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7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목소리 (1) | 제3의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목소리 (1) | 제3의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목소리 (1)
2020.05.160, 라이프/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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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 김영선

 

 

(여성가족부 홈페이지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총 38분의 증언으로, 위안부로 가게 된 부분에 대해 시리즈로 알아본다. 한국 인권뉴스 기사에서 발췌했다. 전문은 여가부 홈페이지를 참조하기 바란다.)

 

1. 이수단 (1921년생, 취업사기)
열아홉 살 때 나를 데려간 남자는 사오십 대로 보이는 조선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언니 집에서 처음 봤는데 나중에 내가 그 사람에게 480원에 팔려서 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주에 있는 공장에 가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나를 속여서, 돈도 주고 옷도 주고 할 것이라 하여 데리고 갔다.

 

2. 박서운 (1915년생, 취업사기)
만주에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닐 만큼 돈이 많다는 말을 듣고 돈을 벌기 위해 스무 살에 만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공장에서 일하거나 허드렛일만 하는 줄 알고 만주로 갔다. 훈춘에서 춘화까지는 트럭을 타고 왔다. 돌아가겠다고 하니 주인이 못 가게 하였다. 멋도 모르고 왔는데 위안소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위안부로 팔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김순옥 (1922년생, 취업사기)
신의주로 팔려가서 40대 주인의 양딸이 되었다. 거기서는 기생으로 등록하여 영업을 했다. 식구가 많아서 먹고 살기가 늘 힘들었다. 20살 때(1942년경) 다시 팔려서 중국의 동녕으로 오게 되었다. 어떤 조선 남자가 공장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여, 여자들이 한 30~40명 쯤 같이 가게 되었다. 그때는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갔다.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따라갔는데, 평양에서 기차 타고 중국에 목단강에 내리니까 일본 군인들이 막 우글우글해서 깜짝 놀랐다.

 

 



 

4. 김의경 (1918년생, 강제연행)
두 명의 일본 군인이 왔다. 거짓말로 ‘군인 나가자’라고 하며 데리고 나왔다. 기차역으로 가서는, 기차의 말 싣는 화물칸에 다른 8명의 여자들과 함께 실렸다. 여자들 중에는 경성의 여자도 있었고, 전라도와 경상도 여자들도 있었다. 그 여자들은 전부 잡혀온 여자들이었다.

 

5. 박차순 (1923년생, 취업사기)
빌린 돈이 쌓이게 되자 사장은 나를 경성에 있는 매춘업자에게 팔아버렸다. 경성에서 1~2년 정도 몸을 파는 생활을 했다. 이후 경성의 포주는 다시 중국으로 나를 팔아 넘겼다. 2~3일 정도 기차를 타고 중국의 동북을 거쳐 호남성으로 갔다. 호남성으로 갈 당시 나이는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나이였다. 그 때가 1942년 경으로 기억한다.

 

6. 현병숙 (1917년생, 취업사기)
중국에서 일본 놈들이 전쟁하는 데를 가면 돈을 곽 채로 모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소리를 듣고 15~16살 때(1934년), 박천 시내로 여자를 사러 온 남자에게 나 스스로 찾아갔다. 아버지를 설득해서 허락을 받고, 아버지가 계약서를 써 가지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도장까지 찍어서 넘겨주었다. 그리고선 3년 기한으로 3천 원을 받았다. 5~6명의 여자들이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왔다.

 

7. 김학순 (1924년생, 강제연행)
양부 밑에서 성장하다가 15세에 평양 기생권번에 다녀 17세에 졸업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영업이 불가하였으므로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북경 도착 즉시 군부대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다.

 

8. 문필기 (1925년생, 취업사기)
우리 마을에는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정도의 아저씨가 살았다. 어느날 그 아저씨가 나에게 말하기를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공부 시켜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승락을 했다. 그러나 부모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호되게 매를 맞을 것 같아 숨겼다.

