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3

권용득 - 1938년, 만 열여섯 살 때 중일전쟁에 동원된 송신도 할머니



 권용득 - 1938년, 그러니까 만 열여섯 살 때 중일전쟁에 동원된 송신도 할머니가 중국 우한에서 처음 한 일은 식당...

권용득
25 May at 15:38 ·

1938년, 그러니까 만 열여섯 살 때 중일전쟁에 동원된 송신도 할머니가 중국 우한에서 처음 한 일은 식당 청소였다. 버려진 한 식당에 있던 시체들을 치우고 식당 곳곳에 핏자국을 닦았다. 그 식당은 얼마 뒤 ‘세계관’이라는 일본군 위안소로 개조됐다. 새 위안소가 생겼다는 소식에 일본군이 몰려들었지만, 영업 허가가 떨어지기 전이라서 몰려든 일본군이 모두 쫓겨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충남 계룡산 부근 출신이었던 송신도 할머니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업자의 말에 속아서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업자는 송신도 할머니의 이동 비용과 송신도 할머니에게 사준 옷가지 등에 높은 이자를 붙여 송신도 할머니의 신변을 구속했다. 업자와 동업 관계에 있던 포주는 송신도 할머니가 저항할 때마다 온갖 폭력을 행사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몇 번이나 도망칠 궁리를 했지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는 오히려 일본군을 따라다니는 편이 생존 확률이 높았다.
송신도 할머니는 토벌 작전에 나서는 일본군과 토벌 작전에서 돌아온 일본군을 번갈아 상대했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일본군과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군을 번갈아 상대한 셈이다. 송신도 할머니 증언에 의하면 음독자살한 위안부도 있었고, 일본군과 동반자살한 위안부도 있었다. ‘도시코’라고 불리던 한 조선인 위안부는 이질에 걸려 일본군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그 일본군에게 당한 폭행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송신도 할머니는 잇달아 다섯 명의 아이를 임신하기도 했다. 그중 무사히 태어난 한 명은 위안소 밖에 살고 있던 조선인 여성에게 맡겼고, 다른 한 명도 위안소 밖 현지인에게 맡겼다. 나머지는 사산하거나 중년의 조선인 여성(아마도 같은 위안소에 있던)에게 배운 방법으로 낙태를 했다.(위안부의 참상을 다룬 한 만화에서처럼 일본군이 위안부의 태아를 강제로 떼는 일은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다. 일본군은 위안부를 성적 도구로 이용했고, 성적 도구로서 가치가 없을 때는 여러 가지 잡일을 맡겼다. 송신도 할머니 역시 임신 중일 때는 잡일을 맡았다.)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군이 전쟁터를 옮길 때마다 따라다녀야 했다. 이동 중에는 일본군의 탄알을 짊어지기도 했고, 일본군이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서면 일본군 대신 철모를 쓰고 보초를 서기도 했다. 중국군이 보초를 서고 있던 조선인 위안부 두 명을 납치하는 일도 있었다. 한 동료(아마도 다른 국적의 위안부)는 피로 얼룩진 일본군의 전투복을 빨러 갔다가 납치되기도 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했던 일본군 상사 이름과 자신이 따라다녔던 부대 이름을 고스란히 기억했다. 종전 후에는 중국을 벗어나려던 미네부대 소속의 이다 킨사쿠 중사가 송신도 할머니에게 청혼을 하기도 했다. 이다 중사와 함께 이다 중사의 고향 땅(사이타마현 후카야)을 밟은 송신도 할머니는 곧바로 버림받았다. 이다 중사는 송신도 할머니를 조선인이 많이 모여 사는 오사카 쓰루하시로 데려가서 ‘미군 매춘부’라도 하라며 요즘 사람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을 몰래 버리듯 유기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모모타니의 한 장화 공장에서 일하면서 기찻삯을 모아 이다 중사 고향집을 다시 찾았다. 이다 중사의 형수와 어머니는 송신도 할머니를 불쌍하게 여겨 주먹밥과 옷가지를 챙겨줬다. 갈 곳이 없던 송신도 할머니는 목적지도 없이 기차를 타고 가다 뛰어내렸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 바람에 또 유산했다. 이다 중사의 아이였다. 이후 송신도 할머니는 오나가와에서 함바집을 하던 조선인 남성과 함께 살았다. 송신도 할머니는 그 남성을 남편이자 은인으로 여겼다.(열여덟 살 연상이던 그 남성에게는 본처가 따로 있었지만, 본처는 다른 조선인 남성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다.)
송신도 할머니는 그 어떤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폐신문을 모아 팔면서 생계를 꾸려가기도 했다. 그 와중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송신도 할머니의 집과 재산을 한꺼번에 쓸어갔다. 송신도 할머니에게 남은 건 함께 살던 반려견 ‘마리코’뿐이었다. 송신도 할머니와 마리코는 이웃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제대로 걷지 못했던 송신도 할머니와 마리코를 대피소까지 업고 간 건 이름 모를 일본인 청년이었다고 한다.
약 일주일 뒤 재일 위안부 피해자의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의 양징자 씨와 신타니 치카고 씨가 수소문 끝에 대피소에서 지내고 있던 송신도 할머니를 찾았다. 그들은 송신도 할머니를 도쿄의 한 호텔로 모셨고, 송신도 할머니는 그 지원모임의 도움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도쿄에서 지냈다. 송신도 할머니는 2017년 11월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송신도 할머니는 1991년 ‘김학순 쇼크’ 이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적 배상 소송을 했던 재일 위안부 피해자였다. 10여년 동안 법정 투쟁을 이어갔고, 안해룡 감독은 그 법정 투쟁기를 다큐영화로 만들기도 했다.(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2007년) 송신도 할머니의 상고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기각됐지만, 그 판결을 규탄하는 수요집회에 참석했던 송신도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노래를 불렀다. 송신도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던 현장에는 이용수 할머니도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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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가와다 후미코의 책(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안해룡·김해경 옮김, 바다출판사, 2016년)과 증언집을 참고했다. 송신도 할머니는 그나마 가시화된 피해자다. 물론 그 가시화는 정대협(지금은 정의연)과 일본 내 시민단체(앞서 말한 재판 지원모임 등등)의 도움 없이 불가능했다.

