その結果を「日本史教育研究会」の大会で発表すると、「朝鮮は当時平安時代のような状態で遅れていた」「開明が遅れた国が強い国の圧力を受けるのは国際的な力学の問題である」という日本の侵略を肯定するような意見や「‘日本人教師’として生徒に日本に対して嫌悪感を持たせてはならない」「いきなり朝鮮問題を取り上げても生徒はシラケルだけだ」と、日朝関係学習に無関心な発言が続き、残念ながら一部の「同志」を除いてはほとんど支持を得られなかった。わたしはまさに「‘日本人教師’として、日本史をどう考えるか」という問題提起をしたかったのだが。 しかしその発表が契機となって日朝関係史の記述を勧められ、1986年わたしは『海峡を越えて・일본と朝鮮ー日本と朝鮮の2000年を考えるー』(評論社)を出版した。古代から現代までの通史で、古代~近世はなるべく新しい資料に基づいて日朝の交流や親善を描き、近代以降は両国の民衆の立場から見ることに努め、当時の「在日」の状況にも触れた。書くことを通じて、日朝関係を知ることは日本を知ることだという思いを新たにした。 ところで問題は、このような本を書きながらも、それはすべて机上で学んだことであり、生身の「在日」にも韓国人にもなかなか会えないことだった。「調布ムルレの会」で朴慶植・李進煕先生らの講演を聞き、フィールドワークで金達壽さんにお目にかかったりし、朝鮮と名がつく集まりに片っ端から行ってみたりするものの、個人的な知り合いはできない。まるで日本人と朝鮮人とは同じ世の中に背中合わせで別々に生きているみたいだった。だから「日韓合同授業研究会」が発足すると聞いたとき、それこそ喜び勇んで参加したのだった。発足の集会には大勢が集まり熱気にあふれていた。 4)日韓合同授業研究会 1995年第1回大会はソウルで開かれた。発起人のひとりで、わたしが通い始めていた「多摩市ハングル講座」の創設者、故村松豊功さんに勧められてわたしも授業報告をすることになった。テーマは「近現代の日韓関係史」で、朝鮮の開国から1945年までの日朝関係を発表形式で学んだ高校の授業の内容と生徒の感想を整理したものだった。それまで「原爆の被害を受けたかわいそうな日本」「日本が悪いことをするはずがない」と思い込んで来た生徒は、加害者としての日本に触れて衝撃を受け戸惑いながら知ってよかったと思ったり、「先生、日本のことを悪く言わないでください、悲しくなります」と言ったり、さまざまな反応をする。一方わたしは生徒たちがいくら歴史の真実を知って申し訳ないと思っても、それだけでは韓国に対する親近感は生まれないことに悩んでいた。韓国の教師たちと話し合いたかったのだけれど、大会直前に体調を崩して参加できず、当然ながら何の反応も得られなかった。 第2回は東京で開かれ、「高等学校日本史教科書に見る日韓関係の記述―近現代」という発表をした。23種の教科書を簡単に調べたのち、占有率が高い4種を詳しく調べ、とくに日本と朝鮮の民衆についてどの程度言及しているかに力点を置いた。当時韓国では国定教科書1種のみであったためか、マスコミの報道もあって日本の教科書は偏向していると思われていたが、日本には何種もの教科書があって中にはかなり詳しく日朝関係を扱ったものもあるし、民衆史観を取り入れるなど、多様な考えと試みがあることを知ってもらい、どのような歴史教育が望ましいかを共に考えたかった。しかし発表にあたえられた時間は短く討議の時間もほとんどなくて、その願いはかなわなかった。 さらに何かのきっかけで竹島が話題になると、韓国側の参加者が一斉に立ち上がって「独島は韓国の領土だ、ちゃんと証拠がある!」と叫んだことに、わたしは茫然とした。竹島がどこの領土かという問題ではなく、それを感情的に主張する態度に違和感を覚え、これでは話ができないとがっかりした。ただある先生が「日本の悪い点ばかりしか知らない生徒に何とか友好の種を蒔こう」と、日本の子どもがやさしい気持ちでヒマワリを育てる日記を紹介した授業を発表されたことは嬉しかった。いくら歴史的事実を知っても親近感は生まれないことに悩んでいたので、とてもよい授業だと思われた。 いま振り返ってみると、当時、わたしは自分をわかってもらいたい気持ちばかりが強く、韓国の人たちがどんな思いでそこに参加しているかを思い見る余裕がなかったことを残念に思う。 第3回大会はソウルで開かれたが、前回あまりに落胆したため参加しなかった。ただみなができたばかりの独立紀念館に行くと聞き、それは見ておかなくちゃと初めて一人旅をして見に行ったのだった。第4回ソウルも不参加。第5回は東京。西澤さんと柳虎順さんが共同授業の発表をされ、アニメーション映画『火垂るの墓』に対して韓国の生徒の中には「日本が被害者づらをしていて不愉快だ」という感想があると聞いて、誰が見てもかわいそうに思える話でも反対側から見ると違うのだと、ショックを受けた。歴史分科会では、古代には日本とか朝鮮とかいう国の感覚はなかったこと、韓国の歴史教育は自国中心的すぎることなどが話題になった。 2001年、第5回慶州大会はわたしにとって忘れられない会になった。出発当日まで補習授業をして空港に駆け付けたための疲れ、山下さんがとってくださったソウルの安ホテルでの眠れぬ一夜、食べつけないニンニク、バスでの長距離移動…などのためか胃潰瘍を発症し、かろうじて自分の発表だけはしてフィールドワークも頑張ったが、そのほかの会議やレセプションのときなどは別室で寝ていた。