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청춘의 조선(1)>-해변의 마을에서 / 이소가야 스에지
** 아래 글은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의『우리청춘의 조선』(김계일 옮김, 1988, 사계절/절판)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わが青春
の朝鮮』(影書房, 1984)인데, 1988년에 사계절에서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이소가야는 일본인(1907년생)으로서, 1928년 일본군에 징
집되어 그 해 함경북도 나남에 파견되어서 군대생활을 하였고, 군 제대 후 흥남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조선인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운동, 독립운동에 참여하
다가 일제 앞잡이 조선인 형사에 잡혀 10여 년간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80년 전후에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이 수기를 썼는데, 이 책에 내오
는 내용들은 오늘날 일제하 노동운동을 되돌아 보는데 매우 귀중한 역사적 기록들-특히 '노동자국제주의'의 교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틈틈이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이 블로그에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카프
『우리 청춘의 조선』/이소가야 스에지
해변의 마을에서
나의 새로운 사회생활의 제일보가 된 대흥남공장의 작업장은 제3유산공장이었다. 그곳은 흥남공장의 수많은 직장 중에서도 노동조건이 가장 열
악한 곳이었다. 하루 종일 고막이 터질 듯이 쾅쾅대는 광석 분쇄기와 자욱한 분진, 용광로 속의 타고 남은 찌꺼기에서 나는 코를 찌르는 냄새 등
등. 그곳에서는 유산(硫酸)이 주르르 떨어지는 옷을 입고 일곱 여덟 겹으로 접은 타올로 입과 코를 막은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가 주야 3교대로
일하고 있었다.
< 사진첨가/이 사진은 1942년도 흥남 공장 사진인데, 이소가야가 처음 활동하던 1930년초에는 이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일제는 1930년대 중후반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로서 특히 북한지역에 급속한 공업화정책을 취해 나갔습니다.-카프 >
사람들은 그곳을 살인공장이라고 불렀는데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월급의 1할에 해당하는 유산수당을 받고 있었다. 처음 직장을 가보았을 때
나는 과연 내가 이런 노동환경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인지 불안하였다. 그러나 설사 그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구한다고 해도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닐 듯싶었으며 또한 흥남에서는 이 공장 말고는 일할 곳도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한 나는 일단 그 직장에서 일하기로 했
다. 얼마 안 되어 일에는 익숙해졌지만 일의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살인공장이라는 작업환경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나는 잠시 공장의 일본인 공원 기숙사에 있다가 그 뒤에는 조선인 하숙으로 옮겨 갔다. 그 이유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오촌면(함경북도 경성
군 오촌면/저자가 처음 조선과 관계를 맺은 곳-카프) 이용만 소년 집에 과수원대금을 월부로 지불하고 있어 집세가 싼 조선인 하숙에 입주해 있는
것이 송금하기에 수월했기 때문이며, 또 한편 군대에 있을 때부터 앓아 온 치질에 조선가옥의 따뜻한 온돌방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
다.
