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hee Kim
8 December 2018 ·
양반은 누구인가? (1)
지난 10월2일 포스팅에서 1600년대까지만 해도 양반들은 농장을 경영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음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생산활동에 나름 참여했던 양반들이 어떻게 비생산적인 계층으로 변모해갔을까?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주류 역사 담론, 특히 조선시대 후기 양반제가 붕괴했다는 한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1. '거꾸로 읽는' 조선시대
최근의 대중적인 역사 담론에서 논쟁거리가 된 핵심 이슈들은 주로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의 근세사를 다루고 있다. 일제 시대에 수탈당했는가 혹은 근대화가 시작되었는가? '건국일'은 언제인가? 박정희는 영웅인가 혹은 역사의 죄인인가? 지난 100여년 동안의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정파가 갈라지고 정쟁이 불붙었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이 역사 전쟁에서 조선시대에 관한 서사는 거의 쟁점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심한 역사 왜곡은 조선시대에 관한 역사 서술에서 일어나고 있다. 왜냐 하면 주류해석에 관한 학계의 비판조차 대중적인 역사 담론에서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신분제에 관한 서술에 있어서 대부분의 고등학교 교과서나 대중적 역사서는 천편일률적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 삼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심지어 상업도시가 성장하였으며 이로 인해 양반을 지배계층으로 한 신분질서가 와해되었다고 한결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가족과 친족문화에 관한 역사적 그리고 인류학적 연구들은 정반대의 역사를 보여준다. 즉 양반제는 조선시대 후기에 붕괴되기는 커녕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양반들은 향권을 장악하였고 그들의 권력은 때로는 왕권을 능가할 정도였다. 양반들이 지배계층이었기에 그들의 유교적 삶의 양식은 보편적 가치를 띠고 전 계층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일상적 관습의 유교화 그리고 양반화는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여 자본주의의 싹이 틔였다는 소위 '자본주의 맹아론'은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후진적이었던 조선의 상공업 수준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조선시대가 양반제가 동요되고 해체되어간 시기로 보는 주류 역사해석은 산업화되고 민주화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살아 숨쉬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조선 후기의 유교적 문화를 인지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조선은 18세기 이후에 이미 평등을 지향하는 근대사회로 이행하기 시작했고 작금의 한국사회가 서구화되고 민주화된 '시민사회'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예컨대 현대 한국 사회의 '시민단체'가 마치 서구 시민 사회에서 볼 수 있는 NGO (Non-Government Organization) 처럼 시민들이 중앙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율적으로 조직한 단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2.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가 있는가?
조선 후기 양반사회에서 유교문화가 정착해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에 양반계층이 지배계층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할 만큼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즉 조선은 망할 때까지 고도의 정착성을 특징으로 하는 농민사회였다. 나의 전공이 경제사가 아니기 때문에 주류이론을 반박할 자세한 통계자료는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상업도시가 성장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인프라의 구축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는도로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토목공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구한말 외국의 여행가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했던 것이 당시 우리나라엔 겨우 한 사람 정도가 걸을 수 있는 길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바퀴가 달린 운송수단도 사용되지 않았다. 생산물이나 상품을 유통시키고 보관하는데 쓰이는 거대한 창고도 없었다. 상업도시가 발달했다는데 서울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길거리는 오물로 가득찼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대규모로 생산물을 운반하고 유통했으며 대규모 인구이동과 인구집중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물적 증거가 없다. 도로도 없고 수레와 같은 운송수단도 사용하지 않았던 사회를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했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3. 직조와 염색기술의 쇠퇴
나는 오히려 조선시대 전기보다 후기에 상공업이 침체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한국의 복식사 연구는 직조와 염색기술에 있어선 조선 후기에 들어와 확실히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서구에서 산업혁명은 직물산업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에 직조와 염색 기술자들은 정부기관(상의원)에 소속되어 왕실과 양반 계층의 수요를 담당하였다. 조선 시대 전기에만 해도 국왕은 직조와 염색기술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우리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조와 잔인했던 폭군 연산군은 장인들의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중국에 보내 선진 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그만큼 기술자를 우대해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왕들은 사치금지령을 지속적으로 내리게 되고 고급직물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를 극도로 억제하였다. 1659년부터 1674년까지 재위했던 현종은 고급비단인 금을 제직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영조는 아예 고급견직물을 직조하는 사직기를 철거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숙련된 기술자들은 정부기관에서 퇴출되었고 직조와 염색업은 민간의 가내 수공업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이 과정에서 복잡한 기술이 필요한 고급 염직물의 생산은 감소하거나 중단되는 방향으로 변하였다. 이는 관영수공업에서 직조와 염색 장인들이 기술을 숙련하고 경험을 쌓아 고급직물을 생산할 수 있었는데 정부에서 사치금지라는 명분으로 생산과 소비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직조와 염색 장인이 일본에 고도의 화려한 염색기법을 전수해 준 것을 보면 임란 이전의 조선의 염색기술의 높은 수준을 유추할 수 있다.
직물 산업과 염색 기술이 조선 후기에 퇴조했던 것은 단지 예외적인 경우일까? 조선 후기에 상공업이 발달했다는 주장은 물품생산이 관영수공업 중심에서 민간의 가내수공업 중심으로 변화한 것을 도시 인구의 급증, 부를 축적한 상인계층의 성장, 대동법 실시로 인한 공인의 등장 등으로 소비 시장이 확대되어 생산이 활발해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직조와 염색 기술의 퇴조가 보여주듯이 정부가 극도로 소비와 생산을 억제하였기에 전문기술자인 장인들은 고급 생산 기술을 후대에 전수할 수 없게 되었으며 민간의 억제된 수요에 겨우 부응할 수준의 생산 만이 가내 수공업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이다.
(To be continued)
참고문헌
조효숙 1995. "전통염색과 한국 문양" 한국복식 2천년. 국립민속박물관.
250박정미, 李宇衍 and 24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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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beom Bae 박물관만 가봐도 컬렉션들의 퀄러티가 조선 중기를 정점으로 하락하는게 너무 눈에 보이지 않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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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Hong 다음 편 언제 나오나요!? 선생님..벌써 재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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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w Jinwoo Kim 음 최근 3~4년 사이에 새로 나오는 논문들은 선생님과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도 양반들이 농장을 크게 경영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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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2조선시대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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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hee Kim Andrew Jinwoo Kim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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