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昇燁
6 hrs ·
권용득 선생의 포스팅을 보고, 수년 전에 있었던 수업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1)
한국과 관련된 근현대사 수업을 하다 보니, 가끔씩 '위안부문제'를 수업에서 다루기도 한다.
'이 미친넘이 대체 무슨 소리를 했을까?!' 하고 불안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소생은 대체로 수업은 '보수적'으로, 곧 '통설'을 중심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그렇게 혁신적 내지는 창조적인 자설(自說)을 수업시간에 이야기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마침 그 수업에는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매우 성실하고 진지한 학생이었다.
기말고사 때는, 온 지도 얼마 안되고 해서 일본어로 논술을 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 클라스의 다른 학생들의 동의를 얻어, "내용이 중요한 거니까, 답안은 한국어로 써도 된다"고 했음에도, 괜찮다고 하면서 일본어로 답안을 적어 낸 일도 있었다.
유학생이라서 후하게 점수를 준 것도 아니지만, 과제와 시험 성적으로 그 클라스에서 제일 좋은 점수를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요시미 선생의 책(이와나미신서)를 베이스로 해서, 오오누마 선생, 하타 선생의 비판적인 입장을 살짝 섞고, 1차자료 몇가지를 써서 90분 동안 수업을 했던 것 같다.
'위안소를 만든 목적'으로 요시미 선생이 말하는 '강간 방지, 성병 방지, 기밀 유지 등등등' 몇가지를, 아주 충실하게 '통설'에 따라 얘기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이 학생이 질문을 했다.
"위안소를 만든 목적이 강간 방지라고 했는데, 이해가 안 가요."
"응? 왜요?"
"위안소 자체가 강간인데, 강간을 방지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잠시 깊은 고민)............"
결국은, 굳이 위안소를 강간이라고 한다면, 통제되지 않은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서 통제된 강간의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해얄까요... 근데 이것까지 싸잡아 강간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쩌구 하는 식으로 얼버무렸던 것 같다.
소생 스스로는, 일본의 대학 수업에서 이렇게 한국사회에서 프로파간다화된 위안부 언설과 조우하는구나, 하는 묘한 감정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
그러고 보니 관련 연구자들 중에서도 '강간'에 무척 집착하는 분이 있는 듯하다.
재작년인가 우연히 『「慰安婦」問題の現在 : 「朴裕河現象」と知識人』(2016)이라는, 말하자면 일본에서 나온 '제국의 위안부' 비판서 중 한권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재승 선생이라는 법학자 한분이 '위안소는 당시 일본 형법상 '준강간죄'에 해당한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찾아보니, 원래 한국어로 쓰여진 서평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수록한 것이었다.
(마침 인터넷에도 올라와 있었다)
http://aporia.co.kr/bbs/board.php…
http://www.prism.go.kr/homepage/entire/retrieveEntireDetail.do?pageIndex=1&research_id=1262000-201800011&leftMenuLevel=160&cond_research_name=%EC%B5%9C%EA%B7%BC+UN+%EC%97%AC%EC%84%B1%EC%9D%B8%EA%B6%8C+%EB%85%BC%EC%9D%98+%EB%8F%99%ED%96%A5%EA%B3%BC+%EA%B5%AD%EC%A0%9C%EA%B7%9C%EB%B2%94+%EC%A0%95%EB%A6%BD+%EB%AC%B8%EC%A0%9C&cond_research_start_date&pageUnit=10&cond_order=3&fbclid=IwAR0w0DQ2QpN4T_yQHPDnDuI2H-AoY6mD9jv1L7ljzzEB3LD5hhfWj9xHnqg
형법 따위 전혀 알지 못하는 소생인지라, 법의 해석을 둘러싸고 그럴싸한 반론을 제기할 능력은 없지만, 그저 신문 사회면(사건, 사고)의 수준에서 '준강간죄(현재는 준강제외설죄)'를 접하는 감각에서는 '응?' 하는 느낌이 들어 여지껏 납득하질 못하고 있다.
'준강간'이란 요컨대, 술이나 마약에 취해서, 또는 병 등으로 의식불명이 된 상태, 내지는 '심신상실' 등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인 상대를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는데(십수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도대학 미식축구부 사건이라든가), 이재승 선생이 말하듯 '폭력과 협박에 의한 항거불능' 상태라는 게 과연 여기에 해당하는 지에 대해서는 뭔가 석연찮은 느낌이 든다.
전전(戰前)의 일본 내지 및 식민지의 판례 같은 걸 뒤져 봐야 명확해 지겠지만, 아무래도 이 양반 자신도 전전 판례 같은 걸 보고 확인해서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자기가 생각해도 '강간'은 좀 너무 나간 것 같고 하니, '준강간' 정도로 해 두면 어떨까 하고 생각한 건 아닐까 하는 느낌(적인 느낌). 그렇게 따지면 전전에 일어난 수많은 인신매매와 강제매춘에 전부 '준강간'을 적용했어야 할 텐데, 과연 그랬을까?
(형법에 밝으신 분, 부디 교시를 내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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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13 hrs
어떤 활동가가 내 포스팅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전시 강간 제도‘, ’일본군의 강간 범죄‘라고 정의했다. 그 활동가 외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줄 안다.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도 지금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그게 정의연의 가장 큰 성과 아닐까.
그런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한 건,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 난징 지역을 점령한 이후다. 일본군에 의한 점령지에서의 집단강간이 문제가 됐고, 그와 같은 범죄 행위를 예방하려고(어차피 지들 식민지 삼아야 하니까) 일본군은 자신들의 전쟁에 기존에 있던 공창 제도를 동원했다. 그렇다고 그게 범죄 행위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불법적 합법, 즉 법적 테두리 안에서 벌어진 대규모 인신매매 사건이자 성노동 착취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성노동은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요된 형태였고, 성노동에 대한 대가도 업자와 포주에게 착취당했다. 정신적 착취는 두말할 것 없다. 다만 그건 집단강간처럼 즉각적인 분노를 일으키는 야만적인 폭력(원시적인 폭력)이라기보다 문명화된 폭력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들의 전쟁에 여성을 성적 도구로 동원한 주체는 이게 폭력이 아닌 것처럼 여성을 길들였다는 얘기고, 그래서 더 악랄하다.
무엇보다 전시 성폭력에 관한 논의는 90년대 이후 구유고슬라비아와 아프리카 각지에서 점령군에 의한 집단강간 사건이 국제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으면서부터다. 구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와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는 전시 성폭력을 주요 전쟁 범죄로 다뤘다. 이후 국제형사법에서도 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UN은 무력분쟁 시 자행된 성범죄 및 성차별 범죄의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국제적인 운동을 주도했다. 98년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채택한 로마규정은 강간, 성노예, 강제 매춘, 강제 임신, 강제 불임, 이에 상당하는 기타 중대한 성폭력, 출산을 막기 위한 집단살해, 성차별적 박해 등을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다. 그전까지 전시 성폭력은 전쟁의 부수적 피해 정도로 여겼는데, 반인륜적 범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얘기다.(관련 얘기는 ‘온-나라 정책연구’에 올라온 사법정책연구원 이혜영 님의 보고서를 참고했다: http://www.prism.go.kr/home…/entire/retrieveEntireDetail.do…)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7803.html?_fr=mt2&fbclid=IwAR1yZhFk_b22_dSL290_M5-WB8oshH0iSobu3g0Po5C_V3qasbrnwbTBabQ
때마침 90년대 이후 가시화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이 국제적 흐름(전시 성폭력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식 변화)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로마규정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제도 역시 전시 성폭력 사건이 맞다. 다만 더 깊이 파고들면 앞서 말했듯이 그건 야만적인 폭력보다 문명화된 폭력에 가깝다. 따라서 나는 앞서 말한 활동가의 정의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서조차 강간의 형태가 아닌 전시 성폭력도 규탄해 마땅한 범죄로 인식하고 있다. 굳이 ‘강간’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김영희 교수가 최근 한겨레 기고문(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7803.html?_fr=mt2&fbclid=IwAR1yZhFk_b22_dSL290_M5-WB8oshH0iSobu3g0Po5C_V3qasbrnwbTBabQ)에서 지적한 대로, 문신처럼 남은 당사자의 상처를 꺼내 보이지 않고도 이것도 야만적인 폭력과 다르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대부분의 언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조선인 여성이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는 표현을 강박적으로 쓴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업자의 꾐에 속아서 위안부로 동원된 사례에도 ‘끌려갔다’는 표현을 강박적으로 쓴다. 그건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부정한다고 알려지면서 더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일본 정부는 93년 고노 담화에서 그 강제성을 일찌감치 인정했다.(‘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단지 더 구체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이를테면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을 사냥하듯 군용 트럭에 태워 납치했다’는 식의 표현.
