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혼을 위하여 (163) - 일본 현직 의원 트위터에 담긴 의미 :브레이크뉴스
예술혼을 위하여 (163) - 일본 현직 의원 트위터에 담긴 의미
-‘미소라 히바리’ 와 ‘미야코 하루미’ 의 심금(心琴)-
이일영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2/24 [07:31]
일본의 재일 한국인 가수 ‘미야코 하루미’(都 はるみ. 1948~)의 아버지 ‘이종택’(李鐘澤. 1904~1987)은 한국인이었으며 일본 이름은 ‘마츠다 세이지’(松田 正次)였습니다. 그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일본 교토의 비단 명산지인 ‘니시진’(西陣) 에 이주하여 직물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작은 직물공장에 너무나 성실한 여공이었던 여성 ‘마츠시로’(松代. 1919~2005)와 결혼하여 1948년 ‘미야코 하루미’를 낳았던 것입니다.
‘미야코 하루미’의 어머니 ‘마츠시로’는 어머니 ‘타미’(タミ)와 아버지 ‘나카타니 도미타로’(中谷 冨太郎)사이에서 1919년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이시카와현’(石川県) ‘코마츠시’(小松市) 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녀가 네 살 때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 ‘타미’(タミ)는 ‘기타무라 조사부로’(北村 助三郎)와 재혼하여 어머니와 함께 교토로 돌아와 자랐습니다.
‘미야코 하루미’(都 はるみ. 1948~)의 본명은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이며 한국 이름은 이춘미(李春美)입니다. 그는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37~1989) 보다 11살 아래의 나이로 1964년 27살의 나이로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제14회 가요콩쿠르에서 우승하여 ‘곤란한 거예요’(困るのことヨ)라는 노래로 데뷔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발표한 일본 이즈반도(伊豆半島)의 동백꽃으로 유명한 ‘이즈오섬’(伊豆大島)을 소재로 만든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アンコ椿は 恋の花)이라는 노래가 일본 열도를 흔들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후 1965년 발표한 ‘눈물의 연락선’(涙の連絡船) 이 155만 장의 앨범판매를 기록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오면서 그해 연말 일본 가수의 꿈에 무대인 제16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하게 됩니다. 이후 1984년까지 20년 연속 홍백가합전 출장이라는 인기 정상의 가수가 되었습니다.
1973년 선 뮤직 프로덕션으로 이적한 ‘미야코 하루미’는 1976년 그동안 불러온 전통적인 엔카와 다른 감성적인 가요 ‘북쪽의 집에서’(北の 宿から)를 발표하여 앨범판매 143만 장이라는 큰 흥행을 가져옵니다. 이 노래는 12월 엄동의 겨울에 발표되어 추운 겨울 연인을 향한 애틋한 여심을 발라더한 대중가요로 노래하여 대 히트를 기록하면서 ‘미야코 하루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던 노래입니다. 1976년 이와 같은 대 히트곡 ‘북쪽의 집에서’로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짚고 가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1969년 11월 ‘주간 평범’이라는 잡지에 ‘미야코 하루미’의 어머니 ‘마츠시로’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내가 조선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딸 ‘하루미’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다.’면서 ‘이러한 세상을 보면서 딸을 인기 가수로 키워내고 싶었다.’ 라며 ‘미야코 하루미’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던 것입니다. 당시 ‘하루미’ 어머니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딸 ‘하루미’가 재일 한국인임을 주변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인기인의 도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사의 파문이 너무나 컸던 것입니다. 당시 ‘주간 평범’ 잡지는 1959년에 창간된 잡지로 1960년에 100만 부가 팔려나가는 인기 잡지이었습니다. 이에 음반회사는 물론 기획사와 언론에 이르기까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내용에 대하여 가수의 생명이 끝이 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던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 전역에서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것에 대하여 이를 비난하는 편지들이 쏟아져 ‘미야코 하루미’ 어머니는 물론 가수 ‘하루미’ 본인도 이후 일체의 취재를 거부하며 함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1976년대 히트곡 ‘북쪽의 집에서’로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게 될 당시 극심한 논란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는 1976년 12월 9일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 중 하나인 ‘산케이신문’(産業経済新聞)에서 발행하는 ‘주간 산케이’에 ‘하루미의 아버지는 일본인이 아니다.’ ‘이러한 하루미에게 일본의 대표적인 상을 줄 수 없다.’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들끓었던 것입니다.
