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미
탄핵 심판정에 새로 뜨는 별
지난해 12월 3일을 기점으로 나라에 큰 장이 섰다. 역사의 장이 섰다. 장마당에는 대통령 탄핵 심판정이라는 큰무대가 가설되고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열전을 펼치고 있다.
그 어떤 영화와 TV드라마도 이 정도 흡인력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이 벌이는 뜨거운 설전은 방송사의 실황 생중계는 물론이고 수많은 뉴스와 유투브로 가공되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홍장원 전 국정원 제1차장이다.
대통령 탄핵의 요건사실을 입증 혹은 반박하기 위해 수많은 고위급 증인들이 등장하여 증언을 쏟아내고 있지만 홍차장만큼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이는 없다. 심판대에 오른 피청구인 윤대통령으로부터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도 홍장원 차장이다.
그는 이 희대의 역사실황극에서 처음에는 조연급으로 등장했지만 점점 태풍의 눈을 몰고 윤석열에 버금가는 주연급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탁월한 언변과 신선한 캐릭터로 많은 국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홍차장의 놀라운 상황 기억력과 말솜씨이다. 자신이 겪은 문제 상황에 대해 객관적 사실과 심리 관찰을 절묘하게 직조해내서 명료하게 전달했다. 분 단위로 선후관계를 맞춰 대통령과 국가정보원장과의 전화 및 대면 기록을 복기하여 설득력을 보여주었다. 이 정도 두뇌게임은 해낼 수 있어야 국정원 1차장이 될 수 있는 모양이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첩보작전 이행하듯 자신의 행적을 관찰, 점검하고 그것을 논리적인 말로 풀어낼 수 있는 인물이다.
두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단정하고 정돈된 외모와 얼굴, 그리고 예의바른 태도와 신중한 자세이다. 그는 심판정에 입장했을 때 대척점에 선 윤대통령에게 두번이나 허리 굽혀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물론 윤대통령은 고개를 돌려 생깠다). 윤석열측 대리인인 김계리 변호사의 맹렬한 안하무인격 추궁에도 냉정을 잃지 않고 “저기 변호인님, 제가 피의자로서 검사에게 조사받는 거 아니잖습니까. 저는 증인이잖아요.” 라고 조용히 응수해서 말문을 닫게 했다.
그리고 세번째, 특기할만한 것은 그가 지금까지 우리 정치권에서는 희귀종이라 할 수 있는 품격있는 보수의 진면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대통령의 신임과 기대를 끊고 원칙을 지켜 선을 넘지 않아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저 대통령 좋아했습니다. 시키는 거 다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단(방첩사 체포명단) 보니까, 그거는 안되겠더라고요.”
보수의 쿠데타라는 말은 그 자체 내적모순으로 붕괴되는 말이다. 요건에 맞지 않는 계엄령으로 무언가를 획책한다는 것은 보수답지 않다. 진정한 보수에게 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정변과 쿠데타를 감행하는 세력은 보수가 아니라 극우라고 불린다.
홍장원차장은 체포자 명단을 받아적다 말고 "미친 놈이로구나." 라며 윤대통령 주위에 소용돌이 치는 쿠데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진짜 보수의 정신이 몸에 배었고 상황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의지적 결단력이 있음을 증명해내었다.
수많은 어록과 숏폼으로 그의 말이 회자되고 있는데, 나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온 것은 최근 인터뷰에서 8차 변론기일 당시 대통령과 국정원장의 발언을 평가하면서 나온 말이다.
“세상의 모든 부분이 사법적인 잣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공직에 있으면 공직의 윤리가 있고, 인간이면 인간으로서의 어떤 가치가 있는 부분인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의 기존에 생각했던 것들이 다 무너져내린 것 같습니다.”
이 말 끝에서 그는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그 상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토로했다.
대통령뿐만 아니다. 역사의 장에 설 수 있는 고위직이라면 시정잡배와는 다른 책임감과 공심이 있어야 한다. 제일 안 좋은게 시정잡배보다 못한 소리를 하는 것, 제 살자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계엄을 해서는 안되었지만 이왕 일을 저지른 후에라도 거짓말만은 해서는 안되었다. 해임되기 전 홍장원이 윤대통령에게 건의했던 바, “진솔하게 국민에게 사과하고 왜 계엄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사정을 말씀드리면 국민들이 훨씬 더 대통령을 이해해주실 것이다.”가 정답이었다. 이것이 대통령의 품격이고 진보/보수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품격이다.
그리고 윤대통령이 국민들 속에 보수를 살리고 자신도 역사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2025년 탄핵심판정에 홍장원이 등장한 모습을 보면 35년전 5공청문회를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노무현이 떠오른다.
88년 국회청문회 당시에 일개 초선의원이었던 노무현은 정주영 당시 현대회장과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용감하게 대들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주목을 받았다.
홍장원차장도 자신의 원칙과 국가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과 직속상관인 조태용 국정원장에 맞서면서 역사와 공론의 장에 오르게 되었다.
노무현대통령은 뜨거운 경상도 시골남자의 순박함과 의기로 진보적인간의 진정성을 표상하는 인물로 우뚝섰다. 한 세대가 지난 후 홍장원차장은 차가운 도시남자의 명철한 논리와 믿음직함으로 보수적인간의 품격을 표상하는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외모와 말투, 이념적 지향성에 있어 대립되어 보이는 두 사람에게는 그러나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원칙과 상식에 충실하게 살아온 결과 역사의 장으로 나서게 되었다는 것, 그 시대 가장 쎈 사람들과 붙었다는 것, 그리고 합리적 정신과 언변으로 붙었다는 것이다.
나 같은 시골출신들은 반듯한 외모에 자제력이 강하고 말이 너무 번드르르한 도회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많다. 홍장원보다는 노무현 같은 인간형에 더 끌리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시대와 함께 요구되는 리더인간형도 변화했다. 원칙은 지키되 유연하게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람,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그리고 투쟁이 아닌 대화에서는 뜨거운 열정보다는 냉정한 논리가 실효성있는 무기이다.
탄핵심판정에서 큰 맥락의 사실요건은 흔들릴 수 없이 애초에 확정되었다. 12월 3일 밤 전국민에게 생중계 된 그대로 대통령은 요건 불비의 계엄을 선포했고 포고령이 내렸고 군대가 국회에 출동했다. 전 국민이 증인인 것이다.
다만 심판정 안에서는 윤대통령이 세부적사실을 들먹이며 헛된 안간힘을 쓰고 있고 밖에서는 응원전 성격의 세 과시 집회가 열리고 있을뿐이다.
심판정 밖 반탄집회에서 수만의 군중들의 환호성을 이끌어내는 인물들은 그러나 보수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진짜 보수는 여기 심판정이라는 무대에 홀로 서서 윤석열대통령과 대적하며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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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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