 

그때가 내가 열여덟 살 되던 해인 1943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집안일도 고되고, 아버지가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게 하였으므로 집을 떠나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싶었다. 며칠 후 저녁 무렵에 그 아저씨가 찾아와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나오라고 해서 부모 몰래 나갔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짐 싣는 트럭을 세워 놓고 있었다.

 

9. 김분선 (1922년생, 취업사기)
만으로 열다섯 살 되던 해 (1937년) 마을의 소복란, 김보희라는 친구랑 셋이서 들에 나물 뜯으러 나갔다. 초봄이었지 싶다. 들에는 일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거기서 허우대만 커다란 우리 셋이 나물 뜯다가 대구로 붙들려 간 것이다. 왜놈인데 경찰관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인 듯 싶다. 짚새기를 신은 채로 붙들려 갔다.

 

일본 사람이 우리한테 “이런 것 하면 안돼. 옷도 고운 것 입고 공장에 취직시켜 줄게. 이런 나물 같은 것 안 뜯어도 된다.” 하면서 데려갔다. 부모님한테는 말도 안하고 나물 광주리 내버리고 그대로 갔다. 그 때는 나이 어려서 아무 것도 몰랐다. 우리끼리 “없이 그러니, 촌에 있지 말고 돈벌어 오자. 따라가서 공장에 취직해서 우리 돈 벌자” 그러면서 갔다.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건 지금도 기억이 난다.

 

10. 박두리 (1924년생, 취업사기)
나는 열일곱 살이 되던 해인 1940년에 끌려간 것이 분명하다. 어느 날 우리 마을에 남자 세 명이 왔다. 세 명이 흩어져서 따로따로 여자를 모집했다. 우리 집에 온 남자는 오십대로 보이는 키가 큰 일본 사람이었다. 이 일본 남자가 세 명 중에서 책임자로 보였다.

 

그는 조선말로 애기했지만 조선말이 똑똑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과 나는 그 사람이 일본에서 사는 조선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대만에 도착해서야 그 사람이 일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머지 두 명은 조선 사람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나를 일본 공장에 넣어준다고 말했다. 부모님도 의심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았다. 정말 돈을 벌러 일본 공장으로 가는 줄 알았더니…

 

11. 이남이 (생년미상. 훈할머니. ?)
집밖에는 여러 사람이 서 있었던 것 같아요. 군복을 입은 사람도 있고 일반 서민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고 일본 사람이 나를 부르러 왔을 때 어머니, 아버지 모두 집에 계셨어요. 아버지는 나를 부르러 들어온 일본 사람에게 일본말로 뭐라 했는데, 나는 우느라고 자세히 그 말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는 그 일본 사람을 몹시 무서워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했던 말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짐을 챙기라고 해서 나는 급하게 가방에 옷과 사진 몇 장을 집어넣고 따라 나섰습니다.

 

12. 문옥주 (1924년생, 강제연행)
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 해 늦가을 쯤 어느 날, 나는 하루코네 집에 가서 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나는 하루코네 집을 나서 우리 집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일본 군복을 입고 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 완장을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 사람은 한참 팔을 잡고 가다가는 나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간 곳은 헌병대로 생각된다.

 

13. 석순희 (1928년생. 강제연행)
그 때가 대동아 전쟁이 터졌다고 하더만. 열 네 살 때지. 그 때 뭘 알아? 아무것도 몰랐지. 마포구 공덕동 복사골 그 안으로 들어가면 큰 쌀 찧는 방앗간이 있어. 그 때가 가을이었을 거야. 초가을인지 그랬어. 동네에서 방송을 했는데, 복사골 큰 방앗간 앞으로 모이라고 하더라고. 몇 살까지 여자들 다 여기로 나와 봐라 하는 식을 했지.

