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1
페리스코프 :: 자오팅양 <천하체계-21세기 중국의 세계 인식>(노승현 옮김, 길 펴냄)
페리스코프 :: 자오팅양 <천하체계-21세기 중국의 세계 인식>(노승현 옮김, 길 펴냄)
2015.04.19
자본주의 이후
자오팅양 <천하체계-21세기 중국의 세계 인식>(노승현 옮김, 길 펴냄)
국경에서 끝나는 현대세계의 질서
2005년에 원서가 나오고 2010년에 번역판이 나온 책인데 나는 최근에야 읽고 깜짝 놀랐다. 현대세계를 본질적으로 ‘무정부상태’로 보는 나와 똑같은 관점을 철학의 방향에서 제시하기 때문이다.
핵심 명제는 간단하다. 현대세계의 사람들이 ‘세계’라고 말하는 대상에 관한 철학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또는 극히 빈약하다는) 것이다.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인식은 있으면서도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체계적 성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내지 동아시아 옛사람들이 근대 이전에 생각해 온 ‘천하’ 관념을 이에 대비시킨다. 서양의 정치철학이 ‘국가’에 중점을 둔 것과 달리 중국의 전통 정치철학은 ‘천하’에 관한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정치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 즉 내가 말한 ‘천하체계’의 이론을 창조하려고 했다. 이것의 이론의 틀과 방법론은 서양의 정치철학과 매우 다르다. 먼저 이론의 틀에서 살펴보면 중국의 정치철학은 천하를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 정치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딴 것에 앞서는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다. 이것은 국가의 정치 문제를 천하의 정치 문제에 종속시켜 이해하려고 한 것이자 천하의 정치 문제는 국가의 정치 문제가 근거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29-30쪽)
천하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한 뒤에,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그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 중국인의 표준적 태도였던 것이다. 반면 근대 서양의 정치학은 국가 내의 정치현상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국가 간의 현상에 대해서는 ‘국제’ 이론을 적용했지만, 국제관계의 정치적 가치는 종속적인 위치에 그친다. 예컨대 기후, 환경 같은 세계적 문제에 대한 각국의 태도는 국내 문제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철학의 이념이 없는 곳은 반드시 혼란스럽고 무질서하다. 서양의 정치철학이 주도하는 세계는 반드시 혼란스러운 세계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오늘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제도가 있고 관리가 있고 질서가 있는 세계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지만,[?] 지리나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세계는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황무지가 되거나 멋대로 약탈하고 쟁탈할 수 있는 공공 자원이 되거나 정복을 일삼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난제이다. 즉 전체적으로 무질서한 세계이자 정치적 의미도 없는 세계는 단지 폭력이 주도하는 세계일 뿐이다. (...) 한 마디로 말해서 세계는 세계가 되지 못한다. 마치 국가는 국가 제도 때문에 국가가 되는 것처럼 세계는 세계 제도 때문에 세계가 되는 것이다. (31-32쪽)
현존하는 국가들 중에는 국내 질서가 비교적 잘 잡혀 있는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도 세계의 전체적 무질서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다. 20여 년 전 파리에 체류할 때 그곳 분위기의 조화와 질서를 흠모하는 마음을 품었는데, 최근 샤를리 엡도 사태 앞에서 착잡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전체주의’는 왜 나쁜 것일까?
홍세화가 ‘똘레랑스’를 말한 것도 파리와 서유럽의 정치적-사회적 분위기를 나와 같은 마음으로 아낀 뜻으로 보는데, 자오팅양의 ‘관용’ 의미 해석이 흥미롭다.
관용은 서양의 논조이다. 오로지 자신의 가치관에 근거하여 어떤 일에 매우 반감을 가지면서도 어떤 신념에서 출발하여 그런 일을 참고 용서하려고 결심할 때가 비로소 이른바 관용이거나, 자크 데리다의 논조에 근거하여 관용할 수 없는 것을 관용하는 것이야말로 ‘관용’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중국에는 결코 관용의 이러한 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관용은 중국의 사유 방식도 아니고 중국의 방법론도 아니다. 중국에 관용의 마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관용의 사유는 없다. 중국의 사유 방식은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것’[大度]이지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寬容]이 아니다.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은 타자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고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자를 혐오하지만 참는 것이다. (...) 중국의 기본 정신은 ‘변화’[化]에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타자를 변화시키고 타자를 나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당연히 다양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다양화’는 오히려 ‘통일’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다양성은 반드시 어떤 전체적인 틀이 규제하는 가운데에서의 다양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규제를 잃어버린 다양성은 단지 혼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25쪽)
현대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질서의 가치와 자유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 아닌가? 자유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오팅양이 말하는 “중국의 사유 방식”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체주의의 위험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와의 직접 충돌을 피하게 해주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다. 현상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만 공유하는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천하체계가 제공한다는 ‘질서’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다. 국가제도가 제공하는 질서도 공짜가 아니라는 점은 마찬가지 아닌가? 인류 차원의 질서체계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잘 따져볼 일이다.
