따졌다. <구국전위> 출판 연락책 김진국은 고려대 철학과 출신으로 출판사를 경영하던 중 안재구에게 직접 발탁된 인물이다.
1993년 6월 안재구는 김진국을 만나 현대그룹 노동자 투쟁을 배후조종할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김진국은 ‘현총련’에 침투하여 동향을 수집하고 안재구가 그것을 북한에 보고했다. 안재구는 현대그룹 노조가 지나치게 과격하여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과격한 투쟁을 지양하게 하라고 했지만 현대그룹 노조를 배후 조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재구는 원주강원지역 책임자인 홍중희를 통해 원주지역 노조활동을 배후 조종하였으며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사업도 전개하였다. ‘대경총련’ 의장 출신인 차남 안영민을 직접 <구국전위>에 가입시켜 학생운동의 상황과 대책을 보고받고 대구경북지역에서 거의 무너진 NL대오를 되살리기 위해 1987~1992까지 ‘전대협’에서 활동했던 간부들로 동우회를 조직하게 하고 사상학습을 지원하였다. 안재구는 ‘전대협 동우회’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전대협’ 의장을 지낸 임종석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대신 김진국을 통해 ‘반민청년회’를 주도하는 조혁을 찾아내고 그를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포섭을 시도했으나, 본인이 안기부에 체포됨으로써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안재구의 평가와는 반대로 조혁은 1990년대 사상전향을 한 뒤 1999년 북한 김정일 정권 타도를 목표로 하는 ‘북한민주화 네트워크’를 결성한다.
<구국전위>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췄지만 국내 재야 운동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은 가지지 못했다. 안재구는 소수 정수분자들을 재야에 침투시켜 세력 확대를 꾀했으나 1994년 결성 3년 만에 꼬리를 밟히고 만다. 이들은 3년간 총 12회의 북한 지령을 받았으며 11회에 걸쳐 북한에 남한의 동향을 보고했다. 재판과정에서 혐의를 부인했지만 안재구로부터 입수한 비밀디스크를 마침내 해독해냄으로써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안재구는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9년 8·15특사로 석방된 뒤 2004년 <국보법폐지 국민연대> 고문 등 현재까지 친북좌파의 원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들 안영민은 <구국전위> 사건과는 별도로 '경북대활동가 조직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하고 ‘말’지 기자를 거쳐 ‘민족21’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호남지역책 류낙진은 8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9년 8·15특사로 석방된 뒤 2002년 기세문과 함께 '백운산 빨치산 위령비'를 건립하려다 적발돼 찬양고무죄로 징역 8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2005년 4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정화려는 구속된 지 4년만인 1998년 8·15특사로 풀려나 2000년대 초반 귀농하였다.
일심회 사건
2006년 10월 4일 국정원은 <일심회> 총책 장 마이클(장민호), 조직원인 민노당 전 중앙위원 이정호, 모 학원장 손정목을 체포했으며, 공안 분위기 조성을 위한 조작사건이라는 민노당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관련자 전원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장 마이클은 1989년 밀입북해 조선노동당에 충성 서약을 하고 남한 내 지하조직 결성 지시를 받아 2002년 1월 <일심회>를 결성하여 국가 기밀을 수집해 북한에 보고하였다. <일심회>는 북한의 대남선전조직인 <한민련>의 10대 강령을 원용해 강령으로 삼았으며 구성원끼리는 단선연계 원칙을 유지했다. 사건 연루자들은 신문 과정에서 묵비로 일관하고 변호인단도 재판의 진행을 방해했으나 <일심회> 수사가 마무리되자 우리 사회의 친북 행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원내에 진출한 민노당의 최기영 사무총장이 핵심 당직자와 당원 명부를 북에 전달한 것을 두고 당내 NL과 PD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당이 쪼개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일심회>에 대한 수사가 청와대 관계자로 확산되는 정황이 나오자 청와대 386들의 강력한 건의를 노무현 대통령이 수용하여 수사가 축소되게 되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대아사를 맞고 이후 배급제를 포기하고 시장에 의존해 인민경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김일성 시신의 안치를 위해 북한 전 주민에게 3년간 옥수수를 공급할 수 있는 액수인 8억9천만 달러를 사용하였다. 금수산태양궁전의 총 부지면적은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17배에 달한다. 수십 만 탈북주민으로부터 가공되지 않은 생생한 북한 정보고 쏟아져 들어오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주사파 진영에서도 변화가 감지되었지만, 국내 주사파 운동권들은 여전히 북한 정보가 조작되었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렵고 인권유린이 있다고 하나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일심회> 총책 장 마이클은 1981년 성균관대에 입학 후 바로 미국 대학으로 유학하고 1987년 초부터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지사 사회부 기자로 재직 중, 북한의 재미공작원인 김윤덕에게 포섭되어, 김윤덕이 준 북한 원전을 탐독하며 점차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심취해 갔다. 포섭 1년만이 1989년 2월 밀입북하여 간첩교육을 받은 후 국내로 돌아와 1994년부터 IT업계 간부 직함을 가지고 동문 및 사업상 지인들 가운데 학생 운동권 출신자들에게 접근해 친교 관계를 유지했다. 1997년 말 고교 후배로서 논술학원을 운영하던 손정목을 포섭하고 1999년에는 이진강과 이정훈도 조직에 가입시킨다. 이후 민노당 최기영과 전 국회의원 비서관 박경식을 포섭해 정보를 수집, 북한에 보고했다.
이정훈은 미국에 유학을 다녀와 영어 공부 전략에 관한 책도 쓰고 실제로 영어교육 사업까지 진행하는 사람인데 북한과 연계해 남조선 혁명을 추구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82년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한 후 초기 NL 학생운동의 리더 중 한사람으로 <삼민투> 고려대 위원장으로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주동해 구속되기도 했고, 민노당 서울시당 대의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일심회> 결성 직후 북한공작원과 접촉해 지령 및 공작금을 수수하기도 했다. 이진강은 1983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으며, 1986년 <애학투련> 관련으로 처벌받았다. 그 역시도 북한공작원과 접촉해 지령 및 공작금을 수수했고 수차례에 걸쳐 국내동향을 장 마이클에게 보고했다. 한기영은 한국외대 85학번으로 이념 서클인 ‘민족사상연구회’에서 활동했고, 그도 역시 1986년 ‘애학투련’ 관련으로 처벌 받았으며, 2000년 1월 민노당 창당 당시부터 대표비서실 국장, 2004년 17대 총선 때는 권영길 후보 전략기획팀장으로 일하는 등 민노당 핵심 당직자로 일해 왔다. 그 역시도 2005년 8월 25일부터 30일까지 베이징을 방문, 다른 조직원들처럼 <일심회>의 비밀 아지트로 알려진 ‘동욱화원’에서 북한공작원과 만나 교육을 받고 민노당과 관련된 자료 등을 보고했다. 성균관대 81학번으로 장 마이클의 입학 동기인 박경식은 장 마이클에게 16차례에 걸쳐 정치권과 군 인사관련 동향 등 국가기밀을 보고하는 등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를 해왔으며 2004년 7월 중국에서 북한공작원과 접촉하였다.
<일심회>는 북한의 <한민전> 10대 강령을 그대로 인용했으며 조직은 단선연계, 복선포치 형태를 취했다. <일심회>는 민노당을 중심으로 통일전선체 구축을 기도했으며, 최기영을 통해 정책결정라인 장악을 시도했다. 또한 이정훈을 통해서는 서울시당 및 서울지역 주요권역별 NL계 모임을 결성하고자 했다. 2006년 11월부터 검거되어 2007년 12월 13일 대법원에서 장 마이클 징역 7년, 손정목 징역 4년, 최기영 징역 3년 6월, 이정훈 및 이진강 징역 3년의 실형이 확정되었고, 2008년 3월 13일 박경식도 3년 6월의 실형이 확정되었다. 검찰은 <일심회> 사건이 2000년 이후 소위 ‘386세대’ 운동권 출신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결성한 '최대 간첩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초기에는 민노당 중심으로 조작 의혹이 집중적으로 제기 되었으나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북한 추종 세태에 대한 비판이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이후 거센 후폭풍에 휩싸여 소위 PD세력이 집단 탈당하여 분당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2007년 12월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온 뒤 2008년 2월 ‘<일심회> 연루자 제명 안건’을 의제로 민노당 임시 전당대회가 열렸으나 NL 계열이 반발하면서 종북주의 청산은 실패로 돌아가고 PD계열은 탈당하게 된다. <일심회> 수사가 진행 중인 2006년 10월 27일 갑자기 김승규 국정원장이 사퇴하고 김만복 당시 1차장이 원장으로 선임되자 청와대 압력설이 흘러나왔다. 이 사건은 북한에 대한 정보가 많이 공개된 상황에서 1980년대식 이분법 즉 '타락한 자본주의가 아닌 고상한 사회주의가 미래 대안이며, 사람을 주인으로 만드는 주체사상이 실현된 사회로 가기 위해 사람을 효율의 대상으로만 보는 신자유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논리가 지식인들 사이에 여전히 만연해 있음을 보여주었다.
2부. 1960~1970년대 좌익 지하당 운동의 특징
1960년대부터 국내에서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하는 지하당 운동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1946년 대구폭동 이후 미군정과 적대적 관계로 변모한 남로당은 6·25 전쟁 중반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다 영남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거의 궤멸되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일시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5·16 군사쿠테타 이후 반공노선이 뚜렷해지면서 잠복 은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1955년까지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이 숙청되었지만, 남한 잔존 세력은 여전히 북한을 우호적인 연대 및 지원그룹으로 여겨왔다. <통혁당>은 김종태가 월북해서 간첩교육을 받고 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지령을 수수해 와서는 당을 결성했고, <남민전>은 북한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주체사상을 수용했으며 총책 이재문은 김일성에게 충성맹세문을 보내기도 했다. <인혁당>도 북한과의 연계를 가지려 했다는 정황이 남아있다.
박정희 정권이 등장한 후 지하로 잠적한 남로당 출신들은 남한 혁명운동을 위해 본격적인 지하당 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북한은 남한 내 혁명운동을 지도할 구심 없이는 종국적인 혁명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남파간첩 김수상을 통해, 대구폭동에 가담한 김종태를 포섭한다. 1964년 3월 임자도를 통해 월북하여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뒤 사상교육과 간첩교육을 받고 남하하여 1965년 11월 김질락, 이문규 등과 <통혁당>을 결성한 뒤 자신이 당수로 취임한다. 김종태는 167회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수해 '청맥' 잡지를 통해 반미 반정부 선전활동을 진행하고, 학사주점을 운영해 재정사업을 진행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다가 1968년 8월 당국에 적발되었다.
