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두뽀사리 ㅣ 2014-12-12 ㅣ 공감(1) ㅣ 댓글 (0)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박완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속편이다. 작은 딸의 중학교 학부모 독서모임에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게 되고, 그 책을 덮으면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으나, 진도도 안나가고, 몰입도 쉽지 않아서... 힘겹게 진행을 해나가고 있다. 대 작가의 역작을 이렇게 박대하는 나 자신이 안타까울 뿐이다. 출간 13년만에 양장본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작가가 전적으로 기억에 의지해 쓴 자전적 소설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작가의 유년 시절과 6-25 전쟁을 임할 때까지의 이야기라면, 그 후에 이어지는 내용을고 전개되고, 작가가 스무 살의 성년으로 들어서던 1951년부터 1953년 결혼할 때까지의 20대를 그렸다고 하겠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강한 스무 살의 작가가 전쟁이라는 야만의 시간을 견디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기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눈물겹게 그려진다. 작가는 1950년대 당시의 거리풍경과 상황,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한 아름다움으로 복원했다.
그 내용은
1. 꿈꿨네, 다시는 꿈꾸지 않기를
2. 임진강만은 넘지 마
3. 미친 백목련
4. 때로는 쭉정이도 분노한다
5. 한여름의 죽음
6. 겨울나무
7. 문밖의 남자
의 제목 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단락의 제목으로도 이야기를 꾸미기에 충분하다고 할 만큼 낭만적인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완서라는 작가는 1931년 경기 개풍에서 태어나서, 1950년 서울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하였다. 개성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완서에게 한국전쟁은 평생 잊을 수 없을 없는 기억으로 남는다.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거의 폐인이 되어 돌아온 `똑똑했던` 오빠가 `이제는 배부른 돼지로 살겠다`던 다짐을 뒤로 하고 여덟 달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그후 그의 가족은 남의 물건에까지 손을 대게 되는 등 심각한 가난을 겪는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 발발 후 곧 대학을 중퇴한다. 그후 미8군의 PX 초상화부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그곳에서 박수근 화백을 알게 된다. 1953년 결혼하고 살림에 묻혀 지내다가 훗날 1970년 불혹의 나이가 되던 해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이후 우리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진실까지 뼈아프게 드러내는 소설들을 발표하며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긋고 있다. 박완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 적절한 서사적 리듬과 입체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다채로우면서도 품격 높은 문학적 결정체를 탄생시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는 우리 문학사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풍요로운 언어의 보고를 쌓아올리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녀는 능란한 이야기꾼이자 뛰어난 풍속화가로서 시대의 거울 역할을 충실히 해왔을 뿐 아니라 삶의 비의를 향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구도자의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2014.12.11. 두뽀사리~
[마이리뷰]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양장) 밥달라고꿀꿀꿀알았다고꿀꿀꿀 ㅣ 2014-12-08 ㅣ 공감(0) ㅣ 댓글 (0)산이 거기 있다고해서 정말 거기 있는 것만은 아니다.현실의 낯이 너무도 차가울 때에, 그 때엔 가끔 내가 헷갈리기도 한다. 숨쉬는 내가 예전의 내가 맞는지. 내가 아는 세상이 이 세상이 맞는지.박완서 선생이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어렸을 적 읽었던 이 책을 다시 편 요즘 나는 그런 때들을 공감한다.그러나 책 속 무자비함과는 별개로 산뜻히 빛나는 작가의 문장들처럼, 나의 시력과는 별개로 산은 거기 있고 언제나 아름다울 것이다.
