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11

08 [인터뷰] 金大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 월간조선



[인터뷰] 金大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 월간조선

09 2008 MAGAZINE

월간조선 


[인터뷰] 金大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
“임기 끝난 평통 자문위원 확 바꾸겠다”


백승구
⊙ 명함 1만3000장의 얼굴 기억하는 조직전문가
⊙ “박영준 전 비서관은 황소 같은 사람.
現 정부를 위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자’고 다짐”
⊙ “노무현 정권 때 좌파성향 자문위원 대거 위촉”(정부기관 관계자)

金大植
⊙ 1962년 전남 영광 출생.
⊙ 경남고·동의대 졸업. 한남대 석사. 일본 오타니대 문학박사.
⊙ 부산 동서대 일문과 교수, 대한일어일문학회장, 한국일본학연합회장, 전국대학교 학생처장협의회
32代 회장, 바른대학 교육실천협의회장, 17대 대통령직인수위 사회교육문화분과委 인수위원.


대통령 자문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평통)가 변하고 있다. 
관변단체라는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통일시대를 주도하는 ‘힘있는’ 헌법기관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특별팀을 만들어 내부 조직에 대한 쇄신도 준비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할 민주평통법 개정까지 준비 중이다. 

변화의 핵심은 지난 10년 동안 햇볕(포용)정책의 홍보기관으로 오용된 평통을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기관으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은 지난 6월 평통 사무처장으로 부임한 金大植(김대식·46) 동서대 교수다. 그는 지난 大選(대선)에서 박영준 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과 함께 ‘선진국민연대’를 만든 조직 전문가로, 17代(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사회교육문화분과委(위) 인수위원을 지냈다.


“지구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돌 것”

김대식 사무처장은 지난 7월 중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18박19일 동안 미주, 유럽, 호주에 거주하는 해외 평통 관계자를 만나 李明博(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과 해외 평통자문위원의 새로운 역할을 주문하고 돌아왔다.

―지난 大選(대선) 때 전국을 여섯 번 돌았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았더군요. 앞으로 몇 바퀴나 돌 생각입니까.

“필요하다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돌아야죠. 이번에 워싱턴, 뉴욕, 필라델피아, LA, 런던, 로마, 뮌헨 그리고 시드니까지 들렀습니다. 해외 자문위원들과 교민들이 새 정부의 통일정책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더군요. 특강도 하고 간담회도 가졌습니다. 일정이 빡빡했는데 주재국 공관에서 많은 도움을 줘 일정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었어요. 朴仁國(박인국) 유엔대사는 공관과 유엔 내부까지 친절히 안내해줬어요.”

―반기문 총장을 만났습니까.

“잠깐 봤는데 너무 바쁘시더군요. 반 총장을 만나기 위해 각국 정상들이 줄을 섰더군요.”

―현지 자문위원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우리 韓人(한인)들, 동포들이 정말 대단해요. 짧게는 몇 년, 길게는 30년 넘게 현지에서 생활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독일에서 만난 派獨(파독) 광부 출신의 한 교민은 제 손을 잡고 엉엉 울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잘되어야 한다면서…. 이분들은 자문위원이라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어요. 멀리서 自費(자비)를 들여 강연회나 간담회에 참석한 위원들이 수백 명이나 됐어요. 강연 도중에는 누구 하나 휴대폰을 받는 사람이 없었고, 휴식시간인데도 화장실에 안 갈 정도로 진지했습니다.”

―현 정부의 통일정책을 소개했다는데 자문위원들이 ‘전 정부와 정책 방향이 전혀 다르다’며 혼란스러워하지 않던가요.

“오히려 현 정부의 對北(대북)정책을 찬성하고 있었습니다.”


“비핵개방 3000은 북한의 생활패턴 바꿀 것”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국제협력기금까지 투입해 북한의 국민소득을 3000달러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 ‘비핵개방 3000’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핵을 포기할까요.

“북한이 세계의 흐름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봐요. 비핵개방 3000이야말로 북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국제사회와 협력해 강하게 대처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어요.

