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1

[이영훈] 김구의 국적을 둘러싼 민주당 의원의 치기 어린 작태 < 정치 < 기사본문 - 펜앤드마이크

[이영훈 교수 특별기고] 김구의 국적을 둘러싼 민주당 의원의 치기 어린 작태 < 정치 < 기사본문 - 펜앤드마이크

[이영훈 교수 특별기고] 김구의 국적을 둘러싼 민주당 의원의 치기 어린 작태
김용삼 대기자입력 2025.02.20 


김용만 의원에게 묻는다. 중국 국적을 취한 안창호, 김규식, 이시영 등 쟁쟁한 독립지사들은 반민족이었나? 그런 지적을 하면 그분들의 영혼을 모독하는 짓인가? 김용만 의원에게, 그리고 분란을 일으킨 최민희 의원에게 역사 공부를 좀 더 철저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작년 8월 일제시대 조선인의 국적을 둘러싼 논란이 발생하였다. 독립기념관장 김형석 씨의 임명 과정에서, 뒤이어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의 국회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에서 두 사람은 일제시대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광복회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당시 조선인의 국적은 한국이었다고 소리쳤다.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영토로 편입되어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조선인은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본의 국민으로 편입되었다. 1910-1945년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어느 사람의 국적은 그가 외국으로 여행하거나 외국인과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나게 마련이다. 당시 조선인이 외국으로 여행할 때 발급받은 여권에는 그의 국적이 일본으로 명확히 표기되었다.
당시 조선인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주장은 1910년 양국 간에 체결된 조약은 불법이고 무효라는 일부 학자의 엉터리 학설에 근거하고 있는데, 조선왕조의 패망과 일제의 지배라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아Q 식 정신 승리법에 불과하다고나 할 것이다.
그 불모의 논란이 최근에 다시 일었다. 국회의 대정부 질의에서 민주당 최민희 의원은 김문수 장관에게 일제시대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의 국적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질문 자체가 엉터리이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시대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또한 최민희 의원은 그 시대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한 분들의 국적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식함을 부지불식간에 드러내고 말았다.
일정기 독립운동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신처럼 여기는 김구의 국적이 중국이었는지 여부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기회에 김구를 비롯하여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들의 국적 문제를 전수조사하여 밝혀야 할 때가 왔다.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성립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한 독립운동가들은 대개 중국 국적을 취하였다. 그에 관해서는 『상해한인사회사: 1910-1945』를 집필한 중국인 손과지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책 206쪽에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국제법에 의하면 국권피탈 직후 모든 한인은 일본의 국민이 되었다. 그러나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한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중국 정부의 보호를 받기 위해 중국에 귀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임정의 저명 인물은 거의 모두 중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
최민희 의원이 이 같은 역사를 알고 있었다면, 모든 국민이 지켜보는 국회의 단상에서 독립운동가들의 국적을 묻는 치기는 부리지 않았을 터이다.



임시정부 주요 각료, 의정원 의원 상당수 중국 국적 취득



프랑스 조계에 거주한 한인으로서 중국으로 귀화한 사람들에 관해서는 동 조계 경찰서가 작성한 명단이 있다. 보다 구체적으론 프랑스 외무부 문서 보관소에 있는 관련 자료를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부가 공동으로 조사하여 편찬한 독립운동사 자료집을 참고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안창호, 김규식, 이시영, 이동녕, 차리석, 조소앙, 양기탁, 신익희 등 임시정부의 주요 각료와 의정원 의원의 상당수가 중국 국적을 취하였다.



북경에 머물면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거나 임시정부를 부정한 신채호, 박용만, 김원봉, 여운형 같은 분들도 중국 국적을 취하였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중국 국적을 취하면서 어떤 분들은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안창호(安昌浩) 선생은 동음의 晏彰昊로 바꾸었지만, 아예 성까지 중국식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얼마 전 작고한 광복회장 김원웅(金元雄)이 그 좋은 예이다. 그의 가족은 1940년대 중국 중경에 있은 임시정부에 속하였는데, 당시 어린아이 김원웅의 이름은 王元雄이었다.
손과지의 지적대로 중국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거의 모두가 중국 국적을 취한 것은 일본이 강제로 부여한 일본 국적을 부정하는 가운데 중국 정부의 보호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중국 정부의 보호는 그리 튼튼하지 못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상해 공동조계의 일본 경찰이 다수의 한인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양대 거두라 할 안창호가 체포되었다.
안창호는 자신이 중국 국적의 보유자임을 주장했으나 프랑스영사관은 안창호의 신병을 일본 경찰에 인계하였다. 일본은 조선인의 국적 이탈과 변경의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를 프랑스 정부가 인정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프랑스영사관이 중국 국적 보유자라는 이유로 일본 경찰의 체포로부터 한인을 보호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가 중국 국적을 취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김구의 국적을 둘러싼 논란