한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본군이 정말 그렇게 위안부를 동원한 줄 알았다.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동원부장으로 일했던 요시다 세이지가 82년 아사히신문을 통해 그와 같은 증언을 했고, 당시 그 증언은 큰 화제가 됐었다.(일명 ‘요시다 증언’) 그런데 그 요시다 증언은 근거가 없는 허위 사실로 밝혀져 아사히신문이 2014년에 요시다 증언과 관련된 모든 기사를 철회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위안부 문제 연구자들은 그전부터 요시다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해서 웬만하면 인용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를 철회한 아사히신문은 오보를 장기간 방치해 알 권리를 침해당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렸다. 그러나 도쿄고등재판소는 아사히신문이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며 원고 측의 항소를 기각(무시)했다. 일본 우익 세력은 좀 더 분발해야...(이건 농담이다. 일본이 하도 비민주적이라길래 과연 그런가 싶어서.)
그것과 별개로 일본 우익 세력은 이때를 놓칠 세라 그와 같은 오보가 일본을 중상모략한다며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UN 같은 국제 사회는 그래도 그건 너님들 책임이라며 선을 그었다. 일본 우익 세력은 좀 더 분발해야...(이것도 농담이다. 일본이 그동안 국제 사회에 천문학적 로비를 쏟아부은 결과가 고작 이건가 싶어서.)
아베는 결국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도 강제성을 인정했다.(‘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함’)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지난 30년 동안의 위안부 운동은 실패한 적이 없다. 2015년 위안부 합의로 인한 보상금 10억엔과 화해·치유재단의 운영비의 출처가 일본 국민 성금이 아니라 일본 국고라는 걸 감안한다면, 그것도 그다지 굴욕적인 합의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합의 과정에서 당사자가 배제된 게 문제지만, 그건 그때가 처음도 아니었다. 고노 담화 이후 95년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됐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합의보다 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우리사회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탓하며 그 다음으로 가지 않았다.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한 운동이 되다 보니 그동안 운동의 목적으로부터 소외당한 당사자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전환점은 아닐까. 야만적인 폭력을 고발하던 즉각적인 분노로부터 벗어나 문명화된 폭력을 있는 그대로 살필 수 있는 단계로, 앞서 말했듯이 그것 또한 같은 폭력이라고 고발할 수 있는 단계로 갈 수 있는 전환점 아닐까. 당사자의 피해를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도 그게 가능했으면 좋겠다. 단 한 명의 당사자도 소외되는 일 없이 그게 가능했으면 좋겠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얘기할 때마다 ‘강간’과 ‘끌려갔다’는 낱말에 힘주고 싶은 욕망과는 이제 그만 결별했으면 좋겠다.
22You, 권용득 and 2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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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borah J. Kim
Deborah J. Kim 음...아마도 제가 형법시간에 배울 때 강간, 강도에 해당하는 폭행, 협박의 정도가 가장 정도가 셌어요. 사실 강간죄에서 가장 중요한 폭행, 협박의 구성요건을 그렇게 설정해둔 것도 문제지만...아무튼 개인간 폭행 협박의 내용을 위안소 설치 문제를 우리 나라에 대한, 우리 조선 여성에 대한 폭행 협박으로 생각하신 듯 싶습니다. 일본이 우리 조선에게 행한 일이 바로 강간만큼이나 그에 준하는 폭행 협박이었다고 해석하는 듯 싶습니다. 사실..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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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燁 '레토릭'이 사실관계 이해의 장애가 되는 일이 종종 있지요.1Hide or report thisLike· Reply · 7hDeborah J. KimDeborah J. Kim 李昇燁 네 그말도 맞습니다. 역사학자이신 교수님의 눈으로 보면 그런면도 있을거라 생각해요.그런데 일본과의 관계속에서 우리 조선의 근대 역사는 우리 조선의 기득권층도 아닌, 가장 피해를 그대로 받았던 "민중"의 시각에서 전 역사를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 민중은 당시 조선의 기득권층과 일본으로부터 이중으로 피해를 받았거든요...전 그 부분이 항상 화가나고 마음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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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h
Shin Chang
Shin Chang 이승엽 선생께서는 항상 미묘한 지점을 잘 포착해서 연구자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줍니다. 읽고 나면 "왜 나는 이 생각을 못했을까" 합니다. 그러면서 "이걸 내가 할 수 있을까"도 고민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문제를 던지고만 있을까. 이샘은 하나씩 풀어 주세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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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in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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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h
Jinyong Park
Jinyong Park 1907년 일본형법을 똑같이 계수한 것이 한국 1953년 제정된 형법입니다. 한일 양국에 당시부터 동일한 조항이 있고요. 당시 일본국도 준강간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1940년대 위안부에 대한 행위에 대하여 일본국 형법 제178조 1항의 준강간 규정 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을 이용한 간음행위를 강간에 준하여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에 반해서 범죄라는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준강간은 강간의 다른 행위 태양인데요. 80여년 만일 자발적 위안부가 존재했다면 행위시점에 강간의 객체인지에 대한 평가가 선제되어야 합니다. 20세기 전반에 식민지배가 국제법적으로 현재 합법적인가에 대한 평가 만큼 판단하기 어렵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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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in Han
Hyein Han 그 학생 똑똑한데요. 한국에서는 질문자가 없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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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정보
| 과제명 | 2017년 국제법센터 정책연구용역4(최근 UN 여성인권 논의 동향과 국제규범 정립 문제) | ||
|---|---|---|---|
| 기관명 | 외교부 | 담당부서 |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연구행정과 |
| 전화번호 | 02-3497-7717 | 연구기간 | 2017-09-15 ~ 2017-12-15 |
| 연구분야 | 외교정책 연구 및 교육 | ||
| 개요 | 최근 UN 여성인권 논의 동향과 국제규범 정립 문제 -무력분쟁 시 자행된 성범죄 및 성차별범죄에 대한 국제형사규범형성과 발전 중심으로- | ||
계약정보
| 수행기관 | 사법정책연구원 [기타] | ||
|---|---|---|---|
| 수행연구원 | 이혜영 | 계약일자 | 2017-09-15 |
| 계약방식 | 수의 계약 | 계약금액 | 4,900,000원 |
연구결과 정보
| 제목 | 최근 UN 여성인권 논의 동향과 국제규범 정립 문제 | ||
|---|---|---|---|
| 부제목 | 무력분쟁 시 자행된 성범죄 및 성차별범죄에 대한 국제형사규범 형성과 발전 중심으로 | ||
| 연구보고서 |
정책연구용역_이혜영.hwp ( 118.0 KB )
└ 정책연구용역_이혜영.pdf ( 367.4 KB )
| ||
| 목차 | 1. 서론 2. 역사적 배경: 무력분쟁 시 자행된 성범죄 및 성차별범죄의 처벌에 관한 UN 안팎의 규범적 발전 3. 규범의 현 주소: 국제형사재판소(ICC) 실행 4. 평가 및 결론 | ||
| 주제어 | 2017년 국제법센터 정책연구용역4(최근 UN 여성인권 논의 동향과 국제규범 정립 문제) | ||
| 발행년도 | 2017년 | ||
연구결과 평가 및 활용보고서
| 평가결과서 |
[국제법센터] 2017 정책연구 평가결과서1_171130.hwp ( 16.0 KB )
└ [국제법센터] 2017 정책연구 평가결과서1_171130.pdf ( 63.0 KB )
|
|---|---|
| 활용결과 보고서 |
〔서식6〕 정책연구용역 활용결과보고서.hwp ( 17.5 KB )
└ 〔서식6〕 정책연구용역 활용결과보고서.pdf ( 102.4 K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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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위안부 운동’ 마치 끝난 듯 평가 말자
등록 :2020-06-04 05:00수정 :2020-06-0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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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을 말하다’ 전문가 릴레이 기고⑤
김영희 연세대 국문과 교수·연세대 젠더연구소장
나는 수요집회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
