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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3
권용득 - <아이 캔 스피크> 이제야 봤다.
권용득 - <아이 캔 스피크> 이제야 봤다. 전반부의 자연스러운 전개가 뒤로 갈수록 엉망진창이었다. 영화 속 위안부...
권용득
23 Ma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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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이제야 봤다. 전반부의 자연스러운 전개가 뒤로 갈수록 엉망진창이었다. 영화 속 위안부 피해자 나옥분을 소위 중심서사(소녀상 이미지에 부합하는 피해자상)의 상징처럼 그린 점이나, 회상 장면에서 일본군을 성욕에 굶주린 짐승처럼 그린 점이나, 나옥분의 증언을 방해하던 일본인들을 파렴치하게 그린 점이나, 사과한 적 없는 일본이라는 편견에 기댄 점이나, 그 외 무수한 클리셰들은 일면 이해가 간다. 사람들이 그걸 원하니까. 그 이상의 이야기는 원치 않으니까.
다만 아무리 영화는 영화라지만, 이 정도로 사실관계를 뭉개도 괜찮을 걸까 싶었다. <아이 캔 스피크>의 클라이맥스는 2007년 미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된 장면을 극적으로 꾸몄는데, 그렇다면 나옥분은 이용수 할머니인 셈이다. 당시 미 하원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한 위안부 피해자는 이용수 할머니였고(김군자 할머니도 있었지만 영화 마지막에 인용한 사진은 이용수 할머니였으므로), 이용수 할머니는 나옥분처럼 자신의 피해 사실을 숨긴 적 없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원단체의 대표적 위안부 피해자나 다름없고, 나옥분보다 오히려 영화 속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 정심과 가깝다. 또한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이 미 하원의 압도적 지지(찬성39:반대2)를 끌어내는 데 크게 한몫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 위안부 결의안을 1999년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처음 발의하고 주도한 인물은 일본계 3세 마이크 혼다 의원이었다. 그리고 미 하원에서 채택된 위안부 결의안을 반대하던 세력이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을 문제 삼은 건,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 자격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었는데(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 부분을 문제 삼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그동안 영화 속 나옥분처럼 살았던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나? 자신의 피해 사실을 떳떳이 밝히고도 주변 이웃과 마음껏 일상을 나눴던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나? 얼핏 격리 시설 같은 나눔의 집이 아닌 남산이 바라보이는 서울 중심에서 조깅을 하며 자신의 건강을 부지런히 챙긴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나? 위안부 피해자가 과거 아시아여성기금과 무라야마 총리의 사죄 편지를 받거나, 배춘희 할머니처럼 중심서사와 다른 얘기를 하면 “일제 창녀” 같은 모욕적인 말을 해대지 않았나? 다시 말해 <아이 캔 스피크>가 가장 못마땅한 까닭은, 현실을 제대로 기만했기 때문이다. 이재훈이 영화 속 파렴치한 일본인들에게 “개새끼들아”라며 주먹을 머리 위로 치켜들 때는, 위안부 문제를 빌미로 ‘당사자 대신’ 일본을 쥐어박고 싶은 욕망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본 걸까. 칭찬 일색이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해 알 만한 사람들조차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덕분에 온종일 착잡했다. 일본의 엉터리 역사 교과서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사실관계를 뭉갠 영화에는 극찬을 쏟아내는 아이러니라니. 아무래도 위안부 문제는 영원히 갈등할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또 나처럼 이런 얘기 해봐야 “반동” 취급밖에 못 받겠구나 싶었고. 그런데 만일 일본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이 캔 리슨” 할 것 같진 않다. 말했다시피 “아이 캔 스피크, 투”라며 악순환은 끝없이 반복될 것만 같다.
