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3

Eunhee Kim - 양반은 누구인가?(3) 양반'은 문화적 개념이다.

(6) Eunhee Kim - 양반은 누구인가?(3) 양반'은 문화적 개념이다.


Eunhee Kim
28 April ·
양반은 누구인가?(3)

실로 오랫만에 양반에 대해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2018년 12월에 두 편의 글을 올리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시간이 나지 않아 중단했었습니다. 왜 갑자기 양반에 대해 쓰는지 궁금하신 분, 그리고 기억을 새롭게 하고 싶으신 분은 아래의 링크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두 편의 글에서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양반제가 붕괴되었다는 대중적 역사담론을 비판하였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잘 인용되지 않는 역사적, 인류학적 연구결과들을 활용하여 썼습니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붕괴를 가져올만큼 상공업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양반의 수가 격증하지도 않았음을, 그리고 당시 한국사회는 고도로 안정된 농민사회였음을 지적하였습니다.

https://www.facebook.com/eunhee.kim.79230/posts/2195112207200412

https://www.facebook.com/eunhee.kim.79230/posts/2208924919152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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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은 문화적 개념이다.(길어요..)

조선시대의 양반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양반'이 객관적인 기준에 의거해 규정되는 법적 개념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동체에서 형성되어 정착된 문화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양반 계층은 중세 유럽이나 일본 도쿠가와 시대의 특권층과 달리 법규에 의해 정의되는 신분계층이 아니었다. 누가 양반이고 누가 양반이 아닌가는 문화적 규칙에 근거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인과 평판에 달려 있었다.

원래 양반은 유교적 관료체제에서 문관('문반')과 무관('무반')을 합쳐서 가리키는 용어였다. 조선 정부는 건국 초기부터 시험을 통해 관료 후보자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강화하였다. 고위 관직자나 공신의 친척이나 자제를 문무관에 기용하는 음서제를 제한했고, 능력있는 사람은 신분 상의 하자가 없는 한 누구나 시험을 통해 관직자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양반 만이 과거시험을 볼 수 있다는 자격 제한도 없었다. 즉 일반 상민이 양반으로 계층상승하는 데 있어 법적 장애물이 거의 없었다. 이는 누구나 유학을 공부하여 도를 닦고 덕을 쌓으면 '군자'가 될 수 있으며 '군자'가 관직자가 되어 백성에게 인간의 도리와 예를 가르치는 게 통치의 중요한 목적이라는 신유학(성리학)의 기본 철학때문이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는 행정보다 교화를 중시했고 문무관료는 유능한 행정가보다 백성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고자 하였다. '양반'은 바로 백성의 스승인 '군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흔히 양반은 3대 혹은 4대 이내의 조상 중에 문과급제자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법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중앙정부가 행정편의를 위해 네 분의 조상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중에 문과급제자가 없으면 군역을 부과한다는 정책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여론의 지지가 없어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당시의 여론을 잘 대변한다.

"문벌세족의 경우 여러 대 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어찌 그것을 이유로 하여 그들을 졸지에 군에 편입시켜 미천한 백성들과 동일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송준호 조선사회사연구141쪽에서 재인용)

이익이 말한 '문벌세족'은 선대 조상들이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학문과 덕행으로 유명한 가문을 말한다. 그 조상들은 백성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요 지도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훌륭한' 조상들의 자손은 비록 관직자가 아니어도 일반 상민과 똑같이 취급하여 군역을 부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 성호 이익의 생각이요 당대의 여론이었다.

