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6

알라딘: [전자책] 문익환 평전-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김형수 (지은이)2018

알라딘: [전자책] 문익환 평전

문익환 평전 -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epub 
김형수 (지은이)다산책방2018-06-01 


종이책 페이지수 728쪽,

책소개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목사 문익환. 이후의 행보는 민주화 세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8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 1989년 평양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현재 그의 이름은 국가적인 행사나 방송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이런 때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2004년 출간된 <문익환 평전>을 새로운 디자인과 편집으로 다시 출간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 김형수는 현 세대에게 잊혀가는 문익환의 생애를 치밀한 자료조사와 시적인 언어로 생생하게 되살린다. 1918년 북간도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이 된 명동촌에서 윤동주와 함께 보낸 학창 시절, 6.25전쟁 정전 협정 당시 판문점에서 통역관으로 있었던 일, 아내와의 추억과 젊은 시절의 고민 등 그의 젊은 날의 모습이 때론 동화처럼, 때론 시처럼 펼쳐진다.


목차
『문익환 평전』을 다시 펴내며
프롤로그 : 20세기가 지나간 뒤에
원점
그의 기원을 찾아서
문익점에게서
19세기로부터의 망명자들
국경의 밤
북간도에 온 그리스도
거장들이 태어나던 때
최초의 기억들
어린 날
릴케처럼
좌절을 배우다
바람 속에 묻힌 삼촌
모진 바람에도 거세지 않은 용정 사투리
바람의 관측자
평양 시절
솥에서 뛰어나와 숯불에 내려앉다
신을 우롱한 대지
도쿄에서 발견한 존재의 비참성
연분홍 코스모스에게
짧은 희망 긴 절망
윤동주를 잃고
8월의 카오스
슬픈 남하南下
분단의 아침을 맞으면서
종교도 시대 위에서 집을 짓는다
침묵의 지대
미국행 여객선
그대들은 혼자가 아니다
1950년 여름, 서울
판문점으로 날아간 비둘기 두 마리
역사의 막다른 골목에서
세기의 방랑자
마지막 귀향
불치의 감탄사로 말하라
뼈아픈 후회
사월이 닫히는 소리
완전주의자의 꿈
한국인에서 히브리인으로
생의 반환점을 지나며
저잣거리로 나오다
새삼스런 하루
「히브리서 11장 1절」
야만의 시간, 1974
장준하 충격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57년 만의 만세운동
난형난제
신나는 법정
장미들의 반란
첫 번째 감옥, 22개월
불발이 된 ‘생의 피날레’
두 번째 감옥, 15개월
겨울이 긴 나라의 봄은 아름답다
하, 그림자가 없다
지옥의 한철
도봉산 1호
계엄령 속의 눈
세 번째 감옥, 31개월
오월의 양심
재야의 사령탑에 오르다
네 번째 감옥, 26개월
신랑이 신부의 방을 찾듯이
절정
때 묻은 십자가
잠꼬대 속의 시대정신
두 세기 사이의 아시아
일본에서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파란과 신명의 축제
일파만파
발자국을 흐트러뜨리지 말자
다섯 번째 감옥, 19개월
통일의 르네상스
여섯 번째 감옥, 21개월
발바닥으로 외칠 거야
폐허의 숲을 헤치며
비둘기들의 장례식
울지 않는 기념비

