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래디스 머랜과 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박유하 | 제3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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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래디스 머랜과 위안부 할머니, 그리고 박유하
제3의길2017.11.060사회, 헤드라인
<<광고>>
¶글쓴이 : 길벗
-위안부 문제 정치화한 사람들, 국회의원 등 개인적 영달에 성공했지만 할머니들에게 실질적 도움은 못 줘
-국수주의와 천박한 역사인식, 왜곡된 반일 여론에 움추린 학계, 정권 눈치 보는 사법부가 유죄 선고 만들어
-1998년과 2007년 사이에 달라진 증언… 기억의 왜곡과 악용이 한일관계의 악화와 피해 확대로 이어진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공군 조종사들.
박유하 교수가 최근 1심의 무죄 선고와 달리 2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우리 사회에 강고하게 또아리를 튼 국수주의와 천박한 역사인식, 역사를 정치적 수단이나 자신의 영달의 발판으로 삼는 정치세력, 왜곡된 반일 여론에 움추려 제대로 목소리를 못 내는 연구자와 학계, 혹여 불똥이 튈까 침묵하는 지식인들, 정권의 눈치를 보는 사법부, 결국 이들에 의해 양심 있는 한 학자는 매도되고 유죄 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국수적 역사관을 주입받았던 대중들은 친일 학자가 유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할 뿐 자세한 내용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야유를 보낸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는 왜곡되고, 그 왜곡은 강화되어만 간다.
어쩌다 우리는 위안부문제를 사실과 다르게 잘못 알게 된 것일까? 정부의 방관에도 그 책임이 있겠으나 정대협의 정치적 접근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 왜곡 현상이 국민들을 일본 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만들어 세우게 하고, 버스의 좌석에 태워 달리게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대협의 지도급 인사들은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며 정치 문제화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인지도를 높여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 제도권 정치에 입문하는 개인적 영달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실질적 도움은커녕 위안부 할머니들의 현재의 고통은 무시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개인적 경험이나 기억들을 소거시키고 오로지 일본에 대한 원한만 되살리기를 요구하고 ’항일 투사‘로 나서기를 강요하는 것 같다.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기억을 왜곡하고 왜곡된 기억이 자신이 실제 경험한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동안 정대협의 소수 관계자들만이 위안부 문제를 독점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입장을 결정했으며,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국민의 반일정서에 편승한 이들의 주장에 대해 감히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일부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체 위안부 할머니의 경험으로 일반화시켜 과장해도 어느 누구도 나서서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박유하 교수가 유죄를 선고받은 것도 우리 사회가 정대협의 폭주를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젠 사실은 사실대로 돌려놓고 정대협도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정대협에서 활동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기억)과 학자•전문가들이 학술적으로 접근해 조사한 내용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다. 물론 정대협 할머니들이 증언하는 아픈 경험들은 실제일 수도 있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의 기억을 정대협의 목적에 맞춰 왜곡 강화하여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치성이 강하고 목적이 뚜렷한 정대협의 보호와 관리를 받는 위안부 할머니들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피해 강도가 높거나 강제 연행 당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고 이 분들의 경험담은 상호간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조금씩 과장을 더해가고,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분들도 동화되거나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 자신의 기억을 오롯이 가지고 있는 할머니들의 증언은 위축되어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정대협 내의 위안부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왜곡된 기억이 진짜 자신이 경험했던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게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보편적 경험으로 굳어져 버리고, 국민들도 영화 <귀향>에서 묘사된 장면들이 위안부 할머니들 모두가 겪었던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 왜곡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머래디스 머랜의 경우와 비슷하다.
머랜은 스트레스로 힘들어 할 때 심리치료를 받게 되고, 최면으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머랜은 아버지에게 이에 대해 따졌고, 아버지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 과정에서 머랜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머랜의 아버지는 머랜을 성적 학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머랜은 아버지가 자신을 성적 학대했다고 기억했을까? 머랜은 일찍 페미니스트 활동을 했고, 아동 학대 사례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근친으로부터의 성적 추행이나 학대를 받은 사례를 많이 보았다. 머랜 자신도 레즈비언으로 크리스천이었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돌팔이 심리 치료사에 의해 이런 경험들이 잠재의식에서 튀어나와 자신이 실제 경험한 기억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 뒤 머랜은 자신의 기억들을 더듬는 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의 성적 학대의 기억은 실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위안부 할머니 중에 머랜과 유사한 사례를 이OO 할머니의 증언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OO 할머니는 위안부 할머니 중 가장 활동이 많고 정치성이 강한 분이다.
