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목소리 (2)
2020.05.260,
¶발췌 : 김영선
(여성가족부 홈페이지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목소리”가 실려 있다. 총 38분의 증언으로, 위안부로 가게 된 부분에 대해 시리즈로 알아본다. 한국 인권뉴스 기사에서 발췌했다. 전문은 여가부 홈페이지를 참조하기 바란다.)
21. 강길순 (1909년생. 강제연행)
당시 일본 정부는 관권과 군권을 발동하여 조선녀성들을 강제로 련행하였다. 1909년 전라북도 김제군 백군면 소승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난 나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마을 구장놈을 앞세우고 마을에 나타난 칼 차고 총을 멘 일본군대놈의 손탁에 걸려 영문도 모르고 잡히게 되었다. 짐짝처럼 풍친 화물차에 실리운 나는 거기에서 내 또래 처녀 20여 명과 함께 부산까지 실려갔다.
22. 로현화 (1922년생. 취업사기)
내가 5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외독자이다 보니 친척들도 없었다. 우리 모녀들은 얼마 안되는 밭을 가지고 농사도 짓고 가마니도 짜서 파는 등 아득바득 일하였으나 도저이 가난을 이겨낼 수 없었다.
내가 18살때인 1940년 10월이었다. 우리가 사는 지사리에 있던 지주(별명 텔레)가 한 일본인(이름은 모르겠으나 검은 옷을 입고 머리는 빤빤히 깎음)과 함께 집에 찾아와 밥벌이가 좋은 데가 있으니 일본 사람과 함께 보내자고 꼬이였다. 어머니가 못보내겠다고 하자 일본인은 발로 어머니의 얼굴을 걷어차고 나를 강제로 화물차에 태운 다음 평양역으로 끌고 갔다.
23. 박영심 (1921년생. 강제연행)
1938년 3월경 나는 일제의 ‘처녀공출’에 걸려들었다. 검은 제복에 별을 두 개 달고 긴 칼을 찬 일본순사놈이 내가 일하던 후포동에서 나와 함께 22살 난 처녀(도미꼬)를 평양으로 강제압송하였다.
평양역에 도착하니 이미 15명의 조선녀성들이 끌려와 있었다. 내가 다른 녀성들과 함께 유개화차와 자동차를 타고 처음 끌려간 곳은 중국 남경이였다. 남경에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는데 그 병영에서 약 500메터 떨어진 곳에는 금수로 위안소가 있었다.
24. 이상옥 (1926년생. 강제연행)
내가 13살 나던 해에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보국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우리 3령제는 제각기 헤여져 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나는 겸이포에 있는 구장놈의 집에 아이보개로 들어갔고 오빠는 남의 집에 소몰리군으로 들어갔으며 언니만이 혼자 집에 남아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그날그날을 연명하며 살게 되었다.
내가 17살 나던 해 어느날 동리구장이 처녀공이라고 하면서 나와 한 동리에 살던 탄실이와 금녀를 겸이포 역전에 끌고 갔다. 역전에는 우리 또래 처녀들이 15명 정도 와있었는데 야시다라는 긴 칼을 찬 일본군대놈이 나타나 우리를 모두 군용차에 타라고 하였다.
25. 황금주 (1922년생. 취업사기)
나는 공부해야 할 그 집 딸들이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또 200원의 빚도 갚고 싶었다. 일본의 공장에 가서 3년간 일하면 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양모는 매우 기특히 여기면서 3년만 잘 갔다가 오면 좋은 곳으로 시집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내가 스무 살(1941년) 되던 음력 2월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두 명이 갔다. 반장 부인이 모일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알려 주어서 그 시간에 함흥역으로 갔다. 함흥역에 나가보니 여러 군에서 모인 여자들이 20명 쯤 되었다. 나이는 대개 열 대여섯 살로 내가 가장 많은 편이었다. 떠날 때 송별식은 없었고, 배웅나온 가족들이 많았다. 역에서 50대의 조선 남자가 우리 일행을 인솔해서 일본인 군인에게 넘겼다.
