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광선에서 나온 김사량 작품집, <빛 속으로>를 받았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번역 이상의 번역이었습니다.
이 기쁜 순간을 기념하며 수국을 한 송이 샀습니다. 수국은 마침 책 제목 색깔과 같은 청보라입니다. 그림도 그렸습니다.
그럼 오늘부터, 김사량과 저의 인연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읽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Watercolor on Cotton 36cm x 2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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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량 - 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1)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의 한 모퉁이를, 나는 몇 번이나 되돌아가서 다시 읽었습니다.
‘나는 종종 지도에서 사라지곤 한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딘가로부터 출발해서 어딘가에 도착하기까지의 지점. ‘틈새’에 해당하는 그런 지점이 과연 존재할까?’
한국의 근현대사 지도에서 자주 사라지곤 하는 김사량이라는 작가를 떠올렸습니다. 도쿄, 경성, 평양, 베이징, 타이항산…… 그는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 지도를 누비고 다녔지만, 어디에서도 온전히 그를 기억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김사량 연구로 석・박사학위를 연이어 받았습니다. 이해득실을 따지자면 그다지 영리한 선택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덕분에 나는 어떤 것도 단정 짓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리며 오래도록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김사량을 만난 세월로 치면 벌써 20년입니다. 김사량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을 때는 박사학위를 받으면 스스로 김사량을 평가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었지만, 박사학위를 받은 지 15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김사량에 대해 굵고 선명한 줄기를 골라내지 못했습니다. 최근 10년에 가까운 시간은 김사량 연구를 중단하고 있었고요. 이런 내가 김사량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를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분에 넘치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김사량을 생각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습니다. 내가 오랜 시간 그를 한마디로 평가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들에게 김사량을 편견 없이 소개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ㅡ 계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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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특별한 인연이 있으시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나 보군요. 김사령을 김사랑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가끔 계시군요. 그럴 만도 하겠지요. 저는 아직도 한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만, 이제부터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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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Seokhee Kim
Sejin Pak 감사합니다 선생님!
대형서점에는 8월부터 출시된다고 해요. 맞아요. 많이들 김사랑이라고 되묻곤 합니다.ㅎ
Do-Eon Kim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김석희 선생님과 출판사 모두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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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khee Kim is with 박소정.
re2tS8 JulhSyl epoSdnfosSeuooraeeotod 19:15 ·
[연재]
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2)
『빛 속으로』 : 너의 이름은
내 이름은 ‘김석희’입니다. 이따금 내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는 시험답안지 담당 교수 칸에 ‘손석희’라는 이름을 쓰는 학생이 있어요. 처음 만나는 어떤 일본인은 ‘‘소키’라고 부르고 ‘曽木(‘소키’, 또는 ‘소기’로 읽히는 성씨)’라는 한자를 쓰는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따금 ‘수키’라고 부르는 서양인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번 고쳐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건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른다는 걸 내가 알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대부분 이름에 얽힌 가벼운 일화쯤으로 생각하며 웃어넘겼죠.
그러나 일제 식민지를 겪은 이들에게 이름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를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사량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빛 속으로』는 이름을 둘러싼 갈등이 주요 사건인 작품입니다.
‘나’는 ‘내 안에 품었던 비굴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여기서 ‘나’는 스스로 조선인성(朝鮮人性)을 감추는 것에 대해 일종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목격됩니다. 가책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설명’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죠.
고백의 형태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에는 대체로 윤리적 물음이 전제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1인칭 화자의 형태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사실상 1인칭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우선 누군가가 ‘나’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양자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식민지 상황에서만 일어났던 과거의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의 아이덴티티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아이덴티티를 감추어야 하거나 폭로되는 상황이란 결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현재에도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와 같은 심정과도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런 경험 없으신가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포스터는 내용과 관계없고요..ㅎ
지도는 박소정 대표의 요청으로 작품집 앞쪽에 싣기위해 제가 연습했던 것들입니다. 결국 실린 지도는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나름 이런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216You, Park Yuha, 김선영 and 21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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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a Kim
글 좋아요. 중국에서 근무했을 때, 제 소개 시간에 한자로 즉석에서 제 이름을 써서 보여주니 정말 좋아하면서 저를 '메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는 '메이'가 되었어요.
동료샘 아들은 '동하'라서 미국에서 'Dongha'라고 썼는데 그게 엄청난 일을 불러왔었대요. 'h'소문자가 묵음 처리 되면서 '동가'라고 불렸는데 그게 '작고 우스꽝스런 당나귀'를 희화하는 말이라 'Dong-Ha'라고 'H'를 대문자로 바꾸고서야 놀림을 받지 않았다…
AuthorSeokhee Kim
Mia Kim ㅎㅎㅎㅎㅎ, 이거 밝히기 조금 거시기한데요...저희 아이 이름이 ㅇㅇ였어요. 근데, 한국어로는 예쁜 이름이 일본어 한자로 읽으면 응코로 읽히는 거예요. 똥이라는 뜻이거든요. ㅋㅋㅋ 그래서 저희 아이는 어딜 가든 반드시 힘주어 자기 이름을 또박 또박 말하는 버릇이 생겼었어요.