<인혁당>은 <통혁당>과 달리 김배영, 도예종 등이 박정희 정권 타도를 목표로 1962년 자생적으로 만든 당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으면서, 반국가단체 조직혐의로 도예종이 징역 3년을 받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인 <재건위> 관련자들은 대규모 봉기를 실제 준비하고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중형이 선고되었다. 핵심 관련자들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다음 날 새벽에 바로 사형 집행이 되었지만 2007년 이후 이루어진 재심에서는 당시 재판부가 인정한 국가변란 도모 협의의 구체적인 증거가 없고 위험성이 과장된 측면이 있다면서 관련자들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1979년 10월 1970년대 최대 지하당 사건인 <남민전> 조직이 적발되었다. 창당 모임을 가졌던 이재문, 신향식 등은 과거 <인혁당>, <통혁당>, <남조선해방 전략당> 출신으로 <민청학련> 세대와 그 이하 청년층이 참여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남민전>은 철저히 비공개로 존재했고, 대중 활동을 위해 반공개적 조직인 ‘민투'를 구성했으며 산하에 노농청년 대중조직을 준비했다.
이 시대의 지하당은 규모도 작고, 1960년대까지 혁명적인 열망을 유지한 몇몇 남로당 이사들과 동조자들의 결사체였기 때문에 남한 반정부세력이나 일반 대중들을 지도하는 전위당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 여러 이유로 조기에 발각되었기에 그 위험도가 축소 평가될 수 있지만, 군부 독재 하에서의 지식인들의 반정부적 태도와 민족주의적 정서를 고려하면 상당한 확장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구좌익계열 주도의 지하당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세대적 단절을 겪게 되고, 이후 지하당 역사는 1980년대를 경화해 젊은 자생 주사파들이 이어받게 된다.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
1961년 12월 28일 북한은 간첩 김수영을 임자도에 침투시켜 동생 김수상과 외삼촌 최영도를 포섭하여 이듬해 초 월북시킨다. 김수상과 최영도는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6개월간 간첩교육을 받은 후 지하당 조직 구성 지령을 받고 임자도로 침투하여 활동을 시작한다. 또한 김수영은 1965년 3월 정태묵을 포섭하여 월북한다. 정태묵은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지하당 조직방법 등을 교육받은 후 임자도에 들어와 친동생 정태연을 포섭하여 1965년 4월 24일 함께 월북한다. 김수상에게 포섭된 대구출신 김종태는 1964년 3월 북한에 들어가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귀환하여 1964년 6월 조카 김질락, 김질락의 서울대 동문 김진환, 이문규 등을 포섭하여 월간지 ‘청맥’을 창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65년 11월 김질락, 이문규 등과 <통혁당>을 창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질락, 이문규, 이관학, 김승환 등 4명에게는 사형, 신광현, 정종운, 이재학, 오병철 등 4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김종태는 1950년 3월 동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대구폭동에 가담하기도 하고 친형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인 김상도의 개인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김수상에게 포섭된 뒤 총 4회 월북하여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간첩교육을 받았으며 1964년 6월 중순 김질락, 김진환, 이문규 등을 포섭하였으며 1965년 11월 말 <통혁당>을 결성, 지도부를 구성한 후 자신이 당수로 취임하였다. 창당 시 김종태는 멤버들에게 북한과의 연결을 숨기고 남한의 독자적 전위당임을 강조했다.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각각 백두1회, 백두5호, 백두6호의 당 번호를 받았다. 김종태는 4차례 월북하여 직접 지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A-3 지령도 167회나 수신하였다.
<통혁당>은 김일성의 통일사업 교시에 입각한 '민족해방 통일 전선' 결성을 목표로 1970년까지 결정적 시기를 조성한 후 일제히 봉기하여 서울의 주요기관을 탈취하는 등 폭력투쟁을 통해 공산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창당선언문에서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당의 지도이념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통혁당>의 투쟁과제는 12개조 강령을 통해 제시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조직계통을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의 이면에 합법적으로 침투하여 핵심당원들을 배치한 후, 결정적 시기에 이들을 동원 유격전과 무장투쟁을 벌인다는 등의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였다.
<통혁당> 관련자 158명 중 당 지도부를 위시한 주요 간부 대부분이 남로당 계열인데 이들을 중심으로 서울대 문리대 등 각 대학 출신 인텔리들을 규합하여 조직을 확대하였다. 좌익투쟁 경력이 있는 남로당 출신들은 ‘정수조직’으로 지하에 잠복시키고, 합법적 지위가 튼튼한 인물들을 표면에 내세워 활동하였다. 김질락은 삼촌인 김종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대학 시절부터 좌익 서클 활동을 했다. 김종태에게 포섭되어 1964년 6월 상경하여 '청맥' 잡지 주간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통혁당> 창당 이후, 후배인 이진영과 신영복을 포섭하여 ‘민족해방전선’ 지도부를 구성하고 산하에 8개 대중단체를 조직해 대중적 기반 확보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각 동아리 주도자를 선발해 <통혁당> 소조를 조직하였다. 경북고등을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다닌 이문규는 '청맥'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하면서, 평소 사상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이재하·윤상환·오병철 등을 조직해 ‘조국해방전선’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1967년 5월에는 산하에 학사주점을 만들고 지방 주요도시에 지점을 설립해 운영하였다. 김질락과 이문규는 1967년 5월 5일 김종태의 제의에 따라 밀입북하여 5월 28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면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공작금 등을 받아 서울로 복귀하였다.
김종태는 4차례 월북하여 투쟁과업 등을 지령받아 실행하고 167회에 걸친 무전지령 및 거액의 공작금과 공작물품을 수령하였다. ‘청맥’은 형식적으로는 대표 김진환, 주간 김질락, 편집장 이문규 등이나 실질적으로는 김종태에 의해 운영되었고 자금 또한 북한에서 제공받았다. 학사주점은 ‘지하당 조직 확산’과 ‘영리 창출을 통한 공작자금 확보’라는 목적 하에 1967년 5월 김종태의 공작금 지원을 받아 이문규가 설립·운영하였다. 또한 서울대 문리대 출신이 주축이 된 ‘1960년대 학사회’라는 주주들의 모임을 기반으로 하여 각 지방 주요도시에 지점들을 설립해 나갔다. <통혁당>은 게릴라식 무장투쟁으로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구체적인 준비를 하였다. 산하에 새문화연구원(서울대 문리대 출신 이진영), 청년문학가협회(성균관대 출신 임중빈), 불교청년회(성균관대 출신 김희순), 동학회(서울대 출신 노인영), 민족주의연구회(동국대 출신 권오창), 경우회(서울대 상대 출신 이종태), 기독청년경제복지회(서울대 상태 출신 박성준), 청맥회(서울대 문리대 출신 신영복) 등 대중단체를 조직·활동하였다. 또한 김종태는 월남의 베트콩식 연합전선을 본떠 이른바 조선민족해방통일전선의 결성을 기도하였는데 재일 조총련의 지원을 받아 결성된 <남조선해방전략당>과 제휴하여 연합전선 결성에 합의하였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1969년 2월 옥중에서 사망한 간첩 최영도에게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했으며, 동년 7월 김종태가 사형 당하자 역시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추모기간을 정해 대대적인 추도식까지 거행하였다. 그 뒤에도 북한은 <통혁당> 재건을 날조하여 북한의 대규모 행사 때마다 유령단체인 <통혁당> 인물을 내세우며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한편 1970년 6월 1일부터는 대남흑색선전방송인 '통혁당 목소리 방송'을 개시했다. 이후 1985년 7월 27일 <통혁당>의 명칭을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하고 '통혁당 목소리 방송'을 '구국의 소리 방송'으로 변경하여 운영하였다. 2005년 3월 23일 <한민전>을 <반제민전>으로 개칭하여 대남선전사업에 적극 이용하고 있다.
핵심관련자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고, 신영복은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박성준은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3년간 옥살이를 한 뒤 1981년 성탄절 특사로 출소한 후 신학 공부에 열중했으며 '비폭력 평화의 물결'과 ‘아름다운 가게’ 등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성공회대 교수를 하였다. 부인 한명숙 씨는 2006년 총리 역임 후 2012년 1월 민주통합당 대표로 선출됐다.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인혁당>은 전 혁신계 일부 인사와 현직 언론인 및 대학 부교수, 강사, 학생 등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1962년 1월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이던 우동읍의 집에서 창당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1962년 4월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민주민족청년동맹> 경상북도 간사장으로 활동하던 도예종을 중앙상무위원회 책임위원으로 정했다. 창당 발기인 대회 사회와 초대 위원장을 맡았던 김상한은 조직 확대 사업을 비롯한 제반 임무를 도예종과 우동읍에게 맡기고 1962년 5월 중순 월북하면서 도예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노동당에 <인혁당> 창당 결과를 보고했다. 우동읍은 1962년 김배영을 월북시켰다. 도예종은 조직사업에 집중하여 학생부, 노동부, 농민부, 청년부, 언론기관부, 합법정당부의 주요인물로서 정도영, 박현채, 김병태, 전무배, 이재문, 오병철, 임창순, 박상홍, 김한득 등 50여 명을 포섭하고 크고 작은 직장 내 소모임을 만들어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1963년 민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다소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1964년 3월 23일 김종필이 한일협정에 대해 언급하자 3월 24일 서울대·연고대 등이 연합해서 4·19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가 발생했고, 다른 대학교로 시위가 번지면서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1964년 2월 당중앙상무위원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4·19처럼 발전시키기로 하고 임창순, 오병철, 서정복 등으로 하여금 전국의 학생조직을 정비하게 하고 박현채를 중앙당 시위 총지휘책으로 기용하는 한편 시위 주도 학생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일보 기자 박범진과 서울대 법대생 황건이 포섭되었다. 5월 30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김덕룡을 비롯한 학생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각계 시민단체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6월이 시작되자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더욱 격화되어 6월 3일 서울대생들이 중앙청으로 밀고 들어갔고, 김재하, 이경우, 박정훈, 이명박 등이 주조하는 고려대 시위대는 시민 3만여 명과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6월 3일 밤 8시 서울시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6·3사태를 <인혁당>이 배후 조종하여 국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관련자를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1964년 7월 27일 중정은 도예종을 포함한 47명을 검거하였으나 서울지검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를 거부했다. 고뇌를 거듭하던 신직수 검찰총장을 비롯한 검찰수뇌부는 구속 만료일인 9월 5일에야 당직검사인 정명래 검사를 통해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자 이에 반발한 이용훈 부장검사, 김병리, 장원찬 검사 등 3인이 반발하고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검찰파동’이 일어났다. 1965년 9월 대법원에서 도예종 징역 3년, 양춘우, 박현채, 정도영, 김영광, 김한덕, 박중기 각각 징역 1년 등을 확정하였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3년 징역형을 복역하고 1968년 출소한 도예종은 서도원과 하재완을 비롯해 흩어져 있는 좌파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경북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여정남을 포섭하여 1971년~1973년까지 경북대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지도했지만 대규모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자 여정남에게 서울을 거점으로 전국학생조직을 결성하도록 지시한다. 1973년 12월 도예종과 서도원은 서울로 올라와 이수병과 김용원을 여정남에게 연결시키고, 이수병, 김용원은 서울지역 학생운동을 지도하던 이철, 유인태, 안양로 등을 여정남에게 소개하였다.
