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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 30일 정지 때 여기저기 게재한 램지어 논문에 대한 첫 번째 글입니다. 논문 소개와 그와 관련, 한국의 동향에 대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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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이후 약 2주간,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뉴스는 美 하버드 대학의 존 마크 램자이어(John Mark Ramseyer) 교수가 ‘국제법경제학리뷰(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誌에 게재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논문, ‘태평양 전쟁에서의 성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 언론은 램자이어 교수가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주장했다”고 일제히 보도했고 한국 사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MBC TV는 비록 인용하는 형태를 취했지만 램자이어 교수를 “노랑머리 일본인”이라고 인종주의적으로 비난하는 일부 한국인들의 반응을 여과없이 기사로 내보냈다. 그는 “친일파”, “일본의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에서 돈을 받는자” 등으로 매도되었다. ‘메시지를 반박하지 못하면 메신저를 죽여라’라는 말에 딱 맞는 보도 행태였다. 반일 종족주의의 소용돌이가 모든 이슈를 삼키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다시 한번 연출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언론인들은 정작 논문을 읽지 않았거나 읽었다고 해도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사실은 전자(前者)일 가능성이 높다. 이 논문에 대한 초기 보도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한국 연합통신이 배포한 기사를 모든 미디어가 거의 있는 그대로 베껴 쓰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익숙한 관행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직접 논문을 읽으라고 요구하는 내가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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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술 논문은 첫머리에 초록을 붙이고 3-5개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이 논문에서는 “매춘(Prostitution)”과 “연계봉공(年季奉公, Indentured servitude)”이다. 일본 경제사(經濟史)에서 연계봉공인으로 유명한 것은 에도(江戶)시대의 여성 중에서 즉 여관, 음식점 등의 여자종업원이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구경도 할 수 없는 금액을 차금(借金)으로 받고 취업처에 가서 수년동안 일했다.
세계 경제사 차원에서 유명한 연계봉공인(Indentured labor)은 18-9세기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도항에는 선임(船賃), 음식비 등이 필요했고 유럽의 빈곤한 노동자에게는 고액의 부담이었다. 이에 미국 현지의 고용주들은 도항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고 미국에 도착한 뒤 보통 7년 동안 그들을 사역(使役)하였다.
램자이어 교수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 일본 유곽의 매춘부, 개전(開戰) 이후 군위안소의 위안부와 업주 사이의 계약을 연계봉공 계약으로 파악했다. 업주들은 취업=성서비스의 개시 이전에 매춘부나 위안부들에게 전차금(前借金)이라는 이름으로 거액을 제공하고 그녀들은 취업 이후 수년에 걸쳐 그것을 갚아나갔다. 그녀들이 손님으로부터 받는 금액, 즉 매출액은 일정한 비율로 업주와 여성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여성들은 이 돈의 일부를 전차금을 갚는 데 사용했다.
모든 학술 논문은 첫머리에 초록을 붙이고 3-5개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이 논문에서는 “매춘(Prostitution)”과 “연계봉공(年季奉公, Indentured servitude)”이다. 일본 경제사(經濟史)에서 연계봉공인으로 유명한 것은 에도(江戶)시대의 여성 중에서 즉 여관, 음식점 등의 여자종업원이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구경도 할 수 없는 금액을 차금(借金)으로 받고 취업처에 가서 수년동안 일했다.
세계 경제사 차원에서 유명한 연계봉공인(Indentured labor)은 18-9세기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도항에는 선임(船賃), 음식비 등이 필요했고 유럽의 빈곤한 노동자에게는 고액의 부담이었다. 이에 미국 현지의 고용주들은 도항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고 미국에 도착한 뒤 보통 7년 동안 그들을 사역(使役)하였다.