「ヒマワリ先生」の権大勲さんに薬や栄養点滴・お粥などのお世話になり、帰途のソウルでは高享玉さんが救急車の手配を、中国朝鮮族の金丹實さんが病院での付き添いをしてくださった。救急車で大病院に行ったものの検査しなければ治療はできないと言われて待たされていたとき、救急車の運転手がどうなったかと電話してきて、まだ治療は受けていないと言うと、迎えに来てほかの病院に連れて行ってくれた。驚いたことには点滴が終わった4時間後、またかれが来てホテルまで送ってくれたのだ。―このような暖かい親切を受けて、初めて韓国の人びとが親しく、等身大で見えてきた。この人たちと通訳なしで話したい!と、韓国語の勉強にも熱が入った。 5)歴史分科会 大会では第5回から歴史・教育人権・文化交流・環境などの分科会ができた。わたしは2001年慶州で「歴史を学んで自由を得ること」という発表をした。ともすれば身の回りにしか関心が無く、あたえられた環境がすべてだと思いこむ生徒たちに、歴史を学ぶことで視野を広げ、多角的・巨視的にものを見る目を養って欲しいという願いを込めて授業をしたいという内容だった。またそのとき、韓国の歴史教科書の「(壬辰倭乱のとき)われわれの民族は身分の貴賤・老若男女を問わず、文化的優越感に満ち、自発的戦闘意識を持っていた」という記述について、どういう史料に基づいているのかと質問した。それに対して「史料は無くてもいいのだ。歴史教育は民族としての一体感を持つことが目的だ」という韓国側の発言があって「史料に基づかない歴史教育?」と、当時問題になっていた日本の扶桑社教科書と同様の危うさを感じた。「文化的優越感」というのも、当時韓国では「古代の韓国はすぐれた文化を日本に伝えてやった」という記述が一般的で第5回東京大会でも話題になっていた。一方鄭光植さんは韓国の教科書は行き過ぎた民族中心主義であり、客観的な記述が望まれると述べた。これらの点がその後の歴史分科会でのテーマになっていく。 第8回江華島大会のハイライトは、田鍾翼さんの「高等学校『国史』教科書の民族主義的傾向に関する分析」という発表だった。「…国難克復の歴史が強調され、平和な交流は描かれない。民族中心史観では民衆や女性の生活にはまったく目が向けられていない。…国家・民族のための歴史教育から生徒個々人のための歴史教育に変えていくべきであり…歴史的思考力養成に向かうべきだ。」権大勲さんも「歴史の授業では歴史の経験を通じて、わたしたちがどのように存在すればいいのか、どうすれば平和な社会になるか、そういうことを研究し教えるこ 歴史分科会 2004年密陽大会 とが重要だ」と言い、藤田さんも「誤った民族主義を捨てることが平和につながる」と述べた。また翌年朴鍾善さんは壬辰倭乱の授業で「勝敗を語るよりも命の尊さに気付かせることが大切であり、歴史を学ぶことで生徒をイデオロギーから解放することが重要だ」と言った。 第9回福岡大会では、宋錫鍾さんとわたしが生徒のレポート交換の発表をした。「日本はなぜ植民地にならなかったか」「日本はなぜ朝鮮を植民地にしたのか」という二つのテーマでそれぞれの生徒たちが書いたレポートを交換して、感想を述べ合うというやり方だった。わたしの学校(千代田女学園)ではまだ近代を学んでいない時点の課題で、「わたしも正解は知らない」と言うと生徒は喜んで取り組み、国際的・国内的条件を考えて書いていたが、植民地支配の実態を知らないので相手国に対する配慮が足りなかった。それに対して韓国の白岩綜合高校からは「永遠の敵日本」「団結して日本より強くなる」と日本の過去の行動を非難する声が多く寄せられて千代田の生徒は戸惑っていた。また「文化的にはるかにすぐれたわが国」と書いたり、為政者の行動を無条件に肯定する姿勢には違和感を覚えた。しかし、日本の生徒が冷静に取り組める課題でも韓国の生徒は熱くなってしまうのが現状であり、日本の生徒が相手国の生徒の感情を知ったことは「多角的に見る」貴重な経験になり、相手国の人を身近に感じたことにも意義があった。宋錫鍾さんは「植民地ということばにアレルギーを起こし感情的になったが、この学習は、現世代と祖父母世代の痛みの共有・一体感を確認でき、自発的な民族アイデンティティの伸長に役立った」と述べた。前年の歴史分科会で、一方に「グローバルな視点から批判的・未来志向的に歴史を見よう」という考えがあり、他方に「韓国には韓国の特殊性を強調する教育が必要だ」という意見があったことは、常にわたしの念頭にあったが、宋錫鍾さんは「相互理解」を言いつつもやはり民族的アイデンティティの確立が一番の目標だったらしく、「いろいろな視点から科学的に見ること・既成概念から自由になること」を目標にしたわたしとは、食い違いがあった。 かつて民族を奪われた人びとが、それを取り戻し自分の民族を誇りたい気持ちをわからないわけではないが、盲目的に自民族の優秀性を信仰することは、ときには排他的になり、たとえばユーゴスラビア紛争のような「民族浄化」にまで及ぶ危険性がある。昔、幼いわたしは「ニッポンヨイクニ キヨイクニ セカイニヒトツノ カミノクニ」と教えられ、「勝ち抜く僕ら少国民 天皇陛下のおんために 死ねと教えた父母の 赤い心を受け継いで 心に決死の白だすき かけて勇んで突撃だ」と、わけのわからない何か神秘的なものを崇めてそれに命を捧げることを当然だと思い込んだのだ。敗戦後、その権威は崩れたが、「権威を崇める姿勢」はわたしの中に長く残って、そこから抜け出すのに長い歳月を要した。 第12回抱川大会でわたしは「『勝ち抜く僕等少国民』―『愛国』教育の私的体験とそれを相対化する方法」と題して自分の経験を語り、大江健三郎のエッセイ『シンガポールのゴムマリ』(『自分の木の下で』朝日新聞社所収)を引用して、自国を相対的に見る視角は、自分の状況を縦(歴史的に)・横(周囲との関係の中で)から見ることであり、それを通じて人はその状況から自由になれるだろうと述べた。 民族的アイデンティティについて付け加えれば、先年ウズベキスタンで会った女性が「わたしはロシアとウズベキスタンのダブル、夫はタタール、娘は、さあ、何じんかしらね」と面白そうに笑った姿がさわやかだった。
