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뉴스]일본군 ‘위안부’ 알고 있나요? - 경향
[정리뉴스]일본군 ‘위안부’ 알고 있나요?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수정201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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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다른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본 적이 없는 나는 너무나 놀라고 무서웠다. (…) 군의관은 강제로 내 옷을 벗기고 아래를 검사했다. 우리 모두는 검사가 끝난 후 한참을 걸어서 어떤 건물로 갔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악몽같은 생활을 시작한 위안소였던 것이다.”
1921년에 태어나 15세때 취업사기를 당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김복동 할머니의 증언입니다. 김 할머니는 지옥같은 위안소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독한 중국 술을 세병이나 마시고 3일 동안 기절한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일본군 ‘위안부’ 알고 있나요?>를 출간했습니다. 역사왜곡교양서 시리즈 제2권으로 김 할머니 같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생하고 참혹한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한일 외교장관회담 결과를 두고 비판이 거센 지금 같은 시기에 더 관심을 두고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책은 전국 대학도서관과 연구기관, 시민단체 등에 배포될 예정입니다. 내년 초에는 일본어판도 출간돼 일본 대학과 관련 단체 등으로 전달됩니다.
중국내 일본 점령 지역 표시 지도. 1937년 9~12월 일본군이 점령한 중국 저장성과 장쑤성, 안후이성 일대를 표시한 지도. 일본군 점령 지역에는 병참시설로 위안소도 함께 설치되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일본군 위안소는 처음에는 대부분 중국에 설치되었다가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동남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일본군이 가는 곳이면 ‘위안부’ 집단도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2015년 12월1일 개관한 중국 난징 리지항 위안소 옛터 진열관. 마당에는 임신한 상태로 연합군 포로가 된 박영심을 형상화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박영심 할머니가 있던 중국 난징 일본군위안소 전경.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1921년 평남 남포에서 태어난 박영남 할머니는 1939년 17세에 일본인 순사가 와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하여 난징 위안소로 끌려갔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일본병사가 군도를 휘둘렀고 다락방 고문실에서 전라로 체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군 위안부 여성들은 구타, 고문, 집단 강간, 나아가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골방에서 자행되는 군인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일신보 1944년 10월27일자 군위안부 모집 광고.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1944년 매일신보에 게재된 신문광고입니다. 이에 대해 일본 우익은 공개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군위안부를 모집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광고의 시점이 전쟁 말기로 1944년인 점, 군을 언급한 점, 광고가 난 신문이 조선총독부 기관지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군 승낙 혹은 관여 없이 이런 광고는 게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 할머니(1929-1970).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군 위안부 피해자 대부분은 공장에 보내준다거나 정신대 등 취업사기나 유괴, 납치 등에 이해 동원되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강덕경 할머니는 학교에서 일본인 담임 교사가 “배우기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며 여자근로정시대를 모집한데 응했다가 위안부로 동원됐습니다.
중국 칭타오 위안소 앞에 모인 일본군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저자는 일본군 당국이 병사들을 전쟁터에 묶어 두기 위해 ‘위안부’라는 ‘마약’을 끊임없이 복용하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상관은 ‘솔선’하여 위안소에 갔으며 병사들에게 위안소에 가도록 장려했다고 합니다. 한 일본군 병사의 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즐거운 외출일이다. 이시카와와 둘이 우선 조선 정벌을 하러 갔다. 내 순서는 네 번째였다. 도미코, 경상남도, 다음으로 지나를 정벌하러 갔다. 내 순서는 첫번째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전에 스무살 때 애인인 야에와 꼭 닮은 그리운 다케7호의 지에코를 방문했다. 그리고 다소 시끄러운 일이 일어났는데, 결국 우선 돌아와버렸다. 지에코는 울고, 정말 불쌍했다.”(1938년 2월21일)
“외출하는 줄거운 날이다. 우선 오타구로, 이시카와와 세명이 위안소에 갔다. 일본, 지나, 조선을 정벌하고 돌아왔다. 어묵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취했다.”(1938년 3월12일)
일기의 주인공은 외출하는 날 동료들과 함게 위안소를 방문해 조선, 중국, 일본 등 세 명의 위안부들을 찾았습니다. 위안부 여성의 국적을 대명사 삼아부르고, 성관계는 ‘정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들이 착용한 콘돔 명칭은 ‘돌격 일번’이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 ‘악몽’.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저자는 일본군 병사들이 상관에게 구타당했던 울분과 전쟁터의 스트레스를 자신들보다 약자라고 생각한 위안부들에게 풀었고, 자연히 과도한 폭력과 학대가 비일비재했다고 말합니다.
“다른 여자들 중에도 밑이 바늘 들어갈 구멍도 없이 훌떡 뒤집어지도록 붓고 피가 나는 사람이 많았다. 멀쩡한 처녀들을 데려다가 날이면 날마다 이런 일들을 시키는데 오죽했겠는가?”
어느 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입니다.
중국 버마 국경 지대에서 발견된 위안부 사체. 미군이 촬영했다. “구덩이에는 여성의 시체로 가득찼다. 거의 조선인이었다”적혀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공.
1945년 패전 후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불명옛럽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패전기 일본군이 위안부에 취한 태도는 크게 세가지입니다. 첫째, 학살이나 집단자결 강요. 둘째, 유기. 셋째, 간호부로의 편입.