처음에는 운중리(雲中里)라는 공장에서 제일 가까운 부락의 최길복이라는 사람 집에서 살다가, 몇 달 뒤에는 구룡리(九龍里)로 이사했다. 모두 다
같은 해 가을의 일이었다. 그 주변에는 흙 담에 싸구려 함석지붕을 엉성하게 얹어놓은 작고 허술한 집들이 제멋대로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그 사이에 조개껍질을 밟아다진 골목길이 미로처럼 나 있었다. 석양녘이 되면 작은 입강(入江)에는 게와 조개, 명태 등을 실은 배가 들어와 그것
들을 모래사장에 어지럽게 늘어놓고 부근의 시와 농촌에서 나온 아낙네들에게 팔고 있었다 아낙네들이 저마다 구입한 생산 따위를 나무를 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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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 2011.05.13 04:32 http://blog.daum.net/historun/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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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019 <우리 청춘의 조선(1)>-해변의 마을에서 / 이소가야 스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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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모래사장에 어지럽게 늘어놓고 부근의 시와 농촌에서 나온 아낙네들에게 팔고 있었다. 아낙네들이 저마다 구입한 생산 따위를 나무를 파서
만든 목기에 담아 머리에 이고 엉덩이를 흔들며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부락은 활기를 띠
어갔다. 그러나 길거리에까지 흘러넘치는 도랑의 구정물과 찢어진 가마니를 판자벽 대신 늘여뜨린, 천정도 없는 옥외 변소 같은 것들이 그곳에 사
는 사람들의 가난한 생활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 부락은 웬일인지 나에게는 겨울이 길고 여름은 몹시 찌며, 봄가을은 어수선하게 지나가는 세
계처럼 느껴졌다.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은은한 갯내음과 함께 물가에 밀려오는 잔물결의 규칙적인 선율이 들려오면, 언덕을 넘어 들려오는 유산공장의 강석분쇄기
죠크랏샤와 로울러 크랏샤의 노호와 같은 울림과 부두에 있던 커다란 짐승 같은 크레인 소리가 무감정한 끈질김으로 그 물결 소리를 삼켜버리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른바 ‘공해’였는데, 식민지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방약무도한 도전을 알리는 최초의 에고였다고나 할까, 바닷물
에는 공장 폐수와 불탄 광석 찌꺼기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흘러 다니거나 내버려져 있었다.
어느새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었다. 어느 날 밤 구룡리 하숙집 주인 손일룡의 집에는 청년들이 모여 밤이 깊을 때까지 뭔가 이야기를 하
다가 돌아가는 기색이었다. 사람 수는 일곱 여덟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때 그 집에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막연하게나마 듣고 있었는데,
조선어를 아직 잘 몰랐고, 또 부엌 봉당을 사이에 둔 옆방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였기 때문에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겨울이 되자 여러 차례 눈이 내려 얼어붙은 대지를 뒤엎었으며, 때로는 바다로부터 불어 닥치는 강풍이 그 보슬보슬한 가벼운 눈을 흩뿌려 하늘
높이까지 휘날리게 하였다. 그때쯤이면 공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섞여 바다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었는데 점심 때가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공장에서 돌아와 저녁식사
를 끝마쳤을 즈음 손일룡으로부터 “이야기하려 오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처음에는 주저하였지만 열심히 권하는
바람에 그의 방으로 건너갔다. 두 평쯤 되는 방에는 7,8명의 청년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었다. 전구 불빛은 어두웠지
만, 방에는 뭔가 밝은 분위기로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청년들의 복장은 한복, 양복, 작업복 등 다양했는데, 상의는 한복을 하의는 공장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던 자도 있었다.
모두들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표정은 한결 같이 밝았다. 청년들이 터준 자리에 비집고 앉자 손일룡이 나를 일동에
게 소개하고 청년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밝혔다. 동년배가 많았지만 조금 나이가 위인 자도 있었
다. 그 중에 비교적 멋진 양복을 입고 있던 곱슬머리 청년이 하나 있었다. 얼굴이 희어서 노동자풍의 다른 청년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 청년이 곧 “실례지만 공장에 들어가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군대에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해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도대체 이 더블양복(옷섶을 많이 겹치게 한 양쪽에 단추를 단 양복저고리)을 입은 사람은 어떻게 벌어먹고 살
까 생각해 보았다. 그만이 아까 자기소개 때 이름만 밝히고 직업은 말하지 않았었는데……그는 자기 뒤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두고 있었다.
김원보라고 밝힌 그 남자에 이어 몇몇 청년이 내게 공장의 일이라든가 고향이야기라든가 취미 등을 차례차례 물어왔다. 나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김원보 옆에 앉아 있던 청년에게 눈을 멈췄다. 자기소개 때 이름은 주선규(朱善圭), 직업은 노동이라고 했던 청년이었다. 그는 나보다 한두 살 아
래인 듯싶었다. 입고 있던 검은 신사복은 천은 고급인 것 같았지만 꽤 오래 입어서 닳아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었다. 새까만 상의와는 대조적
으로 새하얗고 청결한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딱 벌어진 당당한 체격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얼굴은 단정하다고 하기에
는 좀 뭐했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매력 있는 얼굴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유분방한 기질과 두터운 우정, 깊은 통찰력,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정열, 소리 없이 흐르는 큰 강 등을 연상시키는 얼굴이었다.