1974년 4월 3일 정부는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4호 선포를 내용으로 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4월 25일 중정 신직수 부장이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을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은 과거 <인혁당>과 재일 공산당원이 개입하여 정부를 전복하고자 한 반정부 조직으로 4단계혁명을 통해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활동했다고 했다. 그 1개월 후인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추가 발표를 하면서 서도원, 도예종 등이 <인혁당>을 재건하고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 지도했다는 내용으로 관련자 180명을 기소하였다. 9월 7일 비상군법회의는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21명, <민청학련> 관련자 27명, 일본인 2명 등 50명에 대해 사형 8명, 무기징역 9명에다가 20명에게는 12년형 이상을 선고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1명 가운데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흥선, 김용원, 여정남에 대해서는 공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한 다음 재심을 청구할 기회도 주지 않고 판결선고 18시간 만인 4월 9일 전원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였는데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후 1982년 3월과 12월에 수감되어 있던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석방된 인사들은 후일 <범민련>에 관계한 사람이 많았다.
국정원과거사위는 2005년 12월 <인혁당> 및 <민청학련>에 대해 이념 써클 수준의 모임이라 규정했고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재심선고공판에서 수사절차상의 하자를 들어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혁당>이 실재했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사회변혁을 추구한 지하혁명조직이라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인혁당>의 주요 인물들 자신이 <인혁당>에 가입한 사실과 <인혁당>의 강령규약 내용을 진술했고, 당시 조선일보 기자 박범진의 증언도 있으며, 도예종으로부터 이념학습 지도를 받은 내용이 담긴 수첩 때문에 1차 <인혁당>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김정강도 1995년 ‘자유공론’ 1월호에서 증언하고 있다. 또한 김상한이나 김배영의 월북 등으로 볼 때, 북한의 지도와 지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혁명을 추구했다고 해도 최소한 북한과의 연계를 가졌거나 가지려고 노력했을 가능성은 있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 사건
1976년 2월 29일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은 태성장이란 중화요리집에서 <남민전 준비위>를 결성하고 발기인 3명이 중앙위원으로 취임, 초기 지도부를 형성했다. 공개적인 반유신 민주화 투쟁을 위해 산하에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 ‘민주구국학생연합(민학련)’도 구성했다. 이들은 1978년 8월 28일 서울 시내에 뿌려진 유신체재 타도 유인물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어 본거지가 적발된 1978년 9월까지 3년 넘게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고 활동했다. <남민전>의 핵심 지도부들은 <인혁당>, <통혁당>, <남조선해방전략당>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북한의 지령이나 자금을 직접 수수하지는 못했지만 북한을 추종하고 이들과의 연계를 지속적으로 시도하였다. <남민전> 구성원은 합법적 활동이 가능했던 공개단체와 종교단체 출신이 많았다. <남민전>은 유인물 살포를 주된 활동으로 하며, 투쟁자금 조달을 위해 ‘혜성대’라는 무장행동대를 조직해 강도 행각도 벌였다. 그리고 결정적 시기가 왔을 때 무장 봉기를 위해 총기와 폭탄을 은밀히 탈취해 보관하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기도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1979년 치안본부는 <남민전> 관계자 검거 당시부터 일관되게 북한과 연계된 간첩사건임을 분명히 밝혔고, 대법원은 1980년 12월 판결 선고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006년 노무현 정부 아래서 구성된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남민전>의 북한 연계 및 추종활동을 부인하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관련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2006년 9월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9월 각각 대법원의 판단에 이견이 없다고 결론지었고,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민주화보상위원회’의 결정에 반대의견을 피력하였다. <남민전> 조직이 해산된 후 1980년대 남한 변혁운동은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반제투쟁을 전략적 목표로 두고 활동하는 NL그룹이 주도했다.
경찰은 1979년 8월 28일 서울시내에 뿌려진 유인물의 살포자로 1977년 서울대 불온전단 사건의 주모자로 도피 중이던 김부섭을 주목하고 추적하여 애인 박미옥과 함께 있는 것을 체포하고 박미옥의 자백에 따라 모 여중 교사 이수일의 집을 기습하다가 엉뚱하게 <민청학련> 수배자이던 이재문과 이문희, 김남주, 차성환 등을 체포하고 방 안에서 사제폭탄 및 총기류, 창 밖으로 내던진 보따리에서 <남민전> 조직망 도표와 명단 및 남조선민족해방전선기를 발견한다.
1964년 <인혁당> 사건으로 1년 정도 복역한 이재문은 출소 후 경북대에서 여정남을 배후 조종하여 학생 데모 주동에 주력한다. 1974년 여정남이 <민청학련> 주모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자 2년 정도 숨어 지내면서 <통혁당>, <인혁당>을 잇는 남한 지하당 구축을 계획하고 1976년 신향식, 김병권을 끌어들여 <남민전>을 결성한다. 신향식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명동 학사주점의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김병권도 1960년대 말부터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된 전력이 있었다. <남민전>은 대중조직으로 들어가 대중을 장악하는 노선을 채택했으며, 대중 투쟁을 선도할 반공개 조직의 필요성 때문에 ‘민투’를 창립하여 수배자 위주의 야간사령부인 <남민전>에 비해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신분으로 구성된 주간사령부로 불렀다. <남민전>은 결성 3년 만에 좀더 대중적인 기구를 결성하기로 하고 1978년 ‘민족구국교원연맹’, 1979년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 ‘민주구국노동연맹’으로 확장을 시작한다.
<남민전>은 반제사회주의를 지향하는 10개 조항의 강령을 채택하고 9조로 된 규약과 10조의 전사 생활규범을 통해 주체사상을 확립하고 조직을 수호하고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규율에 복종하자고 강조했다. <남민전> 조직원들은 조직 가입 후 이러한 규범을 통해 혁명가로서의 기질을 원숙한 단계로 발전시켰다. <남민전> 전사이자 시인인 김남주는 “계급적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그리하면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끓어오르는 인간적인 나약한 갈등은 없어진다. 진정한 혁명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과업을 추호도 흔들림 없이 완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민전>은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재문) 산하에 각 지역책과 전문부서를 두었다. 다른 조직에서 보기 드문 무력부(부장 이동규)를 두고 실제 혁명기에 인민해방군을 창설하는 준비도 했다. 정보부(조태원), 통일전선부(이재오), 총무부(이해경), 조직부(신향식), 교양선전선동부(안재구), 출판부(임준열), 재정위원회(안용웅) 등 전문기관을 두었고 조직 내 반혁명적 요소를 감시하고 적발 및 시정하는 검열위원회(이해경)을 두었다. ‘민투’ 산하에도 청년부, 농민부, 노동부, 학생부, 연합부, 교양부 등을 두고 조직을 이끌었다.
1977년 7월 13일 중앙위원회에서는 북한과의 연계방안을 집중적으로 토의했고 그해 11월 11일부터 15일간 안용웅을 재일북한공작원과 접선하게 해서 공작금을 요청한다. 북한의 인정을 받기 위해 78년 1월초 ‘민투’ 명의의 전단을 살포하고 3회에 걸쳐 ‘남조선 해방전사들이 보낸 인사문’을 발표하는 북한방송을 청취했다. 이들은 베트콩이 자체적으로 베트콩기를 사용하였던 점에 착안하여,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된 도예종 등 8명이 입던 옷을 수집하여 남민전기를 만들어 숨겨두었다. 그리고 대중투쟁을 지도하고 유신 정권을 규탄하기 위한 대외 선전활동으로 여러 차례 불온 유인물을 제작·살포하였는데 애드벌룬과 쑥담배를 이용한 공중 자동살포 방법까지 개발하였다. 이들은 재벌 및 부정축재자들의 재물을 탈취해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그들을 응징한다는 명분하에 ‘혜성대’를 통해 1978년 12월 럭키그룹 구자영 사장, 1979년 3월 종로의 금은방 ‘보금장’, 4월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에 침입하였으며 삼성 이병철과 현대 정주영 회장 등 재벌과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강도 계획도 모의하였다. <남민전>은 ‘무장이 수반된 대중봉기’를 위해 자체 무장력 강화를 추진하였는데 ‘장기(裝基) 작전’이란 명목으로 국가의 무기를 탈취하고 사제폭탄, 화염탄 등도 제조하였다.