비핵개방 3000이 제대로 추진되면 북한 주민의 생활이 달라질 겁니다. 우리도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면서 생활패턴이 바뀌었어요. 1978년에 국민소득 3300달러였는데 사람들이 냉장고가 보급되면서 식생활 전체가 변했죠.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고도성장을 했고요.”

―지난 7월 아세안지역 안보포럼(ARF) 의장성명에 우리 정부가 10·4선언 내용을 빼려다가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에 대한 언급도 동시에 빠졌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연설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을 이행하겠다는 듯이 ‘남북당국의 전면적 대화’를 제의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개인적 견해지만, 6·15 선언과 10·4 선언은 충분한 국민적 합의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닙니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국민과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들어있어요. 두 선언 중에서 국민이 납득하고 남북의 합의가 가능한 것부터 이행하는 게 맞겠지요.”

비핵개방 3000은 서재진, 남주홍, 현인택, 김우상, 남성욱 박사 등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책을 만든 분들이 현재 외국에 나가 있거나 연구기관에 머물러 있어요. 청와대에 이 정책을 추진할 만한 분이 없어 힘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닙니까.

“제도권 안에 들어가야 정책을 추진할 힘이 생긴다는 것에 공감해요. 그러나 그분들이 청와대 밖에서 각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을 안 해요.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조언할 겁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7월 국회연설에서 ‘비핵개방 3000’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대화의 장에 나오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봐요.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죠.”

―대북정책과 관련해 청와대, 통일부, 외교부, 국정원이 서로 손발이 맞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때도 위기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겠죠.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남북의 냉각기간이 상당히 길어질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남과 북이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한 과도기적 상태에 있어요. 이명박 정부는 실용과 相生(상생), 공영의 기준에 맞춰 남북관계를 발전적으로 헤쳐나갈 겁니다.”


“막무가내 지원은 없다”

평통은 헌법에 명시돼 있는 대통령 자문기구이자 범국민적 통일기구다. 현재 평통은 남북간 교류사업·인도적 지원·금강산 육로관광·철도도로 연결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평통은 남북협력 실무기구인 사단법인 ‘남북나눔공동체’도 운영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추진해온 평양 이유식 공장이 조만간 준공된다. 김대식 사무처장은 “인도적 지원과 민간 차원의 교류는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민간교류는 지금보다 더 확대돼야 해요. 개성공단에는 올 연말까지 100개 기업에서 5만여 명이 참여할 것으로 봅니다. 인도적 차원의 지원도 계속될 겁니다. 막무가내로 도와주는 것보다, 북한 스스로 살길을 만들어줘야 해요. 예를 들어, 연탄을 공짜로 줄 것이 아니라 좋은 연탄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지원하고, 산의 황폐화를 막기 위해 삼림녹화 기술을 전수하는 겁니다. 우리는 북한이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도록 경제력을 키워놔야 합니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이후 북한은 남측 인력을 철수시키고, 사소한 일에도 군사적 대응을 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금강산관광은 계속되어야 합니까.

“계속해야겠지요. 곧 해빙무드가 조성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정부가 현대아산 쪽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평통이 뭔가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지금은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어제 통일부장관을 만났는데, 서로 협조할 것은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개성공단도 현재처럼 진행되는 겁니까.

“남북경협은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특구 개발을 중심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개성공단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경험하고 실험하는 학습의 장으로서 중요한 사업 모델입니다. 중요한 것은 북한당국이 시장경제 논리를 인정하고 개성공단의 발전을 위해 지원해야 한다는 거죠.”

―일어일문학을 전공한 문학박사이면서 지난 대선에서 선거조직을 담당했고, 이제는 통일정책을 자문하는 평통 사무처장이 됐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라는 견해가 있는데….

“대학에서 문학사상을 전공했고 韓日(한일)·北日(북일)관계에 대해 강의도 했어요. 非(비)전문가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저는 과거 정권에서 6년간 평통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對北觀(대북관)을 가지고 있어요. 평통의 역할은 통일에 대한 정책과 자문입니다. 그 전제는 국민의 신뢰와 소통이죠. 현재 국정의 모든 면에서 국민과 소통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 이명박 대통령은 평통을 통일정책에 대해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로 보고 있습니다. 저에게 ‘자문위원과 국민들의 의사를 가감 없이 취합해 보고하라’는 뜻에서 사무처장이라는 중책을 맡긴 것 같아요. 평통은 자문회의와 사무처라는 두 수레바퀴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사무처장은 전문성도 있어야 하지만 조직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해요.”