잊혀진 것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의 기록,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서란 ㅣ 2012-10-28 ㅣ 공감(1) ㅣ 댓글 (0)
우리 아버지 살아 생전에도 우리들 앉혀 놓고 하시는 말씀중에 제일 많은 것은 당신이 겪으신 고난의 시간,한국전쟁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프시던 일찍 가셨던 그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잊지도 않고 몇 번을 하셔도 꼭 같은 말씀이지만 어쩜 그렇게 재생을 잘해시는지.그런 아버지의 말씀을 엄마는 옆에서 지겹다며 자식들에게 그런말해서 무엇하냐고 했지만 난 듣기 좋았다.물론 그 모든 말씀이 내가 겪지 못한,할아버지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호기심에 대한 것도 있지만 아버지가 고난의 시간을 거쳐 지금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이 거져 얻어진 시간들이 아니라는 것을 소설을 읽듯이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잘 들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힘든 기억은 잊을래야 더욱 잊을수가 없다.그것이 개인사이기도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와 함께 51하는 것이라면 더욱 기억되고 기록되어 더 많은 이가 나눈다고 해도 흠이 되기 보다는 더 생생이 그 시대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기록이 되지 않을까,그런면에서 전작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를 단숨에 읽고 이 책을 망설임없이 집어 들게 되었다.
전작은 스무살까지의 기억에 대한 기록이라면 이 소설은 한국전쟁부터 53년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사와 맞물려 힘겹게 돌아가던 한국사와 함께 하여 생생함은 물론 그 시대를 좀더 깊숙히 안으로 들어가 혼란의 시대를 이겨냈던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적골의 유년시절에는 겉껍질만이라도 양반이었던 할아버지와의 기억으로 인해 풍족하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설움보다는 할아버지를 기둥으로 박적골이 좀더 풍성하게 그려졌다면 이 소설은 할아버지에서 장손인 '오빠' 로 정신적이 지주가 옮겨짐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오빠로 인해 보여지던 세상이 오빠가 인민군에 끌려가 도망쳐 오게 되고 시민증을 얻지 못해 다니던 학교에서 도민증을 얻으러 갔다가 함께 숙직질에 있었던 군인이 쏜 오발탄에 다리에 맞게 되면서 기울어 가는 오빠와 그런 오빠로 인해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와서 처음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현저동 집에서의 피난생활,집 앞에 있던 마르지 않던 우물이며 빈집털이를 하여 근근히 이어가던 생활및 어쩔 수 없이 인민위원회에 나가야만 했던 오점의 시간들및 월북을 종용당하고 올케와 어린 조카와 함께 북으로 향하며 마주하는 피난민으로의 생활을 생생히 담아 놓았다.
오빠의 다리에 총알이 박히고 팔개월의 삶은 저자의 정신적 지주였던 '오빠'라는 영혼이 서서히 스러져가듯 그렇게 곁에서 점점 빈쭉정이처럼 매말라 간다. 변변한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먹는것 또한 부실했으니 환자가 그만한 세월을 이겨냈다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인듯 한데 환자와 함께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소리소문없이 오빠의 죽음을 덮어야만 했던 오열의 시간은 그녀를 갑자기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위치로 우뚝 서게 한다. 어린 조카들을 위해서도 한집안의 가장으로 나서야 했던 스무살, 인민위원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근처에 살던 언니의 도움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피엑스에서의 생활은 이미 작품 <나목>으로도 만났던 이야기지만 그 세세함을 다시 소설을 통해 들여다 보게 되니 먹먹하게 되기도 하고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기대었던 엄마의 모든 것이 저자에게로 향하는 엄마와 딸의 애증의 시간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올케 또한 든든한 생활꾼으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삶을 통해 혼란의 시간들이 잘 표현되어 있어 그 시간속을 잠시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현저동 피난생활을 이어나가게 해 주었던 집 앞에 있던 겨울에도 마르지 않고 흘러 나오던 우물과 빈집에 남겨져 있던 먹거리와 힘든 세월이지만 동토에도 봄이 오듯 피어나던 하얀 목련, '미쳤어' 라고 밖에 뱉어낼 수 없었던 계절의 만남은 동토에도 봄이 오듯 피난민의 삶에도 한반도에도 봄이 올 수 있을까? 