<남민전> 총책인 이재문은 1980년 12월 23일 사형이 확정된 후 1년 만에 병사했고, 신향식은 1982년에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김병권은 2005년 9월 사망했다. 안재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88년 10년 만에 가석방되었다가, 이후 또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구국전위>를 건설했다가 재차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전사 호칭을 받은 김남주는 15년형을 선고받고 9년간 복역하다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옥하여 고은, 신경림, 김지하, 박노해 등과 함께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떠받들어졌다. 그의 혁명주의적 시는 학생운동권에서 널리 읽혔으나 ‘반혁명세력 200만 명은 죽여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인 계급주의와 폭력혁명에 심취해 있었다.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해 5·18묘역에 묻혔으며 2010년 전남대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남민전> 출신 중 상당수가 석방 후 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명된<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에 몸담았다. <남민전> 출판부 부장을 지낸 임준열(필명 임헌영)은 2003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주도한 민족문제 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지도위원,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문화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홍세화는 20년간의 망명생활을 거쳐 2002년 영구 귀국한 후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펴냈다. 2011년에는 민노당의 종북 노선에 매우 비판적인 진보신당 대표에 선출되었다. 이재오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1990년대 중반까지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꾀한 민중당 사무총장으로 일했으나 1996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을 거쳐 2006년에는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역임했으며 2007년 이명박 정부에서 특임장관을 지냈다. ‘민투’ 투사로 혜성대 활동(최원석 동아건설 회장 강도 사건 주동)을 한 이학영은 5년의 실형을 받고 <남민전> 활동을 정리한 후 시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2010년 민주통합당 대표 후보로 출마하였다.
부록. 북한의 지하당 조직론(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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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그늘
무소의뿔처럼
2015. 10. 2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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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그늘작가한기홍출판시대정신발매201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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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학 입학 후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투옥되기도 하고 10여 년을 노동운동을 하다가 북한의 실상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전향한 필자가 우리나라의 지하혁명조직에 대해 쓴 책이다. 필자는 이 조직들이 비밀주의가 활동의 원칙인 데다가 관련자들의 함구로 실체 파악이 어려워, 당시 수사자료, 판결문, 일부 관련자들의 수기, 언론 기사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하였기 때문에 허점이 많다고 고백하고 있다. 1부에서는 1990년대 이후 신좌익 주도하에 결성되었던 민족민주혁명당, 중부지역당, 구국전위, 일심회 등을 다루었으며 2부에서는 일제하와 해방 공간에서 활동했던 구 좌익이 주도한, 통일혁명당, 인민혁명당 및 인혁당재건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을 다루었고, 부록으로 '북한의 지하당 조직론'을 실었다. 이 책의 내용 역시 진보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보수의 그늘’처럼 완전히 공정한 시선은 아닐지 모르지만, ‘진보의 그늘’을 살펴봄으로써 극심한 이념 대립의 와중에서 한발 물러서서 더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시야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1부. 1990~2000년대 NL계열 지하당 운동의 역사와 특징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된 자생 주사파는 기존의 구 좌익의 영향을 받지 않고 출발했다. 운동노선에서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을 표방하고 있지만 조직이나 활동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자생 주사파의 원조인 서울대법대 출신 김영환은 1985년부터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과 도서관에 있는 주체사상 비판서적들을 통해 한국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혁명을 위해 민족해방이론(NL)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주변 동료(서울대 고전연구회 82~83학번)들에게 주체사상과 NL이론을 전한 다음 서울대 운동권들에게 본격적으로 보급했다.
1986년 3월 서울대 운동권 1백여 명이 집결하여 ‘구국학생연맹’을 조직한다. ‘구학련’은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1,288명이 구속된다. 그러나 주사파의 활동을 더욱 거세지고 전국적으로 NL계 총학생회가 등장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결성된다. ‘전대협’은 초기에 고대 출신 조혁이 총책으로 있던 반미청년회가 주도한다. ‘전대협’은 반미청년회가 공안당국에 의해 붕괴된 상태에서도 중앙위 주도로 임수경 방북 등 굵직굵직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후 ‘전대협’은 자민통 그룹이 주도하였다.
NL은 PD가 가진 결함(북한과 거리를 두는 태도)과 주체사상에 대한 매력(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사상이라는 자부심) 등이 작용하여 학생운동 지도부들에게 큰 공감을 주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NL 계열은 더욱 기세를 올렸고, 1990년대 초반부터 대거 노동현장과 각종 사회운동 그룹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NL 계열 속에서도 비주사 NL이 있었는데 YTM 사장을 역임한 장명국씨가 당시 주도했던 '새벽' 그룹이 대표적이다. 남한에서 자생 주사파의 성장을 지켜보던 북한 당국은 1989년 간첩 윤택림을 김영환과 접선하게 하여 전면적 연계를 맺는다. 이를 계기로 김영환은 ‘반제청년동맹’ 위원장을 맡게 되고 1992년 <민족민주혁명당>을 출범시킨다. <민혁당>은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를 두었는데 그 아래로 활동가 조직을 두어 그들이 일반 대학생들을 조직화했다.
그러나 독주를 거듭하던 주사파(NL) 진영도 북한의 현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부터 정체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한국 ‘주사파의 대부’였던 김영환마저 북한 체제의 경직성을 목도한 후 ‘북한수령론은 사기극’임을 선언하고 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해 좌우가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사파 운동은 포기했지만 여전히 NL 성향을 지닌 8,90년대 학번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지위를 차지하여 요소마다 중추 역할을 하고 있지만 과거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사건
1998년 12월 18일 남해안에서 격침된 북한 잠수정에서 발견된 유류품에 근거하여 하영옥 등이 관련된 <민족민주혁명당>이 적발된다. 김영환과 조유식 등은 사상전향 의사를 밝혀 공소 보류되었으며, 국정원에 자진 출두하여 자술서 및 자수서를 제출한 15명은 기소유예 처리되었으나, 체포 후에도 전향치 않았던 하영옥, 심재춘, 김경환 등은 구속되었다. 2008년 8월과 9월 영남위원장 최진수, 부산지역위원장 이의엽이 검거되었고 2002년 5월에는 3년 여나 도피해있던 경기남부위원장 이석기가 검거된다. <민혁당>은 김영환이 주도하여 만든 최초의 대규모 신좌익 지하당으로 이후 사회운동에서 주류가 된 NL계의 지도부 역할을 하였다. 창당 초기부터 북한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통일혁명당>과 같은 유형의 당이라 할 수 있다.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2년간 복역하고 1988년 12월 석방된 김영환은 1989년 3월 결성된 하영옥의 지하혁명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의 중앙위원이 된다. 대외적으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직함으로 활동하던 그는 간첩 윤택림을 만나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하고 ‘관악산1호’라는 대호를 받는다. 1991년 5월 조유식(1989년 10월 경 현대중공업 위장취업 사건으로 1년간 복역 후 출소)과 함께 잠수정을 타고 북으로 가서 조선노동당에 정식 입당한 뒤 이듬해인 1992년 3월 16일 <민혁당>을 정식으로 창당한다. 중앙위원회 산하에 경기남부, 영남, 전북위원회 등 지역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위원회 아래 성남, 울산, 부산 등 지역별 위원회와 산하 시 단위 지부를 결성한다. 그리고 학생, 노동, 재야 등 부문별 사업부를 운영하고 중앙 단위의 부문별 사업지도부를 조직한다.
1992년 4월 12일 북한으로부터 40만 달러(당시 약 3억 원) 등을 지급 받아 조직관리비, 선전물 제작, 선거지원금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기관지 ‘빛’을 14회에 걸쳐 제작 배포하고 98회의 북한 지령 수수 및 국가기밀을 북한에 넘겨주었다. 북한 연락 담당인 '말'지 기자 조유식은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자료를 탐독하여 북한에 보고할 목적으로 '말'지에 기고하였고, 취재 명목으로 해외출장을 가서 북한 공작원 및 간첩과 접선하여 국가기밀을 보고하는 한편 공작금도 수령하였다. 하영옥은 1997년 7월 김영환의 <민혁당> 해산에 반발하여 당조직을 수습하여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 등에 대한 조직 관리를 해 오던 중 심재춘을 포섭하여 그의 도움으로 직파간첩 원진우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새로운 대호 ‘광명성’을 부여받고 <민혁당> 총책에 임명된다. 1998년 12월 18일 북한의 반잠수정이 격침된 후 조직보위를 위해 심재춘 등과의 연락을 끊었지만 북한 지령 수수 등 반국가 활동은 지속한다. 심재춘은 1988년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한 후 주체사상에 심취되어 1991년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하고 1993년부터 서울대 총학생회 지도책으로 활동한다. 1998년 하영옥의 지시로 원진우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도피를 도왔으며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하고 ‘광명성91호’라는 대호를 받고 하영옥의 통신연락 담당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한국외대 출신의 김경환은 ‘반제청년동맹’ 조직원으로 활동하던 중 말레시아 국적으로 위장한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 진운방 부부와 만나고 이후 김영환과 진운방 사이의 중간 연락책 임무를 수행하다가, 1991년 9월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관모봉’이라는 대호를 부여받았다.
김영환은 17일 동안 북한에 체류하면서 오히려 많은 실망을 한다. 경제적으로는 뒤지더라도 인간애와 환경의 측면에서 우위에 있을 거라 기대했으나 정작 북한은 인간애는 고사하고 환경이나 주체사상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목도하고 북한이 주체사상을 발전시키고 지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회라고 판단, 북한을 모델로 하는 혁명조직인 <민혁당>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1995년 ‘말’ 4월호를 통해 북한 추종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청년단체 ‘푸른 사람들’의 기관지 1996년 1월호에는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는 글을 기고한다. 1997년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이 남행하였고, 1997년 7월 <민혁당>이 해체된 후, ‘말’ 1998년 5월호에서는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비판하면서 북한과의 완전한 결별을 고하였다. 김영환은 전향 후 북한 민주화 운동에 전면적으로 뛰어들어 1998년 한기홍, 홍진표, 조혁 등 전향한 386들과 함께 격월간 ‘시대정신’을 통해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립을 제창했다. 1999년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를 결성 북한 주민의 인권개선 활동을 전개한 공로로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인권상 단체 부문을 수상했다.
김영환의 대북 연락책을 활동했던 조유식은 전향 후 전부터 창업해 운영해오던 인터넷 서점 ‘알라딘’ 운영에 전념하였다. 하영옥은 1999년 9월 구속되어 8년형을 받고 2003년 4월 특사되었고, 김경환은 4년 6월의 선고를 받고 역시 2003년 4월 석방되어 ‘희망제작소’ 홍보센터 본부장으로 일했다. 이석기는 2002년 5월 검거되었으나 2003년 8·15특사로 석방되었고 여론 조사기관인 ‘사회동향연구소’를 설립했으며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2번으로 국회에 입성하였다. 이의엽 부산지역위원장은 2000년 9월말 검거되어 2001년 출소한 후 2010년 이정희가 대표를 맡은 민노당의 정책 위원장을 맡았다가 통합진보당 공동정책위의장이 되었다.