에필로그 : 삶의 환희! 삶의 슬픔!
후일담 : 낡은 수첩
사진 자료
문익환 연보
참고 자료
그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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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12 문익환은 그러한 현실에 참담하게 좌절했다. 교회 측 은 갈수록 열세인데 윤동주랑 셋이서 삼총사처럼 어울리던 소꿉동무마저 공산당 편에 서버렸다. 겨우 열두 살에 소학교 5학년생인 송몽규가 서슴없이 어른들 앞에 나서서 연설을 하고 다녔다.
P. 225 정치적으로는 미래를 꿰뚫어볼 혜안을 얻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립이 어려웠으며, 신학적으로는 아직 갈증이 많은, 그러면서 여성적인 감수성과 병약한 신체를 가진 서른 살의 문익환이 뛰어넘기에 세파의 물결은 너무도 높고 사나웠다.
P. 333 늦봄. 그렇다, 늦봄! 그는 봄을 좋아했지만 “철도 없이 지레 나온/ 풀포기/ 두셋/ 길섶에서 오들오들”(「너무 이른 봄」에서) 떨거나, “그리 따뜻하지도 않은/ 봄볕에/ 허겁지겁 쫓겨 들어온/ 한기”(「이른 봄의 단상」에서)의 시간들을 포근해하지 않았다. 이른 봄에게 “어차피/ 너는/ 봄의 선구자다”라고 말할 때는 평소 삶의 태도가 그렇듯이 피안의 불을 보는 듯한 거리감도 느껴진다. 그래, 늦봄으로서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나기나 한 것처럼 노래하는 것이다.  접기
P. 387 재야의 선봉장이었던 박형규는 문익환이 등장하자 민주화투쟁이 신나고 즐거우며 함께하지 못하면 혼자만 소외되는 느낌이 들 만큼 웃음이 넘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P. 441 그는 언제나 ‘낡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사적 인간성’을 몰아내기 위해서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모습으로 새로운 공동체, 즉 민중 앞에 서 있었다.
저자 및 역자소개
김형수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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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 시집 『가끔 이렇게 허깨비를 본다』,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조드-가난한 성자들 1, 2』,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흩어진 중심』 등과 『문익환 평전』 『소태산 평전』을 출간했으며 작가 수업 시리즈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로 큰 반향을 얻었다.
수상 : 2016년 만해문학상
최근작 :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유행가들>,<신동엽 문학기행> … 총 3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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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민주화 세대의 큰 선생 문익환 목사
시대의 복판을 살아온 그의 생애가 담긴 아름다운 평전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목사 문익환. 이후의 행보는 민주화 세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8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 1989년 평양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현재 그의 이름은 국가적인 행사나 방송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이런 때 문익환 목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2004년 출간된 『문익환 평전』을 새로운 디자인과 편집으로 다시 출간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저자 김형수는 현 세대에게 잊혀가는 문익환의 생애를 치밀한 자료조사와 시적인 언어로 생생하게 되살린다. 1918년 북간도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이 된 명동촌에서 윤동주와 함께 보낸 학창 시절, 6·25전쟁 정전 협정 당시 판문점에서 통역관으로 있었던 일, 아내와의 추억과 젊은 시절의 고민 등 그의 젊은 날의 모습이 때론 동화처럼, 때론 시처럼 펼쳐진다.

한없이 여리기만 했던 그는, 그러나 쉰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든다. 신랄하게 군사독재정권을 비판하고 과감하게 김일성을 만나면서도 따뜻하게 민중을 감싸 안을 줄 알았던 문익환. 목사에서 갑작스레 행보를 바꿔버린 데 대해 사람들은 “문익환이?”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 문제”라던 시절은 끝났다. 사회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던 지금의 세대들에게, ‘연약하게만 보였던’ 문익환 목사의 모습은 민주화 세대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그래, 이렇게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눈물이 흘러 더 이상 취재를 할 수 없었다

“1994년 1월 18일, 저녁뉴스 하나에 온 나라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문익환 목사의 별세 소식. “뉴스를 듣고 사람들은 곳곳에서 한일병원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조문객들이 몰려왔다. “장례 기간 전국 각지에서 여기저기 자발적으로 빈소가 차려져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했다. 그의 진실을 뒤늦게 신뢰한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끝없이, 그가 생전에 거리에 뿌리고 다닌 숱한 아름다운 일화들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문익환 목사의 상여가 대학로를 빠져나갈 때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이렇게 20세기가 서울을 뜨는구나!”