박소정
작업하면서 제 이름이 ‘박소정’ 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 기뻤고, 한 편으로는 그래서 수 많은 ‘남(미나미)’ 과 하루오의 이름들이 아프게 다가왔어요. 그 시기의 현실적이고 흔한 상황이었을테니까요
AuthorSeokhee Kim
박소정 소정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예쁜가 말이죠... ^^ 생각해 보면 지금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버전이 다르지만, 분명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어떤 학생이 애써 어머니 쪽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정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Hyunhee Kim
이 글을 읽으니 미국에 살고 있는 나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내 이름이 불리는 일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우르르 올라오네요.
일본에서는 이름에 내가 나타날수도 숨을 수도 있으나 서양에 사는 동양인은 이름을 고쳐도 단번에 드러나는 구나 싶은 생각이 이 글을 읽고 드네요. …
AuthorSeokhee Kim
Hyunhee Kim 그렇죠 샘. 이름 이전에 외모에서 차이가 나니 이름 정도는 문제도 아닌 셈이죠. 그 차이와 대응에 대한 문제도 생각할 꺼리가 많을 거 같아요.
『빛 속으로』 : #카레라이스 편
"당신은 언제 카레라이스를 처음 먹었나요?"
김사량이 「빛 속으로」를 썼을 당시, 도쿄는 동아시아 최고의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은 서울도 남부럽지 않은 신문물의 도시지만, 그 시절의 도쿄는 동아시아의 중심, 메트로폴리스였습니다. 「빛 속으로」에는 메트로폴리스 도쿄의 면모를 보여주는 많은 소품들이 등장합니다. 에스컬레이터와 카레라이스 같은 것들이요. (물론 이시기에는 이미 한국의 화신 백화점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었습니다. 마사미 여사의 증언을 기억하실지요?(https://www.facebook.com/seokhee.kim.5070/posts/497877844527667) 화신 백화점 이야기는 다음작품 「천마」이야기를 할 때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번역후기에는 일일이 적지 못했지만, 오늘은 카레라이스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카레라이스를 처음 먹어보셨나요?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 이승철(가수 이승철 아님 주의 ㅎ)의 생일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거기서 처음 카레라이스를 먹었던 거 같아요. 근데 이게 색깔은 애기 설사 같고...향도 독하고 도무지 먹기가 힘들어서 그대로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그 카레가 막 먹고 싶어지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엄마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죠. 그것처럼 노랗고 묽은 것에 감자와 당근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제 얘기를 듣다가 빵 터지시더니 카레를 만들어 주셨어요. 오뚜기 카레였겠죠. 우리가 자주 먹는 카레가 일본식인 거는 다들 아시지요? 나는 그 후로 카레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승철이는 아주 친한 친구였는데, 그에 얽힌 삼각관계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무렵, 영국의 해군제도를 배우는 과정에서, 일본 해군이 영국 해군 식단에 포함되었던 카레를 받아들이면서 해군을 통해 일본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카레라이스에 대한 원형을 ‘니쿠자가’라는 고기감자조림 음식으로 보는 설도 있습니다. 니쿠자가는 감자, 고기, 당근, 양파를 조린 음식인데, 여기에 카레 가루를 더해 카레라이스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그럴 법한 이야기입니다. 카레라이스가 처음 등장하던 곳은 요코하마 남쪽에 있는 도시 요코스카였다고 합니다. 이후에 전역한 수병들이 군항 요코스카와 고향에서 카레집을 차리면서 전국적으로 카레가 퍼지게 되었다고 해요.
일본에는 '카레의 날'이라는 기념일도 있답니다. (ㅋㅋㅋ며칠인지는 모르겠어요.)
한국에서는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양료리제법〉에 ‘카레라이스 만드는 법’이 소개되었습니다. 카레는 고추와는 달리 매우면서도 찬 음식으로 여름 요리로 추천되기도 했어요. 우렁이와 인삼을 넣기도 했다죠?
1968년에 오뚜기(당시 명칭 풍림상사)에서 카레에 설탕과 밀가루, 조미료를 혼합하여 즉석에서 조리할 수 있는 인스턴트 카레를 출시합니다.
앗, 그러고 보니... 녹광에서 나오는 『빛 속으로』 표지색도 카레 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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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khee Kim is with 박소정.
tSp1oneesStored2h ·
[연재]
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4)
『천마』 : #너의모습은
『빛 속으로』에 이어서 발표한 『천마』는 그 무대가 경성입니다. 일제의 ‘끄나풀’이 되어 신바람 나게 경성을 누비던 현룡이라는 소설가가 등장합니다. 그는 얕은 재능으로 기인 행세를 하며 일본인 관료 오무라의 눈에 들어 세력을 얻었지만, 결국은 그 쓸모가 다하여 절로 유배당할 형편에 처해요. 현룡의 캐릭터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화문 하나를 인용해 봅니다.