sono kekkao nihon'shi kyōikuken'kyūkai no taikaide hapyōsuruto chōsen'wa tōji hēan'jidainoyōna jōtaide okureteita kaimēga okureta kuniga tsuyoi kunino atsuryokuo ukerunowa kokusaitekina rikigakuno mon'daide aru to yū nihon'no shin'ryakuo kōtēsuruyōna iken'ya nihon'jin'kyōshi to shite sētoni nihon'ni taishite ken'okan'o motasetewa naranai ikinari chōsen'mon'daio toriagetemo sētowa shirakerudakeda to nichōkan'kēgakushūni mukan'shin'na hatsugen'ga tsuzuki zan'nen'nagara ichibuno dōshi o nozoitewa hoto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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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를 「일본사교육연구회」대회에서 발표하면, 「조선은 당시 헤이안 시대와 같은 상태로 뒤쳐져 있었다」 「개명이 늦은 나라가 강한 나라의 압력을 받는 것은 국제적인 역학의 문제이다」라고 하는 일본의 침략을 긍정하는 의견이나 「일본인 교사」로서 학생에게 일본에 대해서 혐오감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갑자기 조선 문제를 다루어도 학생들은 시라켈만 하고 「일본인 교사」라고 하는 일본의 침략을 긍정하는 의견이나 「일본인 교사」로서 학생에게 일본에 대해서 혐오감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만 하고, 거의 무관심한 발언이나마, 무관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나는 바로 "'일본인 교사'로서 일본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문제 제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 발표가 계기가 되어 북-일 관계사 기술이 추진됐고 1986년 나는 해협을 넘어 일촉과 조선-일본과 조선의 2000년을 생각하다-(평론사)를 펴냈다.고대부터 현대까지의 통사에서 고대~근세는 되도록이면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북-일 간 교류나 친선을 그려왔으며, 근대 이후에는 양국 민중의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노력하여 당시의 '재일(在日)'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글을 쓰면서 북-일 관계를 아는 것이 일본을 아는 것이라는 생각을 새롭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책을 쓰면서도 그것은 모두 탁상에서 배운 것이며, 살아 있는 재일 한국인도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조포물래모임에서 박경식 이진희 선생 등의 강연을 듣고 답사차 김달수 씨를 뵙기도 하고 조선이라는 이름이 붙는 모임에 닥치는 대로 가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없다.마치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세상에 등을 대고 따로 사는 것 같았다.그래서 '한일합동수업연구회'가 발족한다고 했을 때 그야말로 기뻐서 참가한 것이었다.