라고 되묻고 있는 듯,아니 희망은 꼭 올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더불어 그동안 기대왔던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집안의 가장으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인듯 해도 그 생활에 길들여지며 돈을 벌어야 했고 어머니는 그동안 등지고 있던 집안의 대소사를 떠안게 되시고 올케 또한 든든한 버팀목으로 당찬 생활꾼으로 이어나가는 여인들의 삶에서 전쟁의 무서움보다는 배고픔의 서러움에서 벗어나려는 삶과 그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저자의 모습을 통해 저자의 이십대를 통해 더 나아가 소설가로서의 삶 또한 살짝 엿보는 기회를 만나볼 수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이 작품 속에 이어지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그녀의 소설가로서 맥을 이어준 것은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물론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헤쳐나온 저저의 삶 또한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되었겠지만 그녀사 소설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게 해 준것은 '어머니'의 존재인듯 하다. 어머니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소설가 박완서가 있었을까? 어머니와 그녀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이면서도 억척스럽게 힘든 세월을 이겨낸 어머니의 삶을 통해 그녀 또한 세월과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진 듯 하다. 홀로 누구보다 억척스럽게 자식들에게 신문학을 공부시키며 '자존심'으러 버티어낸 어머니,자신이 힘든 시간을 이야기로 풀어내면 고난한 시간을 잊으려 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서서히 저자에게는 영양분으로 자리하지 않았을까. 현저동의 마르지 않던 우물과 같은 분이 '어머니' 이기도 하면서 동토의 땅에서 맞 본 '미쳤어' 라는 백목련의 개화는 '소설가로서의 저자의 삶'에 비유하고 싶다.
꾸며낸 이야기가 사실적이라 믿고 싶은 소설도 있지만 자신의 생생한 이야기가 이처럼 소설로 재탄생하였으니 믿고 싶지 않아도 한 조각 한 조각 이어진 이야기가 멋진 조각보로 다시 태어난것처럼 저자의 소설들은 읽음과 동시에 믿음이 가는 생생함이라 더욱 편안하고 그녀의 마르지 않는 '우물'에 더 기대고 싶은가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또한 오래전에는 모두가 '산' 이었다. 하지만 오래전에는 산동네라고 부르던 곳은 지금은 산은 온데간데 없고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하여 제일의 동네가 되었다. 이곳이 산동네라는 것은 아파트 바로 곁에 있는 작은 동산이 말해주고 있다. 그 또한 좀더 큰 산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얼마전에 모두를 허물어 내고 일부분만 남겨져 있다. 지금의 동산을 보는 사람들은 오래전 그 형상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곳이 '산'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 힘들거나 어려웠던 시절을 더 빨리 잊고 싶어한다. 자신에게 좋은 기억과 행복한 것만 기억하려 하는데 기억이란 것은 그렇지 않다. 나쁜 것일수록 더 오래 더 많이 기억해낸다. 세 잎의 행복 속에 네 잎의 '행운' 이 숨겨져 있듯이 우리네 기억 또한 힘들고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잊으려 한다. 어쩌면 그런 우리의 기억의 편린을 조각 조각 이어준 '조각보'와 같은 저자의 소설들이 있어 참 다행이고 그런 역사의 날실이 있었기에 그녀의 개인사와 병합한 씨실과 함께 멋진 소설로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저자의 불행한 개인사만 놓여 있는 소설이었다면 참 밋밋하고 재미없었을 것이다. 분명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한국전쟁이라는 큰 획이 있어 그녀의 개인사와 씨줄과 날줄로 만나 그녀의 삶과 역사를 탈바꿈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할아버지 이후로 기대었던 오빠의 삶,'오빠도 살아 돌아온 게 아니라 그때 무참히 죽은 것이다. 지금 아랫목에 누워 있는 건 오빠의 허깨비일 뿐 진정한 그는 아니다.' 오빠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다면 어머니와 저자 또한 중심을 자신에게 놓을 수 있었을까. '세상만 자반 뒤집기를 안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응하고 먹고살게 돼있었다.'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더이상 미성년자가 아닌 이젠 한가정을 책임질 의무를 짊어진 일꾼으로 그리고 자신을 중심에 놓게 된 삶을 통해 고난의 시간 속에서 활짝 피어나는 백목련처럼 자신의 고난의 개인사를 솔직하게 끄집어내어 '백목련'처럼 활짝 피게 한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을 터인데 멋진 작품으로 기록되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참 행운이라 여겨진다. 이 기회에 저자의 다른 작품들을 좀더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봐야 할 듯 하다. 소설속의 '어머니'도 저자의 삶도 좀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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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ooomom ㅣ 2012-06-04 ㅣ 공감(1) ㅣ 댓글 (0)
박완서의 소설들을 읽고 있다. 여기저기 정말 겪지 않고서는 이리 생생하고 절절하게 묘사할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짐작되는 대목을 읽으면서 정말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상상력이라면 그야말로 인간 심리의 이중성에 대해 철저하게 고민해 왔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참, 살기가 힘들었으리라 그렇게 짐작이 된다.