“그런데 말이죠, 정말 근사하게도, 도쿄의 작가이자 저의 절친인 다나카 군이 경성에 와 있습니다.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까 조선호텔에 갔었는데, 너무 늦게 가는 바람에 그 녀석이 날 기다리다 지쳐서 오무라 일당과 함께 외출한 모양입니다. 그가 너무 안되어서 나는 지금부터 그를 찾으러 나갈 생각입니다. 뭣하면 소개해 드릴까요? 조선의 조르주 상드로서 또 나의 리베(liebe. 애인. 독일어)로서…….”(본문 94쪽)
현룡의 이 말 중에서 진실한 말은 없습니다. 일본인 작가 다나카(『취한 배』의 작가 다나카 히데미쓰가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룡의 모델은 김문집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사실, 현룡을 그린 드로잉은 김문집 사진을 찾아 참고했어요^^)와는 절친도 아니며 그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조선호텔에 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무라를 설득하여 현룡 자신이 절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부탁하기 위해 애타게 다나카를 찾아다니는 중이죠. 기인 행세를 하며 허세로 가득 차 있는 데다, 여류시인을 유혹하기 위해 ‘조선의 조르주 상드’, ‘나의 리베’라는 말을 지껄이는 현룡의 모습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지금의 우리 안에는 이런 모습이 없는지 자문할 일입니다. 외국어로 떠들어야 권위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권력을 찾아 헤매는 현룡의 모습 속에서, 나는 오히려 현대의 어떤 군상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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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진은 오늘 우연히 창문으로 본 철새들의 무리. 그들은 모두 앞에 가는 자를 따라가죠. (얼결에 쫓아가 찍었는데 겨우 꼬리만 찍었네요.^^ )오늘의 포스팅에 어울리는 사진인 것 같아 올려봅니다.
142Park Yuha, 정혜경 and 14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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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5)
『천마』 : #경성의모습은 ㅡ 소금과 담배
『천마』가 당시 경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난달부터 화재가 되었던 쓰레기통뿐 아니라, 다른 재미있는 소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소재를 한 두 가지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1. 소금장수
『천마』의 도입부에는 현룡이 신마치(현재의 쌍림동 일대) 골목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에 까메오 출현하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소금장수입니다.
“소금이요! 소금!”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소금을 가마니에 담아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잘 기억해 보니 어릴 때 어머니가 지나가는 소금장수를 불러 소금을 사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오래된 기억이긴 합니다만. 혹시 여러분은 기억에 없으실까요? 조금 지나서는 아예 소금만 파는 소금집이 있었어요. 우리 앞집이 소금집이었어요. 딸부잣집이었죠.
소금장수와 얽힌 전래동화도 있었죠. 소금장수가 어느 무덤가에 쉬고 있자니 무덤이 열리며 여우가 튀어나오기에 쫓아가보니 어느 잔치집으로 들어가 신부행세를 하더라는 것이죠. 소금장수는 자기 지팡이가 요술 지팡이라며 방으로 뛰어들어가 신나게 신부를 두들겨 패니, 아픔을 참지 못하고 여우가 되어 도망갔더라는 이야기에요. 남도지방에는 소금장수가 재를 넘으며 동네 아낙들의 ‘결핍’을 해결해 준다는 내용의 민요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의 움직이는 미디어이며 신문물의 전달자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은 사라진, 그러나 우리 어린 시절에는 종종 볼 수 있던 그 풍경이 한 세기 전 경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2. 담배
주인공 현룡은 소금장수의 외침을 들으며 골목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웁니다. 그 담배의 이름은 ‘미도리’입니다. 미도리는 그린을 의미하는 일본어입니다. 당연히 이 담배는 지금은 볼 수 없죠. 조선총독부에서 발매한 담배 이름이었습니다. 이 담배는 담배가 10개피가 들었었고 정가는 10전이었습니다.
김사량은 담배를 즐겼던 것 같습니다. 「빛 속으로」에도 ‘하기’라는 이름의 담배가 나오죠. 하기는 싸리라는 뜻의 일본어예요. 「노마만리」에도 ‘첸먼’이라는 중국담배가 나옵니다. 결국 이 김사량 작품집에는 동아시아 3국의 대중적인 담배가 골고루 등장한다는 뜻이죠. 지금은 담배가 얼마나 하나요? 엄청 비싸 진 셈이죠?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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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ㅡ 미도리 담배갑.
사진 2 ㅡ 소금됫박
사진 3 ㅡ 내용과 관계없지만 박수근 선생님의 소금장수. 생각나서 붙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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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You, Park Yuha, 김선영 and 44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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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특별한 인연이 있으시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나 보군요. 김사령을 김사랑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가끔 계시군요. 그럴 만도 하겠지요. 저는 아직도 한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만, 이제부터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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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d
AuthorSeokhee Kim
Sejin Pak 감사합니다 선생님!
대형서점에는 8월부터 출시된다고 해요. 맞아요. 많이들 김사랑이라고 되묻곤 합니다.ㅎ
Do-Eon Kim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김석희 선생님과 출판사 모두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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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khee Kim is with 박소정.
re2tS8 JulhSyl epoSdnfosSeuooraeeotod 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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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2)
『빛 속으로』 : 너의 이름은
내 이름은 ‘김석희’입니다. 이따금 내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는 시험답안지 담당 교수 칸에 ‘손석희’라는 이름을 쓰는 학생이 있어요. 처음 만나는 어떤 일본인은 ‘‘소키’라고 부르고 ‘曽木(‘소키’, 또는 ‘소기’로 읽히는 성씨)’라는 한자를 쓰는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따금 ‘수키’라고 부르는 서양인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번 고쳐 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건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른다는 걸 내가 알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대부분 이름에 얽힌 가벼운 일화쯤으로 생각하며 웃어넘겼죠.
그러나 일제 식민지를 겪은 이들에게 이름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가를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사량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빛 속으로』는 이름을 둘러싼 갈등이 주요 사건인 작품입니다.
1인칭 화자 ‘나’는 동경제대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으로 빈민촌의 S 협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그의 이름은 ‘남(南)’이지만 아이들은 모두 그를 ‘미나미(南)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그는 굳이 자신의 이름이 ‘남’이라고 고쳐 말하지 않고, 이씨 성을 가진 청년에 의해 폭로됩니다. 이 에피소드는 ‘金史良’이라고 쓰고 ‘긴시료(きんしりょう)’라고 읽히던 김사량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나’는 ‘내 안에 품었던 비굴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추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여기서 ‘나’는 스스로 조선인성(朝鮮人性)을 감추는 것에 대해 일종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 목격됩니다. 가책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설명’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죠.
