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에스토니아 국민이 1991년 8월 20일 구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사이트앤소울트래블]
1991년 8월 20일 새로 독립한 에스토니아는 북유럽 발트해 연안에 있는 인구 130만의 작은 나라이다. 수백 년 독립투쟁 끝에 ‘노래하는 혁명’(Singing Revolution)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한국인처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그들의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의 말을 사용하는 주위 유럽인들과 전혀 다르다. 에스토니아 민족은 핀란드 민족과 함께 고대 한국어와 동일한 문법의 언어를 사용한다.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 가장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민족이 가장 동쪽에 있는 한국말과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을까?
일할 때 함께 노래하는 풍습 비슷
성벽·적석총 무덤도 고조선 양식
아발족, 학살 피해 북쪽으로 피란
‘발족’ 정착 의미로 ‘발트해’ 명명
빗살무늬토기·아시아인 유골 발견
고대 한국어와 유사한 어휘도 많아
소련 등 지배 받다가 1991년에 독립 프랑코왕국 샤를마뉴 대왕이 아발제국의 개종을 거부한 이교도(단군 신앙)들을 학살할 때 이야기다, 796~799년 갑자기 사라진 아발족 가운데는 학살을 피해 추운 북방으로 피란한 사람들이 있었다. 필자는 이때 북방으로 민족 이동한 아발족 기병대와 그 가족이 에스토니아 민족의 직계 조상이라고 본다. 다음 몇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첫째, 유럽 학자들은 발트해의 ‘발트’는 이 지역 민족 이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자료에도 ‘발트족’이라는 민족은 없다. 그러면 발트는 무엇인가? 그것은 ‘발+트’로서 ‘발’이 민족이고, ‘트’가 지역이다. ‘아발’은 ‘대단’(大檀)으로서 ‘아(大)+발(檀, ‘달’로도 발음)’을 가리키는데, 이는 ‘발+족’으로 해석된다. 아발족이 이곳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아발족의 ‘땅’(터, 트로 변음)이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정착지를 ‘발트’(Balt)로 호칭한 것이다. 그에 따라 ‘발족’ 정착지의 연안 바다도 ‘발트해’(Baltic Sea)로 명명됐다.
리투아니아어에서는 ‘발트’를 지금도 ‘발도’(Valdo)라고 하는데, 역시 ‘발(檀)+터(地)’의 뜻이다. 아발족의 땅(Land of Avars)을 가리키는 것이다. 에스토니아 남부에 타르투(Tartu)라는 큰 주가 있다. ‘Tar’(檀)는 ‘Var’(檀)의 별명이므로, ‘타르투’는 ‘타르+투’로서, 역시 아발족의 땅이란 뜻이다. 에스토니아 도시 고유지명들인 ‘발가’(Valga), ‘바라’(Vara), ‘바이가’(Vaiga), ‘발마’(Valma) 등에 들어있는 ‘발’도 모두 ‘아발’을 가리킨다.
한국 강원도 춘천시 ‘중도 고조선’ 유적. [사진 한강문화재연구원]
둘째, 핀란드에서는 에스토니아의 ‘a’가 ‘i’로 모음 변이를 일으켰는데, 에스토니아의 나라와 민족 이름을 지금도 ‘비로’(Viro)라고 부른다. 이것을 에스토니아 모음으로 바꾸면 ‘바로’(Varo)가 된다. ‘로’는 ‘나라’를 뜻하는 고대어이다. ‘Varo’는 곧 ‘발족 나라’라는 뜻으로 ‘아발족 나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형제국 핀란드가 현재도 에스토니아를 ‘아발국’(Viro=Varo)의 뜻으로 호칭하는 것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셋째, 에스토니아어는 핀란드어와 함께 우랄어족 핀·우구루어파의 발트핀어군에 속한다. ‘우구르=아발’임은 전회에서 밝혔다. ‘핀·우구루어’는 ‘핀·아발어’와 같은 의미다. 에스토니아족이 아발족이라는 증거가 된다. 에스토니아어는 ‘주어+목적어+동사’의 어순이다. 교착어이고, 후치사이며, 아직도 모음조화가 남아있다. 한국어처럼 복모음이 발전되어 있고, 자음에서 f, z 발음은 없으며, 어휘에 복수형 어미 변화와 남녀 성별이 없다.
어휘에는 특히 고유지명에 고대 한국어와 유사한 말들이 많이 남아있다. 예컨대, 큰 마을(또는 읍락) 이름은 지금도 ‘OO마’(마을의 뜻)로 되어 있고, 언덕 취락지는 ‘OO메’로 되어 있다.
에스토니아 ‘발마’(Valma) 유적. [사진 한강문화재연구원]
넷째, ‘발마’(Valma, 아발 마을)의 한 무덤에서는 토기와 함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였고, 인골은 최신기술로 복원해 보니 ‘동아시아인’이었다. ‘에스티’(Eesti)라는 민족 이름 자체가 원래 ‘동방인’의 뜻이었다. 빗살무늬토기는 아발족 정착지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고대 또는 중세 초기에도 고조선 문명 후예 이주민 계통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널리 애용되었다.