<그 산이 정말 거기게 있었을까>는 정말 그 힘든 삶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그에게는 어찌보면 가족의 울타리가 참으로 든든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입학해서는 강하고, 현명한 어머니와 든든한 오빠가, 그리고 커서는 올케가 그리고 전쟁이 모두 끝난 뒤에는 남편이....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 때문에 벌어지는 고통이었지 인간 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아니었음을 성년의 나날들에서 확인해서 오히려 그 전의 다른 소설들에서 느꼈던 작가의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는 고통을, 인간의 이중성을, 참혹함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읽기만 해도 가슴 절절하고, 뒷목이 뜨끈거리는 그 내면들을 세세히 낱낱이 파헤쳤던 것이다.
다행이다. 안심이다. 무엇보다 제대로 보는 것, 맞닥뜨리는 것, 직면하는 것, 그래서 보이는 것 그 이면을 본질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망가천재 ㅣ 2012-03-03 ㅣ 공감(0) ㅣ 댓글 (0)
어린 날 한 때의 이야기 입니다.
아버님이 소천하시고 흘러 간 시간과 그 만큼의 고단한 삶에 매몰되어 갈 때 였습니다.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이웃의 한 남성과 다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투는 것이 아니라 거친 그 자에게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당하시고 계셨지요.
어린 피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혈기를 부린 것이지요.
그 자도 마음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저녁 나절 집 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더군요.
어머님 말씀대로 밖으로 나가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습니다. 저도 사실 죄를 지은 것 같아 무섭고 떨려 그 시간까지 멍한채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돌아 온 것은 보복의 폭력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었겠지요.
나는 참아야 했습니다.
순간, 세째 누님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 들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데 당신이 손을 대느냐~"
그 밤은 아무도 입을 연 사람 없이 지새워졌습니다.
위로 세 분의 누님들과 아래 여동생에게, 저는 그런 동생이요, 오빠였습니다.
그런 나의 눈을 뭉클하게 사로잡은 이 책중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데올로기 제까짓 게 뭔데 양심도 없지, 오빠같은 죽음이 양심의 짐이 안 되는 이데올로기 따위가 왜 있어야 하느냐 말이다."
그렇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이 책,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가족의 이야기이며, 한국 전쟁의 막막함과 핍절함을 살아내 온 선생님 젊은 날의 이야기 입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선생님은 특별히 예쁨받고 귀함받는 딸내미였습니다.
가부장의 전통 속에서 아들과는 다른 관심과 지원의 대상이었지만 사실, 아들만큼 관심받고 지원 받으시면서 자라왔던 것이지요.
마치 남의 일처럼 지천이었던, 그래서 관심 밖이었지만 떠나가지는 않았던 싱아의 존재가 새롭게 그리워 질 때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을 지내오신 것이지요.
