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3

Eunhee Kim - 양반은 누구인가(4) 양반과 부의 축적

(6) Eunhee Kim - 양반은 누구인가(4) 양반과 부의 축적 조선시대 양반에 대한 대중적 담론에 볼 수 있는...

Eunhee Kim
21 May at 06:14 ·
양반은 누구인가(4)

양반과 부의 축적

조선시대 양반에 대한 대중적 담론에 볼 수 있는 잘못된 상식 중의 하나는 가난한 양반은 지위가 낮은 양반이라는 인식이다. 흔히 '잔반'이라고 부르면서 가난한 양반을 몰락한 양반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사회에서 양반을 품정하는데 있어 부는 전혀 평가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 '양반답게' 사는 것에 열심히 일하여 부를 일구는 것은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양반이 대체적으로 다른 신분계급보다 잘 살았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현조가 았는 부계친족집단에 속하면 당당하게 양반행세하고 또 양반으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부자라도 내세울만한 직계조상이 없으면 그 지역의 가난한 양반과 동등하게 교류할 수 없었다. 부자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지배계층이 되는 것은 조선 후기 양반 사회에서 불가능했다.

조선 후기에 '아무개 자손'이라는 양반 부계친족집단인 '파'가 형성되는 데에 공동재산을 조성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뛰어난 유학자나 관직자로 인정받은 조상은 국왕 또는 지역 유림으로부터 '불천지위'라는 영원히 제사를 받는 자격을 부여받았는데 그의 자손들은 언제나 독립된 '파'로서 인정받았다. 명망높은 조상은 반드시 봉제사와 여러가지 공동활동에 드는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위토가 조성되었지만 이는 뛰어난 조상이라고 먼저 지역사회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지 위토가 있기 때문에 후손들이 함께 모여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학문과 덕행으로 유명한 유학자의 경우 후손이든 아니든 간에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학계나 문계를 조직하여 이미 생전에 위토가 마련되기 시작할 수도 있었다.

'아무개의 자손'이라는 지역화된 부계친족집단이 유명한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분파되는 과정은 공동재산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중국(주로 동남부) 부계친족집단과 대조적이다. 조선과 달리 명.청대 중국에서는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지역을 처음 개척했거나 이주를 시작했던 입향조를 위해 후손들이 출자하여 공동재산을 마련해야 부계친족집단이 만들어졌다. 자손들은 입향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남은 금액은 출자한 액수의 비율에 맞추어 출자자들에게 나눠주었다. 공동재산이 많을 경우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는 사당을 짓기도 하였다. 또는 특정 조상이 공동재산을 남길 경우 그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고 남은 재산의 수익금으로 제사를 지내고 후손들에게 분배하였다. 여러 세대가 지나며 자손들 사이에 빈부의 차가 생기면 더 잘사는 후손들이 자신들만의 조상을 위해 공동재산을 장만하면서 분파되어 나갔다. 중국의 부계친족집단의 공동재산은 후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위세를 보여주며 그들의 실제 생활에 많은 경제적 도움이 되었다.

재산을 남겨야 후손들로부터 제사를 받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당연히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경제적 부를 획득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이 고향을 떠나 객지에 가서 열심히 일하여 재산을 모으고 지방호족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중국 문화에서 인기있는 성공스토리였다. 반면에 조선 후기 지역사회에서 양반답게 살고 있다는 평판을 얻기 위하여 양반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일체의 경제활동을 멀리 하였다. 우선 양반에게 상공업활동은 금기시되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상공업활동에 종사하게 되면 그 집안은 문중에서 쫓겨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이는 조선 정부에서 상공인들에게 과거시험을 볼 자격도 주지 않은 것과 관련된다.

