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6

Sejin Pak | Facebook 정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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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rs 정경모 〈시대의 불침번〉 제국주의에 빌붙은 친미·친일 비판/ 한국사 빈틈 메울 충격적 증언들 정경모 지음/한겨레출판·정경모(86). 언젠가 한국 역사는 1970년 9월 유효기간 6개월짜리 여권을 손에 쥐고 일본으로 떠난 뒤 돌아.... – m.egloos.z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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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불침번/ 정경모/한겨레출판
8 Ma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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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일본서 지난 40년을 살면서 민족-민주-통일운동을 해온 정경모선생]
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s post
[기획]정경모 선생의 통일철학을 듣는다 (민족통신 14-05-08 08:55) [도꾜=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일본 체류중 재일동포사회에서 이름난 민족민주운동 활동가이며 애국적 지성인의 한사람인 정경모 선생(90)을 만나기 위해 유학생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중인 후배 2명과 함께 요꼬하마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기자일행이 그의 집(단독주택)을 방문하여 초인종을 눌렀을 때 일본계 부인 지요꼬 여사가 문을 열어주었고, 잠시후 정경모 선생이 나왔다. 몇일 전 방문약속 일정을 잡은 후배가 방문하는 당일 “이제 떠납니다”라는 통고를 하지 않아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닌게 다를까 일행 중 후배에게 문턱에서 “남의 집 방문약속하고 오는 날에는 반드시 당일에 전화로 몇명이 몇시에 방문예정이라고 알려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라고 이날 만남을 약속한 30대 후배에게 젊잖게 충고한 다음에 우리 일행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부인께서 대담이 진행되는 방의 탁상에 맥주를 갔다 주었다. 서로 잔을 부딪치며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인사부터 시작되었다. 기자는 이미 그에 대한 애국심과 놀랄만한 지식을 겸비한 애국적 지성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고, 전화로 한두차례 통화한바 있고, 그리고 그의 최근저서로서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는 525쪽 두께의 책, ‘시대의 불침번(2010.1.11한겨레출판)을 훑어 보고 온 터이라 그에 대한 발자취에 대해서는 대체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분과의 만남은 그리 낮설지 않았다. 그는 부친이 목사였고, 그의 부모들이 그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알기 때문에 성경지식과 기독교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어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친숙하게 교제해 온 인맥들도 대부분 기자가 알고 있는 인맥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대화는 한결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예견한대로 정경모 선생은 솔직담백하고 꾸밈이 없었고, 산전수전 다 겪은 삶을 살아오신 분이라 어떤 쟁점들도 막힘이 없었다. 그의 통일철학은 이미 그의 자서전에 모두 반영되어 있어 새삼스럽게 그의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자주, 민주, 통일에 관한 역사적 관점과 방향은 그 어디에서도 이탈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없었다. 미국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일본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한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함석헌, 문익환, 장준하, 백기환 등과 같았고,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도 말기의 백범 김구 선생을 위시하여 여운형, 조봉암 등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의 통일철학도 김일성주석의 연방제와 김대중 대통령의 연합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상과 이념, 신앙과 정견을 초월한 우리민족끼리 손잡고 평화적으로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흡수통일도 적화통일도 그것은 모두 거부해야 할 통일방도라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는 그의 자서전에 반영된 내용들이 아닌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이야기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기자와의 대화를 통해 신중한 자세를 보이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북이나 남이나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한 정경모 선생은 최근에 바둑에서 묘수를 찿았다고 말한다. 힘의 차이가 있으면 한쪽이 이길수는 있지만 남과 북이 서로 전쟁하면 둘다 죽기 때문에 여기에서 묘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최근의 인식으로 나타났다. 