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모는 문익환-박용길 역사적 방북 사건들의 동행자’
[기고] 정경모 선생을 추모하며 / 강민화
2021-02-21 강민화
강민화 / 재일 대동연구소 소장
2021년 2월 16일에 정경모 선생이 타계했다. 향년 97세.
선생은 학생시절에 의학을 전공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정전담판의 미군 측 통역관을 지냈으며, 그 후 일본에 건너와서 망명객으로서 이곳에 머무르게 된 다음부터는 ‘씨알의 힘’사 대표로서의 활동 등을 통해서 통일운동가, 평론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모국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정경모라는 인물과 서로 알게 되어 약 30년밖에 안된 내가 그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때문에 처음에는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 과연 어울릴지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비록 길지 않은 기간 중의 일들이기는 하지만 통일운동 과정의 잊지 못할 추억들인 만큼 꼭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주위의 권고도 있어서 몇 자 적기로 했다.
정경모 선생이 대표를 맡은 ‘씨알의 힘’사에서 발행된 잡지와 저서.
“당신은 크리스찬인가?”
정경모 선생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청춘시절에 일본 아시히신문사에서 출판된 <한 한국인의 마음-조선통일의 새벽에>(ある韓国人のこころ―朝鮮統一の夜明けに)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그 후 집회나 강연회 등에서 몇 번 선생을 보았다. 또한 1989년 봄에는 방북을 마치고 도쿄에 들린 문익환 목사가 기자회견을 했을 때 목사의 통역을 맡았던 선생을 취재기자로서 가까이에서 보기도 했지만 내가 그를 직접 만난 것은 1992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인간 문익환>이라는 책을 지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작업이 진척됨에 따라 아무래도 선생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경모라고 하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문익환 목사와 그의 부인 박용길 여사(장로)의 방북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의 동행자, 목격자로서의 그의 모습이다.
나는 이 두 사건과 관련해서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김일성 주석의 민족애와 통일의지가 세상에 보다 널리 알려졌다면, 박용길 여사의 방북을 통해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물상이 보다 생동하게 알려졌다고 나름대로 생각해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경모 선생은 역사적 사건들의 산 증인인데 그러한 인물을 만나보지 않고 어떻게 문익환 목사에 관한 책을 지어낼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날 나는 선생을 만나러 여름철인데도 정장을 하고 당시 도쿄 시브야(渋谷)에 있는 ‘씨알의 힘’사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전철을 내리자마자 소낙비를 맞은 바람에 나는 흠뻑 젖은 몸으로 사무실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어서 오라며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선생에게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찾아온 용건에 대해서 말했다.
그랬더니 선생은 나에게 “당신은 크리스찬인가?”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다”고 대답하자 선생은 좀 의아한 표정으로 “크리스찬도 아닌데 문익환에 대해서 쓴다고?”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나는 “문익환은 목사가 맞다. 그러나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목사로서의 문익환에 대해서가 아니라, 목사이자 시인이며 민주화·통일운동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고 통일을 절절히 염원하는 인간으로서의 문익환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인간 문익환>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평양을 찾은 문익환 목사를 맞이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녘동포들의 민족애와 통일의지에 대해서 널리 알리려고 한다, 그래서 목사의 방북기록을 책의 소재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선생은 방안을 살피다가 이런 것들도 책을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한번 읽어보라며 몇 가지 자료들을 넘겨주었다. 그 가운데는 평양에 도착한 날 연회장에서 선생이 목사와 함께 부른 <선구자>라는 노래의 가사와 악보도 있었다.
다 아는 것처럼 <선구자>는 1930년대에 중국 용정(龍井)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보며 윤해영이라 하는 사람이 작사를 했고 조두남이라는 사람이 작곡한 노래인데, 선생에 의하면 두 분은 평양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도 도쿄에서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가 이 노래를 애창한 것은 그가 노래의 무대가 된 ‘독립운동의 연고지’ 용정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99년 3월 1일 도쿄에서 3.1운동 80주년을 기념해서 통일토론회가 열렸는데, 나는 행사가 끝난 다음 회식 장소에서 선생과 함께 이 <선구자> 노래를 불렀다.
