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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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 백성의 수난사
주돈식 저 | 학고재 | 2007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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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출간일 2007년 12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500g | 148*210*20mm
ISBN13 9788956250656
ISBN10 8956250650
관련분류
카테고리 분류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한국문화 > 조선시대
책소개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는 주돈식(전 문체부 장관) 저자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인 피랍사를 그 소재로 가공인물과 실제의 역사를 함께 보여주며 새로운 형식의 역사 다큐로 엮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60만 명을 헤아리는 조선인이 참혹하게 청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상황과 그 한을 갚기 위해 인조에게서 쾌도(快刀)를 넘겨받은 효종이 10년 동안 북벌의 꿈을 갈고 닦는 과정을 사료에 있는 사실(史實)을토대로 조선 민중의 처지를 대표하는 김분남과 길영복 같은 가공인물을 통해 복원해내고 있다.
17세기 초 병자호란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왜곡하지 않고 충실히 기록하면서 당시의 정치 상황, 국외 정세, 전란의 현황 등은 물론이고 청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의 생활과 그들이 탈주, 귀환했을 때 조선 사회가 보여준 태도 등을 발굴하고 확인한 자료에 근거해 보여주며 픽션을 통해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는 책이다.
목차
프롤로그
병자호란
전쟁의 첫 화살 / 남한산성 / 쾌도 / 청군의 본격적인 포로사냥 / 강도의 비극 /
근왕병은 어디에 / 최후통첩과 출성항복
포로
조선 포로 60만 / 만주 땅에 들어선 포로들 / 포로는 노예 / 북벌의 태동 / 노예시장 / 환향녀 / 청나라의 횡포 / 적응해가는 포로들
소현세자
전쟁연습 / 소현세자, 간병으로 죽다 / 처녀 공출 / 황제의 죽음 / 치욕
효종의 꿈
봉림대군 / 준비된 새 임금 / 학풍 민풍 무풍 / 왕 길들이기 / 의순공주 / 기회 / 왕은 외롭다 / 쾌도
에필로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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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저 : 주돈식 (朱燉植) 관심작가 알림신청 작가 파일
충남 천안시 입장면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범대 국어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사 정치부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청와대 정무, 공보수석(대변인 겸임) 비서관(김영삼 정부), 문화체육부장관, 무임소장관, 미국하바드대학교 연구원,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 교환교수, 세종대학교 신방과 교수 및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우리도 좋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문민정부 1200일』, 『아기와 함께 디스코를』, 『조선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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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청군들은 산성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파주, 적성積城)으로부터 동으로는 양지陽智), 양근현 양평과 가평 일부), 여주, 이천, 광주, 남으로는 과천, 금천, 수원까지 흩어져 다니면서 마음 놓고 포로를 잡아들였다. 어느 마을은 온 마을을 휩쓸어 폐허가 되었고, 향교에서 제를 지내다가 모두 잡혀간 일도 있었다. 가장과 부인이 잡혀가 많은 가정이 파탄이 났다. 아이를 안고 길을 가는 부녀자들에게 달려들어 아이는 눈 위에 집어던지고 부녀자는 폭행한 뒤 끌고 가기 일쑤였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청군 진영에는 조선 여자들이 셀 수 없이 많고, 군진 주변에는 어린이 시신이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p.46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문서화하여 건넨 항복 문서는 병자호란의 성격을 분명히 말해준다. 청나라의 의도는 확연했다. 청나라는 현재의 조선 왕을 인정하고 왕이 죽으면 세자를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함으로써 조선의 체제를 인정했다. 조선 군대도 해산하지 않고 두었다. 조선의 고위 신하들도 그대로 두고 척화파 중급 관리 세 명을 제거하는 데 그쳤다. 청태종이 처음 전쟁을 일으킬 때 ‘명을 치기 위한 배후 정리’라던 명분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 때엔 으레 따라다니는 패전국에 대한 전쟁배상금 요청도 없고, 매년 보내야 하는 세폐 정도에서 끝냈다.---p.63~64