청년들은 이것저것 내게 이야기를 걸어왔는데 거의가 일상적이고 평범한 내용들뿐이었다. 어느 한 사람이 취미에 대해 물었을 때 “때로 음악을
듣고 즐깁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럼 여기 뛰어난 바이올린니스트가 두 사람 있으니 나중에 이들의 연주를 듣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바
이올린 케이스를 등 뒤에 놓아두고 있던 곱슬머리 김원보에게 한 곡 부탁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럼 한곡만!”이라고 하며 케이스에서 바이
올린을 꺼낸 후 음정을 고르고는 <인디안라멘트>를 연주했다. 그것은 듣고 있던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세련된 연주였다. 그는
일동이 보낸 앙코르에 응답해 이번에는 베토벤의 <미뉴엣>을 연주하였다. 모두들 황홀한 듯이 듣고 있다가 연주가 끝나자 일제히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손일룡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주선규에게 “이번에는 자네 차례야” 라고 말했다. 주선규도 바이올린을 켠다는 것이었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
정을 지으며 김원보로부터 바이올린을 건네받으려고 하지 않다가 모두가 거듭 요청하자 마지못해 단숨에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였다. 듣는 이
의 혼을 사로잡는 듯한 아름다운 그 선율은 음악이 끝난 다음에 좀처럼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 연주는 힘 있고 그 음색은 장중하며 기품이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 본 적이 없고 음악에 대한 감상력도 유치했던 내게는 마치 그 낡은 바이올린이 음의 마술을 이끌어내는 비밀을 주선규의
손에 맡긴 것처럼 생각되었다. 박수를 치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청년들이 일제히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한곡 더 해라”고 권했다. 그렇지만 그는
더 이상 바이올린을 들려고 하질 않았다.
김원보가 나에게 “이소가야씨, 어떻습니까. 참 잘하지요. 주선규는 지금이라도 곧 자신이 원하기만 하다면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그런 건 전혀 생각지도 않아요. 게다가 그는 지금 공장에서 인부생활까지 하고 있어요. 그것도 가장 힘든 흙과 광석 재를 실은
광차(鑛車) 뒷밀이 일을 하고 있지요. 중국인 쿠리들과 함께 말이예요”라고 말했다.
“왜 그러지요”하고 나는 직접, 주선규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우리들은 지금 음악을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요……”라는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게 어떤 일입니까?”
하고 내가 다시 물어보았지만 주선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주(朱)씨의 생각이 잘 이해되지 않는데요? 그 만큼 음악적 재능이 있고 또 그것을 살릴 길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광차 미
는 일 같은 걸 하다니……”
2/2/2019 <우리 청춘의 조선(1)>-해변의 마을에서 / 이소가야 스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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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 같은 걸 하다니
“아니예요, 나는 노동자예요. 이런 손으로는 바이올린 현에는 맞지 않지요.”
주선규는 이렇게 말하고는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려 억센 팔뚝과 손을 펴이며 미소지었다.
김원보가 “우리는 벌써 여러 차례 선규에게 음악을 전공하라고 권유했으나 막무가내였어요. 이 친구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나 역시
바이올린을 켜니까 이 녀석의 재능을 어느 정도 이해하지요. 이소가야. 흥남영화관의 악사 안성교를 압니까? 그는 일본의 우노(上野) 음악학교를
졸업했는데 졸업할 때 교장이 그에게 천엔 이상 가는 바이올린을 주었대요. 구멍 같은 것이 나 있는 바이올린인데 명기라고 합디다. 음악학교 교
장이 안성교의 소질을 인정해서 기념으로 주었다고 그럽디다. 그러나 안성교가 천엔 짜리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때보다 선규 연주가 훨씬 훌륭하
다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마 선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선규 일가는 모두 괴짜지요. 형 인규(仁圭)는 배우이자 영화
제작자이며 연극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한데 그 역시 인부 일을 하기도 했지요. 이소가야씨가 일하고는 제3유산계에 있었지요. 요전에 본명이 드러
나 모가지가 잘려버렸지만 말이예요. 전에 인안계(隣安係)의 스트라이크(파업)를 지도한 일이 있지요. 그 인규도 오늘밤 여기 오기로 되어 있었는
데, 사정이 허락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여기 놀러오니까 또 만날 수 있겠지요.”