고백의 형태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에는 대체로 윤리적 물음이 전제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1인칭 화자의 형태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사실상 1인칭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우선 누군가가 ‘나’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양자 간의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는 식민지 상황에서만 일어났던 과거의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의 아이덴티티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아이덴티티를 감추어야 하거나 폭로되는 상황이란 결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현재에도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와 같은 심정과도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런 경험 없으신가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
포스터는 내용과 관계없고요..ㅎ
지도는 박소정 대표의 요청으로 작품집 앞쪽에 싣기위해 제가 연습했던 것들입니다. 결국 실린 지도는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나름 이런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216You, Park Yuha, 김선영 and 21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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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a Kim
글 좋아요. 중국에서 근무했을 때, 제 소개 시간에 한자로 즉석에서 제 이름을 써서 보여주니 정말 좋아하면서 저를 '메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는 '메이'가 되었어요.
동료샘 아들은 '동하'라서 미국에서 'Dongha'라고 썼는데 그게 엄청난 일을 불러왔었대요. 'h'소문자가 묵음 처리 되면서 '동가'라고 불렸는데 그게 '작고 우스꽝스런 당나귀'를 희화하는 말이라 'Dong-Ha'라고 'H'를 대문자로 바꾸고서야 놀림을 받지 않았다…
AuthorSeokhee Kim
Mia Kim ㅎㅎㅎㅎㅎ, 이거 밝히기 조금 거시기한데요...저희 아이 이름이 ㅇㅇ였어요. 근데, 한국어로는 예쁜 이름이 일본어 한자로 읽으면 응코로 읽히는 거예요. 똥이라는 뜻이거든요. ㅋㅋㅋ 그래서 저희 아이는 어딜 가든 반드시 힘주어 자기 이름을 또박 또박 말하는 버릇이 생겼었어요.
박소정
작업하면서 제 이름이 ‘박소정’ 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 기뻤고, 한 편으로는 그래서 수 많은 ‘남(미나미)’ 과 하루오의 이름들이 아프게 다가왔어요. 그 시기의 현실적이고 흔한 상황이었을테니까요
AuthorSeokhee Kim
박소정 소정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예쁜가 말이죠... ^^ 생각해 보면 지금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버전이 다르지만, 분명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어떤 학생이 애써 어머니 쪽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정말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Hyunhee Kim
이 글을 읽으니 미국에 살고 있는 나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내 이름이 불리는 일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이 우르르 올라오네요.
일본에서는 이름에 내가 나타날수도 숨을 수도 있으나 서양에 사는 동양인은 이름을 고쳐도 단번에 드러나는 구나 싶은 생각이 이 글을 읽고 드네요. …
AuthorSeokhee Kim
Hyunhee Kim 그렇죠 샘. 이름 이전에 외모에서 차이가 나니 이름 정도는 문제도 아닌 셈이죠. 그 차이와 대응에 대한 문제도 생각할 꺼리가 많을 거 같아요.
Seokhee Kim is with 박소정.
29 atoSpsJuoulynl sonatto tnrn17fiu:e0du0hlo ·
[연재]
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3)
29 atoSpsJuoulynl sonatto tnrn17fiu:e0du0hlo ·
[연재]
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3)
『빛 속으로』 : #카레라이스 편
"당신은 언제 카레라이스를 처음 먹었나요?"
김사량이 「빛 속으로」를 썼을 당시, 도쿄는 동아시아 최고의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은 서울도 남부럽지 않은 신문물의 도시지만, 그 시절의 도쿄는 동아시아의 중심, 메트로폴리스였습니다. 「빛 속으로」에는 메트로폴리스 도쿄의 면모를 보여주는 많은 소품들이 등장합니다. 에스컬레이터와 카레라이스 같은 것들이요. (물론 이시기에는 이미 한국의 화신 백화점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었습니다. 마사미 여사의 증언을 기억하실지요?(https://www.facebook.com/seokhee.kim.5070/posts/497877844527667) 화신 백화점 이야기는 다음작품 「천마」이야기를 할 때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번역후기에는 일일이 적지 못했지만, 오늘은 카레라이스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카레라이스를 처음 먹어보셨나요?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 이승철(가수 이승철 아님 주의 ㅎ)의 생일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거기서 처음 카레라이스를 먹었던 거 같아요. 근데 이게 색깔은 애기 설사 같고...향도 독하고 도무지 먹기가 힘들어서 그대로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갑자기 그 카레가 막 먹고 싶어지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엄마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죠. 그것처럼 노랗고 묽은 것에 감자와 당근이 들어 있었다... 엄마는 제 얘기를 듣다가 빵 터지시더니 카레를 만들어 주셨어요. 오뚜기 카레였겠죠. 우리가 자주 먹는 카레가 일본식인 거는 다들 아시지요? 나는 그 후로 카레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승철이는 아주 친한 친구였는데, 그에 얽힌 삼각관계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무렵, 영국의 해군제도를 배우는 과정에서, 일본 해군이 영국 해군 식단에 포함되었던 카레를 받아들이면서 해군을 통해 일본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카레라이스에 대한 원형을 ‘니쿠자가’라는 고기감자조림 음식으로 보는 설도 있습니다. 니쿠자가는 감자, 고기, 당근, 양파를 조린 음식인데, 여기에 카레 가루를 더해 카레라이스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그럴 법한 이야기입니다. 카레라이스가 처음 등장하던 곳은 요코하마 남쪽에 있는 도시 요코스카였다고 합니다. 이후에 전역한 수병들이 군항 요코스카와 고향에서 카레집을 차리면서 전국적으로 카레가 퍼지게 되었다고 해요.