병이 나거나 발에 상처가 나서 따라오지 못하는 포로가 생기면 산이든 들판이든 관계없이 버리고 갔다. 버려진 포로들은 대부분 얼어 죽었다. …) 청군은 항복한 뒤엔 포로를 잡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북쪽으로 철군하면서 도망하고 병사한 포로만큼 다시 잡아들여 보충했다. …) 두 번 이상 도망한 자는 귀에 구멍을 뚫고 한데 묶어 끌고 갔다. …) 인정이니 사람 대우니 하는 것은 처음부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조선 포로는 소유물이며, 산 재산일 뿐이었기 때문이다.---p.83~84
청군이 철수한 뒤, 인조는 꿈속에서도 포로들이 나타나 살려달라며 달려들어 잠을 깨곤 했다. 깜짝 놀라 깨어보면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 인조는 포로 수가 그리 많은 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청군이 모두 철수한 뒤 전쟁에 대한 감회를 밝히는 글에 죄 없는 백성을 모두 다른 나라의 포로가 되게 했다.는 일종의 사과문을 넣으라고 지시했다.---p.80~81
노예를 사러 오는 사람은 여자든 남자든 건강 상태부터 본다. 먼저 옷을 모두 벗긴 다음 앞뒤를 살피고 피부를 본다. 그러고는 나체인 채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키고 걸음을 걸려 관절을 본다. 다음으로 발바닥과 치아를 본다. 여자를 사서 첩을 삼으려는 사람은 여자의 가슴, 성기, 체모 등을 구체적으로 살핀다. 조선에서 곱게 자란 여인들, 특히 낯선 남자 앞에 나서본 일조차 없는 여인들은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 이역만리에서 벌거벗고 여러 사람 앞에 서야 하는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느꼈다. 이 명령을 거절하여 수많은 조선 여자 포로들이 이 노예시장에서 채찍을 맞고 이슬처럼 사라졌다.---p.123
세자와 대군은 편의복 차림으로 수행원 없이 매매 장소에 나갔다. 매매 장소는 아침 일찍부터 시장바닥처럼 붐비고 시끌벅적했다. 이 매매를 위해 멀리 조선에서 온 사람과 포로로 잡혀온 이들이 처음 만났다. 부둥켜안고 몇 시간이나 함께 울며 사연을 말하는 사람, 반가움을 이기지 못해 절을 하는 사람, 아예 목 놓아 곡을 하는 사람…. 그야말로 천지가 슬픔으로 가득했다.---p.120~121
한 어머니가 딸을 속하려고 했다. 딸은 자기 집이 윗마을 송부자댁 논을 소작하여 네 식구가 간신히 먹고사는 형편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한 해 소출을 다 합쳐보아야 2백 냥이 넘는 속가를 내지 못할 처지인 것이다. 청나라 사람은 3백 냥의 속가를 불렀다. 어머니는 애가 타서 2백 냥으로 하자고 했다. 딸은 2백 냥도 어머니가 어떻게 낼 요량인지 걱정이었다. 그러나 청나라 사람은 250냥을 불렀고, 더 이상은 내려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애가 타서 울기도 하고, 집안이 어렵다며 사정도 해보았지만 청나라 사람은 ‘이 아이는 여기 청나라에서도 왕의 시녀나 여진인의 첩 등으로 이만한 가격에 살 사람이 많고, 이 여자를 잡아온 군인들이 원래 비싸게 팔았다’라고 하며 깎아주지 않고 버텼다. 청나라 사람의 태도에 몹시 화가 나서 절망한 이 딸은 옆에 있던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했다.---p.121~122
한 부인이 남편을 속하려고 이곳에 와서 20여 일을 머물렀다. 마침내 시장이 열리고 그리던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부인은 남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장리쌀까지 얻어 3백 냥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청나라 사람은 5백 냥을 불렀다. 이만한 일꾼이면 청나라 어디서든지 5백 냥은 받을 수 있다며 배짱을 부리는 것이었다. 부인은 남편 옆에서 어떻게든 남편을 속환하려고 빌기도 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사정도 해보았다. 그런데 청나라 사람은 엉뚱하게도 이 부인에게 욕심이 난 모양인지 밤을 새고 보자며 부인에게 자기 숙소를 가르쳐주고 그곳에서 밤에 더 이야기를 하자는 이상한 제의를 했다.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남편은 병영에 있는 칼로 자신의 손가락 세 개를 자르고 ‘나는 더 이상 노동을 못 한다’며 속가를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등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비극이 연출되었다.---p.122~123
백정 출신 길영복창작인물)처럼 어차피 돌아가야 별것 없다는 생각으로 뿌리를 박은 사람도 있었다. 소현세자는 이 노예시장의 모습을 사족士族)과 각 개인의 부모와 처자 등의 속환가는 많으면 수백 또는 수천 냥이나 되어 속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사람들이 모두 희망을 잃었고,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 찼다---p.124고 썼다.