“설거지하다 그릇을 깨는 것은 내가 책임진다”

―책상 여기저기에 통일관련 책들이 많군요.

“저는 학자를 천직으로 여깁니다. 학자로서 끊임없이 공부해요. 통일정책도 마찬가지죠. ‘비핵개방 3000’을 만든 전문가들과 꾸준히 토론하고 공부해왔어요. 저는 현장에서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개인적으로 통일은 갑자기 올 수 있다고 봐요. 점진적 통일이 아니라 북한이 스스로 무너져 갑자기 통일될 때 우리는 대처능력이 있을까요? 준비해야 해요.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분야의 통일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평통이 해야 할 일이 많아요. 현재 평통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요. 분발해야 합니다.”

―조직 전문가답게 벌써 평통을 꿰뚫었군요. 사무처의 한 관계자는 ‘김 처장이 조직을 이미 장악했다’고 했습니다.

“장악이라는 말은 좀 그렇고, 파악했다고 해주세요. 조직의 분위기와 공무원들의 심리, 국내외 자문위원들의 역할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을 뿐입니다.”

―사무처 직원들에게 어떤 점을 강조합니까.

“저는 수동적으로 일하는 걸 싫어해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동기를 부여할 생각입니다. 적극적으로 일을 기획하고, 연출하고, 감독해서 결과를 내야 해요. 예를 들어 제가 사무처 대변인에게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라고 지시하는 것보다 대변인실에서 알아서 기획하고 결과를 내야 합니다. 전국 232개 지역협의회도 마찬가지죠. 저는 ‘열심히 설거지를 해라. 설거지하다 그릇을 깨는 것은 내가 책임진다. 그런데 설거지도 안하고 그릇도 안 깨면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현재 13기 평통 자문위원의 수는 지역대표 3445명, 여성대표 3170명, 재외동포 대표는 1977명 등 총 1만6791명이다. 임기는 2년으로, 2007년 7월 1일부터 2009년 6월 30일까지이다. 문제는 자문위원의 성향이다. 盧武鉉(노무현) 정권 때 임명된 자문위원들 중에는 좌파성향의 인물이 적지 않다고 한다.

노무현 정권 때 인물 스크린 작업을 담당했던 한 정부기관 관계자는 “지난 정권에서 편파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대거 위촉됐다. 자문위원으로 부적절하다는 견해를 청와대에 전달해도 그냥 무시해 버렸다”고 했다.


“자문위원 부적합 견해, 청와대가 무시”

서울의 한 지역신문(종로신문 2008년 6월 16일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난 정권에서 진보성 인사들을 대거 위촉함으로써 사실상 (대통령) 자문에 응한다는 명분이 위축되는 사례를 남겼다. 특히 포상문제에서도 평통 본연의 역할보다도 진보성이 얼마나 강하고 정부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끈끈한가에 대해 포상하는 등 불균형적인 집행으로 점철되는 오류를 남겼다. 또한 지난 정권 때 가장 문제로 지적된 것은 평화통일을 상징해 창안된 비둘기 모형의 심벌마크를 남측 사람이 북측사람을 떠받드는 모양으로 교체한 점이다. 이때 많은 자문위원들이 교체를 만류했지만 진보성 간부들에 의해 결국 교체되는 무리를 저질렀다.>

김대식 사무처장에게 조직의 문제점과 개편방향에 대해 물었다.

“평통은 1981년 창설된 이후 통일시대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 구태를 벗지 못한 관변단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여전합니다. 이런 시각은 평통이 그동안 정권의 통일정책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전락되면서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바꿀 생각입니까.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평화통일시대를 여는 ‘국민운동의 중심체’로 과감히 바꿀 계획입니다. 자문위원이 통일의 중심축이 되도록 할 겁니다. 민주평통법도 국회의 협조를 얻어 바꿀 생각입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는 자문위원은 배제할 겁니다.

