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강 최한기,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19세기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혜강 최한기를 손꼽을 것이다. 그는 성리학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이기설(理氣說)이니 예학(禮學) 같은 낡은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지식인이었다. 최한기는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집약되는 유교적 도덕률을 타고난 본성이라고 여기지 않을 만큼 철저한 경험론자였다. 새로운 독서가 그에게 탈바꿈을 선사한 거였다.
19세기 중반 중국에서는 서양의 과학기술과 의학을 한문으로 번역한 책자가 다수 간행되었다. 최한기는 서울의 자택에 칩거하며 이런 책들을 구해 열심히 읽었다. 그러고는 자율적 근대화를 꿈꾸는 신지식인이 되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그 역시 선배들처럼 한문으로 저술활동을 하였으나, 이미 근대적인 과학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는 개화 시대의 문을 열어젖힌 인물로 평가할 만 하다.
아래에서는 그가 남긴 두 개의 짧은 논설문을 읽어볼 생각이다. 첫째 글은 세계의 문자를 하나로 통일할 때가 왔다는 주장을 담은 것이다. 두 번째는 모든 지식은 결국 경험에 바탕을 둔다는 그의 지론을 적은 글이다. 두 글은 모두 그의 저서 《신기통(神氣通)》(제1권)에 실려 있다.
우선 세계 문자의 통일에 관한 글부터 살펴보자.
“문자는 언어를 통하게 하는 표지이다. 각 나라에서 사용하는 글자는 형태가 다르고 쓰는 법도 서로 달라 어디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도 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왼쪽에서) 바른쪽으로 쓰기도 한다. 수직으로 내려서 쓰기도 하고 왼쪽, 오른쪽 및 수직 방향을 섞어서 쓰기도 한다. 획수도 많은 문자도 있고 획수가 적은 것도 있다. 어찌 절대로 바꾸지 못할 법칙이 있겠는가.”
박학다식한 최한기가 이쯤 모르겠는가.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가 많은 만큼 그 원리도 다양하고 모양도 제각각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양한 언어와 문자가 교통하는 세상이라, 통역 또는 번역이 중요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번역이 쉬울 리 없다.
“문사(文辭)의 문맥이 불분명해 혼란스럽다든가, 어떤 글의 내용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이 잘못 소개되는 어려움이 따른다. 이것은 번역자의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데, 번역의 기술은 사람에 따라 교묘하기도 하고 용렬하기도 하며 예리하거나 둔한 차이가 있다. 과거 천하가 서로 교섭하지 않던 시대에는 이런 문제가 결함이랄 것도 없었다. ... 하지만 이제 서양의 여러 지역과 모두 교통하게 되므로, 상선은 교역에 대비해야 한다. 병선(兵船, 전함)도 전쟁의 위험을 예방하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문자를 하나로 통일한다면 어떠할까. 그러면 피차의 사정이 통하여 서로 화해할 방법도 생기려니와 상대방을 위로하고 가르쳐 주는 방법도 충분히 갖추어질 것이다. 또, 서책을 깊이 연구하여 글의 뜻을 파악하는 데도 장애가 사라지게 되리라 본다. (…) (문자도) 서로 나뉘어 분열하는 것을 피하고 모두 화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서양의 모든 나라도 중국의 문자를 사용하는 날이 올 것으로 본다.”
최한기가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중국과 일본에는 서양사람들이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었다. 서구열강이 주도하는 무역이기는 하였지만 그 또한 활발하였다. 조선만 고립되어 있었다. 최한기는 중국에서 들어온 신간 서적을 읽고, 이런 사정을 환히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때 그는 문자 또는 언어의 통일을 꿈꾸었다. 너무 앞서 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중국에 영화서원(英華書院, 1843년 창립된 대학)과 견하서원(堅夏書院, 1830년 창립된 기독교 출판사)이 설립되어 있어 번역사업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중국문화 중심으로 편향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고 속단하지는 말자.
“내 뜻은 저쪽이 이쪽보다 좋다거나 이쪽이 저쪽보다 낫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문자는 하나로 통일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취지일 뿐이다. 서양의 여러 나라에도 혹시 나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한두 해에 성사될 일은 아니지만 후세에 거는 기대라 하겠다.”(이상은 〈세상의 문자를 하나로 통일하자〉)
이 글에서 보듯, 최한기는 당시까지도 대다수 선비가 매달리고 있던 문제, 즉 오랑캐니 문명국이니 하는 화이론(華夷論)에서 벗어났다. 그는 장차 세계 문자가 한자로 통일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였으나, 그것은 중국 문화가 가장 우월하다고 여겨서 한 말이 아니었다. 최한기는 어느 한쪽 문명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장차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이 글을 쓴 해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편전쟁 이후였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곳에서는 헌종 2년(1836)으로 추정하지만 그것은 오류이다. 앞에서 밝힌 영화서원과 견화서원의 창립연대를 고려해도 그렇게 볼 수 없다.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에서 최한기와 같은 생각을 한 지식인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동서문명의 자유롭고 대등한 소통과 교역을 꿈꾼 최한기는 보배로운 존재였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세력은 최한기를 철저히 외면하였다. 그와 친구가 되어 마음을 주고받은 당대의 지식인도 드물었다. 그런 이가 있었다면 〈대동여지도〉를 그린 고산자 김정호 정도였다. 최한기는 아마 너무 세상을 앞서 살았던 모양이다.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해서 봄이 바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겨울철에 북쪽으로 날아오는 제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원이 다른 경험주의자
최한기의 또 다른 논설문을 읽어보자. 우리에게 익숙한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사람은 착한 성품을 타고난다는 주장)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앞에서 읽은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法古創新)과도 차원이 다른 경험주의자의 새로운 주장이다.