당시 ‘미야코 하루미’는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대상을 받았지만 ‘이즈오섬’(伊豆大島)을 소재로 만든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을 부를 때마다 환호하던 함성과 ‘눈물의 연락선’과 ‘북쪽의 집에서’를 부를 때 함께 울던 눈물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한마디의 말에 차가운 냉소로 돌아서는 비정함을 바라보며 당시 가수 생활을 그만두려 하였습니다. 이때 ‘미야코 하루미’에게 다가온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재일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입니다. 당시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미야코 하루미’에게 ‘미소라 히바리’가 전했던 말은 ‘나도 싫은 일이 많았다.’ ‘기죽지마’ 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미소라 히바리’의 격려를 안고 시련을 견딘 ‘미야코 하루미’는 그해 마지막 날 대망의 'NHK 홍백가합전'에서 출전자의 맨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는 ‘오오토리’(大トリ)에 선정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일본 가수의 꿈에 무대로 인정받는 'NHK 홍백가합전'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NHK 홍백가합전'은 1945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시도되었던 ‘홍백음악시합’을 바탕으로 1951년 NHK 라디오 방송에서 첫 회가 시작되어 1953년 NHK TV가 개국 되면서 3회부터는 TV 프로가 되어 단 한 번의 중단도 없이 지난해 2017년 68회의 방송을 기록한 일본의 대표적인 방송 프로그램입니다.
일본 가수가 아닌 해외 가수가 처음 출전한 사례는 이탈리아 소녀 가수 ‘로잔나’(Rosanna Zambon. 1950~)와 일본의 남성 가수 ‘히데’(ヒデ. 1942~1990)가 결성한 보사노바 듀오 ‘히데 & 로잔나’(ヒデとロザンナ)가 1970년 백팀으로 첫 출연 하였습니다. 이후 이들은 1975년 결혼하여 부부 듀오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1972년 대만 여가수 ‘오양 페이페이’(欧陽菲菲. 1949~)와 1973년 홍콩 여가수 ‘아그네스 찬’(アグネス・チャン. 1955~)이 그리고 1979년 대만 여가수 ‘주디 온그’(翁倩玉. 1959~)와 1985년 ‘등려군’으로 잘 알려진 대만의 전설적인 여가수 ‘덩리 쥔’(鄧麗君, 1953~1995)이 출전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가수로는 1987년 조용필(1950~)이 처음 출전하여 그의 히트곡 ‘창밖의 여자’를 불렀습니다. 이후 1988년 ‘계은숙’(桂銀淑. 1961~) 이 1989년 ‘김연자’(金蓮子. 1959~)와 패티킴(Patty Kim. 1938~)이 출전하였습니다. 특히 조용필은 한국 가수로는 최초 출전자로 1990년까지 4회 연속 출연하였으며 계은숙은 1994년까지 7회 연속 김연자는 3회 출전하였습니다. 이후 2002년에는 소녀 가수 ‘보아’(BoA. 1986)가 출전하였으며, 2004년에는 이정현(1980~)이, 그리고 2008년 남성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東方神起)가 출전 하였습니다. 이후 2011년 ‘동방신기’(東方神起)의 3번째 출전과 함께 소녀그룹 ‘소녀시대’(小女時代)와 ‘카라’(KARA)가 출전하면서 한류의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2011년 이후 한일 두 나라의 냉각된 관계를 반영하듯 일본 ‘홍백가합전’에 한국 가수의 출전은 막혀 있다가 지난해 2017년 한국 9인조 걸그룹 ‘트와이스’(TWICE)가 6년 만에 다시 출전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 대중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NHK 홍백가합전'의 역대 순간 최고 시청률은 1984년 제 35회 홍백가합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던 ‘미야코 하루미’가 출전하여 눈물로 불렀던 노래 ‘부부 고갯길’(夫婦坂)이 방송되던 시점의 84.4%라는 경이적인 기록입니다. 당시 종합 사회를 맡았던 ‘우부가타 게이치’(生方恵一) 어나운서가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던 시점에 ‘미야코 하루미’를 ‘미소라 히바리’로 바꾸어 호명한 사건 이른바 ‘미소라 히바리’ 생방송 사건이 벌어져 다음 해 아나운서 ‘우부가타 게이치’가 오사카 지국으로 이동하여 퇴직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당시 ‘미소라 히바리’가 남동생의 조직폭력단 연관사건으로 ‘홍백가합전’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에서 이 사건은 더욱 많은 이야기를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미야코 하루미’는 1979년 작곡가이며 가수이었던 ‘아사즈키 히로오미’(朝月広臣. 1944~2009)와 결혼한 이후 1980년 '오사카 가을비'로 제22회 일본 레코드 대상 최우수 가창 상을 받습니다. 이때 남편 이름을 ‘마야지키 타다시’(宮崎雅) 라는 예명으로 1981년 듀엣곡 ‘두 사람의 오사카’(ふたりの大阪)를 발표하여 상당한 히트를 기록하기도 하였지만 1982년 이혼하였습니다.