26. 이용수 (1928년생. 취업사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 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27. 문옥주 (1924년생. 강제연행)
1940년에 나는 만 열여섯 살이 되었다. 그 해 늦가을 쯤의 어느 날 나는 하루코네 집에 가서 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나는 하루코네 집을 나서 우리집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일본 군복을 입고 기다란 칼을 차고 왼쪽 어깨에 빨간 완장을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갑자기 내 팔을 끌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하였다. 당시는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하던 때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 사람은 한참 팔을 잡고 가다가는 나를 앞세우고 걸어갔다. 간 곳은 헌병대로 생각된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일본군복을 입은 남자는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는 우리를 력전으로 데리고 가서는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28. 강순자 (1922년생. 강제연행)
일본군인이더라. 군인이 여 [어깨에] 별 달고, 칼 차고 모자 씨고. 그래, 내가 누구세요 이란께네 ‘아가씨, 나 좀 봅시다.’ 이래. 그 때 옆에 사람은 한국 사람이데. 왜 그라는데요 이란께 ‘아가씨들, 한국에서 고상하지 말고 좋은 데 취직시키 줄 낀께네, 우리 따라가자.’ 이기라.
좋은 데 취직시키 줄꾸마 카드라. 아가씨들한테 해롭게 안 합니더. 우리가 공장을, 큰 공장을 채맀는데 사람 몇 사람을 더 구해야 된다쿰서로. 옷 맨드는 공장이라쿠데. 그 뭐 [어떤] 일하는 거[까지] 옳게 가르켜주나 오데. 그래, 내 [옷] 맨들 줄 모르는데 쿠니까 가서 배우면 된다 이기라. 첫 먼제(첫 번째)는 모른께네 갈켜주는 사람있다 이기라.
안 됩니다. 나는 샘에 물 질러 와가지고 이거 부모님 말씀도 없이 갈 수 없습니다 이칸께, 마 무조건 추럭에 올리는기라, 추럭에. 내 뭐 힘이 있나. 추럭에 올맀지.
29. 공점엽 (1920년생. 취업사기)
그렇게 말 통해 준(통역 해 준) 사람 한나하고, 이장하고 그렇게 왔던 것이여. 그렇게 어떤 사람들이 뜬금 없이 들어옴시롱 일본 가믄은, 비단 짜는 공장으로 가믄은 비단 짬시롱 겁-나게 돈도 잘 벌고 펜하고(편하고) 좋고 귀경도 좋고, 돈도 많이 벌어서 집에다가 부모한테다 부쳐주믄 부모들이 논도 사고 밭도 사고 그래논닥하고.
그 사람들 말을 들어보믄은 그럴 듯 허거든. 인자 우리가 곤란하기나 하고 그란께 일본으로, 비단 짜는 공장에 가믄은 얼른 돈 쪼깐해서 부쳐주믄 부모들이 쪼깐 살것다….나는 그래도 암만해도 못 갈성부러. 거 가 어디라고 거기를 가냐. 또 내가 그런 말(일본 말)이라도 안단말이제. 암만해도 못 갈성부런께 쮯밋쮯밋하고….
‘암만해도 나는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못 하것는디라우’ 한께, 아부지가 있다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그-까지것 눈으로 보믄 알제. 보믄 배와서 하제 뭔 뱃속에서 배와갖고 나오냐?’ 그람시로 남도 간닥한께 가제. 가서, 그런디라도 들어가서 그런 것이라도 배와 갖고 돈벌이도 하고 그라제 집구석에만 자빠졌을라냐고. 그라고 또 미운 소리하고 그랬쌌기나 하고.
아부지가 그렇게 미운 소리하고 지천(야단)을 할즉에 ‘아이고- 아부지 나 죽어도 갈라우. 갈라우. 가서 죽더라도 내가 가제 어째라우,’ 그라고 내가 따라간께 곁에 [따라온 한국] 사람들이 절-씨구나 하고 급살맞어(너무 좋아해). 일본 사람은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그때 열 여섯 살에 갔응께.