“이 사람이 <인간 문익환>을 쓴 사람이요”
1992년 12월에 출판된 저서 . [사진제공-강민화]
나의 첫 저서 <인간 문익환>은 1992년 12월에 일본 츠게쇼보(柘植書房)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인 1993년 1월 도쿄에서 ‘정치범 서화전’이 열렸는데 나는 여기서 또 정경모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이때 내 팔목을 잡고는 행사장의 한곳에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참으로 놀랍게도 박용길 여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어서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은 여사에게 “이 사람이 바로 강민화요. <인간 문익환> 책을 쓴 바로 그 사람 말이요”라고 나를 소개해주었다.
나중에 선생으로부터 들은데 의하면 전날에 도쿄에 도착한 여사는 <인간 문익환> 책을 보자 다음날 아침에 숙소를 나갈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주의깊이 보았다고 한다.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나는 여사에게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고 반갑다, 옥중에 계시는 목사님의 건강은 어떠하신가? 부디 인사를 전해달라는 내용으로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자 여사는 이렇게 훌륭한 책이 일본에서 출판된 줄은 몰랐다면서 “감사합니다”라고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영감(목사)이 추운 겨울에도 감방에서 맨발로 지낸다고 목사의 소식도 들려주었다.
박용길 여사 하고는 그 후 전화로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편지도 주고받게 되었다. 1990년대 말에 남녘동포들의 금강산관광이 시작되자 여사도 결혼 전에 목사의 요양을 위해서 머물었다고 하는 이곳을 찾았는데, 그녀는 그때 감격을 담아서 나에게 편지와 함께 자신이 쓴 시를 보내주었다.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여사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내외분이 살던 자택 ‘통일의 집’은 빈집이 되었다. 그 후 집은 기념관으로 거듭났는데 여기에는 <인간 문익환> 책이 이전처럼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2002년 10월에 서울에서 박용길 여사와 만났다. 그때 나는 일본에 돌아와서 여사로부터 부탁받은 대로 정경모 선생에게 그녀의 안부 인사를 전했다. 그랬더니 선생은 “아니 그래? 서울에 다녀왔단 말이지?” 하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한시도 잊지 못한 모국, 고향 생각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정경모 선생은 만년에 서울에로의 귀환을 희망했다고 하는데 만약에 그 희망이 실현되었다면 틀림없이 이 집을 찾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박용길 여사와 만나다(2002.10.1). [사진제공-강민화]
처음으로 공개된 문익환 방북 때 이야기
<인간 문익환> 책이 세상에 나가자 이를 계기로 그때까지 그저 소박하게 통일을 염원했던 나는 본격적인 통일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자신의 통일운동의 원점인 셈이다.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나서게 된 이후 나는 여러 통일행사들에서 정경모 선생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2000년 7월 4일에 도쿄에서 열린 통일토론회를 잊을 수 없다.
토론회는 이 해 6월에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들의 만남과 회담이 진행되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직후에 열렸기 때문에 장내는 수백 명 청중들로 꽉 찼으며 출연자들의 이야기는 박수와 환호, 웃음소리로 자주 중단되었다.
2000년 7월 4일에 도쿄에서 열린 통일토론회 모습. 오른쪽에서 한국문제연구소(재일) 강종헌 대표, 정경모 선생, 재미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 그리고 필자. [사진제공-강민화]
나는 이때 토론회 진행역을 맡았는데, 출연자인 정경모 선생에게 평양을 찾은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사이에서 ‘느슨한 연방제’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문 목사와 동행했던 선생은 이번에 6.15공동선언을 통해서 나라의 통일을 위한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과 남측의 연합제안 사이의 공통성에 기초해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합의가 이루어진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질문했다.
그러자 선생은 그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문 목사와 김대중 씨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야겠다고 하면서 내가 오늘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겠다고 서두를 뗀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에 의하면, 문익환 목사는 그때 김대중 씨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많은 여비까지 받고 평양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이때 청중들 앞에서 “문익환 목사는 김대중 씨의 이야기를 받아서 평양에 갔다”고 분명 말했다.
선생은 그날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사이에서 연방제로 통일하되 처음에는 외교권과 군사권을 남북이 제각기 가지며, 연방제를 단계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번에 6.15공동선언에서 서로의 통일방안의 공통성에 기초해서 통일을 지향해 나갈 데 대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 후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6.15공동선언은 1989년 4월 2일에 발표된 문익환 목사와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공동성명을 계승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4.2공동성명이 있었기 때문에 6.15공동선언이 나왔다고 한 선생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선생은 이날 토론회에서 ‘년년세세 화상사(年年歳歳 花相似)/세세년년 인비동(歳歳年年 人非同)’, 즉 년년세세 꽃은 서로 닮았으되 세세년년 사람은 같지 않다는 노래를 소개하고는 세월은 흐르고 인걸들은 가고 없으나 민족의 얼은 맥맥이 흐르고 있다며 감개무량해하였다.