발족의 집회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열기에 넘쳤다. 4) 한일합동수업연구회 1995년 제1회 대회는 서울에서 열렸다.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내가 다니기 시작했던 「타마시 한글 강좌」의 창설자, 고 무라마츠 토요노리씨의 권유로 나도 수업 보고를 하게 되었다.주제는 근현대 한일관계사로 조선의 개국에서 1945년까지의 북-일 관계를 발표 형식으로 배운 고등학교 수업 내용과 학생들의 감상을 정리한 것이었다.그동안 원폭 피해를 입은 불쌍한 일본 일본이 나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믿었던 학생들은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건드려 충격을 받고 당황하면서 알게 됐다고 생각하거나 선생님, 일본을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슬퍼져요라고 말하거나 다양한 반응을 한다.한편 나는 학생들이 아무리 역사의 진실을 알고 미안해해도 그것만으로는 한국에 대한 친근감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한국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대회 직전에 몸이 아파 참가하지 못했고, 당연히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제2회는 도쿄에서 열려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 볼 한일관계의 기술-근현대'라는 발표를 했다.23종의 교과서를 간단하게 조사한 뒤 점유율이 높은 4종을 자세히 조사했고 특히 일본과 조선의 민중에 대해 어느 정도 언급하고 있는지에 역점을 뒀다.당시 한국에서는 국정교과서 1종뿐이어서 그런지 언론보도 때문에 일본교과서가 편향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일본에는 여러 종의 교과서가 있고 그 중에는 상당히 자세하게 북-일관계를 다룬 것도 있고 민중사관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생각과 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어떤 역사교육이 바람직한지를 함께 생각하고 싶었다.그러나 발표에 걸린 시간은 짧고 토의 시간도 거의 없어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무슨 계기로 죽도가 화제가 되자 남측 참가자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독도는 우리 땅이다, 분명히 증거가 있다!고 외친 것에 나는 망연자실했다.죽도가 어디 영토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감정적으로 주장하는 태도에 위화감을 느껴 이래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며 실망했다.다만 한 선생님이 일본의 나쁜 점만 아는 학생에게 어떻게든 우호의 씨를 뿌리자며 일본 아이가 착한 마음으로 해바라기를 키우는 일기를 소개한 수업을 발표한 것은 기뻤다.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알아도 친근감이 생기지 않을 것을 고민했기 때문에 아주 좋은 수업이라고 생각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했고 한국인들이 어떤 생각으로 거기에 참가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 아쉽다. 제3회 대회는 서울에서 열렸으나 지난번 너무 낙담해 참가하지 않았다.단지 모두가 생긴지 얼마 안된 독립기념관에 간다고 해서, 그것은 봐두지 않으면 안 된다며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해 보러 간 것이었다.제4회 서울도 불참.제5회는 도쿄. 니시자와씨와 유호순씨가 공동수업 발표를 했고 애니메이션 영화 화수의 무덤에 대해 한국학생들이 일본이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어 불쾌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해서 누가 봐도 불쌍한 이야기라도 반대편에서 보면 다르다고 충격을 받았다.