나는 ‘여고’ 3학년 여름방학 때 텔레비전을 통해 김학순 씨의 증언을 들었는데, 내 옆에 있던 ‘남자’ 어른은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 민주화와 진보를 고민하는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뉴스 보도를 보자마자 ‘민족의 수치를 저렇게 드러내야 하나’라고 힐난하듯 말했다. 김학순씨의 증언 이후 가을 무렵 ‘위안부’를 재현한 드라마가 크게 유행을 했는데 학교에서 생물 선생님이 철조망을 사이에 둔 남녀 주인공의 입맞춤 장면을 세밀하게 설명하면서 ‘위안부’ 역을 맡은 ‘여자’ 배우 가슴이 매우 크다는 이야기를 거듭 강조했다. ‘위안부’에 대해 내게 말을 건넨 두 번째 ‘남자’ 어른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니 학교에서 몇몇 여자 선배들이 기지촌 활동이나 수요집회에 나가자고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기지촌 활동에도, 수요집회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고민하고 선택하기 전에 가두시위 현장으로, 철거민 싸움터로 내 손을 잡아끄는 선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늘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모순이 중첩되어 있으니 우선 급하고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구술 서사를 전공하고 대학교수가 된 후 학생들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의 기억을 가진 여성들이 구술한 이야기를 읽고 관련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기억은 1991년까지 봉인되어 있었다. 기억의 봉인과 함께 그들의 삶과 고통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 김학순씨가 입을 열기 전까지 그들의 존재는 유령과도 같았다. 그저 풍문으로 떠도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증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폭력의 기억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었고 그 자체로 다시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이었을 테지만 당시 이 말조차도 들으려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곁을 지킨 이들과 연대하며 국내외의 법정과 증언장을 찾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말하라고 주문했고, ‘그렇게 해야 다른 사람들이 들어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람들은 폭력의 기억을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세상의 관심은 한일 간의 이슈가 부각되고 가라앉는 데 따라 오르내리기 일쑤였다. 어떤 이들은 검사나 판사처럼 ‘내가 판단해줄 테니 팩트를 말해보라’는 태도로 증언을 요청했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말과는 상관없이 ‘민족’이라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정동에 저 홀로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제1420차 정기 수요집회가 새해 첫날인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 소녀상 앞에서 열린 가운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회원들과 시민 200여명이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제1420차 정기 수요집회가 새해 첫날인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건너편 소녀상 앞에서 열린 가운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회원들과 시민 200여명이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영화 속에서 증언에 나선 여성들은 모두 옷을 벗어 자신의 상처를 보여준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던 이들이 모두 그 상처를 보고 깊은 탄식을 내며 그제서야 그 말을 믿기 시작한다. ‘일본군 위안부’를 재현한 모든 이야기와 이미지는 ‘소녀’, 혹은 ‘할머니’로 국한된다. 그리고 여기 중요한 수식어가 들어간다. 바로 ‘순결한 소녀’, 그리고 ‘순수한 할머니’다. 나는 한국 사회가 이들의 30대와 40대와 50대를 그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순결’과 ‘순수’를 벗어난 생애를 재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시간 동안 이들을 침묵하게 했던 ‘폭력’을 한국 사회 스스로가 고발할 수 있을까.
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피해자가 견뎌온 시간과 그들과 연대해온 활동가들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쓴 글을 읽었지만, 역시 ‘나는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시간일 것이다. 나는 감히 짐작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당사자라고 생각한다. ‘일본군 위안부’로 호명되었던 이들이 경험한 폭력의 가해와 피해에 모두 연결되어 있고, 또 그들과 연대할 사회적 책임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배봉기씨가 본인의 의지가 아닌,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밝혀야 했을 때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당신이 고통스런 기억을 끄집어내 증언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기억한다. 우리가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기억을 통해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가시화한다고 할 때 기억에 대한 책임과 윤리적 의무는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폭력의 피해 당사자에게만 증언의 의무를 강요하며 그 증언을 통해서만 존재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로부터 적은 피해를 본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피해 정도에 따라 당사자성의 위계를 정할 수는 없다. 또 폭력의 피해를 본 사람만이 당사자성을 갖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식민 지배의 폭력과 그 폭력의 흔적, 그리고 성적 폭력의 현실에 대해 어떤 당사자성을 갖고, 가져야만 한다. 당사자성의 확장을 통해 우리가 기억하겠노라 말할 때 폭력 이후의 침묵을 만들어냈던 폭력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당사자성을 갖고 있으며, 이 가늠할 수 없이 많은 당사자성의 차이 앞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폭력의 피해를 직접 입었던 사람들의 입장과 그들의 곁을 지켜온 활동가들의 입장을 모두 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이를 섣불리 재단할 수 없다. 이 고유한 차이들에 대해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때로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말조차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용수씨의 기자회견 이후 나는 이용수씨와 윤미향씨의 시간을, 그리고 정대협과 정의연의 역사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 그 말들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호명되었던 이들과 연대하는 자의 당사자성을 성찰하는, 반세기의 침묵을 만들었던 한국 사회의 폭력을 반성하는 목소리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장의 역사는 50년 동안 침묵의 폭력으로 뒤덮인 시간이었고 이후 30년 동안 타자화의 폭력에 뒤덮인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을 존중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대리 발화’에 나섰다. ‘할머니’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고, 평가하고, 그 속에 담긴 진의가 무엇인지 가르치려 들었다. 오직 자신만이, 혹은 자신들만이 ‘할머니’의 말에 담긴 속뜻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이들은 어항 속의 물고기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사태를 관조하는 위치에 있었다. 어항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들에게 ‘나의 일’이 아니며 어항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책임 역시 그들에게 있지 않다. 잘못은 ‘저들’의 몫이며 ‘나’는 윤리적인 인간이기에 그들은 윤리를 가장하는 온갖 수사를 동원해 ‘당사자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당사자가 아닌 위치에서 당사자의 말을 존중하며 당사자의 말을 대리 발화하는 것이 ‘윤리’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에 앞서 해석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말이 드러나기에 앞서 이 말은 어떤 식으로 해석될지 그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이용수씨와 윤미향씨의 말이 있기에 앞서, ‘정의연’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연대해온 이들의 말이 드러나기에 앞서 이 말들은 이미 구축된 진영의 스펙트럼 안에서 각자의 위치를 갖게 될 어떤 계획 아래 포섭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정확하게 타자화의 폭력을 구현한다. 누군가를 규정하고 어떤 편견에 가둬 옴짝달싹 없이 묶어둔 채 공격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실행하는 일은 대상을 축소하고 고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축소되고 고정된 속성은 대상 고유의 것으로 본질화하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은 타자화의 폭력에 의해 앞서 규정된 내용으로 환원된다. 이럴 때 사태는 단순화되며 맥락의 두께는 얄팍하게 평면화된다.
이용수씨와 윤미향씨는 서로 다른 진영에 의해 공격의 타깃이 되었다. 서로 다른 입장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결국 타자화의 폭력 앞에 모두 공격의 대상일 뿐이며 그 공격을 정당화하는 빌미는 이들의 ‘타락’이다. 언제, 누군가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이용수씨는 순수한 피해자로 가정되었고 윤미향씨는 순수하고 윤리적인 활동가로 가정되었다. 이들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대상’이기에 이 ‘순수’의 경계를 벗어나는 순간 ‘타락’과 ‘불순’의 모든 오명을 쓰고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 ‘순수’를 벗어난 ‘타락’은 공격의 이유인 동시에 공격을 정당화하는 근거다.
