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3
연찬문화연구소 | 소통(疏通)은 과학(科學)이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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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疏通)은 과학(科學)이다.| 자료실
남곡|조회 15|추천 0|2019.05.31. 11:10
첫날
1. 소통(疏通)은 과학(科學)이다.
<공자 말하기를,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끝까지 밝혀 가겠다.”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9-7)
1) 무지(無知)의 자각
요즘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 가운데 소통(疏通)·경청(傾聽) 등이 있다.
그 만큼 시대는 합의나 화합 그리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절실하게 요구하는데, 그 바탕으로 되는 소통이 어렵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나 자기가 속한 집단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는 아예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다. 또 어쩌다 만나면 싸운다. 겉으로는 듣는 척 해도 속으로는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이른바 신앙이나 신념이 강한 사람이나 집단일수록 더욱 그렇다.
도덕적 윤리적 요구로, 또는 전체의 존속과 행복을 위해 아무리 소통을 강조해도, 자기 생각의 바탕에 ‘내가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아는 것이 틀림없다’라는 단정(斷定)이 있는 한 소통은 실질적이지 않다.
편가름·배척·자기중심성의 바탕이다.
끝까지 대립하여 싸우거나 그저 자신들의 주장이나 이익이 가능한 한 보장되는 적절한 선에서 어쩔 수 없는 타협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과학적으로 아무 근거 없는 ‘내 생각이 틀림 없다’ 또는 ‘내가 사실을 알고 있다’라는 단정이 있다.
공자와 같은 뛰어난 현자는 이미 2500여년 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도 이것을 깨달았다.
동 시대의 소크라테스도 인도의 현자들도 이것을 알았다. 야스퍼스는 이 시대를 인류의식이 획기적으로 점프한 ‘축(軸)의 시대’라고 부른다.
직관적으로 ‘무지(無知)’를 자각했다.
공자의 ‘아는 것이 없다(無知)’라는 말을 스승 중의 스승인 공자의 수사학적 겸허함으로 보는 한 이 말의 진의를 꿰뚫지 못한다.
단순한 겸허함이 아니라, 진짜로 말한 것이다.
요즘은 중학교 정도만 공부해도 과학적으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다. 단지 과학적 상식의 확인으로 끝나고 만다.
실제의 삶이나 사회적 실천 속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사실을 알고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는 단정(斷定)의 문화 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출발이다.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은 그 출발선에 설 수 있게 되었다.‘나는 이것을 진정한 진보의 표지(標識)로 보고 있다.
2) 무지(無知)를 자각한 징표
무지의 자각을 가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념이나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신념이나 신앙이 깊은 것을 비판하려는 말이 아니다.
예컨대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의 감각과 판단에 의한 것이며, 실재와는 별개로 실재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 신앙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나는 오히려 자신이 인간이라는 제한되고 유한한 존재로서 ‘신(또는 신비)를 알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기가 믿고 있는 신(神)에 대한 불충이 아닌가 되묻고 싶다.
실제로 고등종교들조차 얼마나 많은 종파가 있으며, 이교(異敎)끼리 또는 같은 종교의 이파(異派)끼리 가장 잔혹한 전쟁을 해왔으며,지금도 계속되고 있는지를 되묻고 싶다.
비단 종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강한 정치적 신념이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이 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각을 가장 하기 힘들어 하는 부류의 하나다.
특히 진보와 과학의 결합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집단이 전혀 비과학적 때로는 반과학적이 되는 아이러니를 많이 발견하게 된다.
무지의 자각은 깜깜한 무지의 암흑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적어도 공자의 세계에서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지의 자각은 참다운 탐구의 시작이다.
그래서 무지를 자각한 사람의 상태는 ‘설렘’이라고 생각한다. 아집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라는 상쾌함이며, 탐구의 기쁨이다.