중부지역당(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북한 권력서열 22위로 당 정치국 후보위원인 이선실은 재일교포 신분으로 위장해 입국하여 국내 영주 허가를 받아 1980년대 초부터 약 10년 간 서울에 장기 거주하면서 남한 내부에 북한공작지도부 구축을 시도했다. 1990년부터 민중당을 거점으로 삼아 반민자당연합전선을 결성하고 야당이 집권하면 자기들의 지분으로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요구하여 적화통일의 장애요인을 제거하고 친북정권을 수립한 후 한반도 공산화를 실현한다는 전략을 수립한다. 그리고 김낙중, 손병선, 황인오를 포섭한 후 약 400명의 조직원을 모아 <중부지역당>을 결성하고 1995년 통일투쟁을 전개할 조직적 토대 구축을 시도한다.
강원도 정선 사북탄광을 무대로 활동하던 노동운동가 황인오는 이선실에게 포섭되어 1990년 10월 북한으로 들어가 조선노동당에 가입하고 최호경과 동생 황인욱 등을 끌어들여 <중부지역당>을 결성한다. 산하에 강원, 충북, 충남의 도급 당조직을 두었으며, 강원도 당 책임자였던 최호경은 <중부지역당>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미 1990년 12월에 주사파 운동가 241명으로 ‘1995년 위원회’를 결성해 북한과 연계를 시도하였는데, 강원도당은 이 조직을 기반으로 한다.
1992년 안기부에 의해 이선실이 포착되고 8월 25일부터 김낙중, 심금섭, 노중선, 권두영이 체포되고 이후 손병선과 황인오 등 120명이 체포된다. 구속자 중에 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비서인 이근희가 포함되어 간첩단 조작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1992년 8월 안기부는 먼저 <민중당> 공동대표를 지낸 김낙중의 간첩활동 정황을 포착했다. 1935년생인 김낙중은 두 번째 월북사건으로 7년 형을 선고받고 1980년 만기 출소 후 ‘평화통일연구회’를 설립한 후 통일전문가로 활동하다가 88년 말 한국을 방문한 북경 사회과학대 이상문 교수의 소개로 직파 간첩을 만나 동조자를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고 심금섭과 노중선을 포섭한다. ‘무두봉11호’라는 암호명을 받은 김낙중은 1990년 민중당에 입당하여 공동대표가 되고 공작금으로 받은 돈의 일부를 암달러상에게 환전한 후 총선에 출마한 민중당 후보에게 지원하고, 통일단체로 위장한 ‘평화통일위원회’ 설립 자금으로 쓰기도 한다. 수사과정에서 민중당 정선지구당 위원장인 정운환을 통해 황인오가 드러나 체포되고 중부지역당의 실체가 밝혀지게 된다.
1990년 6월 민중당 창당 발기인 대회에 참석한 이선실은 황인오의 어머니 전재순을 만나 황인오를 남파간첩 권중현에게 연결시킨다. 권중현의 설득으로 황인오는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대둔산 11호'라는 암호명을 부여받는다. 1990년 10월 17일 72세의 이선실, 권중현 등과 함께 월북하여 5일째인 21일 지하당 구축의 구체적인 방법과 기술을 배우고 강원도와 충청도를 망라하는 <중부지역당> 건설의 임무를 받는다. 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공작금을 건네받고 돌아온 황인오는 동생 황인욱을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시키고 전 민중당 성남을 지구당 위원장인 최호경을 포섭한다. 최호경이 추천한 은재형, 정경수도 입당시킨 후 1991년 7월 31일 <중부지역당> 결성식을 갖고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의 그것을 차용한 강령과 규약을 채택한다.
조직 체계는 황인오를 책임 비서로 하며, 검열책 최호경, 원 멤버였지만 역량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된 은재형 대신 장창호를 선전책, 조직책 정경수 등 3인으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산하에 강원도당위원회 충북도당위원회, 충남도당위원회와 편집국을 설치하였다. <중부지역당>은 이선실의 지휘 하에 ‘1995년 적화통일 실현’을 목표로 삼고 주사파 핵심인자를 포섭한 뒤 학원, 노동, 언론, 문화계로 침투하였다. 기독교계 운동조직으로 ‘김창준 돌격소조’, 청년학생운동 조직으로 ‘8·28 학생동맹’, 노동운동 조직으로 ‘5·1 노동동맹’, 농민운동 조직으로 ‘11·11 농민동맹’, 지역·분야별 조직 부문 대오를 두었다.
황인오는 총 41회 북한 방송 지령을 수령하고 19회에 걸쳐 공작활동을 보고했으며, 황인오의 동생 환인욱은 신민당 이상수 의원의 개인 비서인 이근희로부터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에 보고하였다. 황인오는 북한의 '구국의 소리' 방송청취팀을 운영하면서 '백두산'이란 이름의 전단을 제작하여 대학가·노동 현장 등에 배포하였고 1992년 4월부터는 ‘새날의 주인’, ‘구국전선’ 등 제하의 당 정치신문을 제작 배포하였다.
총책 황인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8년 준법서약서를 쓰고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북한문제에서는 과거와 달라진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 최호경은 1999년 8월 15일 석방되었으며, 1998년 8월 15일 석방된 양홍근은 정형근 의원을 상대로 고문 의혹을 제기해 법적 공방을 벌였다. 중부지역당 강원도당 춘천시책을 담당했던 이철우는 2004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가 2005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이선실은 월북한 제주 출신 이화선으로, 국내에서 이선화, 신순녀 등의 이름으로 10여 년간 활동하다가 2000년 8월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애국열사릉'에 묻힌 것으로 확인된다. 1992년 ‘애국동맹’에 가입해 김일성 찬양 노래를 작곡한 혐의로 복역한 윤민석은 이후에도 꾸준히 반미 성향 운동권 가요를 작곡했다. 199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1998년 8·15특사로 석방된 김낙중은 평화주의자, 통일운동가라는 이름으로 강연활동을 하였고, 1998년 역시 8·15특사로 석방된 손병선의 둘째딸도 이 사건으로 일본에 도피해 있다가 체류기간 만료로 송환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석방된 이후 안기부 수사관을 상대로 고문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구국전위사건
<남민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0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 1988년 특별 가석방된 안재구는 경희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여전히 친북성향을 드러내다가 1991년 재일 조총련 공작지도부와 접선하여 지하당 조직의 지령을 받고 1993년 <구국전위>를 결성한다. 1994년 안재구, 류낙진, 정화려와 하부 조직원 23명이 검거될 때까지 총 12회에 걸쳐 재일공작지도부의 지령을 받았으며, 홍중희, 박래군, 이영기, 김진국 등 각 지역 책임자들을 통해 파악한 재야, 노동, 대학 운동권 동향을 북한에 보고하고 거액의 공작금을 받아 사용하였다. <구국전위>는 1993년 6월 현대그룹 노동자 파업 현장에 개입해 노동운동을 배후 조종하려 했으며, 학생운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 <전대협 동우회>에 대한 장악 사업을 진행했고 아들 안영민을 활용하여 ‘대구경북지역 총학생회연합(대경총련)’을 배후 조종하였다. 그리고 ‘반미청년회’ 출신 조혁을 포섭하려다가 체포되어 관련자 전원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안재구는 1979년 말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1981년 교도소에서 만난 직파간첩 임창하를 통해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한다. 그의 형 안용웅은 <남민전> 대외연락부장을 맡고 있다가 월북한 인물이다. 1991년 5월초 안재구는 재일교포 유융범을 통해 백영민과 연결되어 동년 8월 ‘남광민’과 ‘광명’이라는 대호와 함께 지하조직 건설의 지령을 받는다. 그는 딸을 통해 소개받은 정화려를 포섭하여 일본과의 연락책으로 삼는다. 정화려는 일본으로 건너가 백영민을 만나 안재구가 동행시킨 물품을 전달하고 북의 편지와 공작금을 받아 귀환한다.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지하당 건설에 나선 안재구는 교도소에서 알게 된 빨치산 출신 류낙진을 호남지역 책임자로 포섭한다. 1928년생인 류낙진은 남로당에 입당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52년 체포되어 1957년 출소한 뒤에 1971년 <통혁당>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어 1990년 전향서를 쓰고 19년 만에 가석방된 상태였지만 안재구의 제안을 서슴없이 받아들이고 만다.
1993년 1월초 안재구는 조직 명칭을 <구국전위>로 확정하고 정화려를 비롯하여, 이영국, 김진국, 유성찬, 홍중희, 이범재, 박래군 등을 차례로 가입시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조직체계는 총책에 안재구, 부책 겸 광주전남책에 류낙진, 연락책에 정화려, 선전교양책에 이범재, 원주강원책에 홍중희, 대구경북책에 이영기, 서울중앙책에 박래군 등으로 중앙조직 및 지구조직을 구성하였다. 안재구는 조직원을 규합할 때 무엇보다 사상성과 북한에 대한 충성도를 따졌다. <구국전위> 출판 연락책 김진국은 고려대 철학과 출신으로 출판사를 경영하던 중 안재구에게 직접 발탁된 인물이다.
1993년 6월 안재구는 김진국을 만나 현대그룹 노동자 투쟁을 배후조종할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김진국은 ‘현총련’에 침투하여 동향을 수집하고 안재구가 그것을 북한에 보고했다. 안재구는 현대그룹 노조가 지나치게 과격하여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과격한 투쟁을 지양하게 하라고 했지만 현대그룹 노조를 배후 조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재구는 원주강원지역 책임자인 홍중희를 통해 원주지역 노조활동을 배후 조종하였으며 학생운동에 대한 지도사업도 전개하였다. ‘대경총련’ 의장 출신인 차남 안영민을 직접 <구국전위>에 가입시켜 학생운동의 상황과 대책을 보고받고 대구경북지역에서 거의 무너진 NL대오를 되살리기 위해 1987~1992까지 ‘전대협’에서 활동했던 간부들로 동우회를 조직하게 하고 사상학습을 지원하였다. 안재구는 ‘전대협 동우회’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나 ‘전대협’ 의장을 지낸 임종석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대신 김진국을 통해 ‘반민청년회’를 주도하는 조혁을 찾아내고 그를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포섭을 시도했으나, 본인이 안기부에 체포됨으로써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안재구의 평가와는 반대로 조혁은 1990년대 사상전향을 한 뒤 1999년 북한 김정일 정권 타도를 목표로 하는 ‘북한민주화 네트워크’를 결성한다.