그런 여린 삶에, 전쟁과 그로 인한 오빠의 부상, 일그러져가는 집안과 삶의 모습, 가늠할 수 없는 개인의 운명 등이 어깨를 누르게 됩니다.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하고, 살려야 하고, 살게해야 하고
삶 삶 삶....
미군 피엑스의 초코렛과 미르크(밀크)와 사탕과 쿠키 들이 조카들의 버즘을 없애고 피부를 윤기나게 하고 살을 나게 하는 것이 감사함이요 모든 무거움을 잊게 하는 것이 되도록 선생님과 가족은 시대를 열절히 살아 냅니다.
그런 날들이 선생님의 호흡이 되고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어 우리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로 나온 것이지요.
항상 선생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선생은 기억될 수 밖에 없도록 삶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쉬 지치지 않도록 삶과 주변과 사물의 의미를 정성스레 되새겨 오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삶 속의 자신을 다스리는 힘이요.
그것이 삶이 살아져 온 날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근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선생님의 결혼 전, 젊은 날의 이야기 입니다.
그냥 읽으셔도 되지만 어린 날의 이야기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먼저 읽으시고 보시면 더욱 좋을 듯 합니다.
오빠의 다리에 총알이 박히고 팔개월의 삶은 저자의 정신적 지주였던 '오빠'라는 영혼이 서서히 스러져가듯 그렇게 곁에서 점점 빈쭉정이처럼 매말라 간다. 변변한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먹는것 또한 부실했으니 환자가 그만한 세월을 이겨냈다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인듯 한데 환자와 함께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소리소문없이 오빠의 죽음을 덮어야만 했던 오열의 시간은 그녀를 갑자기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위치로 우뚝 서게 한다. 어린 조카들을 위해서도 한집안의 가장으로 나서야 했던 스무살, 인민위원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근처에 살던 언니의 도움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피엑스에서의 생활은 이미 작품 <나목>으로도 만났던 이야기지만 그 세세함을 다시 소설을 통해 들여다 보게 되니 먹먹하게 되기도 하고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기대었던 엄마의 모든 것이 저자에게로 향하는 엄마와 딸의 애증의 시간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올케 또한 든든한 생활꾼으로 일어서는 오뚝이 같은 삶을 통해 혼란의 시간들이 잘 표현되어 있어 그 시간속을 잠시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현저동 피난생활을 이어나가게 해 주었던 집 앞에 있던 겨울에도 마르지 않고 흘러 나오던 우물과 빈집에 남겨져 있던 먹거리와 힘든 세월이지만 동토에도 봄이 오듯 피어나던 하얀 목련, '미쳤어' 라고 밖에 뱉어낼 수 없었던 계절의 만남은 동토에도 봄이 오듯 피난민의 삶에도 한반도에도 봄이 올 수 있을까? 라고 되묻고 있는 듯,아니 희망은 꼭 올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더불어 그동안 기대왔던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집안의 가장으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인듯 해도 그 생활에 길들여지며 돈을 벌어야 했고 어머니는 그동안 등지고 있던 집안의 대소사를 떠안게 되시고 올케 또한 든든한 버팀목으로 당찬 생활꾼으로 이어나가는 여인들의 삶에서 전쟁의 무서움보다는 배고픔의 서러움에서 벗어나려는 삶과 그 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저자의 모습을 통해 저자의 이십대를 통해 더 나아가 소설가로서의 삶 또한 살짝 엿보는 기회를 만나볼 수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이 작품 속에 이어지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그녀의 소설가로서 맥을 이어준 것은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물론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헤쳐나온 저저의 삶 또한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되었겠지만 그녀사 소설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게 해 준것은 '어머니'의 존재인듯 하다. 어머니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소설가 박완서가 있었을까? 어머니와 그녀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이면서도 억척스럽게 힘든 세월을 이겨낸 어머니의 삶을 통해 그녀 또한 세월과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진 듯 하다. 홀로 누구보다 억척스럽게 자식들에게 신문학을 공부시키며 '자존심'으러 버티어낸 어머니,자신이 힘든 시간을 이야기로 풀어내면 고난한 시간을 잊으려 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서서히 저자에게는 영양분으로 자리하지 않았을까. 현저동의 마르지 않던 우물과 같은 분이 '어머니' 이기도 하면서 동토의 땅에서 맞 본 '미쳤어' 라는 백목련의 개화는 '소설가로서의 저자의 삶'에 비유하고 싶다.