남과 북을 잇는 ‘무지개 운동’도 펼칠 겁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나 ‘한번 해보겠다. 도와 달라’고 했어요. 과감한 조직 개혁을 통해 자문위원 숫자를 줄여 실정에 맞게 하고, 해외는 조금 확대할 생각입니다.”

현재 해외 자문회의는 58개국에 2개의 지역회의, 31개의 협의회, 16개의 지회로 돼 있다. 김 처장은 평통 조직이 없는 해외공관에 자문위원을 추가로 위촉할 계획이다. 그는 “이분들을 통해 우리의 통일방안이 국제여론으로 형성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자문위원들의 성향은 어떻습니까.

“국내는 물론 해외도 이념적으로 갈라져 있어요. 극좌와 극우, 진보와 보수로 양분돼 있더군요. 물론 한쪽으로 가면 건강한 조직이 아니지요. 민주주의라는 게 51%의 찬성과 49%의 반대로 굴러가는 게 아닙니까.”

―자문위원들의 임기가 내년 6월까지입니다. 자문위원들을 많이 바꿀 생각입니까.

“임기는 보장해야죠. 헌법기관인데…. 앞으로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자문위원들을 검증할 생각입니다.”

―人的(인적) 쇄신을 하겠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표현해도 되겠지요, 뭐. 대개 한번 바뀔 때마다 55% 정도가 바뀝니다. 쇄신이라는 말을 잘못 들으면 오해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바꾼다는 말이 결국 인적 쇄신하는 거 아닙니까.”


“선거 판에서 표 가져오는 사람이 장땡”



김대식 사무처장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를 통일의 중심축이 되도록 하기 위해 국회의 협조를 얻어 ‘민주평통법’을 개정하겠다고 했다.
―현재 수석부의장이 공석인데요.

“누구라고 말씀을 못 드리지만 좋은 분이 오실 겁니다.”

김대식 처장은 이명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길지 않다. 2005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부산 동서대에서 특강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2005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대학특강을 하면서 처음으로 찾은 곳이 부산 동서대입니다. 대학특강을 기획했던 분이 박영준 당시 서울시 정무국장이었는데 그분이 동서대를 택했어요. 그때 저는 학생처장을 맡고 있었는데, 행사를 준비하면서 박영준 비서관과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지요.”

―정치를 할 생각이 있었습니까.

“전혀 없었어요. 2005년 대학특강 이후 이명박 시장과 가끔 연락할 정도였어요. 이듬해 6월 지방대학 학생처장으로는 처음으로 ‘전국대학교 학생처장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돼 바쁘게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명박 후보가 저를 부르더군요. 당시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 후보군의 한 사람에 불과했고, 지지율도 그리 높지 않았어요. 온갖 루머도 돌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후보에게 인간적으로 반해 돕기로 했어요. 그래서 연말에 학교를 휴직하고 안국포럼에 38번째로 합류한 게 정치의 시작이었습니다.”

―캠프에서 조직을 맡게 된 배경은 뭡니까.

“안국포럼에 와 보니까 이명박 후보가 제게 일을 주지 않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원래 그렇다’고 해요. 제가 할 일이 뭔지를 생각해봤어요. 정책분야는 류우익, 백용호, 곽승준 교수가 꽉 잡고 있었어요. 지방교수 출신인 제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도 이분들에게 묻혀 안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영업을 하기로 마음먹었지요. 대학에서 학생처장도 했고, 사람을 좋아하니까 그 쪽으로는 자신 있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CEO를 했기 때문에 영업의 중요성을 잘 알 거라 생각했지요. 선거 판에서 표 가져오는 놈이 장땡이지 그보다 더 좋은 게 뭐가 있겠습니까.

‘표 수확’을 위해 조직을 만들었어요.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문이 열려 있어야 돼요. 제가 학생처장을 7년 동안 했는데 우리 대학에 시위가 거의 없었어요. 학생회 측이 대자보 하나 붙이는 일도 없었지요. 학생회장과 간부들을 수시로 만나 목욕탕에 가서 발가벗고 얘기했지요. 밥도 같이 먹고요. 선거 때도 그렇게 움직였더니 결과가 하나 둘씩 나오더군요.”