 

그렇게들 나오라고 하니까 부모네들이 따라 나왔었지. 어떻게, 왜 그러나 하고. 그래서 나갔는디 동네 여자들을 나래비로(쭉 한줄로) 줄을 세워 놓고는 쌀가마 무게를 재는 저울에 무게를 달았어. 거기에서 무게가 좀 나가는 실한 여자들은 바로 트럭에 싣더라고.

 

14. 이옥순 (1927년생. 강제연행)
심부름 갖다 오다가 끌려간 거야. 뉘기도 몰라요. 긴데(그런데) 턱 끌고 가는 거 안 가겠다고 막 발버둥질 하니까, 쪼끔 가니까 트럭이 하나 있어. 그래 그 트럭에다 이래 톡 주서 올려놓고 우리가 쪼끄만 게 뭐 남자들의 힘을 감당해? 턱 들어 올려놓으니까 그저 그대로 가는 게.

 

그래서 거기서 내려 놔 달라고 막 소리치며 야단하니까 입을 틀어 막아. 입을 틀어 막으니까 뭐 말도 못하고 소리도 못 치잖아. 기런데 그 [트럭] 우엣 사람, 우리 같은 여자들 있는데 멫이나 됐는지도 몰라요.

 

15. 장점돌 (1923년생. 취업사기)
[부모님께는] 공장 간다고 얘기하고 [이모집에 가는데][영등포] 역전에 탁 내린께 어떤 남자가… 나를 어디 가냐구 그랴. 그래서 공장에 갈려고 그란다고. 그람 공장에 갈라면 우리가 공장에 [일] 보는 사람인께 잘됐다고, 공장에 가자고. 그래 데리고 가더니 산 언덕 있는데 쪼맨-한 집 있는데 고리 덷고 가더라고.

 

‘왜 공장에 덷고 간다더니 [여기로 왔냐]’ 밤인께 날 새가지고 가자고. 그래서 그렇게 된 거여 그만. [그 사람이] 일본놈인지, 한복 입었응께 알도 못하지. 난중에 보믄 군속, 군인 말고 군소꾸 있잖아? 그거 겉애, 옷 입은 거 본께. 뭐 한국사람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말하는 거 본께 일본 놈 겉기도 하고 뭐 알 수가 있어?

 

날샌께 인제 밥을 뭐 뭉텅이밥 갖다 주대. 그걸 먹고 있다본께 가자고 하더라고. 그래간께 차를, 그때는 기차 댕겼잖아? 기차 타고 만주 목단강이란 데서 내리는데. 만주 벌판에 집이 쪼끄만한 게 있어. 방이 요렇게 칸칸이 있더라고, 쪼맨-허게… 동네하고 떨어졌어. 아주 외따리여. 한 사람 딱 자기 좋[을]만하게 칸 막어 놓고서는… 기집애들 갖다 넣어놓고 인제 군인들 받는 [거야]… 군인들 덮는 담요가 하나 있었는데…

 

16. 정서운 (1924년생. 취업사기)
아버지가 창씨개명 그것도 안 하구… 그래하다가 왜놈들한테 밉뵈인 거다. 아버지가 뭣에 트집을 잡혔냐면 그때 놋그릇을 바치라 그린 기라. 그랬더니 아버지가 막 이장을 뭐라 하는 기라. ‘전세 다 빼서 가고, 인자 받아먹는 놋그릇까지 바치라고,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줄 수 없다.’ 그래가지고 주재소에서 왔어 놋그릇을 왜 안 받치냐구

 

‘이놈들아, 날 죽이고 가지고 가거라. 나는 그것을 줄 수 없다. 느가 가지구 가라 필수품 쓰는 건 모르겠지만, 그것 가지고 저 탄환 만들고 전쟁 도구로 쓸 물건을 와 우리가 주어야 되냐.’ 그래가지고 [아버지가] 우리 집에 일하는 사람들 데리고 논에 그걸 다 묻었어. 밤에 수십 줄로 파 가지고 논에 묻었는기라. 묻어 났는걸 누가 그걸 밀고를 했어.