역사분과회에서는 고대에 일본이라든가 조선이라든가 하는 나라의 감각이 없었던 점, 한국의 역사교육은 지나치게 자국중심적인 점 등이 화제가 되었다.2001년 제5회 경주대회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모임이 되었다.출발 당일까지 보충수업을 하고 공항으로 달려온 탓에 피로, 야마시타 씨가 잡아주신 서울 안호텔에서의 잠 못 이루는 하룻밤, 못 먹는 마늘, 버스에서의 장거리 이동 등으로 인해 위궤양이 발병해 간신히 자신의 발표만 하고 실사도 열심히 했지만 그 외의 회의나 리셉션 때 등은 별실에서 자고 있었다.해바라기 선생님 권대훈 씨에게 약과 영양 링거, 죽 등이 있어 귀가길 서울에서는 고형옥 씨가 구급차 수배를 맡았고 조선족 김단실 씨가 병원 수발을 들었다.구급차로 큰 병원에 갔지만 검사해야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해 기다리고 있을 때 구급차 운전사가 어떻게 된 거냐고 전화해 아직 치료는 받지 않았다고 하자 마중을 나와 다른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놀랍게도 링거를 맞은 지 4시간 만에 다시 그가 찾아와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이런 따뜻한 친절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한국 사람들이 친근하고 등신대로 보였다.이들과 통역없이 이야기 하고 싶다!며 한국어 공부에도 열을 올렸다. 5) 역사분과회 대회에서는 제5회부터 역사·교육인권·문화교류·환경 등 분과회가 만들어졌다.나는 2001년 경주에서 역사를 배우고 자유를 얻는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자칫 신변에만 관심이 있고 주어진 환경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배움으로써 시야를 넓히고 다각적 거시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을 길러달라는 염원을 담아 수업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또 그때 우리 역사교과서의 (임진왜란 때) 우리 민족은 신분의 귀천·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문화적 우월감에 가득차 자발적 전투의식을 지녔다는 기술에 대해 어떤 사료를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이에 대해 사료는 없어도 되는 것이다.역사교육은 민족으로서 일체감을 갖는 것이 목적이라는 한국 측 발언이 나오자 사료에 근거하지 않는 역사교육?이라고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일본 후소샤 교과서와 같은 위험성을 느꼈다.문화적 우월감이라는 것도 당시 한국에서는 고대의 한국은 뛰어난 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기술이 일반적이어서 제5차 도쿄대회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었다.반면 정씨는 한국 교과서가 지나친 민족중심주의이며 객관적인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이후 역사분과회의 주제가 되어간다.제8회 강화도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전종익씨의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민족주의적 경향에 대한 분석이라는 발표였다.국난극복의 역사가 강조되고 평화로운 교류는 그려지지 않는다.민족중심사관에서는 민중이나 여성의 삶을 전혀 바라보지 않는다.…국가·민족을 위한 역사 교육에서 학생 개개인을 위한 역사 교육으로 바꿔 나가야 하며…역사적 사고력 양성으로 가야 한다.' 