일본에는 '카레의 날'이라는 기념일도 있답니다. (ㅋㅋㅋ며칠인지는 모르겠어요.)
한국에서는 192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서양료리제법〉에 ‘카레라이스 만드는 법’이 소개되었습니다. 카레는 고추와는 달리 매우면서도 찬 음식으로 여름 요리로 추천되기도 했어요. 우렁이와 인삼을 넣기도 했다죠?
1968년에 오뚜기(당시 명칭 풍림상사)에서 카레에 설탕과 밀가루, 조미료를 혼합하여 즉석에서 조리할 수 있는 인스턴트 카레를 출시합니다.
앗, 그러고 보니... 녹광에서 나오는 『빛 속으로』 표지색도 카레 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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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khee Kim is with 박소정.
tSp1oneesStored2h ·
[연재]
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4)
『천마』 : #너의모습은
『빛 속으로』에 이어서 발표한 『천마』는 그 무대가 경성입니다. 일제의 ‘끄나풀’이 되어 신바람 나게 경성을 누비던 현룡이라는 소설가가 등장합니다. 그는 얕은 재능으로 기인 행세를 하며 일본인 관료 오무라의 눈에 들어 세력을 얻었지만, 결국은 그 쓸모가 다하여 절로 유배당할 형편에 처해요. 현룡의 캐릭터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화문 하나를 인용해 봅니다.
“그런데 말이죠, 정말 근사하게도, 도쿄의 작가이자 저의 절친인 다나카 군이 경성에 와 있습니다. 꼭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까 조선호텔에 갔었는데, 너무 늦게 가는 바람에 그 녀석이 날 기다리다 지쳐서 오무라 일당과 함께 외출한 모양입니다. 그가 너무 안되어서 나는 지금부터 그를 찾으러 나갈 생각입니다. 뭣하면 소개해 드릴까요? 조선의 조르주 상드로서 또 나의 리베(liebe. 애인. 독일어)로서…….”(본문 94쪽)
현룡의 이 말 중에서 진실한 말은 없습니다. 일본인 작가 다나카(『취한 배』의 작가 다나카 히데미쓰가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룡의 모델은 김문집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사실, 현룡을 그린 드로잉은 김문집 사진을 찾아 참고했어요^^)와는 절친도 아니며 그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조선호텔에 간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무라를 설득하여 현룡 자신이 절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부탁하기 위해 애타게 다나카를 찾아다니는 중이죠. 기인 행세를 하며 허세로 가득 차 있는 데다, 여류시인을 유혹하기 위해 ‘조선의 조르주 상드’, ‘나의 리베’라는 말을 지껄이는 현룡의 모습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지금의 우리 안에는 이런 모습이 없는지 자문할 일입니다. 외국어로 떠들어야 권위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권력을 찾아 헤매는 현룡의 모습 속에서, 나는 오히려 현대의 어떤 군상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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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진은 오늘 우연히 창문으로 본 철새들의 무리. 그들은 모두 앞에 가는 자를 따라가죠. (얼결에 쫓아가 찍었는데 겨우 꼬리만 찍었네요.^^ )오늘의 포스팅에 어울리는 사진인 것 같아 올려봅니다.
142Park Yuha, 정혜경 and 140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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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5)
『천마』 : #경성의모습은 ㅡ 소금과 담배
『천마』가 당시 경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난달부터 화재가 되었던 쓰레기통뿐 아니라, 다른 재미있는 소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소재를 한 두 가지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1. 소금장수
『천마』의 도입부에는 현룡이 신마치(현재의 쌍림동 일대) 골목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에 까메오 출현하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소금장수입니다.
“소금이요! 소금!”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소금을 가마니에 담아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잘 기억해 보니 어릴 때 어머니가 지나가는 소금장수를 불러 소금을 사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오래된 기억이긴 합니다만. 혹시 여러분은 기억에 없으실까요? 조금 지나서는 아예 소금만 파는 소금집이 있었어요. 우리 앞집이 소금집이었어요. 딸부잣집이었죠.
소금장수와 얽힌 전래동화도 있었죠. 소금장수가 어느 무덤가에 쉬고 있자니 무덤이 열리며 여우가 튀어나오기에 쫓아가보니 어느 잔치집으로 들어가 신부행세를 하더라는 것이죠. 소금장수는 자기 지팡이가 요술 지팡이라며 방으로 뛰어들어가 신나게 신부를 두들겨 패니, 아픔을 참지 못하고 여우가 되어 도망갔더라는 이야기에요. 남도지방에는 소금장수가 재를 넘으며 동네 아낙들의 ‘결핍’을 해결해 준다는 내용의 민요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의 움직이는 미디어이며 신문물의 전달자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은 사라진, 그러나 우리 어린 시절에는 종종 볼 수 있던 그 풍경이 한 세기 전 경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2. 담배
주인공 현룡은 소금장수의 외침을 들으며 골목을 빠져나와 담배를 피웁니다. 그 담배의 이름은 ‘미도리’입니다. 미도리는 그린을 의미하는 일본어입니다. 당연히 이 담배는 지금은 볼 수 없죠. 조선총독부에서 발매한 담배 이름이었습니다. 이 담배는 담배가 10개피가 들었었고 정가는 10전이었습니다.