이OO 할머니의 증언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변화를 보인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 세상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시점인 90년대에 인터뷰한 내용과 정대협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이후인 2000년대에 증언한 내용이 너무나 차이가 많다. 위안부가 된 계기, 위안부 생활과 대우 등에 대해 실제 이OO 할머니가 겪은 것이 무엇이 실제인지 헷갈리는 내용이 많다.
이OO 할머니는 93년~99년 사이 언론과 인터뷰에서는 1944년 10월 16살의 나이로 위안부에 끌려가 1945년 1월에 대만 신주시에서 가미가제의 위안부로 일을 했으며 하루 5~6명의 군인들을 상대했고, 자신을 살려주고 도움을 준 가미가제 특공대에게 사랑을 느껴 1998년에는 이 특공대원과 영혼 결혼식도 올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2007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 나와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2015년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증언에서도 마찬가지로 90년대의 증언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말을 한다.
자신은 1944년 10월 16세의 나이로 위안부에 끌려왔다고 하면서도 3년간 일본 위안부 생활(1945년 8월 일본군이 항복했으니 10개월의 위안부 생활이 됨. 대만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했으므로 일본군의 항복 후에는 위안부 생활을 하지 않았음)을 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하루에 적게는 20번, 많게는 70번 성관계를 강요받았으며, 생리 중에도 성관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93년 첫 증언에서 하루에 5~6명을 상대했다는 증언과는 그 횟수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가미가제 특공대원이 자신을 살려주고 도움을 주어 사랑을 느껴 그 특공대원과 영혼 결혼식도 올렸다고 1998년에 증언했는데, 2007년에는 이런 내용 대신 대만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일본군 300명에게 강제로 강간을 당하고 전기고문을 당했으며, 요구를 거부하면 칼을 가지고 쭉쭉 째는 폭력을 당하고 그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90년대 처음 증언 때에는 나오지 않던 것들인데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종군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이며 조선의 딸이다’라고 강조한다.
이OO 할머니는 60대 나이에 기억하지 못한 경험들이 70~80이 넘어 새롭게 기억들이 되살아난 것일까? 나는 이OO 할머니가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 증언 이후 세간의 관심을 받고 정대협 활동을 하면서 기억의 편린들 사이의 조각들을 정대협 활동 중에 들은 이야기들로 보충하고 그러는 사이 이것들이 자신의 과거 경험이라 착각하고 기억 속에 재편입되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재편입된 가공된 기억들이 2007년, 2015년에는 재생되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정대협 활동 중에 집단 극단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기억들이 정치적, 조직적 요구에 의한 경험담으로 각색되어 대치된 것이라 보면 무리일까?
컴퓨터는 모든 정보를 세세하게 다 저장하는 반면 사람의 뇌는 기억할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자신의 감각기관에서 들어온 모든 정보를 저장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만 키워드 형태로 저장하게 되고 나중에 기억을 되살릴 때는 그 키워드들만 재생하고 키워드 간의 빈 공간은 기억해낼 당시의 상황에 맞춰 스스로 가공해 엮어내게 된다.
초등학교 동창생 모임에서 동창생들이 큰 줄기에서는 기억들이 유사하지만 디테일한 내용에서는 각자가 다르게 기억하는 것도 이와 같은 우리 뇌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고, 같은 사람이 똑같은 과거의 기억들을 기억을 말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재생해 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OO 할머니도 자신이 초기에 기억했던 위안부에 대한 키워드들 사이의 디테일한 기억들을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춰 가미가제 특공대와의 사랑으로 재생하여 증언했지만, 정대협 활동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 사건이자 역사적 문제로 부각되면서 기억의 편린들 사이의 디테일을 이에 맞춰 구성하게 됐던 것 같다. 이 가공되는 디테일의 내용들이 정대협 활동을 통해 들은 내용으로 채워지고 또 그런 방향으로의 구성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은 환경에 노출됨으로써 이런 왜곡된 기억들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OO 할머니의 증언은 90년대 첫 증언시의 내용이 가장 사실에 가깝고 정대협 활동 이후인 2007년~2015년의 EBS 다큐 <시대의 초상>, 미국 의회 증언,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는 과장과 왜곡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추론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도 아니고 사실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OO 할머니의 증언을 역추적해 보면 증언의 강도가 갈수록 강해지고, 처음보다는 나중에 더 많은 경험 사례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증언의 일관성이 없는 것을 볼 때 내 추론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두뇌는 정확성보다 효율성 위주로 기능하고 자기 방어적 성향이 강해(이기성이 작동해) 선택적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또 두뇌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믿음, 그리고 교육받고 경험한 것들에 의해 현재를 이해하는 로직을 갖고 있다. 머래디스 머랜이나 위안부 할머니들도 두뇌의 이런 특성에 의해 기억의 왜곡이 일어나고 자신이 실제 경험하지 않은 것이거나 경험한 것이라도 실제보다 훨씬 더 심하게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하게 된 것이 아닐까?