김형수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북간도며 요코하마며 평양을 취재하는 행운을 누렸다.” 작가는 1999년부터 자료를 수집했고 5년에 걸쳐 『문익환 평전』을 집필했다. 취재를 하면서 문익환 목사를 잃은 “내면의 공동화로 마음고생을 겪는 이들”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캠코더를 들고 녹화하는 사람도 눈물이 흘러 더 이상 취재를 할 수 없었다.” 김형수 작가는 1959년생이다. “우리 세대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끔 세상이 너무 추울 때, 밖에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삶이 무거운 형벌이다 싶을 때 ‘문 목사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가 떠올리는 ‘문 목사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

“우리들 마음속 영원한 청년인 늦봄 문익환 목사님,
그 너른 가슴이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_어느 대학생의 글(본문에서)

쉰아홉, “그는 원로의 나이였지만 재야운동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어 일흔일곱에 별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2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수난의 삶을 산다. 그 기념비의 하나로서 ‘방북’은 통일운동의 최고 업적”이 되었다. 1989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회담을 한 문익환, 그의 방북은 남북 양측의 극적인 공감대로 사용되었다. 문익환은 늦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이런 그의 모습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말은 문익환이 자기 스스로에게 붙인 호 ‘늦봄’이다. 아들 문성근은 아버지 문익환이 처음 옥살이를 하고 나왔을 때, 회고록을 써보라고 넌지시 권유한다.

“첫 출감하셨을 때, 아버지! 이제 회고록을 써보시는 게 어때요, 했더랬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주문이지요. 그 후 어떻게 사실 셈인지 그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아들 문성근의 말처럼 “어처구니없는 주문”이었다. 당시 문익환의 삶은 “아직 그 입구에도 닿아 있지 않았다. 그 후에 저질러진 일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문익환 평전』은 그가 태어나기도 전인 20세기 전에 시작된다. 일제 식민지의 한파를 피해 북간도로 모여든, 한국도 아닌 조선 사람들. 왕도, 국가도, 마을도 없던 이곳을 이들은 사람 사는 곳으로 바꾸어낸다. 허허 벌판에 사람만 있는 이 땅에서 문익환은 태어났다. 그러나 문익환은 어린 시절을 아름다운 때라고 회상한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학교를 다니며 사귄 친구들과 세상을 이야기하고 시를 노래한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일제의 탄압과 뒤이어 벌어진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그는 신학의 길로 들어선다. 목사 문익환은 그래서 어쩌면 연약하기만 한, 현실 도피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창 시절의 친구 윤동주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늦봄’으로서 뒤늦게 피어난 그의 힘은 어쩌면 오랫동안 축적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여리기만 한 젊은 날의 그에게 시대의 혼란함은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목사가 되어 혼란스럽기만 한 한국 사회로 돌아온다. 6·25전쟁 정전 협정의 통역관으로서 시대적 사건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었지만 이 사건이 그를 시대의 복판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신학을 연구하며 목사로서의 삶을 오랫동안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시대의 복판에 등장한다.

“문익환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을 첫발로 삼고, 1994년 1월 18일 사면되지 못한 가석방 상태로 마석공원에 묻힐 때까지 햇수로 19년간, 달수로는 218개월, 날수로 6529일 동안에 달수는 102개월, 날수로는 3102일을 밖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한국인들이 알고 있는 문익환에 대한 모든 추억은 그 백여 개월 동안의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추억을 남기고 말았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_문익환 「잠꼬대 아닌 잠꼬대」에서

2004년 출간된 책을 다시 펴내며 출판사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이 ‘연약한 힘’으로서의 ‘늦봄 문익환’이다. 그 연약한 역동성을 드러내기 위해 20세기 초기 추상화가였던 힐마 아프 클린트의 그림 열세 점과 글을 본문 중간 중간에 삽입했다. 인물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핵심적인 ‘감성’을 전달하려고 하는 데 집중했다.

역사 속 인물을 다루는 평전에서 인물이 역사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를 살려낼 수 있는 데는 지은이의 치밀한 자료 조사 덕분이다. 작가는 “‘문익환 정보’를 사유화하지 않을 생각이다. 취재한 결과물(인터뷰 내용 및 사진 등)은 대부분 ‘통일맞이’ 자료함에 보관해두었으니 언제라도 열람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문익환의 가족과 지인에게 직접 들은 문익환에 대한 일화들을 비롯하여 문익환이 남긴 개인적인 메모, 서신, 산문 등을 통해 당시 문익환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를 작가 특유의 시적 표현으로 아름답게 풀어냈다. 본문의 화보와 지은이 특유의 시적 표현을 통해 늦봄이라는 문익환의 연약한 힘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평전’으로 새롭게 나올 수 있었다. 『문익환 평전』은 문익환 삶의 결정판이다.

