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산의 약속’ 22년… 주류세력 된 운동권
‘군자산의 약속’ 22년… 주류세력 된 운동권충북 괴산 군자산에서 주사파 운동가 700명 결의
단합대회 이후 민노당 통해 제도권으로 진출
각종 시민단체 들어가 진보진영 주도권 장악
임명신 기자 기자페이지 +입력 2023-09-22
‘군자산의 약속’, 일명 9월 테제’가 나온 지 오늘로 22년째다. 2001년 9월22~23일 민족해방(NL)파 운동가들 약 700명이 모여 ‘제도권 진출’의 방향성을 굳혔다. 그때까지 지하활동 내지 실체를 감춘 채 활약하다 사회 각계각층에 진입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자칭 ‘친일·친미 적폐의 나라 대한민국을 뒤엎고 자주·통일을 지향’하던 사람들이다.
‘군자산의 약속’은 어떻게 김일성주의 즉 ‘주체사상(주사)’에 기반한 세계관 역사관이 대한민국 주류가 됐는지 이해하기 위한 필수 지식이다. 이것을 모르고 지난 20여 년 우리사회의 질적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민주노동조합총연합(민노총)을 비롯해 여성·농민·장애인 단체들까지 자신들의 구체적 권익을 넘어 선 시위에 참가하는 이유, 왜 ‘미군철수’ 등 반(反)국가적 구호를 외치는지 알 수 없다.
2001년 9월 가을 ‘전국연합’이 충북 괴산 군자산 보람연수원에서 ‘민족민주전선 일꾼전진대회’를 열었고 거기서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는 전국연합의 정치 조직방침에 대한 해설서’가 나왔다. 그 전문(약 3만5000자)이 손쉽게 인터넷 검색된다. 통칭 ‘군자산의 약속’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전략 레닌의 ‘4월 테제’를 의식한 이름인 ‘9월 테제’로도 불린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은 80년대 이래의 반체제 흐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친북·종북에 ‘면죄부’가 주어진 것이다. ‘종북’이란 용어는 운동권 내 노선·권력투쟁 과정에서 등장했다. 노동운동 중심의 ‘민중민주(PD)’파가 북한을 추종하는 ‘NL’을 조롱하듯 지칭한 표현이다. 6.15선언 이후 북한에 호의적 태도와 실천이 ‘애족’의 범위에 들면서 ‘애국’ 개념은 모호해진다. ‘대한민국=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인식이 제도권 안팍의 교육 및 대중문화를 통해 자리잡게 된다. ‘군자산의 약속’ 주인공들은 그 선봉을 지켜 왔다. .
며칠 전 전자책 ‘군자산의 약속’이 출간됐다. 22년 전 군자산 1박2일 모임 현장에 있었던 민경우 대안연대 대표의 간략하지만 생생한 기록이다. 그는 1983년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국사학과 신입생이 됐다. 운동권 내 ‘문(학)·(역)사·철(학)’ 지식의 우위 때문이었다고 스스로 유튜브 방송에서 말한 바 있다. 운동권의 정신성이 조선말 사대부의 위정척사와 통한다고 지적되는 이유와 통한다.
학부 이래 ‘찐 운동권’ 민 대표에게 2001년 9월 일본 조총련 정치국장 박용이 전화로 10월10일 조선노동당 55주년 기념 남한진보정당·단체 초청 계획을 전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만남, 예술단 교환 등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민 대표는 당시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사무처장으로 조총련(범민련 공동사무국)을 통해 북한(범민련 북측본부)과 전화 소통을 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정부보다 빠른 통신선이었다.
‘군자산의 약속’을 둘러싼 민 대표의 가장 뚜렷한 기억은 “안경호와 오종렬이 만났고 안경호가 모종의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북한을 방문했던 사람들을 통해 북한의 메시지가 군자산 모임에 전해졌음을 뜻한다.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 안경호는 북한의 통일전선부 부부장 8명 중 한 사람이자 대남사업 실세의 한 사람, 그의 남측 카운터파트가 전국연합 상임의장 오종렬이었다. 안·오 만남을 통한 북한의 메시지는 ‘(독자적) 통일운동 대신 민주노동당에 가담해 달라’였다. 그게 군자산 단합대회를 통해 운동권에 확산된 것이다.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로 조국통일을 주도한다는 내용도 수반됐다.
민 대표에 따르면 “주사파 운동권에게 북한의 지위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단순히 통일의 파트너를 넘어 혁명의 선배 또는 기지로 보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의 조언은 일종의 교시에 가까웠다.” 북측 안경호의 조언이 오종렬을 징검다리로 남한 주사파에 빠르게 파급된 배경이다. “정당활동을 둘러싼 논란은 삽시간에 종식됐고 불과 1년 만에 주사파 핵심 거점인 전국연합은 정당활동으로 이동하기에 이른다.”