누구나 유학을 공부하고 자기 수양을 함으로써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성리학적 통치이념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문무관을 지칭하던 양반의 지위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거의 세습적인 지위가 된다. 족보와 고문서, 그리고 현지조사를 활용한 역사적, 인류학적 양반 연구들은 지역사회의 유학자들이 보학적 관점에서 양반을 품정하였음을 많은 사례들을 통하여 보여준다. 누가 양반인지 논함에 있어 그 기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긴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현조의 존재 여부였다. '현조'는 높은 관직에 올랐거나 학문과 덕행으로 가문을 세상에 널리 알린 뛰어난 조상을 말한다. 씨족(본관이 같은 성씨)의 시조나 중시조처럼 계보관계를 정확히 추적할 수 없는 아득히 먼 조상은 현조로 간주되지 않았다. '안동 김씨', '전주 이씨'처럼 본관이 같은 성씨는 구성인원이 양반, 중인, 천민을 다 포함하여 계층적으로 다양했고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양반 가문들이 내세우는 현조는 대부분 부계친족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16세기, 17세기에 활약했던 유명한 유학자들이나 관직자들이다. 이들의 후손들은 다른 방계친척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기 시작했고 일정한 지역에 세거하면서 '아무개 자손'이라는 부계친족집단을 형성하였다. 이 부계친족집단에 속하지 않으면, 즉 '아무개 자손'이 아니면 유림사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은 시조와의 계보관계가 확실한 친족집단이며 '파' 혹은 '문중', '종중'으로 불렸다. 그리고 파의 시조가 얼마나 유명했는가에 따라 그 파에 속한 후손들의 양반의 급수가 정해졌다. 가령 '우암 자손'의 파시조는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이자 노론의 거두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인데 '우암 자손'은 조선의 일급 양반으로 대우받았다. 또한 파시조의 후손들 중에 뛰어난 인물이 나타나면 그를 중심으로 '파'는 하위 지파로 분파된다.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될수록 '파'는 지체높은 양반 가문으로 지역 유림에서 인정받았다.

후세에 올수록 유명한 조상 누군가의 자손이 아니면 본인이 아무리 출중해도 양반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생원이나 문과급제자도 자신의 직계 조상 중에 내세울만한 인물이 없으면 향안과 같은 양반 유학자 모임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가계 상의 의혹이나 하자가 있을 경우 아무리 국가에 혁혁한 공을 세워도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기도 하였다.

현조 다음으로 중요한 양반의 조건은 자손들이 일상생활에서 '양반답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양반답게 사는 것은 '봉제사접빈객'을 포함하여 유교적 학식과 예절을 갖추어 사는 것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과거급제하는 것, 관직자가 되는 것, 학문에 정진하는 것, 문집을 남기는 것, 서원을 출입하는 것, 유교적 가례를 행하고 덕행을 실천하는 것, 다른 양반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는 것 등등을 포함한다. 예컨대 부모의 묘소에 초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는 것처럼 유교적 예를 실천하는 것은 지역 사회에서 지체높은 양반이라는 평판을 얻는데 아주 중요했다.

안동 지역의 양반 부계친족집단을 연구한 인류학자 송선희는 드물지만 일반 상민이 여러 세대에 걸쳐 유학을 공부하고 예를 실천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지역사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아 20세기 초에 양반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은 사례를 보고하고 있다 (Song 1982: 432). 반면에 아무리 훌륭한 조상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양반답게 살지 못할 때 문중 전체가 폐족이 되어 그와 그의 후손들은 상민의 신분으로 전락되고 만다. 한 집안이나 가문, 혹은 종족이 양반신분을 상실할 때 국가에서 규정하는 법적인 절차나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지역사회에서 다른 양반들과 교유하지 못하고 양반집안의 며느리와 사위를 얻지 못하는 사회적 고립의 과정이 진행될 뿐이었다.

요약하면 유명한 관직자나 유학자인 현조가 있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학문을 닦고 유교적 예를 지키며 살아가는 한 그 가문은 지역사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았다. 군자에 의한 덕치를 지향하는 유교국가에서 '군자'로 존경받는 사람의 자손들이 비록 여러 세대 동안 관직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유학을 공부하고 덕행을 실천하며 사는 한 양반으로서 예우하는 것은 바로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양반의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조상이 성취한 것에 따라 개인의 지위가 거의 결정되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본인 또한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또 후대의 자손들에게 훌륭한 조상이 되기 위해, 즉 집안과 가문을 '빛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조상과 가문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자유로운 개인은 조선 후기 양반 문화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에서 양반으로 대우받고 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여러 세대가 걸리는 긴 과정이었다. 상공인이나 부유한 상민이 돈을 주고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위조하여 갑자기 양반으로 계층상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지역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잘살던 양반이 가난해졌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양반지위를 박탈당하고 일반 상민으로 몰락하는 일도 일어날 수 없었다.