램자이어 교수는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 일본 유곽의 매춘부, 개전(開戰) 이후 군위안소의 위안부와 업주 사이의 계약을 연계봉공 계약으로 파악했다. 업주들은 취업=성서비스의 개시 이전에 매춘부나 위안부들에게 전차금(前借金)이라는 이름으로 거액을 제공하고 그녀들은 취업 이후 수년에 걸쳐 그것을 갚아나갔다. 그녀들이 손님으로부터 받는 금액, 즉 매출액은 일정한 비율로 업주와 여성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여성들은 이 돈의 일부를 전차금을 갚는 데 사용했다.
램자이어 교수의 아이디어는 좋은 논문이 보통 그러하듯이 간단하다. 먼저 ‘매춘부와 위안부의 계약은 왜 이런 특수한 형태를 취하는가?’하고 묻는다. 일반적인 노동자는 먼저 일을 하고 그 보수를 일급(日給), 주급, 월급 등의 형태로 받아 간다. 그런데 왜 매춘부나 위안부는 업자들과 전차금, 수년의 계약기간, 매출액의 분할 비율 등이 정해진 독특한 계약을 하게 되었는가?
해답도 간단하다. 취업을 제안받은 여성은 하나의 문제에 봉착한다. 매춘산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그녀의 평판을 치명적으로 손상시킨다. 따라서 업자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그러나 업자가 과연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킬 것인지, 그녀들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업자가 미리 고액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것이 ‘전차금’이다.
업자도 문제에 부딪힌다. 이 산업의 특성상, 그들이 성실하게 근무하는지 감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이 폐쇄된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저들에게 후한 대우를 하지만 저들이 과연 열심히 노동할까? 손님이 다시 찾아와 프론트에서 같은 여성의 이름을 호출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여성들이 벌어들인 돈(매출액)을 일정한 비율로 주인과 함께 분할하는 것이다. 정액의 급여를 준다면 여성들은 최대한 불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최선이 되지만 이렇게 되면 그들도 최대한 열심히 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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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앞서 말한 특수한 형태의 계약, 일종의 연계봉공 계약이 이루어진다. 이상이 램자이어 교수 논문의 요지다. 따라서 그를 비판하려면, 그가 제기한 “문제”와 “해답”을 비판하면 된다. 먼저, ‘매춘부나 위안부가 계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 관헌에 의해 끌려갔다’고 말하고 그 증거를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소위 “강제연행”이다. 그러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지 30년이 되었지만, 그러한 증거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앞서 말한 특수한 형태의 계약, 일종의 연계봉공 계약이 이루어진다. 이상이 램자이어 교수 논문의 요지다. 따라서 그를 비판하려면, 그가 제기한 “문제”와 “해답”을 비판하면 된다. 먼저, ‘매춘부나 위안부가 계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본 관헌에 의해 끌려갔다’고 말하고 그 증거를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소위 “강제연행”이다. 그러나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된지 30년이 되었지만, 그러한 증거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한국의 반일 종족주의자들이 “강제연행설”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전(前) 위안부들의 “증언”뿐이다. 자신이 일본인 군인에 의해,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는 바로 증언. 그러나 나는 그 증언을 신뢰하지 않는다. 램자이어 교수와 같이 외국인으로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있어 더 유리한 입장에 서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지금도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공격하는 데 열심이며, 한국에서 국가원로(?) 취급을 받는 전 위안부 이용수의 증언조차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녀가 커밍아웃할 당시, 1993년 경에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를 보고 따라갔다고 말했지만, 2000년 무렵부터는 일본 군인이 끌고 갔다고 말을 바꿨다. 그간 소위 위안부 운동가와 연구자들이 내건 강제연행의 증언들이 모두 이와 같다. 업자와 위안부 사이의 “계약”을 비판할 수 없게 된 그들, 그리고 한국의 미디어들은 램자이어 교수라는 메신저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위안부에게 거액의 전차금을 주고 수년에 걸쳐 갚아나가게 했다는 주장(이것은 주장도 아니다. 역사적으로 객관적인 사실일 뿐이다)을 비판하려면 주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면 될 일이다. 위안부들이 전차금을 모두 갚거나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자유가 되었고 조선인 위안부들은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이나, 그녀들은 매출액을 분할받아 고액의 소득을 누렸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그와 상반되는 증거를 제시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반일 종족주의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구조에서 비약이나 오류를 발견할 수도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메신저를 비난하는 것만 남았다.
