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참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2013년 3월 14일.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옆방에 누워 있는 일선님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깊은 내면을 향해 감긴 눈,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가늘고 느린 숨, 그리고 푸른빛이 돌며 창백하게 변해가는 피부색.
아, 어머니는 이제 정말로 몸을 벗으려 하시는구나. 나는 직감으로 오늘이 '그 날'임을 알았다. 일선님 곁에 앉아 함께 숨을 고르고 있는 간병사 송정자 씨를 바라보니, 그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동생 유진과 아내 마샤에게 일선님의 상태를 알렸다. 잠시 후 동생 부부를 비롯해 조이빌 공동체 가족들이 일선님의 방인 701호로 모여 들었다. 당신을 한 가족처럼, 아니, 어쩌면 피를 나눈 혈육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해온 이들에게 둘러싸인 일선님의 모습은 지극히 평온했다. 지구별 여행을 마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이를 배웅하기 위해 모인 모두는 깊은 감동 속에서 아무 말없이 가슴으로 교감할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유진이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지방에서 구전돼 내려오는 자장가 곡조에 유진이 직접 쓴 시를 가지고 가사를 붙여 만든 노래었다. 그 노래는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절절한 감정을 실어 부른 '사모곡'이자, 평생을 영적인 깨어남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살아온 한 인간의 뜻과 염원을 드러낸 '주제곡'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사랑이 태양이 되어서 온 세상을 비추리
어머니의 기도가 바람이 되어서 멀리 멀리 퍼져서 모두를 감싸리
어머니의 꿈이 구름이 되어서 하늘 아래 모두에게 꿈을 심어주리
어머니의 사랑이 별이 되어서 밤하늘 밑 아이들을 보호하리
어머니의 기쁨이 울려 퍼져서 우리 가슴 치유하리……
노래가 반복되어 흘러나오자 어느 순간 일선님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맑고 투명한 그 눈동자를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한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일선님, 사랑합니다.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삶을 사셨습니다. 당신이 하던 일을 이제는 우리가 맡아 하겠습니다. 당신이 곁에 있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일선님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나는 제 할 일을 다 끝낸 한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천천히 빠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육체를 지탱해온 생명의 불꽃이 점차 꺼져가면서 육체에서 자유로워진 영혼이 내보내는 파장은 고요하면서도 강렬했다. 그 파장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 안고 녹이는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그 원대한 사랑 속에서 하나로 녹아든 우리는 한 명씩 일선님에게 다가가 그분의 식어가는 손을 만지고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잠시 후 일선님은 90년 하고도 8개월의 생에 마침표를 찍는 숨을 내쉬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2년 5개월. 우리는 그렇게 일선님을 떠나보냄으로써 영원히 가슴에 품었다.
어느 날 찾아온 뇌졸중, 그 후
2010년 10월 7일. 당시 미국 미주리 주 자택에 머물고 있던 나는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봄날 송순현 님이었다. 봄날님은 한국 사회에 <정신세계원(현現 정신세계넷 웰빙포커스)>을 세워 영성과 관련한 다양한 책을 출판하고 인물을 발굴함으로써 영성의 씨앗을 틔우고 꽃이 활짝 피어나도록 헌신해 온 분으로, 나와는 일선님의 자서전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2010년 6월 발간)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작업을 함께하면서 돈독한 인연을 맺었다. 책이 발간된 후에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던 터였기에 멀리서 걸려온 전화가 마냥 반갑기만 했는데, 뜻밖에도 봄날님은 다급한 목소리로 ‘일선님과 연락이 안 되니 어찌된 사정인지 빨리 알아보라’고 했다. 두 분이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이제 출발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했지만 아무리 걸어도 통 받질 않는다는 것.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봄날님의 전언에 초조해진 나는, 제주에 사는 동생 유진에게 연락을 취해 일선 님 집에 가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가 부엌 싱크대 앞에 쓰러져 있어 병원으로 모셨다는 애기를 들었다. 뇌졸중이라 했다.
나는 그 즉시 짐을 챙겨 다음날 비행기를 탔다. 미합중국 미주리 주에서 대한민국 제주 섬까지 향하는 하늘길은 멀고도 멀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어찌나 초조하고 긴장이 되던지, 애간장이 끊어지고 입 안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마침내 비행기가 제주공항에 착륙할 즈음에는 마음이 차분히 정돈되는 것을 느꼈다. 정작 일선님 자신은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을 넘기며 살아왔고 훗날에는 몇 번이나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라고 분명히 말하셨고, 사는 동안에는 당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너무도 충실히 최선을 다해왔음을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항에서 병원으로 향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생과 사의 경계에 놓인 그분이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일까. 물음을 던지자 답이 곧바로 나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북의 영세중립평화통일과 세계평화, 그리고 견성성불.’ 이것을 100퍼센트 순수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염원하는 것. 이것은 일선님이 평생 삶의 목적으로 삼고 실천해 온 주제이었다. 그래, 그것이면 족하지 걱정하고 힘들어 할 이유가 무엇인가. 평소와 다름없는 호방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병원 건물에 들어섰다.