적도 인근 팔라우섬으로 동원됐던 한 할머니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동굴마다 조선인들을 모아다 죽였다. 장교들은 우리 언니들 중의 일부가 아래가 아파서 몸을 안주고 칼로 일본 군인들을 죽이려고 달려드니까 그런 언니들을 동굴로 데려가 우리 보란 듯이 자궁에다 총을 쏘고 젖통을 베어내기도 했다. 이때 미에코와 마쓰무라 요시토라는 언니가 죽었다. 하도 언니들을 죽여서 하루는 밤에 우리들이 흰 수건을 가지고 나가서 공습하러 온 비행기를 향해 흔들면서 장교들이 있는 여기를 폭격해 달라고 신호를 보낸 적도 있다.”
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이 책을 썼습니다. 저자는 “일본의 책임은 동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송과 배치, 위안소 생활과 귀환에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면서 “역사왜곡과 아픔을 넘어 미래로 나가기 위해서는 위안부 본래의 본질을 응시하며 아무런 이해득실을 따지지 말고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국내에 대해서도 “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은 그녀들이 군 위안부로 내몰리기 전의 처녀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이러한 발상은 결국 여성을 ‘성녀’와 ‘창부’로 이분화하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 서 있음을 통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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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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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댓글 수 1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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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uri97
약 2년 전
硫붾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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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경 당시에도 어느정도 지위가 있는 소녀와 처녀들은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위2-30%의 농민의 딸들이 일본의 쌀 수탈 들으로 도저히 생활을 유지못해, 밥벌이라 생각하고 지원한 것일진데.. 당시 있는집 딸들에겐 돈 벌러 몸 버리는 여자들이라며 경계시키며 눈길도 못주게 했으리라... 국가와 정부가 없는 설움은 우리를 이리 처참하게 만든다...
답글
공감2
skj33011
약 2년 전
硫붾돱
[ 군 ]위안부급모
행선 oo부대 위안소
응모자격 년령 18세이상 30세이내 신체강건한자
모집기간 10월27일부터 11월8일까지
출발일 11월10일경
계약및 대우 본인면담항후 즉석에서 결정
모집인원수 수10명
희망자는 좌기장소에 지급문의 할사
경성부종로구낙원정195
조 선 여 관 내
광 3 2645
[ 허 씨 ]
위는 당시 위안부 모집광고다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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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j33011
약 2년 전
硫붾돱
위 광고문을 보고도 강제로 끌고갔다고 말을 할수 있을까요
5000년동안 이어온 가난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민족의 아품입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한국인 창녀들이 우글우글한다네요
심지어 북한에서는 부녀자들이 중국인들에게 성노예로 팔려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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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ng_15
약 2년 전
硫붾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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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군 위안부로 끌려간 수많은 여성들을 모집했던 방법 중의 하나잖아요
경성일보 매일신보는 잘 아시겠지만 총독부 기관지들어있고요
대부분은 공장 가서 돈벌게 해준다고 해서 따라가거나 아님 일본 선생님 권유로 정신대 지원해서 갔더니 군 위안소였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광고들은 1944년 7월25일날이잖아요 일본이 패망하기 1년 전이니까 거의 패망끼가 보일때 낸 것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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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ng_15
약 2년 전
硫붾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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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위안부들이 수십만명이었다는데 패망 1년전의 모집광고를 가지고 모든 위안부들이 그렇게 자발적으로 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2차대전 기간만 해도 6년인데요
설사 일부는 자발적으로 갔다고 해도 그런 비인간적인 대우나 살해가 당연한 거고 결국 패망후 집단 학살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이 일본군이나 정부에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자발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해서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까지 자발적으로 갔다고 매도하지는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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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ng_15
약 2년 전
硫붾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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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같으면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났는데 공장 가서 돈벌게 해준다고 해서 따라 가보니 군 위안소에요
그럼 위안소구나 공장이나 위안소나 돈만 벌면 다행이지 뭐 이러고 맙니까?
하루에 수십명이랑 해야 하고 인간으로 대우 받지도 못하고 도망도 못가고 도망가면 죽이거나 옷벗겨서 때리고
님은 그게 속아서 따라간 여자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나요?
성노예 인신매매지 이게 뭡니까 노예라도 그렇게는 안 부리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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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ffee Sairo
약 2년 전
硫붾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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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적으로 낸 모집광고일겁니다. 물론 그 광고를보고 자발적으로 가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취업사기를 치거나 강제 납치등을 해서 끌고갔을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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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j33011
약 2년 전
硫붾돱
sarang_15님 그리고 Coffee Sairo님
지금도 북한에서는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중국으로 데리고 가서는 중국인에 성노례로 팔려가는 여인들이 수없이 많다고 하네요
심지어는 탈북자들중에도 이 사실을 말하는 사람이 있읍니다
한편 지금도 일본에가면 연예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요 창녀나 다름없는 3류 연예인도 있고요 노골적으로 창녀노릇을 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라고 합니다
7~80년전의 일보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할일을 먼저 해야하는것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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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순
약 2년 전
硫붾돱
카카오 스토리
그러니까 네놈 생각은 광고보고 조선 여자 30만명이 자발적으로 매준을 한 것이 위안부의 실제라는 주장이지 ... 쓰레기같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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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ndon6452
약 2년 전
硫붾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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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무현 대통령님이 생각날까 답은 간단하다 8분 57초짜리 독도 명연설을 든는다면 말이지요 거기에 모든답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더이상일본한테 사과를원하지않는다 그에상은하는 조치를 바랄뿐이다라고 한말들은 고이지미하고 인사할때 누가 먼저머리 숙여였는지를 보면알것이고 일황하고 먼저 머리숙여 인사했는지를 또한 보면알것이다 이런것들이 바로 외교인것이다 이라크 군부대 방문하고 나서 차에서 눈물흘리신분 대한민국을 진정사랑하신분 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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