김원보는 그렇게 말하고는 팔목시계를 보더니 일동을 돌아보며 “벌써 꽤 늦었어. 슬슬 일어나 보지”라고 말했다. 일동은 나랑 인사를 나누고는 각
자 일어서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주선규가 한 권의 책을 꺼내 “틈이 있으면 읽어 보시지요”하며 건네주었다. 받아보니 빨간 표지에 가네쓰네
(兼常淸佐), 『음악의 계급성』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손일룡의 친구들이 떠나간 뒤, 나는 잠시 그대로 앉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한쪽에는 장롱이 있었는데, 그 위에 있는 책꽂이에 조선어사전,
이기영(李箕永)과 신인작가 이북명(李北明)의 소설, 그리고 일본의 『통신강좌』등이 몇 권인가 꽂혀 있었으며, 그 옆에는 가지 않는 벽시계가 놓
여 있었다. 곧 내방으로 돌아온 나는 문득 이께다에이껭(池田英憲/저자 이소가야가 일본에서 군 입대 전 막노동할 때 몇 권의 책을 건네주었던 너
댓살 위의 형뻘되는 사람-카프)이 생각났다.
꽤 으슥한 밤이었는데도 어딘가에서 다듬이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방바닥에 얇은 이불을 펴고는 주선규에게서 건네받은『음악의 계급
성』을 베개맡에 두고 잠들어 버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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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9) 펼쳐보기
<우리청춘의 조선(2)>-다시 태어난 삶/이소가야 스에지
『우리 청춘의 조선』두 번째 이야기
다시 태어난 삶
이소가야 스에지
이 주일 정도 지나 청년들은 다시 손일룡의 집으로 몰려왔다. 나는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와서 무슨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지 좀체 알 수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나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따금씩 모이는 것은 아니리라. 조용한 밤이었기 때문에 조선어로 이야기하는 그들의 목
소리는 꽤 분명하게 들려왔지만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조선어 가운데 ‘바바’라든가 ‘모리타’라는 이름이 가끔 섞여 나왔고 캄파(Kampaniya : 대중적인 투쟁, 모금운동, 캠페인)라든가 써클이라
는 말도 들려왔다. 바바(馬場)와 모리타(守田)가, 내가 그 당시 일하고 있던 제3유산계에서 많은 조선인 노동자와 함께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하
다 체포되었다는 것을 같은 직장의 송성관(宋成寬)이나 장덕호(張德浩)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 소리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주
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화는 때로는 치고받는 설전이 계속 되었다가 갑자기 낮은 소리로 변화되는 식이었다.
“뭘 공부하고 있습니까?”
어느 날 밤 장지문 밖에서 손일룡이 나를 불렀다.
“그냥 있습니다.”
“친구들이 와 있는데 이야기하러 오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바바와 모리타, 이 두 일본인에게 조금 관심이 가기 시작한 점도 있고 또 그 전에 보았던 주선규하고도 만나보고 싶어 손
일룡의 청에 따라 그의 방으로 건너갔다. 거기에는 전번에 모여 있던 청년들이 모두 앉아 있었다. 나는 김원보와 주선규에게 일전에 바이올린을
들려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자 김원보가 “음악을 하시는 게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재능이 없으니까요.”
“그런 건 아니죠. 이소가야씨는 시인이야. 시집을 많이 갖고 있으니……”
옆에서 손일룡이 말했다.
“시집을 갖고 있다고 해서 시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시를 읽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 같은 것을 쓰는 사람도 그렇고요. 그러나 진짜 시
인은 그렇게 흔해빠진 게 아니죠.”
“이소가야씨. 지금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은 누굽니까?”
청년 하나가 내게 물어왔다.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요. 첫째 나는 그렇게 많은 시집을 읽은 것도 아니고, 또 읽었다손치더라도 내가 올바른 감상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지도 모르니까요. 정말 어떤 시를 쓰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시인일까요?”