당시 상황을 돌아볼 때 지금도 가장 놀랍게 여겨지는 것은, 나를 비롯해 우리 4남매와 그 자녀들이 처음으로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일선님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면서 몇 날 며칠을 함께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캐나다, 미국, 중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등 6개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가족에게는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일선님이 쓰러졌다는 갑작스런 소식에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한달음에 달려 온 것이다. 그만큼 일선님은 우리 가족 안에서 가장 큰 ‘어른’이셨고 정신적으로 귀한 유산을 가슴에 심어주는 ‘정신적 구심점’의 역할을 해오셨기 때문이다.
수술 후 첫마디, 세계평화 신난다!
누군가 87세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 불명에 빠졌는데, 의사가 말하길 당장 오른쪽 뇌의 3분의 1을 잘라내야 그나마 살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가족들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수술을 할 경우 당장은 살기야 하겠으나 완치는커녕 후유증으로 더 큰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주위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주치의로부터 수차례 들은 상황이라면?
일선님이 쓰러진 당시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고, 주변에서는 연세도 많으니 이대로 편하게 가시게 하는 게 당사자나 가족에게 더 좋을 것이라는 조언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생각이 달랐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이들의 마음을 충분히 인정하고 헤아렸으나, 그렇다고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일선님을 그 상태로 보내드릴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좀 더 사시면서 더 하셔야 할 무엇이 있다고 모두들 느끼고 있었기 와 남은 가족 사이에 아직 다 나누지 못한 무언가 남아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964년에 바다 건너 이민을 떠난 이후 오랜 동안 고국을 멀리하고 살아온 우리 가족에게는, 일선님이 2006년에 역이민을 하여 제주에 정착하면서 비로소 '고향'을 갖게 된 것이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 전에 일선님이 살던 캐나다 토론토는, 비록 어머니가 거기에 있고 우리 자신이 그곳에서 배우고 성장했음에도 고향이 주는 아늑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일선님이 거처를 제주로 옮기고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이 작은 섬이 우리 가족을 하나로 융합시키고 교류하게 만드는 구심점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이 큰 일을 일선님이 또 이루어 내신 것이다. 우리 4남매와 그 자녀들은 일선님의 큰 결단 덕분에 우리 힘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제주가 우리 마음의 고향이 된다는 가능성에 접하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모두에게 큰 무게를 가지고 다가 왔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일선님이 느닷없이 사라지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 의논도 필요 없이 가족의 무언의 만장일치 결정에 의해 일선님은 곧 수술대에 오르셨고. 의사로부터 수술이 잘 끝났다는 말을 듣고
도 한참을 더 기다린 후에야 우리는 일선님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제 막 마취에서 깨어난 일선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있었고 머리는 붕대로 휘감겨 있었고, 두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코에는 긴 줄이 끼워져 있어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일선님의 의식은 명료하게 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기에, 우리 가족 모두는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일선님을 향해 "일선님 최고!" 라고 외쳤다. 그러자 일선님도 엄지를 세우더니 "우리 모두 최고!"라 화답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리며 "세계평화 신난다"라고 우렁찬 소리를 던지는 게 아닌가. 뇌의 3분의 1을 잘라버린 사람에게서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그 말을 듣자, 우리 모두의 가슴은 불이 붙은 듯 마냥 뜨거워졌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 힘이 우리를 이끌고 사십년을 걸리면서 세계를 한 바퀴 돈 것이다. 다 문어지고 여리고 약한 한 여자의 육체 안에 아직도 저토록 강인한 정신력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랍고 감사하고 자랑스러워, 나는 눈물이 그냥 흘러넘치게 두었다.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을 창조하는 사람
그 후로도 일선님의 투병 과정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아프기 전에 일선님은 종종 '나는 통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정말 그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언제봐도 늘 유쾌하고 밝고 긍정적인 자세로 주변을 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감각을 지닌 몸이 살아 있는 이상 어찌 통증을 전혀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신경세포가 다 죽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을 '통증'과 '고통'은 다르다는 의미로 해석하게 되었다. 즉, 육체를 지닌 한 사람은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일선님은 그것을 고통으로 여기지는 않았고 또 항상 의식의 초점이 더 큰 것 더 중요한 것에 가 있기 때문에 통증 느끼는데에 안테나를 맞추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육체적인 통증에 시달릴 때 많은 사람들은 흔히 그 통증과, 혹은 통증을 느끼는 몸 자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통증은 더 커지고 그로부터 헤어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반면 몸이 내가 아님을 알면 통증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힘이 생기기에, 그 어떤 통증이 찾아와도 그에 완전히 나를 내맡기고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비단 육체적인 통증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괴로움, 스트레스, 마음의 상처 등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내가 아님을 아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고통이 될 수 없다. 잠시 잠깐 아프고 시릴 수야 있지만, 오히려 그 경험을 스스로를 단련하고 성장시키는 계기로 삼는 게 가능해진다.