그 후 모처럼의 6.15시대 흐름이 막혔다가 2018년에 남북의 정상들이 다시 만나서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선생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쉽게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자택에서의 마지막 만남
정경모 선생의 자택에서(2015.11.7). [사진제공-강민화]
정경모 선생의 자택은 일본 요코하마의 히요시(日吉)에 있는데 나도 몇 번 찾아갔었다.
3, 4년 전이었을 것인데 그날도 나는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그날따라 지난날에 대한 추억들이 화제에 올랐는데 나는 만약에 선생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인간 문익환>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통일운동을 하는 오늘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선생이 쑥스러워하면서도 흡족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선생은 해방직후에 한반도에서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며 일본은 다시 일어선다”는 노래가 불리었는데 요즘 정세를 보면 바로 이 노래대로 되어간다고 우려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정경모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정경모라는 인물에 대해서 좋게만 평가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는데 나는 그에 대해서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고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선생이 완고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성미 때문에 생전에 인간관계에서 좀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선생의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을 읽은 어떤 인사는 선생이 특정 단체나 인물에 대해서 욕한 부분만 없었다면 참으로 좋은 책인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지어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이 아닌 이상은 자꾸 단점만 부각시켜봐야 어떻게 정확한 인물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
지금쯤 선생이 저승이라는 데서 문익환 목사나 박용길 여사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는지. 마음속으로부터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때 온 겨레가 한결같이 통일을 외치며 들끓던 시기와 달리 지금 우리의 통일위업은 또다시 난관에 직면하고 있다. 그래서 남녘에서는 “한반도가 분단에 적응했다”는 한심한 소리까지 들려온다.
물론 통일은 쉽지 않으며 따라서 통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어제까지 함께 통일을 외쳤다가 상황이 어려워지자 변함없이 통일을 외치는 사람을 괴짜 취급하는 것도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정경모 선생과 처음으로 만났던 날, 그로부터 받은 한 자료에서 본 문익환 목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소개해서 글을 맺기로 한다.
“통일이 가능하느냐구요? 그럼 통일이 어려워 보이면 포기하실 건가요?
이건 질문부터 잘못되었습니다.
통일은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통일은 우리와 상관없는 무슨 거창한 명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이며 겨레의 문제입니다.
일제시대 우리 겨레는 “독립이 가능합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독립만이 민족이 살길이다를 외치며 온 힘을 다해 독립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만들려면 우리 겨레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당신은 크리스찬인가?”
정경모 선생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청춘시절에 일본 아시히신문사에서 출판된 <한 한국인의 마음-조선통일의 새벽에>(ある韓国人のこころ―朝鮮統一の夜明けに)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그 후 집회나 강연회 등에서 몇 번 선생을 보았다. 또한 1989년 봄에는 방북을 마치고 도쿄에 들린 문익환 목사가 기자회견을 했을 때 목사의 통역을 맡았던 선생을 취재기자로서 가까이에서 보기도 했지만 내가 그를 직접 만난 것은 1992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무렵에 나는 <인간 문익환>이라는 책을 지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작업이 진척됨에 따라 아무래도 선생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정경모라고 하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문익환 목사와 그의 부인 박용길 여사(장로)의 방북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의 동행자, 목격자로서의 그의 모습이다.
나는 이 두 사건과 관련해서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김일성 주석의 민족애와 통일의지가 세상에 보다 널리 알려졌다면, 박용길 여사의 방북을 통해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물상이 보다 생동하게 알려졌다고 나름대로 생각해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경모 선생은 역사적 사건들의 산 증인인데 그러한 인물을 만나보지 않고 어떻게 문익환 목사에 관한 책을 지어낼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날 나는 선생을 만나러 여름철인데도 정장을 하고 당시 도쿄 시브야(渋谷)에 있는 ‘씨알의 힘’사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전철을 내리자마자 소낙비를 맞은 바람에 나는 흠뻑 젖은 몸으로 사무실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어서 오라며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선생에게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찾아온 용건에 대해서 말했다.