세자와 대군은 이 사냥에서 의외의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사냥 첫날 세자와 대군이 쉬고 있는데 조선인 수십 명이 몰려와 ‘우리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호소했다. 조선 세자와 대군이 온다는 말을 듣고 조선 사람들이 떼 지어 나타나 살려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그들은 선천宣川) 일대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달리 어찌할 수 없던 세자 일행은 이들에게 밥을 주고 ‘건강하게 기다려달라’며 위로의 말만 하여 보냈다.
이 사실로 미루어, 포로들은 끌려가서 5년 뒤까지 떼를 지어 청나라 벌판을 헤매거나 인근 부락과 농막 등 농촌에 묻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도 이들을 거두어주지 않았으니, 이들은 그렇게 살다가 죽었거나 청나라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혹은 도시로 흘러들어가 조선인 집단을 이루고, 더러는 청에 노동력을 제공하며 서로 의지하고 살았을 것이다.---p.152~153
청나라가 조선에 인간 공출을 요구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동물을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 여인들은 청나라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일할 것이 뻔했다. 조선은 그런 실상을 파악하지도 않고 가축 몇 마리 없애는 것쯤으로 여겼다. 어차피 노비의 자식이나 천한 것들은 조선에서도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뭐 주고 뭐 맞는 격으로 혼은 혼대로 맞는 것이 조선의 처지였다.---p.169~170
청은 돈 외에도 여자를 탐했다. 청은 황제의 시녀 공출에 이어 결혼 대상으로 사대부 딸들을 뽑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가 하도 거세어 조선의 사대부들은 딸을 내놓으라는 요구에 응하기 위해 양녀 확보에 나섰다.
어느 해엔 고관의 나이 어린 딸 여섯 명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고민 끝에 조선은 우의정 신경진의 8세 된 첩 손녀, 전 판서 이명李溟)의 8세 된 첩의 딸, 공조판서 이시백李時白)의 8세 된 양녀, 전 첨지 이후근李厚根)의 12세 된 첩의 딸, 전 판서 심기원沈器遠)의 11세 된 첩의 딸, 평안병사 이시영李時英)의 첩의 딸 등을 뽑아 보냈다. 첩이란 대감들의 성욕을 충족하는 수단이지만 그 자식들은 이렇게 쓰이기도 했다.---p.182~183
이 쾌도는 몇 년 전 삼전도 언 땅 위에 무릎 꿇고 목숨을 빌어야 했던 우리 왕가는 물론, 한을 풀어달라는 모든 조선인의 혼이 뭉쳐진 칼이 아니냐? 너를 세자로 세우는 것은 바로 그들의 한을 풀어주고 혼을 일깨워달라는 뜻이다. 그런 뜻을 실현하기에는 네가 가장 적임자라 판단했다. 그러니 너는 세자 책봉을 사양하지 말고 이 칼에 맺힌 조선 민족의 말없는 한과 명령을 엄숙히 받아들여야 한다.---p.188
삼전도 수항단 아래에서 청 황제에게 절을 하던 일, 죄 없는 수십만 백성들이 선양에 끌려가 노예로 팔리던 모습, 선양에서 8년간이나 청나라 관리들의 모욕을 받으며 살아온 과거가 그림처럼 머리를 스쳤다. 역사의 빚을 갚는 것은 결국 복수가 아니던가. …) 조선 왕조의 굴절된 모습을 바로잡고 조선 백성의 치욕과 울분을 씻어야 하는 큰 멍에를 지는 것이었다.---p.188~189
말 타고 활 쏘는 자들이 말안장에 엎드려 쏘지 않고 서서 쏘기 때문에 적의 화살에 맞기 쉬어 볼 때마다 큰 웃음거리가 된다. …) 화살은 날아간 끝에 가서는 힘이 빠져 비단 폭도 뚫지 못하는 법인데 사람들은 멀리 쏘는 데만 힘쓰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 청나라 무기를 보면 보졸은 검 자루를 길게 하고 기병은 짧게 했다. 검을 휘두르는 데 불편하지 않게 한 것이다.