그는 바둑을 둘때 ‘요새’에서 <새>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북-미대결이나 남북대결에서도 섣불리 먼저 공격하는 쪽이 패하게 되어 있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박근혜의 비핵화 주장은 문제의 핵심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반복하면서 북의 핵이 겨냥하는 것은 남녘이나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이다. 일본도 미국의 핵우산아래 있다는 것이다. 정경모선생은 또 일본 당국의 자세에 대해서도 “아베는 평양에 가야한다. 아베가 가야 하는 입장인데도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지금쯤 아베는 미국의 오바마와 그것을 위해 평양방문을 의논중일 것으로 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러한 정세를 파악하면서 아베와 박근혜는 북의 핵에 대한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정경모 선생은 조선의 핵무기는 남과 북을 위해서도 그리고 인류평화를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무기라고 강조하면서 미국의 핵무기는 남을 침략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북의 핵무기는 공격용이 아니라 전쟁억제력(deterrence), 즉 방어력 혹은 평화유지력이라는 점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 구 소련이나 러시아는 대외정책에서 비핵국가들에게는 핵불사용 정책을 고수해 왔지만 미 당국자들은 그렇지 않고 핵전쟁을 가상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벌여왔다고 하면서 미 지배세력의 도덕적 문제를 비판한다. 그는 잠시 사색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북이 핵억제력이 없었으면 벌써 거덜났다”고 하면서 “이명박이나 박근혜는 내 책을 읽었을텐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비핵화만 주장하고 있어 안타깝다. 다시 말하지만 북의 핵은 평화를 위한 억제력이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아베나 박근혜, 오바마에 대해 다른 시각도 갖고 있다. 그들의 대외정책이 문제가 많지만 아주 나쁜 정치인들이 좋은 일도 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박근혜는 아버지의 좋지 않은 점을 생각해야 하고, 아베는 아버지, 기시노부의 좋지 않은 점을 되풀이한다면 이들의 앞날은 비관적일 수 밖에 없다는 뜻으로 충언한다. 정경모 선생은 대화중 바둑의 묘수 중 하나인 <새>를 잘 보고 처신해야 미래가 있다고 하며 박근혜는 이점을 특히 유의하여야 되는데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 유럽 등을 돌아다니며 친일하고, 친미하며 외세의존적으로 가면 자기 정권하나 유지하기도 어렵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북에 대해서는 “핵 가지고 가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면서 구태여 긴말을 하지 않는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분단 70년이 가까와 오는데 남북문제는 6.15시대, 10.4시대에서 진전하지 못하고 여전히 경색국면에 머물러 있는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는 무엇이겠는가?”를 물었다. 정경모 선생은 대답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실을 알지요? 그리고 12제자중 하나가 배신한 것도 알지요?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자기 고향땅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수제자 바울(Paul)은 예수보다 더 잔혹하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지요. 그러나 결국 로마(Rome)제국이 기독교화 되었지요. 그래서 진실을 알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조직다운 조직도 없었던 미약한 존재였지만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어 로마 제국을 정복하지 않았소이까?”라고 답변하면서 “남북의 미래를 절대로 비관하지 않습니다.”라고 덧붙인다. 그는 대화중 1989년 문익환 목사 일행을 안내하여 역사적인 평양방문중 김일성 주석과 4.2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여러차례 긍지높게 총화하면서 지난 날 겪어 온 파란만장한 족적과 인생 90을 되돌아 보며 많은 감회에 젖기도 했다. 정경모 선생은 기자와 작별할 때 마이니지 신문(2013.4.18)에 게재된 “망명 한국인 정경모 선생, 조국통일이 생애 소원이다”라고 제목을 단 일본말 보도자료를 비롯하여 2011년 9월24일 재일한국인YMCA 회관에서 열렸던 그의 저서 ‘역사의 불침번’ 출판기념식 보도자료(한겨레신문)주며 인사를 나눴다.(끝) *정경모 선생 약력(그의 저서에 소개된 내용): 1924년 서울에서태어나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일본게이오 대학교 의학부, 서울대학교 의대에 다니다가미국에모리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미국유학중 코리아전쟁이 발발하자당시주미대사 장면의 요청으로도꾜에 있던 맥아더사령부(GHQ)에소환되어 문익환, 박형규등과함께근무했다. 휴전회담 당시 통역업무를맡는등한국에서 지내다 1970년일본으로 건너간 이후40년간 망명객의 신분으로문필활동을 통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지원했다. 일본에서1981년 한국문제 전문지‘씨알의 힘’을발행했고, 1991년에는 일본의 평화와조선의 통일을 생각하는‘씨알의 힘’ 모임을 발족하여 기관지‘씨알’을펴내왔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함께역사적인 평양방문을 결행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의 초석이 된 4.2공동성명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현재요꼬하마에서50년이 넘는 세월을함께한 아내와 살고있다.
[기획]정경모 선생의 통일철학을 듣는다
(민족통신  14-05-08 08:55)