<구국전위>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췄지만 국내 재야 운동을 좌우할 정도의 영향력은 가지지 못했다. 안재구는 소수 정수분자들을 재야에 침투시켜 세력 확대를 꾀했으나 1994년 결성 3년 만에 꼬리를 밟히고 만다. 이들은 3년간 총 12회의 북한 지령을 받았으며 11회에 걸쳐 북한에 남한의 동향을 보고했다. 재판과정에서 혐의를 부인했지만 안재구로부터 입수한 비밀디스크를 마침내 해독해냄으로써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안재구는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9년 8·15특사로 석방된 뒤 2004년 <국보법폐지 국민연대> 고문 등 현재까지 친북좌파의 원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들 안영민은 <구국전위> 사건과는 별도로 '경북대활동가 조직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하고 ‘말’지 기자를 거쳐 ‘민족21’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호남지역책 류낙진은 8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9년 8·15특사로 석방된 뒤 2002년 기세문과 함께 '백운산 빨치산 위령비'를 건립하려다 적발돼 찬양고무죄로 징역 8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2005년 4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정화려는 구속된 지 4년만인 1998년 8·15특사로 풀려나 2000년대 초반 귀농하였다.
일심회 사건
2006년 10월 4일 국정원은 <일심회> 총책 장 마이클(장민호), 조직원인 민노당 전 중앙위원 이정호, 모 학원장 손정목을 체포했으며, 공안 분위기 조성을 위한 조작사건이라는 민노당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관련자 전원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장 마이클은 1989년 밀입북해 조선노동당에 충성 서약을 하고 남한 내 지하조직 결성 지시를 받아 2002년 1월 <일심회>를 결성하여 국가 기밀을 수집해 북한에 보고하였다. <일심회>는 북한의 대남선전조직인 <한민련>의 10대 강령을 원용해 강령으로 삼았으며 구성원끼리는 단선연계 원칙을 유지했다. 사건 연루자들은 신문 과정에서 묵비로 일관하고 변호인단도 재판의 진행을 방해했으나 <일심회> 수사가 마무리되자 우리 사회의 친북 행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원내에 진출한 민노당의 최기영 사무총장이 핵심 당직자와 당원 명부를 북에 전달한 것을 두고 당내 NL과 PD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당이 쪼개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일심회>에 대한 수사가 청와대 관계자로 확산되는 정황이 나오자 청와대 386들의 강력한 건의를 노무현 대통령이 수용하여 수사가 축소되게 되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대아사를 맞고 이후 배급제를 포기하고 시장에 의존해 인민경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김일성 시신의 안치를 위해 북한 전 주민에게 3년간 옥수수를 공급할 수 있는 액수인 8억9천만 달러를 사용하였다. 금수산태양궁전의 총 부지면적은 상암 월드컵 경기장의 17배에 달한다. 수십 만 탈북주민으로부터 가공되지 않은 생생한 북한 정보고 쏟아져 들어오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주사파 진영에서도 변화가 감지되었지만, 국내 주사파 운동권들은 여전히 북한 정보가 조작되었다거나 경제적으로 어렵고 인권유린이 있다고 하나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일심회> 총책 장 마이클은 1981년 성균관대에 입학 후 바로 미국 대학으로 유학하고 1987년 초부터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지사 사회부 기자로 재직 중, 북한의 재미공작원인 김윤덕에게 포섭되어, 김윤덕이 준 북한 원전을 탐독하며 점차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심취해 갔다. 포섭 1년만이 1989년 2월 밀입북하여 간첩교육을 받은 후 국내로 돌아와 1994년부터 IT업계 간부 직함을 가지고 동문 및 사업상 지인들 가운데 학생 운동권 출신자들에게 접근해 친교 관계를 유지했다. 1997년 말 고교 후배로서 논술학원을 운영하던 손정목을 포섭하고 1999년에는 이진강과 이정훈도 조직에 가입시킨다. 이후 민노당 최기영과 전 국회의원 비서관 박경식을 포섭해 정보를 수집, 북한에 보고했다.
이정훈은 미국에 유학을 다녀와 영어 공부 전략에 관한 책도 쓰고 실제로 영어교육 사업까지 진행하는 사람인데 북한과 연계해 남조선 혁명을 추구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82년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한 후 초기 NL 학생운동의 리더 중 한사람으로 <삼민투> 고려대 위원장으로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주동해 구속되기도 했고, 민노당 서울시당 대의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일심회> 결성 직후 북한공작원과 접촉해 지령 및 공작금을 수수하기도 했다. 이진강은 1983년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으며, 1986년 <애학투련> 관련으로 처벌받았다. 그 역시도 북한공작원과 접촉해 지령 및 공작금을 수수했고 수차례에 걸쳐 국내동향을 장 마이클에게 보고했다. 한기영은 한국외대 85학번으로 이념 서클인 ‘민족사상연구회’에서 활동했고, 그도 역시 1986년 ‘애학투련’ 관련으로 처벌 받았으며, 2000년 1월 민노당 창당 당시부터 대표비서실 국장, 2004년 17대 총선 때는 권영길 후보 전략기획팀장으로 일하는 등 민노당 핵심 당직자로 일해 왔다. 그 역시도 2005년 8월 25일부터 30일까지 베이징을 방문, 다른 조직원들처럼 <일심회>의 비밀 아지트로 알려진 ‘동욱화원’에서 북한공작원과 만나 교육을 받고 민노당과 관련된 자료 등을 보고했다. 성균관대 81학번으로 장 마이클의 입학 동기인 박경식은 장 마이클에게 16차례에 걸쳐 정치권과 군 인사관련 동향 등 국가기밀을 보고하는 등 국가보안법 위반 행위를 해왔으며 2004년 7월 중국에서 북한공작원과 접촉하였다.
<일심회>는 북한의 <한민전> 10대 강령을 그대로 인용했으며 조직은 단선연계, 복선포치 형태를 취했다. <일심회>는 민노당을 중심으로 통일전선체 구축을 기도했으며, 최기영을 통해 정책결정라인 장악을 시도했다. 또한 이정훈을 통해서는 서울시당 및 서울지역 주요권역별 NL계 모임을 결성하고자 했다. 2006년 11월부터 검거되어 2007년 12월 13일 대법원에서 장 마이클 징역 7년, 손정목 징역 4년, 최기영 징역 3년 6월, 이정훈 및 이진강 징역 3년의 실형이 확정되었고, 2008년 3월 13일 박경식도 3년 6월의 실형이 확정되었다. 검찰은 <일심회> 사건이 2000년 이후 소위 ‘386세대’ 운동권 출신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결성한 '최대 간첩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초기에는 민노당 중심으로 조작 의혹이 집중적으로 제기 되었으나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북한 추종 세태에 대한 비판이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이후 거센 후폭풍에 휩싸여 소위 PD세력이 집단 탈당하여 분당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2007년 12월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온 뒤 2008년 2월 ‘<일심회> 연루자 제명 안건’을 의제로 민노당 임시 전당대회가 열렸으나 NL 계열이 반발하면서 종북주의 청산은 실패로 돌아가고 PD계열은 탈당하게 된다. <일심회> 수사가 진행 중인 2006년 10월 27일 갑자기 김승규 국정원장이 사퇴하고 김만복 당시 1차장이 원장으로 선임되자 청와대 압력설이 흘러나왔다. 이 사건은 북한에 대한 정보가 많이 공개된 상황에서 1980년대식 이분법 즉 '타락한 자본주의가 아닌 고상한 사회주의가 미래 대안이며, 사람을 주인으로 만드는 주체사상이 실현된 사회로 가기 위해 사람을 효율의 대상으로만 보는 신자유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논리가 지식인들 사이에 여전히 만연해 있음을 보여주었다.
2부. 1960~1970년대 좌익 지하당 운동의 특징
1960년대부터 국내에서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하는 지하당 운동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1946년 대구폭동 이후 미군정과 적대적 관계로 변모한 남로당은 6·25 전쟁 중반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다 영남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거의 궤멸되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일시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5·16 군사쿠테타 이후 반공노선이 뚜렷해지면서 잠복 은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1955년까지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이 숙청되었지만, 남한 잔존 세력은 여전히 북한을 우호적인 연대 및 지원그룹으로 여겨왔다. <통혁당>은 김종태가 월북해서 간첩교육을 받고 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지령을 수수해 와서는 당을 결성했고, <남민전>은 북한과의 연계를 시도하고 주체사상을 수용했으며 총책 이재문은 김일성에게 충성맹세문을 보내기도 했다. <인혁당>도 북한과의 연계를 가지려 했다는 정황이 남아있다.
박정희 정권이 등장한 후 지하로 잠적한 남로당 출신들은 남한 혁명운동을 위해 본격적인 지하당 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북한은 남한 내 혁명운동을 지도할 구심 없이는 종국적인 혁명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남파간첩 김수상을 통해, 대구폭동에 가담한 김종태를 포섭한다. 1964년 3월 임자도를 통해 월북하여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뒤 사상교육과 간첩교육을 받고 남하하여 1965년 11월 김질락, 이문규 등과 <통혁당>을 결성한 뒤 자신이 당수로 취임한다. 김종태는 167회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수해 '청맥' 잡지를 통해 반미 반정부 선전활동을 진행하고, 학사주점을 운영해 재정사업을 진행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다가 1968년 8월 당국에 적발되었다.
<인혁당>은 <통혁당>과 달리 김배영, 도예종 등이 박정희 정권 타도를 목표로 1962년 자생적으로 만든 당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지 않으면서, 반국가단체 조직혐의로 도예종이 징역 3년을 받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인 <재건위> 관련자들은 대규모 봉기를 실제 준비하고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중형이 선고되었다. 핵심 관련자들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다음 날 새벽에 바로 사형 집행이 되었지만 2007년 이후 이루어진 재심에서는 당시 재판부가 인정한 국가변란 도모 협의의 구체적인 증거가 없고 위험성이 과장된 측면이 있다면서 관련자들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1979년 10월 1970년대 최대 지하당 사건인 <남민전> 조직이 적발되었다. 창당 모임을 가졌던 이재문, 신향식 등은 과거 <인혁당>, <통혁당>, <남조선해방 전략당> 출신으로 <민청학련> 세대와 그 이하 청년층이 참여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했다. 유신체제 하에서 <남민전>은 철저히 비공개로 존재했고, 대중 활동을 위해 반공개적 조직인 ‘민투'를 구성했으며 산하에 노농청년 대중조직을 준비했다.