현대인은 재물이라는 가치 앞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쉽게 인정하고 절약을 미덕으로 여길 줄 안다. 그런데 ‘자유’라는 가치를 놓고는 일체의 양보와 타협을 거부한다. 현실 속에서 자유를 그렇게 많이 누리는 것도 아닌데, 관념 속에서는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왜일까?
국가를 비롯한 현대사회의 제도에서 재물의 가치가 다른 가치들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리며 인간관계의 일차적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책임만 하더라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것이 상식처럼 통하지 않는가. 재산 이외의 가치들은 재물로 환산되는 한도 내에서 제도적 존중을 받게 된다. 명예 훼손도 스트레스도 자유의 억압도 재물로만 보상받는 제도에 사람들은 길들여져 왔다.
그래서 여러 인간적 가치들이 현실감을 잃고 관념의 영역에 묶이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봉건’ 관계에서는 다양한 가치들이 거래의 대상이었다. ‘충성’이나 ‘자유’ 같은 가치를 제공하고 폭력으로부터의 보호나 경제적 이득을 얻는 관계가 일반적이었다. 자유와 평등의 절대적 관념을 가진 현대인은 봉건 관계를 미개한 것으로 깔보며, 그런 관계를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의 모습을 이뤘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문명 발생 이래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인간 이하의 상태에 있다가 계몽주의시대 이후에야 참다운 인간이 되었다는 생각은 역사학도의 눈에 하나의 환상으로만 보인다. 약한 위치의 사람들이 자기가 지닌 가치를 제대로 흥정도 못하고 쉽게 착취당하도록 만드는 환상.
봉건 관계가 근대적 제도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서둘러 단정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닥쳐 있는 세계적 변화가 수백 년 만의 큰 전환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려서부터 주입받아 온 계몽주의 가치관을 잠깐이라도 접어놓고 큰 그림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자오팅양은 세계관 자체에 중국과 서양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국의 사유 체계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서양사상의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태도에서 서양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중국에는 서양과 전혀 다른 세계관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모순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서양 사상이지만 조화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중국 사상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미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설적인 근거가 될 수도 있는 전혀 다른 사상인 세계관-가치론-방법론과 정치학-경제학-사회사상이 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중국 사상에는 그런 것과 전혀 다른 세계관-가치관-방법론과 정치학-경제학 사회 이론이 숨어 있다. 그것은 서양 사상의 틀 안에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틀 안에서 표현해야 하고 아울러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28쪽)
대립보다 통합을 지향한 천하 이념
자오팅양이 생각하는 천하체계의 첫 번째 특징은 “밖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세계의 차원에서 현실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자아 인식과 실현의 자연스러운 방향의 하나다. 그런데 현대의 서양 패권세력은 국가 차원에 관점이 묶여 나머지 세계를 타자화한 데 문제가 있었다.
세계를 책임지는 것은 단지 자신의 국가에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론에서 중국 철학의 관점이고 실천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이다. 즉 무엇보다도 먼저 ‘천하’를 정치/경제적 이익에 관한 분석 단위로 삼아서 천하로부터 세계를 이해하는 것, 즉 ‘세계’를 사유의 단위로 삼아 문제를 분석하여 서양의 민족/국가의 사유 방식을 뛰어넘는 것이며, 세계를 책임지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새로운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를 창조하는 것이다. 세계 이념과 세계 제도는 역사적으로 줄곧 결여되었던 이 세계의 가치관이자 질서였다. 일찍이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과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에는 지금까지 모두 국가 이념만 존재했다. (...) 따라서 영국과 미국의 ‘세계 사유’는 단지 특수한 자신의 가치관을 널리 보급하여 보편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왜 타자는 생각할 만한 가치도 없는지를 증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합법성을 상실했다. (12-13쪽)
21세기 상황에서 천하체계를 실현하려 한다면 서양 사상을 거부하기보다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것도 천하체계의 포용성 때문이다.
