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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찌라시를 분석한다 ② – 친일 방어 논리편
2015년 10월 31일 by 심용환
※ 이 글은 「그들의 찌라시를 분석한다 ① – 종북몰이편」의 후속편입니다.
‘야당 정치인들의 아버지들이 모두 친일파다’라는 정말 설득력 떨어지는 찌라시가 돌더군요. 처음 찌라시를 보았을 때 이건 돌아봤자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굳이 글을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목요일에 종북 공세에 이어 이제 친일공세까지 대한민국 상식의 수준이 어디까지 내려간 것인가를 보고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글을 씁니다.
부모가 친일파라고 해서 자녀가 친일파는 아닙니다. 당연하죠. 그러면 일부 정치인 부모의 친일 행각이 왜 문제가 되느냐? 부친의 친일 행적을 적극 부인하려고 한 게 논란을 만든 겁니다. 부모가 친일파니까 너도 정치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누가 봐도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역으로 애국을 했다고 하거나 일제 시대 말단 소위가 무슨 친일을 했냐는 식으로 역사의 진실을 가리려고 하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찌라시를 만들려면, 제대로 만듭시다. 신기남 의원 같은 경우는 예전에 이 문제 때문에 직위를 내려 놓은 적도 있습니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했다, 친일을 했으면 친일을 했음을 인정하고 자식된 도리로 죄송하고 사과한다, 이러면 멋질 텐데, 그런 모습은 보기 힘듭니다.
김성수, 김활란처럼 중일전쟁 이후 친일활동을 했던 분들의 경우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친일활동에 대해 이분들이 한 번이라도 공개적으로 사과한 적이 있던가요? 혹은 문서로라도 참회의 기록을 남겼습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여러 각도에서 친일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펼쳐지더군요.
몇 가지 인상적인 공격이 있어서 소개도 하고, 답변도 달아드립니다.
친일파 변호 논리 1
이승만 대통령 친일 청산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을 잣대로 광복 직후를 평가하니까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광복 직후 우리나라 문맹률이 80%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개화기부터 일제 점령기까지 나라를 이끌 만한 배움을 가진 분도 수가 적었을 뿐더러, 그 당시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아니면 일본 치하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이후 입법, 사법, 행정부를 가진 나라를 세워 본 적이 없는 국민들이 어떻게 정부를 수립하고 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보니 부득이하게 일본정부에서 일한 사람들을 쓴 면이 있지요. 그리고 이건 김일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친일파라는 범위를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의 친일청산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입니다.
일본 정부에서 일한 것만으로 친일파라면 그 당시 면사무소 직원도 친일파네요. 그것도 공무원에 지원해 일했으니 적극 가담자인가요? 공업이고 상업이고 발달이 안 되어 먹고 살 것이 없던 시대, 땅 파먹고 사는 농부가 아닌 이상 돈 벌고 좀 더 나은 생활을 해보고 싶은 사람은 일제 치하라도 공부하지 않았겠습니까? 면서기라도 안했겠냐구요? 학교 선생님은요? 좀 스펙트럼을 넓혀 생각해보시죠.
정말 웃기지도 않는 궤변입니다. 아니 전형적인 물타기 논리죠. 해방 때 우리 민족 전체가 3천만. 반민특위 때 잡혀온 사람이 300명 정도입니다. 학교 선생님, 면사무소직원 다잡아 온 줄 아십니까?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을 보더라도 5천을 넘지 않습니다. 반민법도, 인명사전도 모두 엄격한 기준과 등급을 가지고 ‘친일’을 규정하고 분류했습니다.출처: 역사정의실천 시민역사관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당시 면사무소 직원, 학교 교사들, 친일의 최전선에 있다는 비판 피하기 어렵습니다. 위안부 동원 및 각종 물자 동원에서 적극적 행동을 보였던 사람들은 당시 한인 면사무소 직원이었습니다.
일제 때 학교 선생 아무나 되지 못했습니다. 사범대학에 대한 일제의 관리는 매우 철저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라고까지는 부르지 않지만 역사 앞에서 큰 죄를 지었고, 친일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상대는 자료와 기준을 가지고 얘기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그럴 듯한 말장난으로 논점을 흐리고 있습니다. 아베가 했던 ‘침략은 기준에 따라 다르게 정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리고 ‘어쩔 수 없었다’는 말도 신중하게 써야 합니다. 만약 친일한 이들을 대폭 등용한 것이 정말 그들의 주장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 일부 친일 기술자들만 받아들였던 북한은 어떻게 1971년까지 남한 경제를 앞섰나요? 이승만도 국가 운영 경험이 없었지만 대통령이 되어 국가 운영을 했고, 김병로도 경험이 없었지만 대법원장이 되어 지금까지 존경을 받습니다.
저런 논리를 펴는 이들은 아마 십중팔구 기존 교과서 읽어보신 적이 없을 겁니다. 수능이나 한국사능시 공부해본 적 있나요? 교과서의 어느 곳에도 친일 청산 실패를 단순히 이승만의 죄로 몰아가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시험에서도 반민특위 반대 선언과 반공주의로 친일 문제 덮는 것만 나옵니다. 이들이 지키고 싶고 왜곡하고 싶은 내용들은 사실 분량상 제대로 반영도 안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강조되지도 않습니다.
친일파 변호 논리 2
군조직과 시스템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시네요. 인적 자원이 부족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한국전쟁이 왜 ‘대위들의 전쟁’으로 불렸는지 그 상황을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사단급 제대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은 전무했고, 그나마도 일본군 출신이 없었다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은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무지막지한 소리입니다. 그러면 1945년 당시 1950년 한국전쟁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맥아더가 친일파를 온존시키려 했다는 말입니까? 예정설도 아니고, 이는 결과에 끼워 맞춘 주장입니다. 더구나 백선엽은 34살에 육군 대장이 됐습니다. 친일 군인들의 수준이 이 정도였는데, 그들이 전쟁에 필수적인 요소였을까요. 그리고 전쟁에서 싸우다 죽어갔던 숱한 우익청년들이나 학도병들이 모두 친일 장교들에게 훈련 받아서 남침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더구나 이는 임시정부 광복군의 훈련 수준도 무시하는 말입니다. 미국과 장제스에 의해 오랜 지원을 받았고 oss와 서울 진공 작전까지 했던게 광복군의 훈련 수준이었습니다. 못지 않은 독립군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북한이 미워도 그렇지, 동족 막겠다고 친일파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건 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찌라시라지만 최소한의 명분을 갖고 논지를 전개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북한을 동족이라 얘기했으니 이제 반공 프레임으로 몰아가시면 됩니다.
Filed Under: 시사, 역사, 정치
필자 심용환
작가,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인문학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으며 종횡무진 중. 『역사 전쟁』 『단박에 한국사』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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