램자이어 교수에 대해 “위안부가 성노예가 아니라 매춘부라고 주장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논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초점을 맞추지 못한 비난이다. 하물며 이 논문에는 “성노예(sex slave)”라는 말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매춘부나 위안부와 업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이것은 램자이어 교수가 처음으로 말하는 바가 아니라, 위안부 연구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이 비록 그녀들이 매춘부였음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녀들이 성노예가 아니었음을 주장하는 데 이용될 수 있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반일종족주의자들은 그에 대해 비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역사적·객관적인 사실과 자료는 존재하지 않고 그러한 논리적 문제를 제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램자이어 교수에 대해 괜한 난리법석을 피우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한국의 반일 종족주의자들은 윤미향의 부정행위로 위안부 “운동”이 한국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할 상황에 처하였지만 그에 대처할 수 없었다. 또 2019년부터 한국 사회에서 파란을 일으킨 책 ‘반일 종족주의’를 통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새롭고 설득력이 있는 설명을 설명과 자료를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위안부는 결코 “성노예”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위안부를 “성노동자”로 이해한다. 그런데 반대편에서는 이번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역공의 빌미가 필요했다. 마침 산케이신문이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을 소개했다. 그들은 이 기회를 물고 늘어졌다. 인신공격을 벌였고 반일 여론몰이에 나섰다. 상황을 잘 모르는 한국인들은 미국과 일본에서도 위안부 문제가 논쟁이 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미디어는 이 문제에 대해 조용하기만 하다. 미국에서는 하버드 대학의 학내신문에 실린 한국인 학부생 기자의 메아리 없이 공허한 아우성뿐이었다.
반일 종족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소란은 국내적으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큰 성과를 거뒀는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위안부 문제로 일본 때리기에 실패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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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許修禎, 최덕효 and 39 others
윤정윤
2001년 여성부에서 192명의 위안부 피해 신고자를 면담해 발간한 "일본군 ‘위안부’ 증언ㆍ통계 자료집"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http://dl.nanet.go.kr/law/SearchDetailView.do...
램지어 논문에 대한 두 번째 기고문입니다. 오늘 미국 에이미 스텐리(Amy Stanley)가 문제 삼은 전 위안부 문옥주에 대한 언급은 여기에서였습니다.
이 글은. 램지어 논문의 촛점, 그리고 위안부의 주류는 부모에 의해 팔려간 딸이나 이미 매춘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제 주장입니다.
...
어느 사회에서나 매춘부의 성(性)노동은 고된 것이었으며 자신에 대한 사회의 평판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고수입을 누렸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의 일본 유곽에서 일했던 매춘부나 전시의 일본군 위안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사정은 그들이 유곽이나 위안소 업자와 맺은 계약에서 잘 나타난다.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은 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그가 업주와 매춘부 또는 군위안부의 계약을 연계봉공(年季奉公)으로 파악하면서 그 계약구조를 잘 설명했다.
램자이어 교수에 따르면, 위안부 계약구조의 첫째는 취업 이전에 매춘부·군위안부에게 주어지는 전차금(前借金), 둘째는 그들이 노동하는 연수(年數)를 규정한 계약기간(年季), 셋째는 매출액을 업자와 매춘부·군위안부가 분할하는 비율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기고문 ‘하버드대 위안부 논문 논란, ‘반일 종족주의’ 쇠퇴 전환점 될 것‘을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이러한 특징을 램자이어 교수가 처음으로 말한 것은 아니고, 관계 연구자들에게는 잘 알려진 바이다. 그의 논문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전전(戰前)의 매춘부보다 전시의 군위안부에 대한 대우가 더 좋았다는 사실이다. 그녀들이 일하는 곳이 전장(戰場)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 군위안부들은 전방이건 후방이건, 일본 내지(內地)나 조선과 달리 목숨을 잃거나 부상할 위험에 직면한다. 둘째, 업주가 계약을 위반할 때 위안부가 대처할 수 있는 선택지가 줄어든다. 도쿄나 경성(京城)에서는 지인, 경찰, 법정에 의지할 수 있었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대중 속으로 도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국의 전장에서는 이러한 선택이 어렵다.