중국은 서양에 반대하지 말고 중국을 근거로 서양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서양 사상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중국의 정신적 풍격이 아니다. 약간 불합리하게 들리지만 이것이 바로 중국적 사유의 특색이다. 원칙적으로 중국 사상은 어떤 ‘타자’도 거부하려고 하지 않는다. ‘타자를 거부하지 않는 것’이 중국의 전통 정신이고 민족주의의 형태야 말로 서양의 사유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과 같은 부류의 논조가 바로 중국의 사유를 비교적 간단하게 묘사한 것이다. (24쪽)
1960년대까지 미국의 중국사 연구를 이끌던 존 페어뱅크는 중국에 ‘nationalism’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근대 민족주의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종족’ 의식이 없고, 중국인의 자기정체성은 ‘문명’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다.
근대 민족주의와 가장 비슷한 자기정체성 인식방법이 중국에 나타났던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일이다. 그 당시 서로 다른 민족으로 인식되던 집단의 후예가 모두 중화인(中華人), 즉 한족(漢族)으로 합쳐졌다. 그 후에 이적(夷狄)으로 인식되던 많은 집단이 또한 한족에 합류했다. 지금 중국에 한족 외에 55개 소수민족이 있다고 하는데, 근세에 나타났거나 오지에 살기 때문에 ‘아직’ 한족에 융화되지 않은 집단들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천하제국을 세운 후 오랫동안 다민족국가를 운영해 왔고, 어느 시점의 소수민족들이 상당 기간을 지내는 동안 한족으로 편입되어 들어가는 과정이 계속되어 왔다. 이 현상이 긴 기간 동안 꾸준히 진행된 사상적 발판이 천하체계의 이념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중국에는 내셔널리즘 성격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그 위세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나는 본다. 오랜 고난과 치욕의 역사 끝에 겨우 자존감을 일으키면서 그 동안 부러워하며 미워하던 대상들의 입장에 서 보고 싶은 마음이 대한족주의의 바탕이다. 자존감이 충분히 채워지면 그 대상들과의 차별성을 찾을 것이고, 중국의 역사에서 차별성의 근거를 발견할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건 패권주의 성향의 대한족주의가 완전히 사라지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국인의 징고이즘(jingoism)보다는 강력한 내부 견제가 따를 것이고, 그만큼 그 표현이 절제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천하 이념이 실제로 작동하는 모습
중국의 실제 역사에서 천하 이념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상황이 많다는 사실을 저자도 인정한다. 화이(華夷) 통합성이 무시되고 구분-적대의 태도가 우세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천자의 역할도 원래의 정치철학을 벗어나 전제군주의 모습이 된다.
천자는 천하와 하나의 유기체로 만들어진 개념이고 천하와 천자는 천하/제국의 이론적 기초를 공동으로 구성했으므로 천하는 주로 세계 제도의 개념이고 천자는 주로 세계 정부의 개념이다. 제도는 정부의 합법성을 보증할 수 있지만 반대로 정부는 결코 제도의 합법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천하가 천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고 더욱더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 단편적이거나 불완전한 이런 실천이 천하 이론의 형상을 손상시켰고 또한 심각한 반성을 수없이 초래했다. 예컨대 황종희는 “삼대(三代)의 법은 천하를 천하 속에 넣어 두었고 후대의 법은 천하를 광주리 속에 넣어두었다”고 말했다. 천하의 사회 제도는 실천되지도 않았고 단지 단순한 측면에서 천자의 정부만 실행되었다면 분명히 천자에게는 겨우 이름만 있었지 실질은 없었다. 춘추시대는 난세였을 뿐만 아니라 천하 제도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지금에서 보면 예악이 붕괴된 춘추시대에 대한 공자의 뼈저린 아픔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춘추시대 이후로는 다시 천하 제도에 다가서려는 노력이 없었다. (73쪽)
마지막 문장은 불만스럽다. 나는 정치철학으로 천하체계를 세운 것이 공자가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에 체계적 사유 없이 자연스럽게 펼쳐져 온 현상을 공자가 체계화하면서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정치적 변화를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이념에서 일탈하는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정치의 표준을 세운 것이 유가사상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공자 이후 유가사상의 역할이 바로 “천하 제도에 다가서려는 노력”이었다. 천하 제도의 완벽한 실현이 없었다고 해서 그런 노력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것은 정치사상이 현실 속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 같다.