[도꾜=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일본 체류중 재일동포사회에서 이름난 민족민주운동 활동가이며 애국적 지성인의 한사람인 정경모 선생(90)을 만나기 위해 유학생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중인 후배 2명과 함께 요꼬하마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기자일행이 그의 집(단독주택)을 방문하여 초인종을 눌렀을 때 일본계 부인 지요꼬 여사가 문을 열어주었고, 잠시후 정경모 선생이 나왔다. 몇일 전 방문약속 일정을 잡은 후배가 방문하는 당일 “이제 떠납니다”라는 통고를 하지 않아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닌게 다를까 일행 중 후배에게 문턱에서 “남의 집 방문약속하고 오는 날에는 반드시 당일에 전화로 몇명이 몇시에 방문예정이라고 알려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라고 이날 만남을 약속한 30대 후배에게 젊잖게 충고한 다음에 우리 일행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부인께서 대담이 진행되는 방의  탁상에 맥주를 갔다 주었다. 서로 잔을 부딪치며 만나게 되어 반갑다는 인사부터 시작되었다.    

기자는 이미 그에 대한 애국심과 놀랄만한 지식을 겸비한 애국적 지성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고, 전화로 한두차례 통화한바 있고, 그리고 그의 최근저서로서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는 525쪽 두께의 책, ‘시대의 불침번(2010.1.11한겨레출판)을 훑어 보고 온 터이라 그에 대한 발자취에 대해서는 대체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분과의 만남은 그리 낮설지 않았다.

그는 부친이 목사였고, 그의 부모들이 그를 목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알기 때문에 성경지식과 기독교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어 서로 대화를 주고 받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친숙하게 교제해 온 인맥들도 대부분 기자가 알고 있는 인맥을 가지고 있어 우리의 대화는 한결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예견한대로 정경모 선생은 솔직담백하고 꾸밈이 없었고, 산전수전 다 겪은 삶을 살아오신 분이라 어떤 쟁점들도 막힘이 없었다. 그의 통일철학은 이미 그의 자서전에 모두 반영되어 있어 새삼스럽게 그의 의견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자주, 민주, 통일에 관한 역사적 관점과 방향은 그 어디에서도 이탈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없었다.

미국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일본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한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함석헌, 문익환, 장준하, 백기환 등과 같았고, 조선을 바라보는 시각도 말기의 백범 김구 선생을 위시하여 여운형, 조봉암 등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의 통일철학도 김일성주석의 연방제와 김대중 대통령의 연합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상과 이념, 신앙과 정견을 초월한 우리민족끼리 손잡고 평화적으로 조국통일을 이루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흡수통일도 적화통일도 그것은 모두 거부해야 할 통일방도라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는 그의 자서전에 반영된 내용들이 아닌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이야기에 대해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기자와의 대화를 통해 신중한 자세를 보이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북이나 남이나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한 정경모 선생은 최근에 바둑에서 묘수를 찿았다고 말한다. 힘의 차이가 있으면 한쪽이 이길수는 있지만 남과 북이 서로 전쟁하면 둘다 죽기 때문에 여기에서 묘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최근의 인식으로 나타났다.  

그는 바둑을 둘때 ‘요새’에서 <새>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북-미대결이나 남북대결에서도 섣불리 먼저 공격하는 쪽이 패하게 되어 있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박근혜의 비핵화 주장은 문제의 핵심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반복하면서 북의 핵이 겨냥하는 것은 남녘이나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이다. 일본도 미국의 핵우산아래 있다는 것이다.