고위험에 대한 보상은 고수입이었다. 이것은 1939년 9월 이후에 이루어진 조선으로부터 일본 등지로의 전시노무동원(징용을 포함한다)을 연상시킨다. 1920-30년대 일본에서 일하는 조선인의 임금은 일본인의 1/2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전시동원 이후에는, 작업능력에 따른 차이는 있었지만 민족차별 등 비경제적인 이유로 임금을 차별하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차별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개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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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자이어 교수에 따르면 192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전차금은 1,000-1,200엔이었다. 당시 공장 여공(女工)의 일일(一日) 임금은 1엔 50전 이하였다. 또 여공과 달리 매춘부는 식사와 주거를 제공받았다. 당시처럼 경제발전의 수준이 낮아 엥겔지수가 높은 상황에서 식사와 주거의 제공은 매춘부와 다른 직종 사이의 임금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킨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나는 전차금이 여공 1일 임금의 1천 배를 크게 상회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전쟁 이후에도 전차금의 액수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그 대신 연계(年季)가 단축되었다. 매춘부의 경우 일본에서는 6년, 조선에서는 3년이 보통이었는데, 위안소에서는 2년이었다. 또 버마처럼 6개월에서 1년으로 계약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위안부는 매춘부와 마찬가지로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전차금의 전액 상환 여부와 관계없이 위안소를 떠날 수 있다. 따라서 계약기간이 단축됨으로써 위안부의 귀향이 쉬워졌을 것이다. 위안부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종전 이후에야 비로소 귀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강제연행설”과 “성노예설”의 영향이다. 위안소의 개설이 본격화된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종전 이전에 돌아온 군위안부들이 많았을 것이다. 위안소에서 종전을 맞이한 경우는 오히려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매출액을 업주와 분할하는 비율도 군위안부에게 유리해졌다. 7:3에서 6:4 정도로의 변화다. 4:6의 비율을 채택한 경우도 있었다. 그 결과 불과 몇 달만에 전차금을 상환하고 돌아오는 군위안부도 많았다. 이것은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전 니혼(日本)대학 교수도 말한 바이다(‘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慰安婦と戰場の性)’(신초샤(新潮社)). 나는 군위안부가 맞이하는 군인의 수가 매춘부의 일반 손님보다 훨씬 많았고, 따라서 소득이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여기에 추가하고 싶다.
1925년, 도쿄 유곽에서 매춘부가 서비스하는 인원은 일일 평균 2.5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전선에서는 위안부가 항상 부족하였다. 또 일본군은 위안소에 대하여 성병 예방을 위한 철저한 위생관리 등을 의무로 부과하거나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대신에 병사들로 하여금 위안소를 제외한 다른 업소의 이용을 금지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종전 뒤에 군위안부들이 자기 돈을 군으로부터 회수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도 종전 이전에 귀환한 군위안부가 훨씬 많았으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예외적이었을 것이다.
군위안부는 매춘부에 비해 “고위험, 고수입”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메신저인 램자이어 교수에 대한 인신공격에 전념해왔다. 그러던 한국 언론이 미국의 일부 한국·일본사 연구자들의 견해를 전달하면서, 메시지에 대한 비판을 일부 내놓았다. 첫 번째는 램자이어 교수가 ‘조선인 모집업자의 책임이 일본국가보다 더 크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논문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조선이나 일본의 정부가 여인들에게 매춘을 하도록 강요한 것은 아니다. 일본군이 사기를 벌이는 모집업자와 함께 일한 것도 아니다. 모집업자가 군대의 위안소에 초점을 맞춘 것도 아니다. 대신에, 문제는 수십 년간 젊은 여자들을 속여 매춘업소에서 일하게 해왔던 국내의 조선인 모집업자에 관련된다.”