---p.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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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책은 ‘병자호란’ ‘포로’ ‘소현세자’ ‘효종의 꿈’ 등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어영청(御營廳)과 총융청(摠戎廳)을 창설하고 군대도 2만 명 늘렸지만 조선군은 실전 경험이 부족하고 사명감도 떨어졌다. 그러던 중 청은 명을 치기 전에 조선을 다잡기 위해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지만 곧 청의 군대에 에워싸이고 만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인조와 신하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이 청군은 포로로 끌고 가기 위해 수십만을 목표로 한 조선인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경기도 속오군(束伍軍ㆍ지방군)의 간부인 황태곤의 아내 김분남(창작인물)도 이때 끌려간 조선의 아낙으로 등장한다.
조정의 결정에 따라 강도로 파천(播遷)을 나섰던 왕족들과 대신들도 갑곶 나루터에서 청군의 벼락을 맞았다. 고관의 부녀자들과 피란 온 백성까지 이곳에서만 1만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인조는 믿었던 근왕병마저 소용없이 되자 주화파들에게 귀를 열고 출성항복(出城降伏)을 결정한다.
청이 원했던 건 결국 무엇인가. 그들은 인조가 항복을 통보한 12월27일을 기준해서 그 이전에 잡힌 자는 모두 선양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청의 가장 큰 침략 목적은 포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1637년 1월30일 남한산성을 나선 인조가 청태종 앞에서 흙바닥에 무릎 꿇고 항복을 하자 조선인 포로들을 엮은 청군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철군을 시작했다.
포로
최명길은 『지천집(遲川集)』에서 “청군이 조선 왕의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 15일에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무려 50여만 명이었다”라고 했다. 이 중에 도망친 포로도 있겠지만 철수를 전후해 한강 이북에서 청군에게 잡힌 포로도 상당수 있었다. 정약용은 『비어고(備禦考)』에서 “우리 포로 몇백 명이 먼저 가는데 청나라 군인 한두 명이 뒤따라갔다.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선양으로 간 사람은 60만 명인데 몽고군에게 붙잡힌 자는 여기 포함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한겨울에 60만 명이나 되는 포로가 이동하다보니 낙오자가 많았다.
포로들은 압록강을 건너고 봉황성과 통원보를 지나 최종 목적지인 청의 수도 성경지금의 선양)의 외곽 성 밑 채소밭에 4월 15일경 병영별로 도착했다. 그 행렬에는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도 함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포로들은 노예처럼 팔려나갔다. 노예시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포로들은 돈을 받고 조선에 속환贖還)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초 한 사람당 1백 냥 정도이던 속가는 고관대작들이 식솔들을 되돌려받기 위해 1천 냥, 1천5백 냥을 부르는 바람에 턱없이 치솟았다. 결국 비싼 속가로 인해 속환 대상이 되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해하는 경우도 생겼다.