일선님은 꾸준한 마음공부와 영성 수련을 통해 참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지혜를 얻었고, 그래서 육체적 정신적 아픔을 누구보다 현명하게 다룰 수 있었다. 만약 그런 지혜와 힘을 사전에 터득하지 못했다면, 수술 직후에 그처럼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일선님도 몸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사지가 마비되고 의사소통을 할 수조차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에 이르면 간혹 실의에 빠지고 깊은 우울감에 젖기도 했다. 그럴 때는 표정이 생기를 잃고 눈빛 또한 가라앉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일선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이 평생의 화두와 목표로 삼아온 '한 생각'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견성성불’이다. 돌아 가시기 3개월 전에 이제는 글자를 쓰면 손이 심하게 흔들리고 글자가 겹쳐져서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지난 것이 일년이 되었는데 어느날 일기장을 달라고 하더니 ‘견성성불’이라고 또렷하게 쓰셨다. “아, 일선님, 견성성불이라고 쓰셨네요?” 하니까, 더듬이 말로 “그래 요새는 내 정신이 깜박깜박해서 잊어버리지 않을려고 썼어‘ 라고 하시지 않는가! 말도 잘 못하시던 분이 어느 순간에 이렇게 정신이 살아나셔서 정신집중을 하신 것이다. 정말 놀라웠다. 말하자면 자신이 이 지구에 온 사명과 목적에 늘 깨어 있었다고 할까. 그런 의식과 정신력이 일선님에게 없었다면, 임종 전까지 매일 아침마다 천부경을 외우고 온 마음을 다해 세계평화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지속하기란 아마도 불가능했으리라. 일선님의 투병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 지켜본 유진은, 어머니의 그와 같은 태도에 대해 "당신이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정확히 인식했고, 그 속에서 어떻게 최고의 의식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행동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일선님은 또한 자신이 그때껏 품어온 신념을 강화하고 목표를 되새기는 것뿐 아니라, 일상적인 삶에서도 주변 사람에게 늘 감사함을 표현하고 아무리 작은 것에도 넘치도록 감동하며, 또 세상 모든 것에 아낌없는 축복을 선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1년 3월에 호주에서 날아와 약 한 달을 간호에 매진한 셋째 아들 세진은, 당시 본인이 경험한 어머니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뇌졸중 이후 어머니는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는 듯하다. 더 예민해진 감각이 본래 지니고 있던 긍정적인 정신과 결합하여 모든 것에 탄성을 아끼지 않는다. 무엇을 먹든 너무 맛있다고 하고, 누구를 만나든 당신 참 곱다고 한다. 세상이 다 좋고 아름답고 거룩하게 보여서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라는 말씀도…….'
"뇌졸중은 축복이야"
가족뿐 아니라 다른 많은 간병사와 방문객들도 일선님이 생활하는 모습이나 일선님과 나눈 대화 등을 병상일지에 꼼꼼히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을 읽어 보면 일선님이 얼마나 좋은 기운을 발산하며 주변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아래에 옮겨놓은 글들은 단지 몇몇 사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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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님은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큰 소리로 "굿모닝!"을 외친다. 또 병실을 오가는 모든 이와 눈을 맞추며 오늘은 넥타이가 멋있다, 미소가 아름답다, 여기까지 와주어 고맙다는 등의 말을 건네어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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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선님, 요즘 뭐가 가장 중요해요?
- 사랑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지. 도우미하고 나하고도 사랑을 해야 해. 사랑이 가장 좋은 거야. 사랑을 모르는 것, 그것만큼 불행한 것이 없어. 나는 사랑을 알아. 그래서 이것(뇌졸중으로 인한 상황)을 견딜 수 있지.
- 사랑이 무엇이지요?