물론 직접적인 책임은 조선인 모집업자에게 있다. 일본군은 취업사기나 인신매매에 의한 위안부 모집이 군의 위신을 떨어트린다는 이유로 경계했고, 총독부는 그러한 모집업자를 단속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군은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관여하였다. 이것이 일본의 잘못일까? 잘못이다. 모든 인간은 잘못을 저지른다. 이럴 때는 역사적 비교가 유익하다.
청교도의 전통이 강한 미국이 “전장의 성(性)”에 대해 취한 이중적인 태도는 유명하다. 1941년 이후 “병사의 매춘부와의 접촉은 어떠한 지역에서도 금지”한다는 원칙을 끝까지 유지하였다. 그런데 현지 매춘부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성병이 문제가 되자 군의총감은 콘돔 15만 상자와 소독약 31만 상자를 공수와 선편으로 전선으로 보냈다. 1942년 가을의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은 훨씬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예를 들어, 라이케의 미군 캠프 속에는 2동(棟)의 “레크레이션 센터”가 있었고, 그 속에서 60명의 베트남 여성들이 60개의 개인실에서 침식하며 일했다. 매출액은 업주와 여성이 6:4로 분할하였고, 군의관이 그녀들을 매주 검진하고 안전한 여성은 팻말로 표시해 주었다. “디즈니랜드”라고 불린 이곳은 여단장이 감독하였고, 팬타곤까지 묵인했다. 어디에서 많이 본 모습이다. 바로 일본군 위안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도 일본군 위안소와 흡사한 위안소를 설치했고, 1942년 현재 500여 개에 달했다.
미국 연구자들은 램자이어 교수에 대해, 두 번째로 “조선인 군위안부와 위안소 업자 사이에서 계약은 없었다”고 비판한다. “강제연행”이었으므로 계약은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강제연행”의 증거가 없다는 사실, “10대 초반의 소녀가 계약을 알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위안부는 보통 20대, 평균적으로 20대 중반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충분해보인다. 좀 더 역사적인 사실에 부합하는 문제에 촛점을 맞춰보자.
조선인 알선업자가 좋은 일자리를 소개한다며(취업사기) 여성을 유괴하여 팔아넘기는 일이 있었다. 이때 여성은 자신이 위안부로 일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위안소로 갔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계약이 불필요하고, 고액의 전차금이 지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이 따랐다. 우선, 조선에서 취업사기를 포함한 유괴는 전쟁 이전부터 경찰의 단속대상이었다.
다음으로 여성이 현지에 도착한 후에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위안소를 이용하고 관리를 담당하는 부대는 군위안부 본인들이 장차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인지하였는지를 확인했다. 따라서 유괴에 의한 군위안부 모집은 부모에 의한 사실상의 인신매매를 동반하는 경우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모집업자가 위안소 경영자를 대신하여 부모에게 주는 돈은, 부모 입장에서는 딸을 판 대가이지만, 모집업자나 경영자에게는 전차금이 된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반일 종족주의’(미래사)에 따르면, 모집업자와 부모의 이러한 거래는 인신매매라는 불법과 호주제(戶主制) 하의 정당한 권리행사와 직업알선이라는 합법 사이에서 경계에 위치하였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인신매매가 횡행하고 때로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혐의에 의해 조사를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무죄로 처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모집업자와 거래하는 부모는 딸이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전차금을 받는다는 명시적 계약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부모가 그를 알았다면, 이는 램자이어 교수가 말하는 계약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비판가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있다. 램자이어 교수가 군위안부로서 큰 돈을 벌었다고 소개한 옛 위안부 문옥주가 “업자보다 나를 판 부모가 훨씬 더 밉다”고 말했다는 사실도 이러한 정황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위안부와 업자 사이에서 계약이 이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조선이나 외지에서 전쟁 이전부터 이미 매춘부로 일하고 있는 여성을 모집할 때였을 것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가장 소홀히 다루었지만, 가장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우선, 1940년 경 조선반도(오늘날 한반도) 내에는 총독부가 파악한 매춘부가 약 1만 명을 헤아렸다. 또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전장과 대체로 겹치는 중국, 만주 등 조선인 진출지역의 조선인 매춘부가 8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정부기관이 파악한 숫자일 뿐이다. 이러한 매춘부들을 위안부로 전업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현재의 일자리에 비교할 때 “고위험, 고수입”이라는 점을 알리는 것일 것이다.
