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득
10 mins ·
아래 공유한 박가분 씨 글의 한계는 원문에 달린 손이상 씨의 댓글에서처럼, '일본군 성범죄를 다른 전쟁범죄와의 연속성 속에서 고찰하는 것'을 '(역사)수정주의'로 보는 것 아닐까 싶다. 우리사회에서 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담론은 매번 여기서 가로막혔다. 군 위안부 제도가 마치 일본만의 '독보적인 미친 발상'인 것처럼 여겨져서.
아래는 원문의 한계를 지적한 손이상 씨의 댓글 전문
"여성의 성을 전선에 보급하는 미친 발상은 오히려 역사적으로 보편적이었고 때로는 도덕적으로 권장되기까지 했습니다. 십자군이 점령지에서 저지르는 강간 약탈을 막기 위해 필립 2세가 병영매음을 제도화 한 이래로 서구 군대는 거의 언제나 여성을 전쟁에 동원해왔습니다. 특히 1950년대 인도차이나 전쟁에 이르면 주로 알제리계 여성들로 이루어진 '프랑스군 위안부'들이 성을 착취당하는 외에도 부상병 간호와 응원 업무를 떠맡고 포위상황에서 전투보조 역할을 하는 등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대단히 유사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를 BMC(Bordel Militaire de Campagne)라고 하는데, 동원 규모도 대단히 컸고 심지어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습니다(공식적으로는 2005년에 없앴지만). 이같은 사실로 인해 일본군 성범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물론 아니나, 일본군 성범죄를 다른 전쟁범죄와의 연속성 속에서 고찰하는 것을 수정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블로그 링크는 프랑스 국영방송에서 프랑스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다큐 <전쟁의 창녀들>에 관한 만화가 박경은 씨의 시청 소감
https://blog.naver.com/laurentpark/80182461697
물론 이건 일본보다 먼저 식민지를 거느린 다른 나라도 과거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일본의 책임을 더 이상 묻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박가분 씨 지적처럼, 자신들의 전쟁에 식민지(또는 점령지) 여성을 '군대 보급품'처럼 동원한 배경을 제대로 헤아리려면 '우리가(과거 조선이) 가장 큰 피해자'라는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국제형사재판소가 전시 성폭력을 광범위하게 포괄한 98년 로마규정을 책임자 처벌의 기준으로 채택했을 때, 때마침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시화됐을 때, 거기 서명한 과거 승전국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수많은 현지 여성을 매춘업으로 유인한 미국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미국과 과거 승전국 중심의 국제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마치 남의 눈에 티끌처럼 규탄할 때마다 석연치 않았다. 만일 일본이 패전국이 아니라 승전국이었다면, 그들만의 리그에 속했다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이만큼 부각됐을까 싶어서. 다시 말해 군 위안부 제도가 과거 일본만의 독보적인 미친 발상이라고 여길 때,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전쟁에 여성을 동원한 다른 나라로 하여금 손쉽게 면죄부를 줄 때, 그게 오히려 역사수정주의에 가깝다고 본다.
