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잘 모르는 문제’에 대해 말할 땐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입력 : 201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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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경제학자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발언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한때 진보운동의 이론가로 명망이 높았던 그는 사실 근년에 낸 다른 책들 때문에도 일각에서 부정적인 유명세를 탔었다. 책에서 그는 ‘전공’을 넘어 정제되지 않은 거친 말을 쏟아냈다. 독자들을 더 곤혹스럽게 한 것은 그의 태도였다. 책 안의 그는 일종의 봉건의식을 가진 네오 마르크시스트였고, 머릿속 많은 지식만큼 두꺼운 독단과 원한감정이 마음에 차 있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나는 그의 말들을 통해 한국 지식인이 흔히 앓는 병통을 재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연관된 두 가지 문제의
하나는 자기자신과 타자에 대한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개별적 전문가와 지식인의 무지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더 편견과 독단이 강해진다. 세상을 해석하는 나름의 틀이나 경험칙(내가 해봐서 아는데…)이 생기면 거기에 만사를 꿰맞춰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히도 편견과 독단은 욕망 때문에 악화된다.
그래서 한국 (남자) 지식인은 참 가련하고도 비루한 존재인 경우가 많다. 타인의 인정이나 ‘매개된 욕망’이 오로지 삶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합당한 보상·인정을 못 받거나 또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하면 증상은 불치병으로 심각해질 수 있다. “내가 저 자리에 앉아있어야 되는데, XX” “내가 저 상을 받아야 하는데, ○○” 같은 의식을 가진 경우 말이다. 성숙은커녕 불안과 분노가 더 강해지니, 타인들도 괴롭히게 된다. 마음공부 없이 지식만 열심히 탐하는 경우엔 삐뚤어지기 십상이고, 공부를 버린 채 권세를 탐하면 곧장 무서운 타락의 길을 갈 수 있다. 청문회장에 나왔던 어떤 폴리페서들이나 ‘표절 괴물’들을 떠올려보라. 골목대장이나 단순 월급쟁이로 나이 드는 경우도 많지만, 그 또한 해악을 끼칠 가능성은 작지 않다.
이런 문제는 공자의 시대에도 흔했던 모양이다. <논어>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명제가 ‘군자 됨’의 방법론으로 들어있다 한다. 무릎을 치게 하지만, 구태여 전근대적인 군자가 될 필요까진 없겠고, 답은 간단(?)하다. 신중과 겸허를 삶의 방법 자체로 삼고 끝없이 훈습하는 것이다. 늘 자기 말과 생각이 옳은지 회의하며 ‘자신 없어’ 해야 한다. 50대 이상 배우고 가진 자들은 자신 없어야 ‘맨스플레인’과 꼰대됨을 겨우 면할 것이다.
겸허나 겸손은 앎 자체의 방법과 세상사의 풀이 방법으로도 요청된다. 세상은 크고 세상일은 너무 복잡해져 아무리 뛰어나도 개인이나 한 분과는 자기지평을 넘는 문제를 잘 파악하기 어렵다. 유사 역사학을 신봉하는 석학 과학자 같은 이를 생각해보라. 한국의 참담한 ‘두 문화’ 문제와 분야별 특성도 있다. 어떤 분야의 학자들은 문헌과 실증에 강하지만 철학·예술·기술 등에 무심하다. 일부 사회과학이나 응용학은 미국 편중이 심각하여 외눈박이 상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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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나 전문가의 무지 문제에 대한 해결법은 조금 복잡한 듯하다. 어떤 이들은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아예 말하지 말라고 한다. 개인의 태도로서는 당연하고 옳은 방법일 수 있지만, 저 말을 끝까지 지키면 우리는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고, 사회는 전문가주의나 관료 독재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게다가 어떤 개인이나 공론장의 시민은 ‘잘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도 발언해야 할 상황에 곧잘 처한다. 언론인이나 일부 인문·사회과학자들은 아예 그런 운명을 산다. 물론 필자도 마찬가지다. 구업이 쌓여가니 때로 이 문제는 차라리 무섭다. 다른 분야의 매우 기본적인 지식을 모르거나, 사태들의 복잡한 정황·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말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칼럼으로 낸 나의 용감 무식한 어떤 견해들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나 지식인들의 놀림감이 됐을지 모른다. 고로 이 글 자체가 하나의 자경문이지만, 그런 일이 바로 당신을 비롯한 우리 모두에게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공부해야 한다. 성실·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를 해도 오류의 가능성과 무지를 없앨 수는 없으니, 절망스럽다. 그렇다고 침묵한 채 궁벽한 제 분야에만 갇히거나 상대주의에 빠질 수도 없으니, 고차원의 지혜가 필요하다. 방법은, ‘학문적’ 권위를 얻은 전문적 견해를 존중하되, 분야 간에 이뤄진 대화나 보편적 기율을 통해 의심의 여지나 쟁점을 숙고하는 것이리라. 시민·지식인은 겸허로써 무지와 독단의 권세를 ‘협력 방어’해야 한다. 겸허의 네트워크와 집합지성은 개인으로서는 ‘주화입마’를 예방하고, 사회는 반지성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넘어 앎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절실한 방법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102056045&code=990308#csidxae6f29350614c5f930098e458c037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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