1999년 언론에서 한국의 20세기를 대표하는 인물을 선발한 적이 있다. 문익환은 당연히 여기에 포함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의 애매한 정체성이었다. 목사로서 종교 지도자, 시인으로서 문화 인사, 민주화 운동가로서 정치 인물, 그리고 통일에 힘쓴 통일할아버지. 그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그는 언제나 ‘약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 언론사 취재원이 그를 너무 취재하기 어려운, 다가가기 힘든 인물이라고 했을 때,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농성장에서 전화 한 통화면 금방 달려오던 ‘문 목사님’을 기억하는 노동자들”은 여기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남한 사회가 신격화시켜버린 분단 이데올로기 때문에 발붙일 곳이라고는 없는 사상범이나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사람들까지 가리지 않고 마구 껴안고 사랑했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지 않았던가.

이런 문익환을 민주화 세대의 ‘추억’ 속에만 남겨둬야 할까. 지금, 독재정권의 마지막 인물이 물러났고, 남북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문익환이 그토록 강조했던 ‘사랑’이 이제야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바야흐로 ‘늦봄’의 시대다.

“벌써 5월도 반이 지났군요.
지금은 분명히 늦봄이라고 하겠소.

나의 철인 거죠.” _문익환(본문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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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으로 세 번 읽은 독자입니다. 구판의 특이한 사이즈로 인해 페이지를 넘기기 불편하고 어느 순간 양장 케이스와 종이 본문이 떨어지고 갈라진다는 단점이 새 판에서 극복된 것 같아 좋습니다. 다만 사진자료가 그 사진 속 이야기를 말하는 본문 곳곳에 있지 않고 따로 모여 있는 게 아쉽네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 2018-08-01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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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 김형수 새창으로 보기
평전을 읽는다는 건 한 사람의 생애를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평전이 나왔다는 건 그 사람의 생애가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 한 나라의 거대한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는 것. 작가들로부터 탄생한 수많은 평전이 존재하지만 문익환 선생의 평전을 읽는다는 건 가슴뿌듯한 일이다. 세계에서 오로지 한국만이 분단 국가다. 햇볕 정책으로 인해 북한과의 관계가 조금 좋아지는 가 싶다가 얼어붙은 정국이었다. 새로운 대통령이 나오고 지금처럼 세계의 이목을 집중하는 경우도 드물다. 통일이 올까. 통일이 아니어도 통일된 상태와도 같은 교류가 있다면 이것 또한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 아니었을까.

 

통일의 간절한 염원을 담았던 인물이 문익환 선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때 뉴스에서 떠들석하게 나왔던게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었다. 그의 통일을 향한 마음으로 방북했으리라 어렴풋이 생각했었다. 방북후 구속되었고, 구속된 사진이 실려 그의 얼굴을 사진으로 보았을 뿐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를 잊고 있었다. 단편적인 사실은 기억한다. 배우 문성근이 문익환 선생의 아들이라는 것. 재야에서 활동을 했다는 것 정도였다.

김형수 작가가 쓴 『문익환 평전』이 전부터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문익환 선생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이 출간되니 반가울 뿐이었다. 책의 뒷 부분은  꽤 많은 분량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가 태어났던 북간도에서부터 생의 한 페이지가 차례로 실려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으로 그의 생을 훑어보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가슴이 북받치는 감정을 느꼈다. 그의 육성을 듣는 느낌이었다. 

『문익환 평전』을 읽는다는 건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것과도 같다. 1918년에 태어난 문익환은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자랐다. 일본의 핍박을 받았던 일제 강점기, 나라를 위해 독립을 외쳤던 독립군의 활약들이 문익환의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여성의 역할이 미미했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에 그의 어머니 또한 아홉달 된 그를 업고 독립을 위한 만세 운동을 나갔다고 하니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지 않았나 하는 감동이 밀려 온다.