이후 인기 절정의 상태에 있던 그녀가 1984년 3월 36살의 나이에 ‘보통의 아줌마가’ 되겠다며 "갑자기 가수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때 다시 등장한 인물이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입니다. ‘히바리’와 11살의 나이 차를 가진 ‘미야코 하루미’는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던 대상이었습니다. 지난 1976년 레코드 대상 수상 시기에 재일 한국인 문제로 비방 기사가 쏟아졌을 때 ‘미소라 히바리’가 ‘여러 이야기가 쓰였네’ ‘하지만 열심히 노래해’ 라는 말에 이어 ‘나도 싫은 일이 많았다.’ ‘기죽지마’ 라는 깊은 관심으로 격려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미소라 히바리’가 ‘미야코 하루미’의 은퇴 이야기를 듣고 ‘너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니 꼭 행복해야 한다.’며 비장한 얼굴로 지켜보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훗날 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무대를 떠난 ‘미야코 하루미’는 1987년 프로듀서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 17살의 신인가수 ‘야마토 사쿠라’(大和さくら. 1970~)를 발굴하여 후지 TV가 주관하는 ‘FNS 가요제’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받게 됩니다. 또한, 한국 가수 ‘김연자’(金蓮子. 1959~)의 프로듀서가 되어 일본 가요계에 큰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1989년 6월 24일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죽음을 전해 듣고 가수 복귀를 선언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중하게 살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필자가 확인한 여러 자료에 의하면 ‘미야코 하루미’는 11살이 많은 ‘미소라 히바리’와 상당한 의미가 있는 많은 접촉이 있었습니다. 그중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이 재일 한국인 가수로 공개적으로 알려졌던 ‘미야코 하루미’가 가수의 인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마다 ‘미소라 히바리’가 등장한 사실입니다. 이는 ‘미야코 하루미’가 1976년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았던 시기에 재일 한국인에게는 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와 1984년 ‘미야코 하루미’가 은퇴를 선언하였을 때 등장한 ‘미소라 히바리’가 전한 의미심장한 말들이 쉽게 흘려보내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까닭입니다.
또한, 이러한 ‘미야코 하루미’가 작곡가 손목인에게 전한 ‘미소라 히바리’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한 신빙성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점입니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신중하게 모든 자료와 역사적 행간에 접근하던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일본 입헌민주당 소속 참의원 의원인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 1952~)가 1994년에 펴낸 저서 ‘노래쟁이 ‘미야코 하루미’(歌屋 都はるみ)라는 책을 살펴보다가 의외의 사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리타 요시후’는 꼼꼼한 취재를 통하여 미야코 하루미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와 가수의 음악에 담긴 세세한 이야기들을 논픽션 형식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미소라 히바라’와의 만남에서부터 ‘미야코 하루미’의 데뷔와 은퇴 선언 복귀에 이르는 이야기들이 사실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아리타 요시후’는 이 책을 출판한 이후 ‘미야코 하루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좌로부터) 'NHK 홍백가합전' 저서 ‘노래쟁이 ‘미야코 하루미’ ‘아리타 요시후’ 트위터 내용 출처: https://wikipedia.org © 브레이크뉴스
필자는 이러한 저자 ‘아리타 요시후’ 의원의 트위터를 우연히 살펴 가다가 첨부한 사진과 같은 트위터(twitter) 창을 발견하였습니다. 지난 2014년 6월 8일 트위터에 올린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야코 하루미’가 일본 레코드 대상을 ‘북쪽의 숙소에서’로 수상하기 전에‘대상은 일본과 함께하는 일본인에게 주는 것’ 이라고 업계에 음침한 차별이 있었다. 이에 아버지가 한국인이었던 ‘하루미’는 가수를 그만두려고 생각하였다. 그 때 ‘미소라 히바리’ 는 "나도 싫은 일이 많았다. '기죽지마' 하고 불러내었다. 라는 내용입니다. (都はるみさんが日本レコード大賞を「北の宿から」で受賞する前のこと。「大賞は日本とついているように日本人に与えるもの」と業界で陰湿な差別があった。父が韓国人のはるみさんは歌手をやめようと思った。そのとき美空ひばりさんは「私だってイヤなことがいっぱいあった。たじろぐな」と声をかける)
이렇게 올린 트위터의 댓글에서는 의원이 남의 개인 정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할 짓이냐 등으로 퍼붓는 일본인 팔로우의 뭇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필자는 트위터(twitter) 아이디 @aritayoshifu 로 자신의 실명 ‘有田芳生’을 밝힌 일본 현역의원이 올린 트위터 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일본 현역의원이 게시한 트위터의 내용이 마치 한국인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메시지와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야코 하루미’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한국의 2인조 남성 그룹 ‘동방신기’를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 한국인이라고 유일하게 전한 살아있는 장본인입니다. 이러한 ‘미야코 하루미’의 음악과 삶의 이야기를 펴낸 일본의 현직 의원이 이러한 내용을 분명하게 암시하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트위터에 올려놓은 사실 앞에 우리는 정작 너무나 무심한 세월을 오래도록 흘려보냈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어서 이러한 내용과 함께 ‘미야코 하루미의’ 여러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 칼럼은 (164) ‘재일 한국인 가수 ‘미야코 하루미’입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