이용수씨와 윤미향씨에게서 드러난 ‘순수’를 벗어난 ‘타락’의 징후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정치권력을 향한 욕망을 드러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지난 30년 동안 정치 활동을 계속해왔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장을 옮기는 일일 뿐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모든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겹겹의 정치를 수행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피해자가 ‘운동’에 나서고 이 ‘운동’을 통해 정치적 장에 진입하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드문 일이 아니다.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던 활동가가 제도권 정치로 진입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의 국회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장, 지방의회의 의원들 가운데 이런 ‘운동’의 경력을 발판 삼아 정치에 나선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떤 연구자가 내게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하는 일은 ‘긍정적 일반화’의 대상이 되기 쉬운 데 반해 ‘여성’이 하는 일은 ‘부정적 일반화’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성’들이 하는 아주 작은 일도 크게 가치를 평가받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일반화되는 데 비해, ‘여성’들이 하는 일은 극단적인 부정적 평가를 받고 반대 방향으로 일반화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용수씨와 윤미향씨는 이미 특정 세력을 대리 표상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이 ‘나눔의 집’과 ‘정의기억연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무관심하고 무식해서가 아니라 구분하고 싶지도 않고 구분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윤미향’과 ‘정의연’과 ‘나눔의 집’은 구분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다. 이렇게 해서 수요집회에 나왔던 무수한 사람들과 ‘윤미향’이 아닌 활동가들과 ‘정의연’으로 이어진 30년의 역사, 그리고 이 모든 이들의 시간이 손쉽게 지워진다. 윤미향씨는 하나의 전형이 되어 ‘타락한 활동가’와 ‘비윤리적인 86세대 정치 세력’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실천적 연대를 보여주었던 여성’들을 대리 표상하게 되었다.
이 논의의 와중에 어떤 이들은 윤미향씨가 국회의원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검증하자 나서고, 어떤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평가해 보자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수는 침묵하고 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떤 말도 이 진영의 구도 안에서 쉽게 쓰였다 버려지는 패가 될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노인의 탐욕, 대구, 횡령, 다섯 채의 집, 가족, 배후, 한일관계, 교류와 화해, 배신과 도구화 등의 말이 지난 30년의 역사를, 그 시간의 아주 작은 끄트머리라도 잡아챌 수 있을까. 그 시간은 윤미향씨의 것도, 이용수씨의 것도, ‘정대협’이나 ‘정의연’의 것도 아니다. 이용수씨도 윤미향씨도 이 운동의 흐름 안에 있는 한 사람일 뿐이며 이들은 다른 모든 운동가가 그러하듯이 오류와 한계를 가질 수 있다. ‘정의연’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정의연’을 비난하며 그 단체명 앞에 붙이는 모든 수사적 말들을 고스란히 한국 사회 모든 사회운동단체의 앞에 붙여 놓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오류나 문제는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으니 대충 묻고 넘어가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의연’에 대한 비판적 논의도, 지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운동의 역사에 대한 평가도 모두 필요하고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정치인 윤미향씨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87년 6월 항쟁 이후 시민사회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는 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한 활동가의 위상과 역할, 당사자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산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이 엄청난 ‘말판’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정작 이런 문제들에 관심이 있어서 한 마디씩의 말을 보태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김영희 연세대 국문과 교수·연세대 젠더연구소장.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영희 연세대 국문과 교수·연세대 젠더연구소장.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도 내가 보탠 이 한마디 말의 효과가 두렵다. 인터넷 댓글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두렵고, 내가 한 말이 이 담론장 안에서 어떤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낼지 가늠할 수 없어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 속에서도 한마디 말을 꺼낸 것은 침묵의 이유를 말하고 싶어서다. 지난 반세기 ‘할머니’들의 침묵을 만들었던 폭력은 여전히 성찰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앞다투어 말을 내놓는 사람들 뒤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침묵하고 있다. 나는 이 침묵을 대리할 수 없지만 나의 마음을 미루어 조심스럽게 짐작한다면 분명 사람들의 말문을 닫게 하는 고통과 분노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엄청난 고통의 흔적을 남긴 애초의 폭력은 지워지고 그 고통의 흔적 때문에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 그리고 애초의 폭력을 방관하거나 공모했던 이들이 이 싸움을 멋대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무엇보다 지금 논쟁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마치 ‘끝난 싸움에 대해 평가하듯이’ 말하거나 ‘싸움이 끝난 후 결실을 두고 다투는 이들을 힐난하듯이’ 말하지만, 침묵하는 이들에게 이 싸움은 전혀 끝나지 않은 일이다. 침묵을 뚫고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것은 30년 전에도, 지금도 오롯이 ‘현재’다. .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7803.html?_fr=mt2&fbclid=IwAR1yZhFk_b22_dSL290_M5-WB8oshH0iSobu3g0Po5C_V3qasbrnwbTBabQ#csidxb3121a9ab4524f2b2969f97ffc37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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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승 서평] 제국의 위안부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97
도서정보
저자명 박유하
저서명 제국의 위안부
출판사 뿌리와 이파리
연도(ISBN) 2013(9788964620304)
[이재승 서평] 감정의 혼란과 착종: 위안부에 대한 잘못된 키질
이재승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 문제에 관해 한국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단견을 극복하기 위해 위안부의 또 다른 진실을 드러내겠다고 포문을 열었다. 박교수의 말처럼 어떤 문제를 놓고 양측이 수십 년간 대치하고 있다면 한번쯤 문제 제기방식을 점검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식의 방법적 전환을 통해 적절한 해법을 제공하게 된다면 구태의연한 태도를 취해온 쪽이 잘못이라고 하겠다. 박교수는 이러한 견지에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주로 한국측의 입장을 비판하며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필자는 문제를 올바로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 세상사에 비일비재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특히 정의와 책임이 문제되는 법적 윤리적 사안에서 이러한 교착상태는 수시로 발생한다. 그 이유도 주로 사태에 대한 오해가 아니라 원칙적인 태도와 관련된다. 필자는 위안부 문제는 바로 이러한 유형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박교수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국가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계급구조, 가부장제, 식민주의에 대해 활용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하여 파상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그 많은 다채로운 비판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종합판단을 제공했는지가 중요하다. 박교수의 제안은 복잡하고 미묘하고 위험하다. 필자는 책임이라는 것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교수의 사유실험이 코페르니쿠스적인 가로지르기라고 평가할 수 있는지는 좀더 지켜 봐야 하겠다. <제국의 위안부>는 신문과 인터넷 블로그 서평란에서 충분히 소개되었다. 일전에 프레시안에 이상엽은 박교수의 글이 조만간 논쟁을 유발시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하였다.(1) 박교수의 저작에서 폭포수같은 감성적 통찰들에 경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지만 올바른 키질을 통해 그 통찰들을 잘 꿰었는지는 의문스럽다. 감정의 혼란과 착종이 이 책에 너무 깊이 배여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박교수의 결론적 전제인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법적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반박해보겠다. 만일 박교수의 결론적 전제가 옳다면 해결해야 할 위안부 문제는 소멸하게 되므로 위안부문제를 둘러싸고 박교수가 화해를 위해서 추가적으로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동시에 필자는 일본의 법적 책임이 존재한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어정쩡한 평화기금을 거부하는 것이 더욱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1. 업자의 재발견
박교수는 위안부 동원이 일본이나 일본군의 ‘국가범죄’가 아니며, 설혹 범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로 ‘업자의 범죄’라고 한다. 동시에 박교수는 업자의 책임도 크지만 일본정부의 책임도 언급한다. 그런데 일왕이나 일본정부가 성노예제에 대하여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와 관련해서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수준의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191쪽). 책임에 관한 이런 식의 복화술은 책임을 피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박교수는, 위안부제도는 매춘이고, 조선인 위안부는 ‘제국의 위안부’이고, 일본 군인과 조선인 위안부 사이에 ‘동지적 관계’가 있으며, 위안부는 전쟁의 ‘협력자’이기도 하다고 주장하였다. 박교수는 몇 몇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에서 일본군인과 위안부의 애틋한 사랑과 아름다운 일상을 유난히 강조한다. 그리고 악마적 일본군인상은 잘못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의 상식적 기억에 전쟁을 선포한다. “위안부들의 순수한 기쁨의 기억을 외부자들이 소거할 권리는 없다.” 박교수는 이 아름다운 이면을 꼭 알아야 한다고 반복한다. 그리고 사회와 정대협이 만들어놓은 ‘투사적인’ 위안부상—종로의 소녀상—이 보통의 위안부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한때조차도 말하고 기억하는 것을 억압한다고 흥분한다. 바로 정대협이 퍼뜨린 위안부 이야기 너머에 심오한 진리를 발견한 듯이 말한다.
