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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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京錫
1948년 10월 6일생
서울특별시 출신의 대한민국의 개신교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 가운데 하나인 서경조의 증손자이다. 서경조는 형 서상륜과 함께 1884년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래교회를 창립하였다. 서상륜이 아들이 없어 서경조의 차남인 서병호가 서상륜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서경석은 서병호의 손자이다.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공대 기계과를 졸업한 후 기독교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은 적이 있으며 1975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1980년 석방되었다. 이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등 목회자 생활을 하다가 1982년 프린스턴신학교로 미국 유학을 떠난 후 1988년 귀국하였다.
미국 유학생활동안 목격한 NGO에 착안하여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창립하여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한국에 시민운동의 개념을 뿌리내리게 하였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으로 조직의 재정을 충당하고, 단순한 구호를 넘어서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형태의 시민운동은 한국사회에서 대단히 신선한 모습이었고, 서경석 목사는 시민운동의 대부로서 높은 인지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및 집권 민주자유당과 지나치게 밀착돼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1995년 사무총장직을 사퇴하고 경실련 산하 경제정의연구소장을 맡았다.
1994년 박원순[1] 변호사, 조희연[2] 교수가 참여연대를 창립하면서 경실련과 참여연대가 시민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고, 2000년 박원순 변호사가 주도한 낙천낙선운동에 반대하다가 시민운동 주류에서 밀려났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기독교사회책임, 선진화시민행동 등 보수성향 단체들을 창립하고 스스로 대표를 맡아서 활동하면서 햇볕정책과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행보를 보였다.
2011년 국내 개신교계 최대의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약칭 한기총)의 금권선거 논란이 불거지자, 자신이 지지했던 이광선 목사와 함께 나도 죄인이다라면서 참회의 고백을 해서 화제를 모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특히 2000년 낙천낙선운동을 기점으로 그가 사실상 우익으로 전향해서,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계속 나왔으며, 이때문에 상당수 시민운동단체나 활동가들과도 불편한 관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노무현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 그리고 좌파성향의 시민운동단체들이 주도한 낙천낙선운동에 대해서 대단히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이런 논란이 증폭되었고,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우파 성향의 인물들과 함께하면서 "종북세력의 준동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럽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정책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계속 발표하면서 이런 인식이 확고해졌다.[3]
서경석 목사 본인은 이런 비판에 대해서, 나는 보수가 아니며 북한 인권에 침묵하는 자들이 문제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서경석 목사가 인터넷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4]에 직접 기고한 좌파였던 서경석 목사가 왜 지금 보수가 되었나?을 보면 그의 입장을 잘 알수 있다.[5]
그러나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비롯된 시민들의 촛불집회에 맞불집회를 주도하며 "이번에도 종북좌파들이 주도해 촛불시위를 만들었다. 언론이 난리치니까 국민들 멋도 모르고 춤추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서울 조선족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조선족과 탈북자 인권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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