예컨대 공자는 주공(周公)을 숭상했는데, 주공이 섭정으로 천하를 주재하면서도 신하의 위치를 지키며 천자의 권위를 받든 것이 현실적 득실에 따라 자연스럽게 선택한 행동이지, 공자가 내세운 것 같은 엄격한 이념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나라 앞의 상나라에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많았다. 작은 규모의 사회에서는 지도자의 위치를 나이어린 아들보다 장성한 동생이 물려받는 것이 효율적이었으나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 현실적 권력보다 정통성의 권위에 더 치중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세다. 실제로 주공의 섭정 기간 중 최대의 위협은 주공의 형제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주공이 부자상속의 원칙을 세움으로써 향후 그런 종류의 위협을 봉쇄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공자가 찬양한 것 같은 어마어마한 이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본다.
천자에게 “이름만 있었지 실질은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실세계에서는 현실정치(realpolitik)의 원리가 힘을 발휘한다. 정치철학은 이 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에 절제를 가하는 것이다. 당 태종은 중국의 역대 황제 중 현실정치의 원리에 가장 투철한 사람의 하나였다. <정관정요>는 그가 현실정치의 원리에 정치철학의 이념을 가미함으로써 정치 효과의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옛 심복 한 사람의 독직사건에 임하는 태종의 태도가 좋은 예다. 사형 판결이 떨어질 때까지 개입하지 않고 있다가 판결이 내리자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하늘이 임금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당인홍(黨仁弘)을 풀어주고자 하니,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아 하늘에 죄를 고하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사흘 동안 근신하여 이 죄를 풀고자 한다.” 근신의 자세로 ‘천하위공’의 원리를 지킴으로써 사적 의리와 공적 이념 사이의 긴장을 풀어낸 것이다. 공자가 이상화한 삼대보다 바로 이런 장면에서 이런 식으로 천하 이념이 정치에 작용했던 것이다. 황제가 영명하지 못한 때라도 ‘천하’ 이념은 하나의 압력으로 언제나 작용하고 있었다.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자세
중국에서는 제2차 중영전쟁(1856~1860)으로 베이징이 유린당한 후 서양의 선진기술을 도입하는 양무(洋務)운동이 일어났다. 청일전쟁(1894~1895)에 패하고는 기술만으로 안 되겠다 하여 제도를 바꾸려는 변법(變法)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도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북경의 55일”을 치르고는 공화제를 바라보는 혁명운동이 일어났는데, 1910년 공화혁명을 이루고도 장래의 전망이 열리지 않자 전통 학술-사상을 총체적으로 반성-비판하는 신문화운동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이제 중국의 급속한 발전으로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게 됨에 따라 시각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의 내용만이 아니라 생각의 방법을 바꿀 필요를 자오팅양은 제창한다.
