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02

1805 ‘프런티어 시장’ 북한과 식민주의 유령 / 조문영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세상 읽기] ‘프런티어 시장’ 북한과 식민주의 유령 / 조문영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프런티어 시장’ 북한과 식민주의 유령 / 조문영

등록 :2018-05-09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4·27 남북정상회담과 그 후속 조치들은 한반도 평화라는, 한동안 불가능의 영역으로 제쳐두었던 주제를 공론장에 소환했다. 당장은 비핵화 논의가 우선이겠지만, 북한의 거대한 전환이 임박했다는 공감이 확산되면서 다양한 전망과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저임금, 지하자원, 물류수송의 이점을 고루 갖춰 투자가치가 높은 ‘프런티어 시장’으로 북한을 가치화하는 셈법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동남아시아가 아닌 북한으로 공장을 이전하자는 제안이 “굶주린 북한 동포”에게 주는 평화의 선물인 양 등장하는 현실을 보며 몇해 전 연구차 들렀던 ‘서탑’의 풍광이 떠올랐다.

서탑은 중국 동북 선양(심양)에 위치한 한인 타운의 이름이다. 20세기 초 중국까지 건너온 조선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살았던 이 동네는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이후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의 집거지가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새로운 기회를 찾아 한국인들이 대거 이주하고, 한국에서 돈을 벌고 돌아온 농촌 출신 조선족이 새롭게 정착하고, 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 건너온 탈북민이나 외화벌이에 나선 북한 직원들이 급증하면서 국적을 달리하는 ‘한민족’ 사이의 마주침 또한 빈번해졌다.
이 마주침의 풍광이 많은 이들을 고무시켰음은 물론이다. 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역사적 관문으로 선양의 중요성을 복기하고, 서탑을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는 민족 화합의 실험장”으로 만드는 오랜 작업에는 새로운 시작을 열망하는 많은 이들의 노고가 따랐다. 하지만 이 작업은 간단치가 않다. ‘동포’ 간의 호혜와 시장관계가 뒤엉킨 채 시작된 재중 한국인과 조선족의 마주침은 한·중 양국의 정치적·경제적 변동 속에 적잖은 갈등을 낳았다.

위안화 절상으로 공장 문을 닫은 한국인 사업가는 자신이 저임금으로 고용했던 조선족을 “배은망덕한 사기꾼”에 비유한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수모를 겪다 중국으로 돌아와 부를 축적한 조선족은 “잘난 체하다 쪽박 찬” 한국인에게 동정과 야유를 보낸다. 

경제 지위를 두고 난타전을 거듭하던 양자가 잠시 휴전에 돌입하는 것은 탈북민이라는 공동의 ‘희생양’을 발견했을 때다. 일부 한국인, 조선족 자영업자들은 탈북자의 불법 지위를 악용해 임금 체불을 일삼으면서도 “먹을 것을 찾아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위험한 집단이라며 잔뜩 경계했다.

서탑 탈북민과 북한 주민의 삶을 섣불리 비교하긴 힘들지만, 중국에서든 한반도에서든 ‘민족’이라 호명하고 ‘저임금 노동자’라 받아 적는 형국이 발생할 위험은 상존한다. 단시간에 초고속 성장을 이룩한 한국 사회는 어느덧 민주주의 전도사 역할까지 자임하지만, 인간을 경제개발의 척도로 서열화하고 인적 자본으로 상품화하는 근대의 폭력과 제대로 겨뤄본 적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서구의 근대와 다른 새로운 ‘보편’을 주장하는 한편, 북한과는 여전히 사회주의 동지애를 강조하는 중국 역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개혁개방 초기의 혼란이 부를 축적할 절호의 기회였음을 반추하는 중국인들은 이미 북한 내 부동산 투자처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변화하는 남북관계가 가져올 새로운 ‘기회’란 무엇일까. 19세기 말 영국의 정치인 세실 로즈는 빵을 달라 외치는 런던의 실업자들을 보며 신규 시장을 개척할 필요를 제기했고, 내전을 피하고 싶다면 제국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임금과 지하자원의 보고라는 빈약한 상상력이 빚어낸 ‘프런티어 시장 북한’의 서사는 ‘민족’과 ‘동지애’라는 신화와 식민주의의 유령을 동시에 불러낸다.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43910.html#csidxbe411d14a95b39c8463f9bf7b9aa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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