모집업자의 입장에서 볼 때, 기존 매춘부의 경우, 유괴나 인신매매에 따르는 위험이 없었다. 매춘부의 처지에서는 군위안부가 된다고 해서 사회적 평가가 추가적으로 손상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군인을 위안한다는 자부심을 갖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일본군 상부나 병사들이 위안부의 출신을 따질 처지도 아니었고 실제도 따지지도 않았다. 이상을 고려할 때, 알선업자가 접근하는 첫 번째 대상은 조선 내외의 매춘부였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가장 좌익적이고 반일적인 한겨레신문의 사장을 역임한 송건호(宋建鎬)는 위안부 문제가 정치화되기 전인 1984년에 그가 낸 책, ‘일제지배하의 한국현대사(日帝支配下の韓國現代史)’(카제토오샤(風濤社), (일본어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1927년생으로서 식민지기를 경험한 사람이다.
“일본 당국은 1937년말의 남경(南京) 공략 후, 서주(徐州)작전이 개시될 무렵, 조선 내의 어용 알선업자들에게 지시하여 빈핍(貧乏)으로 매춘생활을 하고 있던 조선 여성을 다수 중국대륙으로 데리고 가서 ‘위안소’, ‘간이위안소’, ‘육군오락소’ 등의 명칭을 가진 일본군 시설에 배치하고, 일본군 병사의 노리갯감으로 삼았다.”
또 버마 랑군에 소재하는 둘째 부인의 남동생(처남)이 소유한 위안소에서 손님 안내와 회계 등을 담당하는 쵸우바(帳長)로 일하고 그 생활을 일기로 남긴(‘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이숲 출판사)) 박 씨의 부인은 대구에서 여관을 운영하였다. 당시 여관업은 매춘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박 씨와 그의 처남이 군위안부를 모집할 때, 그들은 농촌에 가서 여성을 유인하거나 비정한 부모를 찾아 딸을 매입하기 보다는 이미 부인과 관계가 있는 매춘부들을 먼저 교섭하지 않았을까?
지난 기고에서 말했듯이, 옛 위안부들은 처음에는 취업사기나 인신매매에 의해 위안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매춘에 종사했다는 증언은 없다. 매춘에 종사한 사람이 이를 밝히는 것은 한국에서는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을 자초한다. 일본에서 실명으로 자신이 군위안부였음을 밝히고 나선 사람이 없는 것도 비슷한 까닭이다. 물론 한국에서 커밍아웃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지 않았던 사람들로부터 집중적으로 배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취업사기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 인신매매에 의해 위안부가 된 경우, 원래 매춘업에 종사자였던 이가 위안부가 된 경우, 이 세 개의 경로 중에서 둘째와 셋째가 중심이라고 하면, 역시 군위안부 또는 그녀를 대신한 부모와 업자는 경제적 계약을 맺었다고 보아야 한다. 램자이어 교수의 논문은 그러한 점에서 논의의 출발이 되기에 충분하다. 한국의 학계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반일민족주의에 호소하거나 논자를 인신공격하는 구태를 벗고, 학문적 토론을 시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한국의 위안부 연구자들이 이상에 대해 답해야 한다.
41許修禎, 최덕효 and 39 others
윤정윤
2001년 여성부에서 192명의 위안부 피해 신고자를 면담해 발간한 "일본군 ‘위안부’ 증언ㆍ통계 자료집"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http://dl.nanet.go.kr/law/SearchDetail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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