그랬더니 선생은 나에게 “당신은 크리스찬인가?”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다”고 대답하자 선생은 좀 의아한 표정으로 “크리스찬도 아닌데 문익환에 대해서 쓴다고?”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나는 “문익환은 목사가 맞다. 그러나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목사로서의 문익환에 대해서가 아니라, 목사이자 시인이며 민주화·통일운동가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고 통일을 절절히 염원하는 인간으로서의 문익환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그래서 책의 제목도 <인간 문익환>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나는 “이 책을 통해서 평양을 찾은 문익환 목사를 맞이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녘동포들의 민족애와 통일의지에 대해서 널리 알리려고 한다, 그래서 목사의 방북기록을 책의 소재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선생은 방안을 살피다가 이런 것들도 책을 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니 한번 읽어보라며 몇 가지 자료들을 넘겨주었다. 그 가운데는 평양에 도착한 날 연회장에서 선생이 목사와 함께 부른 <선구자>라는 노래의 가사와 악보도 있었다.
다 아는 것처럼 <선구자>는 1930년대에 중국 용정(龍井)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보며 윤해영이라 하는 사람이 작사를 했고 조두남이라는 사람이 작곡한 노래인데, 선생에 의하면 두 분은 평양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도 도쿄에서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가 이 노래를 애창한 것은 그가 노래의 무대가 된 ‘독립운동의 연고지’ 용정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99년 3월 1일 도쿄에서 3.1운동 80주년을 기념해서 통일토론회가 열렸는데, 나는 행사가 끝난 다음 회식 장소에서 선생과 함께 이 <선구자> 노래를 불렀다.
“이 사람이 <인간 문익환>을 쓴 사람이요”
1992년 12월에 출판된 저서 . [사진제공-강민화]
나의 첫 저서 <인간 문익환>은 1992년 12월에 일본 츠게쇼보(柘植書房)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해인 1993년 1월 도쿄에서 ‘정치범 서화전’이 열렸는데 나는 여기서 또 정경모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이때 내 팔목을 잡고는 행사장의 한곳에 데리고 갔는데 거기에는 참으로 놀랍게도 박용길 여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어서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은 여사에게 “이 사람이 바로 강민화요. <인간 문익환> 책을 쓴 바로 그 사람 말이요”라고 나를 소개해주었다.
나중에 선생으로부터 들은데 의하면 전날에 도쿄에 도착한 여사는 <인간 문익환> 책을 보자 다음날 아침에 숙소를 나갈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주의깊이 보았다고 한다.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때 나는 여사에게 이렇게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고 반갑다, 옥중에 계시는 목사님의 건강은 어떠하신가? 부디 인사를 전해달라는 내용으로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자 여사는 이렇게 훌륭한 책이 일본에서 출판된 줄은 몰랐다면서 “감사합니다”라고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영감(목사)이 추운 겨울에도 감방에서 맨발로 지낸다고 목사의 소식도 들려주었다.
박용길 여사 하고는 그 후 전화로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편지도 주고받게 되었다. 1990년대 말에 남녘동포들의 금강산관광이 시작되자 여사도 결혼 전에 목사의 요양을 위해서 머물었다고 하는 이곳을 찾았는데, 그녀는 그때 감격을 담아서 나에게 편지와 함께 자신이 쓴 시를 보내주었다.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여사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내외분이 살던 자택 ‘통일의 집’은 빈집이 되었다. 그 후 집은 기념관으로 거듭났는데 여기에는 <인간 문익환> 책이 이전처럼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2002년 10월에 서울에서 박용길 여사와 만났다. 그때 나는 일본에 돌아와서 여사로부터 부탁받은 대로 정경모 선생에게 그녀의 안부 인사를 전했다. 그랬더니 선생은 “아니 그래? 서울에 다녀왔단 말이지?” 하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한시도 잊지 못한 모국, 고향 생각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정경모 선생은 만년에 서울에로의 귀환을 희망했다고 하는데 만약에 그 희망이 실현되었다면 틀림없이 이 집을 찾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박용길 여사와 만나다(2002.10.1). [사진제공-강민화]
처음으로 공개된 문익환 방북 때 이야기
<인간 문익환> 책이 세상에 나가자 이를 계기로 그때까지 그저 소박하게 통일을 염원했던 나는 본격적인 통일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때문에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자신의 통일운동의 원점인 셈이다.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나서게 된 이후 나는 여러 통일행사들에서 정경모 선생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2000년 7월 4일에 도쿄에서 열린 통일토론회를 잊을 수 없다.
토론회는 이 해 6월에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들의 만남과 회담이 진행되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된 직후에 열렸기 때문에 장내는 수백 명 청중들로 꽉 찼으며 출연자들의 이야기는 박수와 환호, 웃음소리로 자주 중단되었다.