꾸며낸 이야기가 사실적이라 믿고 싶은 소설도 있지만 자신의 생생한 이야기가 이처럼 소설로 재탄생하였으니 믿고 싶지 않아도 한 조각 한 조각 이어진 이야기가 멋진 조각보로 다시 태어난것처럼 저자의 소설들은 읽음과 동시에 믿음이 가는 생생함이라 더욱 편안하고 그녀의 마르지 않는 '우물'에 더 기대고 싶은가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또한 오래전에는 모두가 '산' 이었다. 하지만 오래전에는 산동네라고 부르던 곳은 지금은 산은 온데간데 없고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하여 제일의 동네가 되었다. 이곳이 산동네라는 것은 아파트 바로 곁에 있는 작은 동산이 말해주고 있다. 그 또한 좀더 큰 산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얼마전에 모두를 허물어 내고 일부분만 남겨져 있다. 지금의 동산을 보는 사람들은 오래전 그 형상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곳이 '산'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 힘들거나 어려웠던 시절을 더 빨리 잊고 싶어한다. 자신에게 좋은 기억과 행복한 것만 기억하려 하는데 기억이란 것은 그렇지 않다. 나쁜 것일수록 더 오래 더 많이 기억해낸다. 세 잎의 행복 속에 네 잎의 '행운' 이 숨겨져 있듯이 우리네 기억 또한 힘들고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잊으려 한다. 어쩌면 그런 우리의 기억의 편린을 조각 조각 이어준 '조각보'와 같은 저자의 소설들이 있어 참 다행이고 그런 역사의 날실이 있었기에 그녀의 개인사와 병합한 씨실과 함께 멋진 소설로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저자의 불행한 개인사만 놓여 있는 소설이었다면 참 밋밋하고 재미없었을 것이다. 분명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한국전쟁이라는 큰 획이 있어 그녀의 개인사와 씨줄과 날줄로 만나 그녀의 삶과 역사를 탈바꿈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할아버지 이후로 기대었던 오빠의 삶,'오빠도 살아 돌아온 게 아니라 그때 무참히 죽은 것이다. 지금 아랫목에 누워 있는 건 오빠의 허깨비일 뿐 진정한 그는 아니다.' 오빠의 삶이 그러하지 않았다면 어머니와 저자 또한 중심을 자신에게 놓을 수 있었을까. '세상만 자반 뒤집기를 안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응하고 먹고살게 돼있었다.'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더이상 미성년자가 아닌 이젠 한가정을 책임질 의무를 짊어진 일꾼으로 그리고 자신을 중심에 놓게 된 삶을 통해 고난의 시간 속에서 활짝 피어나는 백목련처럼 자신의 고난의 개인사를 솔직하게 끄집어내어 '백목련'처럼 활짝 피게 한다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을 터인데 멋진 작품으로 기록되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참 행운이라 여겨진다. 이 기회에 저자의 다른 작품들을 좀더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봐야 할 듯 하다. 소설속의 '어머니'도 저자의 삶도 좀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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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ooomom ㅣ 2012-06-04 ㅣ 공감(1) ㅣ 댓글 (0)
박완서의 소설들을 읽고 있다. 여기저기 정말 겪지 않고서는 이리 생생하고 절절하게 묘사할 수 없었으리라 그렇게 짐작되는 대목을 읽으면서 정말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상상력이라면 그야말로 인간 심리의 이중성에 대해 철저하게 고민해 왔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참, 살기가 힘들었으리라 그렇게 짐작이 된다.