30. 길원옥 (1928년생. 취업사기)
아버지 가막소(감옥소) 벌금이 그때 돈으로 이십 원인지 얼마인지 그런 말이 있었나 봐요. 그러자 내가 벌어서 갚는다고, 우리 집에서 몇 집 안 걸려서 푸줏간이 있었는데 그 집에 돈으로 이십 원에 나 사가구 우리 아버지 빼달라고 그랬갔지.
그 이십 원을 가지고는 아빠를 데려 내올 수 있다 생각을 해서람이 권번에 그 사람(권번 넣어 준 사람)이 [학비] 내준 것도 안 댕기고 나와서 돈 번다고 하다가 친구 소갠지 누구 소갠지 모르지만 하여튼 간 거 같애요. [푸줏간 아주머니]를 통해서 팔려간 건지 그냥 어떻게 해서 간 건지 모르지만 하여튼 확실하게 기억하기는 열세 살이거든요. 열세 살인데 만주로 갔거든, 두만강 건너서.
31. 김말순 (1928년생. 강제연행)
어른들은 집에 없거든. 우리 집이 쪼끔 외따리 있어요. 일본 사람 하나 오고, 우리 나라 사람이 하나 오고. 그래해 가지고 칼 찬 놈(순사)이 하나 오고 또 누런 옷 입은 사람(군인)이 하나 오고 이랬지 뭐. 무서워서, 아이고- 칼 찬 사람만 보만 무서워서 벌벌 떠는데 막 숨고 막 그랬는데 그 때는. 순사를 영 무서버 했거든요.
어디를 간다고 첨에는 막 그 사람들은 말 안하고 이장이 말하기를, 비(베)도 짜고 이런 데 간다고 그러대요, 천 짜는데 그런데 간다고. 우리는 뭐 하는지도 모르지. 그 때는 어린께, 나(나이)도 어린께. 십 육세 되는, 열 여섯 살에 갔다.
32. 김봉이 (1927년생. 강제연행)
열 여섯에 갔던가. 봄에 갔을 것인디. 다 잊어버려서 봄에 갔을 것이에요. 내가 여기서 일본 가기 전에 아버지하고 나하고 같이 살았어요. 어머니 에려서 조실부모 잃어버리고, 일본 갈 때 아버지하고 나하고 우리 작은오빠 하나하고 같이 살았거든요
내가 영장이 나왔어요, 그 때. 일본가라는 영장 통지서. 통지서가 나왔는디. 도망 댕기고 숨어 댕기고 그러다가 장성 가서 잽혔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일본사람보담 거 일본놈 앞잽이 조선사람, 그 사람이 겁나게 나쁜 사람이에요. 그 놈들이 더 지랄혀요. 더 지랄혀.
빨간 딱지든가 노란 딱지든가 나왔어. 일본 모집, 공장에 [라고 써 있었어].[딱지에] 써진 것은 위안부 공출하믄 거슥허제. 그런게 놈들이 헌단 말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나왔다, 근게 오메 정신대 공출 나왔네, 모다 그랬제. 그런게 그냥, 옆에서들도 그냥 [여자들을] 숨겨 놓으면 딱 소리도 없이 싹 [잡아갔지].