 

그래가지고 아버지가 잽혀 간기라. 인자 얼마나 고문을 당했던지, 말도 몬해. 이장을 따라서 내가 면회를 갔는데, 아버지가 막 호통을 치는 거야. 네가 여기 올 자리가 아이니깐 다시는 오지 말라구. 인제는 와도 내가 보지 않을 기니깐 절대적으로 오면 안 된다구.

 

[아버지가] 손에다가 전부 붕대를 감았더라구. 저놈들이 얼매나 무서운 고문을 했는지 몰라. 그래가지고 (말을 잊지 못하다가) 메칠 후에 이쟁이 와 ‘아가씨, 일본에 센님바리 맨드는 공장에 가서 한 일 년 아니 이 년 내지 이 년 반만 고생하시고 나오시면 됩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가는 날 아버지가 풀리 나온다 이기라.

 

그걸 믿었지. (한숨섞인 목소리로) 아이고 그래가지고 내가 자청을 해 갖구 간 기라. 공장에 가서 이년이나 이년 반 고생하면, 내 고생하고 나오면, 우리 가족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긴데 내가 그걸. 열 네살에 잡혀가서 동짓달에 갔어.

 

17. 최용순 (1929년생. 강제연행)
동네마다 일본 사람들 앞잽이가 있어요. 일본 애들하고 친해 가지고 막- 정보하는(정보를 알리는) 애들이 있었는데, 이웃집 오빠가 나한테 잘하고 나도 그 오빠를 따랐는데, 우리 엄마는 싫어했어. 일본 놈 앞잽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알았는지 어쨌는지, 순사가 와서 그냥 붙들어 갔어. 거기서 안 왔으면 난 붙들리지 않았지.

 

집에 왔다 그 이튿날 갔어. 바깥에도 안 나갔는데, 어떻게 알구 왔어. 순사가. (순사는) 한 사람. (손으로 칼 찬 시늉을 하며) 막 칼 이렇게 찼어. 칼이 아휴 말도 못해. 그때는 일본놈이라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한 사람씩 끌어서 대전으로 보내는 거야. 그때 밤차로 갔는데, 대전에 가니까 애들이 있더라구, 한 여남은씩. 근데 거기서 밥을 멕이더니, 바로 [기]차를 타구 가더라구, 가니까 부산이야. 난 그때까지 부산이 어딘지 몰랐어.

 

그때는 손님 타는데 안 타고 막 저거야. 이런 하꼬차야(화물칸). 그렇게 맨날 탔어. 인솔자가 있어서 가지구(데리고) 갔지. 그때 인솔자가 일본 놈도 하나 있었구, 한국 놈도 하나 있었구 그래. 군인이구 군복 입고 그러지 않구, 민간인이었어. 군인은 군복을 입는데 군복 안 입었더라구.

 

겁나구 죽으러 가는 줄 알았지. 벌써 일본 놈한테 붙들리면 죽는다 거, 죽으러 가는 건 줄 알고 도망 다녔지. 죽으려는 거 알구 그냥… 그놈들 하라는 대로 해야지. 일본놈들 빽 있는 놈들은 안 잡아갔어. 지방 시골에서는. 면장딸은 안 잡아가요, 그 때도. 면장딸도 나랑 한동갑인데 걔는 안 가고, 붙들려두 안 가구, 걔는 도망도 안 다니구.

 

18. 곽금녀 (1923년생. 취업사기)
나는 14살 때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일본 놈의 집에 들어가 아이보개와 청소부로 일하다가 다시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돌아와 전라남도 광주제사공장에서 일하였다.