<그 산이 정말 거기게 있었을까>는 정말 그 힘든 삶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그에게는 어찌보면 가족의 울타리가 참으로 든든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입학해서는 강하고, 현명한 어머니와 든든한 오빠가, 그리고 커서는 올케가 그리고 전쟁이 모두 끝난 뒤에는 남편이....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 때문에 벌어지는 고통이었지 인간 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아니었음을 성년의 나날들에서 확인해서 오히려 그 전의 다른 소설들에서 느꼈던 작가의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는 고통을, 인간의 이중성을, 참혹함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읽기만 해도 가슴 절절하고, 뒷목이 뜨끈거리는 그 내면들을 세세히 낱낱이 파헤쳤던 것이다.
다행이다. 안심이다. 무엇보다 제대로 보는 것, 맞닥뜨리는 것, 직면하는 것, 그래서 보이는 것 그 이면을 본질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망가천재 ㅣ 2012-03-03 ㅣ 공감(0) ㅣ 댓글 (0)
어린 날 한 때의 이야기 입니다.
아버님이 소천하시고 흘러 간 시간과 그 만큼의 고단한 삶에 매몰되어 갈 때 였습니다.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이웃의 한 남성과 다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투는 것이 아니라 거친 그 자에게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당하시고 계셨지요.
어린 피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혈기를 부린 것이지요.
그 자도 마음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저녁 나절 집 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더군요.
어머님 말씀대로 밖으로 나가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습니다. 저도 사실 죄를 지은 것 같아 무섭고 떨려 그 시간까지 멍한채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돌아 온 것은 보복의 폭력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었겠지요.
나는 참아야 했습니다.
순간, 세째 누님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 들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데 당신이 손을 대느냐~"
그 밤은 아무도 입을 연 사람 없이 지새워졌습니다.
위로 세 분의 누님들과 아래 여동생에게, 저는 그런 동생이요, 오빠였습니다.
그런 나의 눈을 뭉클하게 사로잡은 이 책중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데올로기 제까짓 게 뭔데 양심도 없지, 오빠같은 죽음이 양심의 짐이 안 되는 이데올로기 따위가 왜 있어야 하느냐 말이다."
그렇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이 책,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가족의 이야기이며, 한국 전쟁의 막막함과 핍절함을 살아내 온 선생님 젊은 날의 이야기 입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선생님은 특별히 예쁨받고 귀함받는 딸내미였습니다.
가부장의 전통 속에서 아들과는 다른 관심과 지원의 대상이었지만 사실, 아들만큼 관심받고 지원 받으시면서 자라왔던 것이지요.
마치 남의 일처럼 지천이었던, 그래서 관심 밖이었지만 떠나가지는 않았던 싱아의 존재가 새롭게 그리워 질 때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을 지내오신 것이지요.
그런 여린 삶에, 전쟁과 그로 인한 오빠의 부상, 일그러져가는 집안과 삶의 모습, 가늠할 수 없는 개인의 운명 등이 어깨를 누르게 됩니다.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하고, 살려야 하고, 살게해야 하고
삶 삶 삶....
미군 피엑스의 초코렛과 미르크(밀크)와 사탕과 쿠키 들이 조카들의 버즘을 없애고 피부를 윤기나게 하고 살을 나게 하는 것이 감사함이요 모든 무거움을 잊게 하는 것이 되도록 선생님과 가족은 시대를 열절히 살아 냅니다.
그런 날들이 선생님의 호흡이 되고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어 우리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로 나온 것이지요.
항상 선생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선생은 기억될 수 밖에 없도록 삶을 살아오신 것 같습니다. 쉬 지치지 않도록 삶과 주변과 사물의 의미를 정성스레 되새겨 오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삶 속의 자신을 다스리는 힘이요.
그것이 삶이 살아져 온 날들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근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선생님의 결혼 전, 젊은 날의 이야기 입니다.
그냥 읽으셔도 되지만 어린 날의 이야기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먼저 읽으시고 보시면 더욱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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