북한의 2000~2001년 방침 이후 운동권은 민노당 등 합법적 정치활동의 길로 들어섰다. 그 전까지 ‘거리 대중운동’ 위주, “정치권 진출을 일종의 변절”로 보던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한편 정치활동과 관련한 또 다른 쟁점은 정치활동 방향이었고 그것이 대선 후보를 둘러싼 논란으로 이어진다. 독자 정당을 계획한 민중당, 양김 특히 DJ(김대중)와의 연합전선을 중심에 둔 주사파 내지 NL등 87년 하반기 운동권은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 후보 단일화, 독자후보 방침 등으로 나뉘어 각축했다. 92년 대선에서도 재현됐다.
1992년 대선방침 결정을 위한 전국연합 대의원대회에 범민련 대표로 참가한 민 대표는 대회를 마치고 새벽녘 경희대 크라운관을 빠져나올 때를 “30년 지난 지금도 어제일처럼 생생하다”고 회고한다. 행사 보호를 위해 사수대로 나선 10여 명 학생이 쇠파이프를 땅에 부딪히며 도열해 노래하는 광경. “아 우리의 일심단결 대오, 그 대오 앞에서 한결같이 빛나는 우리들의 삶을 이어 이어 조국사랑의 불길로 탄다….” 2001년 가을 군자산 강연·토론 외 문화행사에서 느낀 감동과도 통하는 정서다. 조선일보 류근일 전 주필은 이를 ‘접신’ ‘황홍결’에 비유한 바 있다. 이런 체험을 공유한 사람들의 끈끈한 애정이 오늘날 정치권 시민단체 학계 법조계 등 일각에서 이어진다. 사실상 이념을 초월한 육친적 연대감에 가깝다.
남한 주사파와 달리 북한 김일성은 제도권 내 진보정당을 매우 중시했다는 기록이 많다고 민 대표가 증언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북한의 기본입장은 진보정당 강화였으며 2000년 오종렬·안경호 만남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1998년 DJ정부가 출범하면서 전국연합의 주류였던 386 세대들이 대거 이탈해 사실상 제도정치권에 진입했을 때 민 대표는 동지들의 언쟁 장면을 기억하면서 말했다. “주사파 마음의 고향이 북한인만큼 북한에서 정리하면 주사파 전체가 입장통일”을 본다. 민 대표는 이를 “주사파의 말 못할 강점이자 약점”이자 이런 심정적 실질적 ‘북한 의존’이 “내부의 분란을 극복하고 하나로 결집할 수 있게 한 동인”이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남한 주사파운동의 그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로 ‘군자산의 약속’을 들었다.
대부분 거리에 있던 운동권이 2000년 안경호 오종렬 만남을 계기로 제도권으로 이동한다. 이 “경이적 변신”을 가능케 한 게 북한의 메시지였다. “군자산의 약속은 그것을 추인한 것에 가깝다.” ‘군자산의 약속’을 계기로 주사파가 민노당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하면 마치 전국연합 3파가 나름의 논의와 토론을 거친 결정처럼 비치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다”고 민 대표는 강조했다. 운동권의 분열과 지난한 논쟁에 북한이 결정적인 종지부를 찍어 준 것이다.
민 대표는 또한 운동권의 “상식을 초월한 패권적 색채”를 짚었다. “(우리나라 운동권이) 1980년대 중반 레닌주의로 통일됐다. 레닌주의에선 진리를 가르는 기준이 당파성 즉 당에 유리한지 여부다.” 이를 “강도 높게 물려받은 남한의 주사파”가 “고비마다 특유의 패권주의로 무리수를 두었다”고 지적했다. 1996년 연대사태, 2000년 중반 민노총·민노당 장악 과정도 그랬다는 것이다.
“1987년 봄부터 학생운동의 노선 전환(유연한 구호와 투쟁 전술)도 북한의 영향이 컸다. 이를 배경으로 학생운동의 대도약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이 만들어졌다. 범민련 중심의 통일운동을 하던 주사파가 ‘군자산의 약속’을 계기로 진보정당 운동으로 전환한 것도 외견상 주사파 운동의 대중적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런 민 대표의 평가는 북한 대중운동 전략전술의 노련함을 말해준다.
80년대 운동권이 과격해지는 가운데 북한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등을 통해 유연하고 부드러운 대중 전술을 구사했다. 한편 복종과 통일을 요구했다. “2007년 대선에서 주사파가 집요하게 심상정·노회찬이 아니라 권영길을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제어하기 쉬운 존재를 원한 것이다. 2004년경부터 전국연합 3파를 비롯한 주사파 조직들이 빠르게 민노총과 민노당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전국교사노동조합(전교조)’ ‘더불어민주당’도 예외가 아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