위안부 할머니들도 대부분 90세를 넘기고 생존하신 분들도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생전에 정대협 활동 중 남기신 증언들이 객관적 사실로 굳어지게 되고, 이런 증언들이 모든 위안부 할머니들의 공통의 경험들로 알려지고 기록되고 있다. 이러는 사이 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의 보편적 문제이며, 전근대화된 식민지 조선의 문제라는 측면은 간과되고, 특정 목적을 위한 증언들만이 위안부 문제의 전체인 양 인식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개인적, 실존적 기억들은 소거된 채, 성 노예로 끌려간 조선의 딸이며 항일 투사라는 상(像,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한국에서 특정 목적 하에 객관적 사실과 다르게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세력이 득세하자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하고 반성하며 사과하는 일본인들마저 한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 위안부 문제의 생산적이며 전향적 해결은 점점 멀어지고, 한일 관계도 악화됨에 따라 직접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는 물론 일본 거주 재일동포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다.
박유하 교수에 대한 우리나라 사법부의 이번 유죄 선고는 한 개인의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 내의 양심적 학자나 일본인들의 입지를 줄여 향후 한일관계 회복에 큰 장애를 안겨준,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우리가 침묵하고 방관하는 사이, 양심적인 학자는 파렴치한으로 내몰리고 역사는 왜곡되어 간다. 역사학계와 지성인들이 각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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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과 2007년 사이에 달라진 증언… 기억의 왜곡과 악용이 한일관계의 악화와 피해 확대로 이어진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공군 조종사들.
박유하 교수가 최근 1심의 무죄 선고와 달리 2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우리 사회에 강고하게 또아리를 튼 국수주의와 천박한 역사인식, 역사를 정치적 수단이나 자신의 영달의 발판으로 삼는 정치세력, 왜곡된 반일 여론에 움추려 제대로 목소리를 못 내는 연구자와 학계, 혹여 불똥이 튈까 침묵하는 지식인들, 정권의 눈치를 보는 사법부, 결국 이들에 의해 양심 있는 한 학자는 매도되고 유죄 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국수적 역사관을 주입받았던 대중들은 친일 학자가 유죄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할 뿐 자세한 내용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야유를 보낸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는 왜곡되고, 그 왜곡은 강화되어만 간다.