삶은 흐르는 물과 같다. 삶의 현실은 어디선가 끝없이 샘솟는 강물처럼 흘러와 잠시도 쉬지 않고 세상의 관계들을 재편해놓는다. 자만에 찬 전위들은 낙오의 길을 가고 선지자를 열심히 뒤따르던 이가 홀연히 전위가 된다. (312페이지)

삶은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 생生은 명命이다. 살려면 살고 말려면 마는 것이 아니라 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 따라서 생명은 불가피하게 자라려고 하는 힘을 갖는다. 생명의 마음, 생명의 본능은 내일을 지향한다. 생명은 '지금 있는 것'이면서 '장차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꿈'을 내포하고 있다. (329페이지)


통일을 위해 앞장섰던 그가 목사인 건 다들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 역시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수학했다. 성서 공동번역위원으로 성서를 번역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으며 우리말 풀어쓰기에 앞장섰다. 또한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뜻을 이어 많은 학생들이 기성세대에 대한 항의로 삶을 외면하자 그들에게 향한 언어는 감동이다.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싸워!'  그때는 청년들이 우후죽순으로 생을 달리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이런 말을 했을까.

저자는 문익환 목사 보다는 문익환 선생이라는 호칭이 더 맞다고 표현했다. 성서를 번역하며 믿음을 강조했던 목사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통일을 위해 앞장섰던 민주 투사이기도 했으니 맞는 표현같다. 약자의 편에 서서 민중들을 사랑했고 그들과 함께 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애써왔던 사람들 중에 신을 섬기는 성당의 신부들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사 직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할 만한 일이다.


다시금 평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세계의 눈이 우리를 향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좋은 일이 아닐까. 평화와 통일을 위해 애써왔던 문익환 선생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상태에까지 이르지 않았나. 한국과 북한의 정상이 포옹을 하는 장면에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역사의 한복판에 서서 민족을 위해 앞장섰던 문익환 선생의 삶의 궤적을 읽는 일이 이토록 즐거울 수가 없다.


- 접기
Breeze 2018-06-04 공감(24)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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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을 깊고도 넓게 헤아리게 하다...

 내게 문익환이라는 이름은 낯익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선 그만큼 친숙하지 못하다. 아는 건 이름과 목사라는 그의 직업 그리고 단편적으로 접했던 그가 했던 일 정도. 가장 큰 기억은 역시 단신으로 북으로 가 김일성을 만난 일이다. 때는 1989년. 87년의 6월 항쟁으로 6.29 선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렀던 시절이다. 국가의 허락 없이 북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감행하게 만든 것일까? 그 일을 들으면서 난 그게 가장 먼저 궁금했다. 그의 발길을 이끈 것. 마치 자력처럼 거기로 가야만 한다고 끌어 당긴 것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다.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북미회담이 성공적으로 열리고 이제 평화 시대로 가는 길목에 서 있으니 더욱 궁금해진다. 마침 올해가 고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지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 100년에 남북관계에 이토록 커다란 성과가 주어졌으니 어쩌면 지금은 하늘에 있는 그의 가호가 함께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시인 김형수가 쓴 '문익환 평전'이 특별판의 모습으로 새로이 나왔다. 맞다. 첫 출간이 아니다. 14년 전에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바 있다. 나는 그 때 만나지 못했다가 특별판으로 비로소 만났다. 이제야 그 궁금증을 풀어 볼 기회를 간신히 가지게 된 셈이다.