조선 정부와 유림사회가 얼마나 상공인들을 천시했는가는 중국과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명.청대 중국의 사대부 계층은 상공업활동에 자유로이 종사했고 상공인으로서의 경력이 과거시험을 보고 관직자가 되는 데 아무 장애가 되지 않았다. 중국 족보에는 조상의 행적을 기록하는 데 있어 가난해서 하고 싶은 공부를 못하고 장사로 돈을 많이 벌어 성공했다는 기사 혹은 가난해서 공부 포기하고 장사하여 많은 돈을 벌어 사회사업을 했다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족보에 그런 기사를 올린다는 것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또한 조선 후기 재지양반은 도시에서 거주했던 중국의 사대부계층과 달리 거의 예외없이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를 피하여 고립된 촌락에 세거하였다. 이는 고려시대 향촌사회의 실세였다고 할 수 있는 이족이 관아가 있는 읍에서 살았던 것과도 비교된다. 조선 후기 안동의 일부 아전들이 양반으로 계층상승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읍내에서 촌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촌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양반답게 유학을 공부하고 유교적 예를 갖추며 살아감으로써 이들 아전 집안은 안동지역에서는 양반으로 인정받았다. 이들을 '퇴촌 아전'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퇴촌'은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속세에서 벗어나 학문과 덕행을 실천하는 선비로 고고하게 살겠다는 의지를 지역사회에 천명하는 행위였다.

양반들이 산골 촌에서 유유자적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 농업에 있었으며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거의 자체 조달하는 자급자족적 생활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농업생산에 있어서도 조선 후기 양반들은 조선 전기에 노비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농장을 경영했던 농업경영자에서 (아래 링크 참조) 소작인에게 농업경영을 거의 맡기고 지대를 수취하는 지주로 바뀌게 된다. https://www.facebook.com/eunhee.kim.79230/posts/2102368583141442

17세기 까지만 해도 양반은 농장을 경영하기 위하여 농업생산의 전과정을 계획하고 주도했으며 농업기술의 발전과 농지 개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조선 전기와 중기에 양반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간척사업을 하여 경작지를 늘리고 보를 축조하여 수리 관개시설을 확충하는 축보개간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오면 농지개발은 정체되고 양반들은 지대에 의존하여 살기 시작하여 조선 말에는 충분히 자작할 수 있는 농지도 '남을 주어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김택규 1979).

노동하는 것이 천시되고 일체의 상공업활동이나 부를 축적하는 경제활동이 터부시되면서 양반에겐 관직자가 되는 것만이 부를 증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가난한 선비가 과거급제하여 관료가 되는 것이 가문과 문중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닦는 길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올수록 과거급제를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는 제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가난한 양반들도 늘어났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가난한 양반들은 상민처럼 농사지을 수 밖에 없었겠지만 같은 문중에 속한다 하여도 노비나 머슴을 쓰지 않고 직접 농사짓는 양반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관직에 있었다 하더라도 비축해놓은 재산이 없으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당시 서간문이나 실록 등의 문헌자료가 보여준다. 지방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땅이 있어도 직접 농사짓지 않고 서울에서 가난한 선비의 삶을 사는 명문세족들도 많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근이 들면 가난한 양반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참고문헌

  • 김택규. 1979. 씨족부락의 구조 연구. 일조각
  • 문옥표. 2004. "종족조직과 생활문화", 조선양반의 생활세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 송준호. 1987. 조선사회사연구. 일조각.
  • 전경목. 2001. 우반동과 우반동 김씨의 역사. 신아출판사.
  • Song, Sunhee 1982. Kinship and Lineage in Korean Village. Unpublished Ph.D Dissertation. Indiana University.
------------------------
229박정미, Jeong-Woo Lee and 227 others
47 comments
17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한동석
한동석 뭐, 능력자들은 서얼 등을 동원해서 막대한 부를 챙기셨던 것 같기는 하더군요.
2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Eunhee Kim
Eunhee Kim replied

 ·
 1 reply
김성일
김성일 지금 그 비슷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1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JiYoung Kim
JiYoung Kim 몇몇 양반여성들의 묘지명을 보면, 남편들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매진할수 있도록 부인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록들이 보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난하면 ‘봉제사접빈객’이 어려워지니 곳간열쇠를 쥔 부인네들이 자연스레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가계경영에 몰입한게 아닐까요?
3
Hide or report this
Like
 · Reply · 1w
Eunhee Kim
Eunhee Kim replied

 ·
 1 reply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