위안부제도가 군인의 성적 욕구를 해소시키기 위해 일본제국이 기획하고 일련의 행정적 입법적 조치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하여 조선인 여성을 강제로 동원한 국가범죄라는 구조적 시각을 거부한다면 위안부제도는 어떻게 이해될까? 우선 위안부와 관련한 주요한 사실들이 산산히 분해될 것이다. 사태를 파편화한다면 이른바 인도에 반한 범죄로서 성노예라는 관념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일본군사령부의 위안부모집 지시는 순전히 부탁이고, 업자의 사기적 모집은 금지되지 않는 행위이고, 위안부를 국외로 이송한 군인은 교통편을 제공한 친절한 아저씨이고, 위안소를 설치한 부대장은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뒷배가 되어준 훈남이고, 위안소를 찾은 군인은 군대로 끌려나온 가련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누구의 무엇을 처벌할 수 있을까? 국가범죄를 부인하는 쪽은 언제나 이와 같이 관료적이고 조직적인 범죄에 대해 파편화 전략을 추구하며 사태를 축소하고 왜곡한다. 유대인의 절멸과정에 관여한 독일인들의 행위도 철저하게 분리해서 논죄했다면 과연 누가 처벌받을 수 있었을까!
박교수도 구조적 책임을 말한다. 그러나 법적 책임을 강화하거나 보강하기 위해서 구조적 책임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책임을 구조적으로 무화시키고 전체적으로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로서 구조적 책임 개념을 사용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박교수는 총체적으로 책임을 규정해야 할 때에는 사태를 쪼개서 책임을 희석시키고, 낱낱이 책임을 추궁해야 할 때에 가해자를 피해자화고, 조선인 군인을, 착한 일본군인을 연이어 등장시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무너뜨린다. 거기에 위안부는 20만이라는 속설을 퍼뜨리고 위안부가 소녀만 있었던냥 소녀상을 세운 정대협을 매몰차게 비판하며 끌어온다. 기혼자들도 위안부로 갔다거나 위안부가 3만명 정도였다고 한들 성노예제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이 달라질지 의문이다. 전체적 시각에서 위안부문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필자는 위안부제도를 국가로서 일본이 파쇼적 동원체제를 통해 부녀자를 위안소로 유인하여 일본군인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강제한 성노예제(sexual slavery)라고 이해한다.(2) 이것이 국제사회의 이해이기도 하다. 일본의 군위안부제도는 인도에 반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에 해당한다. 성노예제도를 설계하고 동원을 지시한 국가권력의 핵심부, 예컨대, 일왕과 내각, 군사령부의 주요인물들이 바로 인도에 반한 범죄의 주범들이고, 위안부를 모집하고 수송하고 감금하고 관리하고 이용하는 자들은 그 하급범죄자들이다. 한편 박교수는 위안부의 진실을 매춘의 이미지 속에서 해체하면서 이를 세상의 오래된 관습 정도로 취급하는 것같다. 특히 일찍이 발전한 일본의 해외이송 매춘여성에 대한 이야기인 ‘가라유키상’을 상세하게 논하였다. 일본이 그러한 전통을 가졌더라도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에게 야만을 자행할 권리가 나오지 않는다. 위안부를 매춘여성으로 굳힌다면 전쟁범죄나 인도에 반한 범죄로 규정하는데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아마도 박교수가 기준으로 삼는 양식있는 일본인들이 대체로 그 정도의 도덕적 간계를 구사하는 것같다. 위안부를 매춘으로 규정하면서 위안부제도의 불법적인 요소들을 슬슬 지워나간다면 위안부문제는 저절로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조선인 업자들만의 범죄로 부각시킬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다.
2. 박교수의 구조적 책임론
박교수는 위안부를 일본군대가 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거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안부 동원과 관련해서는 일본군대에게 법적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일본군대가 조선인 여성을 강제로 끌어다 집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여 강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민지 동원체제를 통해 조선인 여성의 성을 용이하게 착취할 수 있는데, 일본군이 굳이 조선인 여성에게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할 이유가 없다. 구조적으로 정비된 체제를 통해 무리없이 성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데 일본당국이 왜 폭력을 행사하겠는가!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일본당국의 자연적 폭력에서 구조적 폭력으로 중심이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중에 동남아 여성에게는 자연적 폭력이 불법적으로 행사될 수밖에 없었다면 조선인 여성에게 제도적 폭력이 ‘합법적으로’ 행사되었던 것이다. 박교수가 동남아 여성에 대한 일본군의 전시강간과 조선인여성에 대한 폭력없는 섹스를 그토록 열심히 구별하는 것이 어떤 실익이 있는지 모르겠다. 양식있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데는 효과가 있겠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조선인 위안부 연행에서 일반적으로 경찰, 행정공무원, 업자 등 3인이 조를 이루었다고 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연행해간 주체에 대해서는 군인, 경찰, 공무원(면장 구장), 업자 등 다양하게 말하고 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업자(인사소개업자)라고 증언하였다. 박교수는 현실적 강제성을 행사한 자가 업자이므로 위안부동원은 업자의 범죄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업자가 현실적 강제성을 행사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연행의 직접실행자가 업자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교수는 ‘현실적 강제성’과 ‘구조적 강제성’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였다. 자세히 보면 현실적 강제성 개념은 위안부의 동원의 폭력적 이미지를 업자에게 전가하는 방편으로 작동한다. 업자(업주)(3) 폭력성을 강조하다 보니 업자와 일왕 사이에 촘촘하게 존재하는 주요한 책임주체들이 소거되고, ‘고작’ 구조적 강제성의 논리적 귀결점으로 일본정부나 일왕이 등장한다. 구조적 강제성에 입각한 구조적 책임론은 법적 책임을 인정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법적 책임을 부정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박교수가 일본의 책임요소라며 거론한 것들이 한결같이 위안부동원과 직결되지 않는 사정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 성적 서비스를 대규모로 필요로 하는 군대를 유지했다는 점,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점, 업자들의 위안부 연행을 묵인(?)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책임을 거론한다. 필자의 생각은 단순한다. 법적인 책임요소가 없다면 책임을 더 이상 논하지 말자는 것이다. 박교수가 일본의 직접적인 책임요소를 부인하고 대신에 우회적 방식으로 일본의 책임을 거론하는 행태는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부인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4)
박교수의 구조적 책임론은 책임을 강화하고 책임을 분명하게 귀속시키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단에 책임을 전가하고 핵심적인 전쟁지휘부의 책임을 면제시킨다. 그렇게 헐렁하고 구조적이고 상징적인 책임만이 일본에게 존재한다면 위안부 문제를 한일간의 현안에서 제외했어야 옳다. 그렇다면 아시아 평화기금도 불필요하고 과분한 것이다. 일본정부에게 식민지배의 책임자로서 위안부동원에 ‘덤태기’를 쓰게 해서는 안 된다.
3. 일본의 직접적 책임
일본정부와 일본군지휘부는 행위자로서 직접적인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위안부제도는 통치의 하자(부작위)가 아니라 통치의 범죄인 것이다. 직접적인 법적 책임이 존재하는데 상징적이고 구조적인 책임을 운운한다는 것은 기만적이다. 당시 형법은 해외이송을 목적으로 사람을 강제로 연행(약취)하거나 기망하여 연행(유괴)하거나 금전을 대가로 사람을 매매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였다(형법 제226조).(5) 형법규정이 약취든 유괴든 동일한 범죄로 처벌하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우파들은 강제연행(약취행위)이 없었다면 일본의 책임이 없다는 논리를 구축해왔다. 그들은 강제성에 관한 그릇된 인상을 퍼뜨려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키고자 한다. ‘강제성의 소비자’로서 일본우파들은 강제성 개념으로 대중심리전을 벌였던 것이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북한의 당국자가 강제력을 행사하여 일본인을 북한으로 데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 납치문제도 없다고 해야 한다. 어쨌든 형법은 약취든 유괴든 인신매매든 동일한 범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그러한 구별은 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박교수는 일본군대가 위안부의 납치나 유괴를 지시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불법적인 동원의 책임은 위안부를 직접 모집한 업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박교수의 주장은 부당하다. 박교수의 가정처럼 일본군부가 불법적인 동원을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일본군대가 형법 제227조의 범죄자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형법은 제226조 범죄의 피해자들을 인수하는 자도 약취유괴의 방조범으로 처벌하기 때문이다(형법 제227조).(6) 업자의 책임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일본정부와 군대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위안소를 설치 운영하고 위안부를 수수한 부대의 지휘관은 이러한 범죄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법률상 당시에 죄가 성립하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일본정부가 구조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듯이 말해서는 곤란하다.