100년 동안 중국인이 소극적인 관점에서 엄중하게 자아를 비판한 것은 ‘중국을 비판한’[檢討中國] 운동이라고 한다면 중국에 대한 긍정적인 반성은 ‘중국을 다시 생각한’[重思中國] 운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 동시에 ‘중국을 다시 세우는’[重構中國]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의 가장 중요한 사상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을 다시 생각하기’는 사상의 문제에서 동시대의 갖가지 문화 운동보다 더 신중해야 했고 학문의 이론도 더 깊이가 있어야만 했다. 그밖의 운동으로는 주로 ‘신좌파와 자유주의의 논쟁’ ‘현대화와 탈현대화’의 토론, 그리고 나중에 매체에서 ‘공공 지식인’ 운동으로 일컬어진 사회 비판 운동 등이 있다. (...) 대중 매체에서 한층 더 사람들의 주목을 끈 이러한 문화 운동은 최소한 이론이나 관념이 결코 중국 땅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배에 실려 들어온 신식 물품이자 서양에서 유행하는 관념을 복제한 것이다. (...) 땅의 기운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상은 널리 퍼지지 않는다. 이제 더는 서양의 갖가지 관념이 모자라지 않지만 자신의 대국적인 사유와 총체적인 이념은 빠져 있다. 제 힘으로 사유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중국의 끝없는 후환의 문제이다.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것’의 역사적 의미는 중국이 스스로의 사유 능력을 회복해서 다시 새롭게 자신의 생각의 틀과 기본 관념을 수립하며, 다시 새롭게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방법론을 창조하고, 다시 새롭게 자신과 세계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 즉 중국의 전망과 미래의 이념 그리고 세계에서의 작용과 책임을 숙고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이미 근본적인 사상의 문제이면서 또한 거시적인 전략의 문제이다. (15-17쪽)
20세기의 “중국을 비판하는” 운동은 열쇠를 밖에서 찾는 노력이었다. 21세기의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운동은 안에서 찾는 노력이 될 것이다. 그 차이를 자오팅양은 철학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철학적으로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운동은 미래, 즉 미래의 각 방면에 관한 가능성을 사유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점이 중국을 비판하는 이전의 운동과 전혀 다른 그것의 기질과 지향을 결정지었다. 중국을 비판하는 운동은 ‘과거’를 사유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역사 비판과 사회 비판의 기질을 갖추고 있었지만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운동은 더욱더 많은 철학적 분석의 기질을 띠고 있었다. (...) 과거를 비판하는 것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한 두 가지 연구라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서로 대체할 수 있는 연구는 아니다. 중국이 세계에서 반드시 말해야 하는 대국으로, 반드시 일을 처리해야 하는 대국으로, 반드시 세계를 책임져야 하는 대국으로 발전했을 때에는 사상의 측면에서 창조한 것이 있어야 하고, 할 말은 해야 하며, 처리해야 할 일은 처리해야 하고, 남의 장단에 춤출 수는 없다. 이것은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위치와 형세가 절박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22-23쪽)
중국의 급속한 부상은 광범위한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강대국의 위상을 직접 위협받는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그만 나라들도 또 하나 패권국가의 등장이 아닌가 걱정하는 기색을 보인다. 이런 경계심을 피하기 위해 중국 지도부가 내세우는 구호 하나가 ‘책임대국(責任大國)’이다. 자오팅양은 이 말을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는 실제적 지표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중국이 과거의 ‘무책임대국’과 다른 ‘책임대국’이 되는 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위치와 형세에 따른 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를 외칠 때 한국인은 책임을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인처럼 잘 사는 데, 미국과 같은 에너지 소비수준에 이르는 데 어떤 문제가 따르는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위치와 형세는 다르다. “실컷 먹고 배 터져 죽자!” 하는 소수의 정신병자 외에는 13억 중국인의 에너지 소비수준 향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주체성 회복을 주장하면서도 자오팅양은 이 운동이 싸구려 한풀이로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진정한 주체적 성찰 없이 중국의 국력 성장을 편의적 태도로 받아들이면 과거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20세기 초 이래로 중국을 철저하게 검토하거나 비판한 운동에 대한 ‘발란반정’(撥亂反正)인 것 같지만, 신중하고 엄정한 사유를 형성할 수도 없고 심각한 이론 분석에 진입할 수도 없으면서 오로지 다른 종류의 서사(敍事)를 쓰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아주 쉽게 천박한 발언으로 변할 것이다. (...)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서사적인 학술은 이를테면 급진주의/민족주의적인 발언, 탈식민/문화비판적인 발언과 같은 책임지지 않는 발언을 낳았다. 급진주의적인 중국의 발언은 한 측면에서 새롭게 일어난 민족주의의 정서를 표현했지만 또한 ‘노(No)라고 말하다’에서 ‘우뚝 솟아나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한 위험한 논리를 볼 수 있는 서양의 다윈주의의 강경한 논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본래 비판해야 할 관념과 발언의 함정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러한 발언이 세계나 중국을 모두 온당하게 이끄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이렇게 중국을 ‘타자’로 간주하거나 서양의 상투적인 논리로 중국 사회와 중국 역사를 다시 쓰는 척하는 것은 중국의 새로운 서사를 말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중국에 관한 서양의 중국학자의 서사와 매우 비슷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든 본질적으로는 주로 여전히 서양에 비추어 중국을 이해하고 있는 오늘날의 ‘중국을 다시 생각하는’ 사상운동은 여전히 시작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몇 십 년 동안 이미 중국의 보편 의식으로 바뀐 ‘서양’은 중국을 ‘서양’으로 바꾸고자 한 어떤 욕망이었다. (23-24쪽)
경제적 세계화를 넘어 정치적 세계화로
인간사회의 어떤 층위에서나 하나의 집단은 내부의 질서를 지키면서 외부와의 관계를 풀어 나가는 두 가지 과제를 끊임없이 수행한다. 가족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위에서 이뤄지는 일이다. 두 가지 과제에 성공하는 집단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실패하는 집단은 패망을 맞는다. 그런데 ‘인류’의 층위에서는 두 가지 과제를 위한 노력이 매우 빈약하다. 전통시대에 비해 근대에 들어와 더 심각해진 문제다.