하지만 어렵사리 돌아와도 조선에서는 그들을 특히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비하했다. 청군에 끌려간 김분남도 가까스로 도망쳐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과거에 급제해 번듯하게 출세한 아들을 훔쳐보고 살아야 하는 고통의 세월이었다. 그는 아들 앞에 나서지 못한 채 비구니가 되어 아들 열남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다.
소현세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심양에서 조선 포로들의 생활을 눈으로 확인하며 괴로워했다.청나라는 노예로 쓸 남녀뿐만 아니라 황제의 시녀나 여진 남자의 결혼상대로 쓸 여자들도 공출해 갔다.여인들을 청나라까지 인솔해오는 조선 대표들은 돌아가서 조정에 바칠 ‘여인 접수 확인증’이 필요했다. 청측은 여인들이 마음에 들면 접수증을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혼내기만 했다. ‘처녀들이 모두 못생긴 데다가 인원수도 맞추지 못했는데 확인서를 어찌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라며 소리를 질러 조선 대표는 감사의 인사는커녕 야단만 맞고 쫓겨나오기 일쑤였다. 처녀들도 인간 대접은 못 받았다. 조선의 인간 공출은 근래엔 서양에까지 알려져 여러 저서에 소개되고 있다.
태종이 죽은 뒤 청은 조선인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미 명나라를 제압했고 수도도 선양에서 북경으로 옮긴 뒤였다. 인질로 끌려온 뒤 8년 만에 소현세자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원래 몸이 약했던 세자는 귀국 직후 몸이 검어지고 각혈을 하면서 사흘간 중병을 앓다가 그만 숨지고 말았다. 인조에게 벼루로 맞았다느니, 독살당했다느니 설이 분분하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당시 병세로 볼 때 간경화나 간암에 걸려 있었고 패혈증까지 겹쳐 숨진 것으로 보인다. 신하들은 왕위를 원손에게 잇도록 해야 한다고 간청했지만 인조는 이를 물리치고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에게 왕권을 넘겨주기로 한다.
효종의 꿈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북경 근처에 잡혀 있던 봉림대군도 귀국을 서둘렀다. 돌아온 봉림을 불러 인조는 반정으로 자신이 왕권을 잡을 때 신하들에게서 선물받은 쾌도快刀)를 꺼내 주며 청나라에서 받은 ‘역사의 빚’을, 조선 민중의 한을 풀어 주기를 당부한다.
봉림도 비로소 세자 책봉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수시로 쾌도를 꺼내보면서 이 쾌도가 ‘북벌의 칼’이 될 때 조선 민족은 혼이 깨어나고 역사의 빚을 갚고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다짐했다.
효종은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를 해야겠다며 토산품 진상을 금지했고, 세도가의 호화 별장을 비판했다. 공물을 쌀로 환산하여 가을에 한꺼번에 징수하는 대동법을 시행해 세제상의 편의를 주려고 했다. 비록 온전히 정착하지는 못했지만 화폐 사용으로 민풍을 개혁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고민한 것은 무풍武風)을 진작하는 일이었다.
군대의 복장, 마상 활쏘기, 보졸과 칼자루 등등 군대 전술 각 분야의 개선 방향을 지시했고, 조선 군대의 치명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는 군율 확립에 힘을 쏟았다. 문신들의 집요한 반대를 무릅쓰고 정력적으로 추진한 효종의 무풍 진작 정책에 따라 나라의 분위기는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지탱해온 문약文弱)을 떨쳐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효종은 10년간 준비해온 북벌의 거사를 불과 넉 달 앞두고 왕실의 내림병이었던 이마의 종기가 도져서 허무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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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조명된 병자호란의 결과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로얄 o****l | 2019-07-28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11502269
저자의 세심한 리서치와 픽션을 가미한 생동감 있는 기술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병자호란이 조선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는지 알게 되었고 사대사상으로 계속 국력은 약해지고 결국 퇴락의 길로 가게 되었는지 이 책은 잘 보여줍니다. 특히 효종에 대한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만약 북벌정책이 잘 지속되었더라면 망국이 아니라 부국이 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혼탁한 현 시대에도 부국강병의 교훈이 되리라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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