(계속)

참고문헌

송준호. 1987. 조선사회사연구. 일조각

Song, Sunhee. 1982. Kinship and lineage in Korean village

society. Dissert.: Indiana University.
183박정미, Park Yuha and 181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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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Young Kim
JiYoung Kim 탁월한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현조의 존재와 유교적 삶의 일상적 실천이 양반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중요하다고 하신 지적에 공감합니다. 선생님~저는 요즘 여성의 출산과 가의 계승문제를 다시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를 드셨던 봉제사와 시묘살이로 상징되는 삼년상이오히려 ‘여성의 출산’을 방해해서 가의 계승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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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hee Kim
Eunhee Kim JiYoung Kim 김선생님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요. 남계 자손으로 이어지는 '가'의 개념 자체가 조선 중후기에 와서 생성되었는데 여성의 '출산과 관련해서는 생각안해봤네요. 제사지내는 게 중요해지면서 딸은 상속에서 제외되기 시작했는데 굳이 출산과 관련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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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만
한종만 Eunhee Kim 출산은 평등과 반비례 합니다.~^^
국가의 성장 발전 쇠퇴는 출산이 결정하지요.
여성의 고학력은 이미 그 사회가 정점을 찍고 동력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골프치러 가야하는 여자는 애를 두 명 낳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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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호, 《조선사회사연구 》
작성자 : 독서중    작성일 : 2019년 07월 03일

 필자는 조선시대의 양반제와 그 양반제를 주축으로 하였던 사회신분체제는 임란이나 호란과 같은 전란으로도 타격을 받지 않았으며 그와 같은 전란은 오히려 양반제를 종전보다 훨씬 더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고 양반제가 사실상 붕괴된 시기라고 일반이 말하는 18·19세기는 사실은 그 전성기였다고 보고 있다.그들의 양반으로서의 지위나 양반이기에 차지하였던 해당 지역 사회에서의 지배적인 위치는 난후의 혼란이나 그 혼란기에 대두된 이른바 군공수직자나 납속수직자들의 힘에 의해서도, 또는 이른바 민중의 힘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p.160

 
  즉, 한 가문으로서의 사족이란 관직자와 그들 관직자의 일정범위내의 가족 및 자손에 대한 지칭인 바 그러한 사족들에 의해서 형성된 상류 특권계층도 역시 사족이라고 불렀다. 사족은 한마디로 말하여 치자집단이다.치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치자로서의 지위와 권한 및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그 지위와 권한에 상응한(정치 및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종종의 특권이 혹은 국가에 의해서 합버적으로 혹은 사회에 의해서 관례상으로 주어졌으며 그러한 특권은 그들의 일정범위내의 가족 및 자손에게도, 비록 차등적으로나마, 주어졌으므로 그들 치자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특권계층의 출현은 지극히 당연한 추세였다. p.242

   이상에서 필자는, 조선초에는 한 사회계층으로서의 양반은 아직 없었다고 하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전혀 잘못된 것이며 그들이 그러한 주장의 근거의 하나로서 내세우는 노사신의 말 즉,"俄國人民非良則賤只有二途耳"란 말은 그렇게 해석할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님을 밝혔다. 위 노사신의 말은 이미 상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당시 국가 정책상의 한 논쟁거리가 된 보충대의 운영과 관련해서 한 것인데 사실은 이 보충대라고 하는 제도가 바로 당시 양반 또는 사족으로 호칭되는 사회상류특권층이 엄연히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그 계층은 국가정책으로도 마땅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에 있어서의 하나의 지배적인 관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웅변으로 말하여 주는 것이다.