정경모선생은 또 일본 당국의 자세에 대해서도 “아베는 평양에 가야한다. 아베가 가야 하는 입장인데도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지금쯤 아베는 미국의 오바마와 그것을 위해 평양방문을 의논중일 것으로 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러한 정세를 파악하면서 아베와 박근혜는 북의 핵에 대한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정경모 선생은 조선의 핵무기는 남과 북을 위해서도 그리고 인류평화를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무기라고 강조하면서 미국의 핵무기는 남을 침략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북의 핵무기는 공격용이 아니라 전쟁억제력(deterrence), 즉 방어력 혹은 평화유지력이라는 점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  구 소련이나 러시아는 대외정책에서 비핵국가들에게는 핵불사용 정책을 고수해 왔지만 미 당국자들은 그렇지 않고 핵전쟁을 가상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벌여왔다고 하면서 미 지배세력의 도덕적 문제를 비판한다.

그는 잠시 사색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북이 핵억제력이 없었으면 벌써 거덜났다”고 하면서 “이명박이나 박근혜는 내 책을 읽었을텐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비핵화만 주장하고 있어 안타깝다. 다시 말하지만 북의 핵은 평화를 위한 억제력이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아베나 박근혜, 오바마에 대해 다른 시각도 갖고 있다. 그들의 대외정책이 문제가 많지만 아주 나쁜 정치인들이 좋은 일도 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박근혜는 아버지의 좋지 않은 점을 생각해야 하고, 아베는 아버지, 기시노부의  좋지 않은 점을 되풀이한다면 이들의 앞날은 비관적일 수 밖에 없다는 뜻으로 충언한다.

정경모 선생은 대화중 바둑의 묘수 중 하나인 <새>를 잘 보고 처신해야 미래가 있다고 하며 박근혜는 이점을 특히 유의하여야 되는데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 유럽 등을 돌아다니며 친일하고, 친미하며 외세의존적으로 가면 자기 정권하나 유지하기도 어렵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북에 대해서는 “핵 가지고 가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면서 구태여 긴말을 하지 않는다.

기자는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분단 70년이 가까와 오는데 남북문제는 6.15시대, 10.4시대에서 진전하지 못하고  여전히 경색국면에 머물러 있는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는 무엇이겠는가?”를 물었다.

정경모 선생은 대답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실을 알지요? 그리고 12제자중 하나가 배신한 것도 알지요?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자기 고향땅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수제자 바울(Paul)은 예수보다 더 잔혹하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지요. 그러나 결국 로마(Rome)제국이 기독교화 되었지요. 그래서 진실을 알린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는 조직다운 조직도 없었던 미약한 존재였지만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어 로마 제국을 정복하지 않았소이까?”라고 답변하면서 “남북의 미래를 절대로 비관하지 않습니다.”라고 덧붙인다.

그는 대화중 1989년 문익환 목사 일행을 안내하여 역사적인 평양방문중 김일성 주석과 4.2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 계기에 대해 여러차례 긍지높게 총화하면서 지난 날 겪어 온 파란만장한 족적과 인생 90을 되돌아 보며 많은 감회에 젖기도 했다.

정경모 선생은 기자와 작별할 때 마이니지 신문(2013.4.18)에 게재된 “망명 한국인 정경모 선생, 조국통일이 생애 소원이다”라고 제목을 단 일본말 보도자료를 비롯하여 2011년 9월24일 재일한국인YMCA 회관에서 열렸던 그의 저서 ‘역사의 불침번’ 출판기념식 보도자료(한겨레신문)주며 인사를 나눴다.(끝)

 

*정경모 선생 약력(그의 저서에 소개된 내용):