“옛사람이 고난을 겪고 정력을 기울여 깨달은 것을 나는 귀와 눈으로 쉽게 받아들인다. 정력을 소모하지 않고 그 지식을 얻기도 하고 약간 힘을 써서 천천히 체득하기도 한다. 이는 옛사람이 계발하여 이끌어주는 공덕이다. 만약 내가 귀와 눈으로 그것을 보거나 듣지도 못하였다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후세에 태어났기 때문에 상당한 이점이 있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낡은 지식에 만족한다면 발전이 없을 것이다. 최한기는 발전을 추구한 신지식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아직 연구하지 않은 분야를, 그는 탐구하였고, 중간에 맥이 끊어져 후세가 전달받지 못한 지식이 무엇인지를 궁금하게 여겼다.
가령 옛사람이 단서는 밝혔으나 끝까지 구명하지는 못한 주제가 있으나 후세는 기왕에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최한기는, “옛사람과 오늘날의 우리가 서로 협동하여 소통하고 힘을 모아 새 지식에 도달한다.”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18세기에 연암 박지원이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사람의 지혜를 바탕으로 신지식을 열고자 한 강한 열망을 품었다는 사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박지원은 그것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최한기는 달랐다. 그에게는 전 시기에는 볼 수 없던 자신감이 느껴진다. 조선은 아직 개항도 하지 않았으나, 신지식인 최한기는 문명의 진보를 확신하였다.
“예와 이제를 두루 참작하면 학문을 완성할 수 있다.” 이것이 최한기의 확신이었다. 그는 여러 세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된 달력(日曆)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고, 서구의 천문 지식 전반에 놀라운 발전이 일어난 사실에 감탄하였다. 최한기는 문명의 발달의 원리를 일컬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이룩한 “신기(神氣)”라고 불렀다.
신지식인 최한기는 박지원과는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예와 오늘에 두루 통하지 못할 바에는 오늘의 학문을 더욱 소중히 여긴다고 했다. 박지원은 이런 경우 과거의 지식을 탐구하겠다고 말했다. 또, 두 사람은 관심 분야도 서로 달랐다. 박지원이 문장의 세계로 상징되는 인문학에 몰입한 것과는 달리 최한기는 자연과학에 초점을 두었다. 물론 두 사람의 공통점도 있었다. 그들은 형이상학을 배격하였다. 그런데 그 정도에 있어서 최한기가 더욱 철저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묘한 말과 기이한 담론 따위는 신기의 세상에 결코 용납되지 못한다. 만약 신기를 알고 그것을 근거로 주장하지 않는다면, 어떤 주장이라도 사실 무근이든가 사람을 속이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과거와 지금 세상의 경험은 다르다〉)
이처럼 형이상학과 신비주의를 철저히 배격한 이는 드물었다. 그는 만물의 원리(신기)를 논리와 경험에서 구했다. 그는 일찍부터 서울에 살았으나, 본래는 개성 출신이었다. 최한기는 조상으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던 모양으로, 평생 독서와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저술이 120여 권이나 된다. 그런데 인용문에서 보듯, 그는 전통적인 동양 고전에서는 다루어지지 못한 새 분야의 지식에 환호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뉴턴의 중력에 관한 이론도 이해하게 되었고, 서양의 근대의학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말년에 그가 쓴 《신기천험(身機踐驗)》은 자신이 번역서를 통해 배운 서양의학의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그는 사람의 몸을 일종의 기계로 인식하였다. 즉, 신기(神氣)가 운화(運化, 움직이고 변화시킴)하는 기계라는 것인데, 서양의 기계론적 사유를 내면화하였다는 점에서 참으로 흥미롭다. 알다시피 18세기부터 일본에서도 난학자(蘭學者,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서양학을 연구)들이 서양 근대의 해부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에 비하면 최한기의 깨침은 뒤늦은 감도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그가 해부학은 물론이고 근대적 병리학에까지 관심의 영역을 확대한 점은 놀라운 일이었다.
번역서를 통해 서양의 근대적 학문에 심취한 최한기, 그의 학문적 사고는 조선의 학문적 전통에서 더욱 멀어져 갔다. 우리가 함께 읽은 논설문에서 확인한 것처럼 최한기는 경험에 기반하지 않은 일체의 지식을 거부할 만큼 확고부동한 경험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여러 해 동안 읽은 새로운 번역서들, 다시 말해 새시대의 문장이 신지식인 최한기를 탄생시킨 동력이었다. 근대의 새날이 조선에 밝아왔다고 선언하고 싶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조선의 주류 사회는 최한기를 철저히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죽을 때까지 학계의 ‘왕따’였다.
출처: 백승종,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김영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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