  요컨대 양반계층은 시대에 따라 명칭상의 차이가 있었을 뿐 고려시대에도,그리고 그 전의 시대에도 분명히 있었다.이것은 대저 양반이란 어떠한 것이냐 하는 그 본질을 구명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또, 그것은 씨족제도의 발달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여기에서 우리는 한 사회계층으로서의 양반은 씨족제도와 그 씨족제도의 구체적인 표징인 족보를 떠나서는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본서에 수록된 논문들은 바로 그러한 전제하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p.259

 

*** 저자는 이 논고에서 '양반제 후기붕괴설'을 주창한 시카타 히로시교수의 이론을 논박하고 있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 』를 보면 시카타 히로시의 연구 주 논지를 알 수 있다. 시카타 히로시 교수가 조선시대 작성된 경상도 대구지역의 호적대장을 연구해 17~19세기 신분제 변동 사황을 연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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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사연구   
송준호 (지은이)일조각1990-01-01



조선사회사연구

정가
24,000원

기본정보
양장본516쪽
저자 및 역자소개
송준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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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1920년대 단편소설의 상징성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부문에 당선(1993)되었다. 현재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소설창작’과 ‘글쓰기지도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글쓰기와 관련된 크고 작은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저서로는 『좋은 문장 나쁜 문장』『문장부터 바로쓰자』『송준호의 문장 따라잡기』등이 있다.
최근작 : <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을 묻는다면>,<나를 바꾸는 글쓰기>,<좋은 문장 나쁜 문장 (큰글자)> … 총 15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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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출간되었던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조상의 눈아래에서 》 부제가‘한국의 친족,신분 그리고 지역성‘이다. 1987년에 출간된 송준호의 책은 부제가 ‘조선사회의 구조와 성격 및 그 변천에 관한 연구‘이다. 이 책을 먼저 읽고 도이힐러 책을 읽는 게 순서에 맞다. 
독서중 2019-06-2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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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 교수의 <조선초기 양반연구>, 
최승희 교수의 <조선후기 사회신분사연구>,<조선초기 정치문화의 이해>, 
김인걸 교수의 <조선후기 향촌사회 지배구조의 변동>을 구입했다.  

이기적 유인원은 이 구입목록에서는 생뚱맞기는 한데 이전에 구입을 하려다 까먹어서. 

  <조선사회사연구>는 중고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은 중고도서도 잘 보이지 않아 교보에서 이북으로 구입했다. 

역사서를 자주 읽을때도 이런 종류는 다소 지루해 보였는데 재미있게 읽을때가 있구나....

- 접기
가넷 2020-04-02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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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사 연구 


 송준호 교수의 <조선사회사연구>를  읽고 있다. 족보와 씨족을 다룬 챕터만 읽었다. 

 지금 족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17세기 이후이고 이전에는 가계전슬, 내외보, 팔고조도등이 작성되고 있었다. 족보라면 공통의 조상으로 시작하여 뻗어나가는 가지를 중요시 하는 반면에  가계전승, 내외보, 팔고조도 등은 나를 중심으로 올라가는 형태다. 그리고 15세기~17세기에 작성된 족보의 경우에는 17세기 이후의 족보와 달리 남여차별 없이 나이순으로만 기재순서가 정해졌고, 외손도 상세히 기재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뼈대 있는 가문이라 떵떵 거리는 가문들의 구성원이 족보를 왜 그렇게 중요시 하였을까? 그것은 물론 유교적 이념의 문제, 그러니까 친척들이 남 보듯 하는 것에 대한 한탄도 이유가 되긴 하겠지만 그것 보다는 군역의 문제,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한 문제가 주요 했다. 족보가 군역면제의 주요한 증서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본관에 대한 문제인데, 아직 이 부분은 다 읽지 않았지만 중국의 본관제와의 차이점이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본관이 조상이 거주했던 행정구역명이란 것은 동일하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후손이 더이상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음에도 계속 이전에 조상이 거주했떤 지역명이 본관으로 쓰이는 반면에, 중국은 조상이나 본인이 어디에 거주하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핏줄이라도 달리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모호하다고 하였으나 조선과는 다르다는 것은 뚜렷하다. 

지금 현재는 조선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보학이 중요하지만, 당대 조선의 양반들도 제일 중요한 학문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신분변동에 따라 양반의 수가 급증했다고 보는 시선에 대하여 저자는 부정적이다. 보학에[ 밝은 이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말고도 전국단위로도 양반의 가문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양반 행세를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임란과 호란에도 신분제 등이 오히려 강고해졌다는 부분에서는 갸우뚱거리게 만들기는 하지만, 일단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더 고민해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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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5-01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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