어쩌다 우리는 위안부문제를 사실과 다르게 잘못 알게 된 것일까? 정부의 방관에도 그 책임이 있겠으나 정대협의 정치적 접근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 왜곡 현상이 국민들을 일본 대사관 앞에 ‘위안부 소녀상’을 만들어 세우게 하고, 버스의 좌석에 태워 달리게 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정대협의 지도급 인사들은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며 정치 문제화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인지도를 높여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 제도권 정치에 입문하는 개인적 영달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실질적 도움은커녕 위안부 할머니들의 현재의 고통은 무시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개인적 경험이나 기억들을 소거시키고 오로지 일본에 대한 원한만 되살리기를 요구하고 ’항일 투사‘로 나서기를 강요하는 것 같다.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기억을 왜곡하고 왜곡된 기억이 자신이 실제 경험한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동안 정대협의 소수 관계자들만이 위안부 문제를 독점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입장을 결정했으며, 이들의 의견이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국민의 반일정서에 편승한 이들의 주장에 대해 감히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일부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체 위안부 할머니의 경험으로 일반화시켜 과장해도 어느 누구도 나서서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박유하 교수가 유죄를 선고받은 것도 우리 사회가 정대협의 폭주를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젠 사실은 사실대로 돌려놓고 정대협도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정대협에서 활동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기억)과 학자•전문가들이 학술적으로 접근해 조사한 내용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다. 물론 정대협 할머니들이 증언하는 아픈 경험들은 실제일 수도 있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의 기억을 정대협의 목적에 맞춰 왜곡 강화하여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치성이 강하고 목적이 뚜렷한 정대협의 보호와 관리를 받는 위안부 할머니들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피해 강도가 높거나 강제 연행 당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고 이 분들의 경험담은 상호간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조금씩 과장을 더해가고,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분들도 동화되거나 자신도 그런 경험을 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 자신의 기억을 오롯이 가지고 있는 할머니들의 증언은 위축되어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정대협 내의 위안부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왜곡된 기억이 진짜 자신이 경험했던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이게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보편적 경험으로 굳어져 버리고, 국민들도 영화 <귀향>에서 묘사된 장면들이 위안부 할머니들 모두가 겪었던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 왜곡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머래디스 머랜의 경우와 비슷하다.
머랜은 스트레스로 힘들어 할 때 심리치료를 받게 되고, 최면으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머랜은 아버지에게 이에 대해 따졌고, 아버지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 과정에서 머랜의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머랜의 아버지는 머랜을 성적 학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머랜은 아버지가 자신을 성적 학대했다고 기억했을까? 머랜은 일찍 페미니스트 활동을 했고, 아동 학대 사례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근친으로부터의 성적 추행이나 학대를 받은 사례를 많이 보았다. 머랜 자신도 레즈비언으로 크리스천이었던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돌팔이 심리 치료사에 의해 이런 경험들이 잠재의식에서 튀어나와 자신이 실제 경험한 기억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 뒤 머랜은 자신의 기억들을 더듬는 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의 성적 학대의 기억은 실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위안부 할머니 중에 머랜과 유사한 사례를 이OO 할머니의 증언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OO 할머니는 위안부 할머니 중 가장 활동이 많고 정치성이 강한 분이다.
이OO 할머니의 증언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변화를 보인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 세상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시점인 90년대에 인터뷰한 내용과 정대협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고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 이후인 2000년대에 증언한 내용이 너무나 차이가 많다. 위안부가 된 계기, 위안부 생활과 대우 등에 대해 실제 이OO 할머니가 겪은 것이 무엇이 실제인지 헷갈리는 내용이 많다.
이OO 할머니는 93년~99년 사이 언론과 인터뷰에서는 1944년 10월 16살의 나이로 위안부에 끌려가 1945년 1월에 대만 신주시에서 가미가제의 위안부로 일을 했으며 하루 5~6명의 군인들을 상대했고, 자신을 살려주고 도움을 준 가미가제 특공대에게 사랑을 느껴 1998년에는 이 특공대원과 영혼 결혼식도 올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2007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 나와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2015년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증언에서도 마찬가지로 90년대의 증언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말을 한다.
자신은 1944년 10월 16세의 나이로 위안부에 끌려왔다고 하면서도 3년간 일본 위안부 생활(1945년 8월 일본군이 항복했으니 10개월의 위안부 생활이 됨. 대만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했으므로 일본군의 항복 후에는 위안부 생활을 하지 않았음)을 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하루에 적게는 20번, 많게는 70번 성관계를 강요받았으며, 생리 중에도 성관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93년 첫 증언에서 하루에 5~6명을 상대했다는 증언과는 그 횟수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가미가제 특공대원이 자신을 살려주고 도움을 주어 사랑을 느껴 그 특공대원과 영혼 결혼식도 올렸다고 1998년에 증언했는데, 2007년에는 이런 내용 대신 대만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일본군 300명에게 강제로 강간을 당하고 전기고문을 당했으며, 요구를 거부하면 칼을 가지고 쭉쭉 째는 폭력을 당하고 그 과정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90년대 처음 증언 때에는 나오지 않던 것들인데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종군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이며 조선의 딸이다’라고 강조한다.