이 시대의 지하당은 규모도 작고, 1960년대까지 혁명적인 열망을 유지한 몇몇 남로당 이사들과 동조자들의 결사체였기 때문에 남한 반정부세력이나 일반 대중들을 지도하는 전위당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 여러 이유로 조기에 발각되었기에 그 위험도가 축소 평가될 수 있지만, 군부 독재 하에서의 지식인들의 반정부적 태도와 민족주의적 정서를 고려하면 상당한 확장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구좌익계열 주도의 지하당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세대적 단절을 겪게 되고, 이후 지하당 역사는 1980년대를 경화해 젊은 자생 주사파들이 이어받게 된다.
통혁당(통일혁명당) 사건
1961년 12월 28일 북한은 간첩 김수영을 임자도에 침투시켜 동생 김수상과 외삼촌 최영도를 포섭하여 이듬해 초 월북시킨다. 김수상과 최영도는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6개월간 간첩교육을 받은 후 지하당 조직 구성 지령을 받고 임자도로 침투하여 활동을 시작한다. 또한 김수영은 1965년 3월 정태묵을 포섭하여 월북한다. 정태묵은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지하당 조직방법 등을 교육받은 후 임자도에 들어와 친동생 정태연을 포섭하여 1965년 4월 24일 함께 월북한다. 김수상에게 포섭된 대구출신 김종태는 1964년 3월 북한에 들어가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귀환하여 1964년 6월 조카 김질락, 김질락의 서울대 동문 김진환, 이문규 등을 포섭하여 월간지 ‘청맥’을 창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65년 11월 김질락, 이문규 등과 <통혁당>을 창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질락, 이문규, 이관학, 김승환 등 4명에게는 사형, 신광현, 정종운, 이재학, 오병철 등 4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김종태는 1950년 3월 동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대구폭동에 가담하기도 하고 친형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인 김상도의 개인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김수상에게 포섭된 뒤 총 4회 월북하여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간첩교육을 받았으며 1964년 6월 중순 김질락, 김진환, 이문규 등을 포섭하였으며 1965년 11월 말 <통혁당>을 결성, 지도부를 구성한 후 자신이 당수로 취임하였다. 창당 시 김종태는 멤버들에게 북한과의 연결을 숨기고 남한의 독자적 전위당임을 강조했다.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각각 백두1회, 백두5호, 백두6호의 당 번호를 받았다. 김종태는 4차례 월북하여 직접 지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A-3 지령도 167회나 수신하였다.
<통혁당>은 김일성의 통일사업 교시에 입각한 '민족해방 통일 전선' 결성을 목표로 1970년까지 결정적 시기를 조성한 후 일제히 봉기하여 서울의 주요기관을 탈취하는 등 폭력투쟁을 통해 공산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창당선언문에서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당의 지도이념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통혁당>의 투쟁과제는 12개조 강령을 통해 제시되었다. 이들은 강력한 조직계통을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의 이면에 합법적으로 침투하여 핵심당원들을 배치한 후, 결정적 시기에 이들을 동원 유격전과 무장투쟁을 벌인다는 등의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였다.
<통혁당> 관련자 158명 중 당 지도부를 위시한 주요 간부 대부분이 남로당 계열인데 이들을 중심으로 서울대 문리대 등 각 대학 출신 인텔리들을 규합하여 조직을 확대하였다. 좌익투쟁 경력이 있는 남로당 출신들은 ‘정수조직’으로 지하에 잠복시키고, 합법적 지위가 튼튼한 인물들을 표면에 내세워 활동하였다. 김질락은 삼촌인 김종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대학 시절부터 좌익 서클 활동을 했다. 김종태에게 포섭되어 1964년 6월 상경하여 '청맥' 잡지 주간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통혁당> 창당 이후, 후배인 이진영과 신영복을 포섭하여 ‘민족해방전선’ 지도부를 구성하고 산하에 8개 대중단체를 조직해 대중적 기반 확보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각 동아리 주도자를 선발해 <통혁당> 소조를 조직하였다. 경북고등을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다닌 이문규는 '청맥'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하면서, 평소 사상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이재하·윤상환·오병철 등을 조직해 ‘조국해방전선’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1967년 5월에는 산하에 학사주점을 만들고 지방 주요도시에 지점을 설립해 운영하였다. 김질락과 이문규는 1967년 5월 5일 김종태의 제의에 따라 밀입북하여 5월 28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면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공작금 등을 받아 서울로 복귀하였다.
김종태는 4차례 월북하여 투쟁과업 등을 지령받아 실행하고 167회에 걸친 무전지령 및 거액의 공작금과 공작물품을 수령하였다. ‘청맥’은 형식적으로는 대표 김진환, 주간 김질락, 편집장 이문규 등이나 실질적으로는 김종태에 의해 운영되었고 자금 또한 북한에서 제공받았다. 학사주점은 ‘지하당 조직 확산’과 ‘영리 창출을 통한 공작자금 확보’라는 목적 하에 1967년 5월 김종태의 공작금 지원을 받아 이문규가 설립·운영하였다. 또한 서울대 문리대 출신이 주축이 된 ‘1960년대 학사회’라는 주주들의 모임을 기반으로 하여 각 지방 주요도시에 지점들을 설립해 나갔다. <통혁당>은 게릴라식 무장투쟁으로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하고 구체적인 준비를 하였다. 산하에 새문화연구원(서울대 문리대 출신 이진영), 청년문학가협회(성균관대 출신 임중빈), 불교청년회(성균관대 출신 김희순), 동학회(서울대 출신 노인영), 민족주의연구회(동국대 출신 권오창), 경우회(서울대 상대 출신 이종태), 기독청년경제복지회(서울대 상태 출신 박성준), 청맥회(서울대 문리대 출신 신영복) 등 대중단체를 조직·활동하였다. 또한 김종태는 월남의 베트콩식 연합전선을 본떠 이른바 조선민족해방통일전선의 결성을 기도하였는데 재일 조총련의 지원을 받아 결성된 <남조선해방전략당>과 제휴하여 연합전선 결성에 합의하였다.
북한은 <통혁당>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1969년 2월 옥중에서 사망한 간첩 최영도에게는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했으며, 동년 7월 김종태가 사형 당하자 역시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추모기간을 정해 대대적인 추도식까지 거행하였다. 그 뒤에도 북한은 <통혁당> 재건을 날조하여 북한의 대규모 행사 때마다 유령단체인 <통혁당> 인물을 내세우며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한편 1970년 6월 1일부터는 대남흑색선전방송인 '통혁당 목소리 방송'을 개시했다. 이후 1985년 7월 27일 <통혁당>의 명칭을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하고 '통혁당 목소리 방송'을 '구국의 소리 방송'으로 변경하여 운영하였다. 2005년 3월 23일 <한민전>을 <반제민전>으로 개칭하여 대남선전사업에 적극 이용하고 있다.
핵심관련자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 등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고, 신영복은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박성준은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3년간 옥살이를 한 뒤 1981년 성탄절 특사로 출소한 후 신학 공부에 열중했으며 '비폭력 평화의 물결'과 ‘아름다운 가게’ 등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성공회대 교수를 하였다. 부인 한명숙 씨는 2006년 총리 역임 후 2012년 1월 민주통합당 대표로 선출됐다.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인혁당>은 전 혁신계 일부 인사와 현직 언론인 및 대학 부교수, 강사, 학생 등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1962년 1월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이던 우동읍의 집에서 창당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1962년 4월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해 <민주민족청년동맹> 경상북도 간사장으로 활동하던 도예종을 중앙상무위원회 책임위원으로 정했다. 창당 발기인 대회 사회와 초대 위원장을 맡았던 김상한은 조직 확대 사업을 비롯한 제반 임무를 도예종과 우동읍에게 맡기고 1962년 5월 중순 월북하면서 도예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선노동당에 <인혁당> 창당 결과를 보고했다. 우동읍은 1962년 김배영을 월북시켰다. 도예종은 조직사업에 집중하여 학생부, 노동부, 농민부, 청년부, 언론기관부, 합법정당부의 주요인물로서 정도영, 박현채, 김병태, 전무배, 이재문, 오병철, 임창순, 박상홍, 김한득 등 50여 명을 포섭하고 크고 작은 직장 내 소모임을 만들어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1963년 민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다소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1964년 3월 23일 김종필이 한일협정에 대해 언급하자 3월 24일 서울대·연고대 등이 연합해서 4·19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가 발생했고, 다른 대학교로 시위가 번지면서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1964년 2월 당중앙상무위원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4·19처럼 발전시키기로 하고 임창순, 오병철, 서정복 등으로 하여금 전국의 학생조직을 정비하게 하고 박현채를 중앙당 시위 총지휘책으로 기용하는 한편 시위 주도 학생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일보 기자 박범진과 서울대 법대생 황건이 포섭되었다. 5월 30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김덕룡을 비롯한 학생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각계 시민단체가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6월이 시작되자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더욱 격화되어 6월 3일 서울대생들이 중앙청으로 밀고 들어갔고, 김재하, 이경우, 박정훈, 이명박 등이 주조하는 고려대 시위대는 시민 3만여 명과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6월 3일 밤 8시 서울시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6·3사태를 <인혁당>이 배후 조종하여 국가 전복을 기도한 반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관련자를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1964년 7월 27일 중정은 도예종을 포함한 47명을 검거하였으나 서울지검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를 거부했다. 고뇌를 거듭하던 신직수 검찰총장을 비롯한 검찰수뇌부는 구속 만료일인 9월 5일에야 당직검사인 정명래 검사를 통해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자 이에 반발한 이용훈 부장검사, 김병리, 장원찬 검사 등 3인이 반발하고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검찰파동’이 일어났다. 1965년 9월 대법원에서 도예종 징역 3년, 양춘우, 박현채, 정도영, 김영광, 김한덕, 박중기 각각 징역 1년 등을 확정하였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3년 징역형을 복역하고 1968년 출소한 도예종은 서도원과 하재완을 비롯해 흩어져 있는 좌파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경북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여정남을 포섭하여 1971년~1973년까지 경북대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지도했지만 대규모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자 여정남에게 서울을 거점으로 전국학생조직을 결성하도록 지시한다. 1973년 12월 도예종과 서도원은 서울로 올라와 이수병과 김용원을 여정남에게 연결시키고, 이수병, 김용원은 서울지역 학생운동을 지도하던 이철, 유인태, 안양로 등을 여정남에게 소개하였다.