김 처장은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 측의 국민참여본부장 겸 대외협력위원회 총괄단장을 맡으면서 여러 가지 일화를 남겼다.


“현장 감각 뛰어난 사람”

“경선이 한창 치열할 때였습니다. ‘이명박 지지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는데 이 정보가 상대 측 캠프에 흘러갔어요. 양 캠프의 대변인 공방이 시작됐고, 급기야 상대 측에서 이명박 후보를 고발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캠프 좌장이던 李在五(이재오) 전 최고위원을 찾아가 ‘설거지를 하다 보니 그릇을 좀 깼다. 일이 어찌 되었건 간에,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라고 했더니, 이 최고위원은 ‘괜찮다! 전쟁터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좀 더 열심히 해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때부터 가속도가 붙어 잠을 자지 않고 뛰었어요..”

―경선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기고 있었지만, 당내 대의원단 조사에서는 지고 있었습니다.

“대의원단이 문제였어요. 이명박 후보에게 ‘여론에서 승리하고 선거에서 지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지금 당장 전 조직을 현장으로 내려 보내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고 건의했죠. 이명박 후보는 곧바로 캠프 사람들에게 ‘앞으로 눈도장 찍는 사람은 선거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모두 현장으로 내려가서 운동하라’고 하더군요. 경선에서 승리하자 이명박 후보가 해단식 때 ‘김 교수처럼 현장 감각이 뛰어난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며 칭찬해 주셨어요. 피로가 한꺼번에 풀렸습니다.”

김대식 처장은 대선에서 ‘왕비서관’으로 통한 박영준 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과 함께 선대위 공동네트워크팀장을 맡았다. 두 사람은 전국 243개 지역구를 여섯 번이나 돌면서 463만 명 규모의 ‘선진국민연대’를 조직했다. 그때부터 이명박 사람들은 그를 ‘네트워크의 鬼才(귀재)’라고 불렀다.

“선진국민연대를 구성하는 단계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현재 모든 조직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시멘트를 부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 지침을 하달할 때 네거티브도 막을 수 있고, 대응할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한번 해보자’고 했습니다.

전국 243개 선거구를 섬까지 빼지 않고 모조리 돌았습니다. 비행기, KTX를 빼고 자동차 거리만으로도 19만6000km를 달렸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를 ‘투 캅스’라고 불렀어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大勝(대승)을 거뒀지만 현재 지지율은 곤두박질을 치고 있습니다. 쇠고기 문제, 촛불시위, 독도사태, 금강산관광객 피살 등 일련의 사건에 대해 제대로 대응을 못했고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대통령께 ‘이명박 스타일’대로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대통령께서 고개는 끄덕이셨지만…. 이 대통령은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새벽까지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대통령이 무슨 잘못입니까. 우리 참모들이 잘못했지요. 더 낮은 자세로 가야 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통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 의장이지만, 실무책임은 사무처장이 져야지요.”


“박영준 비서관은 황소 같은 사람”

―박영준 전 비서관과 자주 연락합니까.

“박영준 비서관은 忠臣(충신) 중의 충신입니다. 박 비서관이 청와대를 나온 후 ‘우리 둘은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자. 그래서 이 정부가 성공한다면 그걸로 만족하자’고 서로 다짐했습니다. 그는 좋은 친구이자 훌륭한 동지입니다.”

―박 전 비서관에 대해 ‘기회주의자’라는 평이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황소 같은 사람입니다. 얼굴 표정이 무뚝뚝해 보이지만, 굉장히 부드러운 남자예요. 대통령에게 직언도 서슴없이 하는 사람입니다.”

―박영준 전 비서관이 진정한 충신이라면 그를 옆에 두지 못한 이명박 대통령도 손해겠군요.

“기회가 다시 오리라고 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박 비서관은 분명히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현 정부의 성공을 위해 활동하리라고 봅니다. 어디에 소속돼 활동해야 잘하는 것이고, 외부에 있다고 못하는 게 아닙니다.”

―김 처장도 대통령에게 직언을 합니까.

“물론 필요할 때마다 합니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한테 목숨을 바치는 겁니다.”