이OO 할머니는 60대 나이에 기억하지 못한 경험들이 70~80이 넘어 새롭게 기억들이 되살아난 것일까? 나는 이OO 할머니가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 증언 이후 세간의 관심을 받고 정대협 활동을 하면서 기억의 편린들 사이의 조각들을 정대협 활동 중에 들은 이야기들로 보충하고 그러는 사이 이것들이 자신의 과거 경험이라 착각하고 기억 속에 재편입되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재편입된 가공된 기억들이 2007년, 2015년에는 재생되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정대협 활동 중에 집단 극단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기억들이 정치적, 조직적 요구에 의한 경험담으로 각색되어 대치된 것이라 보면 무리일까?
컴퓨터는 모든 정보를 세세하게 다 저장하는 반면 사람의 뇌는 기억할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자신의 감각기관에서 들어온 모든 정보를 저장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만 키워드 형태로 저장하게 되고 나중에 기억을 되살릴 때는 그 키워드들만 재생하고 키워드 간의 빈 공간은 기억해낼 당시의 상황에 맞춰 스스로 가공해 엮어내게 된다.
초등학교 동창생 모임에서 동창생들이 큰 줄기에서는 기억들이 유사하지만 디테일한 내용에서는 각자가 다르게 기억하는 것도 이와 같은 우리 뇌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고, 같은 사람이 똑같은 과거의 기억들을 기억을 말할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재생해 내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OO 할머니도 자신이 초기에 기억했던 위안부에 대한 키워드들 사이의 디테일한 기억들을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춰 가미가제 특공대와의 사랑으로 재생하여 증언했지만, 정대협 활동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정치적 사건이자 역사적 문제로 부각되면서 기억의 편린들 사이의 디테일을 이에 맞춰 구성하게 됐던 것 같다. 이 가공되는 디테일의 내용들이 정대협 활동을 통해 들은 내용으로 채워지고 또 그런 방향으로의 구성을 알게 모르게 강요받은 환경에 노출됨으로써 이런 왜곡된 기억들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OO 할머니의 증언은 90년대 첫 증언시의 내용이 가장 사실에 가깝고 정대협 활동 이후인 2007년~2015년의 EBS 다큐 <시대의 초상>, 미국 의회 증언,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는 과장과 왜곡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추론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도 아니고 사실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OO 할머니의 증언을 역추적해 보면 증언의 강도가 갈수록 강해지고, 처음보다는 나중에 더 많은 경험 사례를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증언의 일관성이 없는 것을 볼 때 내 추론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두뇌는 정확성보다 효율성 위주로 기능하고 자기 방어적 성향이 강해(이기성이 작동해) 선택적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또 두뇌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믿음, 그리고 교육받고 경험한 것들에 의해 현재를 이해하는 로직을 갖고 있다. 머래디스 머랜이나 위안부 할머니들도 두뇌의 이런 특성에 의해 기억의 왜곡이 일어나고 자신이 실제 경험하지 않은 것이거나 경험한 것이라도 실제보다 훨씬 더 심하게 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하게 된 것이 아닐까?
위안부 할머니들도 대부분 90세를 넘기고 생존하신 분들도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생전에 정대협 활동 중 남기신 증언들이 객관적 사실로 굳어지게 되고, 이런 증언들이 모든 위안부 할머니들의 공통의 경험들로 알려지고 기록되고 있다. 이러는 사이 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의 보편적 문제이며, 전근대화된 식민지 조선의 문제라는 측면은 간과되고, 특정 목적을 위한 증언들만이 위안부 문제의 전체인 양 인식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개인적, 실존적 기억들은 소거된 채, 성 노예로 끌려간 조선의 딸이며 항일 투사라는 상(像,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한국에서 특정 목적 하에 객관적 사실과 다르게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세력이 득세하자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하고 반성하며 사과하는 일본인들마저 한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 위안부 문제의 생산적이며 전향적 해결은 점점 멀어지고, 한일 관계도 악화됨에 따라 직접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는 물론 일본 거주 재일동포들에게도 피해를 주고 있다.
박유하 교수에 대한 우리나라 사법부의 이번 유죄 선고는 한 개인의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 내의 양심적 학자나 일본인들의 입지를 줄여 향후 한일관계 회복에 큰 장애를 안겨준, 매우 심각한 사안이다. 우리가 침묵하고 방관하는 사이, 양심적인 학자는 파렴치한으로 내몰리고 역사는 왜곡되어 간다. 역사학계와 지성인들이 각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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