다섯째, 고대 또는 중세 에스토니아인의 무덤은 원형 또는 직사각형 적석총이었다. 원형 적석총은 고조선 문명 무덤 양식의 하나이다. 평양 당모루 2호 유적, 최근 발굴된 한국 강원도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에서도 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 ‘발마’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와 동아시아인 유골. [사진 『에스토니아 역사』]
여섯째, 옛 성터가 약 120개 발견되었는데, 목책으로 마을을 울타리하고, 망루를 세웠으며, 둘레에 환호를 판 것이 전형적인 부여족·예맥족의 방식이었다. 마을 성문의 성벽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성벽의 특징인 ‘치’를 만들었다.
일곱째, 문화와 풍속으로는 음악과 노래를 매우 좋아했다. 중세 에스토니아인들은 ‘로루’(laulu)라는 합창을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일할 때나 축제 때나 ‘앞소리’가 먼저 독창을 하면 온 공동체가 따라 합창했다. 독창과 합창이 번갈아 나오는 양식이 마치 고대 한국의 ‘두레’ 합창과 같은 양식이다. 에스토니아 선각자들이 채집한 민요가 1917년에 1만4500여 수, 1940년에는 2만3800여 수 간행됐다. 1869년 타르투에서 최초의 ‘에스토니아 노래 축제’(The Estonian Song Festival)를 개최한 이래 5년마다 전국적 노래 축제가 열린다.
아발족 다른 한 갈래는 핀란드 정착 에스토니아 ‘발마’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와 동아시아인 유골. [사진 『에스토니아 역사』]
이 에스토니아 민족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의 본래 이름은 ‘발족’이었고 그 뜻은 아발족임을 살펴보았다. 796~799년 아발제국이 해체될 때 주력은 카프카스 지방으로 철수했지만, 다른 방향으로 민족 이동한 부대도 있었다. 일단의 아발족 기병부대와 그 가족이 피레네 산으로 들어가서 ‘바스크족’이 되었음은 이미 전회에서 밝혔다. 항복을 끝까지 거부한 다른 두 개의 아발제국 기마부대와 그의 가족들이 북쪽으로 피난해서 지금의 발트 해안에 도착했다. 그중 한 아발족 부대와 가족은 여기에 정착해 에스토니아 사람이 되었고, 다른 부대와 가족은 다시 바다 건너편으로 더 들어가서 지금의 핀란드와 카렐리아 지방에 정착한 흔적이 추적되고 있다. 핀란드는 지금도 ‘수오미아’ 라고 하는데 고조선어로는 ‘소택지’(沼澤地)를 ‘수오마’라 했다. ‘카렐리’는 ‘경작지’의 뜻이다. 수오미아와 카렐리아를 개척 주민은 동일 계통이다. 그들은 800~1200년경까지 중세 독립 국가를 세워서, 그들의 ‘고유 신앙’(교황청 종군 신부 헨리가 보고한 Tharapita, 즉 단군에게 비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철기로 농사를 지었고 목축과 수렵을 병행하며 살았다.
교황 이노센트 2세가 1199년 지금의 에스토니아 지역 이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십자군’ 파병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208년 독일 기사단이 에스토니아를 침략해 오태패(Otepää)를 점령했고, 덴마크 기사단이 사라마(Saarema) 섬을 점령했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약 20년간 항쟁했으나 1227년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여 북부는 덴마크, 남부는 독일 리보니아(Livonia) 기사단에 점령당했다. 에스토니아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당하고, 농노 상태에 떨어졌으나, 계속 토속 신앙과 고유의 언어와 민속을 유지하며 긴 식민지 백성의 생활을 보냈다. 덴마크, 독일, 폴란드, 러시아, 소련 등의 지배를 잇달아 받았다. 1920년 2월 2일 독립했다가 1940년에 다시 소련의 속령이 되었다. ‘숲속 형제들’(독립운동단체 이름)의 무장투쟁과 ‘노래하는 혁명’의 문화 독립투쟁 끝에 에스토니아는 마침내 1991년 8월 20일 독립국을 수립하여 지금까지 발전을 이어가고 있다.
‘노래하는 혁명’(singing revolution)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자 에스토니아 주민들은 198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이 조약 폐기와 완전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들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3국 수도를 연결하는 긴 도로에 600㎞에 달하는 ‘인간 띠’를 형성했다. 모두 200만여 명이 국가를 합창하는 모습을 보며 전 세계가 폭발적으로 환호하며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소련이 물러날 때까지 독립 쟁취의 노래를 계속했는데 이를 ‘노래하는 혁명’이라고 부른다. 1991년 8월 소련에서 정변이 일어난 기회를 포착하여 1991년 8월 20일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소련도 결국 이 독립을 추후 승인했다. 700여 년의 학대와 학살과 수모에 굴하지 않고 쟁취한 독립이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서울대 교수(1965~2003) 정년퇴임. 한양대·이화여대·울산대 석좌교수(2003~2018) 역임. 저서 『독립협회 연구』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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