 

내가 17살 잡히던 해 1939년 10월이라고 기억되는데 갑자기 감독놈이 12명의 녀공들이 있는 호실에 들어와 나와 김덕녀, 리춘심을 불러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사무실에는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얼굴이 고운 처녀애들이 15명 정도 모였다. 감독놈은 우리들에게 《래일 더 좋은 곳으로 가게 되니 갈 준비를 잘하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15명의 처녀들은 일본놈에게 이끌려 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에 도착하여 우리 일행은 서울 영등포 방직공장에서 온 5명의 처녀들과 함께 서울 시내 어느 한 려관에서 하루밤을 묵게 되였다. 이때 나는 서울에서 사는 언니를 만나보고 오겠다고 일본 놈에게 별의별 사정이야기를 다했으나 끝내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우리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중국의 목단강에 갔다. 목단간에서부터는 누런 덮개를 씌운 군용차에 갈아타고 긴 칼을 찬 일본군대의 호송하에 가게 되였다. 우리를 데리고 간 일본 놈은 군용차를 타고온 일본군 대장교에게 명단과 함께 우리들을 넘겨주었다.

 

19. 김영숙 (1927년생. 취업사기)
10살답이였던 나는 지주의 셋째 첩네 집에 몸종으로 팔려갔다. 날이 밝으면서 시작되는 지주 첩년의 욕설과 매질은 밤하늘에 별이 총총할 때까지 계속되였다. 자는 시간을 내놓고는 내 얼굴에서 눈물이 마를 때가 없었다.

 

몇해가 지난 어느날 이집에 일제 순사놈이 찾아왔다. 때없이 드나들면서 셋째첩과 치근덕거리던 놈이였다. 년놈이 오래 동안 방안에서 쑤근거리더니 지주첩이 나를 불렸다. 내가 방안에 들어서자 일본 순사놈이 “이 집에서 고생하지 말고 잘 먹고 잘 입고 뭉치돈을 벌 곳이 있으니 가자”고 하는 것이였다.

 

지주첩의 몸종으로 시달려온 나는 돈도 벌고 잘 먹을 수 있다는 소리에 그 놈을 따라 나섰다. 그때 내 나이는 13살이였다. 그놈과 함께 기차를 타고 며칠을 갔다. 기차에서 내려 마차를 탔다. 마차에서 내리니 누런 군복을 입고 뺄건 장화를 신은 일본군이 욱실거릴 뿐 사민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데리고 온 순사놈이 일본 장교에게 나를 인계해 주었다.

 

일본 장교놈은 나를 긴 단층집으로 데리고 갔다. 가면서 보니 단층집 주변의 5메터 높이의 담장 우에는 가시철조망까지 늘어져 있었고 총을 멘 보초가 개와 함께 곳곳에 서있었다. 13살 철부지였던 나는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면서 천진난만하게도 잘 먹고 뭉치돈을 벌 수 있는 곳에 온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20. 김영실 (1924년생. 취업사기)
우리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5명의 자식(아들 2명, 딸 3명)들이 있었다.아버지는 늘 병석에 있고 어머니가 벌이를 하여 우리들을 먹여 살렸으므로 우리 집은 매우 가난하였다. 내가 13살 때 살아가기가 너무 곤난하여 부모들은 나를 회령에 있는 삼촌 어머니에게로 보냈다.

 

그러나 내가 회령에 갔을 때 삼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빌어먹기도 하고 남의 집 심부름을 해 주고 얻어먹기도 하였다.

 

내가 18살때였다. 하루는 양복을 걸친 일본인이 나에게 좋은 일자리를 구해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무슨 일자리인지는 몰랐으나 빌어먹기보다는 나으리라 생각하고 그를 따라갔다. 어느 한 장소에 가니 내 또래의 소녀들이 수십 명 정도 와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화물차에 실려 회령 철도역으로 갔다.

 

우리가 렬차를 타고 내린곳은 함경북도 경흥군(오늘의 은덕군) 청학동이였다. 거기서 또다시 화물차를 타고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 가서 내렸다. 거기는 17~18살쯤 되는 소녀들이 이미 10여명 정도 있었다. 일본군은 우리들을 나무판자로 된 집으로 안내하더니 매 방에 한 명 씩 들어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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