김사량은 담배를 즐겼던 것 같습니다. 「빛 속으로」에도 ‘하기’라는 이름의 담배가 나오죠. 하기는 싸리라는 뜻의 일본어예요. 「노마만리」에도 ‘첸먼’이라는 중국담배가 나옵니다. 결국 이 김사량 작품집에는 동아시아 3국의 대중적인 담배가 골고루 등장한다는 뜻이죠. 지금은 담배가 얼마나 하나요? 엄청 비싸 진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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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ㅡ 미도리 담배갑.
사진 2 ㅡ 소금됫박
사진 3 ㅡ 내용과 관계없지만 박수근 선생님의 소금장수. 생각나서 붙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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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6)
『풀이 깊다』 : 너의 언어, 그리고 色
1. 우선, 사투리
#사투리~사투리 사투리, 사투리 사투리, 사투리 사냥을 나간다! 훠야~
어릴 때 김세레나씨의 까투리 타령을 들으면 꼭 한 번씩 머리속에서 자동 개사되어 들리곤 했습니다.
사투리는 지방색을 드러내고, 때로는 표준어, 혹은 서울말과의 사이에서 차별의식을 낳기도 합니다.
서울로 유학 온 지방학생들이 애써 사투리를 감추는 경우나, 시골로 전학간 서울 학생이 서울 말투로 인해 미움을 받는다거나 하는 경우는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죠. 그것은 식민지기의 종주국 언어와 식민지 언어의 위계와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 시골에서 쓰는 말투나 사투리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자칫 지역 차별의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풀이 깊다』를 번역하면서 강원도 주민들의 대화는 강원도 사투리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오는 인물들이 강원도 주민임이 분명하고(물론 타지에서 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사실 내가 강원도 평창군의 탄광촌, 미탄 출신이기 때문에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움직인 것도 있죠.
어릴 때 고향을 떠나 나의 언어인 강원도 사투리를 "거반"(거의) 잊어서 고향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네이티브 체크(?)를 해주신 서울대 김효섭 선생님과 고향 친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본문 한 구절 옮겨 봅니다.
“여봐요, 사람들이요, 마커(모두) 내마르 들어보우야. 저 엥감탱이가 내 항개 뿌인 하엔(하얀) 치매(치마)에까정 먹물을 튕겠다니요. 저 양탕머리 쏙 들러빠진 영감, 하엔 비단 치매 항 개라도 사줬으먼 말을 안 하제. 돈이라도 냉겨 가지고 오면 어데 덧나는지. 맨날 날으 꼴딱 새고 기 들어오는 주제에 술이 당키나 하우 ! 머어, 잔체(잔치)라고? 당장 낼 떼꺼리(끼니)도 없는 주제에 코댕가리 가치 몬느므 잔체요 ! 내 하엔 치매 우트 할꺼나고? 우트 할끄나니까? 비러머글 군청놈들, 즈 집 오슨(옷은) 애끼노미(아끼면서) 나므 치매(남의 치마)는 말이 되우야… 내거 부애가 치밀어 살수가 엄싸요.”
알아들으실 수 있을까요?^^
다음 연재 글에서는 언어와 색깔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ㅡ계속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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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연재]
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7)
『풀이 깊다』 : 너의 언어, 그리고 色
2. 너의 언어
언어와 색깔은 『풀이 깊다』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사량은 두 개의 키워드를 『풀이 깊다』의 앞부분에 대단히 임팩트 있게 압축시켜요.
김사량의 문학 속에서 이름-언어-문학은 하나의 줄에 꿴 구슬처럼 연동합니다.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지구상에 넘쳐나겠지만, 식민지인의 이중언어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그것은 『빛 속으로』의 ‘남(南)’이 보여주는 ‘이름’의 갈등과도 비슷합니다.
주인공 박인식은 첩첩산중 깊은 산에 둘러싸인 오지 마을의 군수인 작은아버지에게 들렀다가 옛 은사 코풀이 선생을 만납니다. 작은아버지가 산민(山民)들을 한곳에 끌어모아 앉혀두고 이른바 ‘색의 장려(색의 장려 운동. 조선 총독부가 흰옷이 생산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해 백의를 착용을 금지했던 정책)’에 대해 연설하기 위해 무게를 잡으며 연단에 나타나는데... 그 뒤에서 굽실굽실하는 가냘픈 목의 50대 통역. 그는 중학교 은사 코풀이 선생님이었습니다. 코풀이 선생은 인식의 중학교 시절 조선어 선생님이었고, 인식과 친구들의 시위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난 인물이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한 군(郡)의 수장이 조선어를 사용하면 위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어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하는 젊은 첩에게까지 의기양양하게 그것이 대단한 일본어인 양 떠드는 작은아버지는 누구 한 사람 일본어를 알 턱 없는 산민들을 향해 일부러 통역까지 세워가며 불쌍할 만큼 우스꽝스러운 연설을 합니다. 그리고 뚱뚱하게 살찐 작은아버지 옆에서 코풀이 선생님은 쭈뼛쭈뼛 코를 닦으며 통역을 합니다.