- 자기가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 그게 사랑이야.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기를 불태우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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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선님, 제가 어제 벚꽃 구경을 갔었는데 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 그렇겠지. 웃고 있었겠지. 아름다운 것을 보면 더 과장해서 표현해야 돼. 감동하는 것이 좋은 기운을 만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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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들꽃들이 찍힌 사진을 보고 혼잣말로) 너 어디서 이제 나타났냐? 너무너무 아름답구나.
위의 기록에서 드러나는 일선님의 태도는, 이 세상에서 흔히 '불행'이라 불리는 사고 또는 질병과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선님은 자기에게 닥친 상황에 분노하는 대신 일어난 사실을 그 즉시 있는 그대로 수용했고,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에 절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했다. 그러고 보면 일선님에게는 감사하고 감동하고 축복하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특별한 재능과 능력과 돈이 필요 없는, 어쩌면 뇌졸중보다 더한 상태에 있대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었던 셈이다.
내면에서 신명과 열정을 불러 일으켜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일선님의 이와 같은 태도는 눈에 띄는 크고 작은 변화를 일으켰다.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들을 웃게 했고, 간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의 진정한 친구가 되게 했다. 또한 우리 4남매의 관계를 신뢰와 애정으로 더 끈끈하게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선님은 종종 상상의 힘과 염력을 발휘해, 온 우주에 사랑의 씨앗을 퍼뜨리는 작업도 계속해서 해나갔다. 그중 하나는 행복 풍선을 만들어 하늘 높이 띄우는 것으로, 일선님은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그 풍선을 받아들어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는 일선님이 어떻게 해서 뇌졸중 이후 더 많이 가슴이 열리고
더 깊게 사랑하고 더 평화로워질 수 있었을까가 궁금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마침내 그 비결을 알아냈다. 수술 이후 차츰 기력을 되찾아가고 있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나갔을 때다. 나는 내 안에서 맴돌고 있는 질문을 아무 거리낌 없이 꺼내어 어머니 앞에 툭 던져놓았다.
"일선님, 왜 이런 상황을 창조했어요? 뇌졸중을 창조한 이유가 뭐예요?"
"하나님이 내 뇌를 수박처럼 두 동강 내서 그 안에 겸손을 심어주려고 하신 거지. 그러니 내게 뇌졸중은 축복이야."
그 순간 내가 받은 충격을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마치 나의 뇌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할까. 그랬다. 그것은 신선하고 은혜로운 충격이었다. 뇌졸중은 이 세상을 여행하는 마지막 관문에서 '겸손'을 배우라고 하늘이 내린 특별한 선물이라 말하는 일선님의 강직함에, 또한 그것을 거부함 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선님의 헌신성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드디어 해내셨구나! 속으로 이렇게 외치자 불현듯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이런 경지에 오르기까지 당신 스스로를 닦아오면서 겪었을 수많은 고비 고비들이 짐작되어 마음이 시린 한편, 어머니가 마침내 흔들림 없이 고요한 평화의 바다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면서 가슴이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죽음, 온전한 나로 돌아가는 의식
일선님의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된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라는 제목처럼, 일선님은 정말로 평화가 되어 이 세상과 작별했다. 사람이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 가운데 하나가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하는 것이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완전한 사랑 가운데서 한 점의 고통 없이 잠자듯 임종을 맞이한 일선님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복을 누렸다 할 만하다. 그 순간을 지켜본 이들은 지금도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죽음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을 처음으로 경험했다고. 그로 인해 뼛속 깊이 뿌리 내린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사랑하는 사람의 형상을 더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아쉽고 서운한 일이지만, 우리 가족은 일선님이 몸을 벗으며 보여준 지극한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도 큰 소리로 울부짖거나 슬픔과 상실감에 젖어 허덕이지 않았다. 병원으로 조문을 온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일선님을 떠나보내는 의식에 참가한 모든 이들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행복감을 느꼈다. 나는 그 이유가 죽음이란 단지 물질로 이루어진 육체가 사라지는 절차에 불과하며, 영적 차원에서는 산 자나 죽은 자나 하나이고 항상 함께한다는 것을 일선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건강하던 시기에도 일선님은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음은 온전하고 무한한 나로 돌아가는 통로이자 의식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자신이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이 지구에서 살아갈 이들을 위해, 재산을 미리 공정하게 분배하고 후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유서로 작성하고 묘지를 알아보고 장례의례에 대해 자녀와 미리 상의하는 등 구체적인 준비를 했다. 다시 말해 어머니는 지속적인 마음공부와 영적 수련을 통해 죽음의 본질을 꿰뚫는 한편, 몸을 갈무리하기 위한 실질적인 일들에도 결코 소홀하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하더라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실질적인 준비를 하지 않고 황망히 떠나는 바람에 자녀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사례도 많다. 이것은 단지 죽음을 코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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