126You, Park Yuha, Seokhee Kim and 12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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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
저도 처음에 재밌게 보다가 가면갈수록 영화가 좀 산만해져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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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산만한 것보다 지나친 극화와 일본인 악마화... 끝까지 보기 너무 힘들었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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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seon Kim
권용득
사실 종군위안부 분쟁은 일본내 시민사회의 목소리에 힘입은바 큰데, 지나친 극화는 되려 이분법적 논리에 휘말려, 소중한 연대를 잃어버리는 아쉬운 부분이고,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기보다는, 영화의 서사와 구조에 맞게 표현되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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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Hyeseon Kim
그 소중한 연대보다 '내부 결속'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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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seon Kim
마이크 혼다 의원은 그동안의 실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내 경선에서 져 의원직을 상실했지요. 떠날 때를 안다는 것만큼 큰 지혜가 없습니다.
http://www.latimes.com/.../la-pol-ca-essential-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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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mer congressman Mike Honda will work to unseat Republican incumbents…
Former congressman Mike Honda will work to unseat Republican incumbents in Califo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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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 replied · 11 replies
Seunghye Han
저도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이전에 위안부를 다루었던 영화들에 비하면 ‘그나마’ 발전을 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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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글쎄요. '그나마' 발전을 했다고 보기 힘들더군요.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성난 민족주의에 기대고 있어서. 차라리 나옥분을 "자발적 매춘부"로 그렸다면 어땠을까 싶더군요. 이왕 사실관계를 뭉갠 김에, 미 하원에서 "자발적 매춘부"는 피해자가 될 수 없냐고 증언했다면, 매춘부는 사람도 아니냐며 피해자 차별하는 위선자들을 저격했다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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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hye Han
그 전의 ‘귀향’ 같은 영화와 비교해보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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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k Kim
정말 얄팍한 기획 영화였어요. 민족감정만 증폭시키면 모든 미해결된 서사를 대충 퉁칠 수 있다는.. 뻔히 알면서 그러니까 더 밉더라구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도 아니고.. 서프라이즈 재연극 같은 연출로도 관객들의 공분을 살 수 있다니..;; 나문희 배우의 연기만 아깝드라구요.. 해결도 못할 재개발 이슈를 어설프게 건드려놓고 대충 편의적으로 쓴 것도 정말 짜증났어요..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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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k Kim
애써 분석하기도 싫을 정도로 게으른 영화인데다가.. 지불의 댓가로 관객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이 나쁜 놈들.. 감동적이었어 훌쩍..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나쁜 영화였어요. 근데 이 참을 수 없는 구림을 표현하자니.. 관객들의 감동이 다 가짜라고 외치는 셈이 되어서.. 나한테 그럴 자격은 없는 것 같다는 자기 검열이;;; 암튼 이런 안일한 영화는 제발 다시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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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네. 한마디로 정말 구리더군요. 말씀하신 재개발 이슈 다룬 방식도 그렇고. 펼쳐 놓고 마지막에 수습 안 되니까 용역 깡패(?)의 인간미를 드러내며 대충 웃음으로 때우려는 시도에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어요. 한줄평 하자면, 용역 깡패와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지만 일본놈은 절대 안돼... 정도가 되겠네요. 그나저나 개봉 당시에 봤고, 이런 얘기 했다면 개까였을 듯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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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저도 봤고 메모까지 써 놨는데 쓸 여력이 없어서 그냥 지나고 말았던 영화죠. 필요한 얘기, 잘 써 주셨네요. 남산 보이는 후암동에서 교회활동도 열심히 하지만 주변인들에겐 피해사실 말하지 못한 할머니라면 계시지요.
그런데다 정말 영어로 말했는지 여부는 모르겠지만(아닐 가능성이 큰데)
그런 설정 자체가 위안부할머니를 영어제국주의로 또다시 괴롭힌 셈. 제겐 그게 가장 큰 아이러니로 보이더군요.
폭력적인 장면을 줄였다는 것 같던데,그 부분 설정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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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대부분 "아이 캔 스피크"에 너무 큰 의미를 두고 좋게만 해석했더군요. 다들 억지 감동에 굶주렸나 싶기도 했고요. 실재하는 위안부 피해자를 너무 미화했다 싶기도 했고요. 정작 현실 속에서는 투사가 되지 않는 이상 그런 대접을 받은 위안부 피해자는 제가 알기로 없었던 것 같아서요. 근데 그냥 지나치길 잘하셨어요. 지금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으니 망정이지, 말씀하신 필요한 얘기를 개봉 당시에 쓰셨더라면 또 욕보셨을 듯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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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ji Gui Do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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