33. 김순악 (1928년생. 취업사기)
[나를] 소개소로 갔다 줘 가지고 서울서 색시 가지러 온 사람들 생[색시] 사러 온 사람들이, 그 사람이 또 돈 주고 우리를 사 가지고 가는 기라, 말하자면. 그래서 서울서 우리가 몇 일 있으끼네이 우리가 안 팔리 나가이, 워낙 시골뜨기다 캐노이께네이 안 팔리 나가는 거, 옷도 우린 워낙 남루하게 입어 놓으께네이 그 소개소서 옷 해 입히고 업자가 돈을 더 비싸게 받는 기라 우리를 갖다가…
그리 팔아 무졌는거(버려 졌는거) 같애. 어디로 데리고 왔는지 어데로 데리고 갈란지 다 모리는 거지. 위안부라고 그 주인들[이] 다 위안부[라고 부르대]. 옷 참하게 입히 가지고 팔리 나가게끔 일본에도 보내고 하루삔도 보내고 그래 인제 어두루 보내고 남았는 거는 서울시내 팔리 나가는 거는 또 팔리 나가고 …
한 이십 명 되었다. 그때 우리 갈 직에도. 어디로 간다 카는 거 우리가 아무 꺼도 모리는 거이야. 저거(소개소 업자들) 돈 벌기 좋은 데는 그렇케 팔아 묵는 갑다 이말[이지]. 그이 우리는 모리고 인자 그래가 따라 갔는기다 이 말이야. 가보니 군인, 군인 상대하는 데라.
34. 김정덕 (1923년생. 강제연행)
둘. 일본 놈 헌병 하나, 한국 사람. [조선사람은] 국방색 단꼬바지를 입었더라고요. 왜 인민군대 바지 같은 거 있죠? 그런 식으로 된 바지를 입었더라구요, 누런 거. 그러니까 긴 칼을 찬 헌병이, 요기 하얀 데다가 빨간 헌병이라고 써 가지고. 일본말로 ‘야, 일루 와 봐’ 이러더라구요. 그 때 옛날에는 일본사람 다 겁내 했어요.
잡혀갈 때 그러니까 나 하나밖에 없었어요, 나 잡아 놓은데. 사흘 가서 나를 감금시켜 놓고, 다다미방에. 나가지도 못하고. 도망갈 수가 없고, 눈이 부슬부슬 오더라구요. 그니깐 나는 소리도 못 내고 자꾸 눈물만 흘리고 내다보고 있다 보니까, 사흘 되던 밤에 나를 역전으로 데려가는 거 있죠. 차 태워가지고. (19세에 연행)
35. 김화자 (1926년생. 취업사기)
[일본순사 두 사람이 와서] 쫌 볼 일 있다고 오라 그래. 글때는 일본사람도 조선말 마이 했대, 한국에 있는 사람은 좋은 일이 있으이까네 가보자, 가보자 그래가 갔지.
[일본 순사가] ‘저 해따이상(일본군인) 옷 하는데 미싱도 배우고 하면 돈벌이도 좋고 가마이 짜는 거 보다 낫다’ 그카대, 그라면 돈으로는 [집으로] 부쳐주냐꼬 물었지, 내가. 그라이까네 [일본 순사가] 달달이 월급 받으면 집으로 붙여준다고 그라대. 그래 나도 ‘하이구- 그라면 마 쫌 사는 게 안 낫겠나?’ 내 속으로 그렇터라. 그래가 [일본 순사가] ‘집에 가가 있으면 그래 연락할게’ 그러[더라].
그러이 뭐 집에 가가 있었지. 있으이까네 그래 안경쟁이 [김씨가] 와 가지고 ‘해따이상 옷 해주는데 미싱하는데 가면 좋다’고 가야 된다 이카대. ‘가야 된다커면 가야 안되나’ 내가 이카고 있으이까네 그래 엄마도 ‘아이고, 저거 가는갑다’ 이래 생각하고 그래 이틀저녁 집에서 자고 그래 갔지. (17세에 연행)
36. 노청자 (1920년생. 강제연행)
그러니까 내가 그때 열 일곱 살인가, 열 여덟 살 먹었나? 농촌에서 밭농사도 짓고 하잖남. 여러 명이 일꾼들 하고 퍼뜩 밭을 메는데, 누-렇게 입은 놈들이 네 명인가 다섯 명인가 올라오더니. 그 놈들 눈깔 딱지도 용하다고 그랬어. [처녀를] 잘 알아 글쎄. 밭을 메는데, 아 느닷없이 쏼라 쏼라 하더니, (혼잣말로) 기가 맥혀. 이 놈들이 와서 끌어가 막.