심각해진 까닭은 무엇보다 ‘인류사회’의 존재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문명 간 접촉이 적던 시절에는 여러 문명권을 포괄하는 ‘사회’의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웠다. 자기 문명권 밖의 사람들을 인간과 다른 괴물로 흔히 상상하고,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접촉이 늘어나도 ‘이교도’란 이름의 준 괴물로 간주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 지리적 장벽이 약해진 끝에 이제 ‘지구촌’을 이야기하고 ‘보편적 인권’을 말하게 되었다.
고대국가가 성장하던 시절을 되돌아보면, 정복 사업에 원주민의 절멸이나 노예화가 흔히 뒤따랐고 정복지에 식민 활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통합’을 이룬 국가들이 성장에 성공했다. 지역의 확장과 국민의 확대가 병행해야 국가의 효과적 성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주민의 지나치게 큰 비율을 노예나 노예에 준한 신분에 묶어놓으면 국가의 안정성이 보장될 수 없었다.
고려 후기의 ‘일천즉천(一賤則賤)’ 문제에서도 이 문제가 나타났다.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천민으로 한다는 이 기준은 천민 비율의 증가로 사회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것이었지만 기득권층의 단기적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었다. 정동행성의 몽골인 관리가 이 기준을 없애려 애썼는데, 고려 귀족들은 원나라 조정에 탄원해서 이 관리를 소환시켰다. ‘闊里吉思’란 이름이 전해지는 이 몽골 관리가 근대적 의미의 ‘인권’ 증진을 위해 천민 비율을 낮추려 했을 리는 없다. 많은 정복 사업을 해온 몽골인들이 피정복사회의 안정된 운영을 위한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귀족은 이 개혁을 거부했고, 결국 사회경제적 붕괴로 왕조의 멸망에 이르게 된다.
‘세계화’란 말이 근년에 유행을 시작했지만, 사실 근대 초기부터 문명 간 장벽의 약화 과정을 통해 진행되어 온 현상이다. 그런데 지금도 ‘경제적 세계화’만 이뤄질 뿐, ‘정치적 세계화’는 별로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정치조직으로 인류사회를 묶어 내부 질서를 구축하고 그 외부, 즉 자연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 나가기 위한 정치적 세계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지금의 상태는 정복만 행해졌을 뿐, 피정복사회를 통합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세계에서 정복의 주체가 된 유럽인에 비해 중국인은 역사를 통해 더 많은 정복 사업의 경험이 있고, 또 피정복사회를 효과적으로 통합한 경험이 있다. ‘천하’ 이념은 이 경험으로 얻은 지혜를 품은 정치철학이다. 서양인의 정복, 즉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이 한계에 이른 21세기 상황에서 참고의 가치가 큰 문명의 유산 중 하나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한 마디. 대체로 좋은 번역인데 ‘욕교반졸(欲巧反拙)’의 느낌이 드는 곳이 더러 있다. 예컨대 “옹골진 개념”이란 말을 여러 번 쓰는데, 지은이의 표현을 가장 정확하게 옮긴 말이라는 자신감이 느껴지지만 독자로서는 이해가 어렵다. 책을 다 읽은 뒤 철학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그런 말이 그 분야에서 많이 쓰이는 것인지 물어보기까지 했다.(그렇지 않다는 대답) 그리고 이 글에 인용한 내용 중 맥락이 석연치 않은 곳에 “[?]” 표시를 몇 번 붙였는데, 지나친 자신감 때문에 정밀성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옥의 티”란 말이 적확하게 느껴지는데, 옮긴이가 조금 더 노력해서 개정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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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orunkim.tistory.com/1529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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