1974년 4월 3일 정부는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4호 선포를 내용으로 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4월 25일 중정 신직수 부장이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을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은 과거 <인혁당>과 재일 공산당원이 개입하여 정부를 전복하고자 한 반정부 조직으로 4단계혁명을 통해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활동했다고 했다. 그 1개월 후인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추가 발표를 하면서 서도원, 도예종 등이 <인혁당>을 재건하고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 지도했다는 내용으로 관련자 180명을 기소하였다. 9월 7일 비상군법회의는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21명, <민청학련> 관련자 27명, 일본인 2명 등 50명에 대해 사형 8명, 무기징역 9명에다가 20명에게는 12년형 이상을 선고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1명 가운데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이수병, 우흥선, 김용원, 여정남에 대해서는 공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한 다음 재심을 청구할 기회도 주지 않고 판결선고 18시간 만인 4월 9일 전원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였는데 <국제법학자협회>는 이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이후 1982년 3월과 12월에 수감되어 있던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석방된 인사들은 후일 <범민련>에 관계한 사람이 많았다.
국정원과거사위는 2005년 12월 <인혁당> 및 <민청학련>에 대해 이념 써클 수준의 모임이라 규정했고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재심선고공판에서 수사절차상의 하자를 들어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여전히 <인혁당>이 실재했으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사회변혁을 추구한 지하혁명조직이라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인혁당>의 주요 인물들 자신이 <인혁당>에 가입한 사실과 <인혁당>의 강령규약 내용을 진술했고, 당시 조선일보 기자 박범진의 증언도 있으며, 도예종으로부터 이념학습 지도를 받은 내용이 담긴 수첩 때문에 1차 <인혁당>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김정강도 1995년 ‘자유공론’ 1월호에서 증언하고 있다. 또한 김상한이나 김배영의 월북 등으로 볼 때, 북한의 지도와 지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혁명을 추구했다고 해도 최소한 북한과의 연계를 가졌거나 가지려고 노력했을 가능성은 있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 사건
1976년 2월 29일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은 태성장이란 중화요리집에서 <남민전 준비위>를 결성하고 발기인 3명이 중앙위원으로 취임, 초기 지도부를 형성했다. 공개적인 반유신 민주화 투쟁을 위해 산하에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 ‘민주구국학생연합(민학련)’도 구성했다. 이들은 1978년 8월 28일 서울 시내에 뿌려진 유신체재 타도 유인물에 대한 수사가 확대되어 본거지가 적발된 1978년 9월까지 3년 넘게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고 활동했다. <남민전>의 핵심 지도부들은 <인혁당>, <통혁당>, <남조선해방전략당>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북한의 지령이나 자금을 직접 수수하지는 못했지만 북한을 추종하고 이들과의 연계를 지속적으로 시도하였다. <남민전> 구성원은 합법적 활동이 가능했던 공개단체와 종교단체 출신이 많았다. <남민전>은 유인물 살포를 주된 활동으로 하며, 투쟁자금 조달을 위해 ‘혜성대’라는 무장행동대를 조직해 강도 행각도 벌였다. 그리고 결정적 시기가 왔을 때 무장 봉기를 위해 총기와 폭탄을 은밀히 탈취해 보관하고 남조선민족해방전선기도 제작하여 보관하였다.
1979년 치안본부는 <남민전> 관계자 검거 당시부터 일관되게 북한과 연계된 간첩사건임을 분명히 밝혔고, 대법원은 1980년 12월 판결 선고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006년 노무현 정부 아래서 구성된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남민전>의 북한 연계 및 추종활동을 부인하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해 관련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2006년 9월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9월 각각 대법원의 판단에 이견이 없다고 결론지었고,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민주화보상위원회’의 결정에 반대의견을 피력하였다. <남민전> 조직이 해산된 후 1980년대 남한 변혁운동은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반제투쟁을 전략적 목표로 두고 활동하는 NL그룹이 주도했다.
경찰은 1979년 8월 28일 서울시내에 뿌려진 유인물의 살포자로 1977년 서울대 불온전단 사건의 주모자로 도피 중이던 김부섭을 주목하고 추적하여 애인 박미옥과 함께 있는 것을 체포하고 박미옥의 자백에 따라 모 여중 교사 이수일의 집을 기습하다가 엉뚱하게 <민청학련> 수배자이던 이재문과 이문희, 김남주, 차성환 등을 체포하고 방 안에서 사제폭탄 및 총기류, 창 밖으로 내던진 보따리에서 <남민전> 조직망 도표와 명단 및 남조선민족해방전선기를 발견한다.
1964년 <인혁당> 사건으로 1년 정도 복역한 이재문은 출소 후 경북대에서 여정남을 배후 조종하여 학생 데모 주동에 주력한다. 1974년 여정남이 <민청학련> 주모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자 2년 정도 숨어 지내면서 <통혁당>, <인혁당>을 잇는 남한 지하당 구축을 계획하고 1976년 신향식, 김병권을 끌어들여 <남민전>을 결성한다. 신향식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명동 학사주점의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김병권도 1960년대 말부터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된 전력이 있었다. <남민전>은 대중조직으로 들어가 대중을 장악하는 노선을 채택했으며, 대중 투쟁을 선도할 반공개 조직의 필요성 때문에 ‘민투’를 창립하여 수배자 위주의 야간사령부인 <남민전>에 비해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신분으로 구성된 주간사령부로 불렀다. <남민전>은 결성 3년 만에 좀더 대중적인 기구를 결성하기로 하고 1978년 ‘민족구국교원연맹’, 1979년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 ‘민주구국노동연맹’으로 확장을 시작한다.
<남민전>은 반제사회주의를 지향하는 10개 조항의 강령을 채택하고 9조로 된 규약과 10조의 전사 생활규범을 통해 주체사상을 확립하고 조직을 수호하고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규율에 복종하자고 강조했다. <남민전> 조직원들은 조직 가입 후 이러한 규범을 통해 혁명가로서의 기질을 원숙한 단계로 발전시켰다. <남민전> 전사이자 시인인 김남주는 “계급적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그리하면 자기 자신의 내부로부터 끓어오르는 인간적인 나약한 갈등은 없어진다. 진정한 혁명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과업을 추호도 흔들림 없이 완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민전>은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재문) 산하에 각 지역책과 전문부서를 두었다. 다른 조직에서 보기 드문 무력부(부장 이동규)를 두고 실제 혁명기에 인민해방군을 창설하는 준비도 했다. 정보부(조태원), 통일전선부(이재오), 총무부(이해경), 조직부(신향식), 교양선전선동부(안재구), 출판부(임준열), 재정위원회(안용웅) 등 전문기관을 두었고 조직 내 반혁명적 요소를 감시하고 적발 및 시정하는 검열위원회(이해경)을 두었다. ‘민투’ 산하에도 청년부, 농민부, 노동부, 학생부, 연합부, 교양부 등을 두고 조직을 이끌었다.
1977년 7월 13일 중앙위원회에서는 북한과의 연계방안을 집중적으로 토의했고 그해 11월 11일부터 15일간 안용웅을 재일북한공작원과 접선하게 해서 공작금을 요청한다. 북한의 인정을 받기 위해 78년 1월초 ‘민투’ 명의의 전단을 살포하고 3회에 걸쳐 ‘남조선 해방전사들이 보낸 인사문’을 발표하는 북한방송을 청취했다. 이들은 베트콩이 자체적으로 베트콩기를 사용하였던 점에 착안하여,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된 도예종 등 8명이 입던 옷을 수집하여 남민전기를 만들어 숨겨두었다. 그리고 대중투쟁을 지도하고 유신 정권을 규탄하기 위한 대외 선전활동으로 여러 차례 불온 유인물을 제작·살포하였는데 애드벌룬과 쑥담배를 이용한 공중 자동살포 방법까지 개발하였다. 이들은 재벌 및 부정축재자들의 재물을 탈취해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그들을 응징한다는 명분하에 ‘혜성대’를 통해 1978년 12월 럭키그룹 구자영 사장, 1979년 3월 종로의 금은방 ‘보금장’, 4월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에 침입하였으며 삼성 이병철과 현대 정주영 회장 등 재벌과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강도 계획도 모의하였다. <남민전>은 ‘무장이 수반된 대중봉기’를 위해 자체 무장력 강화를 추진하였는데 ‘장기(裝基) 작전’이란 명목으로 국가의 무기를 탈취하고 사제폭탄, 화염탄 등도 제조하였다.
<남민전> 총책인 이재문은 1980년 12월 23일 사형이 확정된 후 1년 만에 병사했고, 신향식은 1982년에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김병권은 2005년 9월 사망했다. 안재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88년 10년 만에 가석방되었다가, 이후 또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구국전위>를 건설했다가 재차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전사 호칭을 받은 김남주는 15년형을 선고받고 9년간 복역하다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옥하여 고은, 신경림, 김지하, 박노해 등과 함께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떠받들어졌다. 그의 혁명주의적 시는 학생운동권에서 널리 읽혔으나 ‘반혁명세력 200만 명은 죽여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인 계급주의와 폭력혁명에 심취해 있었다.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해 5·18묘역에 묻혔으며 2010년 전남대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남민전> 출신 중 상당수가 석방 후 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명된<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에 몸담았다. <남민전> 출판부 부장을 지낸 임준열(필명 임헌영)은 2003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주도한 민족문제 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지도위원,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등을 지내며 문화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홍세화는 20년간의 망명생활을 거쳐 2002년 영구 귀국한 후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펴냈다. 2011년에는 민노당의 종북 노선에 매우 비판적인 진보신당 대표에 선출되었다. 이재오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1990년대 중반까지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꾀한 민중당 사무총장으로 일했으나 1996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을 거쳐 2006년에는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역임했으며 2007년 이명박 정부에서 특임장관을 지냈다. ‘민투’ 투사로 혜성대 활동(최원석 동아건설 회장 강도 사건 주동)을 한 이학영은 5년의 실형을 받고 <남민전> 활동을 정리한 후 시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2010년 민주통합당 대표 후보로 출마하였다.
부록. 북한의 지하당 조직론(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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