―김 처장은 인수위원 시절부터 여러 자리에 거론됐습니다. 초대 사회정책 수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 비례대표, 대교협 사무총장 등…. 그런데 막상 평통 사무처장으로 임명되니까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거기간 내내 ‘일이 끝나면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평통 사무처장으로 온 데 대해 ‘권력의 후미진 곳으로 갔다. 좀 있으면 좋은 데로 갈 거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왜 학교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분도 있어요. 변명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평통 자문위원을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했던 게 있어요. 그래서 맡았지요.”

김대식 처장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9기 자문위원을 지낸 후 2003년부터 2007년까지 11·12기 자문위원을 지냈다. 이런 이력 때문에 ‘金大中(김대중)·노무현 측 인물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다.

“평통은 초당적 기구입니다. 자문위원을 지냈다고 무조건 그 정부의 사람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거죠. 지난 정권에서 정치적으로 활동한 것도 아니고, 교수로서 사회적 활동과 통일문제에 관심이 있어 자문위원을 맡았을 뿐입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북한에 대해 지나친 낙관론을 갖고 접근한 대북유화정책이라고 생각해요. 상호주의 원칙을 포기해 우리의 협상력을 약화시켰어요. 대북지원에 투명성이 결여돼 국민의 신뢰를 잃었고, 북한의 협상력만 세졌죠. 6·15 공동선언은 남북정상이 처음 만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북한 핵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은요.

“과도한 민족중시적 자세는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북한이 변할 것이라는 지나친 기대 때문에 북한이 핵실험을 한 후에도 단호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북한에 대화의 주도권을 줘 버린 거죠. 동북아 구상은 脫美(탈미) 경향성을 함축한 논리로서, 실패한 정책입니다.”


張聖萬 동서대 이사장과의 만남

김대식 처장은 이명박 캠프 출신 중에서 보기 드문 호남 출신이다. 金伯駿(김백준)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전북 익산 출신이고, 김 처장은 전남 영광 출신이다. 그는 호적상 1962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59년생이다. 3년이 지나서야 출생신고를 할 수 있었다. 출생신고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시골 농부의 아들(6녀1남)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공부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중학교를 마치고 부산 경남고에 들어갔다. 대통령직위원회 인수위원으로 있을 때 李慶淑(이경숙)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그의 인생역정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이후 부모님께 단돈 천 원을 받은 적이 없어요. 그야말로 잡초처럼 컸지요. 어릴 적 사진이라고는 초등학교 졸업장에 있는 사진이 전부입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건 그야말로 사치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고 싶지 않았어요. 고향에서 남아있으면 농사짓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어요. 부산까지 갈 차비만 마련해 무작정 떠났습니다. 아마 서울까지 갈 돈이 있었으면 서울로 왔을 겁니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놈의 부산 생활은 쉽지 않았어요. 정말 안 해본 일 없이 다 해봤습니다. 하나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다. 제 자취방이 빈민촌의 판잣집에 있었는데, 주인집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인집 딸이 추운 겨울날 부모님 몰래 연탄 한 장을 때 주더군요. 고마움에 어쩔 줄을 몰랐어요. 다음날, 주인 집 딸은 부모님께 혼쭐이 났습니다. 저는 그때의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어요. 혹시 그때 그 여중생이 저를 기억한다면 꼭 만나고 싶어요.”

―도움을 받은 사람 중에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국회부의장을 지낸 張聖萬(장성만) 동서대 이사장님이죠. 제 인생 최고의 스승님이자 제2의 부모입니다. 신앙으로 만났는데 30세인 저를 대학 교수로 임용했어요. 대학 때부터 시작해 30년 동안 저를 뒷바라지하셨죠. 제가 장 이사장님에게 하는 걸 보고 이명박 대통령이 ‘저렇게 한 主君(주군)한테 충성할 수가 있느냐’고 하더군요. 장 이사장님은 제게 인생의 지혜를 아낌없이 나눠줬어요. 그분의 아들이 지난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된 張濟元(장제원) 의원입니다.”