"이곳에 와서 매일같이 자신을 휘감는 묘한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어쩐지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 속을 헤매는 기분이랄까. 사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옷이 희든 검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너무 바보스러운 상황에 인식은 강한 반발심을 느꼈다. 물론 그는 경제적인 견지에서도 또 위생상으로도 ‘색의 장려’ 정책에 반대하지 않지만, 척 봐도 여기에 흰옷을 두른 이는 하나도 없다. 게다가 몇 년간 세탁을 하지 않았는지 그들의 낡아빠진 복장은 마치 죄수복 같은 흙빛이지 않은가! 회당 안에서 눈에 띄는 흰옷이라면, 연단 옆 의자에 단정하게 앉은 내무 주임의 리넨 하복정도인 것이다. 아무리 상부 관청의 명령이라고 해도 작은아버지는 내일 아침 일용할 양식도 없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본문 148쪽)
『풀이 깊다』에 나오는 군수의 일본어 연설 장면은 언어와 표상, 그리고 권력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가히 김사량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ㅡ 계 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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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 ( 8 )
『풀이 깊다』 : 너의 언어, 그리고 色
3. 너의 색ㅡ흰 옷을 입은 사람들
“저기를 봐, 저기를 보라구.”
창 너머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까 회당에 모였던 남자와 여자들이 놀랍게도 등에 검은색으로 ○나 △, 또는 ✕ 표시를 한 채 한 사람 두 사람 머뭇거리며 지나간다. 아무리 작은아버지라도 조금은 뒤가 켕기는지 괜스레 한층 더 흐흐거리며 웃어댔다.
“도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저 사람들한테…”
인식은 핏기가 싹 가신 창백한 얼굴로 일어나, 분노에 차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격렬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작은아버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본문 157쪽)
흰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먹물을 뿌리거나 낙서를 하는 행위는 소설적 허구나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당시에 실제로 빈번히 일어났던 상황인 듯하다. 심지어 상복을 입은 여인에게 먹물을 뿌리거나 여자들의 치마를 들치고 속바지에 먹물을 뿌리는 일조차 있었다(1934년 11월 10일 자 조선일보, 1938년 3월 3일 자 동아일보 참고).
『풀이 깊다』의 이 일본어 연설 장면은 후반부에 나오는 백백교의 연설 장면과 대비된다. 백백교는 1930년대 당시 한반도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이비 종교로 백색 옷을 입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1920년부터 1940년 사이에 조선일보에 91건, 동아일보에 86건의 기사가 실렸을 만큼 그 세가 대단했던 종교다. 재산은 물론 딸까지 바친 한 신도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백백교의 범죄 행위를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그들의 악행이 세상에 알려졌다. 교주의 범죄 행위가 세상에 드러나자, 그들은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있는 자들을 심산유곡으로 끌고 가서 가차 없이 죽여 버렸다. 경찰에 쫓기던 전해룡이 자살함으로써 백백교 사건은 끝이 났는데, 그들에게 피살된 시체만 48구가 발견되었으며, 시체조차 나오지 않은 희생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했다(1940년 3월 20일부터 3월 28일까지 백백교 특집기사 참고).
두말할 것도 없이, 색의 장려 정책에 반발하여 흰옷을 입는 것이 민족적 구원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선전했던 백백교의 교리는 색의 장려 정책 이상의 폭력이었다. 색의 장려 운동의 말단에 있던 코풀이 선생이라는 인물이 ‘백의를 주장하는 종교’에 희생당하고 마는 구조가 그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일제의 ‘색의 장려’ 정책과 대비되는 ‘백의 장려’, ‘일본어’에 대비되는 ‘조선어’ 등 완전히 대비되는 듯 보이는 두 대극의 공통점은, 색깔 옷이든 흰옷이든, 그들의 연설이 일본어이든 조선어이든, 모두 서민을 착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김사량은 언어뿐 아니라 색깔 자체가 권력이 되는 식민지 상황을 예리하게 파헤치며 희화한다.
앞에 소개한 김사량의 세 작품은 모두 과거에 멈춰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적용 가능한 이야기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사량의 문학에는 시대를 뛰어넘어 삶의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사량은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로, 그들의 정책을 비판했다. 식민지기를 통틀어 일본의 심장부에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정책을 이렇게 정면으로 비판한 작가는 내가 아는 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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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좋아서 퍼왔으나 출처가 불분명.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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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 ( 9 )
1. 북경반점
북경반점이 어디입니까?
우리 중 상당수의 핸드폰 연락처에 "북경반점"이 들어 있다에 5백원 겁니다. ㅎ
북경반점은 그냥 아무데나 있는 중국음식점 아니겠습니까? 물론 짜장면을 팔겠죠. 짜짬과 탕슉을 세트로 팔기도 하겠고요. 일본에도 북경반점은 많이 있어요. (심지어 캐나다 벤쿠버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 동아시아적 공감코드랄까요? (댓글사진 참조)
생각해 보셨나요?
왜 북경반점이 그렇게 많을까요?
그렇죠. 모두들 아시는 바와 같이 아주 유명한 원조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100년 전, 베이징에는 이미, 이렇게 현대적인 외관과 인테리어를 갖춘 국제급 호텔, 북경반점이 있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서로다른 목적, 서로다른 색채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이 곳에 모여들었습니다. 밀정이 넘실대는 곳이었죠.