「초(楚)나라 섭현(葉縣)의 심제량(沈諸梁)이 자로(子路)에게 공자가 어떤 인물인가를 물었다. 자로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들은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다. “너는 어찌 ‘그 사람됨이 어떤 일에 열중하면 끼니를 챙겨 밥을 먹는 것조차 잊고, 이를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어버려 늙어 가는 것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느냐.”(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汝奚不曰其爲人也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7-18)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1-1)
무지를 자각한 상태야말로 배우는 것이 기쁜 것이다. 자기가 알아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탐구는 끝나고, 단정만 남는다.
“집 열채 정도의 작은 마을에도 ‘충’과 ‘신’의 면에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겠지만,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 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5-28)
3) 연찬태도(硏鑽態度)
‘무지(無知)의 자각’은 소통과 탐구의 출발점이다.
앞에 소개한 문장의 두 번째 단락이 연찬태도를 잘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텅 비어 있는 데서 출발하여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비부鄙夫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요즘 말로 해석하면 누가 물어 오더라도 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히고, 나아가 어떤 현실적인 문제에도 나몰라라 하지 않고 소통하고 탐구한다는 의미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핵심은 그 태도인데 ‘공공(空空)’이라고 ‘빌 공’ 자(字)를 두 번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많은 오해들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무지의 자각과 결부하여 자신의 지식·경험·가치관·신념 등을 다 비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특히 자기의 식견이나 가치관 또는 신념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반발하거나 허무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을 다 비우면, 무엇으로 탐구하는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가치관이나 신념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야 그것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사실은 그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는 순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지배되는 것이다.
지배된다고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이다.
누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면 화가 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화가 난다는 것은 한자(漢字)로 보면 노예(奴)의 마음(心) 즉 노(怒)가 되는 것이다.
단정하지 않고, 즉 주관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오히려 자신의 지식 등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지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식 등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생각이 틀림없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라는 것을 비우라는 것이다.
비울려고 애쓸 것 까지도 없다.
즉 자신의 생각은 실재와는 별개로 ‘자신의 감각과 판단이라는 자각’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연찬태도란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토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이 옳은가를 모두의 지혜를 활용해서 탐구하는 과정’으로 되는 것이다.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되, 다투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이란 태도를 긍이부쟁(矜而不爭)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연찬태도가 어려운 것은 그 동안 너무 오랜 세월 단정(斷定)의 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 진보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나 집단이 이런 반과학적인 단정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야말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 서면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들이 제대로 들리기 시작한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세상 모든 일에 옳다고 하는 것이 따로 없고 옳지 않다고 하는 것도 따로 없이, 오직 의를 좇을 뿐이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4-10)
지금 말로 표현하면 “단정하지 않고, 끝까지 그 시대의 옳음을 추구한다‘는 연찬태도를 나타내는 말로 다가온다.
공자께서 자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유야, 너는 육언육폐를 들었느냐?"
"아직 듣지 못했나이다."
"앉거라. 내 너에게 말하여 주리라. 인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어지고, 지혜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허황하여지고, 신의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의를 해치게 되고, 정직함을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가혹하여지고, 용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폭하여지고, 굳세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무모해지느니라."
子曰 由也! 女聞六言六蔽矣乎?
對曰 未也. 居! 吾語女.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17-8)
인(仁)·지(知)·신(信)·직(直)·용(勇)·강(剛)은 훌륭한 덕목이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여섯 가지 폐단인 우(愚)·탕(蕩)·적(賊)·교(絞)·난(亂)·광(狂)이 되고 만다.
육덕과 육폐의 갈림은 호학(好學)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호학에 대해 정곡을 뚫는 해석이 많지 않다. 배운다는 것을 학습하는 것 정도로 상식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 원체 주입식 학습에 익숙한 문화 속에서는 예컨대 공자의 말도 학습 대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출세의 관문이 될 때는 공자의 호학(好學)과는 너무나 멀어져 버리는 것이다.
많은 역사가 그렇게 흘렀다.
그래서 학(學)을 배운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아집을 벗어나 탐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공자의 뜻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4) 철저구명(徹底究明)
소통(疏通)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함께 의논하고 합의해서 해결할 과제가 없다면 지금처럼 소통(疏通)이 강조될 필요가 없다.