1924년 서울에서태어나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일본게이오 대학교 의학부, 서울대학교 의대에 다니다가미국에모리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미국유학중 코리아전쟁이 발발하자당시주미대사 장면의 요청으로도꾜에 있던 맥아더사령부(GHQ)에소환되어 문익환, 박형규등과함께근무했다. 휴전회담 당시 통역업무를맡는등한국에서 지내다 1970년일본으로 건너간 이후40년간 망명객의 신분으로문필활동을 통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지원했다. 일본에서1981년 한국문제 전문지‘씨알의 힘’을발행했고, 1991년에는 일본의 평화와조선의 통일을 생각하는‘씨알의 힘’ 모임을 발족하여 기관지‘씨알’을펴내왔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함께역사적인 평양방문을 결행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의 초석이 된 4.2공동성명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현재요꼬하마에서50년이 넘는 세월을함께한 아내와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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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Nov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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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Chung's post
[내년엔 내 생에 마지막 4.2 공동성명 행사를.... 정경모 선생] 통일뉴스 김치관 편집국장이 일본에 취재를 가셨네요. 일본 요코하마로 정경모 선생을 찾아가셨네요. 눈썹까지 하얀 서리가 내린 구순의 정경모 선생님. 망명생활을 해온 정경모 선생은 문익환 목사의 방북을 주선해 1989년 3월 문 목사와 함께 방북했으며, 문 목사는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동한 뒤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공동명의로 ‘4.2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정경모 선생은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내년 4월 5일 도쿄 YMCA에서 4.2공동성명 기념행사를 추진하겠다고 강한 의욕을 보이셨다네요. 선생은 “6.15도 있고 10.4도 있고 기념해야 할 날이 많지만, 내가 직접 관여됐다고 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4.2공동성명을 기념해야 된다”며 “다른 것은 다들 권력자들끼리 했지만 4.2공동성명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게 목숨을 걸고 가서 김 주석을 만나 이루어낸 것." 이라 강조하셨다고합니다. --------------------------------------------------------- 정경모 선생이 증언하는 문익환 목사와 김주석의 상봉 (정경모 선생의 회고록 『시대의 불침번』에서) ----------------------------------------------------------- 김대중 씨가 헛다리를 짚는 바람에 뚱딴지같이 정권을 노태우에게 가로채이고, 또 88올림픽 소동으로 모두 정신이 들떠 있는 한편에서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문익환 목사의 모습이 떠오릅디다. 그리고 홱 머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어요. 문 목사를 평양으로 모시고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하는 거다... 문 목사와 연락을 어떻게 취하나 혼자서 궁리에 잠겨 있던 차인데 유원호 씨가 나타났소이다. 유원호 씨를 앉혀놓고 그 자리에서 곧 붓을 들어 그리 길지 않은 짤막한 편지를 썼소이다... 문 목사와 나, 그리고 수행원으로 함께 따라간 유원호 세 사람이 경유지인 베이징을 향해 나리타를 출발한 것이 1989년 3월 24일 오후였소이다... 그러니까 1989년 3월 27일 아침 10시쯤이었을까. 우리 일행은 숙소를 나와 주석궁이라는 곳을 향해 출발하였소이다... 문 목사가 뚜벅뚜벅 걸어 다가서자 두 분은 순간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껴안으시더이다. 수인사 같은 것은 나눌 겨를도 없었고요... 문익환 목사 일행이 평양을 떠난 것이 1989년 4월 2일 오후였소이다. 그날 아침 문 목사가 기자단 앞에서 낭독하신 선언문이 오늘 우리가 ‘4.2남북공동성명’이라고 부르는 것이오이다. 이 성명문은 27일부터 30일까지 나흘 동안에 걸친 김 주석과 문 목사 사이의 회담을 담은 것으로 9개 항목에 걸친 상당히 장문의 것이지만, 알맹이만을 뽑아서 요약한다면 다음 세 가지 항복이 아닐까 하오이다. ①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니만치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이다. ② 통일에 관한 남북 간 대화의 창구는 널리 개방되어야 하며, 당국자들 사이의 독점에 맡기지 않는다. ③ 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진대 연방제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경로인데, 이의 실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 이 문서를 작성하느라고 나와 안병수(훗날 안경호로 확인) 동지는 31일 밤을 꼬박 세웠지요... 아무튼 4.2공동성명은 그로부터 11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날의 동지 문익환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 평양을 방문하고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후 발표된 6.15공동성명으로 직결되고, 또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 때의 10.4공동성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공동성명의 시발점은 문 목사의 평양 방문이었음이 자명한 사실이라 하겠지요. (정경모, 『시대의 불침번』, 한겨레출판, 2010. 361-399쪽 일부) 기사 전체 읽기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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