 읽어 보니 평전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이더라. 어쩌면 이 책에만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토록 한 사람이 걸어 온 삶의 길을 낱낱이 파헤치다니! 마치 그가 돌길을 걸었다면 그가 밟은 돌 하나하나를 전부 뒤집어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문익환 목사의 삶이 온전히 그리고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다. 그의 삶의 결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알고 싶은 이에겐 정말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전기가 아니고 평전이다.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니 그냥 전기를 쓰는 것보다 평전을 쓰는 게 더 어려운 것 같다. 전기는 있는 사실을 잘 정리해 쓰면 되지만 평전은 저자의 평가까지 들어가니까 말이다. 그런데 너무 주관적으로 쓰면 독자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좋은 전기란 언제나 독자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감동까지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공감과 감동은 특히나 저자의 평가의 경우 독자들이 따져봐도 객관적으로 올바를 때, 적어도 납득될 때 가능하다. 결코 자기 기분이나 주관에 좌우되어선 안되며 사실을 바탕으로 냉철하게 분석하면서 독자들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깊은 뜻마저 설득력있게 짚어줄 수 있어야 한다. '문익환 평전'은, 감히 말하건대, 그렇게 한다. 그런 책이다. 김형수는 문익환 목사의 일대기를 일화나 업적 소개에 그치지 않는다. 문익환 목사가 삶을 걸으며 어떤 선택을 할 때, 단순히 한 개인의 삶 차원에서 그것을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문익환 목사의 선택을 김형수는 언제나 사회나 민족 그리고 시대 전체의 맥락 안에다 두고 의미를 살피고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므로 여기엔 문익환 목사의 삶만 있지 않다. 그와 함께 연동하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와 민족, 시대의 초상까지 같이 어우러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공감하고 문익환 목사의 삶에 감명 받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개인의 삶은 개인의 삶으로 그치지 않는다. 수면 위에 생겨난 작은 동심원도 스쳐가는 바람을 만나 수면 전체를 변화시키는 파문이 될 수 있듯이 아무리 작은 개인의 삶도 결국엔 전체의 삶과 결부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 받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 개인의 삶에 의해 역사 전체가 새로운 물줄기로 흐르는 것도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은 단순히 문익환 목사의 삶을 잘 알려준다는 것을 넘어 개인과 시대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 잘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시대가 없이 개인이 있을 수 없듯이, 시대 역시 개인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것이란 걸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문익환 목사의 삶을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상아탑에서 민중이 고통 받는 현장으로, 기독교라는 종교의 세계에서 세속의 세계로, 지켜보는 자에서 막중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자로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것을 보여준다. 변하기 전 그도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 필부가 시대의 거인이 된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실수와 후회에서 배우고 과오를 올바른 각성 속에서 반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서고 기꺼이 넘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뒤늦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스스로 늦봄이라 자신을 칭했던 문익환 목사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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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8-07-07 공감(1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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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년대의 민주화 투쟁을 경험하지 못한 20대의 젊은이들에게 문익환은 어쩌면 낯선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에서 문익환이라는 이름 석자는 통일과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각인되었다. 시를 노래하며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길만 고집스럽게 걷던 그가 쉰아홉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은 어쩌면 시대의 부름에 호응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를 시대의 외침에 호응하도록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성직자로서의 문익환이 보기에 남과 북의 우리 민족의 삶이 너무나도 애잔하다고 느꼈을 터였다.

 

아직 이런 말을 할 만큼 나이가 든 건 아니지만 한 사람의 삶에는 분명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문익환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1918년 만주 북간도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문익환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한인들이 세운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 북간도의 용정광명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의 문익환은 여리고 행복했던 듯 보인다.

 

"그 속에서 문익환은 겨울 동화를 살았다. 친구 윤동주,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아버지가 장로로 있는 주일학교를 다니며 성탄 때는 교회당 옆의 윤동주 집에서 새벽노래 준비를 하고 밤새워 꽃종이를 만들었다. 옷을 두툼하게 껴입고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개가죽 버선을 신고 새벽 눈길을 걸어 다니며 찬송가를 부를 때는 하느님의 나라가 따로 없었다." (p.101)

 

순진하고 천진난만했던 그가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서서 여섯 차례에 걸쳐 12년간의 옥살이를 감내할 만큼 강인한 투사의 길을 걷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열렬히 사모하던 여인 박용길과 결혼하여 만보산 골짜기에 터를 잡고 신접살림을 시작하자마자 태어난 첫 아이. 그 모습이 안쓰러워 신경 중앙교회 목사가 문익환을 부목사로 초빙하여 부부를 불러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의 앞날은 힘들지만 순탄한 듯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날아든 비보는 문익환의 삶을 현실 세계의 한가운데로 인도하기에 충분했다. 아끼던 친구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

 

"문익환은 자신이 구겨진 휴지처럼 역사의 구석지에 버려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확실히 문익환이 생각지 못한 제2의 길을 간 장준하와, 그보다 더한 제3의 길을 선택한 윤동주, 송몽규의 진로에 비추어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문익환은 엄청난 절망감에 빠졌다. 육체는 밥으로 살찌지만 정신은 기아와 고통으로 성장한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에 의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만 비로소 행동할 수 있게 된다." (p.178)

 