―부모님은 고향에 계십니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고향에 계십니다. 지난 대선 때 대학을 휴직하고 서울에 올라와 있으니까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대선 후 고향 사람들마다 제 얘기를 하니까 ‘아들이 뭔가 잘못했나’싶어 매우 놀라셨어요. 어머니는 인수위원이 뭔지도 모르셨던 겁니다. 고향에 플래카드가 붙고 지역 언론에 자식 얼굴이 크게 나오니까 그제서야 마음을 놓으셨죠.”


남의 밥상까지 들고 가는 정치권

―‘영광 촌놈’이 인수위원도 하고, 48개 중앙부처의 長(장)까지 됐으니 출세를 하긴 했군요.

“‘사람은 올챙이 시절을 알아야 한다’며 ‘겸손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갈 때가 많아요. 인수위원 때는 정말 대단했어요. 한마디 하면 금세 뉴스가 되더군요. ‘야 이거 잘못하면 큰일 나겠다. 학교에도 못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요즘은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에게나 정중히 인사해요.”

―정치가 몸에 맞던가요.

“제가 남한테 싫은 소리를 하면 잠을 못 잡니다. 학생처장 때 학생들하고 다투고 나면 다시 불러 꼭 감정을 풀었어요.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후 덕을 많이 보고 있지만 비애도 적지 않아요. 순수한 마음으로 해도 곡해하는 경우가 많고…. 제 밥상에 수저를 올려놓고 밥을 먹는 것은 괜찮아요.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밥상 전체를 들고 사라져버려요. ‘정치 세계가 이런 거구나’하는 걸 많이 느낍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자라야지요. 교수로 돌아갈 겁니다. 후학을 기르는 것도 큰 공헌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평통 사무처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온 힘을 쏟아 부을 겁니다.”●

[金大植 처장의 조직관리법]

“거울은 절대 먼저 웃지 않는다”

김대식 처장은 지난 대선 때 1만3000여 장의 명함을 받았다. 그는 조직 전문가답게 명함 주인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한다. 이명박 캠프에 들어가자마자 1년 만에 실세로 부상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만이 갖고 있는 조직관리법을 정리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이 인정받았다면 앞으로 50년간은 네트워크를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지켜온 생활신조가 있습니다. 먼저,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둘째, 어제 입은 옷은 오늘 다시 입지 않는다. 셋째, 한 달에 네 번 이발한다. 넷째, 어제 식사한 사람과는 오늘 또 식사하지 않는다.

먼저 잠을 줄이면 한 달 60시간, 1년이면 720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이면 남들이 1년을 살 때 나는 13개월을 사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확보한 시간을 휴먼 네트워킹 시간으로 활용합니다. 시간을 활용하는 데도 방법이 있습니다. 거울을 예로 들어볼까요? 거울은 절대 먼저 웃지 않습니다. 내가 웃어야 거울이 웃지요. 사람을 만날 때도 내가 먼저 웃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마음을 열고 다가옵니다. 이때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을 대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의 특성을 명함에 메모하고 다음날 문자 메시지로 만남의 중요성과 고마움을 알립니다. 특히 중요한 사람의 이름은 휴대폰에 입력해놓고 전화가 걸려오면 상대방의 이름을 먼저 불러줍니다. 그리고 문자나 편지, 전화로 늘 관심을 표현하고 애정을 쏟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생일에 축하메시지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죠. 내가 상대방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관심과 애정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면 상대방은 나와의 인연을 남다르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만남에는 유통기한이 없습니다. 잠을 줄여서 얻은 시간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아 인연을 맺는 것. 이런 생활철학은 조직을 관리하는데 아주 유용합니다. 조직을 관리할 때도 조직원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늘 관심을 갖고 진심으로 대한다면 그 조직은 진정성이 있는 살아있는 조직이 됩니다.

조직의 소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대한다면, 위계질서에 얽매이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진심으로 대한다면, 조직의 소통은 원활하게 이뤄질 것입니다.

문학 하는 사람은 소통이 원활한 편입니다. 저처럼 사람 좋아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잘 웃지만 비를 맞으며 음악을 듣다가 눈물도 흘리고, 또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커피 맛보다는 분위기에 취하는 감성적인 사람이 대체로 조직관리도 잘합니다. 조직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架橋(가교)역할을 잘해 내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러면 조직에 진정성이 살아나고 그로 인해 소통도 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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