소통은 그 시점(時點)의 공동의 목표와 그것에 도달할 방법과 그 구체적 실천에 합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과거 수직적 사회에서는 강제적이어도 과제 해결이 가능했다.
공포(恐怖)와 압제(壓制)로도 일정한 목표를 이루었다.
물론 과거에도 그런 정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그래서 성군聖君이 칭송되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을 모을 때나 반독재투쟁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질 때는 소통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고, 수평적 사회가 되면 즉 공포와 압제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면, 비로소 자유로운 소통(疏通)이 문제를 해결하고 과제를 설정하며 앞으로 사회를 나아가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수직적 사회(전제나 독재, 계급사회)에 저항하는 것과 수평 사회의 소통과는 다른 점들이 있다.
제도적으로 수직 사회를 무너뜨린다고 해도, 수평적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수평 사회라고 말하기 힘들다.
일종의 문화지체(文化遲滯;의식意識과 문화의 변화가 제도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가 있기 마련이고, 급격하게 제도가 변하는 경우는 그것이 더욱 심각하다.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이미 대통령과 국민은 수직 관계가 아니다.
그러나 의식 속에는 아직도 수직적 의식이 남아 있다.
한 쪽에는 왕(王)의 의식과 다른 한쪽에는 신민(臣民)이거나, 수직 사회에서의 저항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워낙 소통이 어려우니까, 마치 소통 그 자체가 목적처럼 되고 있지만, 그것은 출발선에 불과하다.
수평사회에서 소통은 강제되거나 강요될 수 없다.
‘삼군의 장수는 사로잡을 수 있어도, 필부의 마음을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은 공자 시대부터 있어 왔지만, 과거에는 공포와 처벌로 빼앗아 왔다.
이 말은 요즘 들어 비로소 현실이 된다.
수평적 소통은 자기로부터 시작된다.
공자가 공공(空空)을 이야기하고, 석가가 무소주(無所住)를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겪고 있다.
모순이나 위험의 성격이 달라졌는데도, 낡은 이념이나 정서가 지배하고 있다.
지금처럼 낡은 편가름(진영)이 불신과 증오와 대립을 증대시킨다면, 미래는 암울하다.
합작(合作) 역시 선도(先導)할 개인이나 집단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마도 이런 개인이나 집단이 많아지면, 우리의 국운(國運)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선진국을 향한 물질과 제도의 밑천을 꽤 장만한 채, 서서히 또는 급격히 추락할 것이다.
처음 소개한 문장의 마지막 단락이 연찬태도에 입각한 철저 구명을 나타낸다.
“그 양 끝을 들추어내어 끝까지 밝혀 가겠다.” 我叩其兩端而竭焉
그 양 끝(兩端)을 두들겨(叩) 밝혀보겠다(竭)는 문장에서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단지 그 양 끝만이 아니라 그 양 끝 사이에 있는 무수한 스펙트럼을 포함하여, 두들긴다(叩)는 것은 어떤 단정도 없이 철저히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이 문장과 관련해서 논어 위정편에 ‘공호이단 사해야이’ 攻乎異端 斯害也已라는 문장에 대한 해석의 중요성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많은 해설서들이 ‘이단을 행하는 것(또는 공부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라고 해석을 한다.
소수만, ‘(자기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라고 해석을 한다.
이것은 공자 사상에 대한 이해의 중요한 갈림길이다.
나는 후자의 해석이 공자의 뜻에 부합한다고 본다.
지금까지 공자 사상이 정치나 종교 권력으로 이용되었을 때, 그 왜곡이 가장 심한 문장이 바로 이것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제 시대는 바뀌어 공자 정도의 현인이 아니면 알기 어려웠던 통찰이 누구나 과학적으로 이해가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물질적·제도적 준비도 꽤 마련하였다.
나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높이 비상飛翔할 수 있는 저력이 우리 국민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갇힌 상상력을 해방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데 인문적 토대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의 하나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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