젊었을 때 종교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는 성직자나 신학자로서의 문익환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투사로서의 문익환이 더 익숙했다. 검은 뿔테 안경에 듬성듬성한 수염을 하고서도 얼굴에는 늘 미소를 잃지 않던 모습은 투사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1989년 3월 조평통의 초청으로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던 사건은 마치 어제의 일인 양 기억에 또렷하다. 군사정권의 엄혹했던 시기에 국가 기관 소속이 아닌 일반인의 신분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문익환이 법정에 섰을 때 두 손이 밧줄에 묶인 채 사진기자들에게 보여주었던 소년 같은 미소는 그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흉악범처럼 묶여 있는 처지와 미묘한 부조화를 이루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물론 그의 표정과 눈에는 통일에 대한 확신과 열정이 빛나고 있었지만 재판은 구역질이 날 만큼 유치한 여론몰이에 활용되었다." (p.606)

 

성직자라는 가면을 쓰고 정권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는 자들을 우리는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목회자라는 지위와 권력, 신앙심을 이용해 여성신도에게 차마 못할 짓을 저지르거나 신도들의 헌금을 개인의 사적 치부 수단으로 활용하여 부를 쌓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겉으로는 목회자입네 우리 사회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는 아이러니한 현실 앞에서 문익환 목사는 얼마나 한결같았던가.

 

"그는 자신의 마음을 글자가 아니라 발바닥으로 쓰고자 했으니, 세월이 흐르면서 숱한 존재들의 발자국이 덮어버리면 점점 지층 밑으로 사라져갈 것이었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못 돌아다니게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문익환이 지상의 사람들에게 남긴 선물이었다. 그가 예수의 말 중에서도 가장 경외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 문익환! 그의 민중 사랑은 이렇게 넓고 컸다. 넓고 컸던 사랑도 떠난 뒤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헌신적 인간애와 지사적 풍모에 거듭 감복했던 사람들도 그가 말하는 민족의 위기에 대해서는 그것이 드러날 때까지 알지 못했다." (p.646)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문익환 목사와 같은 선각자가 있었기에 평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지 않나 싶다. 평화주의자가 곧 빨갱이로 매도되던 시기에 지속적으로 평화를 주장하던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지낸다. 나이가 들수록 한 인간이 걷게 되는 항거할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한다는 걸 믿게 되는 것처럼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는 날 그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한결같이 달려왔던 수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날 우리는 문익환이라는 이름 석자를 제일 먼저 호명할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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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쥐 2018-06-24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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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역사 교과서만 본다면 우리의 역사를 온전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교과서가 가지는 특징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의 국가 정체성과 연결되며, 그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역사는 잘 다루지 않거나 짤막한 한부분만 언급할 뿐이다. 같은 시대에 살았으면서 우리가 윤동주를 바라보는 시선과 문익환 목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2017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였던 윤동주는 광복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채 1945년 세상을 떠났고, 대한민국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표상이 되어 버렸다. 철저히 국가의 논리와 이해관계에 따라서 윤동주 시인을 신격화 해 버렸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문익환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1989년 방북 이후 문익환 목사가 사망하고 난 뒤 배우 문성근에 대한 국민의 시선들, 국가는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면서, 현대사에서 문익환 목사의 업적을 축소해 버렸다. 역사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으며, 같은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 의미는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문익환 목사의 삶은 바로 우리의 근현대사와 일치하고 있다. 1918년에 태어나 만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삶의 궤적 속에서 20대~30대는 말 그대로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조국과 마주하게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3.1 운동을 맞이 하였으며, 조국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맞물려 일본인들의 조선인들에 가하는 고통을 그대로 느껴야 했다. 혼란스러운 한반도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북간도 만주 용정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이동하게 되었다. 친일과 친러, 친청파가 공존하는 한반도 땅에 머물러 잇을 순 없었다. 문익환 목사의 삶과 정체성, 신념은 바로 그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에게서 시작되었으며, 문재린 목사의 남다른 교육관이 눈에 들어왔다. 윤동주와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어린 문익환은 학업을 멈추고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했던 윤동주의 죽음과 송몽규의 죽음으로 문익환의 삶은 바뀌게 된다.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해 왔던 그들의 삶은 그렇게 분단된 아픈 조국의 현실과 닮아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윤동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조국의 현실 속에서 문익환 목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그 안에서 조국의 현실은 공산당과 대치하는 불안정한 삶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버렸다. 문익환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며, 만주 땅에서 벗어나 서울의 삶의 터전을 옮겨가게 된다. 책에는 바로 이런 과정들이 드러나 있으며, 문씨 일가라고 통용해서 부르는 그 밑에는 문익환 목사를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 계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약한 몸으로 태어났던 묺익환은 춥고 열악한 만주 용정에서 살아남았으며, 책에는 그의 고조부-증조부-할아버지로 이어지는 섬김의 삶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 1989년 방북을 선택한 문익환의 삶은 그 당시 생의 새로운 전환점이었으며, 대한민국 기독교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여기서 문익환 목사가 보여준 삶은 바로 그의 네 남매에게 이어지게 되었으며, 배우 문성근은 네 남매중 막내였다. 형들과 누나들이 아버지의 삶과 교육관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근저에서 채워 나갔다면, 배우 문성근은 바로 형들과 누나들이 채워 나갔던 삶의 방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게 된다. 어쩌면노무현 지지자이면서 , 문재인을 지지하는 문성근의 삶의 바닥에는 문재린 목사-문익환 녹사-배우 문성근으로 이어지는 바로 우리 근현대사의 한 흐름이 아닌가 싶다.또한 배우 문성근은 목사가 아닌 배우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었다. 원칙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 원칙이 세사의 흐름과 동떨어질 때 느끼는 이질감에 대해서 문성근 스스로 자신의 삶의 굴레를 단절시키고, 자신의 자녀들에게 되물림 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아니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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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6-1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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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김형수 새창으로 보기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 만나서 이야기 한 번 나누지 못한 사이면 더더욱 알 수 없지 않을까. 시인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한 김형수에 의해 쓰인 『문익환 평전』을 집어 들면서 든 생각이다.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알고 싶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특별판 『문익환 평전』이 나올 때 한반도는 평화의 물결로 요동쳤다. 세상의 날 선 비판을 가하고 온몸으로 민주화를 끌어안은 그의 호 늦봄에서처럼 우리는 늦봄, 걸어서 두 정상이 만나는 꿈같은 장면을 마주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 