권대훈 씨도 "역사 수업에서는 역사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사회가 되는지, 그런 것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 2004년 밀양대회가 역사분과회 중요하다며 후지타 씨도 잘못된 민족주의를 버리는 것이 평화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다음해 박종선씨는 임진왜란 수업에서 "승패를 말하기보다 생명의 고귀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역사를 배움으로써 학생을 이데올로기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일본은 왜 식민지가 되지 않았나 일본은 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나라는 두 가지 주제로 각각 학생들이 쓴 리포트를 교환하며 소감을 나누는 식이었다.나의 학교(치요다여학원)에서는 아직 근대를 배우지 않은 시점의 과제로, 「나도 정답은 모른다」라고 하면 학생은 기꺼이 임해, 국제적·국내적 조건을 생각해 쓰고 있었지만, 식민지 지배의 실태를 모르므로 상대국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반면 한국의 시라이와종합고등학교에서는 영원의 적 일본 단결해 일본보다 강해진다며 일본의 과거 행동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많이 올라와 치요다 학생들은 당황했다.또 문화적으로 훨씬 뛰어난 우리나라라고 쓰거나 위정자의 행동을 무조건 긍정하는 자세는 위화감을 느꼈다.그러나 일본 학생이 냉정하게 임할 수 있는 과제물에서도 한국 학생은 흥분해 버리는 것이 현실이었으며, 일본 학생이 상대국 학생의 감정을 알게 된 것은 '다각적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 되었고, 상대국 학생을 친밀하게 느꼈다는 것에도 의의가 있었다.송석종씨는 식민지라는 말에 알레르기가 생겨 감정적으로 변했는데 이 학습은 현 세대와 조부모 세대의 아픔 공유일체감을 확인할 수 있어 자발적인 민족 정체성 신장에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작년의 역사 분과회에서, 한편에 「글로벌적인 시점에서 비판적·미래 지향적으로 역사를 보자」는 생각이 있고, 한편에 「한국에는 한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의견이 있던 것은, 항상 나의 염두에 있었지만, 송석종씨는 「상호 이해」를 말하면서도 역시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이 제일의 목표였던 것같아, 「여러 가지 시점에서 과학적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 일찍이 민족을 빼앗겼던 사람들이, 그것을 되찾아 자신의 민족을 자랑하고 싶은 기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맹목적으로 자민족의 우수성을 믿는 것은, 때로는 배타적이 되어, 예를 들면 유고슬라비아 분쟁과 같은 「인종 청소」에까지 미칠 위험성이 있다.옛날, 어린 나는 「일본 요이쿠니 키요이쿠니 세카이니히토노카미노쿠니」라고 가르쳐져 「이겨내는 우리들 소국민 천황 폐하의 은혜를 위해서 죽으라고 가르친 부모님의 붉은 마음을 계승해 마음에 결사의 백다기를 걸고 용감하고 돌격이다」라고, 알 수 없는 무엇인가 신비스러운 것을 숭상하고 있다.비록 패전 후 그 권위는 무너졌지만 권위를 숭상하는 자세는 내 안에 오래 남아 그곳을 벗어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제12회 포천대회에서 나는 이겨내는 우리 등소국민 애국 교육의 사적 체험과 그것을 상대화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경험을 말했고, 오에 겐자부로의 에세이 싱가포르의 곰마리(나의 나무 아래에서)아사히신문사 소장)을 인용해 자국을 상대적으로 보는 시각은 자신의 상황을 가로(역사적으로)부터 보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사람은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덧붙이자면 연전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여성이 나는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더블, 남편은 타타르, 딸은 글쎄 몇 명이지 하며 재미있다는 듯 웃는 모습이 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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