나는 청년에게 그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 질문을 계기로 시 논쟁이 붙었다. 주선규와 김원보와 손일룡ㆍ송성관ㆍ신민섭(申敏燮) 등 거기에 있던 청년들은 내가 대답하기 어려웠
던 일본의 시인과 시뿐만 아니라 조선과 소비에트 시인들에 대해서도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연극과 음악, 문학과 희화
등 광범한 영역에 걸쳐서 종횡무진, 불패 분방한 태도로 논하기 시작했다. 메이에르홀드극장의 새로운 연극 활동의 형식이라든가 방향, 또 당시
소비에트의 새로운 음악활동의 하나였던 무지휘자 교향악단 이야기, 프랑스에서의 앙리 바르뷰스와 로망 롤랑의 예술논쟁, 또 시인에 대해서는
그들 조국의 시인으로 임화(林和)가 거론되고 세르게이에세닌과 미하일 게라시모프, 그리고 그 밖에 여러 가지 많은 시와 시인이 화제에 올랐다.
그날 밤, 손일룡의 집에서 나는 오로지 듣기만 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그들의 이야기가 절반은커녕 그 이하밖에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
다 나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을 통해 새로운 정신적 세계의 문 앞에 서게 된 자신을 느꼈다 나는 이제부터 막이 오르려고 하는 조선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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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019 <우리청춘의 조선(2)>-다시 태어난 삶/이소가야 스에지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U2g2&articleno=316&categoryId=83®dt=20110517023613 2/4
다. 나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을 통해 새로운 정신적 세계의 문 앞에 서게 된 자신을 느꼈다. 나는 이제부터 막이 오르려고 하는 조선의 정
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그들의 역사 등에 대한 지적준비 같은 작업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손일룡의 집에서 그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횟수가 늚에 따라 그들은 차츰 나에 대해서 흉금을 털어놓고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도 그들에
게 조선민족의 자식들로서 신뢰를 쌓고 점차 친해져갔다. 좌담의 중심이 된 인물은 주선규였다. 그들은 차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실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주로 조선이 일본 때문에 져야만 하는 가혹한 생활, 부조리하게 강요된 처참한 운명에 대한 것들이었다. 조선이 일
본의 통치ㆍ지배 아래 놓이면서 초래된 암담한 현실-그것은 민족의 비애와 분노의 근원-이었는데, 여기서 어떻게 희망을 모색하고 이상을 추구
해야 할 것인가를 그들은 의논했던 것이다. 내가 그 때까지 얽매어 있던 과거의 인생과 결별을 고하고 주선규와 그의 동지 송성관, 장덕호와 손을
잡고 그들의 투쟁에 참가하고자 결의한 것은 그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러한 결의는 나에게 새로운 미래를 향한 출발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지독히 험난한 길이 펼쳐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
지만, 그 길 이외에 선택할 만한 다른 길은 생각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나는 이용만 소년 앞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주선규들과 손을 맞잡겠다고 결심한 이상 이용만 소년을 비롯하여 그 일가, 그리고 미래를 맡기려고 했던 저 과수원과도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된
다. 내 앞 길에는 이제 장밋빛 인생 같은 것은 없으리라. 그러나 다른 새로운 인생의 빛 지금 내 앞에 전개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이용
만과 그 일가 사람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썼고, 여태까지 편지를 쓰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마음 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 이용만군, 아마 자네에게는 깊은 상심을, 그리고 군의 부모님과 형제들이여, 당신들에게도 아마 형언하기 어려운 놀람과 실망을 남긴 채 당
신들 앞에서 사라지려고 하는 나를 용서해주기 바랍니다. 당신들은 이 한 사람의 일본인을 변덕스러운 자로 경멸하겠지만 설사 그렇게 할지라도
또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당신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며 지금은 침묵을 지킨 채 모든 것을 망각이라는 배에 싣고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언젠가 내 마음을 이해해 줄 날이 찾아오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세월이 흘러 저
강덕(康德)의 언덕 위 과수가 모두 굳게 대지에 뿌리를 박고 그 가지가지가 휘어지도록 많은 열매가 열려 이윽고 조선 사람들이 새로운 조국을 세