사실 아무리 비가시화된 피해자라고 해도 송신도 할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위안부 피해자의 개인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착취의 연속이다. 어린 시절에는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노동력을 착취당했고, 위안부로 동원돼서는 강요된 성노동의 대가까지 업자와 포주에게 착취당했다. 그럼에도 위안부 피해자 상당수는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배경과 위안부로 동원된 배경에는 우리사회의 여성차별과 창녀혐오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를 향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모든 위안부 피해자는 다중적 억압 구조 속에서 강요된 성노동을 해야 했고(성노동을 하지 않을 때는 여러 가지 잡일을 해야 했고), 그 다중적 억압 구조는 시대가 바뀐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나눔의집 운영진과 이사진은 위안부 피해자를 앞세워 막대한 후원금을 모았지만, 정작 그 후원금은 피해자들에게 거의 쓰지 않았다. 후원금을 피해자들에게 쓰는 대신 호텔식 요양병원을 지어 수익사업을 하려고 했다. 정치인과 유명인사는 국가기념일과 선거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위안부 피해자를 찾았다.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는 국가와 민족의 대의명분에 협조해야만 가까스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국가와 민족의 대의명분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위안부 피해자는 없었다. 간혹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유언은 한결같다. 부고 기사 속 그들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받지 못해서 원통하다는 식이다. ‘조선놈이 일본놈보다 더 나쁘다’는 말은 끝내 기사화되지 않는다.

이따금 나는 우리사회가 앞서 말한 업자와 포주보다 더 악랄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사회는 그들을 죽어서까지 착취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혹자의 말을 빌리자면, 단지 반성하지 않는 아베를 무릎 꿇리기 위해서. 그런데 그 아베는 조만간 실각할지도 모른다. 그럼 다음으로 누구를 무릎 꿇려야 할까. 텐노? 텐노가 무릎을 꿇으면 그 다음은? 다시 말해 이용수 할머니가 ‘이용만 당했다’는 말에 책임감을 느껴야 할 대상은 윤미향 씨와 정의연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목적에 맞게 위안부 피해자의 생애를 줄기차게 착취했던 우리 모두다.




471김희숙, Park Yuha and 469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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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hee Kim 읽다보니 눈물이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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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hee Kim replied · 3 replies


고지원 읽다 괴로운 마음에 잠시 쉬었다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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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이런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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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규 공유합니다. 친구신청 허락해 주심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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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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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Hee Yang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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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욱 다 지당하신 말씀이 맞아요
좀더 닭뇬때 아베합의할때 기자회견 했다면 진정성이 있지 않았을까 윤미향은 아무것도 없이 이일에 뛰어들어 이슈화 시켜 여기까지왔고 이제 더 큰틀을 짜기위해 국회의원에 입성 했다 좀더 지켜보면 더 앞서가지 않을까요 역사공부 관심 일도 없는 아베 아니 일본정권을 상대로 여기까지온건 윤미향을 비롯한 시민단체다 지금까지 달려온건 아무것도 아닌건가
벽을 상대로 싸우는 싸움이다 결과가 있는 싸움인가 …Se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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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jin Jeon 이념보다 정치보다 개인의 행복이 우선시 되는 세상이고 그런 시대에 살아 다행이라 생각했고 특히 색계같은 영화보면서 많이 생각했는데 현실은 이념이나 정치를 넘어서 알수 없는 알기 힘든 논리로 개인을 더 힘들게 하는 세상에 사는거 아닌가 싶은 슬픈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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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영 아아 샘. 너무나 필요한, 입체적인 글이에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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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최 보니까 짜증나네요(일본+정의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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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농구시합에 끌려가서 앵벌이하고오는중에 배고프니어디가서 맛있는밥좀사달라하니 윤미향씨가 돈없어요!라며 고갤돌려버렷다는얘길들으면서 가슴이먹먹해짐을느꼈네요..어떻게..밥한끼를사줄돈조차없었을까요..그렇게 앵벌이에끌고다니면서 할머니들은 무슨사연인지도모르고 끌려다니셨다는데..제때 식사도안드리고살았단얘기죠..그 봉투..다 어디다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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