이제 일본군부가 위안부 동원을 지시했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군의 지휘부는 형법 제226조의 공동정범이나 교사범에 해당한다. 박교수는 불법적인 위안부 모집을 지시한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1938년 위안부 모집에 관한 군대내의 최후통첩인 <군위안소 종업부 등의 모집에 관한 건>(7) 을 제시하며 이를 불법적인 위안부모집을 금지한 군대의 조처로 파악하였다. 박교수는 고바야시의 입장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위안부연행이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도록 교묘하고 신중한 방법을 활용하라는 취지로 해석하는 요시미와 나가이의 입장이 정황상 옳다.(8) 실제로 이러한 통첩이 내려지기 전에 일본에서는 군위안부 납치사건에 대한 재판이 한 건 있었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2년 봄에 나가사키 여성 15명이 상하이 해군지정위안소로 유괴되어 2년간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했다. 1937년 대심원은 위안소경영자와 중개인을 형법 제226조로 처벌하였다. 아직 군국주의의 파도가 일본전역을 휩쓸기 전에 사법조직이 나름대로 인권보호의 기능을 수행한 사례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법원은 부녀자 납치를 지시하고 의뢰한 군대와 그 지휘자의 책임을 불문에 부쳤다.(9) 어쨌든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앞의 최후통첩이 발부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동시에 1937년 중일전쟁 직후에 성적 서비스에 대한 일본군대의 엄청난 수요를 고려해볼 때 위안부를 대규모로 합법적으로 조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점에서 갑자기 인권을 강화하는 금지규정을 내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물의를 일으키지 말라는 지시는 불법적인 위안부 동원을 금지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없다. 그리고 군위안부 모집이 재판에 회부된 사례가 하나뿐이라는 점을 주목할 때 군위안부 연행은 형법적으로 범죄이지만 처벌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박교수는 당시에 불법적 모집을 금지하였으나 실제로 단속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정부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본정부, 일본군사령부, 조선총독부, 조선군사령부는 팔짱끼고 불구경하는 유람단이 아니었다. 그러한 기관들이 위안부동원을 묵인하였기 때문에 위안부 동원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우리가 일본정부에 대해 너무나 높은 수준의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된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부녀자, 미성년자를 군위안부로 내몰기 위하여 형법상의 약취유괴죄를 유명무실하게 하는 직업소개법제를 도입하여 실제로 군위안부 동원을 합법화하였다. 이미 조선에서 군위안부모집에 관해 사법당국이 더 이상 개입하거나 통제할 수 없도록 법제도를 구축한 것이다. 식민지 법통치의 이원성 내지 이중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민간업자를 통제하는 소개영업취체규칙이 일본에서는 사기적 모집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였으나 조선에서는 그 소개영업취체규칙의 법령을 소략하게 규정하여 편법적 방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형성되었다. 형법에서 위안부의 약취유괴를 범죄로 규정해놓고, 소개영업취체규칙에서는 소개업자의 편법적 행위를 허용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식민지에서 이후 총동원체제의 조선직업소개령(1940) 속에서 민간업자에 대한 허가와 통제 규칙을 정함으로써 조선총독부를 위시한 관이 개입한 위안부동원의 법제를 완전히 갖추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안부는 업자들의 납치와 인신매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거국적으로 1,2,3,4차 ‘위안단’을 조직적으로 모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국가적 동원체제 때문이었다. 한혜인은 최근 논문에서 이 점을 상세히 논증하고 있다.(10) 식민지배체제는 입법과 사법의 측면에서 조선인 부녀자를 군위안부로 동원할 수 있게 완벽하게 지원하였다. 차별적이고 불법적인 이원적 법구조 속에서 조선인 여성들은 조직적인 국가범죄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관행상으로 인신매매를 단속하지 않는 것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법으로는 금지했기 때문에 일본정부가 기본적인 의무를 이행했다는 박교수의 평가는 사태에 맞지 않는다. 또한 일본과 조선이 동일한 조건 아래에 있었는데 가난과 비정한 아버지나 오빠 때문에 조선인 여성들이 위안부동원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박교수의 주장도 수정해야 한다. 조선인 위안부들은 조선과 일본의 차별적 동원법제의 희생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편 박교수는 위안부문제에 대하여 주된 책임이 일본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책임의 근거를 성적 서비스에 대한 엄청난 수요를 가진 군대를 유지한 데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책임론을 희화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다. 책임의 핵심을 아주 주변적인 정황으로 밀어버리고 주변적인 배경을 끌어와 군위안부 문제를 논의해서는 안 된다. 박교수는 군당국의 위안부 모집지시의 형법적 의미를 전혀 논의하지 않는다. 지시한 증거가 없다는 식의 주장에 몰입한다. 동시에 군대의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면 도대체 지시를 무엇으로 이해하는지도 궁금하다. 위안부 모집지시를 복덕방에 좋은 집 좀 알아봐달라는 부탁으로 낮출 수는 없다. 박교수는 계속해서 ‘조선인’ 업자의 이윤추구욕을 비난하고 업자를 강제연행의 주범으로 몰아세우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실제로 <제국의 위안부>의 기본 아이디어는 조선인 업자의 재발견이다. 그것으로 모든 책임문제의 판세를 전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과거사의 책임을 추궁하려면 한국이 먼저 조선인 업자를 처벌했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박교수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행위(제2조 12호)”를 국권을 팔아먹은 매국행위와 마찬가지로 반민족행위라고 규정한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친일진상규명위원회가 일부 조선인 위안소 업자들을 친일파로 규정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11)
조선인 업자가 실행자로서 역할을 했다하더라도 주도권은 업자에게 있지 않다. 최근에 안병직 교수는 군위안소 관리인으로 지냈던 인물이 쓴 일기를 번역하였다. 그는 이 책의 해제에서 부록으로 추가한 연합군포로신문조서와 조사보고서를 분석하면서 “위안소업자들이 영업을 위하여 위안부들을 데리고 일본군부대를 쫒아 다닌 것이 아니라 일본군부대들이 하부조직으로 편성된 위안소와 위안부들을 전선으로 끌고 다녔다”고 결론내렸다.(12) 일본군 사령부의 지시가 군국주의 국가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하여 박교수는 상상력을 최소한도 사용하지 않는 것같다. 지시가 어떠한 명령계통을 통해 현장에서 관철되는지를 유의해야 한다. 사령부의 지시는 부동산 소개의뢰와는 다른 것이다. 위안소설치는 철저하게 군대의 계획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위안소가 대규모로 설치되기 시작한 중일전쟁 와중에 화중에서는 1937년 12월 중지나방면군의 지시, 화북에서는 1938년 6월 북지나방면군 참모장의 지시, 화남에서는 1938년 11월 제21 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위안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박교수처럼 운영주체로서 민간업자의 위안소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조차도 군대의 철저한 관리 통제 아래에 있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위안부문제의 주범은 업자가 아니라 일본군부였다.(13)
일본군의 위안부연행은 인신매매금지협약에 포괄적으로 위배된다. 부녀자를 추업에 이용하기 위해 납치하거나 유인하거나 매매하거나 수송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국제법적으로 불법이었다. 위안부모집은 일본이 가입한 <백인노예매매의 진압을 위한 국제협정(1904)>과 <백인노예매매의 진압을 위한 국제협약(1910)>이 금하는 인신매매에 위반된다.(14) 물론 일본은 중요한 1910년의 협정을 식민지에서의 적용을 유보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이루어진 위안부 인신매매나 동원은 협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중적인 차별적인 법체제를 주목한다면 제국의 시민으로서 협력자라는 박교수의 시각은 참으로 부당한 것이다. 조선인은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은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차별을 받은 것이고, 이원화방식을 통해 식민지인은 성노예제의 먹이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조시현의 지적처럼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국적의 선박에 의해 중국이나 남양군도에 수송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은 이 협정의 적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조시현, 국제조약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적용문제(미발간 연구노트).(15)
4. 위안소 –유곽인가 강간캠프인가
위안소형태는 다양하다. 군대직영위안소, 업자의 위안소, 혼합형위안소가 있다. 어느 경우에도 위안소는 군대의 관리 감독하에 놓여있었다. 박교수는 하루 수십명을 상대로 혹사당하고 폭력에 시달리고 버림받는 위안부들을 거론하지만 위안부의 다른 측면을 매우 강조한다. 위안소에서 꼭 강압적인 섹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대화하고 위로를 받는 일도 적지 않았고, 위안부들과 일본군인들의 사랑놀음도, 그들간의 결혼도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희생자인 위안부에게는 긍정적이고 밝은 측면도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의 증언집에서 이러한 장면을 가위질해서 모아놓은 것같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인 장면에 주목하는 것이 과연 전체 책임논의에서 합당한 분배방식인가? 인간은 지옥과 같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꿈을 꾸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희생자들 더욱 희생자화하지는 말자는 주장에는 동조하더라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를 무너뜨리려는 데에 이른다면 박교수의 제안은 매우 위태로운 것이다.