우고 그리고 동포 모두 서로 화목하고 친밀해질 날을 나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반드시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설사 내가 이미 대지로 돌아가 잠
들어 버린다해도 당신들의 추억의 세계에 나를 안주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침묵을 지키며 당신들 앞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게 되었
습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보낸 지금까지의 내 꿈과 생활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나서 몇 년이 지난 후 내가 체
포되어 함흥형무소 독방에 있었을 때 이용만 소년이 몇 차례 내 앞으로 편지를 보내왔지만, 나는 단 한 번밖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물론 소년 일
가에 어떤 해가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그즈음 주선규는 내호(內湖)역 근처 민가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일은 앞에 기록한 것처럼 중국인 쿠리들과 함께 광차를 미는 일이
었는데 하루 일을 마치고 하숙으로 돌아오면 매일 몇 사람인가 젊은 조선인 공원이 먼저 그의 하숙방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들은 주선규로
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바이올린을 배운 뒤에도 주선규와 몇 시간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도 구룡리에서 내호역 앞 식당으로 하숙을 옮겼다. 검거되기 한 달 전이었다. 그 당시 내호역은 아직 작고 역전거리도 한산해서 대부분의 가게
가 문을 닫고 있었다. 하숙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가게였는데, 안으로 쑥 들어가면 이웃집에 면한 곳에 길쭉한 방이 있었다. 바로 그곳이 내가 기
거하는 방이었다. 주선규의 하숙과는 백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나는 내호로 이사한 후 종종 주선규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가 청
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친다거나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청년들은 처음 일본인ㆍ내지인(內地人)이라는 점에서 나에게
약간의 심리적 거리를 두고 상대하고 있는 듯했는데 차츰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주선규와 청년들의 음악연습과 토론을 옆에서 듣고 있다
가 때로는 이야기에 끼어들기도 했다. 주선규는 청년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때로는 정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토론을 시키기도 했다.
처음에는 음악을 배우러 온 자도 그 뒤 차츰 학습에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선규는 조선의 문화, 음악, 영화, 연극, 문학 등,
요컨대 조선 민족이 잃어버린 또는 잃어가고 있는 정신적 재보의 부활ㆍ재생과 새로운 창조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했다.
―― 현재 조선의 문화는 거대한 바위 밑에서 싹이 터 성장하려고 하는 식물과 같은 것이다. 이 식물은 당연히 내리쬐는 태양빛을 받고 또 적당한
비바람을 맞으며 단련되어 싱싱하고 억세게 성장하고 아름답게 꽃펴 향기를 내뿜으며 스스로의 생명의 제전을 구가할 수 있어야 하는데도, 지금
은 그렇지가 못하다. 머리 위에 눌러 덮인 바위 때문에 태양빛을 빼앗기고 비의 은혜, 적당히 부는 바람조차 거절당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처럼
마르고 등이 굽어 꽃도 피지 못하는 식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우리의 참 문화일 수 없다. 그것은 미와 진실을 추구하는 우리 조선 민족이 정의의
투쟁에서 상처 입은 혼의 파편이고, 조선의 대지 위에 그려졌다가 허무하게 사라진 미완성의 피의 꽃이다. 우리 조선 문화의 발전과 성장은 억누
르고 있는 바위, 이것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이며, 우리는 이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태양빛을 차단당하고 있는 대지를 깊이 갈아
새롭게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어야만 한다.
주선규는 그런 이야기를 곧잘 청년들에게 했다. 나는 주선규가 청년들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은, 나 자신에게도 일종의 의식화 역할을 한다고 생각
해서 그들과 어울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주선규가 버들고리 밑에 감춰두고 있던 서적을 가끔 빌려 읽었다. 그 당시 빌린 책 중에는 부하린의 『역사유물론』과 피아트니츠키의『조
직론』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서적을 빌리는 일은 늘 서로 간에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나는 젊은 스승이자 열렬한 친구인 주선규의 이야기 속에서 그의 사상을 흡수하려고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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