박가분
18 May at 00:51
<유감스럽지만 박유하 교수가 (일정부분은) 옳았다>
<제국의 위안부> 등에 실린 박유하 교수의 시각 중에서 역사수정주의적 시각(ex위안부 문제는 다른 제국주의적 전쟁범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등등)에 동의하지 않지만, 정의연(전 정대협)에 대한 이용수 할머니의 저격이 본격화되면서 나는 그가 적어도 일정부분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정의연(정대협)이 위안부의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전부 다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박유하 교수가 전 정대협 현 정의연을 비판하면서 일관되게 내세웠던 논지이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이용수 할머니가 돌아서면서 나는 그가 한 말이 상당부분 사실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뭐 이게 나이가 들어서 토착왜구의 감언이설에 놀아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이나영 교수 등이 내심 말하고 싶은 거겠지만) 할 말은 없지만, 노구를 이끌고 해외에서 용기 있는 증언까지 한 사람이 단순한 변덕으로 이번 발언을 한 게 아니라고 본다. 나는 이 사안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엿가락처럼 늘렸다 줄이는 사람들과 달리, 적어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경청하자'는 정도로 일관되게 적용하자는 입장이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회계비리의 문제의 문제라고 보지만, 사실 운동사회의 반지성주의적 아마추어리즘을 한 두번 본 게 아니라서, 이번에 나타난 문제가 흔한 허술한 회계의 문제인지, 아니면 결정적 비리의 문제로 이어질지는 두고 볼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사실 이 사안의 본질은 과연 정의연이 그 동안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독점할 자격이 있는 단체였냐'는 것이다. 그 동안 정의연은 위안부 등 역사문제에 있어서 한국사회의 반일기조를 사실상 이끌었던 단체이다. 그 동안 일본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취한 사과와 배상의 방식을 '기만적'이라고 전면적으로 거부하며(일본의 법적인 배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동안 이들이 내세운 입장이다), 일본 시민사회에 대해서도 소통보다는 계도적 스탠스를 내세우는 방식이었다. 적어도 이 운동에서 상징이 된 이용수 할머니가 정작 그간의 운동의 방식에 대해서 전부 다 동의한 건 아니라는 것은 확인이 됐다.
그 점에서 나는 이번 사안을 통해 단순히 시민단체의 재원과 회계문제뿐만 아니라 정대협부터 이어져 온 운동방식도 가짜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었는지 충분히 재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게 싫어서 상식적인 회계문제에 대한 의문도 토착왜구의 준동이라고 (일부에서) 몰아붙이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역사 수정주의에는 반대한다.
정의연의 운동방식에 대한 당사자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이때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수정주의적 시각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역사수정주의적 시각이란 이런 것이다. 위안부 문제 이전에도 남성 중심적 가부장 질서가 저지른 전쟁 성범죄의 문제는 이미 많았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아래 일어난 전시강간과 군대의 성착취 문제가 비일비재했으며 위안부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는 위안부 문제의 특수성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위안부 문제는 다른 나라에서도 있었던 전시강간이나 군부대 주변 성매매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직접 나서 여성의 성을 '군대의 보급품'으로 지정해서 전선에 공급한 데 있다. 거기에 민간업자가 끼어 있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여성의 성을 전선에 보급해야 한다는 미친 발상을 국가가 계획하고 입안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서구 제국주의 전체가 짊어져야 할 문제가 아니다. 서구 제국주의자조차도 차마 하지 못한 독보적인 미친 발상을 계획-수립-입안했던 '일본'이라는 네이션-스테이트의 레벨에서 책임을 지고 결착을 봐야 할 문제가 맞다.
다만 그 문제를 정부 대 정부 차원에서 (502 보다 더 나은 방식의) 외교적 결착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인지, 아니면 (우리가 개입할 길이 거의 없는) 일본 입법부 혹은 사법부를 압박해서 법적인 배상을 이끌어내야 하는 문제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용수 할머니 말대로 교육 등을 통해) 일본 시민사회를 설득해야 하는 문제인지 아니면 이들도 일본정부와 한 패로 간주하고 계도해야 할 대상으로 죄를 물을지, 그 방식은 여전히 열린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
Park Yuha
내 책을 “역사수정주의”로 봤다니 유감이군요. 그런데다 “역사수정주의”의 원래 문맥을 모르고 계신 거 같네요. 역사수정주의란 독일에서 시작된 논의이고 그걸 받아 “일본의 책임을 면죄하려는 우익의 획책!”이라는 뜻으로 일본에서 사용된 개념입니다.
저와의 관계에서 말하자면 제 책이 일본책임을 부정한다고 왜곡해 온 비판자들이 씌운 프레임이고요. 한국에서 말하자면 토착왜구론이죠.
그런 맥락을 무시하고 역사수정주의라고 하는 건 책의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틀린 판단이라 해야겠네요.
우에노 치즈코 선생도 급진페미가 아니예요. 급진페미주의자들의 대한 반감은 이해하지만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저는 보편성도 특수성도 함께 말했답니다. 책을 다시 읽으면 보일 겁니다.
“일본처럼 주도면밀하게 여성을 보급”했다는 프레임에 대한 재검토도 필요해 보이는 군요.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