이곳, 북경반점이 바로 김사량의 <노마만리>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동양 사람으로는, 더구나 조선 사람의 신분으로는 발을 들여놓기조차 어렵다는 호사로운 ‘북경반점’이 마치 조선인 합숙소처럼 되어 있었다. 화중 화북의 여러 도시와 오지로부터 안전지대라고 찾아 몰려온 사람들로 들끓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일본이 패전한다면 일본 제국주의와 운명을 같이해야 할, 호주머니에 피묻은 돈이 수두룩한 사람들뿐이다.
그 중에는 미어지게 배가 부른 아편장수도 있고 칠피구두를 신고 삐거덕거리는 갈보장수도 있으며 혹은 화북권으로 교환하러 온 이른바 사업가 - 다시 말하면 송금브로커 - 그리고 대동아성 촉탁이나 군 촉탁, 총독부 촉탁이라는 명색 모를 사내, 이 밖에도 헌병대니 사령부의 밀정 등등 별의별 종류의 인간들이 다 들고 날치는 것이었다."
(본문 191쪽)
"샹하이를 중심으로 악랄한 수완을 휘두르고 있다는 헌병대의 어떤 밀정은 새로 150만원인가 주고 사들인 자동차에 기생을 싣고 어디론가 드라이브 차 떠나며, 도쿄를 무대로 활약했다는 전 헌병보조원은 3층에 일본 계집을 데리고 살면서 4층에 새로 카페걸을 데려다 두고는 못미더워 허덕허덕 오르내리고(이 사내는 해방이 되자 우리 의용군이 샹하이관에서 체포하였다.) 서주서 돌아온 잡곡장수는 소위 신여성을 첩으로 얻어 데리고 조용한 육군반점으로 옮아가며, 난징(남경)서 왔다는 무슨 회장인가는 급전직하로 떨어져가는 돈값을 걷잡을 길이 없어 시계니 보석이니 알지도 못하는 골동품을 사 들이기에 분주하며 그 외에도 돈을 뿌리며 요릿집으로 나가는 패거리, 도박차 밀려 나가는 패거리들이 이 방에서도 쑤군쑤군 로비나 복도에서도 모여 서서 쑥덕거린다."
(본문 192쪽)
1940년대 북경반점의 상황을 스크린처럼 열어주는 기행문 「노마만리」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ㅡ계 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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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량ㅡ그의 이름과 언어, 문학과 방랑에 대하여 ( 10 )
『노마만리』 : 방랑자 김사량
#방랑은이어지겠지만, 연재는곧끝납니다^^
2. 고단한 여행
김사량의 행로에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소설 「향수」(이 작품은 여러 상황이 허락지 않아 아쉽게도 작품집에 싣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번역한 「향수」도 소개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에 보이는 불안과 초조, 르포 「해군행」에 보이는 좌절과 협력, 그리고 이후에 있었던 비판의 칼날 역시 김사량 자신의 몫이었죠. 다만 김사량이 일제에 협력하는 데 머물지 않고 조선의용군이 주둔하고 있던 타이항산을 향해 탈출했다는 점은 그의 행보를 쉽게 단정 지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이 책에 수록된 『노마만리』는 김사량의 망명기 도입부입니다. 『노마만리』만으로도 책 한 권 분량인데, 이 책에는 도입부만 실려서 그의 방랑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노마만리』 이후에도 그의 고단한 여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마만리』 도입부가 흥미로운 것은, 당대 지식인들이 독립운동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긴장감 넘치는 베이징 북경반점 내의 상황이 마치 중국 내의 정치지도처럼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죠. 1919년 3・1운동의 실패를 계기로 하여, 조선 내부의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였고, 그 대부분은 만주로 이동해 상하이(上海)에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무장 독립운동으로서의 대일본항쟁이 있었고, 조선과 만주의 국경지대, 중국 동북지역 및 연해주 지역에는 적극적 항일전이 있었습니다. 재(在)만주 독립군의 공격을 계속 받게 되자 일본군은 토벌 작전을 시작합니다. 일본군의 토벌 작전에 직면한 재만주 독립군은 근거지를 옮겨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입니다. 1931년 이른바 ‘만주사변’이 발발하였고, 결국, 일본의 관동군은 중국 동북지역을 무력으로 점거합니다.
이때 조선 독립운동군의 간부 대부분이 중국 본토로 이동하게 됩니다. 목숨 걸고 싸우던 독립병사와 독립운동가들은 지도자를 잃고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전향자도 많았어요. 일본군은 독립운동가 체포에 협력하는 자에게 상금을 지급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독립운동가가 아닌 사람들마저 독립운동가라는 죄명을 쓰고 체포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 결과, 독립운동가는 물론 재만주 조선인 사회가 위축됩니다. 1932년경까지 비교적 활발하던 조선의 독립운동은 점차 세력이 약해져 갔습니다. 1937년, 루커오차우 사건(盧溝橋事件)을 계기로 일본은 전면적인 중국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은 1938년 중에 주요 도시의 철도 노선을 공격했는데, 중국은 충칭(重慶)으로 천도하여 항쟁을 계속하였고 전쟁은 장기화하였으며, 1941년 12월에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바로 다음 날, 김사량은 ‘남방군을 순회하면서 황군을 찬양하고 전첩을 보도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지만 이를 거절하여 구금됩니다. 그러다 1943년 가을에는 결국 해군견학단으로 파견되고 말죠. 야스타카 도쿠조의 증언에 의하면 이 시기에 김사량은 ‘체포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만큼 격앙되어 일본의 통치 권력을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김사량이 탈출을 감행했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수어천사 은영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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