사람 살리라고 나는 소리소리 지르고, ‘워쩐 도적놈들이 데려간다-’ 그러니까 밭 메던 사람들이 아이구 쫓아 오면서, 막 소리를 지르면서 호미만 들고 쫓아오지. 이 놈들이 막 끌고 가니께 당할 수가 있나? 어떡해, 말도 모르고. 그래 뭐 아무리 조선말로 욕을 하고 악담을 해야 알아들어야지 뭐. 말을 모릉께. 서로가 그렇지 뭐. 그래서 그 때 끌려갔었어 내가.
거시기 일본 놈들, 그러니께 헌병대. 여기 형사나 마찬가지야. 순사 보담 좀 높다는 놈들이지. 끌려가서 뚜껑 없는 기차, 그냥 한 차로 싣고서 갔지 뭐. (18세에 연행)
37. 박송자 (1921년생. 취업사기)
저[상하이로] 갈 때는 붙잡혀 안 갔지 싶으다. 우리 자유로 갔지 싶으다. 우리 친구들하고 우리꺼정 놀았다카이. 친구하고 같이 너이서 살았지 싶으다, 살림하고. 신랑 얻어가. 두어 해 있었지 싶으다. 그 때 유람선을 타고 갔는동. 그 남자들은 거 상하이에 가자카대이.
[같이 산 남자는] 건달이지 뭐. 남자 뭐 건달같이 춤이나 추러 댕기고 하는데 뭐 우예 사노? 아무것도 없는데. 뭐 선나(조금) 벌어가 무울(먹을) 때도 있고 안 물때도 있고. 거(상하이) 있다가 … 이 사람도 헤져뿌고 저 사람도 헤져뿌고.
촌구석 남자들이 가자케가 따라갔는 게지. 그라다가 인제 상하이서 좀 더가가, 저저 촌에 갔지. 군인들 [성기가] 뻘떡 뻘떡 뻘떡 긋는데(그러던 곳).
남자들이 가자케가 따라갔는 게지 뭐. 내나 군대고. 거는 참말로 총소리 났다. [가자고 했던 사람이] 일본사람이지 싶으다. 그 때 [위안소로 가는] 사람들 많았지. 자꾸 사람 모두테(모으더라). 그 사람들이 들고 가이 위안부지. 가가주고는 참 일본 군인인데 아다리 되가…. 돈번다 크이 [위안소에] 갔지. [그런데] 돈이 안 벌이키더라.
38. 박화자 (생년미상. 취업사기)
열 일곱 살 먹을 때 ○○ 가서 저 거시기 삼촌네 집 갔는디, 애기 잔 봐주라하데. 긍게 애기보러 간다고 갔는디. 군인들 양복 맨드는 데 가면은 돈 잘 벌으고 편하다고, 그래서 따라갔어. 한번에는 시장에를 갔어, 갔는디, 나보고 잉, 어떤 청년이 그라데. 군인들 양복 맨드는데 가면은 돈 잘 벌으고 편하다고, 그래서 따라갔어. 그래 따라가버렸어.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이 막 델고 갔제. 그런 사람있드만 사람 구하러 당기고. [그 사람] 한국말을 하제. 그라면은 양복, 뭔 양복을 한다냐 그란게, 국방색으로 양복 해 갖고, 하면은 그런 데[에]가 있으면은 돈을 겁나게 번다고 그래.
그랄 때는 아-조 그냥 아그들이 어디 나간 것만 좋아했어, 어디 나가믄 돈 번다하드라, 뭐 방죽(방직)회사가믄 돈 번다하드라. 우리 동네에서 또 한나 갔다오기도 했어, 방죽회사. 거 갔다온게 낯부닥이 촌에서 일하다가 인자 거그 갔다온게 허-하고 좋은게 이들도 갔다오믄 저렇게 허-하고 좋것다하고 모도 그랬제잉. 그래 갖고는 거기 따라 가 갖고는 군함타고 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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