-문익환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 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 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면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신학자, 목회자,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 시대의 꿈과 사상을 실천하는 예언자. 늦봄 문익환의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가 일흔두 살에 쓴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대로 그는 평양에 갔다. 비록 걸어서 가지는 못하고 베이징 공항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지만. 그는 갔다. 1989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그들을 괴뢰, 인민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동무라는 가장 예쁘고 친근한 말로 그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 했다. 



  윤동주와 시 공부를 하고 그가 문익환이 쓴 모자를 부러워하자 호떡 몇 개와 바꾼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쓴 시를 윤동주가 그것도 시인가, 말해서 그는 시를 포기했지만 그의 안에 있는 시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만으로 쉰셋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쉰여섯에 첫 시집 『새삼스러운 하루』를 출간해놓고 순수하게 기뻐하던 모습을 시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늦봄. 히브리어 성서를 번역하고 목회자의 길로 가던 그가 시대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였다.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은 노동 현장의 가혹함을 알리고자 온몸에 불을 질렀다. 그가 죽으면서 끝까지 외쳤던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지금 2018년에도 유효하다. 늦봄은 그렇게 더디 시대를 건너왔다.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유신 체제에서 독재의 부당함을 알리는 곳에 그는 늦게 온 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남과 북이 하나의 길로 가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온밤을 꼬박 새워 시를 쓰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로 그는 시의 운명을 받아들고 걸어갔다. 평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인간의 명이니 시간의 흐름이니 따지지 않고 그와 함께 2018년의 늦봄을 맞이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걸어서 우리는 만났다. 마주 잡은 손을 흔들고 가슴 설레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생애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의 길을 안내하는 대로 책장을 넘길 뿐이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김형수의 언어로 쓰인 『문익환 평전』은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출생과 죽음 사이의 길을 따라 걷는 작가의 운명 또한 늦봄의 계절과 만나 평화의 길로 안내받는다.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서로를 그리는 마음으로 걸어서 평양으로 신의주로 가는 여정에 늦봄과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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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쥐보스 2018-06-0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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