이 같은 역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3·1운동의 결실로 상해에서 성립한 임시정부는 조선인의 국적이 한국임을 선포하고 보증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임시정부의 주요 각료조차 중국 국적을 취하였음이 그 좋은 증거이다. 다시 말해 국내에서 총독부에 지배들 받은 대부분의 조선인에게 다른 국적을 부여할 실정적(實定的)인 권력이나 정체(政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다수의 조선인은 자신에게 부여된 일본 국적을 인정하고 그에 적응하며 살았다.
예컨대 상해에는 독립운동과 무관한 조선인이 다수 살았다. 1930년대에 걸쳐 상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수는 부쩍 증가하였다. 그들의 거의 모두는 상해 일본영사관의 통제를 받는 일본 국민으로서 생활하였다. 중국에서조차 임시정부의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지난 8월 이후 국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불모의 논쟁은 이 같은 역사에 대해 전혀 교육받지 못한 세대가 국회 의석의 다수를 점한 가운데 아Q 식 정신 승리법으로 일으킨 치기의 작태라고 할 수 있다.
김문수 장관에게 김구의 국적 문제를 질문한 최민희 의원.
최민희 의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서 김문수 장관은 “김구 선생의 국적이 중국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하였다. 이 대목이 다시 한번 치기의 작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 이야기는 역사 연구자 사이에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필자도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고, 또 남에게 여러 번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다.
김구가 쓴 『백범일지』에는 그의 국적이 중국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그가 윤봉길 의거를 일으킨 뒤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망을 다녔던 1935년 경의 서술이다. 그에 의하면 남경의 일본 영사 스마(須磨)는 중국 경비 사령관 곡정륜(谷正倫)과 김구 체포에 대해 교섭하면서 “대역(大逆) 김구를 우리가 체포하려는 데 입적(入籍)이니 무엇이니 딴말을 해선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중국 측이 김구가 중국 국적에 들었다는 이유로 체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관련 자료에 의하면 이 말은 1935년 1월 21일 스마가 곡정륜을 만나서 한 경고 그대로이다. 다시 말해 중국 측이 스마의 말을 그대로 김구에게 전했으며, 김구가 그것을 기억했다가 그의 『백범일지』에 옮겨 적은 것이다.
이 말이 1935년 1월경 김구가 중국 국적을 취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프랑스영사관의 자료에 의하면 김구는 1934년까지 중국 국적을 취하지 않은 유망인(流亡人,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사람-편집자 주)의 신분이었다. 이후 그가 일본의 체포를 피해 도망을 다니는 과정에서 중국 국적을 취할 여유는 없었다고 보인다. 스마의 발언도 김구가 중국 국적을 취한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막연히 그러할 것이라는 짐작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또한 『백범일지』를 보면, 1937년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한 뒤,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지원이 부실하자 김구 주석이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일 작정으로 중국 중앙정부에 여행권을 신청했다는 기술이 있다. 그러자 중국 정부가 김구를 만류하면서 광복군의 창설 등 임시정부의 지원을 강화했다는 것이다.
여행권, 곧 여권의 신청은 김구가 그사이 중국 국적을 취득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렇지만 그 여행권이 여권 없는 여행 허가를 의미할 수도 있어서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필자는 김구가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볼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1932년 윤봉길 의거를 일으킨 뒤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보호와 지지를 받는 유명 인사가 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굳이 국적을 바꾸면서까지 중국 정부의 보호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들 김신의 회고록까지 참고하면 1934년 이후 김구와 그의 가족은 중국 정부의 비호를 받는 유망자 신분이었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백범일지』의 두 대목은 김구가 1934년 이후 중국 국적을 취득했을 가능성을 다분하게 시사하고 있으며, 그 점을 깡그리 부정하기는 어렵다. 독립운동사에 관한 전문가가 아닌 보통의 독자라면 누구나 『백범일지』를 읽고서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으며, 필자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구나 임시정부의 거의 모든 요인이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기에 김구만이 예외적이라고 생각하기는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김구의 국적은 중국이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왔던 것이다.



민주당 의원과 좌파 언론의 작태



김구가 무엇 때문에 유독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이야기할 수 없다. 지난 9월 정규재TV에서 행한 강의에서 정안기는 중국 국적법에서 귀화의 조건으로 규정한 조건들, 예컨대 적당한 재산이나 생활수단을 보유해야 한다든가 범죄 경력이 없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김구가 충족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필자는 그런대로 설득력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백범일지』에도 자세히 서술되고 있듯이 1920년대 상해에서 김구의 생활은 일정한 직업이 없이 유동적이었다.
요컨대 최민희 의원의 질문에 김문수 장관이 “김구의 국적이 중국이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답변한 것에는 전혀 문제로 삼을 만한 하자가 없다. 그는 단정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했을 뿐이며, 그것은 그대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답변의 배경에는 임시정부가 국내는 물론 상해의 조선인에게조차 국적을 부여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달리 말해 김문수 장관은 지난 8월 논란이 벌어진 이래 그가 일관되게 고수한 일제시대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는 주장을 그 발언을 통해 다시 한번 천명하였던 셈이다.
김문수 장관의 발언에 "김구 선생의 영혼을 모독했다"라고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인 김용만 의원. 그는 김구 선생의 증손자다.


김문수 장관의 답변 이후 민주당과 좌파 언론이 보인 작태는 그야말로 치기에 치기를 더한 것이었다. 김구 선생의 증손자로서 현 민주당 국회의원인 김용만 의원은 김문수 장관의 발언을 “김구 선생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 그의 영혼을 모독한”, “그 말을 듣고선 독립운동가들이 통곡을 할만 한” 망언이라고 규탄하였다. 중국 국적을 취했으면 반민족이었다는 것인데 듣기에 심히 민망하다.
김용만 의원에게 묻는다. 중국 국적을 취한 안창호, 김규식, 이시영 등 쟁쟁한 독립지사들은 반민족이었나? 그런 지적을 하면 그분들의 영혼을 모독하는 짓인가? 김용만 의원에게, 그리고 분란을 일으킨 최민희 의원에게 역사 공부를 좀 더 철저히 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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