2000년 7월 4일에 도쿄에서 열린 통일토론회 모습. 오른쪽에서 한국문제연구소(재일) 강종헌 대표, 정경모 선생, 재미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 그리고 필자. [사진제공-강민화]
나는 이때 토론회 진행역을 맡았는데, 출연자인 정경모 선생에게 평양을 찾은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사이에서 ‘느슨한 연방제’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문 목사와 동행했던 선생은 이번에 6.15공동선언을 통해서 나라의 통일을 위한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과 남측의 연합제안 사이의 공통성에 기초해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합의가 이루어진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질문했다.
그러자 선생은 그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문 목사와 김대중 씨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야겠다고 하면서 내가 오늘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겠다고 서두를 뗀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에 의하면, 문익환 목사는 그때 김대중 씨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많은 여비까지 받고 평양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이때 청중들 앞에서 “문익환 목사는 김대중 씨의 이야기를 받아서 평양에 갔다”고 분명 말했다.
선생은 그날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사이에서 연방제로 통일하되 처음에는 외교권과 군사권을 남북이 제각기 가지며, 연방제를 단계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번에 6.15공동선언에서 서로의 통일방안의 공통성에 기초해서 통일을 지향해 나갈 데 대한 합의가 쉽게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 후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6.15공동선언은 1989년 4월 2일에 발표된 문익환 목사와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공동성명을 계승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4.2공동성명이 있었기 때문에 6.15공동선언이 나왔다고 한 선생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선생은 이날 토론회에서 ‘년년세세 화상사(年年歳歳 花相似)/세세년년 인비동(歳歳年年 人非同)’, 즉 년년세세 꽃은 서로 닮았으되 세세년년 사람은 같지 않다는 노래를 소개하고는 세월은 흐르고 인걸들은 가고 없으나 민족의 얼은 맥맥이 흐르고 있다며 감개무량해하였다.
그 후 모처럼의 6.15시대 흐름이 막혔다가 2018년에 남북의 정상들이 다시 만나서 4.27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선생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쉽게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다.
자택에서의 마지막 만남
정경모 선생의 자택에서(2015.11.7). [사진제공-강민화]
정경모 선생의 자택은 일본 요코하마의 히요시(日吉)에 있는데 나도 몇 번 찾아갔었다.
3, 4년 전이었을 것인데 그날도 나는 선생의 자택을 찾았다. 그날따라 지난날에 대한 추억들이 화제에 올랐는데 나는 만약에 선생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인간 문익환>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통일운동을 하는 오늘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선생이 쑥스러워하면서도 흡족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선생은 해방직후에 한반도에서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며 일본은 다시 일어선다”는 노래가 불리었는데 요즘 정세를 보면 바로 이 노래대로 되어간다고 우려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정경모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정경모라는 인물에 대해서 좋게만 평가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는데 나는 그에 대해서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고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선생이 완고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성미 때문에 생전에 인간관계에서 좀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선생의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을 읽은 어떤 인사는 선생이 특정 단체나 인물에 대해서 욕한 부분만 없었다면 참으로 좋은 책인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도저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를 지어서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이 아닌 이상은 자꾸 단점만 부각시켜봐야 어떻게 정확한 인물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
지금쯤 선생이 저승이라는 데서 문익환 목사나 박용길 여사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는지. 마음속으로부터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때 온 겨레가 한결같이 통일을 외치며 들끓던 시기와 달리 지금 우리의 통일위업은 또다시 난관에 직면하고 있다. 그래서 남녘에서는 “한반도가 분단에 적응했다”는 한심한 소리까지 들려온다.
물론 통일은 쉽지 않으며 따라서 통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낙관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어제까지 함께 통일을 외쳤다가 상황이 어려워지자 변함없이 통일을 외치는 사람을 괴짜 취급하는 것도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정경모 선생과 처음으로 만났던 날, 그로부터 받은 한 자료에서 본 문익환 목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소개해서 글을 맺기로 한다.
“통일이 가능하느냐구요? 그럼 통일이 어려워 보이면 포기하실 건가요?
이건 질문부터 잘못되었습니다.
통일은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통일은 우리와 상관없는 무슨 거창한 명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이며 겨레의 문제입니다.
일제시대 우리 겨레는 “독립이 가능합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독립만이 민족이 살길이다를 외치며 온 힘을 다해 독립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세에 의해 분단된 조국을 하나로 만들려면 우리 겨레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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