박교수는 성노예라는 규정이 위안부 여성의 주체성을 과도하게 박탈하여 결국 그들을 모욕하는 말이 된다고 우려한다. 위안부의 인권을 위해서 성노예라는 말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교수의 도덕적 우려가 성노예라는 표현이 함축하는 일본의 부담을 희석시키려는 연막처럼 느껴진다. 박교수의 말대로 이제 위안부는 매춘부라거나 일본군인과 동지적 관계였다고 말하는 것이 위안부의 인권과 명예에 도움이 되는지도 역시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과연 누가 위안부 생활 중에 있었던 아름다운 한 때를 기억하고 말할 위안부의 권리를 억압하는가? 종로에 버티고 있는 잔 다르크 같은 위안부 소녀상인가 아니면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잡도리하는 사람인가?
박교수가 성노예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이상하게도 ‘식민지 백성은 노예’라는 논리적 과잉을 통해서 성노예 개념을 무효화시킨다. 앞서 말한 구조적 책임론의 논리와 동일하다. 박교수는 위안소에서 강압적 섹스도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위안소에서 성적 관계가 모두 강간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같다. 그러한 성적 서비스를 전후하여 폭력이 행사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들이 시내에 외출할 수도 있었고 군인들과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조선의 젊은 부녀자들을 중국이나 남양군도에 강제로 이송해 놓고 거기에서 외출을 허용했다고 해서 그들에게 자유가 있는가? 위안부들은 섹스를 거부할 권리가 없었고 위안소를 떠날 권리가 없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자유가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탈출의사를 상실한 위안부 여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성욕을 채울 군인이라면 정신이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안소라는 거대한 폭력의 구조 안에 위안부들이 놓여있다는 점을 주목해야지, 성을 착취하는 그 장면에서 일본군인의 폭력성 여부를 논할 수 없다. 박교수가 아무리 위안소의 풍경이 인간적 공감의 장처럼 설명하고자 하더라도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은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므로 그러한 상태에 있는 여성을 간음하는 자는 준강간죄(일본형법 제178조)에 해당한다.
박교수가 위안소에서 일본군 장교를 만나 사랑을 받고 그의 도움으로 위안소에서 해방되었던 신경란 할머니의 사례를 강조하지만 결코 평균적인 사례가 아니다.(16) 오히려 일본군 장교가 보증한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았더라면 귀국(탈출)이 불가능했다는 점을 증명하는 사례로 해석해야 한다. 박교수는 동남아 현지인들이 조선인 위안부를 일본군인과 동일하게 적으로 이해하였으며, 일본군인과 조선인 위안부는 제국의 시민으로서 ‘동지적 관계’라고 결론내렸다. 그러한 동지적 관계였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 부상자를 간호하였다고 주장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여성이 체념하여 순응하는 상황을 제국의 위안부로, 동지로, 협력자로 만들려는 것은 놀라운 문학적 상상력이다. 더구나 위안소를 찾은 일본군인도 전쟁에 내몰린 피해자로 규정한 대목은 박교수의 책임이론의 심각한 혼돈상태를 보여준다. 박교수의 책임론은 거의 종교적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그리고 또 위안소를 찾는 군인중에 조선인도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의도적 혼란을 통해서 위안부가 일본군의 성노예였다는 평가를 변경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다.
위안소는 일본제국의 치밀한 국가범죄이다. 소위 위안부는 일본제국의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제국의 성노예이다. 일본군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 모집되어 위안소로 이송된 후, 위안소에서 성의 제공을 강제당했으며, 위안소를 떠날 권리도 박탈당했다. 위안부들은 자유가 없었으므로, 위안소는 강간캠프이고 성노예제도인 것이다. 이미 이 점은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 결론이 난 사항이기도 하다. 1926년 노예제금지협약의 당사자인 일본은 위안부제도를 운영함으로써 노예제금지협약도 위반했다.(17) 박교수는 동남아 여성이나 네덜란드 여성을 상대로 일본군이 전쟁상황에서 강간하고 위안소로 끌고 간 사례와 조선인 위안소를 구별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법적으로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법적으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구별하여 전자를 ‘전리품’으로 후자를 ‘군수품’이라 부르면서 사태를 뒤틀어보려는 것은 강제연행이 없다는 논리와 비슷하다. ‘강제성’ 개념을 도처에서 남용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전시성폭력을 전쟁범죄나 인도에 반한 범죄로 규정하고 있으며, 과거 연합국통제위원회법률 제10호가 강간이나 비인도적 행위, 잔혹한 행위 정도로 표현했던 성폭력을 최근의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은 ‘강간, 성적 노예화, 강제매춘, 강제임신, 강제불임, 심각한 성폭력’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다(제7조, 제8조 참조). 박교수가 위안부라는 개념에 제 아무리 언어적 마법을 구사한대도 도로 성폭력의 범주에 속할 수밖에 없다.
5. 아시아평화기금
박교수는 아시아평화기금(1997-2007)의 의의를 높이 산다. 평화기금은 이른바 수상의 사과문과 일정한 위로금을 위안부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재단이었다. 일본정부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 정치인들, 지식인들이 이 기금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박교수는 일본의 책임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보수세력과 일본의 책임을 이행하려는 양심세력간의 불가피한 타협이었다고 묘사한다. 그래서 박교수는 한국인들이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필자도 평화기금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가장 발전적인 형태의 책임이행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한국의 정대협이 주축이 되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평화기금이 제공하는 돈을 수령하지 않도록 유도하였고, 대만과 한국의 위안부들은 수령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박교수는 정대협의 이러한 거부행동이 선량한 일본인들에게 상처를 주고 반한 분위기를 초래하였다고 지적하고, 정대협이나 일본좌파들이 희생자의 인권을 침해하고 희생자를 사회개혁의 도구로 삼았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정대협의 문제제기가 박교수의 비판대로 잘못된 것이기만 할까! 평화기금은 ‘법적 책임’을 이행하려는 방식에 해당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법적 책임을 추궁하는 피해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부정하면서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은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박교수의 주장처럼, 그 돈의 대부분이 실질적으로 정부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공식적인 국가의 책임도 아니고 법적인 책임도 아니다. 거기에 수상의 사과문이 동봉되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국민기금’이라고 하더라도 사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호박에 줄친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피해자들중에는 곤궁하여 특별히 재지 않고 기금의 돈을 수령했을 수도 있고, 그 돈과 수상의 사과문을 법적 책임의 인정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선량한 일본인의 마음의 상처를 거론하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의 처지와 입장을 각개격파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일본의 태도는 반칙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서 위안부 문제가 피해자 개인의 인권문제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인권공세다. 법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범죄의 진실과 법적 책임을 부정하면서 제공된 돈을 거부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마땅한 태도이다. 운동단체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방치하고 뜬금없이 정치적 대의를 앞세워 피해자를 도구화했다는 비판은 지나치다. 평화기금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한국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활지원에 나섰으며 정대협은 정부에게 그러한 조치를 적절하게 촉구하였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대만의 피해자들에게는 법적 책임의 인정은 자긍심의 문제였다. 원칙을 벗어나서 변칙을 구사한 일본이 문제의 본질을 놓쳤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철저하게 헌신하겠다는 사회적 대의를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교수의 생각과 달리 피해자가 도구화되는 것이 아니라 고양되는 것이다. 인권피해의 구제의 주안점은 배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권존중의 사회를 형성하여 재발방지의 보증을 마련하는 데에 있다. 중대한 인권침해사건과 관련하여 개인적 구제의 차원과 공적인 구제의 차원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유엔총회가 채택한 ‘피해자 권리장전’(18)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분명히 주목하고 있다. 그러한 인권침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국제질서를 형성하는 것에 대해 인류가 권리를 가졌다고 해석해야 한다. 법적 책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국가의 부실한 처방을 거부하는 정대협의 방침은 피해자 권리장전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다.
일본은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할 수 있는 사회가 언제 될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이 인권과 민주주의에 더욱 철저한 나라로 고양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 때 그 사죄는 일본의 빛나는 작품이 된다. 내부적인 변화없이 외교적으로 얻어낸 사과는 어디에 쓸 것인가? 내부적 변화없이 억지로 하는 사과는 그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적 성숙에 기초한 사과만이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나아가 동북아시아 전체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정대협의 사주를 받아 억지 투사가 되었다는 느낌을 가졌다면 잘못이다. 그들도 자연적 수명을 잃어가면서 사회적 대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항상 연약한 피해자이자 비주체로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대의를 만들고 투쟁하고 사랑하고 나누면서 과거를 극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위안부 문제가 한일간에 현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성매매, 성폭력, 성희롱 등 성적 문제에 있어서 한국사회를 전반적으로 성찰하도록 만들었다.
최근에 일본공산당 의원들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새로운 특별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당장에 통과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진실규명, 공식사과, 법적 책임이행, 교과서수록과 시민교육 등을 담는 법안이었으면 한다. 그러한 조건 위에서 생존한 피해자들이 가해자로서 일본정부와 집단으로서 일본을 개인적으로도 용서할 수 있다면 좋겠다.
6. 맺으며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는 최근에 나온 저작중에서 책임을 가장 많이 언급한 책이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은 법적 책임이자 행위책임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법학자여서가 아니다. 뭔가 과거의 잘못된 것을 밝히고 책임을 이행하자는 것과, 그와 상관없이 현실을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자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필자는 법적 책임과 연결되지 않는 책임론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렇다고 법적 책임 만능론자가 아니다. 법적 책임을 배제한 논의가 실제로 책임을 모호하게 하거나 공허하게 만들기 때문에 의심한다는 것이다. 한일관계의 과거사와 관련한 책임론은 특히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일본학자들의 주류는 법적 책임을 부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도의적 책임이나 인도적 책임을 말하는 것같다. 법적 책임이 없으면 그만이지 왜 인도적 책임을 이행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박교수도 법적으로 일본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일본에게 또 다른 책임을 이행하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논하는데 박교수는 조선인 업자, 조선인 군인을 언급했으며, 조선인 아버지의 인신매매를 비난하고, 가난, 계급을 비난하고, 가부장제를 비난하고, 한국전쟁에서도 유지된 한국군 위안부, 양공주, 한국의 성매매관행을 언급하였다. 그의 지적이 모두 맞지만 그것이 일본군위안부의 책임을 인정하거나 부정하는데 관건이 되는지 궁금하다. 또 착한 일본인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위안소에서 위안부에게 용돈을 주고 누이처럼 대하는 착한 일본군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머물고 있는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하는 착한 일본인들, 아시아평화기금에 자발적으로 기부했던 선량한 일본인들, 그러한 기금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던 양식있는 일본인들을 언급했다. 그들은 칭찬할만한 사람들이다. 일본인들이 모두 악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일본인 전체가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박교수가 강조하는 다양한 사례와 측면을 합산해도 위안소가 인도에 반한 범죄로서 성노예제라는 종합판단을 바꿀 수 없을 것같다. 박교수는 종합판단을 스스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면서도 주변적 정황을 집요하게 나열하면서 종합판단에 도전한다. 문학으로서는 국제인도법과 국제인권법을 능가할 수도 있지만 윤리적 결론으로서 국제인도법을 넘어가려는 때에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러한 규범은 승전국인 미국의 일방적 판단이 아니라 20세기 야만과 폭력에 대한 인류의 종합판단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역사기술자는 모든 것을 정직하게 기록함으로써 책임을 다한다. 그러나 주요한 것과 주변적인 것을 구별하고 배치하는 일에 감정의 동요가 들끓는다면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성의 오류는 고치기 쉬우나 한번 정해진 감성의 오류는 교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
(1)'위안부=비극의 소녀상' 뒤집는 두 가지 시선?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906134609
(2) 안병직,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 일기, 2013,
(3) 업자는 모집에 관여한 인사소개업자를 의미하고, 업주는 대체로 위안소 경영자를 의미한다.
(4) 일본정치인의 지속적인 위안부공원 관련 주장이 이른바 부인행위로서 실종범죄에 해당하므로 국제형사재판소에 고발할 사안이라는 견해는 김영석,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 범죄와 강제실종에 의한 인도에 반한 죄, 법학논집 17권 1호(2013), 153쪽 이하; 부인범죄에 대해서는 이재승, 국가범죄, 앨피, 2010, 541쪽 이하.
(5) 제226조(국외이송유괴.인신매매) ①국외에 이송할 목적으로 사람을 약취 또는 유괴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②국외에 이송할 목적으로 사람을 매매하거나 또는 피괴치자 혹은 피매자를 국외로 이송한 자도 또한 같다.
(6) 제227조(약취방조.피괴치자수수) ①전3조의 죄를 범한 자를 방조할 목적으로 피괴치자 또는 피매자를 수수 혹은 장닉하거나 은피케 한 자는 3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②영리 또는 외설의 목적으로 피괴치자 또는 피매자를 수수한 자는 6월 이상 7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7) 민간인이 군부의 명의를 대면서 유괴와 흡사한 방법으로 위안부를 모집한 것에 관해 군부가 군의 위신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사회문제를 일으키므로, 위안부의 모집에 임하는 사람의 인선에 철저하고 모집을 행할 때는 파견군 통제 하에 주도적절하게 관계지방, 헌병 및 경찰당국과 긴밀하게 연결해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8) 이점은 한혜인, 총동원체제하 직업소개령과 일본군 위안부 동원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차별적 제도운영을 중심으로, (미발간원고).
(9) 도츠카 에츠로/박홍규(역), 전시 여성폭력에 대한 일본사법의 대응, 그 성과와 한계, 민주법학 26호(2004), 364-381쪽.
(10) 한혜인, 앞의 글(미발간원고) 참조.
(11) 친일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파로서 조선인 업자 8인 정도를 조사했으며 최종적으로 2~3인이 친일파로 규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은 이들 대부분을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12) 안병직,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풀빛, 2013, 17쪽.
(13)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강제성 재논의, 한국정신대연구소(주관), 강제성이란 무엇인가?-일본군 위안부 문제, 2007 한일공동세미나. 29쪽.
(14) ‘백인’은 협정성립과정의 연혁적 배경을 설명한다. 부녀인신매매 철폐운동은 인신매매되는 백인부녀를 구출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협정이 백인여성만 보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15) 조시현, 국제조약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적용문제(미발간 연구노트).
(16) 한국정신대연구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5, 풀빛, 2001, 21쪽 이하.이 인용자료도 정대협이 편집한 것이므로 정대협이 아름다운 기억을 억압했다는 주장은 액면 그대로 들리지는 않는다.
(17) McDougall, Gay J., Contemporary Forms of Slavery: Systematic rape, Sexual slavery and Slavery-like practices during Armed Conflict, Final Report submitted to the UN General AssemblyUN Doc. E/CN.4/Sub.2/1998/13, 22 June 1998)., para.26-30.
(18) Basic Principles and Guidelines on the Right to a Remedy and Reparation for Victims of Gros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 and Serious Violations of International Humanitarian Law. Adopted and proclaimed by General Assembly resolution 60/147 of 16 December 2005.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2, 2013년 10월, 이재승,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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